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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 법문 001/퇴옹 성철

작성자發菩提心|작성시간16.04.08|조회수58 목록 댓글 0

백일 법문 001/퇴옹 성철


1. 불교의 본질

1). 깨달음의 종교 (1)


"나는 여기서
본분사(本分事)로서 사람을 대한다.
만약 나로 하여금
근기 따라 사람을 대하게 하면
삼승 십이분교(三乘 十二分敎) 가
있게 되느니라"고
조주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근기에는 상근기도 있고
중근기도 하고 하근기도 있으니
근기를 따라서 설법한다면
자연히 삼승 십이분교가 벌어지므로
본분사로서 사람들을 대할 뿐이요,
근기를 따라서
설법을 하지는 않는다고 하는 것이
조주스님의 생명선이고
선가(禪家)의 생명선입니다.

불교의 근본을
이론과 언설을 가지고
이렇게도 설명하고
저렇게도 설명하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니,

이 법문이 선문의 골수가
아닌 줄 알고 들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부터
선가의 본분을 버리고
이론과 언설로서
불교의 근본 뜻을 말해보고자 합니다.


불교란 무엇인가?

그렇게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닙니다.

불교는 팔만대장경이라는
방대한 경전이 있어서
이 경(經)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저 경을 보면 저렇게 말씀하는 등,
누가 어떤 것이 불교냐고 물으면
이것이 불교라고
한마디로 대답하기가 참 곤란합니다.

예수교나 유교나 회교등
다른 종교들은
근본 경전이 간단하여
예수교는 성경,
유교는 사서삼경(四書三經),
회교는 코란이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통칭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라 하니
누가 들어도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많으니
무슨 말씀인지 알기 힘들고,
설사 좀 안다고 하여도
간단하게 어떤 것이
불교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또 하나하나 얘기하려면 끝이 없으니
간단히 무엇을
불교라 해야 하겠습니까?

우선 불교라는 말 자체에서 보면
불교(佛敎)란
불(佛)즉 부처님의 가르침(敎)입니다.

부처(佛)란
인도말로 붇다(Buddha)라고 하는데,
'깨친 사람'이란 뜻입니다.

불교란 붇다
즉 일체 만법의 본원(本源)자체를
바로깨친 사람
즉 부처의 가르침이므로
결국 깨달음에 그 근본 뜻이 있습니다.

만약 불교를 논의함에 있어서
깨친다(覺)는 데에서
한발짝이라도 떠나서
불교를 말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불교가 아닙니다.

불교의 근본인
그 깨친다는 것은
일체 만법을 총괄적으로 표현하여서는
법성(法性)이라 하고,

각각 개별적으로 말할 때는
자성(自性)이라고 하는데,

그 근본에서는
법성이 즉 자성이고
자성이 즉 법성이니
자성이라 하든 법성이라 하든,
이 본원 자체를 바로 깨친 사람을
부처(佛)라 합니다.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敎)이란
법성이나 자성을 바로 깨치는 길
즉 깨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그 근본입니다.

2500여 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새벽에 명성(明星)을 보시고
정각(正覺)을 이루셨으니
이것이 불교의 근본 출발점입니다.

유교는 공자님이
옛날의 삼경이든 육경이든
이것을 읽고 외우고 하여
문자에 의지해서
거기서 얻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세웠고,

기독교는 예수가
절대 신의 계시에 의해서
성경을 의지하여 세워졌으니
곧 절대신의 계시가
기독교의 출발점이 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불교에서
부처님은
많은 지식을 얻음에 의하거나,
혹은 절대신의 계시를 받음에 의해서
부처가 된 것이 아닙니다.

보리수 아래에서
자기 스스로 선정(禪定)을 닦아
자기의 자성을,
일체 만법의 법성을 바로 깨쳐서
부처님이 되셨다는 데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가 다른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신앙의 대상으로서
절대신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불교는 오직
일체 만법의 법성인
자기 자성을 바로 깨치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니
불교 이외의 다른 어느 종교에서도
이와 같은 이론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불교가 주장하는
가장 높고 가장 깊은 진리로서
천고만고에 변할 수 없는
독특한 특색 입니다.

일체 만법의 법성,
즉 자기 성품을 바로 깨치는
이것이 불교의
근본 특색으로 되어 있느니만큼
만약 이 노선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된다면
그것은 스스로
자기 생명을 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과
역대의 모든 조사(祖師)스님들이
자기 성품, 자기 마음을 깨쳐서
부처를 이루었지
절대신이나 언어문자에 의지해서
부처를 이룬(成佛)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불교의 근본 생명선이며,
영원한 철칙이며 만세의 표준입니다.

불교는 성불(成佛),
즉 부처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나
언설과 이론만 가지고는
성불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큰 학자라도
언설과 이론만 가지고서
성불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럼 우리가
무엇하려고 팔만대장경을
만들어 놓았는가?

금강산이 천하에 유명하고 좋기는 하나
그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는
안내문이 필요합니다.

금강산을 잘 소개하면
'아! 이렇게 경치 좋은 금강산이 있구나.
우리도 한번
금강산 구경을 가야겠구나'생각하고
드디어 금강산을
실제로 찾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안내문이 없으면
금강산이 그렇게 좋은 곳인 줄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이 언어문자로 이루어진
언설과 이론인 팔만대장경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일종의 노정기(路程記)입니다.

팔만대장경에서
불교란 이런 것이다.
부처란 무엇이다 라고
설명하고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부처님이 귀하고 높으며
불교가 좋은 줄 알아서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언어문자로 된
안내문이 없었다면
부처님의 훌륭하고 좋은 법을
몇 사람이나 알고 있겠습니까?

이러한 언어문자의 기록이 있기 때문에
불교를 알게 되고
마침내는 부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팔만대장경이라는 노정기에 의지하여
실제로 길을 가서
부처가 되어야 합니다.

서울을 가려고 하면서
서울 안내판이나 소개문을
아무리 들여다 보고 있어 보았자
서울을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한 걸음을 걷든지
두 걸음을 걷든지 하여
마침내 남대문으로 쑥 들어서야지
그러기 전에는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언어문자인 팔만대장경이
성불하는 노정기인 줄만
분명히 알면
그것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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