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료유 마진도 챙기는데 투표용지는 왜 부족한가
선박 운항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연료유 계산이다. 부산에서 미국 로스앤젤레스까지 항해한다고
가정해 보자. 항로를 어디로 잡느냐, 어떤 속력으로 운항하느냐, 기상 상황이 어떠하냐에 따라 필요한 연료유의
양은 달라진다. 더욱이 바다는 늘 예측 불가능한 변수로 가득하다. 저기압을 만날 수도 있고 태풍을 우회해야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선박은 계산된 최소 필요량만 싣고 출항하지 않는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추가 연료를
적재하는데, 이를 마진(margin)이라고 한다.
통상적으로 15% 정도의 마진을 두는 이유는 단순하다. 예상이 빗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비용을 아끼겠다고
마진을 지나치게 줄였다가 목적항을 눈앞에 두고 연료가 바닥난다면 그 피해는 상상 이상으로 커진다. 실제로
연료 부족으로 예인선의 도움을 받아 입항하는 수모를 겪은 사례도 있다. 작은 비용을 아끼려다가 훨씬 더 큰
손실과 불명예를 초래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식은 선박 운항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국가의 중요한 행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특히 선거는
더욱 그렇다. 선거는 국민이 주권자로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절차다. 민주주의의
근간이며 헌법이 보장하는 참정권의 실현 과정이다.
그런데 최근 지방선거 과정에서 여러 지역에서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발생했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의문이 생긴
다. 기사에 따르면 선거관리위원회는 보관 공간 부족과 관리 부담 등을 이유로 투표용지 인쇄 기준 하한을 유권자
수 대비 60%에서 50% 수준으로 낮추었다고 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이다.
선박 운항이라면 어떨까. 선장이 "연료 보관 탱크 관리가 번거롭다"거나 "적재 공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안전
마진을 절반 가까이 줄인다면 과연 정상적인 판단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선박에
자신의 생명을 맡기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문제의 본질은 관리의 편의가 아니라 안전의 확보에 있기 때문이다.
선거도 마찬가지다. 투표용지 보관 공간이 부족하다면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관리 인력이 부족하다면 인력을
보강해야 한다. 보안 문제가 우려된다면 관리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 해결해야 할 문제는 시설과 운영의 미비이지,
유권자의 권리를 행사하는 수단 자체를 줄이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선거는 정기적으로 예정된 국가 행사다. 태풍처럼 갑자기 발생하는 돌발 상황도 아니다. 수년 전부터 일정이
확정되어 있고 유권자 수 역시 상당한 정확도로 예측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여유를 두지 않은 결과
실제 현장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해졌다면 이는 단순한 실무 착오를 넘어 정책 판단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배의 연료는 부족하면 경제적 손실이 발생한다. 그러나 투표용지가 부족하면 국민의 참정권이 침해될 수 있다.
중요성의 무게는 비교조차 어렵다. 그렇다면 마진에 대한 사고방식 역시 훨씬 더 보수적이어야 한다. 연료유에는
15%의 안전 여유를 두면서도 국민의 투표권 행사에는 충분한 여유를 두지 않는다면 그 우선순위는 거꾸로 된 것이다.
이번 논란은 단순히 몇몇 투표소의 운영상 문제로 끝나서는 안 된다. 왜 이런 판단이 내려졌는지, 어떤 근거로 인쇄 기준
이 조정되었는지, 그리고 그 결정이 실제 현장에서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 또한 앞으로는 행정
편의보다 국민의 권리 보장을 우선하는 방향으로 선거관리 체계를 전면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배가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도착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연료 마진이 필요하다. 민주주의가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항해하기
위해서는 더욱 충분한 투표 준비가 필요하다. 관리의 편의를 위해 안전 마진을 줄이는 선장이 좋은 선장이 될 수 없듯이,
행정의 편의를 위해 국민의 참정권 보장을 소홀히 하는 선거 행정 역시 결코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변명이 아니라 혁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