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자신을 시험하라 (고후 13:5)
고린도후서 13:5 KRV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마지막으로 주신 교훈 중의 한마디입니다. 이 교훈은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어느 시대, 어느 교회 성도에게 적절한 교훈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자기 인식과 무지의 자각을 통해 진정한 지혜와 도덕적 성숙에 이르는 철학적 명제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자신의 본질, 한계, 강점과 약점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통해 인간이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진정한 지혜를 추구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즉,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것, 즉 '무지의 자각'이 핵심입니다
소크라테스에게 자기 인식은 도덕적 성숙과 연결됩니다. 자신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 욕망, 두려움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올바른 선택과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기 인식은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진정성 있는 소통을 가능하게 하며, 삶의 의미와 방향성을 명확히 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인식을 완성된 목표가 아닌 지속적인 여정으로 보았습니다. 파이드로스 대화편에서 그는 "나는 아직 나 자신을 알 수 없다"고 선언하며, 자기 성찰과 도덕적 자기 개선의 여지가 항상 존재함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자기 인식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존재가 거울 역할을 하여 자신의 내면을 반영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보았습니다
오늘날 "너 자신을 알라"는 자기 이해를 바탕으로 삶의 선택과 문제 해결 능력을 향상시키는 지침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성향과 한계를 이해하면 직업 선택, 인간관계, 감정 조절 등에서 더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으며, 감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대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산상보훈에서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경고하셨습니다. 누구나 자기 자신을 세 가지 방면으로 시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머피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은 ‘잘못될 가능성이 있는 것은 잘못되고야 만다.’ 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도 바르게 고치지 않고 계속 진행하여 가다가는 반드시 실패하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잘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너그러운 마음이 필요하겠습니다만 그러나 자기 자신이 잘못하고,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결단코 그냥 지나쳐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길인 줄 알면서도 그 길을 끝까지 가는 것은 그 영혼이 망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할 것없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상당히 관대해집니다. 왜 그렇까요 머피의 법칙을 조금만 더 살펴봅니다.
Murphy's law.
1949년 미국 에드워드 공군기지에 근무하던 에드워드 머피 대위가 주장한 법칙이자 심리학 용어다.
1949년, 당시 미국 공군 소속 대위였던 에드워드 머피는 미 공군의 차세대 음속기 개발을 위해 인체가 버틸 수 있는 중력 한계를 찾는 실험을 진행 중이었다. 머피는 새로 만든 측정장치를 설치했는데 부하 기술자들에게 맡겨놨더니 자신이 설계한 전극봉을 전부 다 잘못된 방법으로 조립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터무니없는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실험값은 전부 0이 나왔고, 이후 그는 '어떤 일을 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고, 그 가운데 한 가지 방법이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면 누군가가 꼭 그 방법을 쓴다'는 법칙을 만들었다. 이 사건은 당시 실험을 지휘했던 존 폴 스탭(John Paul Stapp) 대령에게 큰 인상을 줬고 나중에 기자로부터 위험한 실험에서 사상자가 없었던 비결을 질문받자 머피의 법칙을 언급했다.
간단히 줄이자면 "잘못될 수 있는 일은 결국 잘못되기 마련이다. (If Anything Can Go Wrong, It Will)"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일종의 징크스라고도 볼 수도 있다.
여담으로 이 에드워드 공군기지의 실험은 충분한 안전장치가 있다면 인체는 극심한 충격도 버틸 수 있다는 결과를 보였고 후에 자동차 안전장치(안전벨트, 에어백 등 충격 흡수 장치)를 의무화하는 결과를 이끌었다. 이 실험이 없었다면 한참 동안 자동차 사고로 매년 수백의 인명을 잃었을 것이다.[2]머피 대위의 이러한 발언에 대해 로버트 매튜스(Robert A. J. Matthews)[3]는 우주가 실제로 "우리를 적대한다"(Universe really is "against us")라 말하며, 머피의 법칙이란 것이 일정 부분에서 실제로 존재한다고 그의 저서 "The Science of Murphy's Law."에서 말했다.
머피의 법칙 때문에 에드워드 머피는 "우린 안될 거야 아마", "포기하면 편해"라고 단정짓고 그르치는 비관론자이자 겁쟁이라고 많이 알려져 있는데, 머피는 비관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이 오히려 그는 "잘못될 만한 일이 있다면 그 일은 반드시 나쁘게 흘러가거나 실패하므로, 잘못될 만한 일을 그냥 넘어가서는 안된다"는 교훈적인 발언을 한 것이다. 즉 머피가 처음 법칙을 주창한 경위는 안전불감증을 지적하는 뉘앙스에 가까웠는데, 후에 변질되면서 불운의 상황이나 되는 일이 없을 때 쓰이는 탓에 이 법칙의 원류가 된 에드워드 머피까지 비관론자나 겁쟁이로 몰리는 거고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일부 과학자들은 머피의 법칙이 '선택적 기억(Selective Memory)'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선택적 기억이란 뇌의 기억이 시계열에 따라 고르게 기억되는 것이 아니고 인상깊은 기억들 위주로 남는 현상을 일컫는다. 따라서 일이 아무 문제 없이 해결되면 그건 당연하다고 인식되어 기억에 잘 남지 않으나 일이 실패한다면 기억에 남게 된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보면 실패한 사례만 모아서 기억하게 되니 모든 일이 실패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차를 운전할 때 '왜 급할 때는 항상 빨간불이지?'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은 초록불인 경우도 비슷하게 많다. 하지만 빨간불인 경우만 기억하기 때문에 더 많은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애초에 초록불이면 신호등에 아주 잠깐 신경을 쓴 것 외에는 그냥 지나가버리면 끝이다. 하지만 빨간불이면 차를 멈춰야 하고,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 사소한 차이 때문에 빨간불에 걸린 경우가 더 많은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한편 가끔은 심리적 요소 문제뿐만 아니라 진짜로 잘못될 가능성이 높은 경우도 존재한다. 위의 신호등 예시를 이어가자면, 출근길에 지각하기 직전 상황이라고 하면 하루 중 특정 시각[4]일 가능성이 있다. 이 시간에 목적지 근처 신호등이 항상 빨간불인 것으로 스케줄링 되어있다면, 그 시각에 신호등에 도착하면 무조건 빨간불이 될 수밖에 없게 된다. 실제로 신호 연동을 적용한 도로의 경우 해당 시간보다 약 5분 빨리 도착하면 파란 불에 지나가게 된다. 이 케이스들이 계속 누적되면서 급할 때만 빨간불이라는 확신이 점점 강해지는 것은 덤.[5]이렇게 실제로 잘못될 가능성이 일반적인 인식보다 높은 경우가 왕왕 있다. 유명한 사례로는 "빵은 항상 버터를 바른 면이 바닥으로 떨어진다."라는 법칙이 있다. 얼핏 생각하면 양쪽면이 바닥을 향할 확률이 50:50이 되어야 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사람이 빵에 버터를 바를 때, 아랫면에 들고 바르는 사람은 없으므로 윗면에 바르게 된다. 윗면에 버터를 바르고 빵을 손으로 들고 있다가 가슴 높이쯤에서 떨어뜨렸을 때 빵에 가해지는 회전력이 딱 반바퀴쯤 돌 만한 수준이기 때문에 실제로 버터를 바른 면이 바닥에 닿을 확률이 더 높다. 이는 버터를 바른 양이나, 공기와의 마찰력 등은 관계없다. 로버트 매슈스는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토스트를 무려 9821번 식탁 위에서 떨어뜨려 보았다. 그 결과, 6101번이나 잼 바른 쪽이 바닥에 닿도록 떨어졌다. 즉, 잼 바른 쪽이 바닥으로 떨어질 확률이 62.1%로, 우연에 의한 확률인 50%보다 크게 나온 것이다. 게다가 저 62.1%도 사실은 식탁 위에서 들고 있던 걸 떨어뜨린 게 아니라 위로 내던지는 식으로 측정했다는 말이 있다.
이번에는 실제적인 예를 성경에서 보여 드리겠습니다.(수 7장)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군대가 하나님의 은혜로 여리고 성을 정복했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아이 성을 정복하다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간이라고 하는 한 사람이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라’고 하였는데, 아간이 물건을 보고 탐욕을 느낀 나머지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의 금덩이 하나를 자기 장막에 숨긴 것이었습니다.
그 물건들이 사람의 눈에 보기에는 단순하게 전쟁에서 승리의 기념으로, 전리품으로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여호와 하나님께 바쳐질 물건은 반드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아간은 이 사실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삼음으로서 그것이 화근이 되어 이스라엘이 아이 성 전투에서 패배를 하고 만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안 여호수아는 그 물건을 찾아내고, 아간과 아들들과 딸들을 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 이유는 이 문제를 정리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모든 전쟁마다 패하고 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잘못될 가능성을 완전히 무리에서 배제시킨 것입니다.
목회자든 일반 성도들이든
‘나는 지금 올바로 가고 있는가? 나는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고 있는가?’ 점검해야 합니다.
만일 올바로 가지 못하고 잘못가고 있다면 지금 이 정도에서 바로 잡아야 합니다. 잘못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정도 쯤이야 괜찮겠거니 하고 그냥 지나쳐 버리면 머피의 법칙에서 말 한대로 잘못된 시작과 출발은 잘못된 결과와 열매를 가져오고야 마는 것입니다.
육신이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 건강 검진을 주기적으로 하는데,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 건강 검진을 받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신앙은 문제가 있어도 보통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일찍이 우리에게 권면하기를, “사랑하는 자여 내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일 3:2)하였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영혼이 먼저 잘 되기를 바랍니다. 영혼이 먼저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영혼이 먼저 복 받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하는 것이 가전제품이라면 영혼을 위한 바른 검진은 영원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자신의 신앙을 바르게 진단하고 검사하는 사람은 그 미래가 축복될 것으로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으로 영적상태를 검진할 것입니까?
"믿음에 있는가..자신을 시험하고" - '시험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제테'는 '되돌아보다'. '성찰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신앙인은 항상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고 점검하면서 혹시 나태하지는 않았나. 혹시 게을러지지는 않았나. 혹시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나. 혹시 교만하지는 않았나. 점검하는 사람입니다.
교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시험해 왔습니다. 그것도 외부적이고 눈에 보이는 것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바울이 목회자라고 하면서 얼굴이 저렇게도 못생겼을까? 바울이 목회자라고 하면서 저렇게 말을 못할까? 이러한 문제들로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11:20)
그런데 바울은 그런 교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시험은 다른 사람을 할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 자신들을 시험하라는 것입니다. 시험을 하되 외적인 요소에 현혹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내적인 것, 곧 내 자신의 '믿음'의 상태를 중요하게 여겨 그것을 철저히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대형교회에 담임목사님을 모시기 위하여 담임목사 청빙위원회가 조직이 되었습니다. 위원장되는 장로님이 교인들의 생각을 알아보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정말 훌륭한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 분에게는 몇 가지 흠이 있습니다.”
첫째, 그 분은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사시는 분입니다.
둘째, 그 분은 목회하다가 돈이 떨어지면 돈을 벌로 나가십니다.
셋째, 그 분은 감옥에도 몇 번 갔다 온 적이 있는 전과자입니다.
넷째, 그 분은 외모가 못생겼습니다.
다섯째, 그 분은 간질병을 갖고 있어 가끔 발작도 하십니다.
여섯째, 그분은 말이 어눌하여 설교를 잘 못하십니다.
일곱째, 그 분은 설교를 하실 때도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십니다.
여덟째, 그 분은 한 교회에 오래 계신 적이 없고 자꾸 교회를 옮겨 다니십니다.
아홉째, 그 분은 지금 현재 조그만 개척교회를 담임하고 계십니다.
열 번째, 그 분은 신학대학교도 나오지 않은 분이라 당연히 박사학위도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교인들은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질나쁘고 수준이 낮은 목사님은 우리교회에 모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때 위원장 장로님이 말했습니다. "제가 예로 든 목사님은 여러분들이 그렇게도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도 바울 목사님입니다." 그제야 교인들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도 바울이라고 할지라도 오늘날에 웬만한 교회에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으려고 청빙원서를 냈다면 그 분은 당연히 서류심사도 통과하지 못하고 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위대한 목회자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나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우리들이 장차 주님 앞에서 무엇으로 구원받은 성도로 인정받을 수 있겠습니까? ‘주여 주여’라고 많이 외친 소리입니까? 표적을 행한 일입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외모입니까? 소유입니까? 지위와 명예입니까? 교회에서 받은 직분입니까?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믿음을 보시겠다고 했지 외모를 보시겠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성경은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합 2:4)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죽은 자를 살립니다. 믿음은 병을 고칩니다. 믿음은 귀신을 좇아냅니다. 믿음으로 축복을 받습니다.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습니다. 믿음으로 영생을 얻습니다. 믿음으로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믿음을 빼버리면 그 사람은 시체나 다름이 없습니다.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고 하셨습니다. 참된 성도는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주님과 함께 할 때만 살기도 하며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잘난 맛에 살았습니다. 자기가 똑똑하고, 자기가 잘나서 모든 것이 잘 된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육체의 잘난 맛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사람은 정말 이상한 본능이 있습니다. 모든 일이 정상적이고 잘 풀려갈 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적으로는 좀 비정상적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때서야 점검하고 진단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사람은 언제나 평안해 지고 안전해지면 성장과 발전을 위해 움직이지 않고 주저 앉으려고 합니다. “내 몸이 건강한가? 약한 부분은 없는가? 이대로 좋은가?” 생각을 할 때 운동을 하고, 병원에 가서 건강진단을 하고 대처를 하게 됩니다.
어디 우리나라 사람들뿐이겠습니까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문제의식을 갖지 않고 열심히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삽니다. 그래서 자식들 공부를 위해 먹을 것 안 먹습니다. 입을 옷도 안 사 입습니다. 아끼고 절약해서 자녀들을 성장시키고 출가를 시킵니다.
그리고 이제는 좀 편하게 살게 되었다고 생각을 할 그때 갑자기 중병이 발견되어 손을 쓸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몸속에 중병이 있는데도 모르고 살다가 갑자기 봉변을 당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그러므로 평소 문제가 없을 때 진단이 필요합니다.
달리는 자동차도 1년에 한 번은 검사를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적상태를 년 초에 진단하여 바로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참으로 필요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