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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 법문 080-02 /퇴옹 성철

작성자發菩提心|작성시간16.05.28|조회수527 목록 댓글 0

백일 법문 080-02 /퇴옹 성철

제8장 선종사상

2. 견성의 본질

4) 사중득활(死中得活)02


쉬고 쉬어
한 생각이 만년이며
과거와 미래가 끊어지면
승묘경계라고 부르니
보봉 광도자가 이런 사람이며
세간의 진로가
그를 어둡게 하지 못한다.

비록 이러하나
도리어 승묘경계에 떨어져서
도안을 가린다.

한 생각도 나지 아니하고
과거와 미래가 끊어진
승묘경계에 도달하여서는
반드시 곧바로
큰스님을 찾아보아야 함을 알아라.

休去歇去하야 一念萬年하며
前後際斷하면 喚作勝妙境界라 하나니
寶峰廣道者가 便是這般人이라
世間塵勞가 昧他不得하나니
雖然恁麽나
却被勝妙境界하야 障却道眼이니
須知到一念不生 前後際斷處하야
正要見尊宿이니라.

[五祖演]

보봉 광도자(寶峰廣道者)는
진정 문선사의 제자이며
총림에서는
광무심(廣無心)이라는
별명을 가진 스님으로서
일념불생 전후제단이 되기는 했지만
살아나지 못해서
실지 도안(道眼)은 없다고
평(評)을 했습니다.

외식제연 내심무천은
쌍차(雙遮)를 말하는데,
철두철미한 쌍차(雙遮)가 되면
쌍조(雙照)가
안 될래야 안 될 수 없지만,

쌍차(雙遮)한 데서 머무르면
보봉 광도자같이
무심에 머물러서
실지 쌍조(雙照)가 절대로 안 됩니다.

결국은 도를 성취하려면
쌍차(雙遮)가 된 데서,
즉 크게 죽은 데서
다시 살아나
쌍조(雙照)가 되어야 합니다.

죽어 가지고
살아나지 못하면
이것은 산송장입니다.

보통 번뇌망상°분별심이
그대로 있는 것을 가지고
공부가 아닌가,
도가 아닌가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죽지도 못한 사람입니다.

죽어서
살아나지 못한 사람도
도가 아닌데
아직 죽지도 못한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 법문은
오조 법연선사가
‘사량분별이 떨어진
대무심지에 들어
크게 죽은 사람도
도가 아닌 승묘경계’일 뿐이라고 한
진정 문선사
(오조 법연선사의 스승)의
법문을 인용하여 한 말입니다.
사량분별이 다 끊어진
여기에서 크게 깨쳐야
실지로 바로 안 것이고
도를 이룬 사람인 만큼
누구든지
이런 바른 길로 가야지
도가 아닌 것을 도로 삼으면
자타가 다 망한다고
경계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크게 죽어서
다시 살아나는 것
[大死却活]은
선문의 생명선입니다.


원오스님의
‘훈풍이 스스로 남쪽에서 오는구나’
라고 법문하심을 보고
홀연히 과거와 미래가 끊어지니
마치 한 뭉치 헝클어진 실을
칼로 한번 끊으니
다 끊어지는 것과 같았다.

동상(動相)이 나지 아니하나
도리어 청정한
무심경계에 앉게 되었다.

원오스님이 말씀하시되
“아깝구나. 너는 죽었으나
살아나지 못하였으니
언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다.
죽은 후 다시 살아나야
스스로를 속일 수 없느니라”고 하셨다.

원오스님 방에 들어갈 때마다
다만 ‘유구무구가
등칡이 나무를 의지함과 같다’
는 공안을 들어 물으시고
내가 겨우 입을 열려고 하면
즉시 ‘아니다’라고만 말씀하셨다.

내가 비유로써 설명하되
“이 도리는
흡사 개가
뜨거운 기름솥을 보는 것과 같아서
핥으려 하나 핥을 수 없고
버리자니 버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니,
원오스님이

“너의 비유가 지극히 좋구나”
고 하셨다.
어느 날 원오스님이

‘나무가 넘어지고 등칡이 마르니
서로 따라 온다’
고 법문하심을 듣고
내가 즉시 이치를 알고는

‘제가 이치를 알았습니다’

고 하였다.
원오스님이

‘다만 네가 공안을
뚫고 지나가지 못할까 두렵다’
하시고는,
한 뭉치의 어려운 공안을
연거푸 들어 물었다.
내가 이리 물으면 저리 대답하고
저리 물으면 이리 대답하여
거침이 없으니
마치 태평무사한 때에
길을 만나면 문득 가듯 하여
다시 머무르고 막힘이 없으니
바야흐로
‘내가 스스로를 속이지 못한다’
고 하신 말씀을 알았다.

老漢이
見圓悟老師의 擧熏風自南來하고…
忽然前後際斷하야
如一綟亂絲를
將刀一截截斷相似하니라
雖然動相이 不生이나
却坐在淨裸裸處하니
老師云可惜다 爾死了不能活이니
不疑言句是爲大病이라
絶後更甦하야사 欺君不得이니라
每入室에
只擧有句無句如藤倚樹話하고
纔開口하면 便道不是하니라
我說箇譬喩曰아
這箇道理는
恰如狗子가 看熱油鐺相似하야
要舐又舐不得하며
要捨又捨不得이니라
老師曰
爾喩得極好라
一日에 因老師가
擧樹倒藤枯相隨來也하야
老漢이 便理會得하고
乃曰某會也니라
老師曰祗恐爾透公案未得이라 하고
遂連擧一絡索詴訛公案하야
被我三轉兩轉截斷하니
如箇太平無事時에
得路便行하야 更無滯碍하야
方知道我不謾爾이니라.

[大慧廣錄]

대혜스님이
자기가 알았다고 큰소리친 이후
이십여 년 만에
몽중일여가 되어서는
부처님 은혜에 보답할 수 있다고
감격해 한 일은
앞에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몽중일여가 되니
공부가 다 된 것 아닌가 하고
원오스님을 찾아뵈니

‘너의 지금 경계도
성취하기 어렵지마는
참으로 아깝구나!
죽어서는 살아나지 못하였으니
언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다.

죽은 후 다시 살아나야
너를 속일 수 없느니라’
고 경책하셨습니다.

전후제단의 승묘경계(勝妙境界)를
선문에서는
‘죽어서 살아나지 못하였다
[死了不活]’ 하여
지극히 배척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철저히 깨쳐
활연히 크게 살아나야만
정안(正眼)으로 인가하는 것입니다.

크게 죽은 후에
다시 크게 살아나기 전에는
불조 공안들의
심오한 뜻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오스님이 대혜스님에게
공안, 즉
‘언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몽중일여가 되고
숙면일여가 되었다 하여도
공안의 뜻을 알 수 없는데
하물며
객진번뇌가 여전한데도
공안을 알았다 하고
견성했다 하고
보림한다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임제정맥에 있어서
원오스님과 대혜스님은
역사적으로 유명하고 큰스님입니다.

이런 큰스님들의 경험담이고
서로서로 지시하고 지도하고
의지한 그런 공부 방법이니
여기 대해서
조금이라도 의심을 하게 된다면
결국 자기만 죽고 맙니다.

이러한 공부과정은
선종뿐 아니라
전체 불교에 있어서 표준입니다.

이처럼
대혜스님이 원오스님의 지시를 따라
‘유구와 무구가
등칡이 나무를 의지함과 같다’
라는 공안을 참구하여
마침내
‘서로 따라온다’
는 원오스님의 법문에서
다시 살아나서,
즉 깨쳐서 일체 공안을 바로 알아
인가를 받았으며
원오스님이 대혜스님에게
임제정종기(臨濟正宗記)
를 지어 주었습니다.

흔히 내가 장
고불고조의 뜻을 따르자고 하니
조상의 뼈만 들춘다고
나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제방에 많은 모양인데,

그러나
고불고조(古佛古祖)를 표방해서
전통적인 큰스님네들 법문을
귀감으로 삼고 거울로 삼아야지
공연히 내 옳으니
네 그르니 하여
서로서로 비방할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의 표준은
고불고조에 두어야 하니
원오스님이나 대혜스님 같은
큰스님네들이 실지에 있어서
몽중일여가 되고
오매일여가 되어서도
거기서도 공부라고 생각하지 않고
참으로 화두를 참구하여 깨쳐서
비로소 조사가 되고
도인이 되고 했으니
이것을 모범으로 삼지 않으면
무엇을 모범으로 삼겠습니까?
내가
장 주장하는 뜻을
충분히 이해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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