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느리게 오고 아주 바쁘게 간다
어느 시인이 ‘제비꽃을 알아도 봄은 오고, 제비꽃을 몰라도 봄은 간다’더니 그새 봄꽃들의 축제가 끝났다.
올봄엔 유난히 꽃들이 붉고 화사하여 한동안 꽃 대궐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여기저기 꽃들이 만발한 풍경은 그야말로 무릉도원이더라.
이렇게 눈부신 봄꽃들의 잔치에 동참하여도 봄날은 지나갔고, 봄꽃에게 눈길을 주지않았어도 봄날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한동안 꽃 소식에 정신이 팔려 들뜬 마음으로 분주히 지냈던 것 같다.
이제는 차분하게 본래 자리로 돌아올 때다. 옛사람의 심사처럼 봄은 느리게 오고, 아주 바쁘게 간다. 마치 청춘처럼 지나가는 봄.
어디 봄날에만 꽃이 있으랴.
형형색색의 봄꽃들이 지고 나면 초하를 알리는 나무들이 그 신비를 드러낸다.
이때는 청초한 흰색들이 매력을 다툰다.
아카시나무를 비롯하여 불두화, 산사나무, 이팝나무, 산딸나무, 찔레꽃 등이 이어달리기 하듯 피고지기를 반복한다.
숲과 가까이 하며 살다보니 오월을 왜 ‘계절을 여왕’이라 칭송했는지 알만하다.
오월의 산하는 참 아름답다.
아직 영글지 않은 신록이 부드럽기도 하거니와 수목들도 물이 올라 싱그럽고 활기차다.
피천득 시인은 오월을 일러 ‘이십대 청년이 막 세수하고나온 얼굴 같다’로 표현했다.
이처럼 오월의 숲은 젊은 청년의 얼굴처럼 맑고 순수하다.
이러하므로 오월을 맞이하는 일상이 어느 때보다 경쾌하고 가볍다.
화분에 물주는 일도 즐겁고 연못에 물 흐르는 소리도 정겹다.
오월은 마구잡이로 달려드는 날벌레가 많이 없어서 일하기에도 딱 좋다.
열두 달 가운데 오월만큼 좋은 계절이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있다.
아침 나절에 풀을 매고 들어왔다.
쇠뜨기가 키 재듯 자라있어서 호미를 들었는데 덤벼보니 보이는 것보다 훨씬 촘촘하게 버렸다.
꽃나무 사이사이에 자라는 녀석들은 뽑아내기도 참 성가시다.
뽑은 풀도 모아놓으면 태산이라더니 금세 한 망태기가 된다.
화단 밖으로 내보내야 하니 몇 번을 더 오고가야 하는 작업이다.
이런 정갈한 공간을 유지한다는 것은 때때로 머리 무거운 일이기도 하다.
예불시간이 가까워져서 그만두고 일어났다.
예전 같으면 밥 때가될 때까지 정신없이 일을 했는데 체력의 한계를 넘어서면 몸이 무리가 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벌써 무릎 건강이 좋지 않아 쭈그리고 앉아서 하는 일은 몸을 아껴가며 하고 있다.
오늘 못하면 내일 하면 되는 일.
한꺼번에 에 다 해치우려고 하던 성미가 많이 무뎌진 셈이다.
매일 조금씩 나누어 하는 게 능률이 더 좋을 때가 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게으른 눈이 일을 하는 게 아니고, 부지런한 손이 한다.”
눈으로 보면 언제 다하겠나하며 엄두가 나지 않는 일도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면 어느 때에 끝이 난다.
눈짐작으로 지레 겁부터 먹고 뒤로 물러앉지 말라는 것이다.
손길이 수차례 가서 잘 정돈된 화단을 바라보고 있으며 한참이나 흐뭇하다.
이런 기분 때문에 풀매는 일에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다.
속리산 큰 절에 모임이 있어 들렀던 원주실 입구에 조그마한 화단을 만들고 여러 가지 꽃을 심어 놓아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모란꽃이 진 자리에 놓인 제라늄 화분이 오월의 산사를 더 환하게 연출해 주었다.
맑은 향기와 더불어 조촐한 기운이 넘쳐 나는 것 같았다.
그는 물소리만 듣고
자랐다
그래. 귀가 맑다
그는 구름만 보고
자랐다
그래. 눈이 선하다
그는 잎새와 꽃을 이웃으로 하고
자랐다
그래, 손이 곱다
황금찬 시인의 <산골사람> 중 첫머리 부분이다.
물소리와 구름과 꽃을 이웃하며 지내는 일은 귀가 맑아지고, 눈이 선해지고, 손이 고와지는 비결이다.
꽃은 이런 것이다.
창백한 얼굴에 생기를 돌게 하며 밋밋한 일상에 이야기 하나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이 곁에 있는 것은 소소한 위안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주부터 군락으로 심어놓은 병꽃이 피기 시작했다.
어느 해 병꽃의 이름을 알고 자주색 그 꽃잎에 반해 수소문하여 내 거처에 심었는데 이제는 제몫를 해주고 있다.
장미도 한두 송이 얼굴을 내밀었다.
꽃봉오리를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설렌다. 그게 생명의 신비이며 경이인가보다.
최근에 사람 사이 마음 상한 일이 있어 감정이 편치 못했는데 꽃을 보며 위로 삼는다. 꽃과 나무는 이런 존재다.
여름 ● 나는 지금 풀과 시름하고 있다
여름 내내 호미 끝이 무디어질 정도로 일을 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승복 바지에는 여기저기 풀물이 들고 손톱도 거칠어졌다.
출처 ; 현진 스님 / 꽃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