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의 삼각자와 컴퍼스
내가 처음 삼각자와 컴퍼스를 가져본 것은 국민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 외삼촌 친구분이 우리 집에 놀러 오시면서
학용품 선물로 주신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흔한 물건이지만, 당시의 내게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그전까지는 공책에 반듯한 선을 긋기 위해 교과서 모서리를 자 삼아 연필을 움직였다. 동그라미를 그릴 때에는 손
으로 정성껏 그렸지만 시작점과 끝점이 어긋나기 일쑤였고, 아무리 애를 써도 완벽하게 둥근 모양이 나오지 않았다.
가끔은 종이쪽지에 구멍 두 개를 뚫고 연필 두 자루를 끼워 임시 컴퍼스를 만들어 쓰기도 했다. 한 자루는 중심을 잡
고 다른 한 자루는 빙 둘러 선을 그렸지만, 결과는 늘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러다가 처음 컴퍼스를 손에 넣었을 때의 기쁨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바늘 끝으로 중심을 고정하고 연필심을
돌리기만 하면 정확하고 아름다운 원이 그려졌다. 마치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도구
하나가 세상을 얼마나 다르게 보이게 하는지 알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나는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게 되었다. 배를 처음 탔을 때만 해도 오늘날처럼 버튼 하나만 누르면
위치가 위도와 경도로 표시되는 시대가 아니었다. 지금은 위성항법장치가 실시간으로 선박의 위치를 알려주지만,
당시에는 연안에서는 지문항해를, 대양에서는 천측항해를 주로 이용했다.
지문항해에서는 육지의 물표를 기준으로 컴파스로 각도를 측정한다. 한 곳만 재어서는 위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세
곳 이상의 물표를 잡아 방위를 측정하고, 그것을 해도 위에 옮겨 배의 위치를 구했다. 항해사들은 대략 30분마다 위치
를 확인했다. 그리고 이전 위치와 현재 위치 사이의 거리를 해도 가장자리의 거리 눈금에 컴퍼스를 대어 측정하였다.
기관실에서는 프로펠러의 누적 회전수를 기록한다. 프로펠러의 피치에 회전수를 곱하면 이론상 이동거리가 계산되
지만, 실제 항주거리는 늘 그것보다 적다. 바람과 파도, 조류가 배의 진행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차이를 슬립
(Slip)이라고 불렀고 보통 10퍼센트 정도를 예상하여 계산했다. 연료를 청구할 때도, 탱크 바닥에 남아 사용하지 못하는
데드 오일(dead oil)을 계산할 때도 이러한 여유분을 고려해야 했다.
돌이켜보면 인생도 항해와 많이 닮아 있다.
배가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먼저 침로를 정해야 하듯이 사람도 살아가면서 자신만의 목표와 방향을 가져야 한다. 젊은
시절 우리는 저마다 높은 이상을 품고 그 이상을 향해 힘껏 노를 젓는다. 그러나 항해 중 태풍을 만나듯이 인생에도 예상
치 못한 역경과 좌절이 찾아온다. 계획했던 만큼 나아가지 못할 때도 있고, 바람과 조류에 떠밀려 원하던 길에서 벗어나
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잠시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잃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큰 파도를 만나더라도 선장은 침로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우회하고 속도를 줄일 수는 있어도 결국 목적지를 향한 방향만은 놓지 않는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자신의 위치를 아는 일이다. 배가 아무리 훌륭한 침로를 가지고 있어도 현재 위치를 모르면 안전하
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 그래서 항해사들은 끊임없이 위치를 확인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지금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이 부족한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어린 시절 내게 완벽한 원을 그리게 해주었던 컴퍼스와 반듯한 선을 그어주던 삼각자는 단순한 학용품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것들은 방향을 잡고 위치를 확인하는 삶의 상징이었는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절실히 느낀다. 우리에게는 눈에 보이는 삼각자와 컴퍼스보다 더 소중한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것
은 올바른 가치관일 수도 있고, 양심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신념과 꿈일 수도 있다. 그런 마음속의 삼각자와 컴퍼스가 있을
때 우리는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도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다시 목표를 향해 침로를 바로잡을 수 있다.
인생이라는 넓은 바다를 항해하는 동안 누구나 바람을 만나고 조류를 만나며, 예상치 못한 슬립을 경험한다. 그러나 마음속
에 삼각자와 컴퍼스를 간직한 사람은 길을 잃지 않는다. 비록 목적지에 조금 늦게 도착할지라도, 결국 자신이 가야 할 곳을
향해 꾸준히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