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新) 연금술사
젊은 시절 우리는 미래를 안다고 믿었다. 열심히 일하면 집 한 채 마련하고, 자식들 공부시키고, 퇴직금 받아
노후를 보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월은 늘 우리의 계산보다 한 발 앞서 달아났다. 사람의 앞날은 알
수 없다. 그래서 점쟁이도 먹고살고 철학관도 성업하는 것인지 모른다.
우리 세대는 보릿고개를 겪으며 자랐다. 먹고사는 것이 가장 큰 숙제였고, 자식만큼은 굶기지 않겠다는 일념
으로 살아왔다. 그렇게 한평생 직장과 가정을 위해 달려오다 은퇴의 문턱에 섰을 때 또 하나의 선택이 기다리
고 있었다. 퇴직금을 한꺼번에 받을 것인가, 아니면 연금으로 받을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우리보다 십 년쯤 먼저 은퇴한 선배들은 대부분 일시금을 선택했다. 당시 은행 금리가 높았기 때문이다. 정기예금
에만 맡겨도 연금보다 많은 이자가 나왔다. 계산상으로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인생은 계산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어느 날 아들이 사업을 시작한다며 자금을 부탁한다. 조카가 어렵다며 손을 내민다. 평생 알고 지낸 친구가 딱 한
번만 도와달라고 한다. 부모가 자식을 외면할 수 없고, 사람 좋은 이가 친지의 부탁을 매정하게 거절하기도 어렵다.
그렇게 빌려준 돈은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통장에 있던 노후자금은 어느새 남의 사업 밑천이 되어 사라지고,
남은 것은 후회와 한숨뿐이었다.
반면 연금을 선택한 친구들은 조금 달랐다. 그들은 매달 정해진 날짜가 되면 꼬박꼬박 들어오는 돈으로 생활했다.
큰 부자는 아니지만 늘 여유가 있었다. 친구들을 만나면 먼저 술잔을 채우고, 후배를 만나면 밥값을 냈다. 우리는
그런 친구들을 농담 삼아 "연금술사"라고 불렀다.
원래 연금술사는 쇠를 금으로 만드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내가 아는 연금술사는 돈을 금으로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연금을 우정으로 바꾸고, 관계를 행복으로 바꾸는 사람들이다.
나이가 들면 돈의 의미도 달라진다. 젊을 때는 돈이 꿈을 이루는 수단이지만, 늙어서는 사람을 만나게 해주는
통행증이 된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으면 약속이 부담스럽다. 식사 한 끼, 커피 한 잔 값이 신경 쓰이기
시작한다. 결국 사람 만나는 일이 줄어든다. 사람과의 거리가 멀어지면 세상과의 거리도 멀어진다.
반대로 매달 일정한 소득이 있으면 마음이 다르다. 친구를 만나도 위축되지 않는다. 때로는 술 한잔 사고, 손주
에게 용돈도 건넬 수 있다. 그 작은 행동 속에서 사람은 자신이 여전히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
한다. 연금은 단순한 생활비가 아니라 자존감을 지켜주는 월급인 셈이다.
그러나 진정한 신 연금술사는 돈만 준비하는 사람이 아니다. 관계를 준비하는 사람이다.
퇴직 후 행복한 사람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늘 연락 오는 친구가 있고, 함께 웃을 수 있는 동료가 있으며, 자신
의 경험을 필요로 하는 후배들이 있다. 그들은 은퇴하기 오래전부터 관계의 씨앗을 심어 놓았다. 바쁜 직장생활
속에서도 사람을 귀하게 대했고, 받은 도움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직함이 사라진 뒤에도 사람들은 그를 찾아온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 자신을 써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회사를 떠나는 순간 명함은 사라진다. 그러나 실력과 경험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강의를 하든, 자문을 하든, 봉사를 하든 상관없다. 누군가 "선배님이 필요합니다", "당신의 경험이 도움
이 됩니다"라고 말해주는 순간 사람은 다시 살아나는 법이다.
결국 노후의 행복은 통장 잔고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돈의 흐름, 사람의 흐름, 그리고 자신의 가치가 흐르는 통로가
함께 있어야 한다. 강물도 흐르지 않으면 썩듯이 돈도, 관계도, 능력도 흐를 때 비로소 생명력을 갖는다.
나는 요즘 신 연금술사라는 말을 새롭게 정의하고 싶다.
신 연금술사는 매달 들어오는 연금을 술값으로 바꾸는 사람이 아니다. 연금을 여유로 바꾸고, 여유를 관계로 바꾸며,
관계를 행복으로 바꾸는 사람이다. 또한 자신의 경험을 나눔으로 바꾸고, 나눔을 존경으로 바꾸며, 존경을 삶의 보람
으로 바꾸는 사람이다.
쇠를 금으로 만드는 것은 전설 속 연금술사의 이야기다. 그러나 노년의 시간을 웃음으로 만들고, 외로움을 우정으로
바꾸며, 하루하루를 감사로 채우는 일은 우리 모두가 배울 수 있는 진짜 연금술이다.
은퇴는 인생의 종착역이 아니다.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는 환승역이다. 그 여정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가장 많은 돈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가장 많은 사람과 웃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웃음의 씨앗은 퇴직 후가 아니라 오늘 이 순간,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이미 뿌려지고 있다.
아마도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신 연금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