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윈도 속의 물건들, 그리고 마음의 고향
시내 번화가를 걷다 보면 발길을 멈추게 하는 것이 있다. 화려한 간판도 아니고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리도 아니다.
바로 상점의 쇼윈도다. 유리창 너머에는 그 시대의 최신 유행과 최상의 상품들이 가장 빛나는 모습으로 진열되어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바라보며 눈을 즐겁게 하고, 때로는 언젠가 갖게 될 꿈을 품기도 한다. 그 물건들은 당장
팔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마음을 흔들기 위한 존재들이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비로소 할인
된 가격으로 주인을 찾아가지만, 그 전까지는 일종의 전시품으로 살아간다.
우리 집에도 그런 쇼윈도 속 물건 같은 것들이 있다. 다만 최신형 가전제품이나 값비싼 명품이 아니라, 세월의 먼지
를 뒤집어쓴 오래된 물건들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쓸모없는 잡동사니일지 모르지만, 내게는 돈으로 값을 매길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의 전시품들이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할머니가 쓰시던 다듬이돌과 다듬방망이다. 어린 시절 어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예전에는 집집마다 목화를 심고 베를 짜며 살았다. 할머니와 고모들은 밤낮없이 길쌈을 하여 푼푼이 모은 돈으로 논
한 마지기, 두 마지기를 장만했다고 한다. 베를 짜고 빨래를 한 뒤에는 다듬이돌 위에 천을 올려놓고 다듬방망이로
두드리며 손질했다. 그 두드리는 소리는 가난한 시절의 삶을 견디게 해 주던 생활의 음악이었을 것이다.
지금 그 다듬이돌은 아무 쓸모가 없다. 현대식 세탁기와 다리미가 있는 세상에서 그것은 이미 역할을 끝낸 물건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버리지 못한다. 거기에는 할머니의 손때가 남아 있고, 가족을 위해 평생을 바친 한 여인의 땀과
애환이 스며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베란다 한쪽에서 묵묵히 세월을 지키고 있다.
두 번째는 수석 한 점이다. 삼십여 년 전, 당시 밀양대학교에 근무하던 지인에게 선물로 받은 것이다. 나는 수석에
특별한 취미가 없지만, 넓적한 돌 표면에 자연이 그려놓은 무늬는 참으로 신기하다. 안개 낀 산봉우리와 계곡, 그리고
멀리 흐르는 강이 담긴 진경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 돌은 더욱 깊은 풍경을 품어내는 것 같다.
세 번째는 아프리카 케냐의 몸바사 항구에서 사 온 목조각이다. 상반신 여성상을 조각한 기념품인데, 실습선을 타고
입항했을 때 구입했다. 오랜 세월 동안 집안에 놓여 있으면서 학생들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학생들은 신기하다는 듯
조각상의 젖꼭지를 만지곤 했고, 그 덕분에 양쪽 부분만 유난히 반들반들 윤이 난다. 지금 보면 웃음이 나지만, 그 흔적
마저도 지나간 시간의 장난스러운 기록이다.
네 번째는 칠레에서 사 온 옥으로 만든 물고기 한 쌍이다. 하나는 머리에 길고 뾰족한 뿔이 달려 마치 상상의 동물인
일각수 같고, 다른 하나는 살아서 바다를 헤엄치는 듯한 상어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 물고기들을 바라보면 태평양을
가르며 항해하던 젊은 날의 바람 냄새와 파도 소리가 되살아난다.
다섯 번째는 런던 공항에서 구입한 왕궁 경호병 인형이다. 검은 깃털 모자를 쓴 작은 인형이지만, 내게는 특별한 의미
가 있다. 해군에서 제대한 뒤 처음으로 민간 상선을 타기 위해 떠나던 길에 산 기념품이기 때문이다. 그 시절 나는 새로운
직장을 찾아 나서는 초심자였다. 미래에 대한 기대도 있었지만, 낯선 세상으로 나아가는 두려움도 컸다. 지금도 그 인형
을 바라보면 설렘과 불안이 뒤섞여 있던 그날의 공항 풍경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이 밖에도 처음 테니스를 배울 때 사용하던 낡은 우드 라켓이 있다. 지금의 탄소섬유 라켓에 비하면 무겁고 투박하지만,
그 라켓에는 땀 흘리며 공을 쫓던 중년의 열정이 남아 있다.
사람들은 흔히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습관을 두고 미련하다고 말한다. 아마도 보릿고개를 겪으며 자란 세대에게는 무엇
하나 함부로 버릴 수 없는 마음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내 경우에는 조금 다르다. 내가 버리지 못하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시간이다. 다듬이돌에는 할머니의 삶이, 수석에는 우정이, 목조각에는 젊은 항해의 추억이,
옥 물고기에는 바다의 기억이, 경호병 인형에는 초심의 떨림이 담겨 있다.
쇼윈도 속 물건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진열되지만, 우리 집의 오래된 물건들은 내 마음을 붙잡아 두기 위해 남아
있다. 그것들은 더 이상 쓸모 있는 물건이 아니지만, 세월이 만들어 놓은 기억의 전시품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그 앞을
지나며 눈길을 준다. 마치 번화가의 쇼윈도를 구경하듯.
그리고 그 순간, 오래된 물건들은 조용히 말한다.
"네가 걸어온 길이 바로 여기 있다."
어쩌면 그것들이야말로 내가 평생 간직해 온 가장 소중한 마음의 고향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