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첨부하신 원문을 기준으로, **“‘여호와’의 칭호는 ‘삼위일체 계시 안에서 충만히 해석되어야 할 언약적 이름’”**이라는 중점 수정 사항을 반영한 제7장 재개정안입니다. 원문은 제Ⅲ부 제7장의 기독교 노년생활 특성을 “실체성·은사성·공인성·증언성”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제Ⅲ부 기독교 노년생활의 실제
제7장 기독교 노년생활의 특성
실체성·은사성·공인성·증언성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장 17절
1. 문제 제기: 기독교 노년생활은 무엇이 다른가
노년생활은 모든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보편적 생애 과정이다. 그러나 기독교 노년생활은 일반 노년생활과 동일하지 않다. 일반 노년생활이 신체적 노화, 심리적 적응, 사회적 역할 변화, 경제적 안정, 여가와 복지의 문제를 중심으로 이해된다면, 기독교 노년생활은 이 모든 현실을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 안에서 해석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노년생활은 단순히 오래 사는 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깊이 배우고 경외하며 찬송하는 생활이다. 여기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막연한 신 의식이나 일반 종교적 경건을 뜻하지 않는다. 기독교 노년생활은 하나님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알고, 그 하나님께서 언약 안에서 자기 백성을 창조하시고, 구속하시며, 견인하시고, 완성하시는 분임을 믿는 생활이다.
노년기는 젊은 세대가 아직 충분히 경험하지 못한 시간이다. 노인성도는 긴 세월을 지나며 생육과 수고, 성취와 상실, 건강과 질병, 관계와 이별, 기쁨과 슬픔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노인성도는 이 모든 경험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다시 읽는다. 그에게 노년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신앙적 해석의 시간이다.
기독교 노년생활의 특성은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실체성이다. 노인성도는 하나님 나라를 막연한 관념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임하고 장차 완성될 실체로 고백한다.
둘째는 은사성이다. 노인성도는 자신의 지나온 모든 세월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해석한다.
셋째는 공인성이다. 노인성도는 사적 노후를 보내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는 공적 성도이다.
넷째는 증언성이다. 노인성도는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이루시는 분이심을 후대에 전한다. 이때 구약적 표현으로 말하면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계시하신 여호와의 신실하심을 증언한다. 그러나 이 ‘여호와’의 칭호는 단지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적 명칭으로만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여호와’는 삼위일체 계시 안에서 충만히 해석되어야 할 언약적 이름이다. 곧 여호와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영원히 계시는 한 분 하나님이시며, 성부께서 작정하신 언약을 성자께서 성취하시고 성령께서 적용하시는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네 특성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실체성은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고, 은사성은 하나님의 의와 연결된다. 공인성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노인성도의 신분을 밝히며, 증언성은 그가 후대에게 감당해야 할 사명을 밝힌다.
따라서 기독교 노년생활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기독교 노년생활은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믿고, 하나님의 의를 은혜로 고백하며, 교회 안에서 공적 성도로 서고, 후대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증언하는 생활이다.
2. 실체성: 하나님 나라를 현실로 고백하는 노년생활
1) 실체성의 의미
실체성이란 노인성도가 하나님 나라를 단순한 이상이나 관념으로 보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로 임한 통치와 생명의 현실로 고백하는 특성을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먼 미래의 추상적 소망으로만 말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임하였고, 성령 안에서 성도는 그 나라의 의와 평강과 희락을 맛보며, 장차 새 창조에서 그 완성을 기다린다.[1]
노인성도는 긴 신앙의 여정을 지나며 하나님 나라가 단순한 교리적 표현이 아님을 배운다.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시고 보호하시며 징계하시고 회복시키시는 분임을 경험한다. 그래서 노년의 믿음은 막연한 종교 감정이 아니라, 평생의 섭리를 통하여 확인된 고백이 된다.
실체성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나라를 친히 이루신다”는 믿음이다. 성도는 자기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 자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나라에 속한 백성으로 부름 받았고, 성령 안에서 그 나라의 현실을 믿음으로 누리며, 장차 완성될 나라를 소망한다.
그러므로 노인성도의 노년생활은 이 땅의 조건이 약해질수록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더 깊이 붙드는 생활이 된다. 몸은 쇠약해질 수 있으나 하나님 나라의 통치는 쇠약해지지 않는다. 기억은 흐려질 수 있으나 하나님의 언약적 기억은 흐려지지 않는다. 역할은 줄어들 수 있으나 하나님 나라 안에서 성도의 신분은 폐기되지 않는다.
2) 실체성은 삶을 계시적으로 해석하게 한다
세속적 노년 이해는 삶을 주로 기능적으로 해석한다. 건강이 얼마나 유지되는가, 경제적으로 얼마나 안정되는가, 사회적 관계가 얼마나 남아 있는가, 여가를 어떻게 활용하는가가 중요한 기준이 된다. 물론 이러한 요소들은 노년생활에서 실제로 중요하다. 그러나 기독교 노년생활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성도는 삶을 기능적으로만 보지 않고 계시적으로 해석한다.
계시적 해석이란 삶의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배우는 것이다. 노인성도는 건강의 약화 속에서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배우고, 경제적 한계 속에서 공급자이신 하나님을 배우며, 가족관계의 변화 속에서 언약적 사랑을 배우고, 죽음의 현실 앞에서 부활의 소망을 배운다. 삶의 모든 사건은 하나님을 배우는 자리로 변화된다.
이 계시적 해석은 반드시 삼위일체적이어야 한다. 성도는 자신의 삶을 단순히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일반적 표현에 머물러 해석하지 않는다. 성부께서는 자기 백성을 영원한 작정 안에서 붙드시고, 성자께서는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으로 자기 백성의 의와 생명이 되시며, 성령께서는 말씀과 은혜의 방편을 통하여 성도의 믿음을 보존하고 거룩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노년의 삶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언약적 사역 안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이러한 해석은 성경을 통한 배움과 삶을 통한 익힘이 함께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 성도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 배우고, 삶의 경험 속에서 그 말씀의 진실성을 익힌다. 말씀 없는 경험은 주관적 해석으로 흐르기 쉽고, 경험 없는 지식은 관념에 머물기 쉽다. 기독교 노년생활의 실체성은 말씀과 삶이 함께 결합되어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고백하게 되는 데서 드러난다.
3) 실체성은 노년의 불안을 이기게 한다
노년에는 여러 불안이 찾아온다. 건강의 불안, 경제의 불안, 관계의 불안, 죽음의 불안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믿는 노인성도는 이 불안에 완전히 지배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속한 나라가 이 세상의 조건에 의해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는다.
예수께서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하는 제자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다.[2] 이 말씀은 노년에도 깊이 적용된다. 노인성도는 건강과 재정과 가족과 죽음의 문제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문제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그의 정체성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사실에서 온다.
그러므로 실체성은 노인성도를 현실 도피자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을 더 깊이 감당하게 한다.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믿는 사람은 세상의 약함과 상실 속에서도 믿음으로 살아간다. 노인성도는 자신의 약해지는 몸을 보면서도 “나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고백하며, 그리스도께서 장차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실 것을 소망한다.[3]
3. 은사성: 모든 세월을 하나님의 선물로 고백하는 노년생활
1) 은사성의 의미
은사성이란 노인성도가 자신의 전 생애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해석하는 특성을 말한다. 노년은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는 시간이다. 이때 성도는 자신의 인생을 공로의 목록으로 정리하지 않는다. 또한 실패와 상처의 목록으로만 정리하지도 않는다. 그는 모든 삶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다시 해석한다.
“만사가 하나님의 은사”라는 고백은 기독교 노년생활의 중심 명제이다. 성도에게 주어진 생명, 가족, 교회, 일, 건강, 고난, 회복, 눈물, 위로, 심지어 약함까지도 하나님을 배우게 하시는 은혜의 통로가 된다. 이것은 모든 일이 그 자체로 선하다는 뜻이 아니다. 죄와 고통과 죽음은 여전히 악하고 아픈 현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삶 속에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4]
은사성은 자기 인생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석하게 한다. 세속적 노년은 “내가 무엇을 이루었는가” 혹은 “내가 무엇을 잃었는가”를 묻는다. 그러나 은사성을 아는 노인성도는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주셨고, 무엇을 배우게 하셨는가”를 묻는다. 이 질문이 노년을 원망에서 감사로, 체념에서 찬송으로 바꾼다.
2) 은사성은 자기 의를 내려놓게 한다
노년에는 자기 공로를 붙들고 싶은 유혹이 있다. 오래 믿었다는 것, 오래 봉사했다는 것, 많은 고생을 했다는 것, 자녀를 키웠다는 것, 교회를 섬겼다는 것이 자랑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를 아는 노인성도는 이 모든 것을 자기 의의 근거로 삼지 않는다. 그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다.[5]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은혜이다.[6] 그러므로 노인성도의 신앙 연륜도 은혜의 열매일 뿐, 자기 의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참된 은사성은 자신의 삶을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 노인성도는 자신이 견디어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견디게 하셨고, 자신이 지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켜 주셨다고 고백한다.
이때 “여호와께서 나를 지키셨다”는 고백은 삼위일체적으로 충만해진다. 곧 성부께서 자기 백성을 작정과 섭리 가운데 붙드셨고, 성자께서 자기 피로 구속하셨으며, 성령께서 믿음과 회개와 인내를 일으키시고 끝까지 견인하셨다는 고백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신실하심은 성부·성자·성령의 구원 사역 안에서 충만히 드러난다.
이 고백은 노년의 품위를 만든다. 자기 의에 붙들린 노년은 고집과 원망과 판단으로 흐르기 쉽다. 그러나 은사성을 아는 노년은 감사와 온유와 겸손으로 성숙한다. 그는 젊은 세대를 향해 “내가 옳다”고 주장하기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붙들었다”고 증언한다. 이것이 노년의 성화된 아름다움이다.
3) 은사성은 약함까지도 신앙의 자리로 바꾼다
노년의 약함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건강이 약해지고, 기억이 흐려지며, 활동 범위가 줄어들 수 있다. 그러나 은사성을 아는 노인성도는 약함을 단순한 실패로 보지 않는다. 그는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배운다. 바울은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고백하였다.[7]
노인성도는 이 말씀을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능력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노년에는 자신의 한계를 더 분명히 알게 된다. 이때 성도는 절망할 수도 있지만, 믿음 안에서는 더 깊이 하나님께 의존하게 된다. 약함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학교가 된다.
은사성은 약함을 미화하지 않는다. 질병과 고통은 실제로 아프다. 그러나 성도는 그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지 않으셨음을 믿는다. 그는 약함 속에서 기도하게 되고, 도움을 받는 법을 배우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사랑을 경험한다. 그리하여 약함조차 하나님을 배우는 자리가 된다.
4. 공인성: 사적 노후가 아니라 교회적 책임으로서의 노년생활
1) 공인성의 의미
공인성이란 노인성도가 사적인 노후생활에만 머무르지 않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공적 책임을 가진 성도로 살아가는 특성을 말한다. 노년은 은퇴의 시간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사명에서 은퇴하는 시간은 아니다. 직업에서 물러날 수는 있으나, 성도의 부르심에서 물러날 수는 없다.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한다.[8]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으며, 약하게 보이는 지체도 필요하다. 그러므로 노인성도는 교회 안에서 불필요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긴 시간의 기억과 경험과 기도를 통해 교회를 세우는 중요한 지체이다. 교회는 노인성도를 단지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만 보지 말고, 함께 몸을 세우는 동역자로 보아야 한다.
공인성은 노인성도에게 책임을 부여한다. 노인성도는 자신의 말과 태도와 생활이 교회 공동체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의 감사는 교회를 세우고, 그의 원망은 교회를 약하게 할 수 있다. 그의 기도는 다음 세대를 붙들고, 그의 무관심은 세대 단절을 깊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노인성도는 자신의 노년을 하나님 앞에서 공적 사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2) 공인성은 장로성과 연결된다
공인성은 성경의 장로성과 깊이 연결된다. 장로성은 단순히 직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 안에서 말씀과 삶의 경험으로 다른 사람을 권면하고 세우는 성숙한 품위이다. 디도서 2장은 늙은 남자와 늙은 여자가 젊은 세대에게 본과 교훈을 제공해야 함을 가르친다.[9]
노인성도는 자신의 나이를 권위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 성경적 권위는 나이 자체에서 자동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 절제된 말, 사랑의 권면, 성화된 인격에서 나온다. 노인성도의 공적 권위는 주장하는 권위가 아니라 본이 되는 권위이다.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양 무리 위에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지 말고 본이 되라고 권면하였다.[10]
이 원리는 모든 노인성도에게 적용될 수 있다. 노인성도는 젊은 세대를 정죄하는 사람이 아니라 세우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절대화하지 않고 말씀 아래 두어야 한다. 그는 과거를 그리워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현재의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장래 세대가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도와야 한다.
3) 공인성은 세대통합을 지향한다
노인성도의 공인성은 세대통합을 지향한다. 교회는 세대별 프로그램만으로 건강하게 세워지지 않는다. 어린 세대, 청년 세대, 장년 세대, 노년 세대가 서로 분리되어 있으면 신앙 전승은 약해진다. 성경은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자녀와 손자에게 알리라고 명한다.[11] 이것은 세대 간 신앙 교류가 언약 공동체의 본질적 사명임을 보여준다.
노인성도는 세대통합의 중요한 연결자이다. 그는 젊은 세대에게 과거의 신앙을 전하고, 젊은 세대의 질문을 들으며, 자신의 경험을 말씀 안에서 나누어야 한다. 젊은 세대도 노인성도를 단지 낡은 세대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섭리를 오래 경험한 어른으로 존중해야 한다.
세대통합은 일방적 훈계가 아니다. 그것은 함께 하나님을 배우는 과정이다. 노인성도는 젊은 세대에게 경륜을 나누고, 젊은 세대는 노인성도에게 현재의 질문과 삶의 현장을 나눈다. 이 만남 속에서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성을 더 풍성하게 드러낸다.
5. 증언성: 후대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전하는 노년생활
1) 증언성의 의미
증언성이란 노인성도가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이루시는 분임을 후대에게 전하는 특성을 말한다. 노인성도는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 인생 가운데 행하신 일을 증언하는 사람이다.
시편 기자는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하나님의 능력을 다음 세대에 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12] 이 기도는 노년의 증언성을 잘 보여준다. 노년은 침묵의 시간이 아니다. 노년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말해야 할 시간이다. 노인성도의 입술은 불평과 회한으로 채워지기보다, 하나님의 의와 구원과 신실하심을 말해야 한다.
특히 노인성도의 증언은 “여호와께서 언약대로 이루셨다”는 고백을 포함한다. 그러나 여기서 ‘여호와’는 단지 구약적 명칭으로만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여호와’의 칭호는 삼위일체 계시 안에서 충만히 해석되어야 할 언약적 이름이다. 구약에서 자기 백성을 부르시고 구원하시며 언약을 지키신 여호와 하나님은, 신약의 충만한 계시 안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자신을 나타내신 한 분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노인성도가 후대에게 전해야 할 증언은 단순히 “하나님이 내 인생을 도우셨다”는 일반적 간증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성부께서 은혜로 택하시고, 성자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구속하시며, 성령께서 믿음을 주시고 인내하게 하셨다는 삼위일체적 은혜를 증언해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 노년생활의 증언성을 복음적으로 온전하게 만든다.
증언은 단순한 말이 아니다. 노인성도의 삶 전체가 증언이 되어야 한다. 그의 인내, 감사, 절제, 기도, 예배, 죽음 앞의 소망이 모두 증언이다. 젊은 세대는 노인성도의 말보다 그의 삶을 더 깊이 본다. 그러므로 노년의 증언은 언어와 생활이 일치할 때 힘을 얻는다.
2) 증언성은 기억을 신앙으로 바꾼다
노년에는 기억이 많다. 그러나 모든 기억이 신앙적 증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기억은 원망이 되고, 어떤 기억은 자랑이 되며, 어떤 기억은 상처에 머문다. 기독교 노년생활은 기억을 말씀 안에서 다시 해석한다. 그렇게 해석된 기억은 신앙의 증언이 된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단순한 과거 사건으로 기억하지 않았다. 그들은 출애굽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언약적 사건으로 기억했다. 오늘의 노인성도도 자신의 삶을 그런 방식으로 기억해야 한다. 자신의 고난과 회복, 실패와 은혜, 상실과 위로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다시 읽어야 한다.
그러나 이 기억은 구약 사건의 반복에 머물지 않는다. 출애굽의 하나님, 광야에서 먹이신 하나님, 성전과 왕권과 선지자를 통해 언약을 보존하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구원을 성취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노인성도의 기억은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성도의 모든 생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의 적용 안에서 참 의미를 얻는다.
이때 노인성도의 기억은 교회의 자산이 된다. 교회는 노인성도의 신앙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고 나누어야 한다. 그것은 개인의 회고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 성도를 어떻게 붙드셨는지를 보여주는 은혜의 기록이 될 수 있다.
3) 증언성은 찬송으로 완성된다
기독교 노년생활의 증언은 결국 찬송으로 완성된다. 성도는 자신의 인생을 설명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을 찬송한다. 노인성도의 마지막 언어는 자기 자랑이나 세상 원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찬송이어야 한다.
시편 92편은 의인이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고 백향목 같이 성장하며,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고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리라고 노래한다.[13] 이는 노년의 신앙이 쇠퇴로 끝나지 않고 찬송과 결실로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노인성도는 육체적으로 약해질 수 있으나, 하나님을 찬송하는 믿음은 더욱 깊어질 수 있다.
찬송은 노년의 승리 선언이다. 세상은 노년을 상실의 언어로 말하지만, 성도는 노년을 은혜의 언어로 말한다. 그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사”라고 고백하며,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 찬송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드려지는 찬송이다. 성부께서는 영원한 사랑으로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성자께서는 자기 피로 구속하시며, 성령께서는 성도 안에 거하시며 끝까지 믿음을 보존하신다. 따라서 노년의 찬송은 단순한 인생 회고가 아니라, 언약을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드리는 신앙고백이다.
이것이 기독교 노년생활의 아름다운 완성이다.
6. 네 특성의 통합적 이해
기독교 노년생활의 네 특성은 하나의 구조 안에서 통합된다.
첫째, 실체성은 하나님 나라와 연결된다. 노인성도는 하나님 나라를 실제로 믿고, 그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간다.
둘째, 은사성은 하나님의 의와 연결된다. 노인성도는 자기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며, 모든 삶을 은혜의 선물로 고백한다.
셋째, 공인성은 교회 공동체와 연결된다. 노인성도는 사적 존재가 아니라 교회를 세우는 공적 성도이다.
넷째, 증언성은 세대 전승과 연결된다. 노인성도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후대에 전하는 증인이다. 이때 그가 증언하는 하나님은 단순한 일반 신 개념이 아니라, 언약적 이름 ‘여호와’로 자기 백성에게 알려지셨고, 신약의 충만한 계시 안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자신을 나타내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이 네 특성은 노년생활을 기능적 이해에서 계시적 이해로 전환시킨다. 기능적 이해는 노년을 “무엇을 할 수 있는가”로 평가한다. 그러나 계시적 이해는 노년을 “하나님께서 무엇을 드러내시는가”로 해석한다. 이 관점 전환이 기독교 노인학의 핵심이다.
노인성도는 더 적게 일할 수 있지만 더 깊이 증언할 수 있다. 더 천천히 걸을 수 있지만 더 오래 하나님의 길을 말할 수 있다. 더 자주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더 풍성히 은혜를 고백할 수 있다. 이것이 기독교 노년생활의 역설이며 아름다움이다.
7. 제7장 요약
본 장은 기독교 노년생활의 특성을 실체성, 은사성, 공인성, 증언성으로 정리하였다.
실체성은 노인성도가 하나님 나라를 관념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로 임한 통치와 생명의 현실로 고백하는 특성이다. 은사성은 노인성도가 자신의 모든 세월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해석하는 특성이다. 공인성은 노인성도가 사적 노후를 보내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에서 공적 책임을 가진 성도로 서는 특성이다. 증언성은 노인성도가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이루시는 분임을 후대에 전하는 특성이다.
특히 본 장에서 중요한 수정점은 ‘여호와’의 칭호를 삼위일체 계시 안에서 충만히 해석하는 것이다. 구약에서 ‘여호와’는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이 이름을 구약적 명칭에만 머물러 이해하지 않는다. 여호와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영원히 계시는 한 분 하나님이시며, 성부의 작정, 성자의 구속, 성령의 적용 안에서 자기 백성을 끝까지 구원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기독교 노년생활은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믿고, 하나님의 의를 은혜로 고백하며, 교회 안에서 공인으로 서고, 후대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증언하는 생활이다. 노년은 신앙생활의 주변부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송하는 성숙한 생활신학의 자리이다.
각주
[1] 막 1:15; 눅 17:20–21;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임하였고,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경험되며, 장차 새 창조에서 완성된다.
[2] 마 6:25–34. 예수께서는 염려의 문제를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하나님 나라의 우선성 안에서 다루셨다.
[3] 빌 3:20–21. 성도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실 것이다.
[4] 롬 8:28.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5] 고전 15:10.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한다.
[6] 롬 3:21–26; 고후 5:21.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에게 주어지며, 성도는 자기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로 하나님 앞에 선다.
[7] 고후 12:9–10. 주님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하여지며, 바울은 자신의 약함 가운데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문다고 고백한다.
[8] 고전 12:12–27; 엡 4:15–16.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여러 지체가 서로 연결되어 몸을 세운다.
[9] 딛 2:1–5. 늙은 남자와 늙은 여자는 경건과 절제와 선한 교훈의 본을 보여야 한다.
[10] 벧전 5:1–4.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양 무리 위에 주장하는 자세가 아니라 본이 되라고 권면한다.
[11] 신 4:9; 시 78:4–7. 하나님의 행하신 일과 능력과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는 것은 언약 공동체의 교육 사명이다.
[12] 시 71:17–18. 시편 기자는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하나님의 능력과 의를 다음 세대에 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13] 시 92:12–15. 의인은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낸다.
[1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장 3항. 신격의 단일성 안에 동일한 본질과 능력과 영원성을 가진 삼위,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계신다.
[15]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장 3항. 사람은 타락으로 행위언약에 의한 생명을 얻을 수 없게 되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은혜언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생명과 구원을 제공하셨다.
[1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3장 1항. 유효하게 부르심을 받고 중생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효력으로 실제적이고 인격적으로 더욱 거룩하게 된다.
[1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6장 2항. 선행은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의 열매이며 증거로서, 성도는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18]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7장 1항.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이시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에서 완전히 또는 최종적으로 떨어질 수 없고 끝까지 견디어 영원히 구원받는다.
[19]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 대요리문답 제1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