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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2 맥아더장군의 믿음이 역사를 바꾸다

작성자가이드|작성시간26.06.14|조회수36 목록 댓글 0

맥아더장군의 믿음이 역사를 바꾸다14:15-1623:1-63:5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지금은 우리나라가 경제강국이요 문화강국이요 전세계인들이 오고싶어 하는 나라였지만 76년전 6.25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만하여도 세계는 이념으로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대결하였던 그 현장이 우리나라였습니다. 19451016, 이승만은 맥아더 사령부의 전용기를 타고 김포에 내렸다. 33년 만의 귀국이었다. 그를 맞이한 것은 열광하는 군중이었지만, 정치 지형은 복잡했다. 그 와중에 이승만정부가 건국한지 2년도 안되어서 발발한 6.25남북전쟁은 우리 자체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했지만 무너져가는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국내외의 수많은 선혈들의 피가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다는 것입니다. 6.25한국전쟁을 기억할 때 마다 전쟁발발 5년전에 유엔이라는 기구를 창설한 것이 마치 우리나라를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나게 합니다. 국제연합기구인 유엔이 회원국 51개국 중에서 참전한 나라가 16개국이며 의료품 지원한 나라가 6개국이니 유엔은 대한민국을 위해 하나님이 준비한 여호와이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유엔기구만 준비한 것이 아니라 그 전쟁을 지도할 명장들도 준비시켜 놓았습니다. 극동 유엔군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이며 주한미군의 사령관인 워커장군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지도에서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 우리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맥아더 장군의 신앙심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인천 상륙작전하면 떠오르는 말이 있습니다. 성공확률이 1/5000이라는 것입니다. 조수간만의 차는 9m, 썰물이 되면 바다는 뻘밭으로 변하고 상륙정이 뻘에 빠지면 병사들은 그대로 전멸합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단 한 사람, 끝까지 물러서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작전도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리고 그날 바다가 길을 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전략이라고 불렀지만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믿음이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이것은 영화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1/5000의 확률을 뒤집은 한 장군의 믿음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19423월 필리핀 코레히도르 섬, 밤하늘에는 별 한점 보이지 않았지만 짙은 어둠 속에서 포탄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렸습니다. 섬의 절반은 불길에 휩싸였고 살아남은 병사들의 얼굴엔 흙먼지와 핏자국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지하벙커로 들어서면 공기부터 달랐습니다. 흙과 먼지가 뒤섞인 천장에선 진동이 울릴 때마다 먼지가 우수수 떨어졌고 그 안에는 미국 극동 육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파이프 담배를 놓지 않고 자신감이 넘쳤던 그가 그날 밤만큼은 벙커 구석에서 지도 한 장을 내려다보는 것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일본군은 이미 필리핀 전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코레히도르 섬 하나만이 버티고 있었지만 그 마저도 시간문제였습니다. 그때 참모가 조심스럽게 다가갔습니다. 장군님 워싱턴에서 긴급 전문이 왔습니다. 맥아더장군은 전문을 받아들였습니다. 전문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친서였어요. 오스트레일리아로 탈출하라. 반드시 살아남아 반격을 준비하라. 맥아더는 전문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으며 아무 말도 안했습니다. 그렇게 한참동안 침묵이 벙커 안의 모든 이들을 짓눌렀습니다. 여러분 이 상황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7만명이 넘는 병사들이 섬에 남아 싸우고 있는데 사령관 혼자 빠져나가라는 명령이 내려진 겁니다. 맥아더 입장에선 이게 얼마나 참기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그는 그날밤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부하들의 얼굴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그들을 두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하지만 명령은 명령이었습니다. 311일 자정이 지나 맥아더는 어뢰정에 몸을 실었는데 아내 진, 어린 아들 아서, 그리고 핵심 참모 몇 명뿐이었습니다. 사방이 적의 해역이었으므로 일본 구축함이 어디서 나타날지 몰랐습니다. 어뢰정은 소리없이 섬을 빠져나갔습니다. 파도는 높았고 배는 심하게 요동쳤습니다. 이틀이 지나서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에 도착했을 때 환영나온 사람들 앞에서 맥아더는 나지막하지만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짧은 한 문장이었지만 그 말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어요. 문제는 본국에서 그 선언이 곱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부하들을 버려두고 혼자 살아 도망친 장군, 신문들이 그를 향해 일제히 날을 세웠습니다. 병사들 사이에서는 비아냥거리는 노래가 퍼졌습니다. 덕아웃더그, 맥아더가 포탄을 피해 지하벙커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는 겁쟁이라는 조롱은 영웅으로 불리던 사람을 한 순간에 도망자라는 낙인을 찍었습니다. 맥아더는 신문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읽으면서 그 말들을 다 들었지만 아무것도 해명하지 않았어요. 해명할 처지가 아니라는 걸 그 자신이 잘 았았거든요. 멜버른의 관저에서 보낸 첫날 밤, 맥아더는 혼자 집무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창밖으로 오스트레일리아의 밤하늘이 필리핀의 그 시커먼 하늘과는 다른 맑은 별이 가득한 하늘이었습니다. 그는 아내가 챙겨준 성경을 꺼냈습니다. 어머니 메리 핑크니 맥아더가 남겨준 것이었어요. 표지가 낡아 글씨가 희미했지만, 어머니의 손 때가 고스란히 벤 성경이었습니다. 맥아더의 어머니는 독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아들이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하던 날 근처 호텔에서 아들의 방 불빛을 보며 밤새 기도했습니다. 아들의 성공보다 아들의 영혼을 더 걱정했던 어머니였습니다. 맥아더는 그 성경을 품에 안고 어머니가 자주 읽어주시던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시편 23편 이었어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구절이 그날 밤 유독 마음에 걸렸습니다. 부족함이 없다는데 지금 내 처지가 부족함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가? 군사도 명예도 신뢰도 아무것도 없는 다 무너진 상태였어요. 그는 성경을 덮고 두 손을 모았습니다. “주님, 저는 지금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 힘으로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돌아가야 합니다.” “그 길을 열어 주십시오.” 기도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짧은 속삭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맥아더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보낸 첫날 밤의 전부였습니다. 기도 소리가 멈추었고 긴 침묵만이 남았습니다. 그 침묵속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194410월 필리핀 레이테 섬 해안에 상륙정이 닿는 순간 맥아더는 갑판에서 내려서 한발 한발 해변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코레히도르를 떠난 날부터 이 해변에 발을 디디기까지 27개월이 걸렸습니다. “내가 다시 돌아왔다.” 마이크 앞에서 그 말을 내뱉는 순간 목이 메어오는 걸 그는 느꼈습니다. 카메라앞에서 눈물을 삼켰지만 그는 그것이 하나님이 열어준 길이라고 맥아더는 믿고 있었습니다. 멜버른의 그날 밤, 짧은 기도가 응답된 것이라고 말이죠. 이후 일본이 항복하고 전쟁이 끝났습니다. 맥아더는 일본 점령군 최고사령관이 되어 도쿄에 자리를 잡았을 때 그의 나이 66세였습니다. 세상은 그를 다시 영웅으로 불렀습니다. 태평양을 되찾고 일본을 무릎꿇린 사람, 전설이는 말이 그의 이름 앞에 붙었어요. 그렇게 평온한 시간이 어어지는 듯 했지만 하나님의 시간표는 사람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1950625일 도쿄의 새벽은 조용했습니다. 맥아더는 집무실에서 야간보고서를 검토하고 있었을 때 전화 한통이 걸려왔습니다. 수화기 너머 이승만대통령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습니다. “장군님, 북한군이 38선을 넘었습니다.” 맥아더는 수화기를 내려놓지 않은 채 지도를 펼쳤습니다. 손가락이 한반도 지도를 훑어 내려갔어요. 그리고 잠시 멈췄습니다. 그리고 그 밤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습니다. 북한군은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습니다. 대한민국 국군은 훈련도 장비도 경험도 턱없이 부족한 가운데 사흘만에 서울이 함락되었습니다. 보름도 안되어 수원이 무너졌고 한달도 채 안돼 전선은 낙동강까지 밀렸어요. 맥아더는 직접 수원 전선을 시찰하러 날아갔습니다. 소총 사거리 안이라 위험하다는 참모들의 만류도 듣지 않고서 경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전선의 모습은 그의 가슴을 얼어붙게 만들었습니다. 도로위에는 피난민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맨발로 걷는 노인, 아이를 업고 비틀거리는 어머니,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도망치는 군인들, 그 위로 북한군의 포탄이 쏟아지고 있었어요. 여러분 그 장면이 어떠했겠습니까? 전장을 수십년 누빈 노장이 비행기 창밖을 내다보며 주먹을 쥐었을 때 눈가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고 했어요. 낙동강전선이 대한민국의 마지막 방어선이었습니다. 이 선이 뚫리면 나라가 지도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유엔군은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북한군의 공세는 낮에는 폭격, 밤에는 기습으로 하루도 쉬지 않았거든요. 병사들은 잠을 자지 못했고 탄약은 늘 부족했습니다. 맥아더는 하루에도 수십통의 보고서를 받았습니다. 전사자, 부상자, 탄약소비량, 후퇴거리, 숫자 하나하나가 사람의 목숨이었지만, 그는 그 숫자들을 보면서 지금 이 상황을 뒤집을 방법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정면 돌파가 아니라, 측면 상륙이었습니다. 바로 인천상륙 작전이었어요. 하지만 문제는 워싱턴이었습니다. 합참의장 오마르 브래들리 장군이 먼저 전문을 보내 왔습니다. “인천은 안됩니다. 작전을 재검토하십시오.” 해군 참모총창 포레스트 셔먼도 같은 말을 했어요. 전문가들의 분석이 뒤따랐습니다. 인천 앞바다의 조수 간만의 차가 9m에 달한다는 것, 상륙 가능한 시간이 하루 2시간뿐이라는 것, 기뢰에 하나만 걸려도 함대 전체가 갇힌다는 것, 성공 확률은 5000분의 1. 워싱턴은 도쿄로 특사를 보냈습니다. 콜린스 육군참모총장과 셔먼 해군 참모총장이 직접 맥아더를 설득하러 왔습니다. 회의실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이 차례로 말을 꺼냈습니다. “장군, 이건 너무 위험합니다. 7만명의 목숨이 걸린 문제입니다.” 조수간만의 차도 크고 상륙 시간이 2시간 밖에 안되니 성공할 확률이 너무 희박합니다.“ 맥아더는 파이프 담배에 천천히 불을 붙였고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간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천입니다. 적도 우리가 거기로 오리라곤 생각 못합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두 사람을 마주했습니다. ”역사는 항상 위험한 결단 위에 세워졌습니다.“ ”내가 틀렸다면 내가 모든 책임을 집니다.“ 회의실에 침묵이 내려앉았습니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특사들이 돌아간 뒤 맥아더는 집무실에 혼자 남았습니다. 책상 위에는 인천 앞바다의 해도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서랍에서 낡은 어머니의 성경을 꺼냈습니다. 아무 페이지나 펼쳤는데 잠언 35절이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그 구절위에 손가락을 올려놓았고 눈을 감았어요.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그는 지금껏 자신의 판단을 믿어 왔습니다. 아버지 아서 맥아더의 아들로, 웨스트포인트 수석 졸업생으로, 언제나 가장 빠르고 정확한 결단을 내리는 사람으로 살아왔는데 그 구절이 가슴에 들어박혔습니다. 내 명철, 내 계산, 5000분의 1이라는 그 숫자를 뒤집을 수 있는 건 과연 내 머리인가, 그는 두 손을 모았습니다. ”주님, 저는 제 계산으로 이 문을 두드리고 있으나 이 문을 여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뿐이십니다.“ ”이 민족을 살려 주십시오, 아멘.“ 짧은 기도였으나 그 기도는 오래전 멜버론의 밤과 달랐습니다. 그 때는 자신을 위한 기도였지만 지금은 낙동강 너머의 얼굴 모르는 백성들을 위한 기도였어요. 기도를 마치고 맥아더는 성경을 덮었고 해도 앞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는 915일로 작전 개시일을 정했지만 그 날이 다가오기 전에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가 생겼습니다. 바다가 닫히려 하고 있었거든요. 1950910일 도쿄 사령부, D-Day까지 닷새가 남았습니다. 작전 준비는 거의 완료 단계였어요. 수백척의 함선이 이미 이동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고, 7만여명의 병사들이 대기중이었는데 그날 아침 기상 장교가 집무실 문을 두드렸습니다. ”맥아더 장군님, 보고 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기상 장교기 펼쳐 보인 지도 위에는 소용돌이 모양의 붉은 선이 굵게 그어져 있었습니다. 일본 남쪽 해상에서 발생한 태풍이었어요. ”예상 경로가 대한 해협을 정면으로 통과합니다.“ 913일에서 15. 이구역과 정확히 겹칩니다. 파고가 최대 6m에 달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파고 6m는 상륙정 운용이 불가능한 수순으로 상륙정이 뒤집힌다면 7만명이 바다에 수장될 수 있다는 뜻이었어요. 맥아더는 지도를 내려다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참모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장군님 작전 일정을 재검토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맥아더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습니다. 창밖을 바라보니 도쿄의 하늘은 그날따라 유난히 맑았습니다. ”10월이면 낙동강은 없다.“ 그 한마디에 회의실이 조용해졌습니다. 모두가 알고 있었거든요. 낙동강 방어선이 한 달을 더 버틸 수 없다는 것을, 맥아더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작전개시는 915일 변경은 없다.“ 아무도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했어요.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빠져나간 집무실에 맥아더 혼자 남았습니다. 태풍 캐지아, 그것은 단순한 기상 변수가 아니라 작전 전체를 삼켜버릴 수 있는 재앙이었어요. 맥아더는 창가로 걸어가 유리창에 이마를 댔어요. ‘내가 틀린 것인가?’ 맥아더 장군은 혼자 되뇌이었습니다. 워싱턴이 반대하던 이유가 주마등처럼 지나갔고 5천분의 1이라는 숫자가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 그를 가장 무겁게 짓누르는 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자신을 믿고 배에 오를 7만명의 얼굴이었거든요. 그들은 명령에 따라 움직이며 장군이 길을 열어줄 거라 믿는데 그 길위에 태풍이 가로막고 있던 것입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그때 였습니다. 서랍안에서 어머니의 성경을 꺼내 펼친 곳은 출애굽기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앞에서 막혀 있던 바로 그 장면이었어요. 뒤에는 이집트 군대, 앞에는 바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느 쪽도 뚫을 수 없는 상황, 그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라(14:15). 맥아더는 그 구절위에서 눈을 멈추고 한번, 두 번, 세 번, 같은 문장을 반복해서 읽었어요. ”앞으로 나아가라, 바다가 열리기 전에 먼저 발을 내디리라그가 지금 서 있는 자리가 딱 그 자리였습니다. 태풍이 사라지길 기다리다가는 한 달이 지나면 낙동강이 무너집니다. 그러나 지금 태풍과 정면으로 맞서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건가.’ 그는 그 자리에서 무릎 꿇었어요. 집무실에서 무릎 꿇는 것은 처음이었어요. ”주님, 저는 앞으로 나아가려 하는데 바다가 닫혀 있습니다. 모세 앞에 홍해를 여셨던 주님, 이 바다를 열어 주십시오. 이 민족을 살리고 싶습니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 주십시오, 아멘.“ 기도를 마치고 일어섰습니다. 그 시각 같은 시간 부산에서도 기도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피난민으로 가득 찬 부산, 초량 언덕 위의 낡은 교회에 밤10시 교회안에는 목사들, 장로들, 그리고 피난민들 250여명이 모여 있었습니다. 마루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집도 논밭도 가족도 두고 도망친 피난민들이 얼마나 처절했겠습니까? 살아있는게 다행인지 서러운지조차 모를 상황이었습니다. 그중에서 나이 지긋한 최목사가 강단에 올라서서 성도들을 바라보고 두 손을 들어올리고 난 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기도뿐입니다. 기도합시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교회안이 울음 바다가 되었습니다. 터져 나오는 기도소리가 뒤섞여 어떤 말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였습니다. 누군가는 소리높여 부르짖었고 누군가는 이마를 마루바닥에 댄채 어깨를 들썩였습니다. 최목사도 두 손을 모은채 하나님 아버지 우리 민족이 지금 벼랑 끝에 서 있습니다. 바다 건너 도움이 오고 있다고 하는데 그 길을 막는 풍랑을 잠잠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드릴 것은 이 눈물밖에 없습니다. 우리 기도를 받아 주옵소서, 아멘. 기도소리는 밤새 멈추지 않았습니다. 도쿄의 집무실에서 무릎 굻은 장군의 기도와 부산 언덕 위 낡은 교회에서 쏟아진 백성의 눈물이 그날 밤 하늘로 함께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침이 와도 태풍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케지아는 여전히 서해를 향해 북상하고 있었어요. D-Day까지 사흘, 태풍의 속도는 빨라지고 있었습니다. 맥아더는 해도를 펼쳐놓고 태풍의 경로를 짚으면서 인천 앞바다 그 좁은 수로, 태풍과 함대가 같은 자리에서 만나게 되는 날짜가 바로 915일 이었어요. 그는 기상장교를 다시 불렀어요. “경로가 바뀔 가능성은 없는가?” 기상 장교는 잠시 머뭇거라더니 현재 예측으로는 경로 변경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맥아더는 그 단어를 마음속에 새겼습니다. 기상장교가 나간 뒤, 맥아더는 성경을 다시 펼치면서 아까 읽었던 그 구절 앞으로 나아가게 하라. 그는 그 구절아래 연필로 줄을 그었고 성경을 덮었어요. 작전은 예정대로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밤 맥아더는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가장 무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기도는 올렸고 말씀도 붙잡았고 결단도 내렸지만 태풍은 방향을 틀지 않았다는 그것이 믿음의 시험이라는 걸 맥아더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슴이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어요. 내일 아침 기상보고가 두려웠다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었습니다. 기도도, 생각도 멈춘 채, 자정이 지나서여 그는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D-Day까지 이틀이 남았습니다. 1950914, D-Day 전날 밤, 도쿄 기상대에서 급보가 들어온 건 저녁 8시였습니다. 기상 장교가 보고서를 손에 쥔 채 집무실로 뛰어 들어왔어요. “장군님, 케지아가 방향을 틀었습니다.” 맥아더가 고개를 들었습니다. “오후 2시를 기점으로 태풍이 급격히 동쪽으로 선회했습니다. 현제 일본 동북부 방향으로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맥아더는 받아 들였던 보고서 위에 태풍경로가 굵은 선으로 표시되어 있었어요. 서해를 향해 북상하던 붉은 선이 오른쪽으로 뚝 꺽여 있었습니다. 기상학적으로 극히 이례적인 급선회였습니다. 그 방향으로 꺽일 이유가 없었거든요. 어떤 데이터도 어떤 예측 모델도 그 경로를 예상하지 못했어요. 내일 인천 앞바다는 파고 1m이하로 맑겠다고 예측됩니다. 맥아더는 보고서를 천천히 내려놓았고 아무 말도 안했어요. 그런데 기상 장교의 눈에 장군의 입술이 움직이는게 보였습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기도처럼 보였다고 그는 훗날 회고했습니다. 참모들이 하나 둘 집무실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소식이 빠르게 퍼진 것이었어요. 맥아더는 자리에서 일어나 해도 앞에서 손가락으로 인천 앞바다를 짚었어요. ”내일 새벽 우리는 계획대로 인천에 상륙한다.“ 그 말이 끝난 후 사령부 전체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1950915일 기함 마운트 매킨리 호의 갑판에 맥아더가 섰습니다. 검은 바다 위로 바람이 불었지만 믿기 어려울 만큼 잔잔했어요. 수평선 너머 어둠 속에서 인천의 불빛이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그 너머에 월미도가 있었고, 그 너머에 서울이 있었습니다. 새벽 6시 함포 사격이 시작됐습니다. 하늘이 불길로 물들었어요. 포격 소리가 바다를 흔들었지만 상륙정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참전용사들은 그 아침을 마치 호수 위를 미끄러지는 것 같았다고 기억합니다. 그 좁은 수로를 수백척의 함선이 아무 탈 없이 통과했다고, 오전 633분 월미도 상륙 성공, 오후 5시 인천상륙 성공, 5천분의 1 확률이 뒤집히는 데 걸린 시간은 단 하루였습니다. 맥아더는 갑판에서 쌍안경을 내리고 한참을 서 있었어요. 그의 눈이 촉촉해졌습니다. 맥아더는 난간을 잡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소리는 내지 않고 그저 눈을 감고 바다를 향해 서 있었어요. 그 모습을 본 부관은 훗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군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무릎은 꿇지 않았지만 그건 분명 기도였습니다. 작전 개시 13일 후 928일 서울 수복, 중앙청 건물에 태극기가 올라 가는 날, 맥아더는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수복 기념식이 시작되었어요. 연단에 오른 맥아더는 짧게 말했어요. ”하나님의 은혜로 서울이 돌아왔습니다. 이 도시를 대한민국 국민들께 돌려드립니다.“ 그 말을 마치고 그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기념식이 끝나고 맥아더는 한쪽에 혼자 서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갈 길이 아직 멀었어요. 하지만 그 하루만큼은 그는 그저 감사했습니다. 서울을 수복한 영웅, 전세계가 그를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러나 맥아더 본인은 달랐습니다. 도쿄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는 수첩을 꺼내 짧은 문장을 적었습니다. 인천은 내 작전이 아니었다. 나는 도구였을 뿐이다. 수첩을 덮고 눈을 감았습니다. 그 수첩 속의 문장은 오래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훗날 맥아더가 세상을 떠난 뒤 유품속에서 발견된 것이었어요. 같은 시간 낙동강 너머에서 기도하던 사람들은 라디오 앞에 모여 소식을 들었습니다. 서울이 수복되었다는 뉴스가 흘러나오자 초량 교회 안에서 울음소리가 터졌어요. 최 목사는 두 손을 들어올린 채 말이 나오지 않았거든요. 그저 눈물이 흘렀습니다. 옆에 있던 성도가 물었습니다. 목사님 기도가 응답된 건가요? 최목사는 한참만에 입을 열었습니다.”하나님이 바다를 여셨습니다.“ 그 말 한마디 였습니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어요. 창 밖으로 부산의 가을 하늘이 높고 맑았습니다. 195111월 이른 아침 맥아더는 집무실에서 성경을 펴 읽는 것이 매일 아침의 습관이었습니다. 그 때 부관이 문을 두르렸습니다. ”장군님, 워싱턴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부관의 표정이 좋지 않았어요. 트루먼 대통령의 명령이었습니다. 맥아더를 유엔군 사령관직에서 전격 해임한다는 내용이었어요. 맥아더는 그 내용을 한 번 읽고 다시한번 읽고 조용히 내려놓았습니다. 아내 진이 방으로 들어왔어요. 남편의 표정을 보고 무슨 일인지 직감했습니다. ”집으로 가게 됐어.“ 그게 전부였습니다. 설명도, 흥분도 없었어요. 진이 남편 곁에 와서 손을 잡고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14년 만에 귀국하던 날, 뉴욕거리에는 수백만 명의 시민이 나왔습니다. 종이 꽃가루가 하늘을 가득 채웠고 맥아더의 이름을 부르는 함성이 빌딩 사이로 울려 펴졌어요.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귀국 퍼레이드 였지만 그 환호속에서 맥아더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그는 차장 밖의 인파를 바라보면서 필리핀 정글에서 죽어간 병사들과 낙동강 방어선에서 무너진 스물 몇 살 청년들을 생각했어요. 환호성이 클수록 그 무게가 더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그해 4월 그는 의회에서 그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노병은 죽지 않습니다. 다만 사라져 갈 뿐입니다.“ 연설이 끝나고 의원들이 기립박수를 쳤습니다. 맥아더는 단상에서 천천히 내려왔습니다. 누군가 손을 내밀면서 악수를 나눴습니다.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졌어요. 그러나 그날 밤 호텔방에서 아내 진은 옆방에서 잠들어 있었고요. 맥아더는 불을 끄지 않은 채 침대가에 앉아있었습니다. 손에는 어머니의 성경이 들려있었어요. 그는 오래 전 멜버른의 밤에 읽었던 시편 23편으로 다시 돌아갔어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멜버른에서 처음 이 구절을 읽었을 때는 부족함이 없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진 자리에서 어떻게 부족함이 없다고 할 수 있냐고 속으로 반문했는데 지금은 달랐습니다. 필리핀에서 오스트레일리아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필리핀으로 그리고 한국에서 다시 미국으로 그 긴여정을 돌아보니 단 한번도 혼자였던 적이 없었습니다. 바다가 닫혔을 때 하나님께서 먼저 길을 닦아 놓으셨더라고요. 맥아더는 성경을 가슴에 품고 주님, 감사합니다. 저는 이제야 압니다. 인천이 제 작전이 아니었다는 것을 당신이 바다를 여셨습니다.“ 그 고백이 그의 가슴속에서 오래 맴돌았습니다. 이 후 맥아더는 공직을 완전히 떠났습니다. 뉴욕의 한 호텔에 머물며 찾아오는 사람을 맞이하고 회고록을 썼으며 매일 아침 성경을 읽었습니다. 한국 전쟁에 대한 강연 요청이 들어올 때마다 그는 한 가지를 빠짐없이 말했습니다. ”인천상륙 작전은 인간의 계산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저는 도구였을 뿐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 마다 사람들은 의아했습니다. 오성장군이 태평양 전쟁의 영웅이 자신의 작전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처럼 들렸거든요. 하지만 맥아더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것이 진실이었으니까요. 19644584살 더글러스 맥아더는 월터 리드 육군병원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마지막 며칠을 함께 한 아내 진은 이렇게 전했습니다. 남편은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했다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바다를 열어주셨습니다.“ 그것이 맥아더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고백이었습니다. 전쟁을 이긴 것도, 서울을 되찾은 것도 바다를 열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그 한마디로 영웅의 삶이 그렇게 마루리됐습니다. 인천앞바다의 거센 조류와 5천분의 1이라는 확률 앞에서 모두가 고개를 저었지만 한 사람은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준비하면서 계속 이런 질문이 들었습니다. 나라면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 비웃음과 반대를 견디며 끝까지 믿음을 붙들 수 있었을까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저는 숫자를 보고 환경을 보면 계산하게 되고 상황을 보면 두려워집니다. 그런데 오늘 맥아더장군의 이야기를 통해 분명히 깨닫게 된 것은 기적은 담대한 사람의 용기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에서 시작되었다는 것 인천상륙작전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물대에 정확한 길을 여셨습니다. 혹시 지금 여러분 앞에도 5천분의 1처럼 보이는 문제가 놓여 있지는 않으신가요? 사업의 위기. 건강의 위기, 가정의 어려움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을 불가능하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인천의 바다를 여셨던 그 하나님은 지금도 동일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은 길을 여십니다. 오늘 이야기가 여러분의 마음에 작은 담대함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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