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둘째 주 수요일인 14일 오전 10시.
길잡이 오덕만 회장께서 앞장 서고, 8명의 회원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한강문화유산해설사들의 정규답사인 오늘의 서울성곽 탐방은,
혜화문 → 낙산 → 흥인지문 → 광희문→ 장충체육관까지 약 5.5km, 3시간 정도 소요되는 서울성곽의 2코스입니다.
오회장께서 만들어 나눠준 18쪽이나 되는 <서울성곽 탐방 자료>는,
"푸른 산이 아늑하게 감싸 안고 있는 서울은 2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입니다."로 시작합니다.
"한양으로 수도[首都]를 옮긴 태조는 제일 먼저 왕이 사는 집인 경복궁과, 조상들께 제사를 지내는 종묘와 사직단을 지은 후 곧바로 한양을 방어할 성곽을 만들기로 하였습니다. 그것이 한양도성입니다. 도성은 왕이 살고 있는 도읍지 둘레를 빙 둘러 쌓은 성을 말합니다, 성벽으로 둘러 싸인 한양을 드나들려면 문이 있어야겠지요 ? 그래서 도성의 동서남북에 큰 문과 작은 문을 만들어 사람들이 다닐 수 있도록 하였지요."
흐린 날씨, 봄비가 올듯 말듯, 낮 기온은 7도라는 일기예보가 있었지만,
오히려 이런 날씨가 성곽 탐방에 알맞아서 북악[北嶽]의 좌청룡인 낙산, 산길을 걷는 데 한결 도움이 되었습니다.
처음 도착한 곳은 서울시장 관사.
대지는 500평이 채 안 되는 규모, 사적 제 10호인 서울성곽 위에 올라앉아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산이 잇달아 앞으로 흘러가는 능선 가운데 자리 잡아 산의 기[氣]를 계속 빠져나가게 한다."고 비난 받는 건물입니다.
관사 뒤 쪽은 허물어진 성벽을 새 돌로 잇대어 한 눈에 땜질한 흔적이 드러나고, 큰 구멍이 뚫린 곳도 있고, 잡초와 이끼가 성벽 틈을 헤집고 나와 관사 앞 쪽의 잘 다듬어진 정원과 대조하여 보는 사람의 눈쌀을 찌푸리게 합니다.
일제 때 지어진 70년 된 이 건물이 서울성곽 복원에 큰 걸림돌이 되어 대책을 서두르고 있다니 잘 지켜봐야 하겠습니다.
혜화문 문루 위에 올랐습니다.
처음 세워진 곳은 차들이 달리는 대로[大路] 한 가운데, 시대에 밀려 자리를 옮겨 앉았지만 여전히 늠름한 모습입니다.
태조 5년인 1937년에 한양의 사소문 중 동소문에 해당하며 그 때의 이름은 홍화문(弘化門),
1511년 중종 때 이름이 바뀌어져 혜화문,
일제 때 헐려졌다가, 1992년 서울성곽복원사업으로 다시 복원, 문 하나에 얽힌 역사의 고단함이 탐방객의 마음을 아리게 합니다.
<서울성곽 탐방 자료>는 이어집니다.
" [도성축조도감]의 중책을 맡은 정도전은 북악산(342m) → 낙산(125m) → 목멱산(남산 262m) → 인왕산(338m)을 하나로 잇는 전체 길이 18.2 Km의 성곽을 완성했습니다. 1396년 1월부터 시작하여 49일간 성곽을 쌓기 위해 전국 8도에서 20여만 명이 동원되었어요. 그들은 농사를 짓지 않는 농한기를 이용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쌓았습니다."
" 그 해 여름 장마비가 퍼붓자 여기저기 성이 무너지는 곳이 생겼지요. 그래서 다시 성을 보수하는 2차 공사를 하게 되었고, 도성을 드나드는 4대문과 그 중간 중간에 4소문도 만들었습니다. 문 이름에는 유교에서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할 인의예지신 [仁義禮智信] , 즉 어질고, 의롭고, 예의 바르고, 지혜롭고, 믿음직함이 들어 있습니다.
*4대문 :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 * 4소문 : 혜화문, 서소문, 광희문, 창의문
"혜화문 천정에는 봉황새 두 마리가 그려져 있는데, 이 곳에는 참새가 너무 많아 농작물에 큰 피해를 입히자 새들의 왕인 봉황을 그려 넣어 성 밖의 참새가 성 안으로 드러오지 못하게 했다."는 해설이 참 재미 있었습니다.
차들이 달리는 큰 길을 건너 낙산으로 올라갑니다.
산길은 나무계단으로 잘 이어져 걷기가 쉽습니다. 흐린 날씨라 자외선 걱정도 없고, 운동하는 사람들도 다 내려가 어깨 부딪치는 일도 없고, 남은 것은 우리들만의 호젓한 시간이니 절로 웃음이 번지고 이야기가 정답습니다.
'낙타산', '타락산'으로 불렸다는 낙산, 이름답게 산의 모양은 낙타의 등처럼 볼록 솟아 있고, 조선시대 궁궐에 우유를 공급하던 우유소가 있었기 때문에 타락산이 됩니다. 찹쌀가루에 우유를 넣고 푹 끓인 타락죽은 왕의 간식이었습니다.
한양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이 낙산은 높이가 고작 125m밖에 되지 않는 언덕 같은 산이어서,
우백호에 해당하는 338m 높이와 당당한 산세를 가진 인왕산과의 큰 격차가 문제였습니다.
풍수상으로 도성의 좌청룡이 허약하면 왕실의 장남이 이롭지 않아 조선 왕실에서는 낙산의 허약한 지세를 북돋우기 위해 '눈물 겨운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
우유소를 낙산에 세워 좌청룡에게 우유를 먹여 힘을 기르게 하였고,
낙산 아래의 '흥인문'에 아무 의미도 없는 ‘지(之)’ 자를 넣어 '흥인지문'으로 이름을 부풀려 동쪽의 지세를 보강하였고,
또 동대문 밖에 관우 대장군의 위패를 모시는 동묘를 세워 허약한 동쪽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서울의 몽마르뜨라 불리는 낙산.
혜화문 아래 동네는 유명한 대학로, 연극과 뮤지컬, 그림과 음악을 하는 수많은 아티스트와 공연장들.
한 정거장 지나면 악기상들이 밀집한 낙원상가와 , 외국인들의 관광명소 인사동 골목.
몽마르뜨라는 이름이 잘 어울리고, 더구나 남산, 인왕산, 북악산,북한산 등이 한 눈에 보이는 곳.
오른 쪽은 성벽, 왼 쪽은 집들의 지붕, 저만치 성신여대 건물이 보이고 가까이에 한성대 건물이 눈에 들어옵니다.
내가 3년 동안 다닌 K중학교가 어디쯤 있는지 마침 지나가던 사람 붙잡고 물어보고 나서야 벌써 지나쳐 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세월이 너무 많이 흐른 것 같고, 어느 새 나도 역사의 한 페이지로 물러나는 것 같아 많이 안타까웠습니다.
성벽을 끼고 올라가다가 한 눈에 보아도 돌의 크기와 쌓아 올린 모양이 확연히 다른 성벽 한 곳 앞에 멈춰 섰습니다.
" 1396년 태조 때 만든 한양도성은 1422년 세종 때 본격적으로 돌을 쌓아 성을 보수하였어요.
그리고 세월이 한참 지난 1704년, 숙종은 한양도성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도성의 방어시설을 점검하였습니다. "
그러니까 작은 돌로 쌍은 왼쪽 성벽은 태조 때, 중간 돌로 쌓은 오른쪽 성벽은 세종 때, 큰 돌로 쌓은 가운데 성벽은 숙종 때 쌓은 것, 알아 맞추기가 너무 쉬워 회원들 모두 신이 났습니다.^^^
"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화살이 아닌 총과 대포의 공격을 막으려면 숙종 때는 큰 돌로 쌓아야 했겠지요."
한 회원의 보충 설명에 공감이 가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암문도 지나고, 마을버스 종점도 지나고, 쌍용아파트 앞도 지나서 작은 초가집인 비우당(庇雨堂)에 도착했습니다.
근근이 비를 가리는 집이란 뜻의 비우당, 17C 인조 때 <지봉유설>을 펴낸 실학자 이수광이 살던 집입니다
세종 때 우의정을 지냈던 유관, 집 천장에서 비가 줄줄 새자 유관은 방에서 우산을 펴고 비를 피하며 한 말,
"우산이 없는 집은 비가 오면 어찌 견디겠소? "
청백리로 꼽히는 유관은 이수광의 외가쪽 5대조,
<우산각>으로 부르던 이 집을 <비우당>으로 고친 이수광도 청빈한 삶을 살았기에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에 올라온 선비들이 이 비우당을 찾아 유관과 이수광을 추모하며 본보기를 삼았고, 비우당 가는 길에 놓인 청계천 다리를 비우당교라고 부를만큼 청빈[淸貧]은 선비들의 아름다운 덕목, 우리들이 새겨야 할 삶의 철학이기도 합니다.
비우당 뒤에는 자주동샘이라 불리는 작은 샘이 있습니다.
사육신의 난으로 단종은 영월로 유배되고, 18세의 정순왕후는 궁 밖으로 쫓겨났는데, 동대문 밖 청룡사 부근에 정업원이라는 초가를 짓고 천에 염색을 해서 생계를 꾸려 나갔습니다. 바로 이 샘에서 빨래를 하면 신기하게 자주색으로 염색이 되어 이 샘의 이름은 자주동샘.
가까이에 있는 정업원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과부가 된 왕족 출신의 여인들이 모여 살던 곳,
이 곳에서 살던 정순왕후는 단종이 사약을 받고 죽자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단종의 명복을 빌며 평생을 보냈고,
훗날 영조가 이 슬픈 사연을 듣고 <정업원구기>라는 글씨를 써서 비석에 새겨 세웠습니다.
정업원 건너편에 보이는 동망봉이란 작은 산봉우리가 바로 정순왕후가 단종이 있는 동쪽 영월을 바라보며 그리워하던 곳이라서 그녀의 눈물과 한이 동망봉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다시 낙산의 언덕길을 오릅니다.
점심은 공원 관리소 옆 쉼터에서 간식으로 때웠습니다. 가래떡도 나왔고, 인절미도 말랑말랑했고, 군대 간 아들이 가져왔다는 진짜 건빵도 나왔고, 후식은 오렌지와 사탕, 이만하면 진수성찬입니다. ^^^
점심을 든든히 잘 먹었으니 ^^^, 우리들은 신발끈 단단히 묶고 하산길에 나섭니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내려오느라니 아주 오래된 2층집들이 붉은 지붕을 이고 길 옆으로 이어져 나오는 게 시선을 끕니다.
1층은온돌방, 2층 일본식 다다미방, 광복 후 지은 국민주택인데 인천에서 살 때 이런 집에 산 적이 있어 잠깐 희미한 옛 기억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가끔씩 산 길 따라 가파른 계단 길 좌우로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사람 사는 게 만만한 것이 아니구나, 산 동네 사는사람들의 고초가 새삼 느껴졌습니다.
암문을 거쳐 성벽 밖으로 나와 한참 걸으니 저 아래 성벽의 끝이 보이고 그 앞으로 사람과 차들이 다니는 큰 길이 보입니다. 성벽의 끝에 있는 돌들 위에는 성곽 복원에 참여했던 감독관이며, 대장이며, 석수들의 출신지역과 직급과 이름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고창의 낙원읍성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데, 여러 곳에 있던 이런 돌들을 여기에 한데 모아 한양성곽을 쌓은 사람들의 노고와 공적을 기리게 되니 참 뜻이 깊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동대문인 흥인지문[興仁之門], 보물 제1호.
왕세자를 동궁마마라고 부르는 것만 봐도 동쪽은 세자의 자리, 평지에 지어져 지세[地勢]가 약한 것이 큰 단점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임진왜란 때 왜적들이 이 문을 지나 도성 안으로 들어갔고, 일제 때는 전차가 이 문을 통해 드나들었고, 양쪽 성문을 잘라 차와 전차가 다니는 길을 만드는 수모를 당해야 했습니다.
치욕의 역사가 부끄러운지 다행히 보수공사로 가림막이 처져 있어 바라보는 우리들의 마음을 조금 진정시켰습니다.
사람들 속에 섞여 청계천 오간수교 바닥을 밟고 지나 다리 아래 새로 만든 5개 수문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법, 인왕산과 북악산의 계곡을 지난 물이 개천이 되어 지대가 낮은 이 곳 동쪽으로 흘러 내려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 생활 하수까지 합쳐 청계천은 이름과 달리 탁류로 변해 흐르던 곳입니다.
내가 소년이었을 때 학교와 가까운 청계천에 어쩌다 놀러 오게 되면 청계천 위에 태국의 수상가옥처럼 긴 말뚝을 박고 성냥곽같은 판자집을 짓고 그 좁은 골목길을 오가던 피난민 차림의 어른과 아이들, 빨랫줄에 매달린 각양각색의 빨래들이 바람에 흔들리던 광경이 그들의 간난신고의 삶을 드러내는 영화의 한 장면이 되어 아스라이 떠오릅니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 한 켠 아래로 내려가 이간수문 앞에 섰습니다.
동대문운동장을 팔 때 지하 3.7m 아래 쪽에서 원래의 모습 그대로 발굴된 이간수문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얼마나 세찬지 두개의 수문 앞에는 큰 물가름돌 바위 두 개가 수문장처럼 서 있는 게 인상적입니다. 큰 홍수가 나도 역기역자 형태로 물살을 한 번 막은 뒤 , 쇠막대기로 문을 만들어 나뭇가지가 더 이상 못 나가게 막고 사람들이 물살에 휩쓸리지 않게 보호막을 만든 이간수문의 역할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동대문 쪽의 서울 성곽.
다행히 광희문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 성곽 순례의 안내자가 되어 우리들을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습니다.
오간수문 이간수문 옆에 있어 수구문(水口門), 도성의 장례 행렬이 통과하던 문이어서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불린 광희문은 한양성곽 동남쪽에 있던 사소문의 하나로 광명(光明)의 문이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시신이 담긴 상여가 나갈 수 있는 문이라서 이 광희문의 돌을 갈아 만든 돌가루가 만병통치약으로 통했습니다.
물론 '아무리 지독한 병마라도 수많은 원귀에 단련된 수구문에는 꼼짝도 못 할 것'이라는 상상력이 만든 미신이겠지만,
가난하고 힘 없는 백성들이 기댈 수 있는 약 처방이라서, 붉게 칠 한 성문과 더불어 죽음을 거부하던 간절한 염원이 서려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뭉쿨했습니다.
미로처럼 가로 세로로 얽힌 골목 길,
그러나 길잡이 오덕만 선생님의 안내는 거침 없습니다. 한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니 서울시장 관사처럼 성벽을 축대 삼아 지은 집이 가로 막듯 서 있습니다. 집들에 가려 사라졌다 나타난 성곽 한 모퉁이가 유괴 당했다가 부모 품에 돌아온 아이마냥 반갑기 그지 없습니다. ^^^ 우리들 모두 찰칵찰칵 카메라 셔터를 눌렀습니다.
장충체육관 앞 쪽의 집들은 모두 저택이라고 불러야 할 만큼 커 보이는데, 높은 담벽 하며, 대문 앞에 심어진 향나무만 해도 값을 가늠할 수 없어 가난한 우리들은 역사의 흔적을 찾아가는 열정으로 쓰린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습니다.^^^
드디어 오늘의 종착역인 장충체육관 앞에 왔습니다.
혜화문을 떠나 여기까지 3시간 40분이 걸렸습니다. 석양은 아직 멀었지만 지친 나그네들,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이고
고기 한 점 안주로 삼을 자격 충분합니다. 그리고 여기는 대한민국이 공인하는 족발 동네.
저마다 원조집이라고 우기는 집만 10 곳이 넘는데, 진짜 원조집은 사람이 가장 많이 북적이는 집,
<원조 제1호집>에서 '서울성곽'의 영원함을, [위례역사문화연구회]의 무한발전을, [한강문화유산해설사회]의 활약을 다짐하느라 막걸리 몇 병 순식간에 비웠습니다. ^^^ ****
* 탐방 나그네 : 오덕만, 권해룡 , 박희영, 김송미, 김은미, 윤기옥,조순희, 황옥구,이운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