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9일 오늘의 역사
2023년 인도네시아 아낙크라카타우 화산 폭발
2018년 해일을 유발해 4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인도네시아 아낙 크라카타우 화산이 이틀 연속 폭발하며 3㎞ 높이로 화산재를 분출하고 용암도 쏟아냈다.
수마트라섬과 자바섬 사이 순다해협의 아낙 크라카타우 화산은 9일 오전 7시 46분쯤 처음 폭발했고, 어제(10일)까지 7차례 폭발했다.
이번 폭발로 화산재가 산 정상에서부터 3㎞ 높이로 치솟았고 용암도 흘러내렸다.
인도네시아 당국은 아낙 크라카타우의 경보를 두 번째로 높은 2단계로 유지했고 반경 5㎞ 이내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접근 금지 조치도 유지했다.
인도네시아 당국은 앞서 지난 5월부터 화산 활동이 시작돼 주민과 관광객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2021년 광주광역시 학동 건물 무너저 버스매몰 9명사망 8명중상
2019년 U20 대표팀 폴란드 U20 월드컵 8강전에서 세네갈 120분 연장(3-3) 승부차기(3-2)로 꺾고 36년 만에 4강 진출
2019년 홍콩인 100만명 범죄인인도조례(송환법) 반대 시위
2015년 논문 심사 앞두고 나치에 쫓겨나 77년 만에 박사 학위 받은 유대인
나치 정권 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박사 학위 취득을 앞두고 대학에서 쫓겨나 102세가 된 독일 할머니가 77년 만에 박사 학위를 땄다.
독일 함부르크 대학은 9일(현지 시각) “유대계라는 이유로, 논문을 썼지만 학위 심사를 받지 못한 잉게보르크 실름-라포트씨에게 이제 박사 학위를 수여한다”며 “80년 가까이 지났지만 ‘어느 정도 정의(some extent of justice)’는 세울 수 있게 됐다”고 했다.
함부르크대에서 의학을 공부했던 실름-라포트 할머니는 1938년 디프테리아균(급성 감염 질환을 일으키는 균)에 관한 논문을 써 박사 학위 심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가 독일의 모든 대학·공공기관·기업에서 유대인을 내쫓는 ‘인종법’을 제정했고, 어머니가 유대계인 실름-라포트도 대학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는 이후 미국으로 가서 박사 학위를 받고 의사로 일하다 1952년 동베를린으로 이주해 의료업계에 종사했다.
실름-라포트 할머니는 학위 수여식에서 “102세에 뒤늦게 박사 학위를 받기로 결정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나치 희생자들을 위해 용기를 냈다”고 말했다
2014년 '하모니즘' 창시한 화가 김흥수(95세) 세상 떠남.
2014년 검찰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유출' 정문헌 의원 기소
2007년 삼성 라이온즈의 양준혁 선수가 한국 프로야구 사상 첫 2000안타를 달성하다.
2006년 아시아나 항공기 소낙비구름대 관통해 과속운항 중 우박 맞아 기체 부서진 채 김포공항 비상착륙
2005년 노인과 여성 21명을 연쇄살인한 유영철 사형 확정
노인과 여성 등 20명을 연쇄살인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유영철(35)에 대해 사형이 확정됐다.
대법원 1부(주심 강신욱·姜信旭)는 9일 ‘연쇄 살인마’ 유가 무죄판결을 받았던 서울 이문동 살인 부분에 대한 검찰의 상고를 기각, 재판을 마무리했다. 유영철은 작년 12월 1심에서 이문동 사건을 제외한 20명에 대한 살인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항소를 포기했었다.
2005년 2006 독일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한국 대 쿠웨이트 경기
2005년 경상북도에서 독도의 달을 제정한다.
2004년 서울시교육청, 서울 초중고 ‘차렷, 경례!’ 구령 퇴출(7.01부터 실시)
1996년 제35차 세계광고대회 서울서 개막
전세계의 광고 및 미디어업계 인사들이 모여 21세기 광고 및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의 미래를 전망해보는 제35차 국제광고협회(IAA) 세계광고대회가 1996년 6월 9일 한국종합전시장에서 개막했다. 12일까지 계속된 이 광고대회에는 일본 아사히신문 나카에 도시타다 회장과 홍콩 스타TV 라클란 머독 부회장, 아시안월스트리트저널 어번 러너 편집국장 등 세계 미디어업계 및 광고계의 거물들이 연사 및 패널로 참가해 21세기 뉴미디어 기술과 그에 따른 광고방향 등을 논의했다.
세계광고대회는 IAA(국제광고협회)가 주최하는 세계적 규모의 광고대회로 ‘광고산업의 올림픽’ 으로 불리운다. 2년마다 세계각국으로 옮겨 개최되며 전세계 우수 언론사, 광고주, 광고회사 간부 등 약 2천-2천5백여명이 참여한다. 아시아에선 1984년 일본에 이어 두번째로 서울에서 열렸다. IAA는 1938년 세계각국 광고주, 광고대행사, 언론매체 및 마케팅커뮤니케이션 업체 간부들이 구성한 세계유일의 광고단체로 본부는 뉴욕에 있고 세계 65개 도시에 지부가 설치되어 있다. 1996년 현재 87개국 3천5백여명이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1968년 지부가 설치됐다
1994년 네덜란드 경제학자 틴베르헨 사망 - 계량경제 모델을 발전시켜 노벨경제학상 수상
1991년 필리핀 파나투보 화산 폭발로 754명 사망
1991년 시인 고정희 사망
1987년 연세대 이한열군 최루탄 맞고 혼수상태
1987년 6월 9일 연세대 경영학과 2년 이한열군이 교문 앞에서 시위도중 전경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전두환대통령의 5공정권 마지막 해인 1987년은 연초부터 심상치 않았다.
국민들은 당시 민정당이 노태우 대표를 후보로 선출해 간접선거 방식인 이른바 체육관 선거로 정권을 연장하려는 데 거세게 저항했다.
게다가 2월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이른바 4·13호헌조치는 학생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학생시위가 절정에 다다를 무렵 시민단체들은 학생들과 연합해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6월 10일 전국적으로 개최하기로 했다.
당시 연세대 2학년생이던 이군은 이 대회의 일환으로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교문 앞에서 벌이진 시위에 참가했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이군은 27일 만인 7월 5일 새벽 2시 5분 끝내 사망했다.
이한열군의 죽음은 한 대학생의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다. 한국 현대사에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 ‘6월 항쟁’의 처절하고 비장한 마무리였다.
1984년 서방정상회담, 런던 경제선언 채택하고 폐막
1983년 영국 총선서 보수당 압승
1981년 안전기획부 일본거점 간첩 손유형 등 6명 검거발표
1980년 계엄사, 현직 언론인 8명을 유언비어 유포혐의로 연행
1976년 한국적십자, 북적한적십자에 추석성묘단 교류 제의
1975년 필리핀, 중국과 수교
1974년 과테말라 작가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 사망
1967년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 중동전 참패로 사의 표명
1966년 박한상 야당의원 길거리에서 피습(6.15 테러범 임석화 검거 6.17 경찰조작으로 밝혀짐)
1961년 프랑스의 세균학자 게랭 사망
1959년 美 탄도미사일 탑재한 세계최초 원자력잠수함 `조지워싱턴호`진수
1956년 중립국 감시위 비무장지대로 철수
1954년 한국일보 창간
1954년 미국의 교육자 겸 작가 알레인 로크 사망
1954년 일본, 방위청설치법 자위대법 공포
1954년 한국일보 창간.
1954년 제3대 민의원 개원(의장 이기붕/부의장 최순주 곽상훈 선출)
1953년 각의, 휴전 거부 결의
1952년 일본. 인도 평화조약 조인
1951년 미국 중국에 10억불 원조 발표
1942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리데체,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암살에 대한 보복으로
파괴되다. 이 마을은 전후에 다시 재건되었다.
1938년 국민정부 중경으로 이전
1934년 소련.루마니아.폴란드 외교관계 수립
1899(대한제국 광무 3) 하인리히 독일국왕 군함으로 인천 도착
1898년 영국 청나라의 구룡반도를 99년간 조차(租借)
1896년 국어학자 이희승 출생
국어학자 일석 이희승 선생이 1896년 6월 9일 경기 개풍에서 태어났다. 일석은 경성제대 조선어문학과를 2회로 졸업, ‘국어학 개설’ ‘국어대사전’ 등을 펴내 국어학 연구의 초석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으면서도 고비 때마다 불의를 참지 못한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돼 3년간 옥고를 치르다 광복 후에야 풀려났고, 4·19 때는 교수단을 이끌고 나와 이승만 정권에 마지막 경종을 울리기도 했다. 평생을 청빈하게 살아왔으면서도 1989년 93회 생일을 맞아 후학들을 격려하기 위해 사재 2억원을 내놓고 그해 11월 숨을 거뒀다.
14년이 흘러 후손들은 ‘일석 국어학상’을 제정, 2003년 6월 10일 첫 수상자(이익섭 교수)를 냈다.
1892년 정치가 신익희 출생
1885년 청나라 프랑스 강화조약 성립(텐진조약)
1882년 임오군란 발생
조선 고종때인 1882년에 구식 군대의 군인 등리 신식 군대에 비해 차별 대우를 받는것에 항의하고, 민씨전광에 반대하며 일으킨 반란아다
임오년에 군인들이 일으킨 반란이라는 뜻에서 임오군란이라고 부른다
조선 정부는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은 뒤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개화 정책을 추진했다
이 정책 중 하나로 군사제도를 개편하고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만들었다
그런데 군사제도를 바꾸는 과정에서 구식 군대의 많은 군인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또한 군대에 남게 된 군인들도 13개월이나 월급을 받지 못하는 등 별기군에 비해 나쁜 대우를 받았다
신식 군대에 비해 차별을 받은 구식 군인들이 분노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무기를 보관해 놓은 관청을 습격한 뒤 부패한 관리들을 죽이고 일본공사관을 공격했다
또한 궁궐에 침입해 명성 황후와 민씨 세력을 제거하려고 했다
구식 군인들이 일본 공사관을 공격할 때 일본인 13명이 목숨을 잃었고 일본 공사는 몰래 도망 쳤다
이에 일본은 피해 보상을 요구하며 군대를 이끌고 조선에 들어왔다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는 청과 일본의 군대가 동시에 주둔하게 되었다
조선은 일볼과 제물포 조약을 맺고 막대한 피해 보상을 했다
결국 청나라와 일본의 조선에 대한 권한을 확대시켜주는 국제문제로 변하였고 대내적으로는 갑신정변의 바탕을 마련해 주었다
1873년 스페인, 연방공화제 선언
1870년 영국 작가 찰스 디킨스 사망
궁핍한 가정에서 태어난 탓에 어려서부터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채 생업에 뛰어들어야 했던 디킨스는 변호사 사무실 사환과 법원 속기사, 신문사 통신원 등을 거쳤다. 신문사 통신원 생활은 그가 글쓰기에 접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됐다. 각지의 풍속을 스케치해 본사에 송고하는 일이 통신원으로서의 그의 할 일이었다. 이 당시에 썼던 글들을 모은 단편소품집 `보즈의 스케치`(1836) 출간은 작가로서의 시작이었다. `피크위크 페이퍼스`(1837)에 이어 1838년 출간한 `올리버 트위스트`는 작가로서의 명성과 위치를 확고하게 해주었다. 그가 몸소 체험했던 사회의 부조리와 서민들의 애환을 유머러스하면서도 비판적으로 묘사한 그의 글은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받았다.
이같은 그의 작품경향은 자전적 소설 `데이비드 코퍼필드`(1850)와 `황폐한 집`(1853) 출간을 계기로 변해갔다. 주인공 한 사람의 성장과 체험을 중심으로 한 초기의 작품경향과는 달리 많은 인물들을 등장시켜 사회의 여러 계층을 폭넓게 바라보는 이른바 파노라마적인 사회소설로 접근해 간 것이다. 개인의 힘으로는 어쩔수 없는 사회의 두터운 벽에 직면해 유머를 잃고 무력과 좌절감이 전편에 흐르는 작품이 주조를 이뤘다. 그럼에도 그의 창작의욕은 꺾일 줄 몰라 `두 도시 이야기`(1859) `위대한 유산`(1861) 등의 작품을 출간했다.
1863년 미국 남북전쟁 중 게티즈버그 전역: 브랜디 역 전투
1862년 미국 남북전쟁, 쉐넌도어계곡 전역 북군 쉴즈 사단이 포트 리퍼블릭의
잭슨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패배하고 후퇴하다
1843년 오스트리아의 소설가 주트너 출생. 1905년 노벨 평화상 수상
1812년 독일의 천문학자 갈레 출생 - 1846년 9월 23일에 해왕성을 처음으로 관측
1781년 증기기관차 발명가 스티븐슨 출생
1768년 미국의 면직공업 창시자 슬레이터 출생
1672년 러시아의 차르, 황제 표트르 1세 출생
1640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1658-1705) 레오폴트 1세 출생
68년 로마 폭군황제 네로 자살
로마 황제 네로는 전적으로 그의 어머니 소아그리피나가 꿈꿔온 야망의 산물이었다. 황제의 아내와 황제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 그녀의 꿈이었다. 주위의 눈총에도 시동생인 황제 클라우디우스와 재혼한 아그리피나는 곧 황제의 친아들을 제치고 네로를 후계자로 내세웠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증손녀인 자신의 피를 생각하면 크게 꿀릴 것도 없었다. 54년 황제가 죽고 네로가 17세로 5대 황제에 오름으로써 그의 꿈도 사실상 실현되는 듯했다.
집권 초기 네로는 철학자 세네카의 도움으로 악정은 펼치지 않았다. 그러나 네로의 몸에는 아그리피나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원래 후계자였던 의붓동생을 독살하고 사사건건 간섭하는 어머니, 심지어 새 여자를 맞기 위해 아내마저 살해했다. ‘폭군’으로 불릴 때 로마의 절반을 태운 대화재(64년)가 발생하고 사람들이 네로의 소행이라며 의심의 눈길을 보내자 네로의 야만성이 또 유감없이 발휘됐다. 기독교인들이 범인으로 몰려 박해를 당한 것이다.
68년 6월 9일, 반란이 일어나고 원로원마저 등을 돌리자 네로는 31세로 자살을 선택한다. “이로써 한 예술가가 죽는구나.” 자신을 뛰어난 예술가로 착각했던 네로의 마지막 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