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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경&육조혜능대사

육조단경덕이본002/무비스님

작성자發菩提心|작성시간16.03.16|조회수83 목록 댓글 0

육조단경덕이본002/무비스님


제 2 강
- 六祖大師 緣起 外延

오늘 1조.
서문 형식으로 써져있는 내용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六祖大師(육조대사)
緣起(연기)하고 外記(외기)
라 이렇게 했는데,

육조대사의 연기는
당신이 살아온 그 내용을
육조단경 본문 안에
당신의 입을 통해서
이야기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이 있고,
이 외기라고 하는 말은
단경 안에서 정식으로 전해진 것 외에,
단경외의 기록들이다.
그런 뜻으로 外記라 했어요.

大師(대사)의 父親(부친)은
盧 行?(노 행도).

그래서 노 행자. 노 행자 그래요.
행자생활을 많이 했고,
행자로서 벌써 도를 이뤘던 분으로
아주 유명 하지요.

母親(모친)은 李氏(이씨)이다.
모친이 꿈에, 뜰 앞에
白花(백화)가 滿發(만발)하고
또 白鶴(백학)이 雙(쌍)으로 날며,
기이한 향기로
온 집안에 가득함을 보고, 임신하였는데,
그 후 육년 만에
唐貞觀十二年(당정관십이년)
戊戌二月八日子時(무술이월팔일자시)에
아들을 낳으니...

6년이나 그렇게
그 참, 태어날 때부터
특이한 분 인 모양입니다.

老子(노자)도 그렇게
상당이 오래 있었다는 말이 있지요?

노자도 벌써 늙어서 나왔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뱃속에서 오래 있어 가지고...
그래서
노자라고 한다는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어쨌든 거기에 기록 된 대로
일단 그렇게 믿고 보겠습니다.

그날 자시에 아들을 낳으니
이가 곧 대사이다.
그날 밝을 무렵에
僧(승) 둘이 와서 말하기를
“애기의 이름을
慧能(혜능)으로 하라.”는 것이었다.
부친이 “왜 혜능 으로 해야 되느냐?”고 하니까
“앞으로 이 애기가
慧(혜)로써 많은 중생을 건지고
能(능)히 크게 佛事를
이룩할 분이기 때문이라.”
고 대답한 후
홀연히 사라지니 간 자취를 알 수 없었다.
그랬습니다.
여기에 표현 했듯이 사실 그렇습니다.

아까 이야기처럼
부처님의 불법의 산맥이 쭉 흐르다가
내려가기도 하고
올라가기도 하고 그러는데,
달마대사 같은 이들은
아주 오뚝한 산봉우리이고,
또 그 다음에
2조 혜가.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까지도 평범한 산이었다면
또 육조스님에 와서는
우뚝 솟은 그런
하나의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다가
또 다시 내려와서는
평범한 산들이 있다가
황벽스님 같은 이.
임제스님. 특히 임제스님 같은 이가
육조스님만은 못해도
상당히 높은 봉우리를
형성하고 내려오고 그랬어요.

그래서 우리 정통 선종을
육조스님을 들먹거려서
그 사상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또 임제스님을 들먹거려서
“임제종 계통이다.”

우리 조계종을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까
조계종의 역사 속에
임제스님 같은 이.
육조스님 같은 이가
아주 높은 봉우리를 이룩하고,
그 脈(맥)을 이어가게 된
그런 분들이지요.

예를 들어서
경주 김씨 하면 경주 김씨가
계속 왕 노릇 하는 것은 아니지요?
내려오다가 형편없을 때도 있고,
그러다가 그런대로
또 괜찮은 인물이 났다가,
또 한참 갔다가
또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듯이,
역시 불법의 맥도 다 훌륭하지만
그 중에서도,
더욱더 훌륭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여기도 보면 지혜로서 중생을 건지고,
능히 불사를 이룩할 분이다. 그러므로
“혜능으로 하라.” 이렇게 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탄생한 대사는
어머니 젖을 먹지 않고 자랐으니,
밤에 神人(신인)으로부터
甘露水(감로수)의 공양을 받은 것이었다.

뭐 좀 뭐라고 할까요?
쉽게 평가 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조금 加味(가미)를 했다고나 할까?
대개 훌륭했던 분은
좀 지나치게 수식하는 경우가 있지요?

3세에 부친을 喪別(상별)한 후,
모친을 모시고 나무장사를 하였으며,
24세에 五祖(오조)로부터
衣法(의법)을 받은 후,
의법이라고 하는 것은
법을 받았다고 하는데,

옷 衣(의)자를 쓴 이유는,
법의 徵表(징표)로서
袈裟(가사)를 줍니다.
가사가 옷입니다.
스님들 가사를 옷 이라고 그러는데,
그래서 “옷과 법을 받은 후”이런 뜻이지요.

南方(남방)으로 피신하였다가,
이런 내용이
뒤에 쭉 본문에 그대로 나옵니다.
그 때가면 더 정확하고 자세하게 보십시다.

儀鳳元年(의봉원년)
丙子正月에(병자정월)
廣州法性寺(광주법성사)에서
印宗法師(인종법사)를 만나
그달 十五日에 비로소 머리를 깎았고...

상당히 오랜 세월 피신 해있었지요.
그 피신 해있는 기간 동안
사냥꾼들 틈에 살았다는 것입니다.
사냥꾼들 틈에 살면서
그물을 지키라고 하면,
짐승들이 갇히면
슬쩍 들어서 빼내줘 버리고...
공양주 노릇.
밥이나 짓고 하는
허드레 역할이나 하면서
사냥꾼들 틈에 한때 끼어서 살았다.
는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그런 것들도 본문에 나옵니다.
다음달 2월8일에 具足戒(구족계)를 받으니,
머리를 깎고 그 다음에
2월8일에 구족계를 받으니...
구족계는 비구계가 되고,
승려로서 완전한 계율이 되겠지요.

완전한 계율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하니
10계, 사미 10계가 되고
그 10계를 받고
바로 구족계를 받는 수도 있고,
요즘 우리 조계종 같은 경우는
4년이 경과하면,
구족계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이 갖춰지지요.

사미 10계는 열 가지이고
구족계는 250가지가 되고요.
조항이 그렇게 상당히 많습니다.
구족계를 받으니 授戒師(수계사).
계를 주는 스승은
西京(서경) 智光師(지광율사)이고,

갈마. 갈마라고 하는 것은
作法(작법)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검토 하는 거예요.
말하자면 이 사람이
계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이 갖춰져 있는가?
신체는 건전 한가? 사상은 올바른가?
이런 것을 쭉 점검하는 일을
“갈마”라고 그래요.

갈마에
蘇州(소주) 慧靜律師(혜정율사).
교수에, 이것은
바로 가르쳐주는 것이지요.
교수에 荊州(형주) 通應律師(통응율사).

說戒(설계)에,
이것은 계를 설명만 하는 사람 이예요.
설계에
中天(중천) 사多羅律師(사다라율사).

證戒(증계)에,
증서가 필요하거든요,
증명하는 사람.
西國(서국) 密多三藏(밀다삼장)이었으며,
그러니까 그 당시
중국에는 인도스님들이
많이 와서 살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여기
사다라율사도 인도 사람이고,
밀다삼장도 인도 인도스님들이지요.

그 戒壇(계단)은
계를 설하는 장소를 “계단”그래요.

통도사에도
계단이라고 써 붙여놓고,
여기 범어사도 보면 계단이 있고,
해인사도 보면 계단.
어떤 단을 꼭 차려 놓은 것은 아니지마는 단
이라고 해놓고,
계를 설할 때 법당에 단을 따로 차려요.
늘 차려 놓는 것은 아니고
그렇게 차렸다가 또 철거도 하고 그러는데
그것을 “戒壇”이라고 그렇습니다.

그 계단은
송나라 宋朝(송조) 때.
求那跋陀羅三藏(구나발타라삼장)의
創建(창건)인데
거기서 스님들에게 계를 주었다는 것이지요.

當時(당시) 創建碑(창건비)를 세우기를
【이 뒤에 여기서
肉身菩薩(육신보살)이 계를 받으리라.】
육신보살! 육신보살!
이거 처음 듣는 말이지요?
이 【육신보살이 계를 받을 것이다.】
라고 예언을 했다는 것입니다.
벌써... 옛날에 계단을 만들 때부터...


“육신보살”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
보통 일반 우리 육신을 가진 중생과
같은 모습으로서 “보살”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않은 보살은
어떤 보살이냐?
여러분들 기억하듯이
지장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전부 우리하고 좀 다르지요?
보통 평범한
인간의 역사를 가진 보살이 아닙니다.
경전 상에서 그냥 보살이지요.

그런 이들은
實存(실존) 하는지
우리 기도를 하면
영험으로 나타나긴 하는데,
역사적인 인물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육신보살” 하면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가진 입장으로서
역사적인 인물로서의 확실한 보살!
부처님 다음가는
그런 보살이라고 하는
그런 뜻에서 “육신보살”그래요.

【육신보살이 계를 받으리라.】하였으며,
또 梁(양)나라 天監元年(천감원년)에
智樂三藏(지락삼장)이
西竺(서축)에서
菩提樹 一株( 보리수 일주)를
가지고 와서 이 계단가에 심으면서
【앞으로 170년 후에
육신보살이 나타나
이 나무 밑에서
無量衆生(무량중생)을 濟度(제도)하리라】
또 이런 예언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뛰어난 분들은
아마 타고 나는가 봐요.
어떤 노력에 의해서 거두는 성공은
사실은 미미하고,
어느 정도 밖에 안 되고,
그것이 쌓이고. 쌓이고
몇 생이 쌓여서
특별한 인물로
아마 나타날 수가 있는 것이지요.

또 이런 것이 어떻게 보면
육조스님을 좀 미화하는,
미화하기 위해서
이렇게 기록할 수도 있고
그렇기는 합니다.

「제도 하리라」고
豫言(예언)하였는데
대사가 여기서
祝髮受戒(축발수계)한 것이
모두 예언대로 된 것이다.

축발은 머리를 깎다 그런 뜻 이예요.
머리를 깎고 계를 받은 것이
모두 예언대로 된 것이다.

다음해 봄에 대사가
曹溪寶林寺(조계보림사).
조계산 보림사가 됩니다.
조계 보림사로 돌아오니
荊州 通應律師(형주 통응율사)와
學人數百(학인수백)이
追從(추종)하여 와서
함께 머물게 되었는데
堂宇(당우)가 비좁아서
大衆(대중)을 容(수용)하기 어려우므로
절을 擴張(확장)하고자하여,
地主 陣亞僊(지주 진아선).
땅임자 진아선 이라고 하는 사람을 만나고서
대사의 坐具(좌구)깔만한,
그러니까 육조스님이
깔고 앉는 방석 깔만한 터를 달라고 했어요.

이것이 꼭 김교각스님!
구화산의 김교각스님 이야기하고 꼭 같아요.

그러니 아선이
和尙(화상)의 좌구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어서
대사가 좌구를 보이니까
그는 두말없이 應諾(응락)하였다.

방석 그래봐야 얼마 되겠어요?
3분의 1평도 안 되지요?
4분의 1평도 안 되는 그런 작은 것인데요.

그런데
대사가 좌구를 펴 놓으니
曹溪四境(조계사경)을,
조계산 4경계를 덮어버렸고
거기에 四天王(사천왕)이
나타나 네 귀를 누르는지라

아선이
대사의 法力(법력)에
驚嘆(경탄)하고
그 땅을 모두 바치고 말았다.

지금도 있는
天王嶺(천왕령)이
그래서 생긴 이름이다.


사대천왕이 저기. 저기. 저기서
그 네 귀퉁이를 누르고 있었다.
그래 거기에 누르고 있었던 그 고개가,
그 산마루가 바로 천왕령이다.
이렇게 지금 전해온다는 것입니다.


중국 구화산에 김교각.
신라의 왕자출신이라고 그러지요?
그 김교각스님도,
그 분은 여기 신라에서 결혼을 하고 갔어요.
결혼을 하고 중국에 수행하러 갔는데,
그 부인도 나중에 건너가서
그 밑에서 움막을 짓고 살았다는
그런 기록이 있어요.

그 분도 구화산에 가서
수행을 하고 있었는데,
그 밑에 지주가 있었고
지주 아들이 사냥인가 나왔다가,
길을 잃고 호랑이한테 쫓겼다는 거예요.
그런데 마침
그 순간에 쫓겨서
김교각스님이 수행하고 있는
바위 밑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교각스님이
그 호랑이를 쫓고
그 아들을 구해 줬어요.

그래 그 아들을 구해 줬는데,
이름이 道明(도명)입니다.
지장보살 보면
左補凄(좌보처) 道明尊者(도명존자).
右補凄(우보처) 無毒鬼王(무독귀왕).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지장경은
우리 김교각스님 하고
아주 연관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도명이라고 하는 그 아들이,
김교각스님 덕에 살았어요.

그래서 이 아들이 집에 돌아가서는
아버지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어떤 스님이 계시는데 거기서,
토굴에서 나를 살려 줬다”
그러니까
이 아버지가 올라와 가지고는
불심도 장하고하니까요.

“스님 그렇게 계실게 아니라
조그만 절을 지어서
우리가 양식을 대줄 테니까,
여법하게 수행을 하십시 오.”
그랬다고요.
그러니까
“그럼 땅을 좀 달라”고.
“얼마면 되겠습니까?”

“ 이 가사 크기만치만 달라.”고 했어요.

거기는 가사예요.
“그럼 스님 한번
가사를 펼쳐 보십시오.”하니까
당신이 입고 있던 가사를
삭 펼치니까 아홉 봉우리인가?
그게 구화산 이거든요.
아홉 봉우리를 다 덮었다고요.
그림도 나오고 하여튼
중국에는 야단 이예요. 구화산은...

우리 한국스님이 와서
그렇게 지장보살의 후신으로서
구화산을 성지로 만들고 했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가 대단해요.

그래서 지주가
그 땅을 다 줘 버렸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도
그 구화산 4 산이 전체가 다 절산 이예요.
완전히 절 村(촌) 이예요.

중국에는 참 그런
아름다운 역사들이 많이 있어요.
그래 여기 보면
육조스님의 경우하고 같지요.
이렇게 하여
대사가 境內(경내)를 넓히고
山水(산수) 좋은 곳을 골라
절을 세운 것이
十三個所(13개소)였다.


元來(원래) 이 보림사는
西國 智樂三藏(서국 지락삼장)이
조계에 이르러 물을 마셔보고
上流(상류)에는
必是(필시) 절터 될 만한
地(승지)가 있을 것이라
짐작하고 溪源(계원).
계곡의 근원을 따라 올라와보고는
산수의 絶妙(절묘)함이
마치 西天寶林山(서천보림산)과 같다고
感嘆(감탄)하면서,
서천은 인도를 가리키는 것이지요.
曹候村(조후촌)
住民(주민)들에게 말하기를,
그 밑에 아마
조계산 밑에 마을을 두고 하는 소리지요.


마을 주민들에게 말하기를
「여기에 절을 세우면
百七十年後(백칠십년후)에
육신보살이 出現(출현)하여
여기서 敎化(교화)할 것인데
得道(득도)하는 者(자)가 숲과 같으리니,
득도하는 자가 숲처럼 많다는 것이지요.
마땅히 ‘寶林(보림)’이라고
이름 하는 것이 좋다」
보배 寶(보)자. 수풀 林(림)자.
숲과 같이 많다. 라고 해서
그래서
「‘寶林’이라고 하는 것이 좋다」
라고 하였다.


이 말을 當時韶州牧(당시소주목)
候敬中(후경중)이 듣고
武帝(무제)께 秦上(주상)하여
天監三年(천감삼년)에 절을 짓고
寶林寺(보림사)라고 名稱(명칭)한 것이다.

이 절 앞에 못이 있었는데
거기에 龍(용)이 늘 出沒(출몰)하면서
안개도 피우고 바람도 일으켜
물결을 높이고
樹林(수림)도 뒤흔드는 等(등)
장난이 甚(심)하였다.


하루는 용이 큰 몸집을 드러내어
장난을 시작하는 것을
대사가 보고 꾸짖기를
“네가 만일 神通(신통)이 장하다면
몸집을 작게도 하고 크게도 하여
自由自在(자유자재)할 것이니

어디, 아주 작은 몸을
나타내어 보아라.”하니

용이 갑자기 물속으로 들어갔다가
곧 아주 작은 몸으로 솟아올랐다.

대사가
鉢盂(발우)를 대면서,
발우는 스님들 밥그릇이지요.

“네가 이 발우 속에도
들어갈 수 있겠느냐?”고 하니
그놈이 발우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두어 가지고
법당으로 올라와
앞에 놓고
법을 說(설)하여주니
용이 그 功德(공덕)으로 몸을 벗고 갔다.

그러니까
몸을 버리고 薦度(천도)가 됐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용은 어디까지나 축생이니까요.

그 뼈가 지금도 전해오는데
길이가 七寸(7촌)쯤 되고
頭尾(두미)와
角足(각족)이 모두 갖춰져 있다.
이건 글쎄요. 지금까지 전해지는지?
지금도 있다고 해 놨으니까
보물장에 있겠지요.

그 뒤로 대사는 그 못을 메웠는데
지금 大雄殿(대웅전)앞 左側(좌측)에
鐵塔(철탑)을 세워 누른 곳이
바로 그 못자리다.
이런 것들도 챙겨 가지고 가서
확인해 보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대사께서 涅槃(열반)에 드신 후
開元十年壬戌八月三日
(개원십년임술8월3일)에 이르러
그날 밤중에
대사의 眞身(진신)을 모신
塔(탑)속에서 쇠줄을 끊는 듯한
이상한 소리가 들리므로
대중이 쫓아 나가보니
웬 喪主(상주)한 사람이
탑 속에서 나와 도망하는 것이었다.

탑 속을 살펴보니
대사의 목이 상하여 있었다.
이 사실을 고을에 알려져서
縣令(현령) 楊侃(양간)과
刺史(자사) 柳無?(류무첨)이
搜査(수사)에 착수한지
五日만에 石角村(석각촌)에서
범인을 체포하고 심문하여보니
범인은
張淨滿(장정만)이라는
汝州梁縣(여주양현) 사람으로
洪州 開元寺(홍주 개원사)에서
新羅僧(신라승)
金大悲(김대비)에게서
金二十千(금이십천)량을 받고 한 짓인데,
그럼 2만량이 되겠네요.
20천량이니까요.
金大悲(김대비)는
육조대사의 머리를 가져다가
海東(해동). 한국이지요,
韓半島(한반도)에서
공양하기 위함이라는 것이었다.

자사가 몸소 조계에 출장하여
범인에 대한 處刑(처형) 문제를 상의하니
대사의 上足 令韜(상족 영도)가 말하기를
“만약 국법대로 한다면
마땅히 베어야할 일이로되
(불교)의 자비로써 본다면
怨親(원친)이 모두 평등한 것이며,
더구나 그것이
공양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니
용서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으므로

柳刺史(유자사)가 다시금
佛門(불문)의 관대함에 탄복하고
드디어 범인을 놓아주었다.
이렇게 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잡혔으면
목을 못 가져왔지요.
여기 이야기대로라면...

그런데
쌍계사 이야기는 잡히지 않았어요.
목을 가져와서 쌍계사에다 탑을 썼어요.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거기 계시는
육조스님의 형상은
그대로 목이 완전한 상태이고,
여기는 또 잡혔기 때문에
자르려다가 목만 좀 상했다 하는
아마 그런 뜻으로, 여기는 설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쌍계사는
매년 “ 봉찬회”라고 해서
육조스님을 공양 올리는 모임이 있어요.
신도회가 있고 행사도 합니다.


上元元年(상원원년)에
肅宗(숙종)이 사신을 조계에 보내어
대사의 의발을 청하여
궁 안에서 공양하게 하였더니,
이런 말은 무슨 뜻인가 하니
육조스님께서 사용 하시던
가사하고 발우를 궁에다가,
왕궁에다 모셔서
예배 올린다는 뜻 이예요.

공양한다는 것이 뭐 딴 뜻이 아니고요.
궁 안에서 공양하게 하였더니,
永泰元年五月五日(영태원년5월5일)에
이르러 代宗(대종)의 꿈에
육조대사가 나타나
의발을 돌리라 하였으므로,
되돌려 갖다 주어라 하였으므로,
七日에 鎭國大將軍(진국대장군)
劉崇景(유숭경)을 시켜서
조계로 돌려보내면서
자사에게 칙명으로 이르기를
본사에 법다히 안치하고
잘 수호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 뒤에도 혹 사람들에게
절취당한 적이 있어도
바로 찾아오곤 하였다.
이것이 육조스님의
그 옷과 발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憲宗(헌종)이
大鑑禪師(대감선사)라
諡號(시호)하였고
송나라 太祖(태조)가 즉위하면서
開國之初(개국지초)에
兵火(병화)로 타버린
대사의 탑 묘를 새로 쌓아
7층으로 하고 시호를 더하여
大鑑眞空禪師太平興國塔
(대감진공선사태평흥국지탑)
이라 라고 하였으며
宋仁宗天聖十年(송인종천성십년)에
시호를 더하여
大鑑眞空普覺禪師
(대감진공보각선사)라 하였다.

이것이 과거
훌륭했던 성인들에게는
불교를 좋아하는 임금이
자기도 호를 하나 더 첨가해서
그 분을 높이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이렇게 해요.

그 뒤에 어떤 왕이,
그 스님의 행적과 법어집 같은 것을
읽어 보고는,
존경해마지 않을 것 같으면,
당신이 천자로서
호를 하나 올리고 하는
그런 예들이지요.

우리는 뭐 이렇게 읽으니까
별것 아니지만,
사실은 그런 천자에게
이름을 받는다는 것이
보통 영광이 아니거든요.


宋- 神宗(송- 신종)이
또 시호 더하여
大鑑眞空普覺圓明禪師
(대감진공보각원명선사)라 하였다.

이렇게 내려가면서.
육조스님을 존경한 나머지
호를 하나씩 더 해갔다
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

六祖大師 緣起 外延

大師의 父親은 盧行도 요,
母親은 李氏이다.
母親이 꿈에,
뜰 앞에 白花가 滿發하고
白鶴이 雙으로 날며,
奇異한 香氣가
온 집에 가득함을 보고
姙娠하였는데,
그 後 六年만에
唐貞觀十二年
戊戌二月八日子時에
아들을 낳으니
이가 곧 大師이다.

그날 밝을 무렵에
僧 둘이 와서 말하기를
「애기의 이름을
慧能으로 하라」는 것이었다.
父親이 그 까닭을 물으니
앞으로 이 애기가
慧로써 많은 중생을 건지고
能히 크게 佛事를
이룩할 분이기 때문이라고
對答한 後
忽然히 사라지니
간 자취를 알 수 없었다.

이렇게 誕生한 大師는
어머니 젖을 먹지 않고 자랐으니,
밤에 神人으로부터
甘露水의 供養을 받은 것이었다.
三歲에 父親을 喪別한 後
母親을 모시고 나무장사를 하였으며,

二十四歲에 五祖로부터
衣法을 받은 後 南方으로 避身하였다가
儀鳳元年 丙子正月에
廣州法性寺에서 印宗法師를 만나
그달 十五日에 비로소 머리를 깎았고,
다음달 二月八日에 具足戒를 받으니,
授戒師에 西京 智光律師
?磨에 蘇州 慧靜律師,
敎授에 荊州 通應律師,
說戒에 中天 耆多羅律師
證戒에 西國 密多三藏이었으며,
그 戒壇은 宋朝 때
求那跋陀羅三藏의 創建인데
當時(創建)碑를 세우기를
「이 뒤 여기서
肉身菩薩이
戒를받으리라」하였으며,

또 梁 天監元年에 智樂三藏이
西竺에서 菩提樹 一株를 가지고 와서
이 戒壇가에 심으면서
「앞으로 百七十年後에
肉身菩薩이 나타나
이 나무 밑에서 無量衆生을 濟度하리라」
고 豫言하였는데
大師가 여기서 祝髮受戒한 것이
모두 豫言대로 된 것이다.

다음해 봄에 大師가
曹溪寶林寺로 돌아오니
荊州 通應律師와 學人數百이
追從하여 와서 함께 머물게 되었는데
堂宇가 비좁아서
大衆을 收容하기 어려우므로
절을 擴張하고저하여,
地主 陣亞僊을 만나서
大師의 坐具(방석)
깔만한 터를 要求하였다.

亞僊이 和尙의 坐具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어서
大師가 坐具를 보이니까
그는 두말없이 應諾하였다.

大師가 坐具를 펴 놓으니
曹溪四境을 덮어버렸고
거기에 四天王이 나타나
네 귀를 누르는지라
亞僊이 大師의 法力에
驚嘆하고 그 땅을 모두 바치고 말았다.

지금도 있는 天王嶺이
그래서 생긴 이름이다.
이렇게 하여
大師가 境內를 넓히고
山水 좋은 곳을 골라
절을 세운 것이 十三個所였다.

元來 이 寶林寺는
西國 智樂三藏이 曹溪에 이르러
물을 마셔보고
上流에는 必是 절터될만한
勝地가 있을 것이라 짐작하고
溪源을 따라 올라와보고는
山水의 絶妙함이
마치 西天寶林山과 같다고 感嘆하면서
曹候村 住民들에게 말하기를
「여기에 절을 세우면
百七十年後에 肉身菩薩이 出現하여
여기서 敎化할 것인데
得道하는 者가 숲과 같으리니
마땅히 ‘寶林’이라고
이름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이 말을 當時韶州牧 候敬中이 듣고
武帝께 秦上하여
天監三年에 절을 짓고
寶林寺라고 名稱한 것이다.

이 절 앞에 못이 있었는데
거기에 龍이 늘 出沒하면서
안개도 피우고 바람도 일으켜
물결을 높이고 樹林도 뒤흔드는 等
장난이 甚하였다.

하루는 龍이 큰 몸집을
드러내어 장난을 시작하는 것을
大師가 보고 꾸짖기를
「네가 만일 神通이 장하다면
몸집을 작게도하고 크게도하여
自由自在할 것이니
어디 아주 작은 몸을 나타내어 보아라」하니
龍이 갑자기 물속으로 들어갔다가
곧 아주 작은 몸으로 솟아올랐다.
大師가 鉢盂를 대면서
「네가 이 鉢盂 속에도
들어갈 수 있겠느냐」하니
그놈이 발우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두어 가지고
堂으로 올라와 앞에 놓고
法을 說하여주니
龍이 그 功德으로 몸을 벗고 갔다.
그 뼈가 지금도 전해오는데
길이가 七寸쯤 되고
頭尾와 角足이 모두 갖춰져있다.
그 뒤로 大師는 그 못을 메웠는데
지금 殿前左側에
鐵塔을 세워 누른 곳이 바로 그 못자리다.

大師께서 涅槃에 드신 後
開元十年壬戌八月三日에 이르러
그날 밤중에 大師의 眞身을 모신
塔속에서 쇠줄을 끄는 듯한
이상한 소리가 들리므로
大衆이 쫓아나가보니
웬 喪主한 사람이
塔 속에서 나와 도망하는 것이었다.
塔 속을 살펴보니
대사의 목이 상하여 있었다.

이 사실이 고을에 알려져서
縣令 楊侃과 刺史 柳無?이
搜査에 착수한지
五日만에 石角村에서 범인을
체포, 심문하여보니

범인은
張淨滿이라는
汝州梁縣 사람으로
洪州 開元寺에서
新羅僧 金大悲에게서
金二十千량을 받고 한 짓인데
金大悲는
六祖大師의 머리를 가져다가
海東(韓半島)에서
공양하기 위함이라는 것이었다.

자사가 몸소 조계에 출장하여
범인에 대한 處刑 문제를 상의하니
대사의 上足 令韜가 말하기를
「만약 국법대로 한다면
마땅히 베어야할 일이로되
佛敎의 慈悲로써 본다면
怨親이 모두 평등한 것이며,
더구나 그것이
공양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니
용서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으므로

柳刺史가 다시금
佛門의 관대함에 탄복하고
드디어 범인을 놓아주었다.

上元元年에 肅宗이
사신을 조계에 보내어
대사의 의발을 청하여다가
궁 안에서 공양하게 하였더니
永泰元年五月五日에 이르러
代宗의 꿈에 육조대사가 나타나
의발을 돌리라 하였으므로
七日에
鎭國大將軍 劉崇景을 시켜서
조계로 돌려보내면서
자사에게 칙명으로 이르기를
본사에 법다히 안치하고
잘 수호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 뒤에도 혹 사람에게
절취당한 적이 있어도
바로 찾아오곤 하였다.

憲宗이 大鑑禪師라 諡號하였고
宋太祖가 즉위하면서
開國之初에 兵火로 타버린
대사의 탑묘를 새로 쌓아
七층으로 하고 諡號를 더하여
大鑑眞空禪師太平興國之塔
이라 하였으며
宋仁宗天聖十年에 諡號를 더하여
大鑑眞空普覺禪師라 하였고
宋神宗이 또 諡號를 더하여
大鑑眞空普覺圓明禪師라 하였다.


육조단경 강의 02 - 무비스님
http://www.jeolgutong.kr/bbs/index.php?document_srl=17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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