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솔레미오
오늘 새벽, 평소보다 조금 일찍 눈이 떠졌다. 시계를 보니 새벽 세 시 반. 다시 누워 잠을 청해볼까 생각했지만 이미
다섯 시간 반이나 잔 터라 더 이상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이불을 정리하고 조용히 서재로 들어갔다.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 뉴스를 훑어보며 하루를 시작했다.
요즘은 건강을 위해 두어 시간마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는 것이 몸에 좋지 않다고 하니, 거실
과 방안을 천천히 걸으며 몸을 푼다. 그날도 습관처럼 거실을 걷다가 무심코 베란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눈앞이 환해졌다.
마치 누군가 거대한 탐조등으로 집 안을 비추는 것처럼 휘황찬란한 광채가 거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우리 집은
남서향이다. 처음에는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저 멀리 수영강변의 고층 아파트 유리창에 막
떠오른 태양이 반사되어 우리 집까지 빛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찬란한 빛을 바라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입에서 한마디가 터져 나왔다.
“오! 솔레미오!”
태양이여, 나의 태양이여.
그 한마디는 순식간에 나를 수십 년 전으로 데려갔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당시 교과과정에는 음악 시간이 있었다. 아마 학교에서 받은 마지막 정규 음악교육이었을 것이다.
김재수 음악 선생님은 음악 교과서 외에 『세계명가곡집』이라는 책을 따로 사게 하셨다. 그리고는 수업 시간마다 세계
의 명곡들을 가르치셨다.
선생님은 늘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훗날 사회에 나가 중요한 위치에 오르게 되더라도 명곡 한두 곡쯤은 부를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말씀은 어린 학생들에게는 다소 낯설게 들렸지만, 지금 생각하면 단순히 노래를 가르치신 것이 아니었다. 음악을 통해
더 넓은 세상과 더 높은 꿈을 보여주려 하셨던 것이다.
그때 배운 노래 가운데 가장 또렷하게 기억나는 곡이 바로 ‘오 솔레미오’였다. 원어 가사도 배우고 우리말 번역도 배웠다.
‘돌아오라 쏘렌토로’ 같은 노래도 함께 익혔다. 음악 시간이 일주일에 한두 시간뿐이어서 많은 곡을 배우지는 못했지만,
세월이 반세기 넘게 흐른 지금도 몇 구절은 입안에서 자연스럽게 맴돈다.
의미도 정확히 모른 채 외웠던 이탈리아어 가락이 아직도 기억나는 것을 보면, 젊은 시절의 배움은 참으로 신기한 힘을
가진 모양이다.
김재수 선생님만이 아니었다. 김일성대학 출신의 박용길 선생님, 훗날 『정통영어』를 집필하신 송성문 선생님을 비롯
하여 훌륭한 스승들이 학교에 많이 계셨다. 그분들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교사가 아니라 학생들의 가슴속에 꿈의
씨앗을 심어주는 분들이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가난한 시대를 살았지만, 사람을 키우려는 열정만큼은 결코 가난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그 빛을 바라보고 있는데, 눈부시던 광채는 생각보다 빨리 사라졌다. 태양의 각도가 조금 바뀌자 유리창의 반사
도 함께 사라져 버린 것이다. 불과 몇 분 전까지 거실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던 장관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평범한 아침
풍경만 남았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인생도 어쩌면 저 아침 햇살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젊음의 시절에는 영원할 것 같던 시간도 어느새 지나가고,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과 존경하던 선생님들도 기억 속으로 멀어져
간다. 눈부시게 빛나던 순간들은 잠시 우리를 비추었다가 조용히 사라진다.
그러나 사라진다고 해서 없어진 것은 아니다.
아침 햇살이 사라진 뒤에도 그 따뜻함이 한동안 창가에 남아 있듯이, 젊은 날의 노래와 스승들의 가르침도 우리 마음속 어딘가
에 오래도록 남아 삶을 비추고 있다.
새벽의 짧은 광채가 지나간 거실에 서서 나는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노래를 불러 보았다.
“오 솔레미오, 스탄프론테 떼아떼...”
그리고 생각했다.
인생은 짧을지라도, 한때 우리를 비추었던 빛의 기억은 생각보다 오래 남는다고. 마치 저 멀리 반사된 아침 햇살처럼, 어느 날
문득 찾아와 지나온 세월 전체를 황금빛으로 물들여 주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