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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10.1대구 인민폭동과 4.3제주 사건의 원인과 파장- 두 사건의 異와 同

작성자dhleepaul|작성시간26.06.17|조회수49 목록 댓글 0

대구 10.1 사건과 제주 4.3 사건은 해방 직후 한국 사회의 혼란과 미군정·정부 정책에 대한 민중 저항이 폭발한 대표적 사건으로, 두 사건 모두 민간인 희생과 국가 책임 문제를 남긴 비극적 역사이다.

 

대구 10.1 사건

요약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일어난 경찰과 시민들 간의 충돌로 시작된 대규모 유혈사건. 1949년 9월 미군정이 실시한 미곡 자유화 정책의 실패와 함께, 1946년 초 창궐한 콜레라의 여파로 대구 지역 출입을 봉쇄하면서 식량과 생필품, 의약품 부족으로 인해 극단적으로 악화된 민심이 배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벌어진 9월 총파업의 영향으로 10월 1일 대구 시민들이 민중 봉기를 일으켰다. 대구 민중 봉기는 11월 중순까지 경상북도뿐 아니라 전국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군과 경찰의 유혈 진압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며 마무리되었다.

 

목차접기

  1. 정의
  2. 배경
  3. 전개과정
  4. 특징
  5. 결과
    1. ┗ 진압
    2. ┗ 사상자와 피해
    3. ┗ 영향
  6. 성격

 

정의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경찰과 시민들 간의 충돌로 시작된 대규모 유혈사건.

배경

8·15해방 후인 9월 9일 한반도에는 미 육군 제24군단이 진주했고,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 군정청(미군정)이 설치되었다. 미군정은 행정권과 치안권 등 실질적인 통치권을 관할하여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실질적으로 한반도 38도선 남쪽을 통치했다. 미 육군 제24군단장이었던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가 미군정 설치와 함께 미군정사령관으로 부임, 혼란스러운 해방정국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많은 전공을 세우며 군인으로서는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고 초고속으로 대령에서 중장까지 진급했던 하지 중장은 미군정사령관으로 부임하자마자 여러 방면에서 행정적 미숙함을 드러내보였다. 특히 치안 확보를 위해 일제강점기 일본의 경찰로 일반 시민을 억압했던 인사들을 대부분 미군정의 경찰로 고용한 것은 이후 미군정에 대한 일반 시민의 반발을 낳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1945년 9월 미군정에서 발표한 미곡가격자유화는 초기 미군정이 한반도의 실상을 충분히 조사하지 않은 채 도입하여 사회적 갈등을 야기한 대표적인 사례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쌀 공출 제도가 있어 쌀의 유통이 통제되었지만, 이를 보충할 만한 제도가 미비한 상태에서 돌연 자유시장으로 개방되자 부족한 쌀 가격이 30배에 이를 정도로 폭등했고, 쌀을 구하지 못한 시민들의 극심한 반발을 낳았다. 미군정은 경찰을 이용하여 이런 반발을 통제했으나, 식량 부족의 문제는 통제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또한 부패한 경찰이 쌀을 빼았거나 매점하여 암시장에 되파는 것과 같은 사례가 알려지면서 행정에 대한 불신이 극단적으로 커지게 되었다.

1946년 1월 결국 미군정은 이 제도를 취소하고 미곡 공출제도를 다시 시작했으나, 이미 신뢰를 잃은 미군정의 행정 집행에 반대하는 여론과 함께, 미곡의 수집과 배급도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많은 지역의 시민이 기아로 고통받는 가운데, 설상가상으로 1946년 초 경상북도, 특히 대구 일대에서 콜레라가 창궐했다. 미군정은 콜레라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대구 전역의 출입을 통제했는데, 이에 따라 식량과 의약품, 생필품이 부족한 대구 지역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전개과정

조선공산당의 지시 아래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를 중심으로 시작된 1946년 9월 총파업 기간에 대구지역의 좌익세력들은 노동자와 일반시민들의 쌀획득투쟁을 중심으로 대중시위를 전개했다.

10월 1일 대중시위에 밀린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 1명이 사망함으로써 대구시민의 평화적 시위는 급격히 폭력화되어 경찰서 습격, 유치장 개방, 경찰 살해 등으로 전화되어갔다. 이에 미군정은 10월 2일 대구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 전술군과 중앙의 경찰병력을 동원하여 점거된 경찰서·지서 등을 원상 복구시켰다. 미군의 출동과 계엄령의 선포로 대구시 내의 질서는 회복되었으나, 대중들의 시위는 경산·성주·영천 등 경상북도의 각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시위가 일어난 경상북도 내 각 군은 달성·고령·성주·칠곡·군위·의성·선산·김천·영천·경산·청도·경주·영일·영덕(달산면)·예천·문경(산양면)·상주(이안면)·영주·봉화 등 전체 22개군이고 이중 3개군에서는 1개면에서만 발생했다.

이러한 파급은 최초 시위 발생지인 대구로부터의 거리, 교통·통신, 각 군이 처해 있는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상황, 8·15해방 직후의 정치적 갈등의 양태, 경찰·미군·우익 대 좌익의 힘에 있어서의 역학관계 등 여러 요인들의 영향을 받아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이처럼 경상북도 내 각 군의 시위 양태가 다양하게 나타났다는 사실은 남조선노동당 중앙지도부나 대구의 중간지도부가 통일적인 통제를 제대로 하지 못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1946년말 진압되기 전까지 사태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확대된 시위 발생지역은 ① 경상남도지역의 통영·창녕·마산·진주·진양·하동·의령·양산·동래·울산·창원·사천·부산·밀양 등 3부(부산·마산·진주)와 11개군, ② 충청남도지역의 당진·홍천·예산·서산·천안·대전 등, ③ 충청북도지역의 영동·청주, ④ 서울·경기도·황해도 지역의 광주·개풍·연백·장단·개성·서울·인천, ⑤ 강원도지역의 횡성·강릉·평창·삼척, ⑥ 전라남도지역의 화순·무안·광산·함평·영광·나주·보성·장흥·해남·강진·장성·담양·영암 등 전체 21개군 가운데 13개군과 2부(광주·목포), ⑦ 전라북도지역의 남원·순창 등이었다.

특징

전개양상을 보면 경상북도·경상남도·전라남도는 많은 지역에서 시위대가 발발했고, 충청남도·경기도·황해도·강원도 등은 부분적인 지역에서만 발생으며, 동시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각 지역마다 시간적인 차이를 두고 발생했다. 또한 시위의 조직적 단위는 군·면 또는 마을 단위를 넘지 못했다. 이것은 전국에서 동시적으로 봉기를 일으킬 수 있는 조직력·통제력이 없었음을 반영한다. 즉 파급되어가는 시위에 대하여 중앙에서 통제할 수 있는 정도가 구체적·체계적인 수준에까지 이르지 못했고, 대체로 일정기간 동안에 특정한 지역에 집중적인 운동이 발생하게 하는 정도였음을 나타내준다.

결과진압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자 각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경찰만으로는 진압이 불가능했다. 그리하여 미 전술군, 파업파괴단, 조선국방경비대, 각 지방의 일부 우익청년단체들은 대구10월사건 관련자들을 체포한다는 명분 아래 좌익관계자들을 체포 또는 테러했고, 재산을 파괴했다. 미군-경찰-조선국방경비대-우익단체로 이어지는 시위대 진압의 무장력은 대구10월사건 이후에도 그 기본적인 골격은 바뀌지 않았으며, 단지 미 전술군의 역할을 조선국방경비대가 대신 맡았을 뿐이다.

사상자와 피해

대구10월사건으로 인해 야기된 사상자와 피해에 대해서는 정확한 통계가 거의 없다. 이것은 당시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이 보복이 두려워 신고하지 못했다는 점과, 시위 발생시 많은 경찰이 도망가 행방불명이 많았다는 점이 주된 이유이다. 경상북도지역에만 국한해 살펴보면 ① 사망자 : 관리 63명, 일반인 73명, ② 부상자 : 관리 133명, 일반인 129명, ③ 건물전소 : 관청 4, 일반 6, ④ 건물파괴 : 관청 240, 일반 526 등이었다. 피해액은 당시 경무부장이었던 조병옥에 따르면 민간측 피해액이 2억 2,000만 원, 경찰측 피해액이 1억 2,000만 원, 기타 관공서의 피해액이 1,600만 원이라 했으나, 대구10월사건대책위원회에서 발표한 피해상황에 나타난 영천군만의 피해액이 10억 원이 넘는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앞의 발표는 지나치게 적게 보고된 것이라 판단된다.

영향

대구10월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는 좌익세력과 시민이었다. 주요 좌익간부들은 9월총파업과 대구10월사건의 주모자로 검거되었고,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감옥으로, 산으로 또는 지하로 잠적했다. 미군정과 우익은 시위대를 진압함으로써 좌익의 가장 커다란 대중투쟁적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이는 국립경찰의 실력과 생존력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성격

참가자의 측면에서 이 사건은 전국적인 수준에서 230여 만 명이 참여하는 '대중적 성격'을 지녔다. 구체적인 주장과 행동이라는 측면에서는 친일파에 대한 원한의 폭발, 미군정의 반동화 및 식량정책에 대한 반발, 생활고에 대한 분노, 인민위원회에 의한 행정과 치안 담당의 요구 등의 성격을 보였다. 역사적인 차원에서 볼 때 이 사건은 조선공산당의 지시와,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의 조직적 동원 및 상호연락관계가 분명한 것이었지만, 실제의 결과는 일제하에서 구조화된 사회·정치 구조가 8·15해방과 더불어 청산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유지 또는 재건시키려는 미군정과 국내보수세력에 대한 시민들의 자연발생적인 항거의 성격이 있었던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1946년 10월 1일, 경상북도 대구에서 발생한 민중봉기로, 미군정의 쌀 강제 수집과 제한 배급, 식량난, 전염병 등으로 시민들의 불만이 폭발하면서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노동자들의 총파업과 시위가 중심이었으나, 경찰 발포로 사망자가 발생하자 시민들은 경찰서를 점거하고 무기를 탈취하며 전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대구·경북 지역에서만 77만 명이 참여했고, 전국적으로는 약 230만 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군과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사건 후 친일 경찰과 우익 단체의 좌익 토벌과 민간인 학살이 이어졌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의 근본 원인을 미군정의 식량 정책, 토지개혁 지연, 친일 관리 고용 등으로 규정하고 국가 책임을 인정하였다 

제주 4.3 사건- 이 사건은 미쏘 간의 대리전 양상을 띄우는 복잡한 사건이다. 해방 전부터 이 사건은 빌미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따로 자료가 준비되어 있으므로 후술함-dhleepaul

1. 4.3 남로당 무장봉기와 충돌2. 평화협상과 오라리 방화 사건3. 선거 방해와 무력충돌4. 미군정과 국군의 초토화 작전과 집단 학살5. 인민 유격대의 몰락과 사태 평정

4.3 사건 타임라인

1. 4.3 남로당 무장봉기와 충돌[편집]

친애하는 경찰관들이여! 탄압이면 항쟁이다. 제주도 유격대는 인민들을 수호하며 동시에 인민과 같이 서고 있다. 양심 있는 경찰원들이여! 항쟁을 원치 않거든 인민의 편에 서라. 양심적인 공무원들이여! 하루빨리 선을 타서 소여된 임무를 수행하고 직장을 지키며 악질 동료들과 끝까지 싸우라. 양심적인 경찰원, 대청원들이여! 당신들은 누구를 위하여 싸우는가? 조선사람이라면 우리 강토를 짓밟는 외적을 물리쳐야 한다. 나라와 인민을 팔아먹고 애국자들을 학살하는 매국 배족노들을 거꾸러뜨려야 한다. 경찰원들이여! 총부리란 놈들에게 돌리라. 당신들의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란 돌리지 말라. 양심적인 경찰원, 청년, 민주인사들이여! 어서 빨리 인민의 편에 서라. 반미구국투쟁에 호응 궐기하라.


경찰, 공무원, 대동청년단 단원들에게 보내는 무장대의 경고문

시민 동포들이여! 경애하는 부모 형제들이여! '4.3' 오늘은 당신님의 아들 딸 동생이 무기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매국 단선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

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당신들의 고난과 불행을 강요하는 미제 식인종과 주구들의 학살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오늘 당신님들의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하여! 우리들은 무기를 들고 궐기하였습니다. 당신님들은 종국의 승리를 위하여 싸우는 우리들을 보위하고 우리와 함께 조국과 인민의 부르는 길에 궐기하여야 하겠습니다.


무장대가 제주도민에게 보내는 호소문


제주 민관총파업까지만 해도 (비록 어느 정도는 남로당의 개입이 있긴 했지만) 좌우 각진영의 온건파에게도 호응을 얻은 민중항쟁의 성격이 강했지만, 남로당의 무장봉기로 제주도에는 본격적으로 폭력의 한가운데로 들어가게 되었다. 남조선로동당 제주도당은 지속적인 탄압을 받자 1948년 초부터 격렬한 찬반 논의 끝에 무장투쟁을 하기로 결정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 결정은 남로당 중앙당과의 협의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1]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즈음에 제주도 각지의 오름마다 봉화가 솟아올랐다.[2]그것은 남로당을 주축으로 한 무장대가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신호였다. 곧 350여 명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의 전 경찰지서 24개 중 12개 지서와 우익 인사의 집, 우익 청년 단체 등을 일제히 습격했다. 무장대는 무기를 들고 경찰, 우익 인사, 우익 청년 단체 단원, 경찰 가족 등을 공격했다. 이 일로 경찰 4명, 우익인사 등 민간인 8명, 무장대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무장반란에서 무장대가 경찰과 우익 인사를 습격해 군경 일동은 긴장하였다.

4월 3일, 이날 반란을 일으킨 무장대는 경찰과 군 병력에 비하면 상당히 약체였다. 처음 반란에 가담한 인원은 300여 명에 불과했고, 이들이 가진 무기는 일본군이 결호작전을 위해 갖고 왔다 놓고 간 일제 99식 소총, 권총, 수류탄 등 소화기와 군도와 대검 등 칼, 죽창, 몽둥이뿐이었다. 그것도 총기가 턱없이 부족하여 대다수가 칼, 죽창, 몽둥이만 들고 나섰을 정도였다.(경찰이 노획한 무장대의 무기들) 물론 이후에 군경에 대한 습격과 충돌을 통해 무기를 보강하기는 했지만 인력과 무기의 부족은 여전했다.[3] 그리고 이들은 빨치산으로 군경과 우익 인사들을 공격하고, 제주도민들을 향해서 끊임없이 5.10 총선거 거부와 공산주의를 주장했다.

5.10 총선거를 1달 정도 앞두고 있던 상황이라 군경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군경은 4월 3일의 무장반란을 선동으로 인한 무장폭동으로 규정했다. 4월 5일, 미군정은 제주경찰 감찰청 내에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했다. 곧이어 응원경찰들과 우익 청년 단체 단원들이 증파되었고, 통행금지령이 내려져 오후 8시 이후의 통행을 금지됐다. 경찰과 우익은 좌익을 더 강하게 탄압하고자 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제주도민들과 또다시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찰은 진압에 소극적인 경비대를 의심하고 일부러 방화 사건을 조작해 경비대를 보내려 했다.

2. 평화협상과 오라리 방화 사건[편집]

제9연대장 김익렬무장대 총책 김달삼오라리 방화 사건 현장

무장대와 군경 간의 충돌이 벌어지며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던 경비대 9연대도 무장대 진압 명령을 하달받았다. 9연대장이었던 김익렬[4]은 미군정에서 파견 나온 맨스필드 중령의 요청으로 무장대와의 평화협상에 들어갔다.[5] 4월 22일, 무장대에게 평화협상을 요청하는 전단지가 뿌려졌다. 전단에서 김익렬은 "나는 동족상잔은 이 이상 확대시키지 않기 위해서 형제 제위와 굳은 악수를 하고자 만반의 용의를 갖추고 있다. 본관은 이에 대한 형제 제위의 회답을 고대한다."면서 무장대에게 협상 테이블로 나오라고 설득했다. 그러자 무장대는 연대장이 직접 올 것과 협상의 장소와 시기는 자신들이 정하겠다고 답변했다.

제9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과의 회담은 4월 28일 제주도 대정면 구억리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서 둘은 논의 끝에 합의를 보았다. 그것은 72시간 내로 전투를 중단하고, 점진적인 무장해제와 하산을 통한 귀순을 진행하여 귀순자들의 신변을 보장해 준다는 내용이었다. 김익렬과 맨스필드는 이러한 협상 결과에 크게 만족했다. 정말 이렇게 진행되었더라면 더 이상의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72시간이 거의 끝나기 전에 대형사건이 터지고 만다. 5월 1일에 정체 불명의 무장세력이 제주읍 오라리의 전략촌을 습격하고 방화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을 '오라리 방화 사건'이라고 한다.[6]

이 사건에 대해 경찰은 "배신자들에 대한 공비들의 보복"이라고 주장했으나, 현재는 협상 및 토벌의 주도권이 경비대로 넘어간 데 대한 경찰 측의 훼방놓기로 보고 있다. 실제 습격 현장에서 체포된 포로가 자신은 경찰관이며 제주경찰서장의 명령에 따라 행한 일이라고 자백하기도 했다. 물론 경찰 측에서는 이게 좌익의 이간질이라고 주장했다.[7]

현재 밝혀진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오라리 마을은 4.3 무장반란 이후 무장대와 경찰의 충돌로 여러 명의 희생자가 나온 상태였다. 당시 한라산 무장대가 오라리 마을을 습격해 대동청년단 제주지부의 간부와 그 가족이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후 이를 보복하기 위해 대동청년단 제주지부 단원들이 오라리 마을에 난입하여 좌익 활동을 한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의 집 10여 채에 불을 지른 것이다.## 불이 나자 마을 주민들은 불을 끄려고 했고, 무장대는 청년단원들을 쫓아갔으나 충돌은 없었다. 소식을 듣고 온 경찰은 이미 떠나버린 무장대를 추격하지 않고 마을 주민들을 향해 총을 쏘다가 경비대가 출동하자 황급히 마을을 떠났다. 사건을 조사하러 오라리에 온 김익렬은 이 사건의 전말을 알고 미군정에 그 사실을 보고했지만 묵살당했다고 한다.

5월 3일에는 귀순을 하러 산을 내려오던 사람들과 그들을 인솔하던 군인들이 정체불명의 무장세력의 총격을 받는 일이 터졌다. 총격을 가한 자 중 하나가 붙잡혔는데, 그는 자신이 '상부의 지시에 의해 폭도와 미군과 경비대 장병을 사살하여 폭도들의 귀순공작 진행을 방해하는 임무를 띤 특공대'라고 자백했다. 이것을 안 김익렬은 경찰들이 진압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과오를 숨기려 급급한다며 분노했다. 한편 미군정의 태도도 이 사건을 전후하여 강경책으로 바뀌었다. 평화협상은 완전히 깨졌고, 다시 전투가 재발했다. 김익렬과 맨스필드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간 셈이었다.

5월 5일, 딘 군정장관이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송호성 준장 등을 이끌고 제주도에 나타났다. 이들 일행은 맨스필드 중령, 유해진 도지사, 김익렬 연대장 등을 만나 비밀리에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는 다시 재발한 무장반란과 충돌에 대해서 논의가 이루어졌다. 경찰 측에서는 줄기차게 이 반란이 계획적인 폭동이고 강경하게 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김익렬은 이 반란은 복합적인 이유에서 발생했으며 경찰에게도 일정 부분의 책임이 있고, 무력과 선무 공작을 병행해서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물증까지 내놓자 딘 군정장관은 조병옥에게 설명과 다르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에 조병옥은 이것이 다 조작된 증거이고, 김익렬은 공산당과 관련이 있는 자라는 모함을 해 댔다. 분노한 김익렬이 조병옥에게 달려들며 회의는 파국으로 치달았고, 다음 날 김익렬은 연대장 자리에서 전격 해임되고 말았다.[8] 그의 후임은 경비대총사령부 고급부관이던 박진경이었다.

3. 선거 방해와 무력충돌[편집]


평화협상이 깨지자 무장대는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5.10 총선거가 코앞이었기에 무장대는 선거를 방해하고자 했다. 반면 군경은 선거를 성사시키고자 했다. 선거가 다가오면서 선거사무소와 선거관리위원들에 대한 무장대의 공격은 더욱 빈번해졌다.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피살당했고, 선거 관련 문서들이 탈취되거나 소각되었다. 이러한 방해 공작으로 제주도의 최종 선거인 등록률은 64.9%에 불과했다.[9] 선거위원들도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군경이 자신들을 보호해 주기를 바랐다. 군경은 무장대의 공격에 대응하면서 선거를 지원하고 선거운동을 진행했다. 그와중에도 무장대와 군경 간의 충돌이 이어져 5월 7일부터 5월 10일까지 29명이 목숨을 잃었다.

선거 날인 5월 10일이 되자 무장대는 주민들을 산으로 보내 투표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했다. 주민들은 무장대의 지도에 따라 한라산이나 오름에 올라가 생활하다가 선거가 끝난 후에 하산했다. 동시에 투표소에 대한 조직적인 공격도 이루어졌다. 이렇게 되니 마을에는 군경, 군경 가족, 우익 인사, 우익청년단원 등을 제외하고는 투표할 사람이 별로 없었다. 투표가 진행된다 하더라도 무장대의 습격으로 투표소가 불타거나 담당자가 살해당하기 일쑤였다. 대대적인 선거 방해로 인해 미군정과 군경의 투표 독려에도 불구하고 제주읍 중심을 제외하고는 선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3개 투표구 중 2개 투표구의 선거가 무효화되었다. 그리하여 제주도는 5.10 총선거를 거부한 유일한 지역이 되었다. 재선거는 1년 이후에야 치러질 수 있었다.

북제주군갑 구을 구
등록인수27,560 명20,917 명
투표인수11,912 명 (43%)9,724 명 (46.5%)
총투표구 수73개소61개소
투표실시
투표구수
31개소 (42%)
42개소 미실시
32개소 (52%)
29개소 미실시
각 후보자
득표 상황
양귀진 3,647표
김시학 3,479표
김충희 2,147표
문대우 1,639표
양병직 3,474표
박장희 3,190표
김덕준 691표
결과선거 무효화

선거 이후 군경과 무장대와의 대립은 더욱 첨예해졌다. 제주도의 선거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군경은 더욱 눈에 불을 켜고 무장대에 대한 진압을 가속화했다. 5월 20일경, 미 20연대장인 브라운 대령이 제주지구 미군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그는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강경한 진압을 천명했다. 또한 그는 제주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건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으로 인해 일어났다고 확신했다.[10] 김익렬의 뒤를 이은 박진경도 그러한 강경진압에 한몫했다. 마침 그가 부임한 직후 경비대 병사 41명이 탈영하여 무장대에 합류하는 사건이 터졌는데,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제주 출신 병사들을 소외시키고 육지에서 온 병사들을 중심으로 진압 작전을 펼쳤다.[11] 브라운과 박진경의 진압 작전으로 제주도 중산간마을 전역에서 수천여 명의 주민들이 체포되었다.[12] 이런 무차별 체포작전으로 박진경은 두 달 만에 대령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경찰과 우익청년단원들도 마찬가지로 무장대를 진압한다며 민간인들을 탄압했다. 무장대와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이들은 좌익 혐의자에게 사적제재를 가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48년 6월 18일, 강경진압을 주도하던 박진경은 끝내 부하들에 의해 피살되었다. 그를 죽인 자는 문상길 중위, 손선호 하사 등을 포함해 9명이었다. 재판에서 검찰은 이들이 김달삼의 지령을 받아 박진경을 죽였다고 주장했지만, 피고인들은 "박진경 대령은 동포를 학살하고 진급했다."라고 말하며 "3천만을 위해서는 30만 제주도민을 다 희생시키도 좋다. 민족상잔은 해야 한다고 역설하여 실제 행동에 있어 무고한 양민을 압박하고 학살하게 된 박 대령은 확실히 반민족적"이므로 죽였다고 밝혔다. 피고인들은 대부분 중형을 받고, 문상길과 손선호는 총살당했다. 이후 박진경의 후임으로 최경록 중령과 송요찬 소령이 임명되었다. 이들은 박진경의 뒤를 이어 강경 진압을 계속 진행했다. 그리하여 계속 수많은 사람들이 잡혀왔으나 최경록의 말처럼 실제 전투에 종사한 정예 부대는 아직 하나도 체포되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결국 1948년 7월경 들어 무장대도 적극적인 공격을 삼가고, 제주도민들의 여론도 평화적 문제해결을 계속 요구하며 진압도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한편 7월 15일 경비대 제9연대가 부활하여 송요찬이 연대장에 임명되었다. 무장대에서는 '남조선 대의원' 선거를 비공개 혹은 반공개적으로 실시했고[13] 총책 김달삼이 1948년 8월에 열리는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하고자 월북하면서 이덕구가 후임으로 부임했다.

4. 미군정과 국군의 초토화 작전과 집단 학살[편집]

1948년 5.10 선거 실패 이후 경찰의 증강에도 불구하고 무장대의 공세가 수그러들지 않자 미군정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아시아 대륙을 누볐던 야전군 출신인 브라운 대령을 '제주도 최고 지휘관'으로 임명해 제주도 작전을 총지휘하도록 했다. 하지 중장은 제주도 제59군정중대와 제주 CIC에도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브라운 대령을 지원하도록 명령했으며, 이에 따라서 제주도에 대한 무자비한 무력진압을 추구했다. 제주도 지부 지휘관이 된 브라운 대령은 이른바 '평정작전(Pacification Plan)'을 진행했다. 당시 미군정은 소위 6.23 재선거 실시를 위해 '중산간 지역 고립 및 검거작전'을 벌였는데, 이는 제주도민 대량 검거 사태를 불러왔다. 이처럼 제주도에서 미군정 수뇌부의 지휘와 관심에 따라 강력한 토벌전이 전개돼 많은 제주도민이 체포되고 인명피해가 급증하기에 이른다.[14] 1948년 6월 북제주군 조천면 북촌리 집 앞 굴 속에 숨었다가 형제 주민들과 함께 붙잡힌 강서수씨는 이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밤에 숨었다가 날이 밝아갈 때 붙잡혔는데, 나와서 보니 경찰관들이 죽 포위를 했더라고. 모자를 보니까 졸병들이 아니고 높은 놈들 같았어. 미국놈들 하고. 굴에서 나오니까 우리에게 수갑을 채워가지고 동쪽을 향해 엎드리라고 해. 사복을 입은 미국사람들은 키가 큰 놈들이었는데 세명인가 네명인가 돼. 따로 한 차를 탔으니까. 미국놈들이 '빨갱이' '빨갱이'하고 한국말을 하면서 총을 갖고 쏘는 시늉을 하는거야. 미국놈이 지시하면서 경찰관들이 같이들 막 모여들어. 우리는 경찰차에 타고 미국인들은 자기네 차에 타서 같이 제주시로 넘어갔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9일 후인 24일 대한민국과 미국은 양자 간에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에 의거하여 미군이 완전 철수할 때까지 주한미군사령관은 한국군의 작전통제에 참여하게 되었다.[15] 한국군을 지휘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주한미군으로부터 '임시군사고문단'이 파견됐다. 그러는 사이 10월에는 제주도로의 파견을 반대하며 좌익 성향의 군인들이 여순사건을 일으켰다. 또 이때 제주도 근해에 소련 선박이나 잠수함이 출현했다는 소문이 퍼졌다.[16] 그리하여 점차 대대적인 토벌전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1948년 9월부터 소강상태는 종료되고 군인들과 경찰들이 육지로부터 제주도로 차츰 파견되었으며, 그나마 제주도민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던 김봉호 경찰청장이 경질되었다. 10월 11일에는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설치되어 사령관으로는 김상겸, 부사령관으로는 송요찬이 각각 임명됐다.

군은 한라산 일대에 잠복하여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는 매국 극렬분자를 소통하기 위하여 10월 20일 이후 군 행동 종료기간 중 전도(全島) 해안선 5km 이외의 지점 및 산악 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만일 차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그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임. 단, 특수한 용무로 산악지대 통행을 필요로 하는 자는 그 청원에 의하여 군 발행 특별통행증을 교부하여 그 안전을 보증함.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이 발표한 포고문 中

송요찬의 포고령은 여순사건 직전에 발표됐고, 언론에 보도된 시점은 여순사건이 발발한 다음날이었다. 이에 따라 여순사건은 제주도 토벌을 부추기는 촉매제가 됐다. 제9연대는 제11연대의 '무행동 전략(do-nothing policies)'을 '무차별 테러통치(indiscriminate reign of terror)'로 대체했다. 송요찬이 '해안선에서 5km 이외의 내륙지역'을 '적성지역'으로 간주해 위반자에 대해 총살하겠다는 것은 대게릴라전에서 나타나는 '자유발포지대(free fire zone)'의 설정이었다. 그러나 이는 그 지역내 모든 주민들을 '적'으로 간주하는 것은 물론 그들의 생존수단까지도 파괴했다. 베트남전에서도 한 지역이 '자유발포지대'로 선언되면, 지상군이나 공군은 그곳에서 보이는 사람은 누구든지 적군으로 간주했다.


허호준, 『4.3, 미국에 묻다』, 선인, 2021, p.212

10월 17일, 송요찬은 포고문을 발표하여 "해안선으로부터 5km 바깥에 있는 지역에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허가 없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무시무시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이 결정은 산 중턱에 거주하는 중산간마을[17] 거주민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제주도는 과거 조선시대부터 큰 배를 만드는 것을 금해서 어업이 그렇게 발달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해안가 일대에서 어업에 종사하는 '해안마을' 외에도 산 중간층에서 밭을 이루고 살아가는 소농들의 '중산간마을'이 해안선에 사는 '해안마을' 만큼이나 많았다. 이런 섬에서 해안선을 제외한 모든 곳을 초토화시킨다는 건 당시 토벌대가 얼마나 제주 현황에 무지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포고문은 중산간마을 주민들에게 있어서 생활터전 자체를 포기하라는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해안으로 내려와야 살 수 있는데도 내려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다음 날부터 해안은 전면적으로 봉쇄되었고, 군경은 중간산마을을 비롯한 산악지역을 적지(敵地)로 간주했다. 게다가, 해안마을 중에서도 곤을동처럼 피해를 입은 지역도 있었다. 결국 이러한 탁상행정의 말로는 죄 없는 수만 명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여순사건이 터진 후에는 더욱 심해져서 서북청년회 회원들이 대거 제주도로 내려와 군인과 경찰 행세를 했다. 또 제주도민들을 대상으로 민보단을 조직해 무장대를 막으려고도 했다. 마침내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송요찬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 계엄령 선포에 대해 불법이었는지에 대해 논란이 되고 있다. 제헌헌법에는 제64조에 "대통령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한다"라고 써 놓았고 제헌헌법 제99조에는 "법률의 제정 없이는 실현될 수 없는 규정은 그 법률이 시행되는 때부터 시행한다"고 명시되어 있는데, 계엄령 선포 당시 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는 법률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18] 이에 대해 계엄령 선포가 적법했다는 측은 제헌헌법 이전의 법령인 일본의 계엄법이나 미군정 아래에서 계엄령이 폐지되지는 않았다는 점, 제헌헌법 제100조에는 "현행법령은 이 헌법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한 효력을 가진다"고 명시한 점 등을 들어 계엄령이 법적 근거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논란으로 인하여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가 소송을 건 일이 있었는데, 법원은 그에 대한 판단을 유보했다. 계엄령 선포는 제헌국회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야당 국회의원들이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이인에게 계엄령의 허점을 지적하며 위헌 아니냐고 묻자, 그는 계엄법의 부재를 인정했지만 "계엄령은 급박한 때에 현지 군사령관이 하는 것", "단지 동란을 방지하는 응급조치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라면서 얼버무렸다.

계엄령을 토대로 군경토벌대는 본격적인 진압에 들어갔다. 토벌을 위해 군경은 해안을 통제하고, 언론에 재갈을 물렸다.[19] 제주도는 외부로부터 고립되었다. 1948년 11월 중순부터 초토화작전이라고 불리는 강경 진압이 시행됐다. 중산간지대의 마을들과 주민들이 주요한 진압 작전 대상이었다. 또한 미군정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해 내부의 불안요소 제거를 명분으로 제주도에서 경비대와 경찰을 이용해 소탕작전을 지속했다.

토벌대를 격려하는 이승만 대통령토벌대에 체포된 사람들

"아, 떼죽음당한 마을이 어디 우리 마을뿐이던가. 이 섬 출신이거든 아무라도 붙잡고 물어보라. 필시 그의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아니면 적어도 사촌까지 중에 누구 한 사람이 그 북새통에 죽었다고 말하리라. 군경 전사자 몇백과 무장공비 몇백을 빼고도 5만 명에 이르는 그 막대한 주검은 도대체 무엇인가?"


현기영, 「순이삼촌」 中

사방에서 빵빵 총소리가 들리니까. 제주 아낙들이 많이 죽었어. 학교 운동장에다 강제로 끌어내서 일렬로 세워놓고 기관총으로 두두두. 끔직하지.


다큐멘터리 《수프와 이데올로기》중 제주 출신 재일교포 증언

그 때 산에 올라간 사람의 가족인지 임산부인 여자 한 명이있었는데 사람들에게 '잘 보라'면서 그 사람을 잡아다가 막 때렸다. 옷을 다 벗겨서 나무에다 매달았다. 총에 대검을 끼워서 찌르니 피가 흘러내렸다. 경찰은 벗긴 여자의 옷으로 대검의 피를 닦았다.


4.3 생존자 안인행의 증언

"처녀 때. 가다 보면 일본 군인들이 총 메고 말 타고 지그락지그락 다녀도 본 척도 않고 그냥 지나가지, 아무 말도 않더라고. 무섭지 않았지. 나는 4.3 사건 때야 사람 무서운 거 알았어요."


4.3 수형 생존자 송○○ 씨 증언

군경토벌대[20]는 중산간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주민들을 폭도로 간주해 학살했다. 그리고 마을에 불을 질렀다.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일들이 학살 도중에 벌어졌다. 토벌대는 주민들을 집결시키고 가족끼리 말을 태우게 하거나 뺨을 때리게 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주저한다면 마구 구타했다. 반항하면 그 자리에서 총살하는 일도 있었고, 총살자 가족에게 총살당하는 사람을 보게 하며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치게 했다.[21] 그런가 하면 무장대로 변장하여 들어가 도움을 요청한 다음, 도움을 주면 바로 본색을 드러내 사살해 버리는 '함정 토벌'[22][23], 자수를 종용하며 명단이 있으니 거짓말하면 재미없다며 으름장을 놓다가 사람들이 자수를 하면 바로 처형해 버리는 '자수 사건'도 있었다. 처형 대상인 사람이 없자 그 사람의 가족을 데려다 대신 죽여 버리는 '대살(代殺)'과[24] 마을 주민들을 모아놓고 학살을 벌이는 '관광총살'도 횡행했다. 어떤 곳에서는 군경토벌대가 주민들을 대상으로 사살연습을 벌이기도 했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학살된 사람들은 토벌대에 의해 모두 '사살된 폭도'가 되었고, 학살행위는 '공적'으로 치하되었다. 한편 학살을 피해 마을을 탈출한 사람들은 한라산 인근을 떠돌아다니면서 동굴이나 숲에 숨어야 했는데, 군경토벌대는 이런 사람들까지도 색출해 학살했다. 이런 끔찍한 일들로 인해 제주도에서는 '이름 빼앗기지 말라'는 유행어가 나돌았다.[25]

토벌대 중에서는 서북청년회 소속 대원들이 가장 악랄했다. 이들은 노인, 어린이, 아기 등 나이와 성별을 가릴 것 없이 일반 서민들을 빨갱이와 한통속으로 치부하여 모조리 죽여버렸다고 한다. 이들 서북청년회는 월남한 지주나 이북 출신 조직폭력배, 개신교도, 극우세력 장정들이 주류로서 제주에서 화풀이와도 같은 만행을 저질렀고, 진압군 중에서도 가장 악명이 높았다.[26][27]

참고로 일본군은 삼광작전을 '정식 군사교리'로 채택하고 있었다. 쉽게 말해서 적의 전쟁 수행에 도움이 되는 적의 민간인들을 모두 죽이고 적의 마을을 모두 불태우고 적의 물자를 모두 빼앗아야 한다는 극단적인 초토화 전술이었다. 일본군은 이 교리를 중일전쟁에 적용해 수 백만 명의 중국 민간인을 학살해 국제적인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군, 경 토벌대에는 일본군 부사관, 장교 출신들이 주로 자리를 차지했는데, 일본군의 비이성적이고 잔혹한 군사교리를 제주도에 그대로 적용한 것이었다.

작전명령에 의해 소탕된 것은 거개가 노인과 아녀자들이었다. 그러니 군경 쪽에서 찾던 소위 도피자들도 못 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총질을 하다니! 또 도피 생활을 하느라고 마침 마을을 떠나 있어서 화를 면했던 남정네들이 군경을 피해 다녔으니까 도피자가 틀림없겠지만 그들도 공비는 아니었다. 사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공비에게도 쫓기고 군경에게도 쫓겨 할 수 없이 이리저리 피해 도망다니는 도피자일 따름이었다... (중략) 도피자 아들을 찾아내라고 여든 살 노인을 닦달하던 어떤 서청 순경은 대답 안한다고 어린 손자를 총으로 위협해서 무릎 꿇고 앉은 제 할아버지의 따귀를 때리도록 강요했다. 닭 잡아 내라고 공포를 빵빵 쏘아대기도 했다.


현기영, 「순이삼촌」 中

무명천 할머니는 제주 4.3 사건 당시인
1949년 1월 12일 한경면 판포리에서
토벌대의 총격으로
아래턱을 소실하였다.
그 후, 정상적으로 말을 하거나 먹지 못한 채
소화불량 및 관절염 등 후유장애를 앓다가
2004년 9월 8일 향년 나이 90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학살피해자 무명천 할머니(본명 진아영)의 생가에 있는 소개글

"저 한길을 대낮에 한번만 걸을 수 있으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 생존자 김순애 씨의 증언 中

남녀를 불러내 구타하면서 성교를 강요했고, 여자의 국부를 불로 지지기도 했습니다. 밤에는 그 썩는 냄새로 잠을 못이룰 지경이었습니다. 난 그들이 제정신을 가진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홍경토(71세, 성산읍 고성리) 씨의 증언[28]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49년 1월 17일에 벌어진 북촌리 학살사건이다. 북촌리 부근의 제2연대 3대대의 일부 병력이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군인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에 놀란 마을 원로들을 포함한 주민 10명이 시신을 싣고 직접 대대 본부가 있는 함덕군주둔소를 찾아갔으나 군인들은 흥분하여 마을 원로들을 포함한 9명을 무참히 살해한 후[29], 북촌리에 나타났다. 군인들은 북촌리 주민 1천여 명을 집결시키고 주민 전체가 빨갱이라는 죄목을 씌우는 등 억지 핑계를 대며 민보단 책임자를 제일 먼저 사살했다. 주민들이 동요하자 위협사격을 가했는데, 이때 사격으로 젖먹이를 안고 있는 여인들이 목숨을 잃었다.[30] 공포에 잠긴 주민들에게 토벌대는 군경 가족을 골라낸 다음, 나머지는 수십 명씩 끌고가 마을 주변의 옴팡밭에서 모조리 총살했다.[31] 학살은 북촌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서쪽 '너븐숭이'와 동쪽 '당팟' 등 2곳으로 나눠 이뤄졌고 이 일로 300~460여 명의 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또 군인들이 불을 지르는 바람에 마을 전체가 불에 타 잿더미로 변했다. 이 사건은 제주 4.3 사건 당시에 일어난 학살 사건으로는 최대 규모였고[32], 이 일로 인해 북촌리의 성비는 한동안 여초였다고 한다.[33] 그런데 군경은 이런 자신들의 학살 행위를 무장대의 행위라고 왜곡해 서술해 놓았다.

또 다른 사례로는 다랑쉬굴에서 일어난 일이 있다. 구좌읍 종달리와 하도리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은 1948년 12월 경에 구좌읍 세화리에 있는 다랑쉬 오름 근처의 굴로 피난을 와 있었다. 그런데 군경토벌대가 그 위치를 알고 안에 있던 사람들 보고 나오라고 했다.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토벌대는 굴 입구에 불을 지폈다. 결국 연기에 질색하여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망자 중 3명이 여성이었고 아홉 살 아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랑쉬굴은 1992년에야 발굴되어 그 전모가 알려졌다.

초토화작전은 1949년 2월까지 계속되었다. 토벌대의 학살은 수많은 마을을 파괴시키고 제주도의 인구를 급감시켰다. 미군 보고서는 "지난 한 해 동안 1만 4,000명~1만 5,000명의 주민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 중 최소한 80%가 토벌대에 의해 살해됐다. 섬에 있는 주택 중 약 1/3이 파괴됐고, 주민 30만 명 중 약 1/4이 자신들의 마을이 파괴당한 채 해안으로 소개당했다"[36]면서 그 참혹한 실상을 보고했다. 제주 4.3 사건 동안 발생한 대부분의 인명, 재산 피해는 이 초토화작전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소수였지만 학살을 막기 위해 애쓴 사람들도 있었다. 모슬포경찰서장이었던 문형순은 군경의 강압으로 인해 100여 명이 자수하여 학살될 위기에 처했을 때, 도움을 주어 이들이 살아날 수 있도록 했다. 또 성산포경찰서 서장으로 일하면서 6.25 전쟁 당시의 4.3 관련 예비검속자 학살을 부당하다며 거부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서귀포시 남원면 신흥리의 구장인 김성홍은 군경의 물음에도 자신은 "모른다"고 일관하여 혹시 모를 마을 주민들의 학살 피해를 막아주어 '몰라구장'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위미리 출신 순경이었던 강계봉은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의 주민들의 희생을 막고자 애썼고, 서북청년회(!) 단원이었던 고희준도 성산포 지역에서 무고한 주민들을 도와주었다. 또 경찰이었던 장성순은 귀순한 사람들을 처벌하지 않고 풀어주었으며, 이북 출신이었던 방 씨(본명은 미확인)는 상관의 학살 명령에 총기가 미작동한다며 명령 이행을 거부했다.[37][38]#

물론 이 끔찍한 학살 행위가 비단 군경토벌대에 의해 자행된 것만은 아니었다. 무장대도 반동분자 처단과 보복을 외치며 자기들에게 비협조적인 제주도민들을 학살했다. 구좌면 세화리, 표선면 성읍리, 남원면 남원리 등에서는 무장대에 의해서 군경 토벌대나 우익과 관련된 사람들이 무참히 살해되었고 그 수는 4.3 사건 총 희생자의 약 10~20%로 추정된다.[39][40] 쉽게 말해 당시 제주도에서는 낮에는 서북청년단의 토벌대 및 군, 경찰이 '빨갱이 색출'을 빙자한 학살을 하고 이들이 저녁에 해안가 주둔지로 철수한 이후에는 빨치산들이 내려와서는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이거나 살기 위해 군경에 협조한 양민들을 학살했다. 다음은 무장대에 의한 학살의 증언들이다.

세화리 민보단은 제주도에서 가장 강했다. 그 날 제주도 남로당 놈들이 전부 습격에 가담했다는 말이 있었다. 그들은 밤 9시 30분경 세 발의 총성을 신호로 일제히 공격했는데 길가로 내려오면서부터 불을 질렀다. 그리고 "너 남로당원이냐, 민보단원이냐"고 묻지도 않고 그냥 눈에 보이는대로 죽였다. 그리고 식량과 옷을 도둑질해갔다. 당시 지서엔 응원대도 있었고 지서원들도 있었는데 갑자기 기습받은 것이라 경찰들은 정문 밖으로 나와 보질 못했다.


무장대의 구좌면 세화리 마을 습격 사례

표선면 성읍리는 중산간마을이면서도 불에 타지 않은 마을이다. 토벌대가 성읍지서 소재지인 성읍리는 제외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성읍리는 소개령도 내려지지 않았고 오히려 토벌대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1949년 1월 13일, 군경토벌대가 수색을 위해 나간 사이에 여러 일들이 벌어졌다. 먼저 마을에 남아 있던 경찰이 입산자의 처자식을 살해하는 일이 터졌다. 이후 오후 5시 경 무장대가 마을을 공격했다. 무장대는 보초를 서는 주민을 살해하고 2시간 동안 음식을 약탈하고 집집마다 불을 질렀다. 협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무장대에 의해 무참히 살해됐다. 이 날의 충돌로 38명의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무장대의 표선면 성읍리 습격 사례

인민 유격대의 몰락과 사태 평정

귀순자 중 무장대 협력자를 가려내는 장면사살되어 십자가에 내걸린 이덕구의 시신[41]


토벌대의 강경한 진압은 1949년 3월, 유재흥, 함병선이 제주도 지구 전투 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수그러들기 시작했다.[42] 유재흥은 무력 진압으로 일관하던 진압 방식을 무력과 선무공작을 병행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구호대책이 마련되었고, 산에 있던 피난민들에게 자진해서 하산하면 죄를 묻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하산을 권유했다. 그리하여 4월부터 하산자들이 속속 나타났다. 5월까지 수천여 명이 하산했고 여자, 어린이, 노약자 등을 제외하고는 철저히 검색되어 따로 수용되었다. 당시 증언에 따르면 자신들이 직접 돌을 쌓아 격리 구역을 만든 뒤 그 안에 수용되었다고 한다. 유재흥은 재선거가 있던 5월 초까지 부임했고, 5월 15일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는 제2연대에게 임무를 위임하고 폐지되었다. 서북청년회 일색이었던 제2연대 제3대대와 서청 출신 경찰들도 같이 철수했다. 하지만 하산자 중 1,600여 명은 전국의 교도소에 분산되어 수용되고 말았다. 이후 육군 수색학교의 후신인 독립대대와 해병대가 순서대로 제주도에 들어와 치안을 담당했다.

제주 주민들은 2연대의 공적을 높이 찬양했고 기리기 위해 서귀포에 ‘함병선 대령의 공덕비’를 건립하고, 1949년 7월 7일에는 도민 전체의 이름으로 한라산에 ‘평정비’를 건립했다.[43]

이런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과 선무공작 등 일련의 정책들은 무장대를 거의 끝장냈다. 무장대 대원들도 하산 행렬에 따르거나 초토화 작전 도중 사살당했으며, 간부들도 이와 비슷한 처지가 되었다. 6월 7일에는 무장대의 상징적 존재였던 이덕구가 토벌대에 의해 사살되었다. 그의 시신은 나무 십자가에 묶여져 제주경찰서[44] 정문 앞에 하루 동안 전시되고 태워졌다. 그의 죽음은 무장대의 완전한 몰락을 의미했다. 이후 무장대의 활동은 급격하게 약화되었고 지속적인 진압 작전이 이루어지면서 이들은 거의 소멸되었다. 무장대는 6.25 전쟁이 터지자 북한의 지원이 있으리라는 희망 속에 방송국, 파출소를 습격하는 게릴라 전술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끝내 군경의 무력 진압과 선무공작으로 인해 '잔비’(殘匪)로 불리며 한라산 일대와 오름을 떠도는 처지가 되었다. 1952년 군 정보국은 무장대의 수를 무장인원 35명, 비무장 동조자 30여 명 등 총 65명으로 예측하였으나 이런저런 내분 끝에 4.3사건 7주기를 맞은 1954년에는 제주 경찰의 브리핑에서는 무장대의 수가 6명(남성 2명, 여성 2명)으로 "두 편으로 나뉘어 서로 연락이 두절된 상태"라고 밝혔으며 그 중 여성 한 명이 투항하면서 1955년에는 다시 5명으로 숫자가 줄었다. 1956년에는 이들 중 다시 2명이 경찰에 의해 사살되었고, 1957년에는 다시 2명이 또 사살되었다. 그렇게 9주기를 하루 앞둔 1957년 4월 2일 마지막 무장대원이 검거되면서 무장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45]

무장대의 활동은 줄어들었지만 4.3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진 것이다. 4.3 사건의 여파가 간신히 가라앉던 즈음이었다. 전쟁이 터지자 전국에서는 좌익 정치범이나 좌익 혐의자, 보도연맹 가입자들을 대상으로 예비검속과 학살이 자행되었다. 전국에 있던 교도소에서 학살이 벌어졌고, 이때 그곳의 4.3 구속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다.# 이들에 대한 탄압과 학살 그리고 유족들에 대한 연좌제 적용으로 인해 제주도민들 중 적잖은 민간인이 해병대 등 국군에 자원 입대하는 일도 적잖게 있었다. 자원입대로 충성심을 증명해야 연좌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나고 무장대가 궤멸당한 1950년대 중반에야 제주도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1954년 9월 21일 제주 경찰은 경찰국장 신상묵 명의로 포고문을 발표해 한라산에 내려졌던 금족령을 해제하였으며, 1957년 4월 2일 최후의 무장대원 오원권[46]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며 제주도에서 4.3 사건의 총성은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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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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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 발포 사건을 계기로 시작되어,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의 봉기와 이후 1954년까지 이어진 무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 사건이다 

 배경에는 단독 선거 반대, 남로당의 총파업과 무장 봉기, 그리고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의 강경 진압이 있었다 

 사건 초기에는 경찰 발포로 사망자가 발생했고, 이후 무장대와 토벌대 간 충돌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제주도민 약 30만 명 중 3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사건은 주민 공동체의 자발적 저항과 국가권력의 학살이 교차한 비극으로 평가된다 

 

두 사건의 공통점과 차이점

공통점: 두 사건 모두 해방 직후 사회 혼란, 미군정·정부 정책에 대한 민중 불만, 좌익 세력과 민간인의 저항이 얽혀 발생했으며, 대규모 민간인 희생과 국가 책임 문제를 남겼다 

  • 차이점: 대구 10.1 사건은 즉발적·자발적 민중봉기 성격이 강하고, 식량난과 노동자 요구가 중심이었으나, 제주 4.3 사건은 사전에 조직되고 계획된 무장 봉기로, 단독 선거 반대와 남로당 지휘 하의 체계적 저항이 특징이다 

역사적 의미

두 사건은 해방 후 남한 사회의 정치적 혼란과 분단 상황, 민중의 저항과 국가권력의 폭력적 대응을 보여주는 사례로, 이후 진실화해위원회와 정부 차원의 사과 및 명예 회복 논의가 이루어졌다 

나무위키+1. 또한 지역적 저항의 역사로서, 한국 현대사에서 민간인 희생과 국가 책임 문제를 재조명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대구 10·1 사건(大邱 10·1 事件)은 1946년 10월 1일에 미군정하의 대구에서 발발, 이후 남한 전역으로 확산된 일련의 사건을 지칭한다. 역사적 관점에 따라 10월 인민항쟁, 10·1사건, 영남 소요, 10월 폭동 등으로 불린다.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10월 인민항쟁,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영남 소요, 10월 폭동으로 부르며, 중립적인 입장에서는 10·1사태로 부른다. 조선공산당의 선동 및 주도를 주장하는 시각에서는 10월 폭동으로 부르기도 한다. 과거에는 10월 폭동, 영남 소요, 10월 항쟁의 용어가 혼용되었으며, 공식적으로는 보다 중립적인 10·1사건이라는 지칭을 사용한다.[1]

2010년 3월 대한민국 진실화해위원회는 《대구 10월사건 관련 진실규명결정서》에서 해당 사건을 "식량난이 심각한 상태에서 미 군정이 친일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 공출 정책을 강압적으로 시행하자 불만을 가진 민간인과 일부 좌익 세력이 경찰과 행정 당국에 맞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국가의 책임을 인정해 유족들에 대한 사과와 위령사업을 지원하도록 권고하는 결정을 내렸다.

 

배경

 군정기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및 9월 총파업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46년 9월 30일자 민주중보에 실린 10월 사건이 일어날 조짐을 다룬 기사. 이 기사가 실린지 이틀후 부산 지역신문인 민주중보는 1달반 동안 휴간상태 들어갔다.[2]

광복 이후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USAMGIK) 기의 남한내 한인들의 삶은 굶주리는 처지였다. 미군정의 쌀 배급 정책이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 콜레라가 창궐한 대구의 굶주림은 특히 더 심했었다. 대구, 경북 일대에 2천여 명의 콜레라 환자가 발생하자 치료를 위한 조치들은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전염을 막는다며 대구를 봉쇄해버린 탓이었다. 차량은 물론 사람조차 시경계를 넘을 수 없게 되면서 그 결과 농작물과 생필품 공급이 끊어지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쌀이 부족했다. 당시 돈이 있다해도 쌀을 구할 수 없어 콜레라를 치료하는 의사들조차도 콩나물과 쌀로 죽을 끓여 먹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또한 국립경찰[3]로 채용된 과거 친일파 출신 경찰들이 일제시대 방식 그대로 농민들의 쌀을 강탈하다 시피 공출해갔다.[4][5] 친일출신 경찰들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는 매우 커져갔고, 경찰은 이에 대해 보복하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졌었다. 이러한 가운데 대구경북 일대의 민심은 매우 흉흉했다.[4]

소련군정의 스티코프의 일기에 따르면 총파업에 관한 명령과 자금이 개입 되었다고 작성되었다. 1946년 남한을 뒤흔들었던 9월 총파업 당시 북한의 소련군정은 조선공산당측에 200만엔을, 이어 발생한 10월 대구폭동 기간 중에도 세 차례 추가자금(300만엔 이상)을 지원했으며, 파업투쟁에 대한 행동지침까지 지시했다. 이는 당시 소련군정의 최고 책임자인 연해주군관구 정치담당 부사령관 겸 군사평의회위원이었던 테렌티 스티코프(1907∼1964년)가 작성한 일기에 나타나있다.[6]

한편 1946년 5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미군정에서 '공산당 활동 불법화'를 공표함과 동시에 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령을 내린다. 다만 이때 당시 조선공산당은 소련군정에게서 직접적인 지원금을 조달받고 있던 터라 굳이 무리해서 위조지폐를 만들 이유는 없었으며, 수도경찰청 청장이었던 장택상 측에서 증거로 제시한 위조지폐 또한 조선공산당 인사들이 만들었다는 증거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다.

이후 박헌영 계열 조선공산당세력들에서는 "미군정에 대항하겠다."면서 '신전술'이라는 방식을 채택하여 더욱 극단적 성향을 보이게 된다. 이어 공산당과 전평은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1946년 9월에 철도노동자, 운송업노동자들이 주도해 대대적인 파업을 벌였는데, 이것이 9월 총파업이다. 9월 총파업은 부산지역의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다. 이렇게 되어 공산당과 전평은 9월 총파업을 주도해 나아가 본격적으로 미군정에 정면충돌을 벌였다.[7] 9월 총파업으로 순식간에 전국으로 번져나가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미군정은 국립경찰과 반공청년단체를 투입하여 파업에 진압하였으나, 여기서 의외의 사태를 맞게 되는데 대구지역 노동자들의 파업 시위에 경찰이 발포하자 이에 대해 맞서 발전하게 되었다.[8]

조선공산당의 신전술에 따라 1946년 7월부터 전평과 전농을 중심으로 미군정을 상대로 한 강경한 투쟁이 시작된다. 그 시작은 ‘쌀 획득 투쟁’이었다. 전평은 기존의 온건노선을 버리고 소속된 노동조합들이 쌀 배급과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였다. 투쟁은 9월 총파업으로 번져갔다. 그 중심에 철도노동자들이 있었다.[9]

영남지역의 상황

대구

조선공산당에서 주도하여 9월 총파업을 전개했을 때, 대구에서는 전평 지도부에서 9월 23일부터 총파업에 돌입, 10월 1일까지 파업과 시위가 계속되었다.[10] 10월 1일 대구지역에서 노동단체들이 모여 메이데이 행사를 개최했다. 해주로 피신했다가 소련을 방문하고 돌아온 박헌영은 경성부로 내려와 경성의 메이데이 행사에 참석, 축사를 낭독했고 타지역의 메이데이 행사에서도 그의 축전이 낭독되었다. 그러나 메이데이 행사는 미군정에 대한 사건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런데 10월 1일 저녁, 대구부청 앞에서 기아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시위 도중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황말용, 김종태 라는 노동자가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의 발원지인 대구부청 자리는 오늘날 경상감영공원이다.[10] 사태가 심각해지자 박헌영은 무력 시위를 중단할 것을 촉구했고, 불필요하게 미군정을 자극해서는 안된다며 중단을 촉구했지만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고, 경찰관과 행사 참가자 간의 물리적인 폭력사태로 진행되었다. 박헌영은 즉시 서울시를 떠나 피신하였다.

다음 날 아침,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2명이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노동자들이 시내에 집결하기 시작했고 굶주린 일반 시민들과 학생들도 시위에 합세했다. 만여명의 군중에 포위된 대구경찰서장은 스스로 무장해제를 선언하고 유치장 열쇠를 건네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들을 석방하게 했다. 조선공산당 지도부의 통제를 받는 노동자들은 질서 있게 경찰권을 인수하려 했다. 그런데 이때, 거리 한쪽에서 흥분한 군중들이 경찰에 투석을 시작했고, 궁지에 몰린 경찰관들은 군중들에게 총을 난사하여 17명의 시위대가 죽는 사태가 벌어졌다.[11]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에서는 당시 모습을 촬영한 사진을 볼 수 있다. 사진에는 거리 한쪽에 장총으로 무장한 경찰들이 엄폐물 뒤에 쪼그려 앉아 있고 반대편으로 피신한 시위 군중 쪽에는 여러 명이 바닥에 쓰러져 있다. 시신을 촬영한 사진에는 번호가 24번까지 매겨져 있어 당시 적어도 24명이 사망했음을 알 수 있다.[12]

분노한 군중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동향을 살피던 정사복 경찰관들을 구타하거나 경찰 무기고를 털어 총기로 무장했다. 처음에 평화시위로 시작하다가 폭력적 성향으로 돌변하자 일부 젊은 공산당원들은 시위의 선봉에 섰으나 고참 당원들은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뒷전에서 이리뛰고 저리 뛰어다니기만 했다.

군중들은 부잣집과 과거 친일파들의 가옥을 털어 생필품이나 식량을 가져갔지만, 달아나지는 않고 그것들을 길바닥에 쌓아놓고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었다. 일반 가게나 은행 같은 곳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경찰관을 집단 폭행하거나 죽인것은 그들의 대부분이 일제 때부터 조선인들을 괴롭혀온 친일경찰이었기 때문이었다고 박헌영 평전에서 주장한다.[13]

심지어 대구지역의 의사모임인 대구부의사회는 경찰에 대한 경고문을 발표해 "첫째, 경관은 시민에게 발포를 중지하라. 둘째, 동포에게 발포한 경관 부상자의 치료를 거부한다"며 사건에 동참했다.[14]

조선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시위대는 많은 경찰관과 우익인사들을 군중이 보는 앞에서 구타, 죽창찌르기, 칼로 난도질하기 등으로 잔인하게 살해하였다.

미군정은 이튿날인 10월 2일 오후 7시 대구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군을 동원함으로써 표면적으로는 질서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미군 개입으로 시위가 대구 인근인 경산군성주군영천군 등으로 확대되면서 경상북도 일대에서 민간인들과 미군정간의 충돌은 멈추지 않고, 계속 발생하게 되었다. 이후 경북 지역 민간인 시위 진압 과정에서 또다시 경북 지역을 벗어나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1946년 말까지 계속되었다.)

경상북도

독립운동가 박상희박정희 대통령의 셋째 형이다.

소요사태는 10월 2일 즈음 되어 잠잠해지는 듯 했으나 주변인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시위를 벌이고 소요를 일으키면서 사건은 경북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영천에서는 1만여명의 시위대가 경찰서를 습격하고 군수, 경찰, 관리들을 살해하고는 경찰서와 우체국을 방화했다. (10월 3일) 경찰응원대가 도착해 질서는 회복되었으나 경찰관들과 우익 청년단원들은 사건 관련자들의 집을 약탈하고 유린했다.[15] 영천에서만 해도 1200여호의 가옥이 전소,파괴되었고 사망 40명, 중상자 43명, 피해액 10억여원의 피해를 입었다.[16]

한편 선산군(현재의 구미)에서는 다른 지역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피해가 미미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20세기까지 알려져왔던 내용은 박정희의 형 박상희를 주동으로 한 2000여명의 군중들이 구미경찰서를 공격해 경찰서 기능을 마비시키고는 선산인민위원회보안서 간판을 매달아 지역관리에 나섰고 경찰, 우익인사들을 감금하고 부호들의 가산을 파괴했다고 보도되어 왔었다. 허나 21세기에 들어 새롭게 밝혀진 사건 조사내용에 의하면 10월 3일 구미 경찰서 습격 당시 경북지역 남로당원들은 폭동이 최악의 사태로 치닫는 것을 오히려 막으려 했다고 밝혀진다.[17]

이것은 박상희(朴相熙)의 죽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산지부 사무국장이던 박상희는 구미에 머물면서 대구의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해 10월3일 시위를 하던 인민들이 선산경찰서를 습격하자, 박상희는 시위대를 설득해 갇혀 있던 경찰들을 무사히 피신시켰다가 뒤늦게 도착했던 타지역 경찰에게 사살되고 말았다.[18]

박상희의 큰딸 박영옥씨는 2010년 7월15일 구미 박상희 묘역에서 열린 추모비 제막식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18]

63년 전 돌아가신 아버님은 동분서주하시면서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수많은 옥고를 치르셨고, 돌아가시던 1946년 10월5일에도 시위대에 둘러싸인 경찰관이 위태롭다는 전언을 듣고 경찰관을 구하러 가셨다가 변을 당하셨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아버님은 좌익이니, 우익이니, 공산활동을 했느니 하는 부당한 평가에 시달리며 지금까지 지내 왔다. 별세하신 지 60년이 지나도록 묘비 하나 없이 싸늘한 땅에 누워 계셨다.

예천군에서는 시위를 막기 위해 미리 경찰들이 파견되었으나 민간인과의 충돌로 인하여 실패했고 1000여명의 군중이 경찰서를 습격해 교전까지 벌였으며, 미군이 도착할 때까지도 질서가 회복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도 경찰서 공격이 이어져 경찰이 다치고 무기고가 탈취되는 일이 이어져 외곽지역에 경찰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영일군에서는 민간인의 공격으로 전도사가 살해당하기도 했다.[19]

칠곡에서도 격렬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500여 명의 군중은 약목지서를 습격해 3명의 경찰을 기둥에 묶어 살해했다. 왜관에서는 2,000여 명의 주민들이 시위와 함께 왜관경찰서를 공격해 경찰 4명이 추가로 피살되었다. 사건 전의 왜관지역은 미곡수집령에 대한 저항이 매우 심했는데 왜관 주민들의 분노가 어찌나 큰지 당시 경찰서장 장석한은 얼굴이 난도질당한 채로 머리부터 밑으로 갈라져 살해당했다고 한다.[20]

이 외에도 달성, 고령, 성주, 군위, 의성, 김천, 경산, 청도, 경주, 영덕, 안동, 상주, 문경, 영주, 봉화 지역에서 사건이 발생했고 약 77만 3200여 명이 사건에 참여했다. 경북 지역의 사건은 다양한 강도(미발생/저강도/중강도/고강도/최고강도로 분류)와 방식(선제공격, 경찰서 습격, 장날 이용, 정치 이념 세력 간의 힘의 균형 이용, 파급이 큰 논농사 지역 이용)을 이용해서 전개되었고, 이에 대한 경찰의 가혹한 보복도 뒤따랐다.

경찰측의 피해 규모는 당시 지역에서의 경찰에 대한 신뢰도나 관할 경찰서장의 임기응변에 따라 크게 줄어드는(동시에 경찰의 보복도 가벼운) 경우가 많았는데, 고령군의 경우 10월 3일 오후 8시경 군민청 본부에 모인 군내 민청원 수백 명이 군청을 습격, 접수할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정보를 접한 당시 고령경찰서장 최이준(崔二俊)이 직접 민청 간부와 만나 양자간 절충을 시도하고, 협상 결과에 불만을 품고 4일 오전 1시경 괭이와 낫을 들고 경찰서 공격에 나선(당시 고령경찰서에는 10월 1일의 대구에서의 소요 진압에 15명의 경관이 투입되고 그밖에 피신한 경관 몇몇을 제외하면 남은 경찰은 8명뿐이었다) 민청원과 군중들을 상대로도 최이준 서장이 다시 몸소 나서서 담판을 짓는 모습을 보였는데, 군중들 사이에서 온건파와 강경파 사이의 알력이 벌어져 시간을 끄는 과정에서 대구로부터 지원경찰이 온다는 소식에 군중은 해산, 별다른 피해는 일어나지 않았다.

왕조 시대 이래로 유교적 전통이 강한 만큼 우익 및 경찰 세력도 좌익 못지 않게 강했던 안동에서는 10월 3일에 농림학교 교사 8명을 비롯, 공산주의 지도자로 지목된 30명(《대구시보》에는 82명)이 안동 및 영주 경찰에 사전 체포되면서 불상사는 예방되었다고 평가되었다.[21] 문경에서는 황시곤, 이규선 등 문경의 지방 유지들이 광복청년회 점촌지부 점촌소방대와 함께 경찰에 협조했고, 문경경찰서장이었던 조준영 경감은 문경 군민들에게 비교적 "청렴하고 참신한 인물"로 평가받아온 사람이었고 군내 좌익들의 동태를 파악해 예방조치를 강구한 덕분에 피해가 다소 적었는데, 10월 월 4일 50여 명의 군중이 군내 산양지서를 습격, 파괴하였고 경찰에 용의자 30명이 검거, 별다른 인명피해는 없었다.

경상남도

경남지역은 대구 10.1 사건의 도화선이 되는 9월 총파업이 시작된 곳이다. 하지만 다른 지역과는 달리 9월 총파업의 전개는 매우 소극적이고 온건적이었으며 10월 사건 때에도 분산적이고 고립적인 사건들이 펼쳐졌다.(그럼에도 많은 지역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경남지역에서는 통영에서 최초의 사태가 발생했다. 4000~5000여명의 군중들이 읍내를 장악하고는 경찰을 구타하고 무기를 탈취했다. 창녕에서도 여러 지서가 습격당하고 군중의 경찰서, 군청 점령시도가 있었다. 마산에서는 6일과 7일에 거쳐서 군중과 군경 사이의 치열한 충돌로 13명 정도의 사망자를 내었다.[22] 울산지역에서는 면사무소가 파괴되고 경찰서가 포위당했으나 응원경찰과 미군의 도움으로 곧 탈환되었고 군중 일부는 배를 타고 도망하였다. 소극적인 사건이 있었던 부산에서도 9일에 유혈충돌이 일어나 24명이 목숨을 잃었다.

영남 이외 지역에서의 상황

충청도

경상도에서 불붙은 사건은 충청도로 옮겨붙었다. 충청도에서 사건은 주로 서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했다. 충남에서는 17~19일을 기점으로, 충북은 10월 4일과 7일에 민간인의 소요가 일어났다.

10월 17일 당진에서 경찰서가 공격당하고 공공시설 점거,통신선 절단, 교량 폭파가 일어남을 시작으로 충남 서북부는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다. 홍성에서는 쌀과 토지를 달라고 시위를 벌이는 군중을 향해 경찰이 무차별 발포하여 4명이 죽었다. 예산, 선산, 천안에서도 소요사태가 발생해 경찰과 우익세력을 위협했다.

충북에서는 비교적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청주에서 경찰 1명이 죽고, 영동군에 300~400여명의 군중이 경찰서를 습격하려 했으나 실패한 정도였다. 충북지역에서 사건이 이렇게 미미했던 까닭은 충북의 중심지인 청주가 온건 성향의 좌익이 꽤 우세했었기 때문이었다. (일부 온건세력은 "극단적인 공산주의자는 용납되지 못함"이라는 전단을 뿌리기도 했으며 실제로 극단주의자를 탈퇴시키기도 했다.)[23]

서울,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충청도에서 사건이 가라앉으면서 경기도와 황해도 지방에서도 소요사태가 터졌다. 경기도 광주에서는 경찰을 살해하고 경찰서를 불태우는 투쟁을 벌였다. 개풍에서는 경찰서장이 피살되고 대부분의 지서가 이틀에 걸쳐서 습격당했다.[24] 파주에서는 폭동이 계획되다가 사전발각되어 주동자들이 전원 체포되었다.

마침내 서울에서도 시위가 발생했다. 3일 1200여명의 군중이 학생들과 합세해 노래를 합창하며 시청 앞에서 시위를 벌였고 21일 정오에는 2000여명이 종로네거리에 모여 동대문으로 전진했다. 그러나 기독교 청년회관 앞에서 무장경찰대의 집단발포로 해산당했고 그 부근을 지나가던 권투선수 한 명이 피살당했다. 그 날 종로 5가에도 시위가 발생하고 서울역에는 폭탄이 터졌다.[25] 달을 넘긴 11월 2일에도 남대문 앞에서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 외에도 인천,연백,장단 지역에서도 시위와 습격이 잇따랐고 10월 20일에서 22일 간 사건이 발생했다.(인천 제외)

강원에서는 횡성에서 수천명의 군중들이 경찰서를 습격했고 묵호에서는 시위를 조사하던 도중 사망자가 나자 주민들이 경찰지서 등을 공격해 다수의 사망자가 또 발생했다. 강릉에서도 경찰이 구타당하고 통신이 두절당했으며, 평창에서는 무기를 든 좌익세력들과 경찰과의 충돌이 발생했다. 삼척에서는 광산을 이유로 좌우익 간의 소요가 일어났다. 강원도의 사건은 동해안 부근에서 사건이 주로 일어났다는 것이 특징이다.

전라도

남한 전역을 휩쓸 것 같았던 일련의 사태들은 10월 23일부터 28일까지 약 일주일 가까이 멈추었다. 미군정과 우익세력들은 좌익극단주의자들이 추수기와 군경의 쌀수집을 기다리고 있고 미군정은 쌀수집을 할 권리가 없다는 선동에 집중할 것으로 판단했다.[26] 그러나 이것은 좌익이 전라도에서 일을 준비해나가는 기간이었다. 그런 이유 탓인지 특히 전남지역은 사건 초기의 경북처럼 크고 폭력적이었다.

전라도에서 사건은 10월이 끝나갈 때 즈음 전남에서 시작되었다. 10월 30일부터 화순지구의 광부들은 광주를 향해 행진을 시도했다. 다음 날인 31일에도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대동하여 행진에 나섰으나 별 다른 충돌 없이 미군의 설득으로 중단되었다. 그러나 정작 11월 4일에 광부들은 미군과 경찰에 대한 격렬하게 맞서면서, 광부와 민간인들은 도로와 다리를 막고는 군경이 탄 지프차를 전복시켰다. 그리고 돌과 탄환을 날리며 이들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다.[27]

무안에도 시위가 발생했다. 좌익청년단체원 50여명이 경찰지서를 습격하고 소요가 발생해 7명이 목숨을 잃었다. 일로에서는 군중이 경찰을 공격했으며, 안성에는 시위대가 철도역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철도경찰과 응원경찰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목포에서까지 학생과 노동자로 구성된 많은 군중들이 파출소를 불태우고 경찰서까지 공격하는 일이 일어나자, 목포와 무안군 일대에 야간통행금지령이 선포되었다.[28]

광주에서는 파업참여자들이 시위를 벌였고 학생들도 시위를 벌이면서 학교가 휴교당하기도 했다. 광산군 송정리에서는 미군과 대화를 한 한국인이 군중에 의하여 친미파로 몰려 무차별 폭행당했다.[29] 그런가하면 함평에선 군중들이 다른 곳에서 온 선동자들과 함께 경찰과 충돌을 일으켰고, 영광에서도 경찰과의 충돌이 발생했다.

나주지역에서 사건은 화순과 함께 전라도 지역에서는 대규모이자 극렬적이었다. 5000여명의 군중이 나주 진입을 시도하였고 일단의 군중이 총을 쏘는 경찰에 달려들어 10명의 사망자를 낳았다. 11월이 되자 8000여명의 군중이 집결해서는 집결하여 진압하려는 미군을 저지하고 각 경찰지서를 공격했다. (약 9개의 경찰지서를 추산 1만여명의 군중이 공격했다. 그 외에도 보성에서 면장과 마을유지, 우익청년단원들이 공격당하는 일이 발생했고, 벌교,장흥,해남,강진,영암에도 11월과 12월에 걸쳐 조그마한 사건들이 여러 번 발생했다. (장성,담양지역에도 사건이 발생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전남의 사건이 매우 격렬했던 것과는 달리 전북에서는 오직 남원과 순창에서만 작은 크기의 사건이 발생했다.(전북의 좌익세력이 분열되어 갈등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전주에서 신경과민적인 경찰의 발포[30]를 끝으로 대구 10.1 사건은 종말을 고했다.

피해

10월 사건은 전국적인 규모의 시위로 확장되면서 경찰력만으로는 진압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각 지역에서 미군과 남조선국방경비대를 비롯하여 한민당세력, 민족청년단서북청년회백의사 등 반공주의 우파 인사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로 인해 족청백의사서북청년회 등 각종 반공주의 우파단체 관련자들이 시위에 가담한 좌파를 체포한다는 명분으로 테러 또는 재산 피해를 입히는 경우가 속출했다. (이를 피하기 위해 일부 좌익세력과 민간인들은 산으로 피신하기까지 하였다.[31])

이 사건의 정확한 규모는 기록 미비로 알려지지 못하였고, 2차 피해를 우려한 참가자들의 신고도 적어 피해 상황은 명확히 추산할 수 없다. 대구를 포함한 경상북도 지역에서만 사망자가 공무원 63명, 일반인 73명으로 총 136명인 것으로 발표되었다. 역시 경북 지역에서만 관청 건물 4동과 일반 건물 6동이 불에 타 전소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체포된 사람은 수천 명에 이르렀다.

당대의 이모저모

박헌영은 이 사건을 "'10월 인민항쟁'으로 부르며, '동학농민운동3.1 운동과 함께 조선의 3대 위대한 인민항쟁'이라 평가했다. 실제로 조선공산당은 공식적으로 시위를 선동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지역의 공산당원들은 읍면마다 터진 시위대의 맨 선두에 서서 싸우다가 죽거나 감옥으로 끌려갔다.[32]

한편, 우익세력들은 일제히 이 사건을 격렬히 비판했는데, 특히 한국민주당세력에서는 '이번 파업투쟁은 박헌영 일파의 모략 선동에 기인한 것'이라며 일제히 맹비난했다.

좌익 내부에서도 이 사건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조선공산당을 제외한 좌익계열 9개 정당 대표들(정백과 이영)은 긴급 회동을 갖고 이번 싸움이 '박헌영의 공산당이 벌인 모험주의'라며 격렬히 비난했다.[32]

좌우합작 세력에서는 양비론을 내세웠는데, 여운형과 김규식은 10월말 미군정청 브라운 소장과의 회담에서 "‘10·1 폭동’이 경찰에 대한 반감, 군정 내 친일파의 존재, 일부 한국인 관리의 부패, 파괴분자들의 선동 탓에 일어났다."고 군정청에 비난을 했다. 이어서 자칭 '대구폭동'이 미군정의 정책파탄에 따른 한국 민간인의 불만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사태를 살육과 파괴로 몰고 간 책임은 ‘신전술’로 과격한 투쟁 노선으로 기울어 잘못된 정책을 채택한 조선공산당에 있다."고 주장했다.[33] 김규식은 '이러한 행동들은 국제적으로 조선 민족의 위신을 떨어뜨려 독립을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라며 자제를 촉구했다.[34]

1946년 10월 24일 덕수궁 한미공동회담에 참석한 수도경찰청 수도국장 최능진은 "대구폭동은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에 의한 불행한 사건이다. 그러나 그 원인은 우리 경찰 내부에도 있다. 국립경찰은 친일경찰과 부패 경찰관들의 피난처가 되었다고 말했다." 당시 10월 사건의 이유 중에 하나였던 친일경찰의 실태를 자신들의 입으로 증거한 것이었다.[4]

의의 및 영향

10월 사건은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주변 경상남도까지 번진 대규모로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이고, 참가자의 시각에서 두가지 견해로 갈라진다.

2007~2010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대구 10월사건’을 조사했던 김상숙은 학살의 현장을 목격했던 이들의 목소리를 묶으며 이 사건을 ‘항쟁’으로 명명하고 1946년 3~4월 절정에 달했던 식량위기가 대구 사건의 중심이었다 주장한다. 이후 영천, 선산을 비롯해 12월 중순까지 남한 전역 73개 시군에 농촌 항쟁이 일어났는데 학계에서는 이 항쟁들을 대구 항쟁과 무관하게 ‘추수 봉기’(브루스 커밍스), ‘전민 항쟁’(정해구) 차원에서 연구했다.[35]

1945년산 추곡 수집에서 낭패를 본 미군정은 1946년산 하곡 수집부터는 지방행정기관뿐만 아니라 경찰, 우익단체, 때로는 무장한 미군 병사들까지 동원하여 가택수색과 검문, 검색과 처벌 등의 강압적 방법을 사용하여 곡물을 공출했다. 하곡은 일제도 공출을 삼갔던 만큼 하곡 수집과 공출에 동원된 강압적 방법은 점령군과 농민 사이에 긴장감만 높여갔고, 농민들은 10월항쟁으로 자신의 불만을 표출했다. 미군은 10월항쟁의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서 사후에 대구지역 저명인사 19명을 개별적으로 인터뷰했는데, 그들은 군정의 양곡수집정책, 비효율적인 쌀 배급, 공출 과정에서 경찰이 보여준 임의적이고 잔인한 수법, 배급 과정에서 경찰과 관리의 부정과 부패 등 미군정 식량정책의 실패를 우선적으로 지적했다.[36]

이 사건의 근본원인은 소련군정의 스티코프의 명령과 자금이 개입되었으며, 지시를 받은 조선공산당일제 강점기의 그대로 남은 일부 제도, 미군정과 군정청의 식량정책 실패, 가혹한 수매, 미군정 경찰 및 서북청년단, 반공청년단의 일반인 사냥 등으로 민심이 흉흉하게 된 분노에 있었다.[37] 이런 상황에서 10월 사건을 주도한 조선공산당과 박헌영 계열이 시위대를 선동하여 미군정의 경제 정책에 대한 반발과 경찰과 같은 핵심 행정기구에 친일파를 그대로 등용한 과거사 미청산에 대한 반대, 행정과 치안에 인민이 참여하는 인민위원회 설치 요구 등의 주장을 내걸어 민간인의 참여를 유도했다.

김일성의 1953년 남로당 숙청을 살아남았던 박갑동은 9월 총파업 시위가 격화되는 중에 조선공산당과 전국농민회총연맹, 전평의 조직이 개입되었으나, 당시 공산당 고참 간부들은 사태를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할지 몰라 뒷전에서 이리뛰고 저리 뛰어다니기만 했었다고 주장한다.[13][38]

같이 보기

각주

  1. 박인경 (2006년 10월 4일). “10월, 역사 뒤의 숨은 진실을 재조명하다”. 경북대신문. 2008년 6월 22일에 확인함.
  2. 민주중보 1946년 10월 1일[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민주중보 1946년 11월 15일[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3. 군정기 시절 경찰은 '국립경찰'이라고 불리었다.
  4.  KBS 다큐멘터리 《인물현대사》 20편, -민족이 최선이다.- 최능진 편.
  5.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6. 이지영 (2011년 6월 2일). “모두 소련지시-소련자금이었다, 총파업-대구폭동진실”. 뉴데일리.
  7. 당시 박헌영은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해 비밀리에 월북, 해주에 있다가 소련을 방문하였다.
  8. 박헌영 평전, 안재성 지음. p379
  9. 울산저널 - 이관술을 사슬에 채운 때 벌어진 9월 총파업과 박헌영 월북
  10.  김용한 (2006년 10월 2일). “[대구] 10월 사건 거리순례 및 추모제 개최 - 잰걸음 내딛는 대구의 10월 사건”. 오마이뉴스. 2008년 6월 22일에 확인함.
  11. 박헌영 평전, 안재성 지음. p380
  12. 오마이뉴스 - 손가락 까딱하면 "타당"... 박정희 대통령 형마저도
  13.  《박헌영 평전》, 안재성 저. 실천문학사. p380
  14. <독립신보>, 1946년 11월 1일자
  15. <The origin of the Korean War>, "CIC report", 358p
  16. <10월 인민항쟁 연구>, 정해구
  17. 평화뉴스 - 독립운동가 '박상희' 선생 재조명을 기대한다
  18.  매일노동뉴스 - 독립운동가 열전 <삶과 넋> 62 박정희 셋째 형, 경북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박상희
  19. <G-2 Periodic Report>, USAFIK
  20. <G-2 Weekly Summary No.57>, USAFIK
  21. 정영진 《폭풍의 10월》 한길사, 1990년, 391~395쪽.
  22. 박헌영, '10월 인민항쟁', <박헌영노선 비판>(서울:세계,1986)
  23. 정해구, <10월 인민항쟁 연구>, P169~172
  24. <조선일보>, 1946년 10월 22일 <서울신문>, 1946년 10월 23일
  25. <G-2 Weekly Summary No.59>, USAFIK
  26. <G-2 Weekly Summary, No.59>, USAFIK
  27. <G-2 Weekly Summary, No.61>, USAFIK
  28. <서울신문>, <영남일보>, 1946년 11월 5일
  29. <G-2 Periodic Report, No.381>, USAFIK
  30. 좌익청년단체가 합법적으로 집회를 열었으나 집회시간을 조금 넘긴 것을 이유로 경찰이 군중을 한쪽으로 몰아놓고 발포해 6명이 죽었다
  31. <세대>,대구 10.1 폭동 사건,p231,이목우
  32.  박헌영 평전, 안재성 지음. p382
  33. “<신동아> 2006년 3월호. -좌우익 대결에서 친일경찰 항쟁으로 이어진 대구 10·1폭동-”. 2012년 12월 1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9월 14일에 확인함.
  34. 《박헌영 평전》, 안재성 저. p382
  35. 한국일보 - 폭동 아닌 항쟁이 있었다, 70년前 대구의 오늘
  36. 한겨레 - 미군정은 왜 일제도 안 했던 하곡 공출을 강행했나
  37. 《박헌영 평전》, 안재성 저. 실천문학사. p383
  38. 2010년 6월, 前남로당 출신이자 박헌영이 비서였던 박갑동의 구술 증언.

참고 자료

외부 링크

대한민국의 대규모 시위 및 농성

대한민국의 공안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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