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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 법문 019-3/퇴옹성철

작성자發菩提心|작성시간16.04.18|조회수24 목록 댓글 0

백일 법문 019-3/퇴옹성철

6. 십이연기의 재해석3



일승도(一乘道)라고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흔히 이것은
대승불교에서만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은[법화경]에서
'시방 국토 가운데
오직 일승법이 있으니
모든 부처님의 방편설은
제외 한다'라고 설하시어,
부처님의 근본 뜻은
일승(一乘)에 있음을 천명하셨습니다.

때로는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의 이승(二乘)도 말하고,
때로는 이승에 보살(菩薩)을 더한
삼승(三乘)도 말씀하지만
그것은 방편이며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이유에서
삼승을 말씀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첫째 성문승(聲聞乘)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지만,
항상 생멸(生滅)
의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성제(四聖諦)를 설할 때도
생멸적인 관점에서 서서 해석하며,
열반을 증득해도
유여열반(有餘涅槃)이요
무여열반(無餘涅槃)
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둘째는 연각승(緣覺乘)입니다.

스스로 인연을 관찰하여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인연을 관해도
생멸적인 변견으로 관하는 것이지
중도 졍견(中道正見)
으로 바로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역시
무여열반을 성취하지 못합니다.

셋째는 보살승(菩薩乘)입니다.

성문과 연각승은
순전히 자기의 이익(自利)보다
타인의 이익(利他)이 근본이 되어서
남을 위해서는
나의 해탈은 그만두고
지옥을 하루에
천번 만번 가도 좋다고 하는
대보리심을 내어서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육바라밀을
비롯한 수많은
수행(六度萬行)을 닦습니다.

일체중생을 위해서
무량한 아승지겁 동안
육도만행을 닦으며,
한없는 세월 동안
중생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남을 위해서
남을 도우며 살면서
마침내는 무상정각을 이룹니다.

이러한 사람을
보살승이라고 하며,
이승과는 달리
유여열반이 아닌
무여열반을 증득합니다.

그러면
부처님의 근본 관점은
어느 곳에 있느냐 하면
성문승도 연각승도 보살승도 아닌
오직 일승(一乘)입니다.

보살승은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의
무한한 세월 동안
남을 위해 노력해서
정등각(正等覺)을 이룸을 말하는데,

일승(一乘), 일불승(一佛乘)이란
진여법계를
지금 바로 깨치는 것입니다.
곧 중도만 정등각하면
진여법계가 그대로 현전하므로
중도를 정등각해서
법계를 그대로 바로 보는
이것을 일승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일승은 중도를 내용으로 한
진여법계를 깨치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불법을
성취함에 있어서는
오직 중도를 바로 깨쳐서
진여법계를 바로 증득하면
화장세계에서
임의자재하게 생활할 수 있게 되니
이것이 바로 곧은 길(直路)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부처님 당시에
모든 제자들이
부처님의 법문 끝에
바로 깨쳐서 중도를 증득했지
무슨 다른 길을 빙빙 돌아서
공부를 성취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본래 바른 길,
즉 지름길로 가서
부처님 법문을 깨치고
불법을 성취했지
무슨 육도만행을 닦아 성불한다든지
삼아승지겁 동안을 닦아야 한다든지
하는 얘기는
근본 원시경전에는 없는 말입니다.

진여법계로
바로 들어가는 이것이 일승입니다.

그러면 왜
삼승을 설하였는가?

소승불교와 대립적인 입장에 선
대승불교에서 방편으로 한 것입니다.

부파불교인 소승불교에서는
이들은 순전히 자리에만 치중하고
이타는 행하지 않았다고
대승에서 주장합니다.

이타가 없기 때문에
소승의 자리적인
편견을 부수기 위해서
이타의 육도만행을
강력히 주장한 것입니다.
이것이 보살승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도
중도일승(中道一乘)에서 볼 때는
일종의 방편이지
실지의 구경법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지. 관(止觀),
정. 혜(定慧)를 함께 닦아서
중도를 정등각하여
진여법계로 들어가면 그만이지
거기에서 보면
무슨 이승이니 삼승이니 하는
헛된 길(空路)은 없습니다.


원시경전에
부처님 제자들이 깨친 경로가
삼아승지겁이 걸린다고 하는 등의
수증(修證)의 점차(漸次)는
결코 보이지 않습니다.

비구 교진여가
부처님의 중도법문을 듣고
바로 깨치고 나서
‘집(集)이 곧 멸(滅)'이라고,
즉 생사가 곧 열반이라고 하니
부처님께서 인가하셨다는 말은
내가 앞에서도
여러 번 귀 따가울 정도로 말했습니다.

말로서만
'생사 즉 열반'이 아니라
확실히
원융무애한 것을 체득한 것입니다.

그 뒤에도
부처님의 제자가
깨친 사실이 자주 나오는데
그것을 보면
모두가 바로 깨쳐 들어갔지,

'삼아승지겁을 닦아 성불한다'
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둘러가는 공로(空路)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일승 사상은
대승불교에서 크게 주장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 일승이라는 말이
반드시 대승경전에서
비로소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은 아함경(阿含經)에
일승도(一乘道)라는
형태로 드물기는 하지만
그 용례가 보입니다.

하지만 그 내용까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것과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 여러 비구들이여,
이 일승도(一乘道)가 있어서
중생을 청정하게 하고,
근심과 슬픔을 초월하여
괴로움과 걱정을 멸하며
바른 도리를 증득하여
열반을 증득하게 하니
이른바 사념처(四念處)니라.

어떤 것을 사념처라 하는가.
몸에서 몸(身)을 관하여
열심히 바르게 알고 바르게 상념하여
세간의 탐욕과 걱정을 조복하여 머물며,

수(受)에서 수를 관하여
마음(心)에서 마음을 관하여
법(法)에서 법을 관하여 머무느니라.

여러 비구들이여,
이 일승도가 있어서
중생을 청정하게 하고
근심과 슬픔을 초월하며
괴로움과 걱정을 멸하고
바른 도리를 증득하여
열반을 증득하게 하니,
이른바 사념처니라.”
(南傳大藏經 제 16권 상,
相應部經典 5, pp. 357-358)

여기서 말하는
일승도란
신(身). 수(受). 심(心). 법(法)
의 네 가지를 바로 알고
바로 생각(正知正念)한다는 것입니다.

즉 몸은 청정한 것이 아니며,
수는 즐겁지 못한 괴로움이고,
마음은 항상하지 않는 무상한 것이며,
법은 자성이 없는
무아(無我)라고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근본불교에서는
부처님이 설한
여러 가지 수행법 가운데
사념주(四念住),
또는 사념처를
바로 일승도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역(漢譯)아함경에서는
이것을 다소 다르게 말합니다.

그 한역의 내용 일부를
다음에 인증해 보겠습니다.

어느 때 부처님이
중각 강당에 계시었다.
존자 아난은 이차(離車)에게 말하였다.

"여래응등정각(如來應等正覺)께서
알고 보는 바는,
타오르는 번뇌를 떠나
청정한 곳에 뛰어 나는
도를 세 가지 설하여,
일승도로써
중생을 정화하고
근심과 슬픔을 여의며
괴로움과 번뇌를 넘어
진여의 법을 얻게 한다.

무엇이 셋인가.
이와 같이 성스런 제자는
청정한 계율에 머무니. . . .

또 이차여,
이와같이 청정한 계율을 구족하면
탐욕. 악. 선하지 않은 법을 여의며
내지 제 사선(第四禪)을
구족하여 머무른다.

또 삼매를 바르게 받아 지녀서
이 고성제(苦聖諦)에서
여실히 이를 알고,
고집성제(苦集聖諦),
고멸성제(苦滅聖諦).
고멸도적성제(苦滅道赤聖諦)
에서 여실히 알고 구족한다.

이차여,
이것을 여래응등정각께서
알고 보는 바,
세 번째로 타오르는 번뇌를 떠나
청정한 곳에 뛰어나는 것을 설하여,
일승도로써
3중생을 정화하고
괴로움과 번뇌를 여의며
근심과 슬픔을 멸하여
여실한 법을 얻게 한다고 이름하느니라. "

一時에 佛住毘舍離미후
池側重閣講堂이러라. . . .
尊者阿難이 語離車言호대.
如來應等正覺의 所知所見은
說三種離熾然하고 淸淨超出道하며
以一乘道로 淨衆生하고 離憂悲하며
越苦惱하여 得眞如法하니라
阿等僞三인가
如是聖弟子는 住於淨戒하고....
得次離車如 是淨戒具足하여
離欲惡不善法하여
內地第四禪具足住하며...
復有三昧正受하여
於此苦聖諦에 如實知此하고
苦集聖諦 苦滅聖諦 苦滅道跡聖諦에
如實知九足하니라. . . .
離車여
是名如來應等正覺이 所知所見으로
說第三離跡然하고 淸淨超出하여
以一乘道로 淨衆生하고
離苦惱하며 滅憂悲하여
得如實法이라하니라.
(大正藏 제2권. p. 147下- 148上,
雜阿含經 29券)

이상의 내용은
외도의 제자인 이차(離車)에게
부처님의 제자인
아난존자가 대답한 것입니다.

즉 청정한 계율을 지키고,
사선 등의 선정을 구족하며
고. 집. 멸. 도의 사제를 숙지하면,
고난과 근심에서
벗어나 청정하게 되고
참다운 법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계율(戒律)과 선정(禪定),
사제(四諦)등의 세가지는
부처님이 중생들을 위하여
일승도로서 시설한 것이라고 봅니다.

한역 잡아함경에는
이 일승도라는 말 외에도
여실한 법을 의미하는
진여라는 말도 나오지만 ,

이 두 가지가 이에 상응하는
파리(巴利:Pali)경전에는 없으므로
이 말들은 다소
후대에 삽입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승도라는 말은
비단 여기서 뿐만 아니라
앞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파리어로 씌어진 경전에도 나오므로
결코 후대의
대승불교에서
비로소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 일승도라는 의미가
아함경과 대승경에서
똑같이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아함경에서는
일승도가 사념처라고 하는 등
삼승에 대하는
대승불교의 일승과는
거리감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뜻이야 어찌되었든
일승이라는 말도,
아뢰야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대승불교가 흥륭하기 이전의
근본불교에서부터
일찍이 사용되었다는 점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래가 세상에 나오거나
세상에 나오지 않거나
법성은 항상 머무르니,
여래는 그것을 스스로 알아
바른 깨달음(等正覺)을
이루어서 나타내 연설하고
분별하여 열어보이느니라.

이른바
이 일이 있으므로 저 일이 있고,
이 일이 일어나므로
저 일이 일어나느니라.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 생을 연하여
노. 병. 사. 우. 비. 뇌. 고가 있으니
이것이
괴로움의 쌓임(苦陰)의 모임이니라.

무명이 멸한즉 행이 멸하고
내지 생이 멸한 즉
노. 병. 사. 우. 비. 뇌. 고가 멸하니
이것이 괴로움의 쌓임의 멸함이니라.

如來出世커나 及不出世커나
法性은 常住하니
彼如來自知하여 成等正覺하고
願現演說하여 分別開示하느니라
所謂是事有故로 是事有하며
是事起故로 是事起하니
緣無明有行하고
乃至緣生有老病死憂悲惱苦니하니
如是苦陰集하느니라
無明滅則行滅하고
乃至生滅則老病死憂悲惱苦滅하니
如是苦陰滅하느니라
(那梨迦經, 相應部經典 2권)

이 경전에서는
연기의 성품을
법성(法性)이라고 하였는데,

법성은
만법의 자성(自性)이라는 말입니다.
이 법성은 항상
법계에 존재하므로
연기, 곧 십이연기는
항상 법계에 존재하는
법성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른바 연기법은
세존께서 만든 것입니까,
다른 사람이 만든 것입니까? "

부처님께서는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연기법이란
내가 만든 것이 아니요,
또한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래가 세상에
나오거나 나오지 않거나
법계에 항상 머물러 있느니라.

여래는 이 법을
스스로 깨치고
바른 깨달음을 이루어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분별하여 연설하고
개발하여 나타내 보이느니라.

이른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나느니라. "

世尊이시여
謂緣起法은
謂世尊作가 爲餘人作郞오

佛告比丘하사대
緣起法者는
非我所作이며
亦非餘人作이니라

然이니
彼如來出世거나 及末出世거나
法界常住하느니라
彼如來自覺此法하여
成等正覺하고 爲諸衆生하여
分別演說하고 開發願示하느니라
所謂此有故彼有하며
此起故彼起하느니라

(雜阿含經 第十四券;
大正藏 第二券 p. 85 中)

이 연기법경(緣起法經)은
앞의 내용과 더불어
연기법의 성품을
뚜렷이 규정짓고 있습니다.

앞의 경전에서는
연기법의 성품은
곧 법성이라고 하였으며,

이 경전에서는
그 연기법은 항상
법계에 머무른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연기법의
법성, 법계로의 해석은,
연기법이 생멸적이고
시간적인 인과관계를
내포하든 아니든
그 근본은
진실한 법성의 연기,
법계의 연기로 보아야 한다는
뜻을 암시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연기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보며
법을 보는 사람은 연기를 보느니라.”

緣起를 見하는 者는 法見하며
法見者는 緣起를 見하느니라.
(中阿含經,p. 241)


“발가리(跋迦梨)여,
법을 보는 사람은 나를 보며
나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보느니라.

발가리여,
법을 보아서 나를 보며
나를 보아서 법을 보느니라.”
(相應部經典 三券 p. 190)

연기를 바로 보는 것이
법을 바로 보는 것이며,
법을 바로 보는 것이
성불(成佛)이라는 말입니다.

여래는 법계를 정등각 하고
연기를 직접 꺠치고
중도를 직접 증득했습니다.

여기에서
그 직접 증득하고 바르게 꺠친
연기는 곧 법이며
곧 중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님이
분명히 교시되어 있습니다.

한편 법계고 하면
화엄종의 법계연기에서만 주장하였지
근본 원시경전에는
그런 이론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는데,

이미 앞의 예문에서 드러나듯이
원시경전에서도
연기법과 관련하여
법계설이 설해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에서
예문 한 가지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사리불(舍利弗)은
잘 법계에 도달하였느니라.”
(南傳大藏經相應部經典
第二券 p. 81)


이는 부처님만이
법계에 도달했다는 것이 아니라
제자인 사리불도
법계에 잘 도달하였다고
부처님이 친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삼승을 설하였는가?
소승불교와 대립적인 입장에선
대승불교에서 방편으로 한 것입니다.

부파불교인 소승불교에서는
이들은 순전히
자리에만 치중하고
이타는 행하지 않았다고
대승에서 주장합니다.

이타가 없기 때문에
소승의 자리적인
편견을 부수기 위해서
이타의 육도만행을
강력히 주장한 것입니다.
이것이 보살승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도
중도일승(中道一乘)에서 볼 때는
일종의 방편이지
실지의 구경법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지. 관(止觀), 정. 혜(定慧)를
함께 닦아서 중도를 정등각하여
진여법계로 들어가면 그만이지
거기에서 보면
무슨 이승이니 삼승이니 하는
헛된 길(空路)은 없습니다.

이상의 여러 가지
원시경전을 살펴본 까닭은
천태대사나 현수대사 같은
그런 큰스님들이
아함불교(阿含佛敎)를 소승이라 하여
무시하다시피 했으므로
후대에서도 아함(阿含)이라 하면
으레 소승불교
계통의 경전으로만 인식하고
대승적인 법계 연기. 진여연기를
원초적으로, 그리고
산발적으로 설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역의 아함경이나
이에 상당하는 팔리어의
남전대장경에 표현되어 있는
근본불교는 결코
후대에서 잘못 이해한
유부(有部)의
소승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해설해 온
가전연경 등
연기설에 관련된
경전들의 사상에 의하면
부처님의 근본법은
중도연기(中道緣起)에 있는데,

이 중도연기란
곧 진여법계를
말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진여법계란
천태종(天台宗)이나
화엄종(華嚴宗)등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일승원교(一乘圓敎)이며,
화엄경. 법화경의 근본 도리입니다.

원시불교 경전에는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진여법계의 사상을 구성하는
중도(中道)나 법계(法界).
법성(法性). 여여(如如),
진여(眞如)등의 사항이
연기설을 주축으로 하여
부분적이고
원초적인 형태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의 근본불교에 있는
중도사상. 연기사상. 진여법계사상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화엄의 법계연기사상입니다.

흔히 화엄사상을
부처님 뒤에
발전되어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대로 말한다면

부처님이 근본불교에서
설한 연기설을
정통적으로 계승하여
보다 정치하게 발전시킨 것이
화엄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선종(禪宗)도 똑 같습니다.

화엄의 법계연기가
부처님의 진여법계연기 이론을
정통적으로 계승한 것이라면,
선종은 실천면에서
진여자성을 확철히 깨쳐서
진여법계를 직접 증득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중도를 정등각하여
진여법계를 증득하여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전해 내려온 것이
다름 아닌 선종입니다.

선종도 흔히 뒤에
중국에서 발달되었다고 보는데,
그것은 모르는 사람의 말입니다.

선종이란
부처님의 중도,
즉 법계연기. 진여법계를
단박에 증득(頓證)한 것이며
몸소 실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진여의 법계를
교리적으로 설명하든지,
혹은 증득하든지간에
이 사상은 후세에 발달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근본 불교시대에
미숙한 형태로나마,
적어도 문헌의 기록적인 측면에서,
친히 잘 말씀하시고
친히 증득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후세에 이르러
보다 완벽하게 이론화되고
문자화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설명한 연기법을
한 게송을 지어 읊어봅니다.


가없는 풍월은
눈(眼)속의 눈이요

다함없는 하늘과 땅은
등불 밖의 등불이러라.

버들은 푸르고 꽃은 예쁜데
십만의 집에 문을 두드리는
곳곳마다 사람이 답하네.

無邊風月眼中眼이여
不盡乾坤燈外燈이라
柳靑花明十萬戶에
叩門處處有人應이로다


대천대천세계의 곳곳마다
버들은 푸르고 꽃은 예쁜데
여기 불러도"예"하고
저기 불러도 "예" 합니다.

곳곳마다 부처님 없는 곳이 없고
곳곳마다 진여 아닌 곳이 없습니다.
다함이 없고
한이 없는 연기법을
이렇게 표현해 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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