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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남긴다는 것

작성자남청도|작성시간26.06.17|조회수21 목록 댓글 0

 

이름을 남긴다는 것

 

우리는 발을 이고 다닐 수는 없다. 발은 땅을 딛고 걷기 위해 있는 것이고, 날개가 없는 이상 하늘을 날 수도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 속에서 살아간다. 그렇기에 인생의 가치는 얼마나 높이 날았는가보다 어떤

발자국을 남겼는가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예로부터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시골에는 겨울이면 눈이 많이 내렸다. 밤새 함박눈이 소리 없이 쌓이고 나면 다음 날 아침

세상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산과 들, 지붕과 길목까지 온통 하얀 눈으로 덮여 있으면 마음마저 깨끗

하게 씻기는 듯했다. 아이들은 그런 날을 기다렸다는 듯 밖으로 뛰어나갔다. 눈밭에 몸을 던져 뒹굴고, 서로 눈을

뭉쳐 던지며 웃음꽃을 피웠다. 막대기로 눈 위에 그림을 그리고 이름을 쓰기도 했다. 때로는 뒷산으로 올라가 토끼

발자국을 발견하면 신이 나서 그 흔적을 따라가기도 했다. 눈 위에 찍힌 작은 발자국들은 숲속 굴까지 이어졌고,

우리는 마치 탐험가가 된 것처럼 숨죽이며 토끼를 찾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눈밭 위에 남겨진 발자국들은 금세 사라질 흔적에 불과했다. 햇살이 비치면 눈은 녹고, 발자국도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사람의 삶은 다르다. 어떤 이는 세상에 깊은 흔적을 남기고, 어떤 이는 바다 위를 지나간 배

처럼 아무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 결국 사람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살았느냐일 것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위대한 사람들은 자신의 안락함만을 위해 살지 않았다. 그들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자신의 능력을 공동체와 인류를 위해 사용했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은 세월이 흘러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단순히 유명해지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고, 세상에 의미 있는 흔적을 남겼다는

뜻이다.

 

그러나 나의 젊은 시절은 그런 이상을 꿈꿀 여유조차 없었다. 아버님께서 일찍 세상을 떠나시는 바람에 나는 어린 나이

에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당장 중요한 것은 꿈이나 명예가 아니라 식구들이 굶지 않고 살아가는 일이었다. 선택

의 여지는 많지 않았다. 나는 배를 탔다. 거친 파도와 바람을 견디며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그 시절 내 어깨 위에

는 가족이라는 무거운 짐이 올려져 있었고, 나는 그 짐을 내려놓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가족들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생계를 위한 절박함도 차츰 줄어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대로 바다에 배 지나간 흔적처럼 살아도 괜찮은가?' 먹고사는 문제에 매달려 앞만 보고 달려왔

지만, 정작 나 자신을 위한 삶은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내 나이는 서른여섯이었다.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늦은 나이였다. 하지만 늦었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을 위한 삶만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길도 찾아야 했다. 그래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대학원에 진학

했고, 학교로 들어갔다. 새로운 출발이었다.

학교에 들어가던 날, 나는 혼자 조용히 다짐했다.

"은퇴하기 전까지 반드시 세계적인 저널에 내 이름을 올리겠다."

누군가에게는 작은 목표처럼 들릴지 몰라도 나에게는 인생을 걸어야 할 만큼 큰 꿈이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다.

부족한 영어 실력과 학문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남들보다 몇 배 더 노력해야 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다. 그러나

눈 덮인 산길에서 토끼 발자국을 따라가던 어린 시절처럼 나는 한 걸음씩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발자국 하나하나가 모여

결국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마침내 시간이 흘러 정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뒤돌아보니 참 먼 길을 걸어왔다. 생계를 위해 바다를 누비던 청년은

어느새 연구자가 되었고, 젊은 날 품었던 꿈도 이루었다. 세계적인 저널에 내 이름을 올렸던 순간의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것은 단순히 논문 한 편이 실렸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고, 자신과의 약속을 끝

까지 지켜냈다는 증표였다.

눈 내린 겨울 아침, 새하얀 벌판에 남겨진 발자국은 언젠가 사라진다. 그러나 목표를 향해 묵묵히 걸어간 삶의 흔적은 사람

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는다.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거창한 명성을 얻는 일이 아니라 자신만의 길을 성실히 걸어가며 세상

에 의미 있는 발자국을 남기는 일이다.

이제 인생의 황혼에 서서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면 가슴 한편이 뿌듯해진다. 나는 하늘을 날지도 못했고 특별한 재능을 타고

난 사람도 아니었다. 다만 주어진 길을 포기하지 않고 걸어왔을 뿐이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작은 이름 하나를 남길 수 있었다.

사람은 결국 사라진다. 그러나 자신이 흘린 땀과 노력, 그리고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남긴 흔적은

오래도록 살아남는다. 그것이 내가 살아오며 깨달은 인생의 의미이며, 이름을 남긴다는 것의 진정한 가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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