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시작되려는지 공기가 묵직했던 오후였어요. 혼자 걷는 종로 거리는 유난히 소란스러웠지만, 조계사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마법처럼 세상의 소음이 잦아들더라고요. 사실 처음엔 박물관 전시라고 해서 조금 딱딱하진 않을까 걱정했거든요. 그런데 안내문을 읽는 순간 마음이 툭 내려앉았어요. "지옥의 끝까지 함께하는 동반자"라니, 요즘 부쩍 지쳐있던 저에게 꼭 필요한 말이었거든요.
불교중앙박물관의 어두운 전시실 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가장 먼저 저를 맞이해준 건 참당암의 석조지장보살좌상이었어요.
돌의 차가운 질감이 그대로 느껴지는데, 이상하게 그 모습이 참 따뜻하더라고요. 수백 년의 세월을 산바람 맞으며 견뎌온 보살님의 얼굴에서 '단단하게 버티는 힘'이 무엇인지 배운 기분이었어요. 화려하진 않지만 묵직하게 그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죠.
조금 더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니 공기부터가 달라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이번 전시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금동지장보살좌상들이 은은한 조명 아래서 빛나고 있었거든요.
이 보살님은 한때 도난당했다가 다시 돌아오신 사연이 있다고 해요. 그래서일까요? 잃어버렸던 소중한 것을 다시 찾았을 때의 그 안도감이 보살님의 미소에 서려 있는 것만 같았어요. "돌아갈 곳이 있다"는 말이 왜 그렇게 코끝을 찡하게 만들던지..
도솔암 내원궁에서 오신 보살님은 또 다른 분위기였어요. 가장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시던 분이라 그런지, 그 고요함의 깊이가 남다르더라고요.
전시실 내부의 낮은 온도와 적막함 때문이었을까요? 보살님 앞에 서 있으니 제 숨소리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들리는 것 같았어요. "잠시 멈추어 호흡하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복잡했던 머릿속을 맑게 비워주는 기분이었죠.
| 이토록 다채로운 표정의 성보들을 본 적 있나요? |
사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의외였던 부분은 보살님들의 엄숙함 뒤에 숨겨진 인간적인 모습들이었어요. 지옥 중생을 구제한다는 거창한 명분보다, 우리 곁에서 함께 울고 웃어줄 것 같은 친근한 조각상들이 정말 많았거든요.
한쪽에 나란히 모셔진 성보들은 마치 명절날 모인 대가족처럼 활기가 넘쳤어요. 각자 다른 손모양과 표정을 하고 있는데, 그 화려한 색채감이 어두운 전시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죠.
근엄한 표정의 문관상들도 있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각자의 직책에 따라 들고 있는 지물이나 옷의 문양이 다 다르더라고요. 마치 현대의 직장인들처럼 각자의 위치에서 묵묵히 책임을 다하는 모습 같아서 왠지 모를 동질감마저 느껴졌어요.
|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온 순간 |
지장보살님의 자비심이 너무 무겁게만 느껴질 때쯤, 저를 무장해제시킨 분들이 있었어요. 바로 나한상들이었는데요. 세상에, 불교 조각이 이렇게 유머러스할 수 있다니!
서로 장난을 치는 듯한 표정부터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웃음을 참는 모습까지, 보고 있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어요. "인생 별거 있니, 그냥 좀 웃고 살자"라고 말을 거는 것 같았거든요.
등이 가려운지 효자손 같은 것을 들고 계신 분도 있고, 품에 무언가를 소중히 안고 계신 분도 있었어요. 깨달음이라는 게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이런 소소한 일상 속에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당신이 짊어진 고통의 무게를 잠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십시오. 당신은 오직, 지금 이 순간 숨 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박물관을 나오기 직전, 인자한 표정의 노스님 같은 조각상을 보며 마음속으로 깊은 숨을 내뱉었습니다.
눈썹과 수염이 하얗게 샌 할아버지 같은 친근함. 그분이 건네는 소리 없는 위로가 전시장 밖으로 나가는 발걸음을 훨씬 가볍게 만들어주었죠.
마지막으로 마주한 단정한 모습의 수행자상까지 보고 나니, 도솔산 선운사의 맑은 기운을 온몸으로 듬뿍 받은 기분이 들었어요. 비록 서울 도심 한복판이었지만, 제 마음만큼은 잠시 구름 위에 누워 쉬다 온 것 같네요.
여름날의 열기 속에서 마음의 쉼표가 필요한 분들이라면 꼭 한 번 들러보세요. 7월 말까지라고 하니 시간이 그리 넉넉지는 않아요.
여러분은 요즘 어떤 고민을 짊어지고 계신가요? 선운사 보살님들께 그 짐을 아주 잠시만이라도 내려놓고 오시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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