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찻잔에 남은 온기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면 나는 습관처럼 커피 한 잔을 내린다. 젊은 시절에는 잠을 깨기 위해 마셨고, 바쁘게 살아갈
때는 일을 시작하기 위한 신호처럼 마셨다. 이제는 커피의 맛보다도 그 시간이 좋아 마신다. 커피 향이 천천히 방 안
에 번지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식탁 위에 내려앉으면 비로소 하루가 시작되는 것 같다.
한 모금씩 천천히 마시다 보면 커피는 어느새 바닥을 드러낸다. 그러나 나의 아침은 커피가 다 마셔진 뒤에야 비로소
깊어진다. 빈 잔을 그대로 내려놓지 못하고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기 때문이다.
커피는 사라졌지만 찻잔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다.
그 온기는 참 이상하다. 금방 식어버릴 것 같으면서도 한동안 손끝에 머문다. 나는 그 잔을 양손으로 감싸 안고 가만히
눈을 감는다. 그러면 따뜻함이 손바닥을 지나 가슴으로 스며든다. 때로는 잔을 볼에 대어 본다. 어린아이처럼 우스운
모습일지 모르지만, 그 순간만큼은 세상 어떤 난로보다도 더 따뜻한 기운이 전해진다.
아마도 그 온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 따뜻함 속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난다.
어머니는 평생 뜨거운 사랑을 드러내 놓고 표현하는 분이 아니셨다. "사랑한다"는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새벽
같이 일어나 밥을 지으시고, 추운 날이면 내 옷을 미리 아랫목에 덥혀 두셨으며, 늦게 돌아오는 자식을 기다리며 대문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다. 어머니의 사랑은 말이 아니라 온기였다.
겨울이면 얼어붙은 내 손을 당신의 두 손으로 감싸 녹여 주셨고, 열이 나면 밤새 이마를 짚어 보셨다. 학교에서 돌아와
힘없이 앉아 있으면 아무 말 없이 볼을 쓰다듬어 주시곤 했다. 그 손길은 지금 생각해도 참 따뜻하다. 세월은 많이 흘렀
지만 이상하게도 그 온기만은 잊히지 않는다.
사람은 떠나도 온기는 남는 모양이다.
어머니가 떠나신 지 십여년이 넘었건만, 빈 찻잔을 손에 들고 있으면 문득 그 손길이 되살아난다. 커피가 남긴 마지막
온기가 어머니의 체온처럼 느껴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이란 어쩌면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형태는 사라져도 마음
속에는 오래 남아 있다가 어느 날 찻잔 하나를 통해 다시 찾아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인생도 빈 찻잔과 닮았다. 젊음도 지나가고, 재산도 명예도 언젠가는 사라진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베풀었던 따뜻한 마음만은 오래도록 남는다. 커피는 마시고 나면 없어지지만, 잔에 남은 온기는 한동안 사람을 데워 준다.
사랑도 그렇다. 사랑을 준 사람은 떠나더라도 그 온기는 남아 누군가의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그래서 나는 아침마다 빈 찻잔을 쉽게 내려놓지 못한다.
그 작은 잔 속에는 방금 전 마신 커피의 향기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살아온 날들의 추억이 담겨 있고,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 비쳐 있으며,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사랑이 고요히 머물러 있다.
오늘도 커피를 다 마신 뒤 빈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본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마지막 온기가 천천히 식어 간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 되살아난 어머니의 온기는 식지 않는다.
어쩌면 사람은 사랑을 기억하며 사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랑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아침 식사 후 빈 찻잔에
남아 있는 작은 온기 하나로도 충분히 되살아난다.
나는 오늘도 그 온기를 가만히 볼에 대어 본다. 마치 어머니가 먼 세월을 건너와 말없이 내 얼굴을 어루만져 주시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