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길을 묻는가?
선가의 화두 중에 “길에서 길을 묻는가?”라는 질문이 있다. 우린 길 위에 서 있으면서도 그 길을 잊고 있다.
부처님도, 하느님도, 알라신도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데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먼 길을 헤매면서 돌고 있는 것이다.
구원의 존재는 멀리서 찾을수록 더 멀어진다. 이 또한 길에서 길을 묻는 우치와 다르지 않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 부처다
이런 이이갸기 전한다. 어떤 젊은이가 부처를 찾아 길을 떠나게 된다.
“스승님! 어디 가면 살아 있는 부처님을 만날 수 있을까?”
“저고리를 뒤집어 있고, 신발을 거꾸로 신은 사람을 만나거든 그분이 살아 있는 부처님일세.”
그 날로 살아 있는 부처를 만나기 위해 구도 여행을 시작한다.
그런데 산속의 절에도 저고리를 뒤집어 입고 신발을 거꾸로 신은 수행승은 없었고, 시장 바닥에도 그런 사람은 없었다.
어쩌다가 저고리를 누더누덕 기워 입은 사람을 만났어도 신발까지 거꾸로 신은 사람은 끝내 만날 수 없었다.
이 젊은이는 꼬박 3년을 산 넘고 물 건너 온 세상을 누비며 찾았지만 그 같은 이웃을 만나지 못했다.
이제는 단념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 그 젊은이는 지친 몸과 마음으로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3년 만에 정든 집 앞에 도착하니 목이 메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어머니!”하고 불렀다.
집을 나간 아들이 이제나 오나 저제나 오나 날마다 기다리던 어머니는 문밖에서 아들의 목소리가 들리자
반가운 마음에 뒤집어 놓은 저고리를 그대로 걸치고, 섬돌에 벗어 놓은 신발을 거꾸로 신은 채 달려갔다.
“아이고, 내 새끼야!” 이때 아들은 어머니를 보는 순간 깨닫는다. “오메, 살아 있는 부처님이 우리 집에 계셨네!”
비로소 그는 그토록 찾아 헤매던 부처님을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15세기 인도의 신비주의 시인으로 유명한 까비르, 그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물속의 물고기가 목말라하는 것을 보고 나는 웃는다.”
가까이 존재하는 스승을 머리서 찾는 것이 물고기가 물속에서 목말라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부처, 즉 구원의 존재자는 가까이 있는데 부처를 찾는다고, 불교를 믿는다고 주위의 인연들이나 가족에게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신앙하는 이의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종교를 믿는 것은 가까운 사람에게 친절하기 위해서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불평한다면 그것은 물고기가 물속에서 목말라하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음이다.
선가의 화두 중에 “길에서 길을 묻는가?”라는 질문이 있다.
우린 길 위에 서 있으면서도 그 길을 잊고 있다.
부처님도, 하느님도, 알라신도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데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먼 길을 헤매면서 돌고 있는 것이다.
구원의 존재는 멀리서 찾을수록 더 멀어진다. 이 또한 길에서 길을 묻는 우치와 다르지 않다.
6세기 무렵 중국에서 살았던 부대사라는 선비가 있다.
주위 사람들은 불교에 심취한 그를 ‘쌍림 거사’라고 불렀다. 그가 남긴 시는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무척 애송한다.
그 시는 이렇다.
밤마다 부처와 같이 자고
아침이면 부처와 함께 일어난다.
참으로 부처님 계신 곳 알고 싶은가?
말하고 움직이는 그곳을 살피라.
자신이 곧 부처라는 것을 인식하라는 법문이다.
날마다 같이 자고 일어나면서도 모른다. 자신 밖에서 찾는 부처님은 의미 없다.
잘못된 삶의 방식이나 가치를 전환하여 부처의 존재로 나아가야 한다.
당대의 선승 임제 선사가 “사람이 부처다.”라고 일갈한 것 또한 알고 보면 부처는 구하는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드러내야 할 대상이라는 법문이다. 구름 사라지면 맑은 하늘 아니던가.
이처럼 어리석음이 소멸되면 그 자체가 부처인 것이다.
설경 속에 산사의 장명등이 졸고 있다. 저 골짜기에서는 밤새 내린 문의 무게에 못 이겨 넘어지는 설해목 소리가 들린다.
이런 삼동 추위에 나 자신이 얼마만큼의 부처인가를 반문해 본다.
출처 ; 현진 스님 / 산 아래 작은 암자에는 작은 스님이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