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셉 니세포르 니엡스 Joseph-Nicephore Niepce는 프랑스 중부 지방의 샬롱 쉬르 손의 부유한 집안에서 1765년에 태어났다. 군직과 공무원 생활을 그만 둔 후, 1801년 고향으로 되돌아온 니세포르는 두 살 위인 형, 클로드와 함께 그 당시로는 낯선 직업인 발명가의 길을 택한다.
산업사회의 도래와 함께 니엡스 형제는 발명특허가 유혹하는 벼락부자의 꿈에 그들의 삶을 내맡긴 것이었다. 성공의 가능성을 비친 그들의 발명품은 우선 1807년 특허를 따낸 내연 동력기관이었다.
불에 의해 팽창된 공기로 배에 동력을 공급하는 이 모터를 상품화시키기 위해, 형 클로드는 1816년 파리와 1817년 런던에 머무는데, 이때 두 형제는 편지를 통해 후에 사진이라 명명될 발명을 구상하게 된다.
1816년 봄, 니세포르는 오목렌즈가 달린 약 16 cm의 정방형 암상자를 통해 자기 방의 창문을 열어 젖히고 정면에 있는 가금장을 촬영한다.
형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그는 "하얀 종이 위에서 창문에서 보이는 가금장의 전모와 바깥보다는 어두운 상태로 있는 십자형 유리창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음양이 도치된 이 네거티브 이미지를 빛에 노출되어도 변하지 않게 정착시킬 수가 없었다.
이미지를 정착시키기 위해 그는 전통적인 판화 기법에 집착했다. 즉 감광성 물질에 기록된 이미지를 부식동판화 혹은 석판화 방식으로 고정시킨 후 판각으로 이미지를 강조하여 인쇄하는 방법을 고려했다. 니세포르는 내연동력기관의 연료로 쓰려했던 유태역청이라 불리우는 검은 아스팔트가 감광성이 있으며 빛을 받으면 굳어져 잘 용해되지 않음을 발견하고 이것을 광화학적 기록과 부식동판화의 재현 메커니즘에 활용한다.
빛을 많이 받은 부분은 라벤더유에 잘 용해되지 않았고, 빛에 노출되지 않은 부분은 쉽게 용해되어 일종의 음화 상을 만들었다.
이 원판을 돋음질하여 잉크를 묻혀 종이에 찍으면 양화 상이 되었다.
내연동력기관을 상업화하려는 클로드의 시도가 가망이 없게 되자, 니엡스는 사진의 발명에 박차를 가한다. 기화된 요오드를 쏘여 양화 원판을 얻은 그의 사진적 작업은 두 방향으로 나아갔다. 첫째는 기존의 판화그림들을 광화학적으로 복제하여 얻은 양화 원판을 산으로 부식시킨 다음 판화 방식으로 찍어내는 것이었다.
부연하면, 와니스를 칠해 판화그림을 반투명체로 만든 후 유태역청을 바른 금속판에 밀착시켜 햇빛을 쏘였다. 그리고 요오드 기체를 쏘여 양화로 만든 다음, 노출된 정도에 따라 금속을 공격하는 산의 부식작용을 이용, 양화원판에 요철을 주고, 판화를 찍어 복사화를 얻었다. 둘째는 렌즈가 달린 암상자를 이용하여 감광판에 현실의 이미지를 기록한 후 요오드 기체를 쏘여 눈에 보이는 현실의 양화상을 얻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조망 point de vue"이라 명명했다.
이 두 방식 모두는 암중모색 끝에 1824년 '이론의 여지없는' 성과에 이른다. 빛의 작용에 의거한 이 두가지 광화학적 복제 방법을 니세포르는 1829년 헬리오그라피(heliographie)라고 명명하는데, 이 어휘는 태양이 그린 그림 혹은 태양이 쓴 글이라는 뜻을 지닌다. 전자의 작업은 <앙부아즈의 조르쥬 추기경> (1826)을 비롯하여 또 다른 세 점이 오늘날까지 보전되어 있고, 후자의 작업, 즉 니세포르가 "조망"이라고 이름붙인 것은 <창문에서 본 조망> 외에 <준비된 식탁> (1827?)이라는 제목의 정물이 원화는 소실된 채, 「1900년 만국박람회의 사진회고전시장」(파리, 1903)의 도판으로만 전해지고 있다. 그러니까 <창문에서 본 조망>은 후에 사진이라 명명될 재현 중 가장 오래된 오리지널 사진이다. 니엡스는 이 사진을 1827년과 28년 사이 런던에 체류할 때, 영국인 학자 프란시스 바우어에게 맡겼었고, 「사진의 역사, 카메라 옵스큐라에서 근대초기까지」의 저자, 헬무트 거른샤임은 이를 1952년 재발견하여 현재는 오스틴 소재 텍사스 대학이 소장하고 있다.
이 사진을 촬영하기 위한 노출시간은 8시간 이상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 시간 동안 해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건물의 양편 모두를 비추었기 때문에 명암의 대비가 없어졌다. 따라서 오리지널은 장시간 노출로 인해 건물의 입체감이 사라졌고 표면은 번들거려 상을 제대로 보기가 힘든 상태다.
우리가 보는 사진은 코닥연구소가 콘트라스트를 강화한 복제 사진이다.
광화학적으로 현실의 상을 기록한 이 최초의 사진은 손의 개입 없이 이루어진 최초의 재현 행위라는 점에서 획기적인 사건이다.
사진의 발명과 관련하여 사진의 전신격으로 사진의 역사에서 언급하는 1786년 질-루이 크레티앙이 발명한 자동전사식 초상제작기(physionotrace)나 19세기 초엽에 윌리암 월라스톤이 고안한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는 사실 사진적 재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편리한 사실적 재현을 위한 발명품에 불과하다. 이 둘 모두는 재현하는 인간의 손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양 빛이 그리는 "조망"은 재현하는 손을 불필요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전의 여하한 재현방법과 단호한 단절을 이룩한다. 그것은 사물의 반사광이 감광판에 그린 그림이지 인간의 손이 모델을 따라 그린 그림이 아니었다.
좌측 건물을 구획하는 하얀 선이 명료하게 보여주듯이 사진적 재현은 그 시작부터 플로렌스의 필리뽀 부르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 이후 확립된 원근법을 수용했다. 다시 말해 하나의 가상의 소실점을 향해 나아가는 두 개의 좌측 횡선은 원근법을 내재화한 사진의 형태적 속성을 지시하는 지표다.
원근법은 움직이지 않는 한 시점을 중심으로 시계의 사물들을 거리와 크기의 비례에 맞추어 2차원의 평면 위에 배치하는 재현규범인 바, 사진기 구조의 근간을 이루는 카메라 옵스큐라, 즉 암상자는 원근법과 사실주의적 모사가 재현의 규범으로 굳어지자 이를 용이하게 획득하려는 화가들이 사용한 도구였다. 16세기 후반 이후에는 암상자에 렌즈가 장착되어 원근법에 의거한 보다 선예한 상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니엡스의 업적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가 발명하고 제도화한 재현형식을 광화학적으로 성취했다는 것에 한정된다.
니세포르 니엡스의 사진 이미지에 대한 관심은 오직 "암상자가 받아들인 이미지를 흑과 백에 이르는 점진적 색조로, 빛의 작용을 통해 자연스럽게 복제하는데" 있었다. 광화학적으로 현실의 이미지를 기록한다는 기술적인 문제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어떠한 미학적 의도, 개성적 표현을 고려할 수 없었다.
방에서 항상 보이는 자기 소유지의 부속건물들을 아무런 미적 감흥 없이 조야한 렌즈가 장착된 암상자로 포착하는 것 이외는 어떠한 다른 의도가 있을 수 없었다. 현실세계를 미학적으로 해석하기에는 사진적 재현의 기술적 장애가 너무나 성가시게 그를 따라다닌 것이었다.
사진을 통한 세계의 미학적 해석은 기술적 장애가 사진적 재현에 더 이상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지 않는 상황이 도래할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창문에서 본 조망>은 광화학적 기록의 중요한 원리가 발견됐음을 알리는 사진이지 미학적 의도를 허용하기에 이른 사진의 완성을 통보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니엡스는 불분명한 이미지 탓에 완벽한 성공이라는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광학에 무지했던 그는 보다 선명한 이미지를 가져다 줄 렌즈와 암상자의 개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때 파리에 사는 무대 미술가이며 실제를 보는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초대형 무대배경을 갖춘 극장, 디오라마의 지배인인 다게르가 사진의 역사에 등장한다. 다게르는 니엡스에게 렌즈를 공급하는 광학상 슈발리에를 통해 니엡스의 발명을 알게 된다. 그는 1826년 초 니엡스와 접촉을 시도하지만 니엡스는 그를 경계한다. 그러나 다게르의 되풀이된 시도에 호감을 갖게된 니엡스는 1829년 12월 14일 사진의 완성을 위한 협약서에 서명을 한다. 니엡스의 발명을 완성하는데 목적이 있는 협약서는 각자의 의무사항을 명기했다. 니엡스는 그가 발견한 내용의 전부를 다게르에게 공개하여야 했고, 다게르는 "암상자의 새로운 결합"을 통해 그 발명의 완성에 기여해야 했다.
300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두고 니엡스와 다게르는 발명의 완성과 사용을 위해 개별적으로 연구를 진행했고, 종종 다게르는 니엡스가 있는 셍-루-드-바렌느 마을을 찾았다. 그들의 주된 관심은 무엇보다도 노출시간을 단축하면서 흑백의 선명도를 향상시키고 은판에 감광유제를 도포하는 기술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1831년 다게르는 요오드 은을 감광제로 사용하여 3분의 노출로 다양한 계조도의 음화를 얻는데 성공하지만 정착에 실패한다. 1833년 니엡스는 음화-양화 방식을 실험하기 위해 감광 은판 위에 유리를 지지체로 사용한 네거티브를 밀착인화하지만 백색의 강도가 너무나 약화되어 포기한다.
이에 다게르는 선명한 양화상의 획득을 목표로 삼는다.
1833년 7월 5일 니엡스는 현존하는 최초의 사진을 찍은 셍-루-드-바렌느의 르 그라 자택에서 예순 여덟의 나이로 갑자기 죽는다. 1837년, 자신의 연구목표에 도달한 다게르는 니세포르의 상속자인 아들, 이지도르 니엡스에게 1829년 체결한 '니엡스의 발명'의 개선과 사용에 관한 계약서의 변경을 요구하여 향후 공표될 발명에 자신의 이름을 독점적으로 부과한다. 즉 1839년 8월에 프랑스 하원의원이며 과학원 회원인 프랑수아 아라고가 공표하는 니엡스가 발명한 헬리오그라피의 개선되고 완성된 형태에 다게레오타입이라는 이름을 부여해 긴 세월 동안 사진을 최초로 발명한 사람으로 그릇되게 인정받는다.
1829년 서명한 협약서에 따라 니엡스는 다게르에게 헬리오그라피의 발명의 전모를 헬리오그라피 약술이란 제목의 글을 통해 알려주는데, 이에 의거하여 1839년 다게레오타입의 발명과 관련된 니엡스의 공헌과 다게르의 기여를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니엡스는 다게레오타입의 근간을 이루는 은판을 여러 해 동안 사용했다.
둘째 그는 비감광 유태역청을 용해시키기 전에 은판을 흑화시키기 위해 요오드를 사용하는데, 요오드 결정이 승화하면서 은판을 흑화시키는 정도를 살피는 유리창을 장치했다. 셋째로 니엡스는 잠상을 현상한다는 개념을 인지하고 있었다. 반면 요오드은이 감광성을 띠며 수은증기는 감광된 부분에만 선택적으로 달라붙는다는 사실은 다게르의 발견이다.
사진의 발명이 공표되기 6년 전 사망한 니세포르 니엡스는 최초의 사진으로 공표된 다게레오타입의 위세가 드세면 드셀수록 더욱더 망각의 그늘 속에 가리워 졌다.
니세포르의 아들, 이지도르는 1841년, 소책자 '다게레오타입으로 잘 못 불리는 발견의 역사'를 통해 이러한 역사의 오류에 항의하지만 반향 없이 끝난다. 1867년 니세포르의 동향인인 자료수집가 빅토르 푸크는 철저한 고증과 자료수집을 통해 '사진 발명에 관한 진실'을 출판하지만 최초의 사진은 다게레오타입, 사진의 발명자는 다게르라는 만인의 의식 속에 인각된 연상작용을 지울 수는 없었다.
산업사회의 도래와 함께 니엡스 형제는 발명특허가 유혹하는 벼락부자의 꿈에 그들의 삶을 내맡긴 것이었다. 성공의 가능성을 비친 그들의 발명품은 우선 1807년 특허를 따낸 내연 동력기관이었다.
불에 의해 팽창된 공기로 배에 동력을 공급하는 이 모터를 상품화시키기 위해, 형 클로드는 1816년 파리와 1817년 런던에 머무는데, 이때 두 형제는 편지를 통해 후에 사진이라 명명될 발명을 구상하게 된다.
1816년 봄, 니세포르는 오목렌즈가 달린 약 16 cm의 정방형 암상자를 통해 자기 방의 창문을 열어 젖히고 정면에 있는 가금장을 촬영한다.
형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그는 "하얀 종이 위에서 창문에서 보이는 가금장의 전모와 바깥보다는 어두운 상태로 있는 십자형 유리창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음양이 도치된 이 네거티브 이미지를 빛에 노출되어도 변하지 않게 정착시킬 수가 없었다.
이미지를 정착시키기 위해 그는 전통적인 판화 기법에 집착했다. 즉 감광성 물질에 기록된 이미지를 부식동판화 혹은 석판화 방식으로 고정시킨 후 판각으로 이미지를 강조하여 인쇄하는 방법을 고려했다. 니세포르는 내연동력기관의 연료로 쓰려했던 유태역청이라 불리우는 검은 아스팔트가 감광성이 있으며 빛을 받으면 굳어져 잘 용해되지 않음을 발견하고 이것을 광화학적 기록과 부식동판화의 재현 메커니즘에 활용한다.
빛을 많이 받은 부분은 라벤더유에 잘 용해되지 않았고, 빛에 노출되지 않은 부분은 쉽게 용해되어 일종의 음화 상을 만들었다.
이 원판을 돋음질하여 잉크를 묻혀 종이에 찍으면 양화 상이 되었다.
내연동력기관을 상업화하려는 클로드의 시도가 가망이 없게 되자, 니엡스는 사진의 발명에 박차를 가한다. 기화된 요오드를 쏘여 양화 원판을 얻은 그의 사진적 작업은 두 방향으로 나아갔다. 첫째는 기존의 판화그림들을 광화학적으로 복제하여 얻은 양화 원판을 산으로 부식시킨 다음 판화 방식으로 찍어내는 것이었다.
부연하면, 와니스를 칠해 판화그림을 반투명체로 만든 후 유태역청을 바른 금속판에 밀착시켜 햇빛을 쏘였다. 그리고 요오드 기체를 쏘여 양화로 만든 다음, 노출된 정도에 따라 금속을 공격하는 산의 부식작용을 이용, 양화원판에 요철을 주고, 판화를 찍어 복사화를 얻었다. 둘째는 렌즈가 달린 암상자를 이용하여 감광판에 현실의 이미지를 기록한 후 요오드 기체를 쏘여 눈에 보이는 현실의 양화상을 얻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조망 point de vue"이라 명명했다.
이 두 방식 모두는 암중모색 끝에 1824년 '이론의 여지없는' 성과에 이른다. 빛의 작용에 의거한 이 두가지 광화학적 복제 방법을 니세포르는 1829년 헬리오그라피(heliographie)라고 명명하는데, 이 어휘는 태양이 그린 그림 혹은 태양이 쓴 글이라는 뜻을 지닌다. 전자의 작업은 <앙부아즈의 조르쥬 추기경> (1826)을 비롯하여 또 다른 세 점이 오늘날까지 보전되어 있고, 후자의 작업, 즉 니세포르가 "조망"이라고 이름붙인 것은 <창문에서 본 조망> 외에 <준비된 식탁> (1827?)이라는 제목의 정물이 원화는 소실된 채, 「1900년 만국박람회의 사진회고전시장」(파리, 1903)의 도판으로만 전해지고 있다. 그러니까 <창문에서 본 조망>은 후에 사진이라 명명될 재현 중 가장 오래된 오리지널 사진이다. 니엡스는 이 사진을 1827년과 28년 사이 런던에 체류할 때, 영국인 학자 프란시스 바우어에게 맡겼었고, 「사진의 역사, 카메라 옵스큐라에서 근대초기까지」의 저자, 헬무트 거른샤임은 이를 1952년 재발견하여 현재는 오스틴 소재 텍사스 대학이 소장하고 있다.
이 사진을 촬영하기 위한 노출시간은 8시간 이상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 시간 동안 해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건물의 양편 모두를 비추었기 때문에 명암의 대비가 없어졌다. 따라서 오리지널은 장시간 노출로 인해 건물의 입체감이 사라졌고 표면은 번들거려 상을 제대로 보기가 힘든 상태다.
우리가 보는 사진은 코닥연구소가 콘트라스트를 강화한 복제 사진이다.
광화학적으로 현실의 상을 기록한 이 최초의 사진은 손의 개입 없이 이루어진 최초의 재현 행위라는 점에서 획기적인 사건이다.
사진의 발명과 관련하여 사진의 전신격으로 사진의 역사에서 언급하는 1786년 질-루이 크레티앙이 발명한 자동전사식 초상제작기(physionotrace)나 19세기 초엽에 윌리암 월라스톤이 고안한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는 사실 사진적 재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편리한 사실적 재현을 위한 발명품에 불과하다. 이 둘 모두는 재현하는 인간의 손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양 빛이 그리는 "조망"은 재현하는 손을 불필요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전의 여하한 재현방법과 단호한 단절을 이룩한다. 그것은 사물의 반사광이 감광판에 그린 그림이지 인간의 손이 모델을 따라 그린 그림이 아니었다.
좌측 건물을 구획하는 하얀 선이 명료하게 보여주듯이 사진적 재현은 그 시작부터 플로렌스의 필리뽀 부르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 이후 확립된 원근법을 수용했다. 다시 말해 하나의 가상의 소실점을 향해 나아가는 두 개의 좌측 횡선은 원근법을 내재화한 사진의 형태적 속성을 지시하는 지표다.
원근법은 움직이지 않는 한 시점을 중심으로 시계의 사물들을 거리와 크기의 비례에 맞추어 2차원의 평면 위에 배치하는 재현규범인 바, 사진기 구조의 근간을 이루는 카메라 옵스큐라, 즉 암상자는 원근법과 사실주의적 모사가 재현의 규범으로 굳어지자 이를 용이하게 획득하려는 화가들이 사용한 도구였다. 16세기 후반 이후에는 암상자에 렌즈가 장착되어 원근법에 의거한 보다 선예한 상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니엡스의 업적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가 발명하고 제도화한 재현형식을 광화학적으로 성취했다는 것에 한정된다.
니세포르 니엡스의 사진 이미지에 대한 관심은 오직 "암상자가 받아들인 이미지를 흑과 백에 이르는 점진적 색조로, 빛의 작용을 통해 자연스럽게 복제하는데" 있었다. 광화학적으로 현실의 이미지를 기록한다는 기술적인 문제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어떠한 미학적 의도, 개성적 표현을 고려할 수 없었다.
방에서 항상 보이는 자기 소유지의 부속건물들을 아무런 미적 감흥 없이 조야한 렌즈가 장착된 암상자로 포착하는 것 이외는 어떠한 다른 의도가 있을 수 없었다. 현실세계를 미학적으로 해석하기에는 사진적 재현의 기술적 장애가 너무나 성가시게 그를 따라다닌 것이었다.
사진을 통한 세계의 미학적 해석은 기술적 장애가 사진적 재현에 더 이상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지 않는 상황이 도래할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창문에서 본 조망>은 광화학적 기록의 중요한 원리가 발견됐음을 알리는 사진이지 미학적 의도를 허용하기에 이른 사진의 완성을 통보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니엡스는 불분명한 이미지 탓에 완벽한 성공이라는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광학에 무지했던 그는 보다 선명한 이미지를 가져다 줄 렌즈와 암상자의 개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때 파리에 사는 무대 미술가이며 실제를 보는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초대형 무대배경을 갖춘 극장, 디오라마의 지배인인 다게르가 사진의 역사에 등장한다. 다게르는 니엡스에게 렌즈를 공급하는 광학상 슈발리에를 통해 니엡스의 발명을 알게 된다. 그는 1826년 초 니엡스와 접촉을 시도하지만 니엡스는 그를 경계한다. 그러나 다게르의 되풀이된 시도에 호감을 갖게된 니엡스는 1829년 12월 14일 사진의 완성을 위한 협약서에 서명을 한다. 니엡스의 발명을 완성하는데 목적이 있는 협약서는 각자의 의무사항을 명기했다. 니엡스는 그가 발견한 내용의 전부를 다게르에게 공개하여야 했고, 다게르는 "암상자의 새로운 결합"을 통해 그 발명의 완성에 기여해야 했다.
300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두고 니엡스와 다게르는 발명의 완성과 사용을 위해 개별적으로 연구를 진행했고, 종종 다게르는 니엡스가 있는 셍-루-드-바렌느 마을을 찾았다. 그들의 주된 관심은 무엇보다도 노출시간을 단축하면서 흑백의 선명도를 향상시키고 은판에 감광유제를 도포하는 기술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1831년 다게르는 요오드 은을 감광제로 사용하여 3분의 노출로 다양한 계조도의 음화를 얻는데 성공하지만 정착에 실패한다. 1833년 니엡스는 음화-양화 방식을 실험하기 위해 감광 은판 위에 유리를 지지체로 사용한 네거티브를 밀착인화하지만 백색의 강도가 너무나 약화되어 포기한다.
이에 다게르는 선명한 양화상의 획득을 목표로 삼는다.
1833년 7월 5일 니엡스는 현존하는 최초의 사진을 찍은 셍-루-드-바렌느의 르 그라 자택에서 예순 여덟의 나이로 갑자기 죽는다. 1837년, 자신의 연구목표에 도달한 다게르는 니세포르의 상속자인 아들, 이지도르 니엡스에게 1829년 체결한 '니엡스의 발명'의 개선과 사용에 관한 계약서의 변경을 요구하여 향후 공표될 발명에 자신의 이름을 독점적으로 부과한다. 즉 1839년 8월에 프랑스 하원의원이며 과학원 회원인 프랑수아 아라고가 공표하는 니엡스가 발명한 헬리오그라피의 개선되고 완성된 형태에 다게레오타입이라는 이름을 부여해 긴 세월 동안 사진을 최초로 발명한 사람으로 그릇되게 인정받는다.
1829년 서명한 협약서에 따라 니엡스는 다게르에게 헬리오그라피의 발명의 전모를 헬리오그라피 약술이란 제목의 글을 통해 알려주는데, 이에 의거하여 1839년 다게레오타입의 발명과 관련된 니엡스의 공헌과 다게르의 기여를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니엡스는 다게레오타입의 근간을 이루는 은판을 여러 해 동안 사용했다.
둘째 그는 비감광 유태역청을 용해시키기 전에 은판을 흑화시키기 위해 요오드를 사용하는데, 요오드 결정이 승화하면서 은판을 흑화시키는 정도를 살피는 유리창을 장치했다. 셋째로 니엡스는 잠상을 현상한다는 개념을 인지하고 있었다. 반면 요오드은이 감광성을 띠며 수은증기는 감광된 부분에만 선택적으로 달라붙는다는 사실은 다게르의 발견이다.
사진의 발명이 공표되기 6년 전 사망한 니세포르 니엡스는 최초의 사진으로 공표된 다게레오타입의 위세가 드세면 드셀수록 더욱더 망각의 그늘 속에 가리워 졌다.
니세포르의 아들, 이지도르는 1841년, 소책자 '다게레오타입으로 잘 못 불리는 발견의 역사'를 통해 이러한 역사의 오류에 항의하지만 반향 없이 끝난다. 1867년 니세포르의 동향인인 자료수집가 빅토르 푸크는 철저한 고증과 자료수집을 통해 '사진 발명에 관한 진실'을 출판하지만 최초의 사진은 다게레오타입, 사진의 발명자는 다게르라는 만인의 의식 속에 인각된 연상작용을 지울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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