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져라

작성자發菩提心|작성시간22.04.03|조회수22 목록 댓글 0

마음, 그 투명한 빛으로 /의연스님

마음 닦는 길 [修心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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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져라

【문】

깨달음을 얻은 후에
닦는 수행의 방법으로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고루 가져야 한다는 뜻을
아직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다시 자세히 설명하시어
미혹을 없애고
해탈의 문에 들게 하여 주십시오.


【답】

진리에 들어가는 천 가지 길이
모두 선정과 지혜가 아님이 없다.

그 요점을 들어서 설명하면,
단지 자기 성품(自性)의
본체(體)와 작용(用)의 두 가지 뜻에 불과하니
앞에서 말한
고요한 공적(空寂)과
신령스러운 영지(靈知)가 바로 그것이다.

 
선정은 본체이며 지혜는 작용이다.

본체에 즉한 작용이므로
지혜는 선정을 떠나지 않았고
선정은 지혜를 떠나지 않는다.

선정이 곧 지혜이므로 고요하면서 항상 알고,
지혜가 곧 선정이므로 알면서 항상 고요하다.

육조(六祖) 스님이
'마음에 산란 없음이 자기 성품의 선정이요,
마음에 어리석음 없음이 자기 성품의 지혜이다
'
라고 하신 뜻과 같다.

만약 이런 도리를 깨달아
고요함(寂)과 앎(知)에 자유로워서
선정과 지혜가 둘이 아니게 되면,
그것은
돈오문(頓悟門)에 들어간 사람의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먼저 고요함[寂寂]으로써
반연하는 생각을 다스리고
그다음에 또렷하게 [惺惺]함으로써
혼침(昏沈)을 다스린다 하여,

선후로 대치하여
혼침과 산란함을 고루 다스려
고요함에 들어가는 사람은
점수문(漸修門)에 속하는
열등한 근기의 수행이다.


그는 비록 성성함과 고요함을
평등하게 한다고 하지만,
고요함만을 취하여 수행함을 면치 못하니,
어찌 깨달은 사람의
본래의 고요함과 본래의 앎을 떠나지 않고
자유로이
두 가지를 함께 닦는 것이라 하겠는가?

그러므로 조계(曹溪) 스님은
'스스로 깨쳐 수행하는 것은
따지는 데 있지 않다.
만약 선후(先後)를 따지면
그는 미혹한 사람이다
' 라고 하셨다.

깨달은 사람의 경지에서
선정과 지혜를 고루 평등하게 가진다는 뜻은
애써 노력하는 것도 아니며
원래 무위(無爲)이어서
어떤 특별한 곳과 때도 또한 없다.

즉 빛을 보고 소리를 들을 때에도 그러하고,
옷 입고 밥 먹을 때에도 그러하고,
대소변을 볼 때도 그러하고,
사람을 만나 이야기할 때에도 그러하며,
나아가서는
걸어가고 서 있거나, 앉거나 눕거나,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혹은 기뻐하고 성낼 때에도 언제든지 그러하다.

마치 빈 배가
물결을 타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고
흐르는 물이
산을 끼고 돌 때에 형세에 따라
굽이돌고 바르게 흐르기도 하는 것처럼
마음마다 알음알이가 없다.

그리하여 오늘도 무심하여 자유롭고
내일도 무심하여 자유로워서
갖가지 반연을 따라도 아무런 걸림이 없고,
약을 끊거나 선을 닦지도 않는다.

또한 순박하고 솔직하여 거짓이 없어서
보고 들음에 무심함으로
한 티끌도 상대되는 것이 없으니
어찌 번뇌를
털어 없애는 노력이 필요하겠는가.

한 생각의
망령된 정도 일어나지 않으니,
반연을 잊으려 힘쓸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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