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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 수국을 만나는 시간

작성자남청도|작성시간26.06.18|조회수26 목록 댓글 0

 

유월, 수국을 만나는 시간

 

녹음이 짙어가는 유월이다. 유월은 수국의 계절이다. 봄꽃들이 저마다의 화려함을 뽐내고 떠난 자리에 수국은

조용히 찾아와 초여름을 채운다. 햇살이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이맘때면 길가와 담장 밑, 절집 마당과 산기슭

곳곳에서 수국이 둥근 얼굴을 내민다.

내가 대신동 주택에 살 적에는 마당 한켠에 수국 한 포기가 있었다. 특별히 거름을 주거나 정성을 쏟지 않아도

해마다 잊지 않고 꽃을 피웠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것이 수국의 장점이다. 비바람이 불어도 꿋꿋하게

견디다가 어느 날 문득 탐스러운 꽃송이를 만들어 내곤 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사람도 저 수국처럼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많았다. 좋은 환경만 찾지 말고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것 말이다.

 

어릴 적 외갓집에 가려면 다름산 고갯길을 넘어야 했다. 그때는 길도 험하고 교통도 불편했지만 이상하게 힘들었

다는 기억보다 정겨운 풍경이 먼저 떠오른다. 그 고갯길 아래 수목원에서는 해마다 수국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사람들이 꽃을 보기 위해 일부러 찾아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세월이 참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들꽃처럼 흔히 보던 꽃이 이제는 축제의 주인공이 되었으니 말이다.

부산에서는 영도 태종대의 태종사 수국이 유명하다. 수국이 만개하는 계절이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든다.

금정산 자락 남산동의 회룡선원 수국도 아름답기로 이름이 나 있다. 얼마 전 종무소에 전화를 걸어 꽃이 피었는

지 물어보았더니 아직은 덜 피었고 7월쯤 되어야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산속 높은 곳이라 평지보다

계절이 조금 늦게 찾아오는 모양이다. 꽃도 저마다 자기 시간이 있는 법이다. 남보다 빨리 피려고 서두르지 않는다.

때가 되면 피고 때가 되면 진다.

 

수국을 보고 있으면 꽃보다 사람을 생각하게 된다. 수국의 작은 꽃잎들은 한치의 빈틈도 없이 서로 다정하게 붙어

있다. 서로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지 않는다. 누가 더 아름답다고 뽐내지도 않는다. 작은 꽃 하나하나는

눈에 잘 띄지 않지만 함께 모였을 때는 커다란 꽃송이가 되어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그래서 수국은 겉모습만

아름다운 꽃이 아니라 내면의 아름다움까지 보여주는 꽃처럼 느껴진다.

우리 사회도 수국처럼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서로 기대어 살아가며, 자기 자리에서

조용히 아름다움을 더한다면 세상은 훨씬 따뜻해질 것이다. 혼자서는 작은 꽃잎에 불과하지만 함께 모이면 하나의

꽃송이가 된다는 사실을 수국은 말없이 가르쳐 준다.

 

몇 년 전에는 서울에 사는 둘째 딸 가족과 함께 제주도 서귀포로 여름 휴양을 간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공원을 찾았는데, 그곳에서 나는 평생 잊지 못할 수국 풍경을 만났다. 수국이 허드러지게 피어 있었던 것이

다. 흰색과 하늘색, 보라색, 분홍색 꽃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꽃물결이 일렁였고, 햇빛은

꽃잎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그 순간 나는 마치 천국에 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온 세상이 꽃으로 물들어 있었고 사람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손주들은 꽃길 사이를 뛰어다니며 즐거워했고, 딸아이는 연신 사진을 찍었다. 나는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꽃은 말이 없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는 것을 그날 새삼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수국은 화려하면서도 겸손한 꽃이다. 멀리서 보면 눈부시게 아름답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작은 꽃들이

서로 의지하며 하나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수국은 가족을 닮았다.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가 서로 기대고 살아가는

모습과도 닮았다. 또한 이웃과 친구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공동체의 모습과도 닮았다.

 

유월의 수국을 바라보며 나는 다시 한번 삶을 생각한다. 혼자 빛나기보다 함께 아름다워지는 삶, 앞서가기보다 서로

보듬어 주는 삶, 자기 색깔은 다르지만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삶 말이다. 수국이 해마다 유월이면 어김없이 꽃을 피우

는 이유도 어쩌면 그런 소중한 가르침을 전해 주기 위해서인지 모른다.

올해도 수국이 피고 있다. 어디선가 또 누군가는 수국 앞에 서서 꽃을 바라보며 추억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추억은 세월이 흘러도 꽃향기처럼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유월이 오면 내가 수국을 기다리는 것도 어쩌면

그 꽃 때문이 아니라, 수국과 함께 피어나는 아름다운 기억들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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