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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의 변명

작성자남청도|작성시간26.06.12|조회수17 목록 댓글 0

 

털의 변명

 

아침에 거울을 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사람들은 털을 참 이상하게 대한다. 머리카락은 한 올만 빠져도 걱정하면서,

다른 곳의 털은 보이는 족족 뽑고 깎고 밀어 버린다. 마치 같은 털이면서도 신분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만약 우리 몸의 털들이 한자리에 모여 회의를 한다면 어떨까?

먼저 머리털이 의자에 앉아 점잖게 입을 열 것이다.

“나는 햇볕도 막고 추위도 막고 머리를 보호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다.”

그러면 눈썹이 얼른 나설 것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땀이 눈으로 흘러들지 못하게 막아 주는 건 바로 나라고.”

곁에 있던 속눈썹도 질세라 한마디 거들 것이다.

“먼지나 벌레가 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지키는 건 나야. 나는 눈의 경비원이지.”

 

그러자 콧털이 코웃음을 친다.

“다들 너무 잘난 척하는군. 공기 중의 먼지와 이물질을 걸러 내는 필터가 누구인데? 내가 하루만 휴가를 가도 난리가 날걸.”

그 말을 듣고 귀털도 슬며시 손을 든다.

“나도 있어. 귀 안으로 들어오는 먼지와 작은 이물질을 막아 주는 건 나란 말이야.”

회의장 한쪽에서는 수염이 괜히 턱을 쓰다듬으며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예로부터 나는 지혜와 권위의 상징이었다. 왕도, 장군도, 학자도 나를 길렀지.”

그러면 젊은 털들이 킥킥 웃으며 말한다.

“요즘은 면도기 광고 모델들이 더 인기인데요?”

수염은 괜히 헛기침만 할 것이다.

 

사실 우리 몸의 털은 생각보다 바쁘다. 털은 단순히 장식품이 아니다. 피부 위에 작은 감시탑처럼 서서 바람이 스치는 것,

벌레가 기어가는 것, 무언가 살짝 닿는 것을 가장 먼저 알려 준다. 피부 속 신경과 연결되어 있어 작은 움직임도 감지한다.

밤길을 걷다가 모기가 팔에 앉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도, 갑자기 소름이 돋는 것도 털과 피부가 함께 보내는 신호 덕분

이다.

가슴털과 겨드랑이털도 억울한 사정이 있다. 사람들은 보기 싫다고 하지만, 이들은 피부와 피부가 맞닿을 때 생기는 마찰

을 줄여 주고 땀이 흐르는 길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일하는 직원들인 셈이다.

문득 발바닥을 내려다본다. 다른 포유동물과 달리 우리는 발바닥에 털이 거의 없다. 아마 오래전 두 발로 걷고 뛰며 살아

가는 동안, 마찰과 압력을 견디기 위해 두꺼운 피부가 털의 자리를 대신했을지도 모른다. 정확한 이유는 과학자들에게 맡겨

두더라도, 수백만 년 동안 진화가 우리 몸을 얼마나 세심하게 다듬어 왔는지는 짐작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털은 참 성실한 존재다. 평생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제자리에서 자기 일을 한다. 칭찬도 받지 못하고, 때로는 귀찮은

존재 취급까지 받는다. 그래도 햇볕을 막고, 먼지를 걸러 주고, 추위를 견디게 하며, 위험을 가장 먼저 알려 준다.

그래서 가끔은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다가 이렇게 말해 주고 싶다.

“고맙다. 너희들이 있어서 내가 오늘도 무사하구나.”

물론 그 말을 들은 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바람이 스칠 때마다 살짝 흔들리며, 여전히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

히 임무를 수행할 뿐이다. 사람의 몸에서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부지런한 수호자, 바로 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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