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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의 설치미술작품

작성자남청도|작성시간26.06.17|조회수26 목록 댓글 0

 

검은 사각형의 값어치

 

우리 집에는 그림이 몇 점 있다. 그렇다고 내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아니다. 화가인 친구에게 선물로 받은 것도

있고, 살림이 조금 펴졌을 무렵 안면을 보고 구입한 것도 있다. 아내의 친구가 기증하듯 건네준 그림도 있다. 하지

만 정작 그 그림들은 집 안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 넓지 않은 집에서 벽은 이미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고, 그림들은 액자 속 품위를 지닌 채 방 한구석에 기대어 서 있다. 어쩌다 먼지를 털어낼 때면 “미안하다”는 생각

이 들지만, 그렇다고 마땅히 걸어둘 자리도 없다.

 

그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래전 배를 타고 다니던 시절, 대만 고웅의 골동품상에서 명나라 때의 화병 하나를 사 온

적이 있다. 진품인지 아닌지는 지금도 잘 모른다. 다만 화병 표면에 그려진 나무 아래의 동자승 모습이 유난히 마음

에 들었다. 값어치보다 정취가 먼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케냐 몸바사에 입항했을 때는 목조각 몇 점을 샀다. 거친

나무결 속에 아프리카의 태양과 바람이 스며 있는 듯해 지금도 거실 탁자 위에 올려두고 있다.

그런데 우리 집에서 가장 크고도 독특한 미술작품은 따로 있다.

거실 벽면의 삼분의 일쯤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검은 직사각형.

설치미술이라고 부르면 제법 그럴듯하다. 흰 벽지를 배경으로 한없이 깊고 새까만 화면이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다.

제목을 붙인다면 아마도 「침묵」 정도가 어울릴 것이다.

 

사실 그것은 고장 난 텔레비전이다.

큰아들이 어느 날 더 큰 TV를 샀다가 작은 집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우리 집 TV와 바꾸어 갔다. 처음에는 화면도 크고

선명해서 좋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고장이 났다. 수리 기사에게 문의하니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나는 원래 텔레비전

을 즐겨 보는 사람이 아니어서 별 관심이 없었다. 아내는 드라마와 뉴스를 종종 보았지만 수리비를 생각하면 선뜻 고칠

마음이 생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1년이 넘었다.

화면은 한 번도 켜지지 않았지만 TV는 여전히 거실의 주인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다.

누군가는 왜 치우지 않느냐고 묻는다. 사실 휑하게 빈 벽을 바라보는 것보다 검은 화면 하나가 있는 편이 훨씬 안정감이

있다. 손님이 오면 제법 큰 TV가 걸려 있으니 집이 넉넉해 보일 수도 있다. 물론 가까이 다가가 보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금세 들통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내가 그 TV를 쉽게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 검은 화면은 세상에서 가장 큰 액자이기 때문이다.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 대신 수많은 상상이 그 안에서 켜진다. 어떤 날은 어린 시절 고향 바다가 비치고, 어떤 날은 젊은

시절 먼 항구의 풍경이 떠오른다. 고웅 골동품상에서 화병을 고르던 나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하고, 몸바사의 붉은 석양

이 번져 나오기도 한다. 친구에게 받은 그림들이 걸려 있다면 보여줄 수 있는 풍경은 하나뿐이겠지만, 검은 화면은 날마다

다른 그림을 전시한다.

세상에는 값비싼 예술작품이 많다. 그러나 예술의 본질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있다면, 우리 집의 고장 난 TV도

제법 훌륭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는 TV를 두고 우리는 지금도 수신료를 꼬박꼬박 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화면

한 번 켜지지 않는데 말이다. 가끔 그 고지서를 볼 때면 절도 모르면서 시주를 하는 사람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받을 수도 없는 방송을 위해 돈을 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괜찮다.

우리 집 구석에 처박힌 그림들, 진위를 알 수 없는 명나라 화병,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목조각, 그리고 거실 한가운데 걸린

검은 직사각형까지. 모두가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있다. 값어치는 시간이 정하는 것이지만 추억의 가치는 세월이 흘러도

줄어들지 않는다.

오늘도 나는 소파에 앉아 고장 난 TV를 바라본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고물이라 부를지 모르지만, 내게는 가장 넓은 화폭

이다. 전원이 꺼진 채 침묵하고 있지만, 그 안에서는 여전히 수많은 이야기들이 상영되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어떤 방송보다 오래, 어떤 그림보다 깊게 내 곁에 남아 있는 예술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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