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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열 小考

중의적 표현에 관하여

작성자말그리|작성시간07.01.30|조회수2,682 목록 댓글 3
중의적 표현에 관하여....


‘그는 구두를 신고 있다’라는 문장을 보자. 형태가 간단한 데다 어법상 아무런 흠을 잡을 수 없다. 그렇지만 표현의 정확성 면에서는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하나는 그가 구두를 신은 상태라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그가 지금 막 구두를 신고 있는 중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한 문장이 두 가지 이상의 뜻으로 해석되면 그 문장은 중의성을 띤다고 한다. 중의문은 해석상 오해의 여지가 있으므로 표현에 신중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는 구두를 신고 있다’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우리말에는 중의적 표현이 많고, 그것이 우리말의 한 특성이기도 하다. 또 언어 습관, 언어 상식, 혹은 전후 문맥이 대부분 이러한 중의성 문제를 해소해 주기도 한다. 중의적 표현이라고 해서 일일이 피하려다 보면 한도 끝도 없어 오히려 글이 사고의 흐름을 방해하기만 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중의적 표현을 다 허용해서도 안 된다. 독자에게 굳이 의미의 모호성을 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읽는 사람이 헷갈릴 수 있겠다 싶은 표현은 삼가는 게 좋거니와, 전후 문맥으로 보아 어느 한쪽으로만 해석되는 경우라 하더라도 달리 표현할 방법이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그 표현이 특정 이해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경우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예컨대 법조문에 이러한 중의적 표현이 들어 있다면 해석 여하에 따라 판결이 달라지는 결과를 낳는다.
이제 우리말에 흔히 나타나는 중의적 표현들을 유형별로 나누고, 수용여부에 대해 알아보자.

(가) 어휘의 중의성

한 어휘는 단 하나의 뜻만 지니지 않는다. 예컨대 ‘힘’은 ‘체력’을 말하기도 하고, ‘권력’을 말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는 힘이 세다’라는 말에는 ‘그는 근력이 세다’라는 직설적인 뜻과, ‘그는 권력이 세다’라는 비유적인 뜻이 들어 있다. ‘손이 크다’라는 말도 신체의 손 자체가 크다는 뜻과 함께 ‘씀씀이가 크다’는 비유적인 뜻도 들어 있다. 이는 어휘 자체가 갖는 중의성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따라서 아주 자연스런 언어 현상이며, 특히 비유적인 표현은 기교 수단으로서 적극 활용되는 것이기도 하다.

(나) 관형격조사 ‘의’의 표현에서 나타나는 중의성

‘그녀의 편지’라는 표현을 살펴보자. 이는 ‘그녀가 보낸 편지’, ‘그녀가 받은 편지’, ‘그녀 수중에 있는 편지’ 등 여러 뜻으로 해석된다. ‘엄마의 그림’도 ‘엄마가 그린 그림’, ‘엄마가 가지고 있는 그림’, ‘엄마 모습이 담긴 그림’ 등으로 해석된다.
이는 ‘의’의 쓰임 범위가 넓다 보니 생겨난 현상이다. 하지만 이 역시 전후 문맥을 통해 중의성이 어느 정도 해소된다. 예컨대 ‘헤어지자고 보내온 그녀의 편지’나 ‘그녀의 편지에는 나에 대한 미움이 담겨 있었다’라고 썼다면 ‘그녀의 편지’에는 ‘그녀가 보내온 편지’라는 뜻만이 담겨 있다.
다만 ‘의’를 사용할 때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있다. ‘의’의 수식 대상을 모호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의 정책 홍보’라는 표현을 보자. 이는 ‘정부의 정책을 누군가 홍보한다’는 뜻과 ‘정부가 정부의 정책을 홍보한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또 ‘나의 책 소개’는 ‘내가 어떤 책을 소개한다’는 뜻과 ‘내가 쓴 책을 소개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 역시 전후 문맥을 살피면 어떤 뜻으로 쓰려 했는지 알 수 있겠지만, 이런 표현을 문두에 내세운다면 독자로서는 헷갈릴 수밖에 없다.
본래 관형격 조사 ‘의’가 직접 꾸미는 대상은 하나뿐이다. 예컨대 ‘나의 아주 소중히 여기는 시계’에서 ‘나의’가 직접 꾸미는 것은 ‘시계’이다. 그런데 ‘나의 아주 소중히 여기는 시계 바늘’이라는 표현을 보자. 상식적으로 볼 때 ‘나’는 시계를 소중히 여기지, 그 속에 든 바늘을 소중히 여길 리는 없으므로 여기서 ‘나의’가 수식하고자 하는 것은 ‘시계’이다. 그렇지만 구조면에서 볼 때 ‘나의’가 꾸미는 것은 ‘바늘’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나의 생활 일기’ ‘나의 전원 생활’처럼 ‘의’가 붙은 관형어는 뒤에 여러 명사가 올 경우 맨 마지막 명사를 수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에 예로 든 ‘나의 책 소개’ 역시 ‘나’가 수식하는 것은 ‘소개’여야 자연스럽다. 그렇지만 글 쓰는 이가 이런 점을 무시하고 ‘나의 책을 소개하다’라는 내용을 이런 형태로 적다 보니 중의적 표현이 빚어진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다) 수식구조에 의한 중의성

이는 앞에서 살펴본바 관형격 조사 ‘의’ 뒤에 명사가 두 개 이상 놓여 해당 관형사가 어느 명사를 수식하는지 불분명한 데서 오는 중의성과 궤를 같이한다. ‘예쁜 그녀의 딸’이라는 표현을 보자. 예쁜 대상이 ‘그녀’일 수도 있고 ‘그녀의 딸’일 수도 있다. ‘무분별한 학생들의 해외 연수’라는 표현도 학생이 무분별하다는 것인지, 해외연수가 무분별하다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이 경우는 상식적으로 후자를 염두에 둔 표현임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학생들의 무분별한 해외연수’라고 하든가 ‘무분별한 해외 학업연수’ 등으로 표현하는 게 좋다. 만약 ‘학생들이 무분별하다’는 취지의 표현이라면 ‘무분별한 학생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나서는 해외연수’ 등으로 풀어주는 방법이 있다.

○ 얼마 전에 나온 황선배의 출판사 책표지가 커다랗게 붙어 있었다.

얼마 전에 나온 것이 황선배인지, 책인지, 책표지인지 불분명하다. '얼마 전에 황선배의 출판사에서 펴낸 책의 표지가 커다랗게 붙어 있었다' 정도가 적절하다.
○ 용감한 철수의 아버지는 적진을 힘차게 뛰어들었다.

사실 여기서 용감한 사람은 당연히 철수의 아버지여야 한다. 앞서 설명했듯이 관형어는 수식 받는 명사가 여럿 나열됐을 때 맨 끝에 있는 명사를 수식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또 만약 철수가 용감하다고 할 경우, 웬만큼 글을 써 본 사람이라면 이렇게 표현하지는 않는다. 문장을 따로 나누어 철수가 용감하다는 점을 앞에서 밝히고, 뒤에 철수의 아버지가 적진을 뛰어들었다고 쓸 것이다. 그렇지만 글을 많이 써보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 이렇게 표현하는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에 현실 언어생활에서 혼동이 빚어지는 것이다. 이 표현은 ‘용감한 철수 아버지’라고 하면 중의성이 다소나마 해소된다.

(라) 부정표현의 중의성

우리말의 부정 표현은 부정하는 범위나 대상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예컨대 ‘그는 버스를 타지 않았다’는 표현에서, ‘않았다’의 대상이 ‘그’인지, ‘버스’인지 ‘타다’인지 확실히 구별되지 않는다. ‘그’가 대상이라면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버스를 탔다’는 뜻이 될 테고, ‘버스’가 대상이라면 ‘그는 버스 대신 다른 차를 탔다’는 뜻일 테고, ‘타다’가 대상이라면 ‘그는 버스를 타지는 않고 뒤꽁무니에 매달리든가 어떤 다른 방식으로 버스를 이용했다’는 뜻이 될 터이다. 이런 예문을 몇 개 더 들어보자.

① 졸업 여행에 학생들이 다 가지 않았다.
-졸업 여행에 아무도 안 갔다.
-졸업 여행에 일부는 갔다.

② 오늘 같이 비가 오지 않으면 장날은 장꾼들로 붐빈다.
-오늘은 비가 오지 않아서 일반 장날처럼 장꾼들이 붐빈다.
-오늘은 비가 와서 예외지만 맑은 장날은 항상 장꾼들이 붐빈다.
-오늘처럼 비가 많이 오는 장날엔 장꾼들이 별로 없다.

③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유언대로 아들에게 재산을 상속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재산을 상속하지 않겠다고 유언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재산을 상속하기로 유언했지만, 유언 내용과는 좀 다르게 상속됐다.

④ 비루스와 같은 미생물은 보통 현미경으로 볼 수 없다.
-비루스와 같은 미생물은 대개 현미경으로도 볼 수 없다.
-비루스와 같은 미생물은 일반 현미경으로는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상에서 이런 모호성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그는 버스를 타지 않았다’를 다시 예로 들어보자. 이런 표현이 다짜고짜 나올 리는 없다. 거기에는 어떤 전제 상황이 있게 마련이다. 예컨대 소설이라면, 버스와 택시가 동시에 도착했다든가, 버스가 도착해서 여러 명이 올라타고 있었다든가 하는 상황이다. 전자의 경우 ‘그는 버스를 타지 않았다’는 말은 ‘버스를 안 타고 택시를 탔거나 걸어갔다’는 것을 암시하고, 후자의 경우 다른 사람은 탔지만 그는 타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전후 상황이 이러한 모호성을 상당 부분 해소시켜준다.
그렇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모호성을 극복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야말로 뜬금없이 이런 표현을 쓸 수도 있는 것이다. 위의 예문 ③과 같은 표현이라면, 전후 그러므로 부정 표현에서는 이런 점을 주의하여 가능한 한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는 게 좋다. 이 같은 중의성을 해소하는 데에는 조사 ‘는’을 넣는 방법도 있다.

○ 그는 버스를 타지 않았다.
-그는 버스를 타지는 않았다.
-그는 버스는 안 탔다.

○ 바이러스와 같은 미생물은 보통 현미경으로 보이지 않는다.
- 바이러스와 같은 미생물은 보통의 현미경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 적어도 학교에서 놀지 않겠다.
- 적어도 학교에서는 놀지 않겠다.

전체부정, 부분부정을 구분하는 방법도 있다. 전제부정은 ‘아무도, 누구도, 전혀’ 등의 부사를 사용하고, 부분부정에는 ‘는’을 사용한다.

○ 졸업 여행에 학생들이 다 가지 않았다.
- 졸업 여행에 학생들이 아무도 가지 않았다.
- 졸업 여행에 학생들이 다 가지는 않았다.

(바) 주어가 미치는 범위의 중의성

주어와 술어 사이에 부사 등 다른 요소가 끼어들었을 때, 그것이 주어와 짝을 이루는지, 술어와 짝을 이루는지 불명확할 때가 있다. 이로 인해 의미도 둘로 갈린다..

○ 아내는 나보다 자식을 더 사랑한다.

주어 ‘아내’와 술어 ‘자식을 더 사랑한다’ 사이에 ‘나보다’라는 부사어가 끼어들었다. 여기서 ‘나보다’가 주어 ‘아내’와 짝을 이룬다면 ‘나보다는 아내가 더’라는 뜻이 되고, 술어부의 목적어 ‘자식’과 짝을 이룬다면 ‘나보다는 자식을 더’라는 뜻이 된다. 그에 따른 의미 변화는 다음과 같다.

㉠ 아내는 나와 자식 중 자식을 더 사랑한다.
㉡ 나보다는 아내가 더 자식을 사랑한다.

기실 이 문장이 어법 면에서 중의성을 띤다고 하지만, 일상 언어 습관에서는 이를 중의적인 문장으로 보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이 문장을 ㉠의 뜻으로만 해석할 뿐, ㉡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래의 ㉢과 ㉣을 비교하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 아내는 나보다 자식을 더 사랑한다.
㉣ 아내는 나보다 더 자식을 사랑한다.

㉢은 ㉠에 가까운 뜻이고, ㉣은 ㉡에 가까운 뜻이다. 그러므로 본문이 중의성을 띤다 하더라도 ㉡이나 ㉣의 뜻으로 쓰지 않았다면 개의할 바는 아니다. 다만 ㉡이나 ㉣의 의도로 이 표현을 썼다면 잘못 쓴 셈이 된다.

○ 나는 철수와 순이를 만났다.

이 문장도 앞에 든 예문과 성격이 같다. 언어 습관에 따르면 ‘나는 철수와 순이 두 사람을 만났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게 마땅하지만, 논리를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은 ‘나는 철수와 동행하여 순이를 만났다’는 뜻으로도 읽힌다며 따질 수도 있다.

○ 이때 한 용감한 시민이 소리를 지르면서 도망가는 범인을 뒤쫓기 시작했다.

소리를 지른 사람은 시민인가, 범인인가. 문장 사이에 쉼표를 넣어보면 이해하기 쉽다.

㉠ 이때 한 용감한 시민이 소리를 지르면서, 도망가는 범인을 뒤쫓기 시작했다.
㉡ 이때 한 용감한 시민이, 소리를 지르면서 도망가는 범인을 뒤쫓기 시작했다.

㉠은 소리를 지른 사람이 시민이고, ㉡은 소리를 지른 사람이 범인이다. 역시 중의성을 띤다. 그렇지만 이 문장은 앞에서 예와 달리 중의성이 매우 강하다. 어느 쪽을 염두에 둔 표현인지 알기가 쉽지 않다. 그저 쫓아가는 사람이 ‘저놈 잡아라’라고 외쳤을 것이라는 상식적인 판단으로 감을 잡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상식적인 감마저 잡을 수 없는 문장, 예컨대 ‘철수는 소리를 지르면서 도망가는 영수를 뒤쫓았다’라는 표현은 100% 중의적이다. 이럴 때는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정확히 써야 한다. ㉠, ㉡처럼 쉼표를 넣거나, 아래처럼 중의적인 요소를 삭제하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겠다.

㉢ 이때 한 용감한 시민이 소리를 지르면서 범인을 뒤쫓기 시작했다.

(사) 주체와 객체의 모호성

보조사 ‘는’은 주어에 붙기도 하고 목적어에 붙기도 한다. 때로는 목적어에 붙어서 문장의 맨 앞에 놓이기도 한다.

①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이 주격으로 쓰인 경우)
② 나는 그녀는 사랑하지 않는다.(‘는’이 목적격으로 쓰인 경우)
③ 그녀는 내가 사랑하지 않는다.(‘는’이 목적격으로 쓰여 문두에 놓인 경우)

그 중 ③은 목적어가 맨 앞에 놓여 마치 주어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아래 문장은 착각의 정도가 이보다 훨씬 더 심하다.

④ 그녀는 누구나 다 사랑한다.

‘그녀’가 주어로 쓰였을까 목적어로 쓰였을까. 주어로 쓰였다면 아래 ㉠의 의미일 것이고, 목적어로 쓰였다면 ㉡의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이 문장만 달랑 놓고 보아서는 둘 중 어느 것을 뜻하는지 알 길이 없다.

㉠ 그녀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
㉡ 모든 사람이 그녀를 사랑한다.

전후 문맥을 통해 어떤 의도로 썼는지 충분히 감을 잡을 수 있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이런 문장은 피해야 한다. 아래 표현도 마찬가지다.

⑤ 철수는 순이가 좋다고 한다.
- 철수는 순이를 좋다고 한다.
- 순이가 철수를 좋다고 한다.

중의성을 띠는 표현은 이 밖에도 공동격 구문에서 흔히 보이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① 귀여운 영희와 철수
- 영희가 귀엽다.
- 영희와 철수가 귀엽다.

② 나는 사과와 배 두개를 샀다.
- 사과 한 개와 배 한 개를 샀다.
- 사과 한 개와 배 두 개를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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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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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한글타령 | 작성시간 07.01.31 모호성에 중점을 두고 말과글에 투고하셔도 되겠는데....
  • 작성자한글타령 | 작성시간 07.01.31 잘 읽었습니다. 명확해야 할 기사에서는 이 점에 주의해야겠지요.
  • 작성자말그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7.02.02 겨울호에서 긁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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