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배를 타고
“세월이 약이다”, “세월을 이기는 장사는 없다”는 말이 있다. 결국 모든 것은 시간 앞에 놓여 있다는 뜻일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만물은 시간의 함수다. 귀하게 여기는 생명조차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전제로 한다. 생명이
있든 없든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꽃은 피었다가 지고, 강물은 흘러가며, 산도 긴 세월 속에서는 조금씩 모습
을 바꾼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다. 그 유한함 때문에 삶은 더욱 소중해진다. 인간은 누구나 인간답게
살 권리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것이 천부인권이라는 말의 본뜻일 것이다. 과거에는 노예가 노예의 신분으로
태어나 평생 남을 위해 살다가 생을 마감해야 했던 시대도 있었다. 그러나 21세기 AI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에
도 우리는 여전히 금수저와 흙수저를 이야기하며 출발선의 차이를 따진다. 물론 현실의 격차는 존재한다. 그러나
시간 앞에서는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왕도, 재벌도, 노동자도, 학자도 모두 같은 배를 타고 같은 바다를 건너간다.
우리는 모두 ‘시간의 배’를 타고 항해하는 선원들이다. 그리고 각자에게는 보이지 않는 ETA가 주어져 있다. ETA,
즉 Estimated Time of Arrival. 목적지 도착 예정 시간이다. 물론 어느 배도 ETA를 정확히 맞추지는 못한다. 항해
중에는 수많은 변수가 생기기 때문이다. 잔잔하던 바다가 갑자기 거칠어지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태풍이 진로를
가로막기도 한다. 어떤 때는 피항을 해야 하고, 어떤 때는 파도와 정면으로 맞서 싸워야 한다.
인생이 항해에 자주 비유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선박이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선원들은 쉬지 않고 당직을 선다.
현재 위치를 확인하고, 계획된 침로를 벗어나지 않았는지 점검한다. 바람과 파도, 해류에 밀려 항로를 이탈하지 않았
는지 살피고, 다른 배와의 충돌 위험은 없는지 감시한다. 또한 기관을 정비하고 선체를 관리하여 배가 가장 효율적으
로 움직일 수 있도록 노력한다. 인간의 삶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매일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며 살아간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혹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점검한다.
젊은 시절에는 목적지만 바라보며 노를 저었다. 먹고사는 일이 가장 급했다. 가족을 돌보고 직장에서 맡은 일을 해내
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짧았다. 그래서 버킷리스트라는 말을 들어도 크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평생 꼭 해보고 싶은
일들을 적어 둔 목록이라지만, 내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살아내는 것 자체가 목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나의 ETA도 어느덧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남은 항해 거리를 어렴풋이 가늠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 늦기 전에 나만의 버킷리스트를 만들어 보기
로 했다. 거창한 성공이나 명예가 아니다. 오히려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아 있던 사람들을 찾아가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일이다.
문득 60여 년 전의 일이 떠오른다.
중학교 입학식 전날, 금산에 있는 외갓집에 갔다가 남문산역에서 막차를 놓친 적이 있었다. 어린 마음에 선로를 따라
뛰어보았지만 기차는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 당황하고 있던 나를 어느 늦은 밤 귀가하던 농부가 도와주었다. 그의 안내
로 진성 마을의 한 부잣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고, 다음 날 새벽 첫차를 타고 무사히 마산에 내려가 입학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 집에는 나보다 한 살 많은 손자가 있었다. 진주남중 1학년이던 그는 친구들과 함께 나를 끼워 주며 낯선 아이를 친절
하게 대해 주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 따뜻함이 고마웠다. 세월이 흘러도 그 기억만은 잊히지 않았다.
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지만 생활에 쫓기며 살아오느라 찾아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다 수소문 끝에 그의 소식
을 알게 되었다. 시골에서 면서기로 일하다가 몇 해 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한 번쯤 찾아가 고맙다는 말을 전했
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뒤늦은 아쉬움이 가슴을 스쳤다. 인생에서 가장 늦은 감사는 전하지 못한 감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찾아야 할 사람들이 있다.
그중에는 대학 시절 일본어를 공부하던 때 만났던 한 일본인 여성도 있다. 배를 타고 일본 다고노우라항에 입항했을 때
였다. 부두 근처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그녀와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름은 하루꼬였다. 낯선 외국 청년에게
친절을 베풀어 준 그녀는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주었고, 가족들과 함께 따뜻한 환대를 해주었다. 멀리 후지산까지 함께
구경하며 잊지 못할 하루를 보냈다.
그날의 후지산은 유난히 맑았다. 산은 그대로였지만 그날의 청춘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갔다. 만약 하루꼬가 아직 살아
있다면 이제 일흔 대여섯쯤 되었을 것이다. 세월은 우리 모두를 늙게 만들었지만, 사람의 마음속에 남은 고마움까지
지워 버리지는 못했다.
나는 이제 남은 항해 동안 해야 할 일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일이 아니다. 더 높은 곳에 오르는 일도 아니다. 나의 삶에 작은 등불이 되어 주었던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일이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
하는 일이다.
우리는 모두 시간의 배를 타고 항해한다. 언젠가 각자의 ETA에 도착할 것이다. 그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목적지에 닿기 전에 꼭 해야 할 일들이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 그것은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일이다.
남은 항해가 길지 않더라도 괜찮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고, 한마디라도 더 전할 수 있다면 그 항해는 충분히 의미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입항의 순간, 나는 조용히 말하고 싶다.
“고맙습니다. 여러분 덕분에 제 인생의 항해는 행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