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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운동장

작성자남청도|작성시간26.06.07|조회수25 목록 댓글 0

 

운동장

 

어릴 적 우리에게는 변변한 놀이터가 없었다. 지금처럼 아파트 단지마다 놀이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동네마다

체육공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이야말로 우리들의 운동장이었다. 황금빛 벼를 베어낸 들판

에는 짚단이 여기저기 쌓여 있었고, 우리는 그 짚을 엮어 공을 만들어 차며 하루해가 짧은 줄도 모르고 뛰어다녔다.

흙먼지가 일어도 좋았고, 신발이 해져도 상관없었다. 그 시절 아이들에게는 웃음소리만 있으면 어디든 운동장이

될 수 있었다.

국민학교에 입학하면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운동장을 만났다. 넓고 평평한 흙바닥은 어린 마음에도 신기한 세상

이었다. 마음껏 달릴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운동장은 공부를 하는 교실 못지않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는 곳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법을 배우고, 이기고 지는 법을 배우고, 서로를 배려하는 법도

배웠다.

 

가을이 되면 운동장은 가장 화려한 모습으로 변했다. 만국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전교생과 학부형들이 한자리에
모여 운동회를 열었다. 청군과 백군으로 나뉘어 목청껏 응원가를 부르고, 달리기와 릴레이 경주에 온 힘을 쏟았다.

기마전에서는 승리를 위해 서로의 모자를 빼앗으려 안간힘을 썼고, 긴 장대 끝에 매달린 보물상자를 향해 오쟁이를

던지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날만큼은 아이도 어른도 모두 운동장의 주인공이었다.

월요일 아침 조회 시간도 운동장의 중요한 풍경이었다. 전교생이 줄을 맞춰 서서 교장선생님의 훈화를 들었다. 때로

는 손을 앞으로 내밀어 위생검사를 받기도 했다. 손등과 손톱 밑에 검은 때가 끼어 있으면 담임선생님은 아이들을

데리고 시냇가로 향했다. 겨울이면 얼음을 깨고 찬물에 손을 담근 채 조약돌로 손등을 박박 문질러 때를 벗겼다.

손은 얼어붙을 만큼 시렸지만, 그것 또한 학교 운동장과 함께 떠오르는 추억의 한 장면이다.

 

세월은 흘러 학교를 졸업했고, 운동장과도 자연스레 멀어졌다. 먹고사는 일이 우선이 되면서 운동장에 설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어린 시절의 운동장이 자꾸만 생각난다. 그곳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공간이었다.

출발선은 같았고, 달리기 시합에서는 누구나 같은 거리를 뛰었다. 부잣집 아들이든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든 운동장

에서는 모두 같은 학생이었다.

하지만 사회에 나와 보니 세상은 학교 운동장과 달랐다. 평평한 운동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누군가는 태어날 때부터

넓고 단단한 길 위에 서 있었고, 누군가는 비탈진 언덕 아래에서 출발해야 했다.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금수저와 흙수

저라는 말도 결국 그런 현실을 표현한 것일 것이다.

 

나 역시 두메산골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상 물정을 알 겨를도 없이 자랐고, 학교를 마치자마자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 그래서 월급을 조금이라도 더 주는 직업을 찾아 바다로 나가 배를 타게 되었다. 반면 어떤 친구는

어머니가 도시의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다. 어릴 적부터 아들의 진로를 고민하며 공부를 시켰고, 마침내 명문대 법대

를 졸업하여 판사와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물론 사람의 인생을 단순히 비교할 수는 없다. 누구에게나 나름의 어려움과 노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발선이

같지 않다는 사실만은 부인하기 어렵다. 어린 시절 운동장의 출발선은 반듯하게 그어져 있었지만, 사회라는 운동장

은 처음부터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아래로 미끄러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애쓰고,

조금이라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노력한다. 개인의 삶이 그렇고 기업의 경쟁이 그렇다. 나라의 운명도

마찬가지다. 세계는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 움직이고 있으며, 잠시 방심하는 사이에도 순위는 바뀐다.

그래서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훌륭한 지도자는 국민이 출신과 재산, 지역과 환경 때문에 지나치게 불리한

위치에 놓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누구나 노력한 만큼 꿈을 펼칠 수 있도록 운동장을 가능한 한 평평하게 만드는

것이 국가의 책무일 것이다. 또한 세계라는 거대한 운동장에서는 나라 전체가 뒤처지지 않도록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교육과 산업, 과학기술과 문화의 경쟁력을 키워 선진국 대열에서 밀려나지 않도록 이끌어야 한다.

 

가끔은 어린 시절 학교 운동장이 그립다. 그곳에는 승패가 있었지만 원망은 없었고, 경쟁이 있었지만 미움은 없었다.

모두가 같은 흙바닥 위에서 넘어지고 일어나며 함께 자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운동장은 단순히 뛰어노는 장소가

아니라 세상을 배우는 교실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꿈꾸는 사회도 그런 운동장이어야 하지 않을까. 누구나 마음껏 달릴 수 있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기회를 얻으며, 출발선의 차이가 너무 크지 않은 세상. 가을 하늘 아래 만국기가 펄럭이던 그 평평한 운동장처럼 말

이다. 어린 시절의 운동장은 사라졌지만, 그 운동장이 가르쳐 준 공정함과 희망의 가치는 지금도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기억을 품고, 조금 더 평평한 세상을 향해 오늘도 걸어가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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