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부하신 제11장 원문을 기준으로 재개정했습니다. 원문은 노년기의 사회·문화생활을 복지생활·봉사생활·문화생활의 세 영역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제11장 노년기의 사회·문화생활
복지생활·봉사생활·문화생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장 33절
1. 문제 제기: 노년기의 공인생활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노년기의 사회·문화생활은 개인의 사적 생활을 넘어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공적 생활이다. 사람은 홀로 늙어 가지 않는다. 노인은 가정, 교회, 지역사회, 국가, 문화 질서 안에서 살아간다. 그러므로 기독교 노인학은 노년의 개인생활과 가정생활과 교회생활뿐 아니라, 사회와 문화 속에서 노인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다루어야 한다.
일반 사회는 노년기의 사회생활을 주로 복지, 여가, 문화 참여, 사회봉사, 노인권익, 의료와 돌봄 제도 등의 관점에서 다룬다. 이러한 접근은 필요하다. 노인성도의 현실적 삶은 사회 제도와 문화 환경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 노인학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노년기의 사회·문화생활을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노인성도는 사회 제도의 수혜자이면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공인으로서 세상 속에서 증언하는 자이다.
이때 노인성도가 증언하는 하나님은 막연한 종교적 대상이 아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언약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이시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알리셨고, 그 이름은 언약을 세우시고 지키시며 자기 백성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낸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서 ‘여호와’의 칭호는 구약의 역사적 명칭에만 머물러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여호와’의 칭호는 삼위일체 계시 안에서 충만히 해석되어야 할 언약적 이름이다. 곧 여호와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영원히 계시는 한 분 하나님이시며, 성부께서 창조와 섭리 가운데 세상을 보존하시고, 성자께서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며, 성령께서 성도의 삶 속에 그리스도의 은혜를 적용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증언자로 세우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기독교 노인학에서 노년기의 사회·문화생활은 크게 세 영역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복지생활이다. 이는 노인성도가 하나님의 돌보심을 사회적·교회적 돌봄 속에서 경험하고, 동시에 참된 복지가 하나님 나라의 통치 안에 있음을 고백하는 생활이다. 둘째는 봉사생활이다. 이는 노인성도가 자신의 남은 삶을 자기중심적으로 소비하지 않고, 은사에 따라 이웃과 교회를 섬기는 생활이다. 셋째는 문화생활이다. 이는 노인성도가 세속적 가치와 문화 속에서 분별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품위를 드러내는 생활이다.
이 세 영역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복지생활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배우는 자리이고, 봉사생활은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자리이며, 문화생활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가치관을 드러내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노년기의 사회·문화생활은 단순히 여가를 보내거나 사회적 고립을 줄이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며, 성령의 열매로 이웃을 섬기는 공적 신앙생활이다.
2. 노년기의 복지생활
1) 복지의 성경적 의미
복지라는 말은 흔히 사회정책, 소득보장, 의료지원, 주거안정, 돌봄서비스를 의미한다. 이러한 제도적 복지는 실제로 중요하다. 노년에는 경제적 소득이 줄어들고, 건강이 약해지며, 돌봄의 필요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는 노인의 기본 생활을 보호해야 하고, 교회도 노인성도의 현실적 필요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성경적 관점에서 복지는 단순한 제도적 편의나 물질적 안정만을 뜻하지 않는다. 참된 복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시고 보호하시는 데서 온다. 성경에서 복된 삶은 하나님과 분리된 풍요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사는 삶이다.[1] 그러므로 기독교 노인학에서 복지생활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와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땅은 단순한 지리적 공간이 아니었다. 그 땅은 여호와의 언약적 통치 아래서 살아가는 복된 삶의 자리였다.[2] 그러나 여기서 ‘여호와의 통치’는 삼위일체 계시 안에서 충만히 해석되어야 한다. 성부께서는 창조와 섭리로 자기 백성의 삶을 보존하시고, 성자께서는 참된 왕으로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성취하시며, 성령께서는 성도 안에 하나님 나라의 의와 평강과 희락을 맛보게 하신다. 그러므로 노인성도의 복지생활은 단순히 편안한 시설이나 충분한 재정을 확보하는 것을 넘어, 삼위일체 하나님의 돌보심과 교회의 사랑과 언약 공동체의 질서 안에서 살아가는 생활이다.
2) 복지정책의 필요와 한계
노년기의 복지정책은 필요하다. 소득보장, 의료보장, 주거보장, 돌봄서비스, 사회참여 기회는 노인의 존엄한 삶을 위해 중요하다. 교회도 이러한 현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신앙은 현실적 필요를 외면하는 관념이 아니다. 성경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가난한 자를 돌보라는 명령을 반복한다.[3] 약한 자를 돌보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중요한 책임이다.
그러나 복지정책은 한계를 가진다. 제도가 아무리 잘 마련되어도, 인간의 궁극적 불안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경제적 안정이 있어도 고독할 수 있고, 의료적 돌봄을 받아도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지 못할 수 있다. 또한 복지가 기능주의적 관점에 머물면, 노인을 수혜자나 관리 대상으로만 볼 위험이 있다.
기독교 노인학은 복지정책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하나님의 일반은총과 사회적 책임의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교회는 복지정책만으로 노인성도의 삶이 완성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노인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제도적 지원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노년을 해석할 수 있는 신앙의 기준이다.
그 기준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이다. 노인성도는 복지제도를 감사함으로 사용할 수 있으나, 자신의 궁극적 안전을 제도에 두지 않는다. 그는 성부의 섭리와 성자의 구속과 성령의 위로 안에서 자기 삶을 해석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복지생활은 제도의 필요를 인정하면서도, 제도를 넘어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언약적 돌보심을 바라보게 한다.
3) 교회의 복지생활: 돌봄과 존귀
교회의 노인복지는 단순한 행사나 위문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교회는 노인성도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 존귀하게 대해야 한다.[4] 식사 제공, 방문, 차량 지원, 병원 동행, 심방, 상담, 장례 돌봄은 모두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돌봄이 노인성도를 수동적 수혜자로만 만들면 안 된다.
교회의 복지생활은 돌봄과 존귀가 함께 가야 한다. 노인성도는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공인으로 세워져야 한다. 그가 받은 돌봄은 다시 감사와 기도와 권면과 찬송으로 공동체에 흘러갈 수 있다. 교회는 노인성도가 도움을 받는 가운데서도 자신의 신앙적 사명을 잃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
참된 교회 복지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서로를 돌보는 사랑의 질서이다. 바울은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한다고 말한다.[5] 노인성도의 복지생활은 바로 이 몸의 교제를 실제로 경험하는 자리이다.
이 교회의 돌봄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를 반영한다. 성부께서는 자기 백성을 가족으로 부르시고, 성자께서는 교회의 머리로서 약한 지체를 존귀하게 여기시며, 성령께서는 성도들 안에 사랑과 긍휼과 섬김의 마음을 일으키신다. 그러므로 교회의 복지생활은 단순한 복지 프로그램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이 교회 공동체 안에 나타나는 생활이다.
4) 복지생활의 영적 위험
복지생활에는 영적 위험도 있다. 첫째, 복지를 권리로만 이해하면 감사가 사라질 수 있다. 둘째, 복지를 의존의 구조로만 이해하면 사명이 약화될 수 있다. 셋째, 복지를 물질적 편안함으로만 이해하면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흐려질 수 있다. 넷째, 교회가 복지를 프로그램으로만 운영하면 말씀과 신앙 전승의 중심성이 약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노인성도는 복지를 받을 때에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교회의 돌봄과 사회의 제도적 지원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자신이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야 한다. 받는 자로만 머무르지 않고, 받은 은혜를 증언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복지생활의 영적 회복은 “누가 나를 얼마나 도와주는가”에서 “하나님께서 이 돌봄을 통해 무엇을 가르치시는가”로 질문을 바꾸는 데서 시작된다. 노인성도는 사회와 교회의 돌봄 속에서 성부의 섭리, 성자의 긍휼, 성령의 위로를 배우며,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흘려보내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
3. 노년기의 봉사생활
1) 봉사는 은혜 받은 자의 응답이다
노년기의 봉사생활은 자기 공로를 쌓기 위한 활동이 아니다. 봉사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응답이다. 성도는 선행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은 자로서 선한 일을 위해 지음 받았다.[6] 그러므로 노인성도의 봉사는 자기 의의 근거가 아니라 은혜의 열매이다.
노년에는 활동의 범위가 줄어들 수 있다. 그러나 봉사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봉사는 반드시 많은 일을 하거나 눈에 띄는 사역을 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노인성도는 기도, 권면, 위로, 상담, 환대, 격려, 찬송, 신앙 이야기, 세대 연결의 방식으로 봉사할 수 있다. 작은 섬김도 하나님 나라 안에서는 귀하다.[7]
봉사생활은 노인성도 자신에게도 유익하다. 봉사는 노년을 자기 연민과 고립에서 벗어나게 한다. 다른 사람을 섬길 때, 노인성도는 자신이 여전히 하나님 나라의 사명 안에 있음을 확인한다. 봉사는 노년의 삶을 수동적 생존에서 능동적 증언으로 바꾼다.
이 봉사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대한 응답이다. 성부께서는 성도를 선한 일을 위하여 부르시고, 성자께서는 섬기는 종으로 오셔서 자기 생명을 주셨으며,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은사와 사랑의 열매를 주셔서 이웃을 섬기게 하신다. 그러므로 노년의 봉사생활은 단순한 사회활동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는 생활 예배이다.
2) 봉사는 행복한 성도의 생활이다
참된 봉사는 억지로 하는 희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의 기쁜 응답이다. 행복하지 못한 성도는 오래 봉사하기 어렵다. 자기 의와 인정 욕구로 시작한 봉사는 쉽게 피로와 원망으로 변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성도는 감사로 섬긴다.
노인성도의 봉사생활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좇아 이루어져야 한다. 그는 “내가 아직 쓸모 있다”는 자기 증명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주셨으니, 나도 받은 은혜를 나누겠다”는 감사로 봉사한다. 이때 봉사는 자기 확인의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 찬송의 방식이 된다.
바울은 자신이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면서, 그 은혜가 헛되지 않아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그것도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8] 이것이 기독교 봉사의 핵심이다. 노인성도는 봉사하면서도 자신을 높이지 않고, 자신을 통해 일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높인다.
그러므로 노년의 봉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 고백은 삼위일체적으로 충만해야 한다. 성부께서 삶의 기회를 주셨고, 성자께서 섬김의 길을 열어 주셨으며, 성령께서 연약한 성도 안에서 사랑으로 일하게 하신다. 이 은혜를 알 때 노인성도는 봉사를 부담이 아니라 복된 참여로 받아들인다.
3) 봉사는 공로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봉사생활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공로주의이다. 사람은 선한 일을 하면서도 자기 의를 세우려는 유혹을 받는다. “내가 이렇게 섬겼다”, “내가 이 교회를 위해 얼마나 수고했는가”, “젊은 세대는 나만큼 헌신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봉사를 은혜의 열매가 아니라 자기 의의 근거로 바꾸어 버린다.
성경은 성도의 선행을 귀하게 여기지만, 그것을 구원의 근거로 삼지 않는다. 선행은 믿음의 열매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형제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다.[9] 그러므로 노인성도는 자신의 봉사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아야 한다. 봉사가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원망하지 않고, 작은 섬김이라도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믿음으로 감당해야 한다.
교회도 노인성도의 봉사를 공로주의로 부추기지 말아야 한다. 봉사를 많이 한 사람을 단순히 인간적 영웅으로 세우기보다, 그를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해야 한다. 봉사자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공로주의는 결국 하나님의 의를 흐리게 한다. 노인성도는 자기 봉사를 의의 근거로 삼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을 붙들어야 한다. 성부께서 은혜로 받으시고, 성자께서 의가 되시며, 성령께서 선한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사실을 고백할 때, 봉사는 자기 자랑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가 된다.
4) 봉사의 실제 영역
노년기의 봉사생활은 다양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첫째, 교회 안의 봉사이다. 예배 안내, 기도 모임, 새가족 돌봄, 환우 심방, 교회 역사 기록, 후배 직분자 격려, 주일학교 축복기도 등이 가능하다. 둘째, 가정 안의 봉사이다. 자녀와 손자녀를 위해 기도하고, 지혜롭게 권면하며, 가족 간 화해를 돕는 일이 있다. 셋째, 지역사회 안의 봉사이다.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고독한 노인을 방문하며, 지역 공동체 안에서 선한 이웃으로 사는 일이다.
봉사의 형태는 건강과 형편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비교하지 않는 것이다. 많이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몸으로 섬기고, 움직임이 제한된 사람은 기도로 섬기며, 말할 힘이 있는 사람은 권면으로 섬기고, 말이 줄어든 사람은 인내와 찬송으로 섬길 수 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와 형편 안에서 섬김을 받으신다.
노인성도의 봉사는 교회와 세상 사이에서 하나님 나라의 표지가 될 수 있다. 세상이 노년을 무능과 부담으로 볼 때, 노인성도는 기도와 위로와 지혜와 찬송으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드러낸다. 이것이 노년 봉사의 공적 의미이다.
4. 노년기의 문화생활
1) 문화생활은 소일거리를 넘어 가치관의 표현이다
노년기의 문화생활은 흔히 여가, 취미, 여행, 음악, 독서, 운동, 모임, 미디어 이용 등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문화생활은 노년의 삶에 활력을 줄 수 있다. 고립을 줄이고, 정서적 안정과 공동체적 관계를 돕는 긍정적 기능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 노인학은 문화생활을 단순한 소일거리로만 보지 않는다. 문화생활은 그 사람의 가치관을 드러낸다.
성도는 문화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 무엇을 즐기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말하고, 어떤 모임에 참여하며,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는 신앙과 무관하지 않다. 바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 말한다.[10] 그러므로 노인성도의 문화생활도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기준 아래 있어야 한다.
노년의 문화생활은 감사와 절제와 분별의 생활이어야 한다. 문화는 하나님께서 주신 창조 질서 안에서 인간에게 허락된 풍성한 삶의 표현일 수 있다. 그러나 타락한 세상 속의 문화는 죄의 욕망과 세속적 가치에 오염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문화를 무조건 거부하지도 않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도 않는다. 말씀 안에서 분별하며 누린다.
이 분별은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진다. 성부께서는 창조세계의 선한 질서를 주셨고, 성자께서는 타락한 세상 속에서 성도를 구속하여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삼으셨으며, 성령께서는 성도에게 지혜와 절제를 주셔서 문화 속에서도 거룩하게 살게 하신다. 그러므로 노년의 문화생활은 단순한 취미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생활 방식이다.
2) 세속적 노인문화의 위험
현대 사회의 노인문화는 여러 위험을 가진다. 첫째, 젊음 숭배이다. 노년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고, 젊어 보이는 것과 건강 유지 자체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문화가 있다. 둘째, 소비주의이다. 노년을 실버산업의 소비 대상으로 만들고, 경제력에 따라 노년의 가치를 평가한다. 셋째, 향락주의이다. 남은 인생을 자기 즐거움만을 위해 사용하라는 문화가 있다. 넷째, 체념주의이다. 노년을 아무 의미 없는 쇠퇴기로 여기며 무기력하게 만드는 문화가 있다.
노인성도는 이러한 문화에 무비판적으로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성도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한다.[11] 노년의 문화생활은 세상과 똑같이 늙어 가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시간을 사용하고 관계를 맺고 기쁨을 누리는 방식이어야 한다.
젊음은 우상이 될 수 없다. 건강도 우상이 될 수 없다. 여가와 여행과 취미도 최종 목적이 될 수 없다. 성도는 이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누릴 수 있으나, 그것들이 하나님보다 앞서게 해서는 안 된다. 노인성도의 문화생활은 그리스도의 자유 안에서 누리되, 하나님의 뜻 안에서 절제되어야 한다.
세속적 노인문화에 대한 대응은 단순한 보수적 거부가 아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참된 복과 기쁨을 삼위일체 계시 안에서 회복하는 일이다. 성부의 창조 질서를 감사로 누리고, 성자의 구속 안에서 세속적 욕망에서 자유하며, 성령의 열매 안에서 절제와 기쁨을 배우는 것이 기독교적 문화생활이다.
3) 거룩한 즐거움과 찬송의 문화
기독교 문화생활은 금욕적 우울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기쁨을 주시는 분이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을 감사함으로 누릴 수 있다. 음악, 문학, 자연, 대화, 여행, 배움, 예술은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을 누구의 영광을 위해 누리는가이다.
노인성도는 문화생활을 통해 하나님을 더 깊이 찬송할 수 있다. 자연을 보며 창조주를 찬양하고, 음악을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묵상하며, 독서를 통해 지혜를 얻고,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사랑을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문화생활은 단순한 오락을 넘어 거룩한 즐거움이 된다.
특히 찬송은 노년 문화생활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시편은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낸다고 노래한다.[12] 여기서 ‘여호와의 정직하심’은 자기 백성을 언약대로 붙드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다. 기독교 신앙은 이 신실하심을 성부의 변함없는 사랑, 성자의 완전한 구속, 성령의 지속적인 견인 안에서 찬송한다. 그러므로 노인성도의 찬송은 그의 삶 전체를 삼위일체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문화적 행위이다.
찬송은 노년의 기억을 은혜로 바꾸고, 고통을 소망으로 바꾸며, 개인의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방식이다. 노인성도가 찬송할 때, 그는 단순히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애를 하나님의 은혜로 해석하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증언한다.
4) 미디어와 언어생활의 분별
현대 노년기의 문화생활에서 미디어 이용은 매우 중요하다. 텔레비전, 스마트폰, 유튜브, 뉴스, SNS는 노인성도의 생각과 감정과 세계관에 큰 영향을 준다. 그러므로 노인성도는 미디어를 분별 없이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거짓 정보, 분노를 자극하는 콘텐츠, 세속적 욕망을 부추기는 문화, 신앙을 혼탁하게 하는 가르침을 경계해야 한다.
성도는 무엇이든 참되며, 경건하며, 옳으며, 정결하며, 사랑받을 만하며, 칭찬받을 만한 것을 생각해야 한다.[13] 미디어 사용도 이 기준 아래 있어야 한다. 노인성도는 자신의 마음을 지키고, 말과 공유의 책임을 가져야 한다.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퍼뜨리거나, 분노와 혐오의 언어를 반복하는 일은 신앙적 문화생활이 아니다.
언어생활도 문화생활의 중요한 부분이다. 노년의 말은 공동체에 큰 영향을 미친다. 감사의 말은 세대를 세우고, 원망의 말은 공동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 노인성도는 자신의 입술이 찬송과 권면과 축복의 도구가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14]
미디어와 언어생활의 분별은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온전히 이루어지기 어렵다. 성부께서는 진리의 기준을 말씀 안에 주셨고, 성자께서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말씀으로 오셨으며, 성령께서는 성도 안에서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입술을 거룩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노년의 언어와 미디어 사용은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서 훈련되어야 할 문화적 경건이다.
5. 세속적 기능주의 노인관에 대한 대응
1) 기능주의 노인관의 문제
현대 사회는 사람의 가치를 기능과 생산성으로 평가하기 쉽다. 얼마나 일할 수 있는가, 얼마나 벌 수 있는가, 얼마나 건강한가, 얼마나 독립적으로 살 수 있는가가 가치의 기준이 된다. 이러한 기준에서 노년은 쉽게 결핍과 부담의 시기로 평가된다. 이것이 세속적 기능주의 노인관이다.
기능주의 노인관은 노인의 존엄을 약화시킨다. 노인을 경제적 부담, 의료비 증가, 사회적 의존의 대상으로만 보면, 노인은 자기 존재를 부끄러워하거나 무가치하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가치를 기능에서 찾지 않는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고,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았다.[15]
노인성도는 세상의 기능주의 평가에 자신을 맡기지 말아야 한다. 그는 더 이상 많은 일을 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그의 존재는 여전히 존귀하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교회의 지체이며, 언약 전승의 증인이다.
이 존엄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 안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성부께서는 노인성도를 자기 형상으로 지으셨고, 성자께서는 그의 몸과 영혼을 피로 사셨으며, 성령께서는 그 안에 거하시며 끝까지 믿음과 소망을 붙드신다. 그러므로 노인성도의 가치는 기능이나 생산성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께 속한 존재라는 사실에서 나온다.
2) 대응적 가치관으로서의 기독교 노년생활
기독교 노인학은 적응적 가치관을 넘어 대응적 가치관을 제시한다. 적응적 가치관은 세상이 정한 기준에 맞추어 노년이 적응하도록 돕는 데 머문다. 반면 대응적 가치관은 세속적 기준 자체를 성경의 진리로 비판하고, 하나님 나라의 기준으로 노년을 새롭게 해석한다.
노인성도는 세상의 기준에 단순히 적응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세속적 가치에 대응하는 신앙의 전사이다. 세상이 젊음을 숭배할 때, 그는 백발이 의로운 길에서 얻은 영화의 면류관임을 증언한다.[16] 세상이 생산성을 절대화할 때, 그는 기도와 찬송과 권면의 가치를 증언한다. 세상이 죽음을 회피할 때, 그는 부활과 새 창조의 소망을 증언한다.
이것이 노년기의 사회·문화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신앙적 자세이다. 노인성도는 시대의 흐름에 끌려가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으로 시대를 분별하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드러내는 사람이다.
이 대응적 가치관은 여호와 하나님을 삼위일체 계시 안에서 아는 지식에서 나온다. 성부께서 세상을 섭리로 다스리시고, 성자께서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다스리시며, 성령께서 성도를 새롭게 하여 이 세대를 본받지 않게 하신다. 그러므로 노인성도는 사회와 문화 속에서 낙심하거나 동화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증언하는 공적 성도로 살아간다.
6. 제11장 요약
본 장은 노년기의 사회·문화생활을 복지생활, 봉사생활, 문화생활의 세 영역으로 살펴보았다. 복지생활은 단순한 제도적 지원을 넘어, 하나님의 돌보심과 교회의 사랑 안에서 노인성도가 존귀하게 세워지는 생활이다. 봉사생활은 자기 공로를 쌓는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성도가 감사로 이웃과 교회를 섬기는 생활이다. 문화생활은 소일거리나 오락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 나라 백성의 가치관을 드러내는 생활이다.
특히 본 장에서 중요한 수정점은 ‘여호와’의 칭호를 삼위일체 계시 안에서 충만히 해석하는 것이다. 구약에서 여호와는 자기 백성을 언약 아래 부르시고, 약속의 땅과 사회 질서와 문화생활 속에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이 이름을 구약적 명칭에만 머물러 이해하지 않는다. 여호와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영원히 계시는 한 분 하나님이시며, 성부의 창조와 섭리, 성자의 구속과 통치, 성령의 적용과 성화 안에서 자기 백성을 세상 속의 증인으로 세우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노인성도는 세속적 기능주의 노인관에 자신을 맡기지 않는다. 그는 생산성과 효율성으로 자기 가치를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 안의 부르심과 교회 공동체 안의 사명으로 자신을 이해한다. 그러므로 노년기의 사회·문화생활은 하나님 나라의 공인으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생활이다.
기독교 노년생활은 적응적 가치관을 넘어 대응적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노인성도는 세상이 만든 노년의 기준에 단순히 맞추어 사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으로 세속적 가치를 분별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증언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노년기의 사회·문화생활이 지향해야 할 신학적 방향이다.
각주
[1] 시 1:1–3; 시 32:1–2; 마 5:3–10. 성경에서 복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와 그의 통치 안에서 누리는 생명과 의와 평강을 포함한다.
[2] 신 8:7–18. 약속의 땅은 단순한 물질적 풍요의 공간이 아니라, 여호와를 기억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며 살아가야 할 언약적 삶의 자리이다.
[3] 신 10:18–19; 사 1:17; 약 1:27. 성경은 약한 자와 돌봄이 필요한 자를 돌보는 일을 하나님 백성의 중요한 책임으로 가르친다.
[4] 고전 12:12–27.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약하게 보이는 지체도 몸에 필요하다.
[5] 고전 12:26.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한다.
[6] 엡 2:8–10. 성도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다.
[7] 마 10:42. 주의 제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코 상을 잃지 않는다.
[8] 고전 15:10. 바울은 자신의 수고까지도 자신이 아니라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다.
[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6장 2항. 선행은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의 열매이며 증거이고, 성도는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형제에게 유익을 준다.
[10] 고전 10:31. 성도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한다.
[11] 롬 12:2. 성도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한다.
[12] 시 92:12–15. 의인은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낸다.
[13] 빌 4:8. 성도는 참되고 경건하고 옳고 정결하고 사랑받을 만하고 칭찬받을 만한 것을 생각해야 한다.
[14] 엡 4:29; 약 3:9–10. 성도의 말은 덕을 세우고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것이어야 한다.
[15] 창 1:26–28; 벧전 2:9–10.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성도는 택하신 족속과 거룩한 나라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부름 받았다.
[16] 잠 16:31. 백발은 의로운 길에서 얻을 때 영화의 면류관이다.
[1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장 3항. 신격의 단일성 안에 동일한 본질과 능력과 영원성을 가진 삼위,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계신다.
[18]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5장 1항. 하나님은 그의 지혜롭고 거룩한 섭리로 모든 피조물과 그 모든 행동을 보존하고 지도하고 통치하신다.
[1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6장 1–2항.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서로의 은사와 은혜에 참여하며, 사랑 안에서 서로의 유익을 위해 교제해야 한다.
[20]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35–136문. 제6계명은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정당한 노력과 이웃의 생명을 보호하는 책임을 요구하며, 생명을 해치는 태도와 행위를 금한다.
[21]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