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부하신 제12장 원문을 기준으로 재개정했습니다. 원문은 노년기의 경제생활을 경제활동·은퇴·재산관리·상속과 영원한 기업의 관점에서 정리하고 있습니다.
제12장 노년기의 경제생활
경제활동·은퇴·재산관리·상속과 영원한 기업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태복음 6장 21절
1. 문제 제기: 노년기의 경제생활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노년기의 경제생활은 매우 현실적인 문제이다. 은퇴 이후 소득이 줄어들고, 의료비와 생활비의 부담이 커지며, 재산관리와 상속 문제가 가족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또한 노년에도 경제활동을 계속해야 하는 사람이 있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도 재물에 대한 염려와 집착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노인학은 노년기의 경제생활을 피상적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기독교 노인학은 경제생활을 단순히 소득, 소비, 저축, 투자, 상속의 문제로만 보지 않는다. 경제생활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드러내는 중요한 생활 영역이다. 예수께서는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고 말씀하셨다.[1] 재물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을 드러내는 표지이다. 노년기의 경제생활은 한 성도가 평생 무엇을 의지해 왔고, 마지막에 무엇을 붙드는지를 보여준다.
노인성도는 경제생활을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의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 재물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청지기적 도구이지, 생명의 주인이 아니다. 경제활동은 자기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소명을 따라 이웃을 섬기는 통로이다. 은퇴는 사명의 종료가 아니라 사역 방식의 변화이다. 재산관리와 상속은 탐욕과 두려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청지기직을 마무리하고 후대에게 신앙적 가치를 전하는 일이다.
여기서 경제생활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막연한 종교적 대상이 아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언약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이시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알리셨고, 그 이름은 자기 백성을 창조하시고, 부르시고, 먹이시고, 기업을 주시며,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서 ‘여호와’의 칭호는 구약의 역사적 명칭에만 머물러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여호와’의 칭호는 삼위일체 계시 안에서 충만히 해석되어야 할 언약적 이름이다. 곧 여호와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영원히 계시는 한 분 하나님이시며, 성부께서 모든 소유의 근원이 되시고, 성자께서 자기 백성을 피로 사셔서 참 기업의 보증이 되시며, 성령께서 성도 안에 거하시며 기업의 보증으로 인치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노년기의 경제생활은 다음 네 가지 질문 앞에서 정리되어야 한다. 첫째, 노인성도는 경제활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둘째, 은퇴 이후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셋째, 재산관리는 청지기직의 관점에서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넷째, 상속과 유산정리는 영원한 기업의 소망 안에서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본 장은 이 질문들을 중심으로 노년기의 경제생활을 살펴보고자 한다.
2. 노년기의 경제활동
1) 경제활동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
경제활동은 인간의 생존과 사회생활에 필요한 활동이다. 일하고, 벌고, 쓰고, 나누고, 관리하는 모든 과정은 삶의 중요한 부분이다. 성경은 일을 저주 자체로 보지 않는다. 사람은 타락 이전에도 하나님께서 맡기신 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는 사명을 받았다.[2] 타락 이후 노동에는 수고와 고통이 더해졌지만, 일 자체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질서 안에 있다.[3]
노년기의 경제활동도 이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노인이 계속 일하는 것은 단순히 생계 때문만은 아니다. 때로는 경제적 필요 때문에 일하고, 때로는 건강과 사회적 관계를 위해 일하며, 때로는 자신의 은사와 경험을 사회와 교회에 나누기 위해 일한다. 중요한 것은 그 경제활동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이다.
노인성도는 경제활동을 자기 의존의 수단으로만 삼지 않아야 한다. 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기회를 사용하는 통로이다. 성도는 일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생명과 힘과 지혜를 주시는 분임을 인정해야 한다. 경제활동은 하나님을 잊게 하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범사를 섭리하시는 분임을 배우는 자리이다.
이 섭리의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성부께서는 창조와 섭리로 일의 질서를 세우시고, 성자께서는 참 사람으로 오셔서 이 땅의 노동과 수고의 현실 속에 들어오셨으며, 성령께서는 성도에게 지혜와 성실과 절제를 주셔서 일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섬기게 하신다. 그러므로 노년기의 경제활동은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는 생활이며, 이 여호와의 섭리는 삼위일체 계시 안에서 충만히 해석되어야 한다.
2) 정년은 인생의 종말이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정년은 경제활동과 사회적 역할의 큰 전환점이다. 많은 사람은 정년을 맞으며 상실감과 무력감을 경험한다. 직함과 직장과 수입과 사회적 관계가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년은 인생의 종말이 아니다. 성도에게 정년은 하나님 앞에서 사명의 방식이 바뀌는 시기이다.
노인성도는 현직에서 물러날 수 있으나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물러나지는 않는다. 직업적 지위는 끝날 수 있으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신분은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현직의 이해관계에서 물러난 노년은 더 객관적이고 공적인 시각으로 공동체를 섬길 수 있다. 젊은 시절에는 생계와 경쟁과 책임에 얽매여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기 쉬웠으나, 노년에는 더 넓은 관점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정년 이후의 삶은 준비되어야 한다. 손을 놓고 늙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경험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계획해야 한다. 노인성도는 자신의 시간과 건강과 재물과 지혜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기도해야 한다. 정년은 사역의 끝이 아니라, 성숙한 사역의 시작이 될 수 있다.
정년 이후에도 성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 있다. 성부께서는 성도의 남은 날도 섭리하시고, 성자께서는 성도를 자기 몸 된 교회의 지체로 계속 사용하시며, 성령께서는 새로운 방식의 섬김과 증언을 가능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정년은 직업적 기능의 종료일 수 있으나, 언약적 사명의 종료는 아니다.
3) 노년기의 일은 소명과 절제가 함께 가야 한다
노년기에 계속 일하는 것은 귀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일이 다 유익한 것은 아니다. 경제활동은 소명과 절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재물에 대한 집착으로 쉬어야 할 때 쉬지 못하고, 더 많이 소유하려는 욕망으로 일을 계속한다면, 그것은 신앙적 경제활동이 아니다. 반대로 일할 수 있는 은사와 기회가 있음에도 게으름과 무기력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바른 태도가 아니다.
성경은 게으름을 경계하고,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며, 궁핍한 자에게 나눌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4] 그러나 동시에 재물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5] 그러므로 노인성도는 노년기의 일을 하나님 앞에서 분별해야 한다. 일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방식이어야 한다. 재물 증식 자체가 삶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노년기의 일은 세 가지 기준으로 점검할 수 있다. 첫째, 이 일이 하나님 앞에서 감사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인가? 둘째, 이 일이 몸과 마음과 가정과 교회생활을 파괴하지 않는가? 셋째, 이 일이 이웃에게 유익을 주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조화를 이루는가? 이러한 기준이 있을 때 노인성도의 경제활동은 소명과 절제의 질서 안에 놓인다.
이 소명과 절제는 성령의 도우심 속에서 가능하다. 성부께서는 일의 경계를 세우시고, 성자께서는 자기희생적 섬김의 길을 보이시며, 성령께서는 탐욕을 절제하게 하고 감사로 일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노년기의 일은 단순한 소득 활동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서 감당하는 청지기적 순종이다.
4) 경제활동과 신령한 예배
바울은 성도에게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권면하며, 이것이 영적 예배라고 말한다.[6] 이 말씀은 노년기의 경제활동에도 적용된다. 성도의 경제생활은 예배와 분리되지 않는다. 일하고 벌고 쓰고 나누는 모든 일은 하나님 앞에서 드려져야 한다.
노인성도는 경제활동을 통하여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할 수 있다. 정직하게 일하고, 탐욕을 절제하며, 약한 자를 배려하고, 공정하게 거래하며, 받은 것을 감사함으로 나누는 생활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제문화이다. 반대로 부정직한 이익, 과도한 탐욕, 가족 간 재산 다툼, 돈을 통한 통제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어긋난다.
따라서 노년기의 경제활동은 신령한 예배의 한 영역이다. 노인성도는 자신의 경제생활을 하나님께 드리며,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고 주께로 돌아간다”는 고백 안에서 살아야 한다.[7]
이 예배적 경제생활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이다. 성부께 받은 것을 성자 안에서 감사로 사용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절제와 나눔으로 드리는 것이 성도의 경제적 예배이다. 그러므로 노인성도의 경제활동은 세속적 생존 전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의를 증언하는 생활 예배가 되어야 한다.
3. 은퇴와 청지기직
1) 은퇴는 사명 방식의 변화이다
은퇴는 일을 그만두는 사건이지만, 신앙적으로는 사명 방식의 변화이다. 직장과 직분과 공식적 역할은 끝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과 시간과 은사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므로 은퇴 이후의 삶은 공허하게 남겨진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 새롭게 드려야 할 시간이다.
은퇴 후 성도는 자신의 정체성을 직업에서 찾지 않아야 한다. 직업은 중요한 소명의 자리였지만, 성도의 궁극적 신분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직업을 잃었다고 자신을 잃는 것은 아니다. 성도는 은퇴 후에도 하나님의 백성이며, 교회의 지체이며, 가정과 사회 속에서 신앙을 증언하는 자이다.[8]
은퇴 이후의 시간은 지혜롭게 관리되어야 한다. 기도, 말씀, 건강관리, 가정 돌봄, 교회 봉사, 이웃 섬김, 다음 세대 권면, 신앙 기록 등은 은퇴 후 노인성도가 감당할 수 있는 중요한 사명이다. 은퇴는 무의미한 여가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더 깊이 정리되고 드려지는 시간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은퇴는 성부의 섭리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시간이며, 성자께서 맡기신 교회적 섬김의 방식이 변하는 때이고, 성령께서 성도 안에 더 깊은 기도와 증언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시간이다. 은퇴 이후의 삶도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시간이며, 이 여호와 하나님은 삼위일체 계시 안에서 충만히 고백되어야 한다.
2) 청지기직의 네 영역
노인성도의 청지기직은 네 영역에서 나타난다.
첫째, 시간의 청지기직이다. 노년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늘 맡기신 시간이다. 성도는 남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사용해야 한다.[9]
둘째, 몸의 청지기직이다. 노인성도는 건강을 우상화하지 않지만, 몸을 방치하지도 않는다. 몸은 하나님께 받은 것이므로 가능한 범위 안에서 돌보아야 한다.[10]
셋째, 재물의 청지기직이다. 재물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이다. 노인성도는 자신의 생활을 책임 있게 관리하고, 가족과 교회와 이웃을 위해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해야 한다.[11]
넷째, 경험의 청지기직이다. 노인성도의 경험은 사라질 개인 기억이 아니라 후대에게 전승할 신앙의 자료가 될 수 있다. 지나온 경제생활의 성공과 실패, 탐욕의 위험, 하나님의 공급하심, 나눔의 기쁨을 후대에게 말해 줄 수 있다.
이 네 영역의 청지기직은 모두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응답이다. 성부께서 시간과 몸과 재물과 경험을 맡기셨고, 성자께서 그 모든 삶을 자기 은혜 안에서 새롭게 하시며, 성령께서 그것들을 하나님 나라의 열매로 사용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청지기직은 단순한 자기관리 원리가 아니라, 언약의 하나님 앞에서 사는 성도의 생활 구조이다.
3) 은퇴 이후의 탐욕과 무기력을 경계해야 한다
은퇴 이후 노인성도가 경계해야 할 두 가지 위험이 있다. 하나는 탐욕이고, 다른 하나는 무기력이다. 탐욕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데도 재산증식에만 몰두하게 한다. 무기력은 하나님께서 아직 맡기신 사명이 있음에도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만든다. 두 태도 모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분별하지 못할 때 나타난다.
탐욕은 재물이 생명을 보장할 것이라는 착각에서 온다. 예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재물을 쌓아 두고도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가르치셨다.[12] 노인성도는 이 경고를 깊이 들어야 한다. 많은 재산이 죽음 앞에서 생명을 연장하지 못한다.
무기력 또한 신앙적 문제가 될 수 있다. 노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시기가 아니다. 비록 몸의 힘은 줄어도, 기도와 권면과 감사와 찬송의 사명은 남아 있다. 성도는 마지막까지 하나님 앞에서 깨어 있어야 한다.[13]
탐욕과 무기력은 모두 하나님을 잊을 때 생긴다. 탐욕은 재물을 하나님처럼 의지하는 것이고, 무기력은 하나님께서 아직 일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성부께서 성도의 남은 시간을 붙드시고, 성자께서 그의 삶을 자기 몸 된 교회 안에서 사용하시며, 성령께서 연약함 가운데서도 기도와 섬김의 능력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을 때, 노인성도는 탐욕과 무기력을 이기고 감사와 절제와 소망으로 살아갈 수 있다.
4. 노년기의 재산관리
1) 재산관리는 신앙의 문제이다
재산관리는 단순한 기술이나 법률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신앙의 문제이다. 재산을 어떻게 얻었고, 어떻게 사용하며, 어떻게 남길 것인가는 한 사람의 가치관을 드러낸다. 노년기의 재산관리는 평생의 경제생활을 하나님 앞에서 정리하는 중요한 일이다.
성경은 재물을 악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재물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마음을 강하게 경고한다.[14] 재물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선한 도구가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우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노인성도는 재산을 관리할 때 먼저 자신의 마음을 살펴야 한다.
노년기의 재산관리는 네 가지 원칙을 따라야 한다. 첫째, 감사의 원칙이다. 지금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해야 한다. 둘째, 절제의 원칙이다. 필요 이상의 탐욕과 과시를 경계해야 한다. 셋째, 책임의 원칙이다. 자신의 생활과 가족의 책임을 무질서하게 방치하지 않아야 한다. 넷째, 나눔의 원칙이다. 하나님께 받은 것을 교회와 이웃을 위해 선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원칙들은 단순한 생활 지혜가 아니다. 성부께서는 모든 소유의 근원이시고, 성자께서는 자기 백성을 값으로 사신 주인이시며, 성령께서는 성도의 마음을 새롭게 하셔서 감사와 절제와 책임과 나눔을 가능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재산관리는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청지기적 신앙 행위이다.
2) 빚과 의무의 정직한 정리
노년기의 재산관리는 권리만이 아니라 의무도 포함한다. 사람은 재산뿐 아니라 채무와 책임도 남길 수 있다. 그러므로 노인성도는 자신의 경제적 상태를 정직하게 정리해야 한다. 가족에게 알리지 않은 빚, 불분명한 보증, 정리되지 않은 재산관계, 불투명한 약속은 사후 가족 간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
성경은 성도의 경제생활에서 정직을 요구한다.[15] 노인성도는 재산을 감추거나 조작하거나 특정 자녀를 조종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재산관리는 사랑과 공의와 질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필요한 경우 법적 절차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명확하게 정리하는 것도 지혜로운 일이다.
경제적 의무를 정직하게 정리하는 일은 가족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유산 문제로 가족관계가 파괴되지 않도록 미리 준비하는 것은 노인성도의 책임 있는 신앙생활이다. 평생의 재산을 정리하는 마지막 과정에서도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해야 한다.
정직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다. 구약의 언약 질서에서 거짓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이었다. 이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는 삼위일체 계시 안에서 성부의 거룩하심, 성자의 진리 되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으로 충만히 이해된다. 그러므로 노인성도의 경제적 정직은 단지 사회적 신뢰의 문제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서 사는 거룩한 삶의 표현이다.
3) 재산은 가족을 통제하는 도구가 아니다
노년기의 재산관리에서 흔히 나타나는 위험은 재산을 가족 통제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다. 부모가 재산을 빌미로 자녀를 조종하거나, 자녀가 재산을 기대하며 부모를 대하는 관계는 모두 왜곡된 관계이다. 재물은 사랑을 대신할 수 없고, 신앙을 강제할 수도 없다.
성경적 부모는 재산으로 자녀를 지배하려 하지 않는다. 부모는 자녀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을 권면하고 축복해야 한다. 재산은 질서 있게 나눌 수 있지만, 그것이 부모의 권위나 자녀의 순종을 사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녀 역시 부모의 재산을 자신의 권리처럼 탐내지 말아야 한다. 탐심은 우상숭배이다.[16]
노인성도의 재산관리는 관계를 세우는 방향이어야 한다. 재산 때문에 형제가 다투고 가족이 분열된다면, 그것은 신앙적으로 큰 손실이다. 재산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도구일 뿐이며, 가족의 사랑과 신앙 전승보다 앞설 수 없다.
재산을 통한 통제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어긋난다. 성부께서는 자녀를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 자기 앞의 인격으로 세우시고, 성자께서는 강압이 아니라 자기희생의 사랑으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시며, 성령께서는 사랑과 자유와 절제 안에서 가정을 세우신다. 그러므로 노인성도는 재산으로 가족을 묶으려 하지 말고, 재산까지도 하나님께 맡기며 가족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와 책임을 배우도록 도와야 한다.
5. 상속과 유산정리
1) 유산은 마지막 가치관을 표현한다
유산정리는 노년기의 중요한 과제이다. 유산은 단순히 죽은 사람이 남긴 재산이 아니다. 신앙적으로 보면 유산정리는 평생 하나님께서 맡기신 재물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의 문제이며, 마지막 가치관을 표현하는 일이다. 무엇을 누구에게 어떻게 남길 것인가는 한 사람이 무엇을 귀히 여겼는지를 보여준다.
성경에는 상속과 기업의 주제가 중요하게 나타난다. 이스라엘의 땅은 단순한 사유재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신 기업이었다.[17] 또한 장자권과 기업의 문제는 가족 질서와 언약 전승과 깊이 연결되었다. 그러나 신약에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바라본다.[18] 그러므로 성도의 유산정리는 땅의 재산과 영원한 기업을 혼동하지 않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
노인성도는 자녀에게 재산만 남기지 말고, 신앙의 유산을 남겨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라”,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라”, “교회를 사랑하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는 유언이 재산보다 더 중요한 유산이다.
이 유산의 중심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한다. 노인성도는 후대에게 “여호와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고백은 성부의 섭리, 성자의 구속, 성령의 견인 안에서 충만히 해석되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유산정리는 단순한 재산 이전이 아니라, 언약적 하나님 지식의 전승이 된다.
2) 상속은 공의와 사랑 안에서 정리되어야 한다
상속 문제는 가족 갈등의 중요한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노인성도는 상속을 공의와 사랑 안에서 정리해야 한다. 공의는 불투명함과 편애와 속임을 피하게 하고, 사랑은 가족 간 화목과 책임을 고려하게 한다.
성경은 편애가 가정에 큰 갈등을 일으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삭과 리브가의 가정, 야곱의 가정은 편애와 경쟁이 가족 갈등을 낳은 대표적 사례이다.[19] 노인성도는 이러한 성경의 경고를 기억해야 한다. 상속은 자녀 간 경쟁과 원망을 조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가능한 한 질서 있고 평화롭게 이루어져야 한다.
상속을 정리할 때는 다음 원칙이 필요하다. 첫째, 명확성이다. 애매한 약속은 갈등을 낳는다. 둘째, 공정성이다. 각 자녀의 상황과 책임을 고려하되, 불필요한 편애를 피해야 한다. 셋째, 합법성이다. 법적 절차를 무시하면 가족에게 어려움을 남길 수 있다. 넷째, 신앙성이다. 상속의 목적은 가족을 재물에 묶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화목과 책임을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
공의와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성품의 반영이다. 성부께서는 공의와 사랑으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시고, 성자께서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함께 나타내셨으며, 성령께서는 성도 안에 화평과 절제와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그러므로 상속은 단순한 재산 분배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가정 안에서 배우고 드러내는 마지막 경제적 책임이다.
3) 유언은 신앙 고백이어야 한다
노인성도의 유언은 재산 분배 문서에 그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마지막 신앙 고백이 되어야 한다. 야곱은 죽기 전에 아들들을 불러 축복했고, 요셉은 죽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음으로 말하였다.[20] 히브리서는 요셉의 유언을 믿음의 행위로 해석한다.[21]
노인성도의 유언에는 다음 내용이 포함될 수 있다. 첫째, 하나님께 대한 감사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고백이다. 셋째, 가족에게 남기는 용서와 화목의 권면이다. 넷째, 교회와 신앙생활을 귀히 여기라는 부탁이다. 다섯째, 재산을 둘러싸고 다투지 말라는 당부이다. 여섯째, 부활과 영원한 기업에 대한 소망이다.
이러한 유언은 가족에게 깊은 신앙교육이 된다. 노인성도는 죽음 이후에도 자신의 마지막 말을 통해 후대에게 하나님을 경외하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유언은 노년기의 경제생활과 신앙생활이 만나는 중요한 자리이다.
유언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마지막 증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여호와의 이름은 삼위일체 계시 안에서 고백되어야 한다. 성부께서 평생을 섭리로 인도하셨고, 성자께서 죄인을 구속하여 영원한 기업을 열어 주셨으며, 성령께서 믿음과 소망을 끝까지 붙드셨다는 고백이 유언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유언은 죽음 앞의 정리가 아니라, 후대에게 남기는 복음의 증언이 된다.
6. 재물과 영원한 기업
1) 땅의 재물은 영원하지 않다
예수께서는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고 하셨다. 땅에서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기 때문이다.[22] 이 말씀은 노년기의 경제생활을 해석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노년에는 평생 모은 재산을 붙들고 싶어지는 마음이 강해질 수 있다. 그러나 성도는 땅의 재물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재물은 필요하지만 영원하지 않다. 재물은 생활을 돕지만 생명을 보장하지 못한다. 재물은 가족에게 유익을 줄 수 있지만 구원을 주지 못한다. 재물은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도구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대신하면 우상이 된다. 노인성도는 이 사실을 누구보다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땅의 재물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은 성도를 허무주의로 이끌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재물을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성부께서 주신 것은 감사로 받고, 성자 안에서 자유롭게 사용하며, 성령의 인도 안에서 나눔과 선행의 도구로 삼아야 한다. 재물은 주인이 아니라 도구이며, 성도의 마음은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향해야 한다.
2) 성도의 참 기업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성도의 참 기업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베드로는 성도가 거듭나 산 소망을 갖게 되었고,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되었다고 말한다.[23] 바울도 성도가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아 기업의 보증을 받았다고 말한다.[24] 그러므로 노인성도는 땅의 재산을 관리하되, 그것을 최종 기업으로 착각하지 않는다.
이 소망은 노년기의 재물관을 변화시킨다. 성도는 땅의 재물을 감사함으로 사용하지만, 그것에 매이지 않는다. 재물이 많아도 교만하지 않고, 적어도 절망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최종 안전이 재산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있음을 믿는다.
성도의 참 기업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 성부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영원한 기업을 약속하시고, 성자께서는 그 기업을 자기 피로 확보하시며, 성령께서는 성도의 기업의 보증으로 인치신다. 그러므로 노인성도는 경제적 많고 적음에 따라 자신의 가치를 판단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받은 영원한 기업을 바라본다.
3) 재물 사용은 하나님 나라의 증언이어야 한다
노인성도는 재물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증언할 수 있다. 정직한 재산관리, 검소한 생활, 지혜로운 나눔, 교회와 선교를 위한 헌신, 가족 간 화목을 위한 상속 정리, 가난한 이웃을 향한 긍휼은 모두 하나님 나라의 경제문화를 보여준다.
성도의 재물 사용은 마지막까지 예배적이어야 한다. 다윗은 성전 건축을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하면서도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라고 고백하였다.[25] 이것이 노인성도의 재물관이어야 한다. 가진 것은 모두 주께로부터 왔고, 마지막에는 모두 주께 돌아간다. 성도는 다만 맡은 동안 충성스럽게 관리할 뿐이다.
재물 사용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증언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 고백은 삼위일체적으로 충만해야 한다. 성부께 받은 것을 성자 안에서 감사로 사용하고, 성령의 인도 안에서 나누고 드리는 것이 성도의 경제생활이다. 그러므로 노인성도는 재물을 붙들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재물까지도 하나님께 맡기며 영원한 기업을 바라보는 청지기로 살아가야 한다.
7. 노년기 경제생활의 왜곡과 회복
1) 왜곡된 경제생활
노년기의 경제생활은 여러 방식으로 왜곡될 수 있다. 첫째, 탐욕이다. 필요 이상의 재산증식에 몰두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잃는 것이다. 둘째, 두려움이다.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의지하며, 미래 불안 때문에 감사와 나눔을 잃는 것이다. 셋째, 통제이다. 재산을 통해 가족을 지배하려는 것이다. 넷째, 무책임이다. 자신의 재산과 빚과 상속 문제를 정리하지 않아 가족에게 혼란을 남기는 것이다. 다섯째, 비교이다. 다른 사람의 재산과 생활 수준을 보며 원망하거나 교만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왜곡은 모두 재물을 하나님보다 앞세울 때 발생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26] 노인성도는 이 말씀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점검해야 한다.
왜곡된 경제생활은 여호와 하나님을 잊는 데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 여호와 하나님은 단순한 구약적 명칭으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성부께서는 모든 소유의 주인이시고, 성자께서는 성도의 참 의와 생명이시며, 성령께서는 성도의 탐욕과 두려움을 깨뜨리고 감사와 절제와 나눔을 가능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경제생활의 회복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마음을 돌이키는 데서 시작된다.
2) 회복된 경제생활
회복된 노년기 경제생활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생활이다. 노인성도는 경제활동을 소명 안에서 감당하고, 은퇴를 사명의 변화로 받아들이며, 재산을 청지기적으로 관리하고, 상속을 공의와 사랑 안에서 정리하며, 재물을 영원한 기업과 혼동하지 않는다.
회복된 경제생활은 감사와 절제와 나눔과 소망으로 나타난다. 감사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하게 한다. 절제는 탐욕을 막아 준다. 나눔은 재물을 하나님 나라의 도구로 사용하게 한다. 소망은 성도의 참 기업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붙들게 한다.
이러한 경제생활은 노인성도 자신뿐 아니라 가족과 교회와 사회에도 선한 증언이 된다. 그는 돈을 붙들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재물까지도 하나님께 맡기고 영원한 기업을 바라보는 성도로 선다.
회복된 경제생활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드러낸다. 성부께서는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고, 성자께서는 성도의 참 보물이 되시며, 성령께서는 마음을 새롭게 하셔서 재물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청지기로 살게 하신다. 이것이 노년기 경제생활의 성경적 회복이다.
8. 제12장 요약
본 장은 노년기의 경제생활을 경제활동, 은퇴와 청지기직, 재산관리, 상속과 유산정리, 재물과 영원한 기업의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노년기의 경제생활은 단순히 소득과 지출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마음의 방향을 드러내는 신앙생활의 중요한 영역이다.
특히 본 장에서 중요한 수정점은 ‘여호와’의 칭호를 삼위일체 계시 안에서 충만히 해석하는 것이다.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먹이시고 입히시며, 약속의 땅과 기업을 주시고, 언약 공동체의 경제 질서를 세우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이 이름을 구약적 명칭에만 머물러 이해하지 않는다. 여호와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영원히 계시는 한 분 하나님이시며, 성부의 창조와 섭리, 성자의 구속과 참 기업, 성령의 인치심과 견인 안에서 성도의 경제생활을 다스리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노인성도는 경제활동을 하나님의 섭리와 소명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정년은 인생의 종말이 아니라 사명 방식의 변화이다. 은퇴 이후에도 시간, 몸, 재물, 경험의 청지기직은 계속된다. 재산관리는 감사와 절제와 책임과 나눔의 원칙 아래 이루어져야 하며, 상속과 유산정리는 공의와 사랑과 신앙 고백 안에서 정리되어야 한다. 성도의 참 기업은 땅의 재물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이다.
그러므로 노년기의 경제생활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여호와로 인정하고 경외하는 신앙생활의 한 영역이다. 노인성도는 재물을 소유의 근거로 삼지 않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도구로 사용한다. 그는 경제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증언하며, 마지막까지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고 주께로 돌아간다”고 고백하는 청지기로 살아가야 한다.
각주
[1] 마 6:19–21. 예수께서는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시며,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2] 창 2:15. 하나님은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다.
[3] 창 3:17–19. 타락 이후 노동에는 수고와 땀이 더해졌으나, 일 자체가 폐기된 것은 아니다.
[4] 엡 4:28; 살후 3:10–12. 성도는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고, 궁핍한 자에게 나눌 수 있어야 한다.
[5] 딤전 6:6–10.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며,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
[6] 롬 12:1. 성도는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하며, 이것이 영적 예배이다.
[7] 대상 29:14. 다윗은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으므로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라고 고백하였다.
[8] 벧전 2:9–10. 성도는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다.
[9] 시 90:12; 엡 5:15–16. 성도는 자기 날 계수함을 배우고 세월을 아껴야 한다.
[10] 고전 6:19–20. 성도의 몸은 성령의 전이며, 하나님께 받은 것이므로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11] 눅 16:10–13. 작은 것에 충성하는 자가 큰 것에도 충성하며,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12] 눅 12:16–21.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재물을 쌓아 두고도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인생의 어리석음을 보여준다.
[13] 벧전 4:7–11.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므로 성도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며, 받은 은사대로 서로 봉사해야 한다.
[14] 딤전 6:17–19. 부한 자들은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며, 선한 일을 행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해야 한다.
[15] 잠 11:1; 롬 13:8. 거짓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며, 성도는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않아야 한다.
[16] 골 3:5. 탐심은 우상숭배이다.
[17] 민 26:52–56; 신 21:15–17. 이스라엘의 기업과 장자권은 가족 질서와 언약 공동체의 구조 속에서 이해되었다.
[18] 벧전 1:3–4. 성도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된다.
[19] 창 25–27장; 창 37장. 이삭과 리브가의 편애, 야곱의 요셉 편애는 가족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20] 창 49장; 창 50:24–26. 야곱과 요셉의 마지막 말은 단순한 가족 유언을 넘어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는 신앙 고백이었다.
[21] 히 11:22. 요셉은 믿음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떠날 것을 말하고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다.
[22] 마 6:19–20. 땅의 보물은 사라질 수 있으나, 하늘의 보물은 사라지지 않는다.
[23] 벧전 1:3–4. 성도의 참 기업은 그리스도 안에서 보존된 영원한 기업이다.
[24] 엡 1:13–14. 성령은 성도의 기업의 보증이 되신다.
[25] 대상 29:14–16. 다윗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받은 것임을 고백하였다.
[26]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며,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2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장 3항. 신격의 단일성 안에 동일한 본질과 능력과 영원성을 가진 삼위,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계신다.
[28]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5장 1항. 하나님은 그의 지혜롭고 거룩한 섭리로 모든 피조물과 그 모든 행동을 보존하고 지도하고 통치하신다.
[2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6장 2항. 선행은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의 열매이며 증거로서, 성도는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형제에게 유익을 준다.
[30]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6장 1–2항.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서로의 은사와 은혜에 참여하며, 사랑 안에서 서로의 유익을 위해 교제해야 한다.
[31]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41–142문. 제8계명은 정당한 방법으로 자신과 이웃의 재산을 보존하고 증진할 의무를 요구하며, 부당하게 재산을 해치는 행위를 금한다.
[32]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