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S 오늘의 부처님 말씀]
선지식을 존중하고
설법하는 스승을 얻고
법을 듣는 대중을 만들어
언제나 바른 행에 머물러라.
<보살장정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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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힐링레터]
바위도 설법을 한다- 효암스님
mangong.bbs.or.kr/S1929
세상을 깨우는 소리들
바위도 설법을 한다
<효암스님 지음>
진정한 신통은 도를 깨쳐 설법하는 것
대승에서는 가장 으뜸가는 신통으로 설법을 꼽는다.
『보적경(寶積經)」에서 부처님이 문수보살에게
신통에 대해 묻자 문수보살은
"세존이시여, 설법이 가장 큰 신통 변화입니다.
하열한 중생에게 대자비를 베풀어
방편을 써서 갖가지 법을 설하시니,
이를 능가할 신통은 없는 줄 압니다"라고 하였다.
기독교에서도 신이 내리는 은총 가운데
최고의 은총은, 신의 말씀을 전달하는
능력을 신으로부터 받는 일이라고 한다.
이를 '말씀 은사'라고 하는데,
이 은사를 통해 은총을 받은 사람이야말로
신을 기쁘게 하고 죄지은 인간을 구원하는
가장 중요한 일을 하기 때문이다.
수행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설법하는 능력이 없으면
수행이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도를 깨달았으면 법문이 열려야 한다.
법문을 할 줄 모르는 도인은
음식을 만들지 못하는 요리사와 다르지 않다.
오늘날 한국불교는 설법이 없는 불교로 변해버렸다.
경전을 강의하는 사람도 드물고,
설법을 하는 이도 찾기 어렵다.
설법을 듣고자 하는 불자도
과거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었다.
신통과 기적은 따로 있지 않다.
문수보살의 답변처럼
설법 능력을 갖춰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신통이다.
무릇 불자라면 부처님의 설법을 듣기 위해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설법이라는 신통만이 중생의 공덕을 증장시킨다.
다른 신통은 미혹만 더하고
악도의 길에 빠지게 한다.
설법은 이 세상 소리들 가운데 가장 복된 소리다.
이 종소리 법계에 두루하여
불교에는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여러 방편들이 있다.
방편이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나 방법이다.
이러한 방편 가운데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이
언어, 즉 설법이다.
언어를 이용한 설법은 중생들을 깨우치는 데 필수적이다.
부처님도 설법이라는 방편으로
수많은 중생을 가르치셨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간혹 색다른 방편을 쓰기도 한다.
주로 선가에서 사용하는,
부처님이 가섭에게 전했다는
삼처전심법(부처님이 제자
가섭에게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 법),
덕산의 방망이 세례(덕산선사는 누가 법을 물으면 말 대신 방망이를 들었다),
임제의 할(임제선사는 후학들에게 고함친 것으로 유명하다),
마조의 발길질(마조선사는 누가 법을 물으면 발길질을 했다),
조주의 끽다거(조주선사는 누가 질문을 하면
"차나 한잔하고 가게" 하며
차를 따라주곤 했다) 등이 언어를 대신한 방편들이다.
이외에도 불교의 방편들을 살펴보면
좀 더 다양한 모습들이 발견된다.
방편은 꼭 신심이 두터운 불자나
구도심 깊은 수행자에게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불교를 믿지 않는 일반인들은 물론
세상의 모든 생명들에게도
불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사용된다.
심지어는 귀신이나 지옥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서도 방편이 쓰인다.
법당에 모셔진 불상과 탱화를 비롯하여
절 안팎의 그림이나 글씨들이 이에 속한다.
경악의 번뇌
부처님은 중생의 고통,
특히 정신적인 고통이 번뇌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고통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번뇌를 없애는 수행을 해야 한다.
하지만 누구나 공감하듯 번뇌를 끊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번뇌의 수효는 무량하다.
오죽하면 번뇌를 객진(客塵)에 비유했을까?
번뇌는 나그네처럼 왔다가 떠나는가 하면
먼지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번뇌는 근본 번뇌와 지엽 번뇌로 구분한다.
근본 번뇌가 나무의 뿌리라면,
지엽 번뇌는 나무의 줄기와 가지에 해당한다.
수많은 지엽 번뇌들의 뿌리인 근본 번뇌는
무명(無明)에서 비롯된다.
무명은 진리를 모르는 마음으로,
모든 중생의 마음이 이에 속한다.
그리고 이 무명은 다시 씨앗에서
줄기가 생기는 것처럼
갈애(渴愛)라는 번뇌를 자라나게 한다.
갈애는 중생들의 본능에 해당하는 번뇌로,
마치 목마른 자가 물을 그리워하듯
중생의 몸과 마음에서 끊임없이 발생한다.
갈애의 종류는 크게 세 가지다.
생존 본능으로써의 유애(有愛),
감각적 행복을 추구하는 본능으로써의 욕애(欲愛),
생존과 행복에 방해하는 것들을
배척하고 제거하려는 본능으로써의
무유애(無有愛)가 그것이다.
무명과 갈애는 집착, 탐욕, 성냄, 의심,
거만, 혼침, 들뜸, 불안 등 수많은 번뇌를 넣게 하고,
이로 인해 중생은 괴로움에 휩싸인다.
불교의 고급 교리에서는
중생의 모든 정신 활동을
번뇌로 규정할 정도이다.
마음을 깨치지 못하고 일으키는
중생의 정신 활동은 번뇌 아님이 없다.
번뇌는 그런 것이다!
진실한 설법은 음성이 아니다
초기불교에서는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친 내용들을 법(法)이라고 칭한다.
이때 말하는 법은 연기, 오온, 십이처,
십팔계, 삼법인, 사성제, 삼학, 팔정도,
삼십칠조도품, 업, 윤회, 수행 과정과
단계와 결과 등을 아우른다.
이러한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대승에서는 대승을 설하기 위한
전 단계의 가르침으로 본다.
중생들이 온갖 법들을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 차원에 맞추어 법을 설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야사 상의 교리인 『금강경』에서
바로 이러한 법들이 마침내 공이며,
무아이며, 무자성으로
실체가 없는 것임을 강조한다.
오온이니 십이처니 십팔계니 하는
온갖 법들은 다만 명칭에 불과할 뿐
진실이 없기 때문이다.
『금강경」은 철저히 법무아(法無我)를 중요시하는 교리이다.
법무아를 다른 말로 법공(法空)이라고도 한다.
법무아의 입장에서는 부처님의 언설이 성립하지 않는다.
법무아이므로 설할 것이 없는 비소설(非所設)이다.
이 때문에 부처님은
'만약 누가 여래가 설할 만한 법이 있고
드러낼 만한 특별한 진리가 있어
설법을 했다고 여긴다면
이는 여래를 비방한 것' 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불교인이라면 먼저 부처님의 음성,
즉 설법에 의지해야 한다.
그러나 그 설법은 법의 무아성, 공성,
무자성을 깨닫게 하기 위한 방편일 따름이다.
이 때문에 설법도 언젠가는 버려야 할 뗏목에 불과하다.
법이 실재한다는 집착을 버리게 하려고
법을 설할 수밖에 없었던 부처님의
대비(大悲) 방편을 생각하며,
법이 없는데 법을 설한다'는
무법설법(無法說法)의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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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깨우는 오늘의 부처님 말씀 647)
"성내고 교만하고 완고하고 반항하고,
속이고 질투하고 과장해서 말하고,
오만방자하고 상스러운자와 친밀한 것
이런 것이 비린 것이지,
육식은 비린 것이 아니다."
<숫따니빠따-소품>
불기 2570년 6월 12일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3번)
♣참회진언(懺悔眞言)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3번)
♣멸업장진언 : 옴 아르늑게 사바하(3번)
♣법신진언 :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3번)
♣소원성취진언(所願成就眞言)
옴 아모카 살바다라 사다야 시베훔(3번)
♣광명진언(光明眞言)
옴 아모카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릍 타야훔(108번)
♣보회향진언(普回向眞言)
옴 삼마라 삼마라 미만나 사라 마하 자거라 바라훔(3번)
“원한은 원한으로 풀리지 않고,
오직 자비로써 풀린다.
이것은 영원한 진리이다.”
《법구경(法句經)》
-경구(經句) 해설 -
이 말씀은 상대방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으로는
갈등이 해결되지 않으며,
이해와 자비의 마음으로 대할 때
비로소 화합과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남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바로 공덕의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