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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Re: 제8장 노년기의 개인생활

작성자펄군|작성시간26.06.08|조회수0 목록 댓글 0

 

아래는 첨부하신 제8장 노년기의 개인생활 원문을 기준으로, 요청하신 핵심 수정, 곧 “‘여호와’의 칭호는 ‘삼위일체 계시 안에서 충만히 해석되어야 할 언약적 이름’”이라는 관점을 반영한 재개정안입니다. 원문은 노년기의 개인생활을 의식주, 건강, 질병과 죽음, 평생교육의 네 영역으로 구성하고 있습니다.

 

 

8장 노년기의 개인생활

의식주·건강·질병과 죽음·평생교육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장 31–33절

 

 

1. 문제 제기: 노년의 개인생활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노년기의 개인생활은 매우 실제적이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어디에 거하며, 몸을 어떻게 돌보고, 질병과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며, 남은 생애 동안 무엇을 배울 것인가는 노인성도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기독교 노인학은 노년의 개인생활을 관념적으로만 다룰 수 없다. 노인성도의 의식주, 건강, 질병, 죽음, 배움의 문제는 모두 구체적인 생활의 자리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 노인학은 이러한 문제를 단지 기능적 차원에서만 다루지 않는다. 기능적 접근은 “어떻게 건강을 유지할 것인가”, “어떻게 안정된 주거를 마련할 것인가”, “어떻게 경제적 불안을 줄일 것인가”를 묻는다. 이러한 질문은 필요하다. 그러나 성경적 접근은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이 모든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가르치시는가”를 묻는다. 노인성도의 개인생활은 하나님을 배우는 생활신학의 자리이다.

예수께서는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에 대한 염려를 다루시면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다.[1] 이 말씀은 노년기의 개인생활 전체를 해석하는 기준이 된다. 노인성도는 의식주를 염려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돌보심을 배우는 자리로 본다. 건강은 자기 보존의 절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섬기기 위한 청지기적 도구이다. 질병과 죽음은 절망의 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과 새 창조의 소망 안에서 해석되어야 할 현실이다. 평생교육은 단순한 취미나 여가가 아니라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후대에 전승하기 위한 배움과 익힘의 과정이다.

여기서 노인성도가 배우는 하나님은 막연한 신적 존재가 아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언약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이시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여호와라는 언약적 이름으로 자신을 알리셨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서 ‘여호와’의 칭호는 구약적 명칭에만 머물러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여호와’의 칭호는 삼위일체 계시 안에서 충만히 해석되어야 할 언약적 이름이다. 곧 여호와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영원히 계시는 한 분 하나님이시며, 성부께서 자기 백성을 작정하시고, 성자께서 구속을 성취하시며, 성령께서 그 구속을 적용하시고 성도를 끝까지 견인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노년기의 개인생활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 안에서 재배열되어야 한다. 노인성도는 생활의 필요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생활의 필요가 하나님보다 앞서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먹고 마시고 입고 거하는 모든 일을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분임을 배우며, 몸의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배우고, 죽음 앞에서도 그리스도의 생명을 증언하는 자로 선다.

 

 

2. 노년기의 의식주

1) 의식주는 염려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돌보심을 배우는 자리이다

노년기의 의식주는 실제적이고 중요한 문제이다. 나이가 들수록 소득은 줄어들고, 몸은 약해지며, 생활의 독립성은 흔들릴 수 있다. 먹는 것, 입는 것, 거처하는 것의 안정은 노인성도에게 큰 위로가 된다. 교회와 가정은 노인성도의 기본 생활이 존엄하게 유지되도록 실제적으로 돌보아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의식주를 염려의 최종 대상으로 삼지 말라고 가르친다. 예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며,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고 말씀하셨다.[2] 이 말씀은 생활의 필요를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생활의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으라는 뜻이다.

노인성도는 의식주를 통하여 하나님의 돌보심을 배운다. 하루의 양식을 받을 때 그는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한다. 입을 옷과 거처할 처소가 주어질 때 그는 하나님의 보존하시는 은혜를 기억한다. 때로 부족함을 경험할 때에도 그는 하나님께 구하고, 교회의 사랑을 받고,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의식주는 단지 생존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돌보심을 배우는 신앙의 자리이다.

이 돌보심은 삼위일체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성부께서는 피조세계를 보존하시고 자기 백성의 필요를 아시며, 성자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의 배고픔과 피곤함과 가난의 현실 속에 들어오셨고, 성령께서는 성도에게 믿음과 감사와 인내를 주셔서 일상의 필요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노년의 의식주는 단순한 생계 문제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언약적 돌보심을 배우는 자리이다.

2) 노년의 식생활: 절제와 감사

노년기의 식생활은 건강과 깊이 연결된다. 그러나 기독교적 식생활은 건강관리의 기술에만 머물지 않는다. 성도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한다.[3] 그러므로 노인성도의 식생활은 절제와 감사의 생활이어야 한다.

절제는 자기 몸을 돌보는 청지기적 태도이다. 노년에는 몸의 기능이 변화하므로, 식생활도 지혜롭게 조절되어야 한다. 지나친 탐식이나 무절제는 몸을 해치고 마음을 둔하게 만들 수 있다. 반대로 건강 염려에 지나치게 매여 음식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도 바른 태도가 아니다. 성도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받되, 절제와 지혜로 사용한다.[4]

감사는 식생활의 영적 중심이다. 노인성도는 식탁 앞에서 지나온 세월 동안 먹이시고 입히신 하나님을 기억한다. 많은 것을 소유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늘도 필요한 것을 아시고 공급하심을 믿기 때문에 감사한다. 감사의 식탁은 노년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가족과 교회 안에 은혜의 분위기를 만든다.

식탁의 감사는 단지 일반적 감사가 아니다. 노인성도는 성부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성자께서 생명의 떡으로 오셨으며, 성령께서 감사하는 마음을 일으키심을 믿는다. 그러므로 노년의 식생활은 몸을 유지하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예배적 생활이다.

3) 노년의 의복생활: 단정과 존귀

의복은 단지 몸을 보호하는 기능만 가진 것이 아니다. 의복은 사람의 태도와 품위를 드러내기도 한다. 노년기의 의복생활은 허영이나 체면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무관심과 방치의 대상도 되어서는 안 된다. 노인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존재로 부름 받았으므로, 단정하고 감사한 태도로 자신을 돌보아야 한다.

성경은 외적 단장을 절대화하지 않는다. 참된 아름다움은 속사람의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에 있다.[5] 그러나 이것은 외적 삶을 무질서하게 방치하라는 뜻이 아니다. 노인성도의 단정한 의복생활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몸과 삶을 존중하는 표현이 될 수 있다. 화려함이 목적이 아니라, 감사와 절제와 품위가 목적이다.

노년의 의복생활은 신학적으로도 깊은 의미를 가진다. 타락 이후 인간은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하게 되었고,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6] 이 사건은 인간의 수치와 하나님의 은혜로운 덮으심을 보여준다. 성도는 궁극적으로 자기 의의 옷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은 자이다.[7]

그러므로 노인성도의 의복생활은 외적 단정함을 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덧입은 하나님의 의를 기억하게 하는 생활이어야 한다. 여기서 ‘여호와께서 입히신다’는 고백은 삼위일체 계시 안에서 더욱 충만해진다. 성부께서는 죄인의 수치를 아시고 은혜의 덮으심을 예비하시며, 성자께서는 자기 의로 성도를 입히시고, 성령께서는 성도의 속사람을 새롭게 하셔서 단정과 온유와 거룩의 품위를 나타내게 하신다.

4) 노년의 주거생활: 거처와 순례

노년기의 주거생활은 안정과 안전의 문제와 깊이 연결된다. 나이가 들수록 거처의 구조, 이동의 편리성, 돌봄의 접근성, 공동체와의 연결성이 중요해진다. 교회와 가족은 노인성도가 고립되지 않고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성경적 주거 이해는 단지 안정된 집을 확보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성도는 이 땅에서 나그네와 거류민으로 산다.[8] 노인성도는 오랜 세월 한 집에 거했을지라도, 자신의 최종 거처가 이 땅에 있지 않음을 안다. 그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집을 바라본다.[9]

이 관점은 노년의 주거생활을 깊이 변화시킨다. 집은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집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이웃을 섬기는 자리이다. 노인성도의 가정은 후대에게 신앙의 기억을 전하는 작은 교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성도는 이 땅의 집을 영원한 집으로 착각하지 않는다. 노년의 주거생활은 감사와 청지기직과 순례의식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노인성도의 거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임재 신앙 안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성부께서는 자기 백성을 영원한 집으로 부르시고, 성자께서는 처소를 예비하시는 중보자이시며, 성령께서는 성도 안에 거하셔서 이 땅의 집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평강을 맛보게 하신다. 그러므로 노년의 집은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라, 영원한 처소를 바라보며 하나님을 섬기는 순례의 자리이다.

 

 

3. 노년기의 건강생활

1) 건강은 목적이 아니라 청지기직의 대상이다

노년기에 건강은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건강이 무너지면 생활의 독립성이 줄어들고,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에도 어려움이 생긴다. 그러므로 노인성도는 건강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몸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이며, 성도의 몸은 성령의 전이다.[10]

그러나 건강은 최종 목적이 아니다. 현대 사회는 건강과 장수를 우상화하기 쉽다. 오래 사는 것 자체가 최고의 가치처럼 여겨지고, 건강을 잃으면 인생의 의미도 잃은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성도에게 건강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도구이지, 하나님을 대신할 목적이 아니다.

기독교 건강생활은 두 극단을 피한다. 하나는 몸을 무시하는 태도이다. 이것은 창조신앙에 어긋난다. 하나님께서 몸을 지으셨고, 성도는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다른 하나는 몸을 우상화하는 태도이다. 이것은 영원한 생명을 이 땅의 건강으로 대체하는 오류이다. 노인성도는 몸을 감사함으로 돌보되, 몸의 건강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귀하게 여긴다.

이때 하나님과의 관계는 삼위일체적 언약 관계이다. 성부께서는 몸과 영혼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며, 성자께서는 참 몸을 입고 오셔서 몸의 구속까지 이루실 것을 보증하시며, 성령께서는 성도의 몸을 자기 성전으로 삼으신다. 그러므로 건강생활은 단순한 자기관리나 장수 전략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몸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청지기적 순종이다.

2) 건강관리와 절제의 신앙

노년기의 건강관리는 절제의 신앙과 연결된다. 절제는 성령의 열매이다.[11] 노인성도는 식사, 운동, 수면, 약물, 정기 검진, 마음의 습관에 이르기까지 지혜롭게 자신을 돌보아야 한다. 이러한 관리는 자기중심적 생존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생명을 책임 있게 사용하는 청지기직이다.

건강관리는 또한 공동체적 책임과 연결된다. 노인성도가 자신의 건강을 지혜롭게 돌보면, 가족과 교회 공동체의 돌봄 부담도 질서 있게 조정될 수 있다. 그러나 건강관리의 실패를 단순히 개인의 죄나 믿음 부족으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 노년의 질병과 약함은 복합적인 현실이다. 교회는 정죄보다 돌봄으로 접근해야 한다.

노인성도는 건강이 좋을 때 감사함으로 섬기고, 건강이 약해질 때 겸손히 도움을 받을 줄 알아야 한다. 도움을 받는 것도 신앙의 훈련이다. 성도는 자립만을 미덕으로 삼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서로 의존하는 법을 배운다.[12]

3) 마음의 건강과 영적 평안

노년기의 건강은 몸의 문제만이 아니다. 마음의 건강도 중요하다. 외로움, 우울, 불안, 분노, 후회, 상실감은 노년의 삶을 깊이 흔들 수 있다. 기독교 노인학은 이러한 마음의 문제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노인성도의 마음은 말씀과 기도와 공동체의 사랑 안에서 돌봄을 받아야 한다.

성경은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라고 가르친다.[13] 이것은 감정을 억압하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성도는 자신의 염려를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가져가야 한다. 노인성도는 지나온 삶의 상처와 현재의 두려움을 주님께 아뢰며,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도록 기도해야 한다.[14]

이 평안은 단순한 심리적 안정이 아니다. 성부께서 자기 자녀를 아시고 돌보시며, 성자께서 죄와 죽음의 두려움을 담당하셨고, 성령께서 성도 안에서 위로자와 보혜사로 일하신다는 언약적 평안이다. 그러므로 노인성도의 마음 건강은 상담과 돌봄의 차원만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교회는 노인성도의 마음 건강을 위해 말씀, 방문, 대화, 기도, 공동체 참여의 통로를 마련해야 한다. 노년의 고독은 단지 사회적 문제가 아니라 영적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교회는 노인성도가 그리스도의 몸 안에 연결되어 있음을 실제로 경험하게 해야 한다.

 

 

4. 노년의 질병과 죽음

1) 질병은 저주 아래 있는 몸의 현실이다

질병은 노년기에 자주 마주하는 현실이다. 성경은 질병을 낭만적으로 보지 않는다. 질병은 타락 이후 인간이 경험하는 고통의 일부이며, 몸이 죽음 아래 있음을 보여주는 표지이다.[15] 그러므로 기독교 노인학은 질병을 가볍게 말해서는 안 된다. 질병은 실제로 아프고, 두렵고, 생활을 제한하며, 때로는 믿음을 흔든다.

그러나 성도는 질병을 최종 절망으로 보지 않는다. 질병은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지만, 동시에 하나님께 의존하도록 부르는 자리가 될 수 있다. 성도는 병들었을 때 자신의 몸이 자기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더 깊이 배운다. 그는 생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게 된다.

질병을 죄의 직접적 결과로 단정하는 태도는 조심해야 한다. 물론 모든 질병은 넓은 의미에서 타락한 세상의 현실과 연결되어 있지만, 특정 질병을 특정 죄의 직접적 벌로 단정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위험하다. 예수께서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두고 그 사람이나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야 한다.[16]

질병 앞에서 성도는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을 고백한다. 그러나 이 고백은 삼위일체 계시 안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성부께서는 생명과 죽음의 주권자이시며, 성자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신 대제사장이시고, 성령께서는 탄식 가운데서 성도를 위로하시며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노년의 질병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긍휼과 능력을 배우는 신앙의 자리이다.

2) 질병은 하나님의 능력을 배우는 자리이다

바울은 자신의 약함 가운데 주님의 능력이 머문다고 고백하였다.[17] 이 말씀은 노년의 질병을 해석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질병은 성도에게 자기 능력의 한계를 가르치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의지하게 한다. 노인성도는 질병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공동체의 사랑을 받고,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고백한다.

질병이 신앙을 자동으로 성숙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질병은 사람을 원망과 낙심으로 몰아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질병 속에서 말씀의 해석과 교회의 돌봄이 필요하다. 노인성도는 질병의 의미를 자기중심적으로만 해석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의 빛 안에서 해석해야 한다.

교회는 병든 노인성도를 위해 기도하고 돌보아야 한다. 야고보서는 병든 자가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고, 장로들이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친다.[18] 이는 질병의 문제가 개인의 고립된 문제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함께 감당해야 할 문제임을 보여준다.

3) 죽음은 성도에게 최종 절망이 아니다

노년의 개인생활에서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주제이다. 성경은 죽음을 죄의 삯으로 말한다.[19] 죽음은 창조 본래의 선한 질서가 아니라 타락 이후 인간에게 임한 심판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죽음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죽음은 여전히 원수이다.[2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셨다. 예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말씀하셨다.[21]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의 죽음을 새롭게 해석하게 한다. 성도의 죽음은 허무의 종결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과 영화의 완성을 기다리는 통로이다.

노인성도는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그 준비는 단지 장례 절차나 재산 정리에 그치지 않는다. 참된 죽음 준비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또한 후대에게 믿음의 유산을 남기는 것이다. 노인성도의 마지막 말과 태도와 찬송은 가족과 교회에 깊은 신앙교육이 될 수 있다.

죽음 앞에서 성도는 “여호와께서 나를 영접하신다”고 고백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고백은 반드시 삼위일체적 복음 안에서 충만히 이해되어야 한다. 성부께서는 자기 자녀를 영원한 집으로 부르시고, 성자께서는 죽음과 부활로 성도의 길을 여셨으며, 성령께서는 성도의 마지막 순간까지 믿음과 소망을 붙드신다. 그러므로 성도의 죽음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 안에서 해석되는 마지막 순례이다.

4) 장례는 마지막 신앙교육의 자리이다

기독교 장례는 단순한 이별 의식이 아니다. 그것은 한 성도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그리스도의 부활 소망을 선포하며, 남은 자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가르치는 자리이다. 성도의 장례는 죽음의 승리를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승리를 말해야 한다.

노인성도는 자신의 장례를 준비하면서 가족에게 재산보다 더 중요한 신앙의 유언을 남길 수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 “그리스도를 의지하라”, “교회를 사랑하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는 유언은 어떤 물질보다 귀하다. 이러한 준비는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증언하는 자리로 삼게 한다.

장례는 또한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언하는 자리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여호와’는 삼위일체 계시 안에서 충만히 해석되어야 한다. 성도의 장례는 성부의 선택과 섭리, 성자의 구속과 부활, 성령의 인치심과 견인을 기억하는 예배적 증언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장례는 죽음의 슬픔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언약 성취를 선포하는 마지막 교육의 자리이다.

 

 

5. 노년기의 평생교육

1) 노년은 배움이 끝나는 시간이 아니다

노년은 배움이 끝나는 시간이 아니다. 성도는 평생 하나님을 배운다. 성경은 인생의 본분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한다.[22] 그러므로 노인성도는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배움에서 물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노년은 말씀과 삶의 경험이 만나는 깊은 배움의 시기이다.

평생교육은 단순한 지식 습득이나 여가 활동만이 아니다. 기독교 평생교육의 중심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이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일반적 종교 지식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언약적 지식이다. 노인성도는 성경을 통해 성부의 작정과 섭리, 성자의 성육신과 구속, 성령의 적용과 견인을 배우며, 자신의 지나온 삶을 그 말씀으로 해석하고, 후대에게 그 깨달음을 전승한다.

이것이 노년기의 배움공부와 익힘공부이다. 배움공부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 배우는 것이다. 익힘공부는 삶의 사건을 통해 배운 말씀의 의미를 실제로 깨닫는 것이다. 노인성도의 신앙은 이 두 공부가 결합될 때 성숙한다. 말씀 없는 경험은 주관적 회상이 되고, 경험 없는 말씀은 관념에 머물 수 있다. 그러나 말씀과 경험이 함께 해석될 때, 노년의 삶은 깊은 생활신학이 된다.

2) 평생교육은 후대 전승을 위한 준비이다

노인성도의 배움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는 배우고 익힌 것을 후대에게 전해야 한다. 시편 71편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하나님의 능력을 다음 세대에 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23] 이것은 노년기 평생교육의 목적을 잘 보여준다. 노인성도는 배워서 자기 만족에 머물지 않고, 배워서 전승해야 한다.

교회는 노인성도를 위한 성경공부를 단순한 친교 프로그램으로 운영해서는 안 된다. 노인성도 교육은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자신의 삶을 말씀으로 해석하며, 다음 세대에게 신앙을 전할 수 있도록 돕는 방향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노인성도는 신앙의 마지막 학생이면서 동시에 다음 세대의 교사이다.

후대 전승의 핵심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노년교육은 이 표현을 구약적 역사 기억에만 제한하지 않는다. 여호와의 행하심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언약 사역으로 충만히 해석되어야 한다. 성부의 창조와 섭리, 성자의 구속과 중보, 성령의 적용과 성화가 함께 전해질 때, 노년의 신앙 전승은 복음적으로 온전해진다.

평생교육은 또한 노인성도의 자존감을 회복시킨다. 세상은 노년을 배움의 끝으로 여기기 쉽다. 그러나 교회는 노인성도에게 “아직도 하나님을 배울 시간이 있으며, 아직도 전할 말씀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 이것은 노인성도를 사역의 주체로 세우는 중요한 길이다.

3) 말씀·기도·찬송의 교육

노년기 평생교육의 중심은 말씀과 기도와 찬송이다. 말씀은 노인성도의 삶을 해석하는 기준이고, 기도는 그의 약함을 하나님께 맡기는 통로이며, 찬송은 그의 삶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고백이다.

말씀교육은 노인성도가 성경 전체의 언약 구조를 이해하도록 도와야 한다. 창조, 타락, 언약, 그리스도, 교회, 완성의 흐름 안에서 자기 인생을 해석하게 해야 한다. 기도교육은 노인성도가 개인적 필요를 아뢰는 데서 더 나아가, 교회와 후대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중보하도록 도와야 한다. 찬송교육은 노인성도가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의 은혜로 고백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이 말씀·기도·찬송은 삼위일체적으로 정돈되어야 한다. 말씀은 성부의 뜻과 성자의 복음과 성령의 조명을 통해 깨달아진다. 기도는 성자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부께 나아가는 은혜의 길이다. 찬송은 성부께 영광을 돌리고, 성자의 구속을 높이며, 성령의 은혜를 고백하는 교회의 응답이다. 그러므로 노년의 평생교육은 단순한 학습 프로그램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께 더 깊이 참여하는 신앙의 훈련이다.

노년의 찬송은 특별한 힘을 가진다. 젊고 건강할 때의 찬송도 귀하지만, 몸이 약해지고 죽음이 가까워질 때 부르는 찬송은 교회에 깊은 증언이 된다. 노인성도의 찬송은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인도하셨다”는 에벤에셀의 고백이며, “장차 완성하실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소망의 고백이다.

 

 

6. 8장 요약

본 장은 노년기의 개인생활을 의식주, 건강생활, 질병과 죽음, 평생교육의 네 영역으로 살펴보았다. 노년기의 개인생활은 매우 실제적이지만, 기독교 노인학은 그것을 기능적으로만 해석하지 않는다. 성도는 먹고 마시고 입고 거하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배우며, 건강을 자기 보존의 우상으로 삼지 않고 청지기직의 대상으로 삼는다. 질병과 약함 속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배우고, 죽음 앞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새 창조의 소망을 붙든다. 또한 노년은 배움이 끝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후대에게 전승하기 위한 평생교육의 절정기이다.

특히 본 장의 핵심 수정은 ‘여호와’의 칭호를 삼위일체 계시 안에서 충만히 해석하는 것이다. 구약에서 여호와는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을 먹이시고 입히시며, 광야에서 인도하시고, 질병과 죽음의 현실 속에서도 자기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이 이름을 구약적 명칭에만 머물러 이해하지 않는다. 여호와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영원히 계시는 한 분 하나님이시며, 성부의 작정과 섭리, 성자의 구속과 부활, 성령의 적용과 견인 안에서 자기 백성을 끝까지 돌보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노년기의 개인생활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 안에서 재해석되어야 한다. 의식주는 염려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돌보심을 배우는 자리이고, 건강은 목적이 아니라 섬김의 도구이며, 질병은 절망이 아니라 은혜를 배우는 자리이고, 죽음은 종결이 아니라 부활 소망 안에서 해석되는 현실이다. 평생교육은 노인성도를 다시 신앙의 학생으로 세우며 동시에 후대의 교사로 세운다. 이것이 기독교 노년생활의 개인적 실제이다.

 

 

각주

[1] 마 6:31–33. 예수께서는 의식주의 염려를 다루시면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명하셨다.

[2] 마 6:25–34. 하늘 아버지께서 성도의 필요를 아신다는 말씀은 노년기의 생활 염려를 해석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3]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4] 딤전 4:4–5.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므로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고,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

[5] 벧전 3:3–4. 성경은 외적 단장보다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6] 창 3:7, 21. 타락 이후 인간은 스스로 무화과나무 잎으로 몸을 가렸으나,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7] 사 61:10; 갈 3:27. 성도는 구원의 옷과 의의 겉옷을 입으며,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이다.

[8] 히 11:13; 벧전 2:11. 성도는 이 땅에서 나그네와 거류민으로 산다.

[9] 고후 5:1–4. 땅에 있는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원한 집이 있다.

[10] 고전 6:19–20. 성도의 몸은 성령의 전이며 하나님께 받은 것이므로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11] 갈 5:22–23. 절제는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이다.

[12] 고전 12:21–26.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지체들은 서로를 필요로 하며 함께 돌본다.

[13] 벧전 5:7. 성도는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겨야 한다. 이는 주께서 성도를 돌보시기 때문이다.

[14] 빌 4:6–7.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면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

[15] 창 3:17–19; 롬 5:12. 타락 이후 인간은 수고와 죽음의 현실 아래 놓이게 되었다.

[16] 요 9:1–3. 예수께서는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고난을 특정 죄의 직접적 결과로 단정하지 않으셨다.

[17] 고후 12:9–10. 주님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하여지며, 바울은 약함 가운데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문다고 고백한다.

[18] 약 5:13–16. 병든 자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고, 장로들은 주의 이름으로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19]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나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이다.

[20] 고전 15: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다.

[21] 요 11:25–26. 예수께서는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

[22] 전 12:13. 사람의 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이다.

[23] 시 71:17–18. 시편 기자는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하나님의 능력을 다음 세대에 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24] 신 4:9; 시 78:4–7.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과 능력과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는 것은 언약 공동체의 교육 사명이다.

[25]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장 3항. 신격의 단일성 안에 동일한 본질과 능력과 영원성을 가진 삼위,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계신다.

[2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5장 1항. 하나님은 그의 지혜롭고 거룩한 섭리로 모든 피조물과 그 모든 행동을 보존하고 통치하신다.

[2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장 3항. 사람은 타락으로 행위언약에 의한 생명을 얻을 수 없게 되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은혜언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생명과 구원을 제공하셨다.

[28]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8장 1항.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목적 안에서 독생자 주 예수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로 택하고 세우셨다.

[2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2장 1항. 사람의 몸은 죽은 후 흙으로 돌아가나 영혼은 즉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의인의 영혼은 거룩함에 완전히 이르러 지극히 높은 하늘로 받아들여진다.

[30]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 대요리문답 제1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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