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법문 003/퇴옹 성철
깨달음의 종교 (3)
다음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바른 깨달음, 곧 증지(證智)를
이루느냐 하는 것입니다.
* 선남자야,
다만 모든 성문(聲聞)들의
둥근 바 경계는
몸과 말과 마음이 모두 끊어졌어도
끝내 저들의 친증(親證)하여 나투는
열반에도 이르지 못하거든
하물며 어찌 생각있는 마음으로서
능히 여래의
둥근 깨달음 경계를 헤아리겠느냐.
반딧불을 가져
수미산을 사르려 하여도
끝내 불태우지 못하듯,
윤회하는 마음으로서
지견을 내어
여래의 대적멸 바다에 들려 하여도
마침내 이르지못할 것이니라.
善男子
但諸聲聞 所圓境界
身心語言 皆悉斷滅
彼之親證所現涅槃
何況能以有思惟心
測度如來圓覺境界
如取螢火燒須彌山
終不能着 以輪廻心
生輪廻見
入於如來大寂滅海終 不能至
(圓覺經 金剛菩薩章)
이와 같이 불법이란
반드시 깨쳐야 되는 것인데
깨친다는 것은
언어문자 뿐만 아니라
몸과 마음까지도 다 떨어진
무심지(無心地)에 이르러서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만약 생멸(生滅)하는
심의(心意)를 가지고
불교의 깊은 뜻을 배우려고 하면
동쪽으로 가려고 하면서
서쪽으로 가는 것과 같느니라
(洞山良介禪師)
심의식(心意識)이라는 것을
좀더 자세히 말하면
심(心)이란
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이며
의(意)란
제7식말나식(第七識末那識)이며
식(識)이란
전6식(前六識)을 말합니다.
분별의식인 6식이나
무분별인 제8식이거나 간에
심의식을 가지고
불법을 알려고 하는 사람은
마음으로는 동쪽으로 가려고 하면서
몸은 서쪽으로 가는 것과 마찬가지니
불법은
유심경계(有心境界)로서도
알 수 없고
무심경계(無心境界)로서도
또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 법의 재물을 덜고
공덕을 없앰은
심의식으로 말미암지 않음이 아니니
이런 까닭에
선문(禪門)에서는
제8식까지 버리고
남(生)이 없는 지견력(知見力)에
문득 들어가네.
損法財滅功德 莫不由斯心意識
是以禪門了却心 頓入無生知見力
(證道歌)
언어문자라는 것은
심의식의 표현입니다.
부처님은 언어문자를
달 가리키는 손가락에 비유하셨습니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누구든지 그 손가락 끝을 따라
허공에 있는 달을 보아야 할 것인데
바보는 달은 쳐다보지 아니하고
손가락 끝만 쳐다보고
달이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천년 만년 가도
달은 영원히 보지 못하고 맙니다.
부처님꼐서
팔만대장경을 말씀하신 것은
바로 달 가리키는
손가락을 펴 보이신 것이니
그 손가락을 물고 빨고 해보았자
결국 달은 보지 못하고 맙니다.
그러니
그 손가락 저편에 있는
달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언어문자에 집착해서
손가락 끝만 보고
달은 보지 못하는 까닭에
마침내 자성을
깨치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천년 만년
손가락 끝만 보아서는
달은 못보는 것이며
손가락 끝을 보고
달이라고 하든지
손가락 끝만 보고 있으면서
달 보기를 기다린다면
이런 바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 네가 비록 억천만 겁토록
여래의 묘장엄법문을 기억하여도
하루동안
선정(禪定)을 닦느니만 못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아난존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아난존자가 총명하고
지해(知解)가 뛰어나서
언어문자를
기억하는 것으로만 생명으로 삼고
실지 선정을 닦지 아니하므로
부처님께서
너무나 딱하게 여겨
아난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외에도
부처님께서 언어문자만
기억하는 것으로 만족해 하는
아난에게 타이르신 일이 많습니다.
'너하고 나하고는
저 과거 무수겁 동안
같이 발심하여 성불하려고 공부하였다.
그러나 너는
다만 언어문자만
따라가서 그것만 기억하고,
나는 틈만 있으면 선정을 닦았다.
선정을 닦는것은 밥을 먹는 것이요,
언어문자를 기억하는 것은
밥 얘기만 하는 것이니
어찌 배가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언어문자란 처방전이다.
거기에 의거해서
약을 지어 먹어야
병이 낫는 것이지
처방전만
열심히 외어 보았자
병은 낫지 않는다.
너는 처방전만 기억하고 있으니
중생병이 낫지 않은 것이고
나는 약방문에 의지해서
약을 먹었기 때문에
부처를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늘
언어문자를 기억하는 것을
능사로 삼지 말고
감히 선정을 닦으라고 간절하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으나,
아난은 부처님 생전에는
그 병을 고치지 못하고,
마음 가운데
깨침을 얻지 못했던 것입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가섭존자가 중심이 되어
필발라굴(七葉窟)에서
대중들을 모아
부처님께서 생전에 하신
법문들을 수집. 정리하게 되었는데
거기에 아난존자도 참석하였습니다.
아난존자의 총명. 지해는
물을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겨 부울 때
한방울 흘리지 않고 붓듯이,
그렇게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던 만큼
부처님 법문을 수집하는 데 있어서도
가장 수승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가섭존자께서 생각해 보니
아난의 총명이 뛰어나
부처님 법문을
다 기억은 하고 있으나
마음 가운데
깨치지 못하였으므로
실지의 부처님 법은 모르니,
그런 사람을 대표로 내세워
결집(結集)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비유로 이야기하자면
금강산 안내문을 잘 외워
자기가 본 것 같이
설명할 수 있다 하여도
실지로 금강산을 본 사람과
못 본 사람과는
근본적으로 틀리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문을 결집하는 데 있어서
참으로 자기가 눈을 뜨고
자기가 법을 보고
자기의 마음을 깨친 후에
부처님의 법을
남에게 소개해야만
부처님 법문이 전하는 것 만으로는
근본 생명이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섭존자가 방편을 써서
아난이 없으면
부처님 법문을 결집하지 못한다는
대중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여기는 사자굴이니
너 같이 마른 지해로 인하여
몹쓸 병이 든 여우가
어찌 이 사자굴에 들어올 수 있겠느냐'
하면서
필발라굴에서 쫓아내 버렸습니다.
그러자 아난이
애걸복걸하였습니다.
"제가 어리석어서
언어문자에만 탐착되어
마음의 근본을 깨치지 못하였습니다.
부처님이 떠나실 때
지금 누굴 의지하여
공부해야 하겠습니까라고 여쭈니,
부처님께서'
나의 대법(大法)을 가섭에게 전했으니
너는 내가 떠난뒤
가섭을 의지해서 대법을 성취하라'
고 말씀하셨는데
이제 사형(師兄)이 나를 쫓아내시면
나는 누굴 의지해서
대법(大法)을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울면서
간절히 용서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래도 가섭존자는
"너는 지해 총명으로
몹쓸 병이 든 여우 새끼니
이 사자굴에는 살 수 없다.
부처님 법문을 결집하는
이 회상에 꼭 참석하려면
깨쳐서 오너라"하고
기어이 쫓아내 버렸습니다.
그렇게 쫓겨났으나
아는 것이 많으니
신도들이 와서 예배하고
큰스님이라고 받드니,
쫓겨난 것도 다 잊어버리고
마른 지해로서
다시 대중들 앞에서 법문을 했습니다.
그때, 같은 부처님 제자인
발기(跋耆)비구가 있어
조용한 처소에서
공부만 하고 있었습니다.
아난존자가 와서 법문한다고 하니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 들어
번잡함이 이루 말할 수 없어
도저히 공부를 할 수 없어
아난에게 다음과 같이 타일렀습니다.
고요한 나무밑에 앉아
마음은 열반에 들어
참선하고 계으르지 말라
말 많아 무슨 소용 있는가.
그때서야
아난존자가 술깬 사람처럼
정신이 번쩍 들어
'아! 큰일났구나.
가섭존자에게 쫓겨나
여기 와 있는 신센데
이 무슨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가'
하고, 크게 반성하고는
그때부터 부처님이 생전에
그렇게 부탁해도 하지 않던
선정을 열심히 닦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선정을 익혔는지
그 기간은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앉으나 서나 밤낮으로 침식을 잊고
열심히 용맹정진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날 저녁
너무나 피곤하여
좀 누워야겠다고 생각하고
목침을 베려는 순간에
확철히 마음을 깨쳤습니다.
거기서 다시
가섭존자를 찾아가
인가(認可)를 받고
부처님 법문을 결집하는
필발라굴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시아문(如是我聞)',
즉 내'이렇게 들었노라'
로 시작되는 경전들이
편찬케 되었던 것입니다.
불교 역사상
부처님 법문을 모은 경전은
물론 그 뒤에
성립된 것도 많이 있지만
대개는 아난존자가 구술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아난존자 같이
부처님 법문을 잘 기억해 아는 사람은
천추만고에 그 누구도 없지만
깨치지 못한 연고로
같은 부처님 제자이면서도
가섭존자에게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였으니
이는 곧 불교의 생명이
언어와 문자를 기억하는
총명에 있지 아니하고
마음을 깨치는 데 있음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는
사실(史實)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이 근본 생명을
잊어버리지 아니해야 합니다.
생명없는 사람은 송장입니다.
그러니 송장 불교가 아닌
살아있는 불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 가운데서
부처님 진리를 깨쳐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항상 말하는 것인데
팔만대장경 속에서
불법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얼음 속에서 불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팔만대장경에 무슨 잘못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고
그 언어문자에 집착되어
그러한 언어문자가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죄가 있을 뿐임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