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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 법문 027-4/퇴옹 성철

작성자發菩提心|작성시간16.04.24|조회수22 목록 댓글 0

백일 법문 027-4/퇴옹 성철

1. 심식설(心識說)의 근원 04


어느 때 세존은
사위성 기수급고독원에 머물러 계셨다.

"비구들이여,
어리석고 무지한 범부들은
이 사대(四大)로 만들어진 몸에서
싫어하는 뜻을 내고
싫어하여 떠나고 해탈하려고 한다.

비구들이여,
이 심(心)
혹은 의(意) 혹은 식(識)
이라고 부르는 것에

어리석고 무지한 범부는
싫어하는 뜻을 내지 못하고
싫어하여 떠나지 못하며
해탈하지 못하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어리석고 무지한 범부는
긴 밤에
이것은 내 것(我所)
이라는 집착이 있어서,

이는 내 것이고,
이는 나(我)이며,
이는 나의 자아(自我)
라고 취착(取着)하느니라.

그러므로
어리석고 무지한 범부는
싫어하는 뜻을 내지 못하고
싫어하여 떠나지 못하며
해탈하지 못하느니라.

비구들이여,
어리석고 무지한 범부는
이 사대(四大)로 만들어진 몸을
나(我)라고 생각함이 ,
심(心)을 나(我)라고
생각하기보다도 더하다.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이 사대로 만들어진 몸은
나타나서 1년을 머물고
2년을 머물고 3년을 머물고
4년을 머물고 5년을 머물고
10년을 머물고 20년을 머물고
30년을 머물고 40년을 머물고
50년을 머물고 백년을 머물고
다시 오래 머물 수 있느니라.

비구들이여,
그렇지만 이 심(心)
혹은 의(意)혹은 식(識)
이라고 불리는 것은
낮과 밤에 전변(轉變)하여
다른 것으로 생기고
다른 것으로 없어지느니라.

비구들이여, 비유하면
원숭이가 수풀 속을 배회하면서
한 가지를 잡았다가
그것을 버리고
다른 한 가지를 잡는 것과 같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이 심(心)
혹은 의(意) 혹은 식(識)
이라고 불리는 것도
또한 낮과 밤에 전변하여
다른 것으로 생기고
다른 것으로 없어지느니라.

비구들이여,
그렇지만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는
연기(緣起)를 잘 사유하느니라.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으며
저것이 생함으로 이것이 생하며,

저것이 없으므로 이것이 없으며
저것이 멸하므로 이것이 멸하느니라.

곧 무명에 연하여 행이 있으며
행에 의하여 식이 있고. . . . .

이와 같은 것이
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모임(集)이니라.

무명의 남음이 없고,
탐욕을 떠나고 소멸에 의해서
행의 멸이 있으며,

행의 멸에 의해서 식의 멸이 있고. . . . .

이와 같은 것은
이 모든 괴로움의
쌓임의 멸함(滅)이니라.


비구들이여,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는
색(色)에서 싫어하는 뜻을 내고
수(受)에서는 싫어하는 뜻을 내고

상(想)에서는 싫어하는 뜻을 내고
행(行)에서도 싫어하는 뜻을 내고
식(識)에서도 싫어하는 뜻을 내느니라.

싫어하는 뜻을 내는 까닭에
싫어하며 떠나느니라.

탐욕을 떠나는 까닭에
해탈하느니라. "
(南傳大藏經 第十三券
相應部經典二)


중생은 속박된 생활을 하고 있어
해탈 대자재한 생활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어리석은 중생은 긴 밤에
나(我)와 나의 것(我所)
이라는 집착이 강하여

일체법과
일체 사물에 있어서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自我)
라고집착하고 매달립니다.

이렇게 집착하여
싫어할 줄을 모르므로
번뇌에서 떠나지 못하고
해탈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긴 밤(長夜)'이란
캄캄한 기나긴 밤중이라는 뜻인데
해가 지고
캄캄한 그때만 밤이 아닙니다.

자기의 진여자성을 보지 못할 때는
누구에게나
억천만겁이 다 캄캄한 밤중입니다.

중생이 실제로
무명의 근본을
뿌리째 뽑아 없애버리고
참으로 진여자성을 보아서
청천백일 같은
정각을 이루기 전에는
언제든지 캄캄한 밤중입니다.

이와 같이
일체 사물에 집착이 강한 중생은
심, 또는 의, 또는 식
이라고 불리는 정신적인 면보다,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네 가지로 구성된 이 육신을
보다 더 강하게
자기 자신(自我)의 당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은 수시로 변하여
이리 분별 저리 분별하고,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는 등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요동칩니다.

그것은 마치
숲속에서 원숭이가
이 나뭇가지를 잡았다가
다시
저 나뭇가지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비하여
육신은 태어나서
1년, 2년 혹은 10년, 20년,
또는 백년,
때로는 그보다 더 오래 존속하여,
정신적인 것보다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생은 마음보다도
몸을 더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배운
거룩한 제자들은
연기의 진리를 깊이 배우고 사유하여
무명을 깨뜨리고
모든 괴로움을 걷어버립니다.

그리하여
육신을 이루는 요소인 색(色)과
정신적인 면을 이루는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다섯 가지 요소에
집착하지 않고
싫어하는 뜻을 내어
그로부터 멀리 떠납니다.

집착과 탐욕을 떠나기 때문에
마침내 해탈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특히 역설하는 바는 ,
중생이 탐욕을 끊지 못하여
해탈하지 못하는
보다 중요한 원인은
육신보다도
심의식(心意識)에
더 미혹하다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사대로
구성된 육신에 대해서는
더러 혐오하여
떠나려고 하고 해탈하려고 하지만,

정신적인 심의식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심의식은
숲 속에서 원숭이가
이리저리 옮겨 다니듯이
아침에 변하고 저녁에 바뀌어
잠시도 머무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이 경전과 상응하는
한역 아함경에서
다시 한번 인용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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