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요 13:21-30)
부활 주일 전 주간, 즉 종려주일을 맞으며 예수님이 수난 당하신 고난주간을 맞으면 우리는 성경에서 거기에 부합되는 두 인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하나는 예수님의 머리에 값진 향유를 부은 무명의 한 여인이요, 또 하나는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먹은 가룟 유다입니다. 이 시점은 경건한 신도들이 우리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명상하는 기간인데 왜 하필이면 기분 나쁜 가룟 유다 이야기를 이 시기에 설교하실까? 의아해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18세 때 처음으로 함흥 어느 극장에서 「왕 중 왕」이란 영화를 성경학원 학생들에 끼어 단체로 구경 갔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화면에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아 군인들에게 넘기기 위해 예수님께 입 맞추는 장면이 나오는데, 자리에서 어느 청년 교인이 벌떡 일어나서 손에 든 책을 화면에 내어 던지면서 "저 놈 잡아라"하고 고함을 치는 광경을 본 일이 있습니다. 실로 경건한 신도들에게는 기분 나쁜 인물이 가룟 유다입니다.
시인 단테는 지옥 맨 밑층에 친구 시저를 배반해 죽인 브루투스와 스승을 배반한 가룟 유다가 들어 있는 것으로 썼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이 기분 나쁜 인물을 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크게 부각시켜 생각해야 하는가? 그런데 우리가 아니라 성경 4복음 자체가 모두 이 기분 나쁜 인물, 반역자, 배반자를 바로 예수님 십자가 죽음 전면에 기록해 놓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도 귀한 글, 가치 있는 예수님의 언행과 제자들의 사실이 많았을 터인데 왜 이 불쾌한 기억인 이 사건을 꼭 빼지 않고 기록해 놓았을까?
그의 이름 '가룟 유다'(Judas Iscariot)에서 '가룟'이라는 호칭의 의미는 '거짓말쟁이', '염색하는 사람', 그리고 '시까리우스'(sicarius)라고 '단도를 품고 다니는 사람'이니, 그는 당시 애국 열혈혁명당원의 하나였음이 분명하고, 그 이름이 유다인 것을 보면 전통 있는 예루살렘 출신 귀족 계급에 유다 지파 정통자손인 것이 확실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12제자의 하나로 쓰임을 받았으니 진리를 탐구하는 자요, 제자 중에서 또한 재무를 맡았으니 신임도가 두터웠고, 여인이 바친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를 돕자 했으니 사회의식, 정의감도 두드러진 사람이었음이 뚜렷이 드러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아먹었다는 것입니다. 왜 팔아먹었느냐는 것은 나중 성경 기록을 살펴서 논하기로 하고, 여기서 먼저 가룟 유다라는 그 인물, 그 배반자에 대하여 기록한 4복음서 기록을 보면서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 4복음서에 기록된 가룟 유다 기사와 사도행전 1장의 기사를 읽어보면, 그가 예수를 배반하고 팔아먹고 배가 터져 죽은 원수인데도 한결같이 가룟 유다에 대하여 동정적으로 썼다는 점입니다. 요한복음 13장 2절에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했고, 27절에서는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예수를 잡아 죽게 되었다는 식으로 기록했습니다. 그 말은 사탄만 그 속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좋은 제자였을 터인데 하는 암시가 있습니다. 이 점은 4복음서가 꼭 같은 기분으로 표현했습니다.
또 사도행전 1장에서 죽은 가룟 유다 대신 그 자리에 맛디아를 택하여 열 두 사도의 자리를 채우는 기사가 있습니다. 지나간 일인데 그 의식을 행한 것은 단지 자리 하나를 메우려는 데 있지 않고, 기도하던 초대 사도들의 가룟 유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서 나온 행위였습니다. 즉 깊이 참회하고 기도하고 보니 가룟 유다는 바로 딴 사람이 아니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 바로 자기 자신들이란 자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를 팔아먹은 죄인 가룟 유다,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배반한 베드로의 죄는 오십보 백보 차이 뿐이라는 참회였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가룟 유다를 새삼스럽게 제거식을 하고 새 사람을 채운 것은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이 배반자의 근성을 가진 가룟 유다를 죽은 그림자까지라도 뽑아버리자는 철저한 참회의식이었습니다. '내 속에도 사탄이 들어왔다면', 그리고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기만 했다면 나도 가룟 유다였을 것이다', '아니 나 자신도 하루도 몇 번씩 예수를 팔아먹고 있지 않았는가' 하는 참회였다는 점입니다.
자, 그러면 오늘 우리들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우러러 보고 있는 우리들은, 나도 가룟 유다가 아닌가? 이 성경은 가룟 유다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비시켰습니다. 나는 예수 팔아먹은 사람이 아닌가? 나는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입술로만 믿고 행동은 예수를 배반한 사람은 아니었나? 나는 예수를 반역한 사람은 아니었나? 나는 예수님이 맡겨준 사명을 헌신짝처럼 던져버렸던 일은 없었는가? 그렇다면 나는 가룟 유다가 아닌가?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 다가 앉은 가룟 유다가 아닌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일심으로 기도하던 120명의 문도들이 기도에 깊이 들어가 보니 베드로도 야고보도 요한도 마리아도 수산나도 모두 아! 가룟 유다가 저놈이 아니라 바로 나였구나! 가슴을 치고 땅바닥을 치고 무릎을 쥐어뜯으면서 내 속에 있는 가룟 유다, 예수 팔아먹는 이 무서운 죄악을 죽음 놈의 그림자까지라도 뽑아버리지 않고서는 예수님과 마주 설 수 없다고 했던 그 통회와 그 자복과 그 참회와 그 눈물과 그 회개가 있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러면 가룟 유다는 왜 예수를 팔았는가를 살펴보겠는데, 이제부터는 가룟 유다가 다름 아닌 나 자신임을 감안하자는 것입니다. 왜 예수를 팔았는가?
첫째, 성서의 기록은 돈을 탐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돈 얼마에 예수님을 팔아먹다니 그럴 수가 있을까? 그런 정도의 수전노를 왜 예수님의 제자까지 삼았을까? 온 천하를 주고도 못 바꿀 예수님을 어찌 돈 얼마에 팔 수 있을까? 여러분은 상식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상식으로도 생각지 못할 일입니다. 그런데 복음서 기자들은 사실 그대로 썼습니다. 왜?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돈 때문에 그 놈의 썩어 빠진 돈 몇 푼 때문에 예수를 판 일이 없습니까? 돈 때문에 주일을 거르는 일, 예배를 등한시 한 일, 친구를 배반한 일, 형제간에 의리를 배반한 일, 돈 때문에 양심을 파는 일, 돈 때문에 의리도 법도 상식도 도덕도 팔아먹는 일, 실로 돈 때문에 죽이고 죽고 하는 세상이 아닙니까? 국내 정치도 국제 정치도 윤리도 도덕도 양심도 정의도 모두 돈줄에 매어 달려 제 곳으로 가지 못하는 금전만능의 이 세상이 아닙니까? 모두 금송아지 우상에게 절하느라고 야웨 하나님마저 잊어버린 것이 아닙니까? 아마 여기 앉으신 여러 교우들이 이 돈 문제 하나만이라도 초연할 수 있다면 예수님을 훨씬 더 잘 믿을 것으로 봅니다. 나는 정말 이 문제에서 깨끗하고 자유합니까?
나는 소박하게 좋은 목사 자격으로 우선 돈을 모르는 목사와, 어디 가서 권력과 자리를 탐하여 한 자리 하려고 덤비지 않는 목사라면 우선 합격선으로 봅니다. 카톨릭 교회가 12세기 힐데브란드 교황 그레고리 제 7세에 의하여 교직의 독신제도를 법령으로 확정했는데, 그 중요 원인 중 하나가 교직자가 수많은 가족, 친족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경제적으로 부패하기 때문에 그것을 막아보려는 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돈과 하나님을 함께 섬길 수 없다 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개인 소유를 인정하였으나 50주년 희년 제도를 만들어 50년에 한 번씩은 다시 되돌려주고 새로 꼭 같은 조건으로 시작하게 했던 것입니다. 초대 기독교의 경제윤리도 개인 소유의 절대권은 허용치 않았습니다. 돈 때문에 예수님을 팔아먹게 된 가룟 유다의 배반을 남의 일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각자 이 예수 파는 죄를 참회하고 주님 십자가 부활 앞에 나서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최근 가룟 유다 연구가 진행되면서 한결 같은 결론은 가룟 유다는 민족독립투쟁을 위해 조직된 당시 열혈 혁명단원의 한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운동이 유대민족의 독립운동의 하나, 즉 정치 투쟁운동의 하나로 보고 예수 운동에 가담했고 그 제자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의 제가 가운데는 열심당 시몬도 같은 종류의 사람이며 당시 예수님의 일행을 갈릴리 사람들이라고 지칭한 것으로 보아도, 소위 혁명운동 반골운동의 근거지인 갈릴리임을 감안할 때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이 가룟 유다는 어떤 예수님 전기 작가가 표현하는 대로, 결과적으로 예수님이 가룟 유다식의 정치혁명가가 아니기에, 즉 헤롯왕을 내어 몰고 로마 군대를 추방하고 독립전쟁을 하는 민족정치 투쟁가가 아니기에 자기의 주장과 견해에 배반되기에 급기야 예수를 판 것이며, 자기가 배반자가 아니라 예수를 배반자로 보아 팔아 넘긴 것, 또 예수 같은 나약한 무저항주의, 십자가에 죽으심, 사랑의 죽음은 오히려 민족 투쟁, 정치 투쟁, 혁명 운동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이러한 미온적인 지도자에게서 독립투쟁의 지도권을 빼앗으려고 예수를 팔았다는 가정입니다.
이 가정은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뜻이 무엇입니까? 기독교 이천 년 역사에서 예수와 예수의 참 진리와 참 교회와 참 주의 종들이 핍박을 받고 수난을 당하고 순교를 당한 것은 예수를 아주 모르는 사람들에게서가 아니라, 바로 예수를 따르면서도 예수가 자기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다고, 예수가 자기편이 되어주지 않는다고, 교회가 자기 정책을 지지해 주지 않는다고, 교회가 자기 정부의 앞잡이가 되어주지 않는다고 하는 그 가룟 유다 류의 제자들에게 당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지금도 그렇지 않습니까? 기독교는 역사상 가장 큰 핍박을 회교권과 공산권, 그리고 카톨릭이 신교를 이단으로 몰아 박해를 했는데, 그것들은 모두 같은 기독교에 근원을 가진 집단입니다. 우리는 예수가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내 뜻대로 되어주지 않을 때, 내 편이 되어주지 않을 때, 예수를 배반하여 팔아먹은 일은 없는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예수는 교육가에게는 교육가도 되고, 사상가에게는 사상가도 되고, 때로 정치가에게는 정치가도 됩니다. 그러나 예수는 정치가도 교육가도 사상가만도 아닌 만민의 구세주 예수,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죽으신 메시아 그리스도이십니다. 나 자신, 바로 내 주장 내 뜻대로 모든 것을, 아니 예수까지도 하나님까지도 내 편, 내 마음대로 조종하는 하인을 만들려고 하는 이 교만, 이 고집, 이 독선, 이 무지, 이 무서운 죄를 위해 속죄의 제물이 되어 죽어주시는 분이시냐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가룟 유다의 죄를 내 속에서 발견하고 참회하십시다.
마지막으로, 가룟 유다는 배반자의 표상입니다. 배반의 죄입니다. 나는 평창동에 가서 마당에 정원수를 심을 형편이 못되어 땅에서 돋아나는 풀이고, 싸리나무고, 무엇이나 그대로 두고 가꾸고 있습니다. 3년을 지나고 4년을 지나니 이제는 마당이 제법 정원으로 바꿔졌습니다. 나는 어느 날 아침 문득 자연은 사람에게 일 년 키우면 일 년만큼, 3년 키우면 3년만큼 영락없이 보답을 하는구나, 그런데 사람 아니 나는 어떠한가? 사람만이 배반하는 존재, 개도 잘 먹여주는 주인에게 꼬리를 흔드는데 인간은 10년을 키워 주어도 하루아침에 배반하는 존재이구나! 나는 마당에 펄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인간만이, 자식은 부모를 배반하고, 제자는 스승을 배반하고, 후배는 선배를 배반하고, 친구가 친구를 배반하고, 아버지도 배반하고 어머니도 배반하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존재라는 점입니다. 오늘 가룟 유다 아닌 자가 누구입니까? 나는 자식들에게 서운함을 당했을 때 옳거니 내가 내 부모에게 대답질하고 그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는데, 나는 제자들에게 서운함을 느꼈을 때 옳거니 내가 내 스승에게 고마운 인사 한 번 제대로 보답지 못했는데,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후배가 해를 넘게도 전화 한 통 연락을 주지 않아 서운한 생각이 들 때도 옳거니 내가 나를 아끼는 그 사랑하던 그 선배를 몇 해를 넘기면서도 한 번 모셔서 식사 한 번 따뜻하게 대접 못해드렸는데 하고 자책하니 서운함이 다 풀어져 버리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