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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작성자남청도|작성시간26.06.15|조회수32 목록 댓글 0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우리 속담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말이 있다. 가장 미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라도 함부로 괴롭히면 반응을

보인다는 뜻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속담 속의 지렁이는 단순히 약한 생물의 상징만은 아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하찮아 보여도 사실은 땅을 살리고 생태계를 떠받치는 숨은 일꾼이다.

어릴 적 내가 살던 시골에서는 뜨거운 물을 함부로 마당에 버리지 않았다. 아궁이에서 갓 끓인 물을 사용한 뒤에는

한참 식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버렸다. 어른들은 "땅속에 사는 벌레들이 데인다"고 말씀하셨다. 그때는 그런가 보다

하고 들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놀라운 생명 존중의 정신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작은 생물들까지 생각하며

살아온 것이다.

 

비가 오는 날이면 나에게는 또 다른 관심사가 있었다. 바로 낚시였다. 낚시를 가려면 미끼가 필요했는데,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지렁이였다. 나는 비가 오거나 비가 갠 뒤 초가집 추녀 밑의 흙을 파곤 했다. 신기하게도 그곳에는

유난히 지렁이가 많았다. 어린 마음에는 그 이유를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나름의 과학이 숨어 있었다. 초가지붕을

타고 흐르는 빗물에는 낙엽과 먼지, 유기물이 섞여 있었고 그것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지렁이들의 좋은 먹이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잡은 지렁이를 낚싯바늘에 꿰어 붕어와 피라미를 낚았다. 그때는 지렁이가 단지 물고기를 잡기 위한 미끼에

불과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알고 보니 지렁이는 단순한 벌레가 아니라 토양 생태계를 유지하는

중요한 존재였다.

 

지렁이는 흙 속을 기어 다니며 수많은 굴을 만든다. 그 굴은 공기가 통하는 통로가 되고 빗물이 스며드는 길이 된다. 덕분

에 식물의 뿌리는 더 깊이 자랄 수 있다. 또한 낙엽과 각종 유기물을 먹고 소화한 뒤 영양분이 풍부한 분변토를 배출하여

땅을 비옥하게 만든다. 토양 속 미생물들의 활동도 활발하게 해 준다. 그래서 농부들은 예부터 "지렁이가 많은 땅은 좋은

땅"이라고 말했다. 현대 생태학에서는 지렁이를 아예 '생태계 공학자'라고 부른다니, 작은 몸집에 비해 참으로 대단한 직함

이다.

그런 지렁이를 보며 오래전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약 40여 년 전, 고종형님이 김해에서 지렁이 양식장을 운영한다는 소식을 듣고 구경을 간 적이 있었다. 비닐하우스 안에 땅

을 파고 바닥에는 비단천을 깔아 놓았다. 그 위에 소똥을 일정한 두께로 펴고 수많은 지렁이를 기르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매우 생소한 광경이었다.

 

"형님, 이걸 어디에 쓰려고 이 많은 지렁이를 기르십니까?"

내가 묻자 형님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본에서 토룡탕이라고 해서 지렁이를 먹는 게 유행이라더라. 단백질이 많아서 건강식으로 인기라는데 곧 우리나라에도

들어올 거야. 지금 시작하면 큰돈 벌 수 있지."

형님의 눈에는 이미 황금빛 미래가 펼쳐져 있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몸에 좋아도 사람들이 지렁이를 먹겠습니까? 보기만 해도 징그럽다 할 텐데요."

형님은 웃으며 내 말을 흘려들었다. 하지만 몇 년 뒤 결과는 내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토룡탕 열풍은 오지 않았고 형님

은 결국 양식장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더 안타까운 것은 뒤늦게 그 사업을 인수한 사람들이 큰 손해를 보았다는 이야기였

다. 소문만 믿고 뛰어든 사람들이 남긴 것은 빚과 한숨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지렁이는 참 억울했을지도 모른다. 본래 땅속에서 묵묵히 흙을 갈아엎고 낙엽을 분해하며 자연을 돕고 있었는

데, 사람들은 거기서 돈 냄새를 맡고 사업거리로 만들려고 했으니 말이다.

며칠 전에도 비슷한 기사를 보았다. 경북의 어느 지역에서 지렁이 양식장을 운영하면서 각종 유기성 폐기물을 들여왔는데

악취 때문에 주민들이 민원을 제기했다는 내용이었다. 지렁이는 원래 폐기물을 분해하고 퇴비를 만드는 데 유용한 생물이

지만, 규모가 커지고 돈벌이가 개입되면 뜻하지 않은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렁이는 인간에게 무엇 하나 요구하지 않는다. 농약도 달라 하지 않고 월급도 달라 하지 않는다. 그저

낙엽과 유기물을 먹으며 흙을 부드럽게 만들고 땅을 살린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지렁이에게조차 돈벌이의 굴레를 씌우려

한다.

 

어릴 적 초가집 추녀 밑에서 잡던 지렁이 한 마리가 이제는 새삼 다르게 보인다. 낚시 미끼로만 알았던 그 작은 생물이 사실은

숲을 살리고 농사를 돕고 탄소를 저장하며 토양 생태계를 유지하는 숨은 공로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비가 온 뒤 촉촉한 흙 위에 지렁이가 기어가는 모습을 보면 반가운 마음이 든다. 그 모습은 마치 땅이 아직

건강하다는 신호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은 흔히 거대한 나무와 아름다운 꽃만 자연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건강한 숲

과 비옥한 들판은 이름 없는 작은 생물들의 수고 위에 세워져 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어쩌면 이 속담은 단순히 약자의 반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미약해 보이는 존재도 세상을 떠받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말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밟고 서 있는 이 땅 아래에는 오늘도 수많은 지렁이들이 말없이 흙을 갈며 자연과

인간을 위해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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