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백일법문005 /퇴옹 성철

작성자發菩提心|작성시간16.04.09|조회수54 목록 댓글 0

백일법문005 /퇴옹 성철

절대적 인간관 (2)


유교에
양명학파(陽明學派)가 있는데
불교와 관련이 많습니다.

이 학파를 주장하는
왕양명(王陽明)의 말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사람 사람마다 나침반이 있어
만 지 변화의 근원이
본래 마음에 있구나.

이전의 잘못된 소견을 웃노니
가지마다 잎마다 밖으로 찾았네.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것을 홀로 알때
이것이 하늘과 땅
만유의 근본 기틀이로다.
자기집의 무진장 보화를 버리고
집집마다 밥그릇 들고
거지노릇 하는구나.

人人이 有箇定盤針하야
萬化根源이 本在心이라
却笑從前顚倒見하노니
技技葉葉外頭尋이로다. . . . .
無聲無臭를
獨知時에 此是乾坤萬有基라
據却自家無盡藏하고
沿門持鉢效貧兒로다.

여기서도
공연히 언어문자에 끄달려
딴 곳을 더듬고 있었음을
경책하였으니
가지마다 일마다
밖을 찾았다고 반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루바삐 마음을 돌이켜서
방편가설과
삿된 믿음에 얽매이지 말고
내 마음이 오직 부처인 줄 알아서
내 마음속의
무진장 보물 창고의
문을 열자는 것입니다.

왜 남의 집에
밥 빌어 먹으러 다니며
거지 노릇을 합니까?

이제까지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해 왔습니다.

이야기가 조금 벗어났지만
종교란 궁극적으로 무엇이며
그 가운데에서도
불교란 어떤 특징과
무엇을 근본으로 삼는냐
하는 문제를 잠깐 살펴봅시다.

물론 불교나 예수교나 회교나
이미 다 알다시피
세계적인 종교임에는 틀림없으나
각기 그 교조의 입장이 다르고
그 내용이 상이하므로
같은 종교라고 하더라도
사뭇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각 종교의
입장과 내용은 다르다 할지라도
구경목표는 다 같다고봅니다.

예를 이야기하자면
서울로 갈 때
북쪽에서 가든지 남쪽에서 가든지
서쪽에서 가든지 동쪽에서 가든지
어디서 가든지 간에
서울이 목표인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의 목표는 공통입니다.

그 공통인 종교의 목표가
무엇이냐 하면
상대유한의 세계에서
절대무한의 세계로 들어가
영원한 행복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상대유한의 세계는
생멸(生滅)의 세계이며
절대무한의 세계는
해탈(解脫)의 세계이니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건너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
종교의 근본목표인 것입니다.

영원한 행복이란
상대유한의 세계에서는
실현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근본 욕구는
영원한 행복에 있는데
절대무한의 행복을 얻기 위해서
절대무한의 세계로 들어갈 것을
목표로 삼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그 종교의 근본 목표입니다.

그러면 다른 종교는 그만두고
불교의 구경 목표는 무엇이냐 하면
부처님이 다른 경에서도
많이 말씀하셨지만
<기신론(起信論)>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고(苦)를 버리고
구경의 낙(樂)을 얻는다."
離一切苦하고
得究竟樂이니라.

모든 고(苦)를 다 버려버리고
종국적인 최후의 낙,
영원하고 절대적인
즐거움(樂)을 얻는다는 것이
우리 불교의 목표입니다.

그것은 곧 상대유한의 세계를 떠나
절대무한의 세계로 들어가
영원한 행복을 얻는다는 것과
그 내용이 꼭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상대유한의 세계를 버리고
절대무한의 세계로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서울로 가려면
서울 가는 이유를 알아야지
무조건하고 서울만 간다고 하면
미친 사람이니
그 이유를 좀 설명하겠습니다.

천지만물이 많아서
동물도 있고 식물도 있고
무생물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사람은
모든 면에서 수승(殊勝)해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란 살아있는 물건인데
살아있는 동안에
무엇을 목표로 하고
활동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 알아야 할 일입니다.

동서고금을 통해
철학자나 과학자나 종교가나
어느 학자 어느 사람이든지간에
분명한 살아가는 목표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행복에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이란 살아있는 동안에
그 산다는 데 있어서
고생되는 조건이 많이 있습니다.

고생의 내용을
각 방면에서 연구하고 분석해 보면
사람이란
실제로 고(苦)의 존재이지
낙(樂)이란 극히
일부분 뿐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삼계가 불타는 집이요,
사생이 고해다
(三界火宅四生苦海)'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삼계(三界),
즉 중생이 사는 이 우주 전체가
불타는 집과 같다는 것이니
그렇게 고생이 많다는 말이며,

사생(四生),
즉 생명으로 태어나는 모든 것이
고(苦)의 바다라는 것이니

불타는 집에서
고생만 하고 사는 것이
인생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나서 살아있는 동안에
고생 고생만 하다가
결국은 죽고마는 것이니
그동안 혹
좋은 일도 더러 있기는 있지만
그것은 순간적이어서
인생 전체로 볼 때는
고(苦)는 많고
낙(樂)은 적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는데
자살(自殺)할 수도 없고
어떻게 좀 고생을 덜하고
행복하게 살 수 없느냐 하는 생각은
고생하는 사람이
생각 안할래야 안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유사 이래로
사람들은 어떻게 하여야만
이 고생하는 가운데서
좀더 행복하게 살 수가 있겠느냐
하여 그 방법을 모색해 왔습니다.

행복에 두 가지가 있으니
일시적인 행복과 영원한 행복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이것을 보면 모든 것이
다 상대유한으로 되어 있어서
모순에 모순으로서 투쟁의 세계입니다.

투쟁의 세계에서
일시적으로 행복을 얻었다 해도
곧 끝이 있고 맙니다.

그렇지만 살아있는 이상
일시적인 행복에만 만족할 수는 없으니

당장 한 시간 후에 죽더라도
지금 이 순간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살 수 있느냐는 것을
공상(空想)하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니

이것이
영원한 행복의 추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원한 행복을
상대 유한의 세계에서는
이룰 수가 없으니

절대무한의 세계를 구상하고
거기 가서 영원한 행복을 받도록
노력하자는 것이
종교의 근본 뜻이라고 말해왔습니다.

이 현실세계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영원한 행복이라는 것을
성취할 가능성이 없으니
현실을 떠난 다른 세계를 모색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예수교의 천당설(天堂設)입니다.

이 현실 세계란
모든 것이 시간과
공간의 제한내에 있어서
영원하고 무한하지 못합니다.

이 현실세계에서는
아무리 뛰고 굴리고 재주를 넘어 보았자
중생이 참으로
본능적으로 욕망하는
영원한 행복이라는 것은
절대로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만치
이 현실 세계에서는
영원한 행복의 추구를 완전히 포기 하고
다른 세계를 찾아
그곳만이 절대무한하며
영원한 행복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
예수교의 천당설입니다.

저 하늘을 자꾸자꾸 올라가면
새로운 땅이 있고
그곳에는 모든 것을 모르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을 못할 것이 없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하며
일체를 초월한 절대자 하나님이 계신다.

그 하늘 나라 천당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거기 한번 들어가면
영원토록 생명을 누리고
영원하고 절대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하여 왔습니다.

사람이 영원하고
절대적인 행복을 누리는 곳이 있다면
현실인 이것을 다 버리고
그 곳으로 가자고
생각할 것 아니겠습니까?

아방궁이다 뭐다 해봐야 다 헛 것이니
다 버리고 그곳으로 가자 할 것입니다.

이것이 각 종교의
시발점(始發点)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종교가 조직화되고 체계화된 이후부터
인류의 사상을 지배하였는데
불교는 삼천 년,
예수교는 이천 년,
바라문교는 사천여 년의
세월이 흘러왔습니다.

사람의 지혜가 발달되기 전에는
천당설을 아무 주저없이 믿고 따랐는데
차차로 지혜가 발달함에 따라
그런 가르침이
거짓말 같은 생각이 들어
방황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큰 신학자들이 나서서
'합리(合理).
불합리(不合理)를 논하지 말고
예수의 말씀을
무조건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유명한 신학자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은
'불합리(不合理)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고 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교에 대한
근본이 어디 서있느냐 하면
절대적인 믿음,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
절대적인 신(信)에 기반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에 와서는
우주과학 시대가 되어서
하늘 나라를 맹목적으로
그대로 믿으라 하는 것은
통하지 않게 되었고

또 여러 신학사상들이 주장되어
예수교의 사상 자체도 전환하고 있지만
근본 교리는 그렇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당에 계시는 절대 신인
하나님을 내놓고는
예수교를 찾아볼 수 없고
하나님을 의지해서만
그 하나님의 힘, 타력(他力)으로써
절대무한의 세계인 하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교는 그와는 다릅니다.

상대유한의 세계를 벗어난
절대무한의 세계를
어느 곳에서 찾느냐 하면
자기의 마음 속에서 찾는 것입니다.

내 마음 속에
절대무한의 세계가
다 갖추어 있는 것이지
내 마음 밖에 ,
이 현실 밖에 따로 있지 아니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불교의 독특한 입장입니다.

혹 어떤 때 타력적인 방편을 쓰는 것도
결국은 자력으로
자기 마음을 밝히려는 데
그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불교를 믿으려면
자기에게 그러한 절대무한의 세계가
갖추어 있다는 것,
내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을
믿는 것이 근본 조건입니다.

내 마음 속에 갖추어져 있는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개발하여 사용하기 전까지는
그것을 자세히 알 수 없는 것이지만

부처님이나
옛 조사스님들의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오늘날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의 발달로
인간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이 있음이
차츰차츰
실증되어 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불교는 처음과 끝이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인간을 완성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는데

그 인간이
절대적 존재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자기가 절대적 존재이며
무한한 가능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개발해서
참으로 완전한 인격을 완성하자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어서
앞으로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많은 기여를 할 날이 있을 줄
나는 믿습니다.

이 소식을 게송(揭頌)으로
한번 읊으면 이러합니다.

"기이하다
내 집의 보배창고여
무한한 신기로운 공력
묘하여 측량키 어렵네

의지(意地)를 몰록 벗어나
마음 근원을 사무치면
신령한 빛이 영원토록
무너지지않는 몸을 비추도다."

奇哉自家大寶藏이요
無限神功妙難測이로다
頓超意地徹心源하면
靈光이 長照不壞身이로다.

이렇게
내 마음 속의 보배 창고를
확실히 믿고 개발하면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