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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 해설 번역]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작성자Dorian|작성시간13.01.31|조회수694 목록 댓글 2

Lady Macbeth of Mtsensk : an Introduction

 

그의 작품은 사려 깊은 비평보다도 소음(그것이 찬사이건 비난이건 간에)을 더 많이 겪어야 했다.

                      - 보리스 아사피예프, 1934년

 

 

소비에트 연방의 가장 저명한 음악학자가 '맥베스 부인'의 초연이 있었던 해에 쓴 위의 문장은 아직도 유효하다. 쇼스타코비치의 두 번째 오페라는 분명 그의 가장 도발적인 작품이며, '역사적 이해'는 물론이거니와 '사려 깊은 비평'에 대한 어떤 시도도 많은 유혹에 빠지지 않게 주의해야만 한다. 이념적 당파성이나 무분별한 '감정적' 반응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정성에 대한 일반적인 기준에 따라 소비에트와 관련된 출처에서 나온 ‘증거’의 채택 같은 것 말이다.

 

완전하고도 적절한 제목으로 부르자면 '므첸스크 주의 맥베스 부인'이라 해야 할 이 작품은 1930년 10월에서 1932년 12월 사이에 작곡되었다. 당시 소비에트 연방은 '제1차 5개년 계획'에 따른 급격한 공업화의 시기에 있었다. 농장의 집산화는 강력하게 시행되고 있었으며, 이와 더불어 이른바 '부농'(원래는 부유한 착취자인 지주 혹은 농민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실제로는 집산화에 저항하거나 그럴 것이라는 혐의가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여기에 해당되었다)에 대한 대규모의 토지 몰수 및 강제 이주도 행해졌다. 1920년대에는 다양한 스타일(이념적인 측면은 거의 없었던)이 성행했던 예술계에서는 이제 프롤레타리아 기관들이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작성된 어떤 예술적 언명도, 특히 오페라와 같은 공적 영역에서는 한층 더 그 시대적 관련성을 찾아내야만 하는 처지였다. 그러나 '맥베스 부인'의 경우에 그 관련성이 존재했으며 여전히 존재하는 지점은 바로 '사려 깊은 비평보다도 소음'의 출처이다.

 

니콜라이 레스코프가 쓴 '스케치'는 1865년에 도스토예프스키가 발간하던 잡지 '시대'(Epokha)에 실린 형태로 처음 출판되었다. 줄거리는 실제의 삶에 바탕을 둔 것이다. 비록 억압받는 여성의 이야기는 당대의 러시아 문학에서 상당히 흔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가장 잘 알려진 예는 알렉산드르 오스트로프스키의 희곡 '폭풍'으로, 이 작품은 1859년에 초연되었고 이듬해에 출판되었으며, 1921년에는 야나체크에 의해 오페라('카차 카바노바')로 각색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로프스키의 카챠가 간통 때문에 고문을 당한 뒤 속죄의 차원에서 자살을 결행하는 데 반해, 레스코프의 (예)카테리나 르보프나 이즈마일로바는 시아버지(보리스 티모페예비치 이즈마일로프)에 이어 남편(지노비 보리소비치 이즈마일로프)과 남편의 조카(오페라에는 등장하지 않는다)까지 살해한다는 극적인 전개를 쫓아간다. 그녀의 마지막 행동은 후회보다는 복수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녀는 그 사이에 자신과 결혼한 연인(세르게이)을 앗아간 죄수(소녜트카)를 물에 빠뜨린 뒤 자신도 몸을 던지고 만다. 이렇게 해서 카테리나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억압에 대해 가장 격렬한 방식으로 저항함으로써 오스트로프스키에 대한 '비판'을 표현함과 동시에 이 무서운 이야기에 깃든 '전율'이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딜레마를 압도하게 함으로써 이 극을 추잡하게 만들어버린다. 바로 이것이 오스트로프스키가 표방하는 사실주의와 레스코프의 자연주의 사이에 놓인 괴리의 가장 중요한 징후이다.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는 그릇된 정보와 (자기)검열 그리고 공포가 판치는 분위기 속에서 나왔다. 이 사실과 이 시대 이후에 (이념적으로 어느 진영에서건) 나온 그의 전기 중 상당수가 풍문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은, 일반적으로 '역사적 증거'로 간주되는 사항들을 선뜻 받아들이는 것을 현명치 못한 태도로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탄생 배경은 상대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적다. 작가인 마리에타 샤기니얀은 쇼스타코비치가 이 이야기에 주목하게 한 것은 자신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생전에조차도 '진보적'인 작가로서의 평판에 의문이 제기되곤 했던 레스코프는 이미 1920년대에 소련 내에서 광범위하게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1927년에 체슬라프 사빈스키는 '맥베스 부인'의 영화 버전을 만들었으며, 쇼스타코비치는 이 영화가 '생생하고도 매혹적'이라 생각했다고 전해진다. 뒤이어 다양한 무대 상연용 개작이 선을 보였으며, 쇼스타코비치는 1930년에 보리스 쿠스토디예프(그는 오랜 세월에 걸쳐 작곡가의 일가와 절친한 사이로 지내다가 3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의 삽화가 들어간 소설의 신판을 구입했다. 그해 가을에 그는 레닌그라드의 극작가인 알렉산데르 프레이스와 공동으로 시나리오의 대강을 작성했으며, 두 사람은 공통의 지인들이 지닌 특징적인 기질에서 끌어낸 세부 사항을 정성들여 다듬었다. 1930년 10월부터 1932년 12월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이루어진 작곡은 영화와 발레 그리고 무대 음악을 위한 작업(총 아홉 작품이었다) 때문에 간간이 중단되면서 진행되었다. 이들 병행 작업은 쇼스타코비치가 처음으로 비교적 안락한 삶을 살 수 있게 해준 수입의 원천이 되었다. 이 시기는 또한 니나 바르자르와의 연애 기간이기도 했으니(두 사람은 1932년 5월 13일에 결혼했다), 그는 이 시기를 자기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여겼을 것이다.

 

원래 이야기의 내용에 대한 변경은 '증거'가 극도로 주의 깊게 다루어져야 하는 중대한 문제이다. 가사에 음악을 붙이는 작업은 불가피하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원래 바탕을 둔 텍스트의 의미를 철저하게 바꿔버린 오페라의 예도 적지 않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와 프레이스가 레스코프의 이야기에 가한 변경은 유난히 광범위했으며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었다.

 

작곡가가 표현한 의도는 첫째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카테리나 르보프나가 긍정적인 인물이라는 인상을 남겨 두려는 것'이었다. 그는 카테리나와 그녀를 둘러싼 인물들 모두와 관련해서 텍스트와 음악 양면에서 이를 행했다. 이리하여 그녀가 지노비의 조카를 죽이는 장면은 삭제되었다("설명할 수 있는 경우라 할지라도, 어린애를 죽이는 것은 언제나 부정적인 인상을 준다."[!]). 2막에서 그녀는 보리스가 세르게이에게 채찍질하는 모습을 억지로 보게 된다. 그녀가 되돌아오는 남편 면전에서 화를 돋울 목적으로 일부러 세르게이에게 키스하는 대목은 생략되었다. 3막에서 지노비를 죽였다고 고백하는 것은 세르게이가 아니라 그녀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 덧붙여진 두 번의 애절한 탄식은 그녀나 느끼는 배신감과 죄책감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뿐만 아니라 명확하게 서정적이며 민요적인 요소를 지닌 그녀의 성악 선율은 다른 등장인물 거의 모두에게 부여된 패러디적인 스타일(5막에 등장하는 늙은 죄수만이 유일한 예외이다)과 대조를 이룬다.

 

카테리나를 둘러싼 인물들에 대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적 패러디는 그의 다른 극장용 작품에서 너무나도 멋진 효과를 발휘했던, 뮤직홀과 카바레에서 차용한 스타일로 이루어졌으며 이것은 텍스트상의 교체 작업과 나란히 이루어졌다. 이렇게 해서 보리스 티모페예비치는 폭군에 더해 늙은 호색한이 되었으며, 카테리나에 대해 품은 욕정이나 4장에서 그를 따라다니는 빈 왈츠 패러디가 이를 보여준다. 그를 반주하는 바순과 트롬본이라는 독특한 악기 조합은 그를 쇼스타코비치의 발레 작품인 '볼트 op.27'에 등장하는 관료와 같은 다른 자본주의 혐오자와 연결시킨다. 보리스의 아들인 지노비 보리소비치가 주인으로서 또한 남편으로서 보여주는 무능함은 텍스트상의 다양한 암시와 알토 플루트의 음색에 의해 강조된다. 3막에서 두 사람은 조카의 에피소드를 회피하고 술에 취한 농부-밀고자와 나태하고 부패한 경찰들, 호색적인 성직자와 술고래 하객들이 벌이는 요란한 소동(하지만 당시의 현실에 오싹할 만큼 부합하지 않는가?)으로 대체함으로써 레스코프의 원작을 완전히 고쳐 썼다.

 

이러한 변경 가운데 상당수는 오스트로프스키와 체호프, 고골, 샬티코프-쉬체드린, 수초보-코블린, 도스토예프스키의 희곡과 소설 그리고 무소르크스키, 차이코프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베르크의 오페라에서 그 모델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저급 예술'이라는 수단(예컨대 오펜바흐와 뮤직홀 그리고 무성영화의 전통에서 끌어온 갈롭 같은)을, 특히 비극적인 결말을 지닌 오페라에서 이처럼 광범위하게 사용한 쇼스타코비치의 태도는 전례 없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혼합을 '비극-풍자'라는 말로 '설명'했다. 이것은 적어도 일석사조의 효과를 가져왔다. 첫째, 쇼스타코비치를 풍자성을 띤 이중적이고 모순된 제목(예를 들면 마야스코프스키의 1918년 작 '신비한 희가극'이나 브세볼로드 비쉬네프스카야의 1933년 작 '긍정적인 비극' 같은)이라는 러시아 특유의 전통과 연결시켰다. 둘째, 작곡가에게 이념 세력이 우위를 점하게 되더라도 자신의 의도를 해명할 수 있는 정당한 기회를 주었다. 셋째, 극장의 연출자들에게 자신의 방식으로 연출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했다. 넷째, 후대의 해석자들에게 풀라지 않는 난제를 남겼다. 쇼스타코비치의 진술을 액면 그대로 해석하면, 그가 레스코프의 원작에 가한 변경은 공산당의 이념에 부합하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여기에 내포된 풍자는 모두 혐오스런 옛 부르주아 시대의 악덕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맥베스 부인'에서 나는 현실을 드러냄과 동시에 한 러시아 상인의 일가에 깃든 폭압적이고 굴욕적인 분위기에 대한 혐오감을 일으키고자 했다. …(세르게이의) 잘생기고 멋진 외모에서는 장래의 부농의 모습이 두드러진다. …보리스 티모페예비치는 건강하고 힘센 늙은이로, 주인이자 부농이다. …반면에 지노비 보리소비치는 '자신이 황소만큼이나 부풀어오를 수 있다고 믿었던' 개구리처럼 보잘것없는 인물이다.

 

 

이러한 '드러냄'(razoblachenie)은 당시에 이미 소비에트 영화와 연극 및 발레의 특징이었으며, 위에서 인용한 시각은 1929년 12월에 이래 적용되어 온 스탈린의 정책이었던 '부농 계층의 청산'과도 오싹할 정도로 일치한다. 부분적으로는 이 작품의 초창기 연출이 카테리나에 대해 제각기 다른 시각으로 접근했다는 사실 때문에 야기된, 그녀의 불명확한 성격에 대한 숱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이것(즉 쇼스타코비치의 진술 - 옮긴이)은 덜 중요한 배역들과 그들에게 투영된 이 작품의 정치적 측면이 당시에 러시아인과 서구인 모두에 의해 해석된 방식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컨대 빅토르 수슬린이나 리처드 태러스킨 같은) 일부 권위 있는 해석자가 그들의 성격을 탐구할 때 계속해서 유지했던 태도이기도 하다.

 

이러한 해석을 학구적인 방식으로 논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반대 견해도 이와 마찬가지로 그럴듯하고 반박할 수 없다. 즉 1930년대에 쇼스타코비치가 남긴 모든 진술은, (1934년 8~9월에 걸쳐 열린 소비에트 작가 총회에서 막심 고리키에 의해)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 공식적인 강령으로 확립된 직후의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오페라가 어떻게든 공연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둘러댄 구실에 불과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쇼스타코비치의 첫 오페라인 '코'(1928)의 해설 책자는 원작의 풍자적인 목적을 그대로 살렸다고 시인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6년 뒤에 '맥베스 부인'을 해설한 사람들은 그와 같은 것을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설령 사실이었다 해도 말이다. 후대의 수정주의적 시각에 따르면, 풍자는 비유적인 것이며 과거의 착취자들이나 그들의 허구적인 자본주의적 육화(肉化)에 대한 것이 아니라 공산당의 규율 아래 압제적인 권위주의 세력이 존속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것이 된다. 이 오페라에서 부농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인물에 대한 의식적인 비인간화가 '당의 노선'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면, 4막(여기서 이 작품을 마무리하는 카테리나의 자살이 우리에게 마지막 인상을 남긴다)에서 죄수들에게 보이는 깊은 동정심은 반대 견해를 같은 수준으로 옹호한다고 볼 수 있다. 풍자적인 목적을 지닌 어떤 드라마도 그 풍자의 대상을 한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효과적이고 지속력 있는 풍자에서 중요한 점은 그 표적이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결론으로 성급하게 건너뛰는 것은 여전히 지나칠 정도로 쉬워 보인다. 예를 들어, 이념적으로 반대편에 있는 해석자들은 자기 부모를 당국에 고발했으며 가족들에게 살해된 뒤 순교자처럼 떠받들어진 당대의 실존인물 파블리크 모로조프라는 인물(이 이야기 자체는 파블리크의 고발 행위에 관한 한 소비에트 당국이 공식적으로 조작한 것임이 얼마 전에 밝혀졌다)과의 유사성에 주목했다. 태러스킨이 보기에 이 유사성은 카테리나의 살인에 대한 정당화와 연관된다. 반면 이언 맥도널드의 관점으로는 세르게이가 카테리나를 배신한 행위와 관련이 있다. 쇼스타코비치 자신은 그의 음악에서 어느 쪽으로도 명확한 단서를 남겨놓지 않았다.

 

또한 맥도널드는 (증거의 인용 없이)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경찰서 장면은 …곧바로 러시아 관객들에게 보안 기관들에 대한 풍자로 받아들여졌으며, 스탈린이 1936년에 볼쇼이 공연을 보았을 때 가장 격노했던 것도 바로 이 장면이었다(아마도 그는 경찰서장[경사]이 자신에 대한 희화화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바로 '당의 노선'의 이론가였던 고리키조차도 분명히 이 장면을 재미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스탈린이 화를 냈다 하더라도 그것은 노골적인 관능성을 보여주는 장면과 형편없는 연주 탓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쇼스타코비치 자신은 세르게이의 유혹 장면이나 지노비가 살해되는 대목에서 무심코 흘러나온 관객의 웃음에 대해 우려했다.)

 

쇼스타코비치의 의도에 대한 제3의 해석은 너무나 단순하다는 면에서 앞의 견해들보다 덜 유혹적이다. 저술가인 갈리나 세레브리야코바는 이 오페라를 쓸 당시의 작곡가를 관찰하고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는 사랑이라는 주제를 새롭게 조명하길 갈망했다. 한계를 모르는 사랑, 마치 괴테의 ‘파우스트’에서처럼 악마 자신에 의해 부추겨져 범죄까지 나아가게 되는 그런 사랑으로 말이다. …이 젊은 작곡가는 내게 결혼하기로 결심했다고 이야기하면서 흥분한 태도로 자기 말을 삼켜가면서 자신의 약혼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가 지키려 애썼던 객관적인 태도는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혹은 갈리나 비쉬네프스카야가 지적했듯이 '그는 니나가 망설임 없이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길 바랐으며, 따라서 그는 카테리나가 저지른 모든 범죄를 정당하다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랑의 비극적인 힘이라는 관념이 당시 쇼스타코비치의 창조적인 사고 속에 내재했다는 사실은 1928~32년 사이에 작곡되었으며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니나에게 헌정된 '일본 시가에 의한 여섯 개의 로망스'로 확증된다. (기묘하게 뒤틀린 음악 어법을 지닌 이들 노래는 1966년까지 공연되지 못했다.) 그리고 시회 규범을 압도하는 사랑 이야기에 대한 탐구가 작곡가의 마음속에서 최우선 사항이었다는 게 사실이라면, 어떤 의도적 비유도 부수적인 배역의 비인간화로 해석할 이유가 없다. 혹은 적어도 (스탈린 치하의 러시아에서 급격하게 체제 반항적인 언동이 되어가고 있던) 섹스나 폭력과 관련된 어떤 선정적인 이야기도 중심 테마(즉 사랑)에 연막을 치는 역할을 할 이유가 없다. 더구나 어떤 '긍정적인 영웅'도 없는 이 오페라에서 말이다. 그다지 매력적인 생각은 아니지만, 이러한 비인간화는 그저 단순히 젊은 작곡가가 재미로 한 일일 수도 있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러한 해석은 솔로몬 볼코프가 편집했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는 쇼스타코비치의 '회고록'인 '증언'에 기술된 관점과도 일치한다. "나는 '맥베스 부인'을 나의 신부, 장래의 아내에게 헌정했다. 따라서 이 오페라는 자연스럽게 사랑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만, 사랑만 다룬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세상이 천박한 것으로 가득차지 않았더라면 사랑이 어떠한 것이 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맥베스 부인'의 서사 구조가 위에서 기술한 것보다 더 복잡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카테리나의 음악은 다른 등장인물들을 철저하게 감염시킨 패러디적인 뮤직홀 스타일과 결코 무관하지 않으며, 3장에서 카테리나와 세르게이가 육체적으로 사랑을 나눌 때의 음악이 2장에서 아크시냐가 학대받는 장면이나 4장에서 세르게이가 채찍질당하는 대목과 본질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이들 장면에서는 모두 무성영화의 반주를 연상케 하는 소란스런 갈롭풍 음악(쇼스타코비치는 릴리언 기시와 버스터 키튼 영화의 열렬한 팬이었다)이 연주된다. (릴리언 기시는 무성영화 시대의 미국 영화배우로 순진무구한 이미지와 절제된 연기로 높은 인기를 끌었으며, 버스터 키튼은 배우 겸 감독으로 뛰어난 작품성을 지닌 코미디 영화를 다수 남겼다 - 옮긴이). 여기서 대체 무엇이 비극적이고 무엇이 풍자적이란 말인가? 더구나 서로 반대되는 서술 방식이, 하나가 다른 하나를 흡수하는 일 없이 병존하는 상황은 메이에르홀드의 극장 개념과 바흐틴의 '카니발' 및 소설에서의 ‘대화’ 이론 같은 복잡한 지적 풍조와의 더 폭넓은 유사성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아마도 유일하게 무가치한 해석은 이 드라마의 다면성을 제한해 압도적인 유일한 ‘메시지’를 찾아내고자 하는 태도일 것이다. 마지막 가능성으로, 이러한 다면성이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에 내재하는 극적 핵심을 풍부하게 하기보다 상쇄한다는 주장은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한다. 분명한 것은, 이 논의에 참여한 어느 쪽도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할 근거를 오랜 세월에 걸쳐 착실히 쌓아왔다는 사실이다.

 

'맥베스 부인'의 초창기 연출이 충격적일 만큼 상이하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모스크바에서 이 오페라를 연출한 블라미디르 네미로비치-단첸코는 '완벽한 사실적 비극’을 보여주겠다는 목표로 (대략 모스크바 남쪽으로 200마일 정도 떨어진 독립된 행정구역인) 므첸스크 주의 역사와 풍습을 조사하기까지 했다. 그는 이 오페라를 '카테리나 이즈마일로바'로 개칭했으나, 사실 심리학적 사실주의를 추구하고자 하는 그의 갈망은 카테리나에 대한 공감을 줄이고 쇼스타코비치의 악상이 암시하는 것보다 기괴한 주변적 요소를 억제함으로써 레스코프의 성격 묘사로 되돌아가는 결과를 낳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레닌그라드에서는 니콜라이 스몰리치가 각 배역의 흑백 양극성을 강조하는 연출을 시도했다. 이러한 착상과 모스크바 볼쇼이(스탈린이 관람했던 무대가 바로 이것이었다)의 위풍당당한 전통을 조화시키고자 했던 그의 시도는 세 가지 연출 가운데 가장 덜 성공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들 초기 공연에서 이미 텍스트와 음악을 교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각 대목에 한층 시각적으로 그리고 언어적으로 스며 있는 불일치는 두 개의 러시아 악보, 즉 1930년대 초에 출판된 악보 및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가 재발견한 '1932년 오리지널 악보'와 1979년에 함부르크의 출판사 지코르스키가 펴낸 악보 각각의 사이에서 명백하게 발견된다. 이러한 개작을 책임진 사람이 정확히 누구이며 또한 어떤 정료의 압력 아래 이와 같은 일은 행했는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오직 스탈린 치하의 러시아에서만 엄숙주의적인 태도가 판치고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이 오페라가 1935년 4월 5일에 필라델피아에서 공연되었을 때 '"형제애의 도시의 순결한 오락 협회"(Clean Amusement Association of the City of Brotherly Love)는 쇼스타코비치의 작품 공연을 막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며', 3장에서 욕정을 채운 세르게이가 진정되는 모습을 묘사하는 트롬본 글리산도는 삭제되었다[여기서 '진정되는'이란 실제로는 성교 후 성기가 위축되는 것을 뜻합니다. 잡지에는 차마 직역할 수가 없어서 ㅡㅡ;;;]. 어쨌든 1950년대에 찾아온 스탈린 이후의 '해빙' 시기에 쇼스타코비치 자신은 자기 작품의 섬뜩한 대목들에 대한 여러 가지 우려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1956~62년 사이에 이루어진 그의 개정 작업은 분명 당국의 승인을 얻기에 필요한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바로 오늘날까지도 지휘자와 연출가들은, 비록 거의 모두가 예외 없이 오리지널 스코어를 기본으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이따금 사소한 삭제를 행하며, 작곡가의 아들인 막심 쇼스타코비치의 경우와 같이 여기에 1963년 악보를 섞거나 붙여넣기까지 하고 있다.

 

1936년 1월 28일자 '프라우다' 신문 3페이지에 실린 무기명 기사는 소비에트 음악의 다원주의적 역사에 큰 제약을 가하는 것이었으며, 이 제약은 1953년 3월에 스탈린이 사망했을 때까지 위세를 떨쳤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심리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음악이 아닌 혼돈'이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었다.

 

 

최초의 1분부터 청자는 고의적으로 조장된 일련의 무질서한 소음에 혼란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메이에르홀드적 태도'의 가장 부정적인 측면이 오페라에, 음악에 증폭되어 이식된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표현된 관점이 스탈린 자신의 견해를 충실하게 반영한 것임은 명백해 보이지만, 이 중상모략의 원작자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적어도 열두 명의 용의자가 거론되었다). 그 뒤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은 몇 번 더 공연된 다음 무대에서 내려졌다. '인민의 적'으로 선언되었고 음악계의 동료 대부분이 그를 배척했음에도(사실상 셰발린과 카발레프스키만이 명예로운 예외에 속했다), 또한 자실까지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쇼스타코비치는 계속 작업해 오던 교향곡 4번을 완성했다. 그러나 그는 같은 해에 초연을 앞두고 리허설을 진행하던 중에 이 작품을 거둬들였다. 러시아와 소비에트의 여성에 대한 오페라 4부작을 작곡하려 했던 계획은 유보되었다. 그는 이후로 결코 다른 진지한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았고, 이반 제르진스키의 '고요한 돈 강'에 대한 스탈린의 승인으로 확립된 '노래-오페라'가 새롭게 부각되면서 러시아의 음악 전통은 오랜 침체기를 맞이했으며 아직도 거기서 완전히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이 원고는 1990년대 초에 작성된 것으로, 오늘날 러시아 음악이 처한 상황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 옮긴이).

 

글|데이비드 패닝(David Fanning)

번역|황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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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라 뮤지카'에 실렸던 건데, 저를 초죽음으로 몰아간 원고 중 하나입니다.

길기도 했지만, 문장 자체보다도 제가 당시 시대상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는 게 문제점이었죠.

하여튼 도움은 되리라 생각하고 여기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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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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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데니얼 | 작성시간 13.05.20 잘 읽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Dorian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5.20 아이고... 이 글에 댓글이 다! 감사합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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