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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 법문 080-06 /퇴옹 성철

작성자發菩提心|작성시간16.05.29|조회수154 목록 댓글 0

백일 법문 080-06 /퇴옹 성철

제8장 선종사상

2. 견성의 본질

4) 사중득활(死中得活)06


조주스님이
투자스님에게 물었다.

“크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때에는 어떠합니까?”

“밤 길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날이 밝아서 가야 한다.”

굉지스님이 소참에서
이 법문을 거론하고서 말씀하였다.

“만약 [크게 죽어서 다시 살아난]
이 시절을 알면
곧 ‘밝음 가운데 어두움이 있으니
어두움으로 서로 만나지 말고
어두움 가운데 밝음이 있으니
밝음으로 서로 만나지 말라’
함을 알 것이니라.

일체 만법이 다 없어진 때에
밝고 밝게 항상 있으며
일체 만법이 생길 때에
비고 비어 항상 고요하니
문득 죽음 가운데 삶이 있고
삶 가운데 죽음이 있다고
말함을 알 것이다.”

설두스님이
이 법문에 대해서 송하였다.

삶 가운데 눈이 있으니
오히려 죽음과 같고
약을 거리끼니
어떻게 큰스님을 감정하리오.

옛 부처도 오히려
일찍이 이르지 못했다 말하니
티끌 모래 뿌림을
누가 이해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趙州問投子
大死底人이 却活時에 如何오
投子云
不許夜行이요 投明須到니라
宏智小參에 擧云
若箇時에 識得하면
便知道當明中有闇이니
勿以闇相遇요
當暗中有明이니 勿以明相覩로다
一切法盡處箇時에 了了常存요
一切法生時箇時에 空空常寂이니
須知道死中活活中死니라
雪偈頌云
活中有眼還同死하니
藥忌何須鑑作家오
古佛도 尙言曾未到어니
不知誰解撤塵沙요.

[宏智錄 五]

일념불생 전후제단이 되어서
멸진정의
깊고 깊은 무심지에 들어가
오매일여가 되었다 해도
크게 죽은 사람이니
거기서 살아나야지
살아나지 않으면
견의 지위[見地]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서
구경은 모르고 맙니다.

‘밝은 가운데 어두움이 있으니
어두움으로써
서로 만나지 않는다’ 함은
조이쌍적(照而雙寂)입니다.
어두움이 있다고 하여
밝음의 상대적인 어두움으로만
취급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니
밝은 가운데 어두움이기 때문입니다.

‘어두움 가운데 밝음이 있으니
밝음으로써 서로 만나지 않는다’ 함은
적이쌍조(寂而雙照)입니다.

밝음이 있다고 하여
어둠과 대립되는 밝음으로만
취급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니
어두움 가운데 밝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밝음과 어두움이 함께 있는[雙雙]
밝음과 어두움입니다.
절대로 한 편에 치우쳐서
서로 대립되는
밝음과 어두움이 아닙니다.

밝음과 어둠의 대립이 그친 동시에
밝음과 어둠이
서로 융통자재하는
중도의 밝음과 어두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법문은
석두(石頭)스님의
참동계(參同契)에서
굉지스님이 인용한 구절입니다.

‘일체 만법이 다 없어진 때’란
쌍차(雙遮)를 말하고

‘밝고 밝게 항상 있다’는 것은
쌍조(雙照)를 말하며

전체적으로는
크게 죽은 가운데
크게 살아남을 말합니다.

‘일체 만법이 날 때’란
쌍조(雙照)를 말하고
‘비고 비어 항상 고요하다’는 것은
쌍차(雙遮)를 말하며

전체적으로는
크게 산 가운데
크게 죽은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쌍차(雙遮)가 쌍조(雙照)며
쌍조(雙照)가 쌍차(雙遮)여서
차조(遮照) 동시이니
이것이 중도(中道)입니다.

죽음 가운데 삶이 있고
삶 가운데 죽음이 있다는 것은
깨친 경계를 말하는 것이나
말로써 아무리
설명해 봐도 소용없습니다.

실지로 깨쳐 봐야
아는 것이니만큼
화두를 부지런히 해서
오매일여에서
확철히 깨쳐서야
그 경계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티끌 모래를 뿌린다’ 함은
장경(長慶)스님의 법문을
설두스님이 인용한 것입니다.

장경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묻되

“어떤 것이
바른 법의 눈[正法眼]입니까?”
하니
“바라노니 모래를 뿌리지 말라”
고 한 법문입니다.

여기에 와서는 견성성불이라는 것도,
임제 할과 덕산 방도, 향상일로도,
또 온갖 말과 수식어가 다 소용없고
천칠백 공안도
눈에 모래를
뿌리는 것인 줄 알아야만
어느 정도
‘삶 가운데 죽음이 있고
죽음 가운데 삶’이 있다는
뜻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삶 가운데 죽음이 있고
죽음 가운데 삶’이 있다 한다고
무슨 별다른
깊은 법이 있는가
집착하여 매달리게 되면
영원토록 불법을 모르고
깨치지 못하고 마는 것이며
그렇다고
실지 이런 경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크게 죽어서 크게 살아나면
제8 아뢰야 무기식까지 다 없어진
참으로 크게 죽은 경계가 나타납니다.

여기에서는
항상 죽은 가운데 항상 살아 있고
항상 산 가운데 항상 죽어서
밝음과 어두움이
서로 고요하고 서로 비치니,
곧 부처님과 조사의 바른 눈입니다.
이것을
밝음과 어둠이
함께하는[雙雙] 시절이라고 합니다.


숨이 끊어진 때와
종적이 끊어진 곳에서
참으로 바른 눈을 갖추어야 한다.

그때에는 역력하여
가라앉지 아니하고
신령하고 신령하여 상대가 끊어지니
문득 사방으로 활보하며
주위에 널리 응할 것이다.

絶氣息時斷蹤跡處에
須具眼하여사 始得다
那時에 歷歷不沈하고
靈靈絶對하여
便能闊步大方하여
周旋普應이니라.

[宏智錄]

대무심지에서
크게 살아나야 함을 말하는 것이니,

크게 살아나면
쟁반 위를 구슬이 구르듯이
자유자재한 큰 활용[大用]이
널리 펼쳐
규범이 있지 않은 경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크게 죽은 데서
크게 살아나야지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경계가 나타나지 않는데
하물며
번뇌망상이 그대로 있는 데서
대용(大用)이 나타난다고 한다면
이것은 불법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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