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동양학 연구의 권위자인 정재서 교수(이화여대 명예교수)의 『동양학의 길을 걷다』(푸른사상). 한국 동양학의 정체성을 수립하기 위해 험로를 걸으며 학문의 길을 닦아온 석학이 바라본 세상사와 학문에 대한 사유를 담고 있다. 동양학의 다양한 단상이 담긴 이 책은 독자들에게 인문학적 소양을 넓혀준다. 2021년 11월 30일 간행.
■ 저자 소개
신화학자, 중문학자, 문학평론가. 현재 영산대 석좌교수,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중문과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미국의 하버드-옌칭 연구소와 일본의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에서 연구하였다. 계간 『상상』 『비평』 등의 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신화학, 도교학 등을 바탕으로 주변 문화론, 제3의 동양학, 제3의 신화학 등을 제창하고 동아시아 담론, 동아시아 상상력 등과 관련된 논의를 전개한 바 있다. 계명대 중문과 교수,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중국어문학회 회장, 비교문학회 회장, 인문콘텐츠학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산해경 역주』(1985) 『불사의 신화와 사상』(1994) 『동양적인 것의 슬픔』(1996) 『이야기 동양신화』(2004) 『한국 도교의 기원과 역사』(2006) 『사라진 신들과의 교신을 위하여』(2007) 『앙띠 오이디푸스의 신화학』(2010) 『제3의 동양학을 위하여』(2010) 『동아시아 상상력과 민족서사』(2014) 『산해경과 한국문화』(2019) 등 및 다수의 공저, 편저, 번역, 논문들이 있다. 상훈으로는 한국출판문화상 저작상(1994), 비교문학상(2008), 우호학술상(2008), 이화학술상(2015) 등을 수상한 바 있다.
■ 책머리에 중에서
나는 반세기 동안 동양학의 길을 걸어왔다. 조부께 보학(譜學)을 배우던 유년 시절까지 포함한다면 거의 평생을 동양학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은 셈인데 아직도 이 길은 끝나지 않았고 나의 발걸음도 계속될 것이다. 바야흐로 노자가 “학문을 하면 날이 갈수록 할 일이 많아지고 도를 닦으면 날이 갈수록 할 일이 없어진다(爲學日益, 爲道日損).”고 한 말을 실감하는 중이다. 이 책의 제목에서 학문 활동을 걷기에 비유한 것은 걷기야말로 실로 인간의 모든 행위 중에서 가장 사람다운 본질을 느끼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에서 영웅은 언제나 집을 떠나 길을 걷는다. 그들은 괴물을 퇴치하거나 보물을 얻기 위해, 또는 궁극적인 앎을 위해 험난한 지상의 길을 걸어갔다. 잘났거나 못났거나 우리의 일생은 각자 나름대로 이와 같은 신화 속 영웅의 행로와 크게 다르지 않다.
■ 추천의 글
정재서 교수의 말대로 학문 활동이란 ‘길을 걷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그리고 정 교수가 이제까지 걸어온 길은 말 그대로 “험난한 지상의 길”을 걷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동양학에서 인기 없던 험로”를 걸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걸어온 길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공기가 희박한 고산지대에 새로 난 길을 따라 걸을 때 느낄 수 있는 대기의 맑고 깨끗함과 주변 경관의 경이로움을 있는 그대로 체험케 한다. 이로써 우리는 누구나 걸어온 평탄하고 훤하게 뚫린 인간 세상의 대로에서는 결코 체험할 수 없는 신선함을 그의 학문 여정에서 감지하게 된다. 모름지기 진정한 의미에서의 학자라면, 정 교수와 같이 우리를 새로운 길로 인도할 수 있을 만큼의 학문적 모험심과 학자적 결기를 지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정 교수가 걸어온 학문의 길은 실로 값지고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정 교수의 이번 저서 동양학의 길을 걷다는 그가 동양학의 영역에서 고산지대에 해당하는 곳을 탐사하고 또한 길을 내는 과정에 언뜻 저 아래 인간 세상에 눈길을 주었을 때 그의 눈에 비친 세상사에 대한 사유를 담은 글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글들에서 우리는 동양학의 고봉에 머물면서도 현실에서 결코 마음의 눈을 떼지 않고 있는 정 교수의 인간적 면모까지 읽을 수 있거니와, 그 모든 글에서 확인되는 정 교수의 균형감각은 학자라면 누구나 배우고 본받아야 할 덕목일 것이다. 어떤 학문 영역의 길을 걷든 진지한 마음의 학자라면, 또한 동양학의 새로운 영역에 관심이 있는 일반 독자라면, 정 교수의 이번 저서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 장경렬(서울대학교 인문대 명예교수)
■ 책 속으로
중국문학의 정전(正典)이자 시가문학의 원조인 『시경(詩經)』이 고아한 클래식이 아니라 주로 당시의 유행가, 지금으로 말하면 트로트(혹은 뽕짝) 가사를 모아놓은 책이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시경』을 편집한 공자는 이 책을 안 읽으면 사람 구실을 못 할 것처럼 그 중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사람으로서 ‘트로트’를 배우지 않으면 그것은 마치 담을 맞대고 서 있는 것과 같으리라(人而不爲周南召南, 其猶正牆面而立也歟).”[『논어(論語)』 「양화(陽貨)」] 후대의 유학자들은 더 강하게 나갔다. “귀신과 천지를 감동시킴에 ‘트로트’만 한 것이 없다(感天地動鬼神, 莫近於詩).”[『모시(毛詩)·서(序)』] 대충 이렇게 의역해도 될 듯싶은데 젊을 때는 이 말이 잘 납득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7080세대의 대학문화는 이른바 ‘데칸쇼’(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에 심취하거나 팝송과 통기타 음악이 주류이었지 트로트는 저 멀리 있었다. 심지어 수준을 낮춰보는 경향까지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미자가 우리 음악을 몇십 년 후퇴시키고 있다”라고까지 극언하였다. 엘레지의 여왕에 대한 이러한 신성모독은 당시 대학생들이 우리 대중음악에 관해 얼마나 무식해서, 용감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