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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창작강의

[스크랩] 시 창작의 과정

작성자오쟁이|작성시간21.01.07|조회수2,450 목록 댓글 0
시 창작의 과정

1. 시를 쓰는 과정 3단계

(1) 1단계 - 시의 종자 얻기

영국의 시인이자 시론가(時論家) 인 루이스는 {젊은이를 위한 시(Poetry for you)}라는 책에서 시를 쓰는 과정을 3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첫 번째 는 [시의 종자]를 얻는 단계이다.
그것은 어떤 감정, 어떤 체험, 어떤 관념, 때로는 하나의 이미지이거나 한 줄의 시구일 수도 있다고 루이스가 말하는 그 종자는 앞에서 설명한 시를 쓰는 계기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그 당자가 결코 가볍게 흘려 버릴 수 없는 심리적 충 격, 달리 말하면 아, 이거 시(詩)가 되겠다 싶은 인상적인 느낌인 것이다. 일종의 영감이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루이스는 이 종자(種子)를 반드시 노트해 두라고 권고하고, 그러나 노트한 그 뒤에는 대부분의 시인들이 그 사실을 잊어버리게 된다고 덧붙이고 있다.
잊어버리게된다 말은 누구나 꼭 그렇게 잊어야만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종자를 당장 한편의 시로 만들려고 서두를 것은 없다는 정도의 뜻이라고 새겨 두는 게 좋다. 아닌게 아니라 종자 하나를 붙들었다 해서 그것을 바탕으로 당장 한편의 시를 쓰려고 서두르면 상상력이 종자 자체에만 얽매어 표현이 단조롭고 내용이 빈약한 시가 되기 십상인 것이다.
그런 사 태를 막기 위해서는 조급증을 부리지 말고 지긋하게 기다릴 줄 아는 힘 을 기를 필요가 있다.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시의 종자를 붙든 순간 에 펜을 들어 단숨에 한편의 시를 써낼 수도 있는 것이다. 즉흥시 는 그런 예의 하나가 된다. 그리고 그런 즉흥시 중에서도 훌륭한 작품 을 찾자면 적잖이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율이 높고 성실성도 문제되는 방법이기 때문에 대가나 중진이라고 불리는 시인들도 부득이한 경우가 아닌 한 그렇게는 시를 쓰지 않는다. 이제부터 시를 쓰려는 사람들은 더욱 삼가야 할 방법이다.
시의 종자를 노트해 두고 다음에는 그것을 잊어버린다는 루이스의 말속에는 이러한 즉흥시적 방법에 대한 경계도 아울러 함축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렇게 잊어버릴 바에야 노트는 또 무슨 소용이냐 할는지 모르지만 참으로 중요한 것이 바로 그 노트이다. 시의 종자를 만일 노트해 두지 않으면 아무리 기억력이 좋은 사람도 생활의 이런저런 잡사를 겪는 사이에 조만간 그것을 그야말로 완전히 까먹게 되고 만다.
완전히 까먹는다는 이 말은 그 종자가 도저히 싹터서 자랄 수 없는 멸실(滅失) 상태가 됨을 이르는 것이다.
루이스가 말하는 잊어버림은 그러한 멸실 상태가 아니라 시인의 무자각적 의식 속에 그 종자가 간직됨을 뜻한다. 그리하여 거기서 그 종자는 조금씩 부풀어 언젠가는 싹을 틔우게 되는 것이다.
노트는 이러한 시의 종자의 생명력을 보증하는 비망록이라 할 수 있다
(2) 2단계 - 종자의 성장과 시적 사고

이러한 종자 얻기의 과정을 거치면 다음에는 그 종자가 시인의 정신 내부에서 성장하는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고 루이스는 말한다. 두 번 째 단계이다.
물론 눈에 안 보이게 내면적으로 진행되는 그 성장은 이제 막 한편의 시가 태어나기 직전의 순간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의 탄생 은 그 종자의 충분한 성장이 가져오는 필연적 결과라 할 수 있다.
종자 의 성장기간은 일률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며칠 동안에 속성으로 자랄 수도 있지만 아주 느림보로 진행되어 몇 년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성장의 속도가 느릴 땐 시인의 정신 내부에서 자라는 시의 종자가 하나 뿐이라 할 수도 없다. 내용을 달리하는 여러 개의 종자가 동시에 자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루이스는 시를 쓰는 과정의 이 단 계에 대한 설명을 더 이상 부연하지 않고 이 정도로 마무리짓고 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시의 종자의 내적 성장과정이 루이스가 말하는 시작(詩作)의 두 번 째 단계인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 간략한 설명은 자칫하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를 안고 있다. 우려되는 오해는 루이스의 그 말이 시의 종자의 성장을 자 연적인 현상으로 생각케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시의 종자를 얻은 다 음에는 일단 그것을 잊어버리게 된다는 첫번째 단계의 설명을 상기할 때 그러한 우려는 더욱 커진다. 시의 종자를 얻고 그리하여 그것을 노트해 두었다고 해서 그 종자가 혼자의 힘으로 소망스럽게 쑥쑥 자란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식물의 종자가 그러하듯 시의 종자도 그것이 제대로 싹트고 자라자면 사람(시인)의 정성어린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한 노력의 바탕이 되는 것은 평소에 시적 사고를 지속적으로 거듭하는 일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틈나는 대로 시를 생각하는 그 일이 바로 그러한 노력의 바탕을 이룬다. 그리고 그러한 바탕 위에서 때때로 전날의 노트를 펼쳐 거기 적힌 그 시의 종자를 자신의 상상력의 거울에 비추어보면 상상력이 만들어낸 새로운 그 무엇이 그 종자에 추가되게 된다. 이것이 곧 시의 종자의 성장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평소에는 시를 생각해 본 일이 한번도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천하의 걸작이 튀어나왔다는 식의 황당무계한 기대를 가져서는 안 된다.
이 강좌 의 첫 시간에 이미 밝힌 일이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것이다.
시의 종자의 성장 발전에 필요한 노력의 바탕이 되는 것이 평소의 시 적 사고라고 했지만 실상 이것은 시의 종자를 얻는 데 있어서도 그 효과가 대단히 큰 선행조건이 된다. 바꾸어 말하면 평소 시를 자주 생각하는 사람은 시의 종자도 그만큼 알찬 것을 많이 얻게 되는 것이다.
널 리 애송되고 있는 시 <국화 옆에서>에 대한 작가 서정주의 자작시 해설 은 그 좋은 예증을 보여준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서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위의 인용문은 <국화 옆에서>의 우리가 잘 아는 제3연인데, 서정주는 이 시를 쓸 때 이 대목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거울 앞에 선 누님 같은 여자]의 이미지는 이 시의 종자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서정주는 이 종자를 루이스의 말처럼 일단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붙드는 그때부터 곧바로 작품화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서정주는 이 종자가 우발적으로 떠 오른 것이 아니고 상당 기간 지속된 시적 사고의 결과라는 사실을 밝히 고 있다. 그의 말을 직접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 모든 젊은 시절의 흥분과 모든 감정소비를 겪고 있는 인제는 한 개의 잔잔한 우물이나 호수와 같이 형(型)이 잡혀서 거울 앞에 앉아있는 한 여 인의 미의 영상이 내게 마련되기까지에는 이와 유사한 많은 격렬하고 잔잔한 여인의 영상들이 내게 미리부터 있었을 것임은 물론입니다.
…인제 이 <국화 옆에서>를 쓸 무렵에는 어느 새인지 거기에서도 찬 서릿발 속에 국화꽃에 견줄만한 여인의 미를 새로 이해하게 된 것도 위에서 진술한 바와 같은 것들의 많은 되풀이 되풀이의 결과임은 물론입니다. 그래서 내가 어느 해 새로 이해한 이 정밀한 40대 여인의 미의 영상은 꽤 오랫동안-아마 2~3 년 동안 그 표현의 그릇을 찾지 못한 채 내 속에 잠재해 있었다가 1947년 가을 어느 해 어스름 때 문득 내 눈이 내 정원의 한 그루의 국화꽃에 머물 게 되자 그 형상화 공작이 내 속에서 비로소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서정주, <시작과정(詩作過程)>에서

위의 글에서는 [정밀한 40대 여인의 미의 영상이 2~3년 동안 내 속 에 잠재해 있었다]는 대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그 영상은 <국화 옆에서>라는 시의 종자인 [겨울 앞에 선 누님 같은 여자]의 이미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종자의 획득은 2~3년 동안 지속적으로 그런 이 미지를 떠올릴 수 있게끔 시적 사고를 거듭하면서 준비를 해온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평소의 준비, 즉 그 노력은 의미 있는 시의 종자를 얻는 일에만 국한되지 않고 그 종자를 성장 발전시키는 데 있어 서도 매우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종자 획득을 준비하는 노력과 그 종자를 키우는 노력은 궁극적으로 한편의 시를 만들 어 내기 위해 서로 유기적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전 단계의 작업이기 때문이다.

(3) 3단계 - 구체적인 언어표현 찾기

정신의 내부에서 시의 종자가 제대로 성장 발전하게 되면 이번에는 하나하나 언어를 골라 거기에 구체적 표현을 부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루이스의 구분 중 세 번 째 단계인 것이다.
이 단계에 이르면 시를 쓰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끼게 된다고 루이스는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의 경우는 그 욕구가 배가 고플 때의 시장기와 어떤 일이 닥치려고 할 때의 흥분 내지 두려움이 뒤섞인 느낌을 실제로 경험하게 된다고 그는 덧붙인다. 이것은 물론 일반화될 수 없는 루이스의 개인적 느낌이다.
그리고 시를 쓰고 싶다는 욕구라도 사람에 따라 그 강도가 다를 수 밖 에 없다.
뭐 특별히 강렬하다 할 정도의 욕구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히려 냉정하게 깨어있는 정신상태 에서도 이 세 번 째 단계의 작업은 진행될 수 있는 것이다.
시를 쓰는데 있어서는 영감보다도 지적인 제작의식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이른바 고전주의적 작시법은 그렇게 깨어있는 작업태도를 지향한다. 이와는 달리 영감으로 통하는 혹종의 흥분상태를 존중하는 태도는 낭만주의적 작시법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방법의 어느 쪽을 취해도 막상 시를 쓰려고 할 때는 가장 적합한 표현의 언어를 찾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정신을 집중한다 해서 필요한 언어가 척척 발견되고 그리하여 시가 술술 씌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시인들은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기벽을 부리기도 한다.
이를테면 뜰을 거닐거나 목욕을 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사과냄새를 맡거나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래도 일이 잘 안 되면 별 수 없이 작업을 중단하게 되지만 그것 은 포기를 뜻하지 않는다. 이튿날 또는 며칠 뒤에는 작업이 다시 재개되는 것이다.
나의 경우는 이 과정에서 두 가지 방법으로 도움을 얻는 다.
하나는 지난날에 적어둔, 지금의 이 시와는 관계가 없는 다른 시의 종자의 노트를 펼쳐 보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작업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을 때 술을 마시는 일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지는 않지만 막혔던 생각의 벽에 구멍이 뚫리는 수가 있다.
종자를 붙들자마자 곧바로 펜을 든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도 결코 쉽게 씌어진 작품은 아니다. 당사자(當事者)의 말을 빌면 앞에서 밝힌 대로 제3연을 먼저 써놓고 몇시간을 누웠다 앉았다 하는 동안 제1연과 제2연의 이미지가 저절로 모여들었다 것이다. 저절로 모여든 것이니까 여기까지는 비교적 쉽게 씌어진 편이라 하겠다.
그러나 시를 마무리짓는 마지막 연은 달랐다. [마지막 연만은 좀처럼 표현 이 되지 않아 새벽까지 누웠다가 앉았다 하다가 그만 자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이것은 며칠 동안을 그대로 있다가 어느 날 새벽 눈이 뜨여서 처음으로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결련(結聯)만은 그 뒤에도 많은 문구상의 수정을 오랫동안 계속했던 것을 말해 둔다라고 서정 주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대가 서정주가 비교적 수월하게 썼다고 볼 수 있는 <국화 옆에서>도 실은 상당한 산고(産苦) 끝에 완성된 작품이란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시의 초심자들의 경우는 그러한 산고, 그러한 고통이 더욱 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고통이 아무리 크다해도 작업의 결과 가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되면 그로써 고통은 절로 보상된다. 문제는 그런 결과를 낳도록 함에 있어 도움이 되는 길이 무엇인가를 찾아보는 일인데, 그 점에 대해서도 <국화 옆에서>에 대한 서정주의 자작시 해설은 많은 시사를 주고 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이것은 다 아는 <국화 옆에서>의 1연과 2연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두 연의 형성에 대해 이미지가 저절로 모여 들 었다고 한 서정주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음의 인용문은 우리에게 알려 준다.
한 송이의 국화를 중심으로 하는 이미지가 고정되기까지에는 그 전에 이 와 비슷한 많은 상념이 내 속에 이루어지고 인멸하고 다시 이루어지면서 은연중에 지속되어 왔던 것을 나는 기억합니다.
그 중에 몇 가지를 예로 들면 ‘저 우리 이전의 무수한 인체(人體)가 사거(死去)하여 부식해서 흙 속에 동화된 그 골육은 거름이 되어 온갖 꽃들을 기르고, 그 액체는 수증기로 승화하여 구름이 되었다가 다시 비가 되어 우리 위에 퍼부었다가 다시 승화하였다가 한다는 상념이라든지……저 많은 길거리의 젊은 소녀들은 사거한 우리 애인의 분화된 갱생(更生)이라는 환상이 라든지-
이런 것들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상념들은 언뜻 보기엔 <국화 옆에 서> 첫 연의 시상(詩想)과 아무 관계도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념과 환각의 거듭 중복된 습성은 한 송이의 국화꽃을 앞 에 대할 때 이것은 저 많은 소쩍새들이 봄부터 가을까지 계속해 운 결과려니 하는 동질의 시상을 능히 불러일으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위의 인용문을 통해 우리가 쉽게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저절로 이미지가 모여들었다는 <국화 옆에서>의 1연과 2연이 실은 평소에 쌓은 시적 사고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평소의 시적 사고는, 정신의 내부에 서 성장 발전한 시의 종자가 구체적 표현의 언어를 찾는 단계에 있어서 도 결정적 작용을 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상이 루이스가 말한 시를 쓰는 과정의 세 가지 단계이다.
그러나 이것은 구분을 해본다면 그렇게 구분이 된다는 뜻일 뿐, 모든 시가 반드시 그런 단계를 차례대로 밟아서 씌어진다는, 수학에 있어서 의 공식 같은 틀은 아니다.
실제로는 시의 종자를 붙들자마자 곧 언어 표현작업에 착수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그 종자가 제대로 성장하지 않고 소멸해 버리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위와 같은 단계를 거쳐 한편의 시를 썼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대로 완성품이 되는 일은 드물다.
더러는 예외가 없지도 않지만 대체로 그것은 퇴고의 단계가 다시 추가되지 않을 수 없다.
퇴고는 초고를 1 주일쯤 서랍 속에 넣어 두었다가 꺼내서 시작하는 게 좋다.
초고가 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퇴고를 서둘면 생각이 아직 그 초고에만 쏠려 있어 결점이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이다.
1주일 정도 여유를 두었다가 초고를 다시 검토해 보면 그때는 그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이 생 겨 퇴고가 제대로 될 수 있는 것이다.


2. 시 창작의 제1단계 과정들

(1) 시창작 출발에서 완료까지의 과정

'산고(産苦)의 밀실(密室)'이라는 용어가 있다. 창작의 과정이 이루어지는 비밀스런 집필(執筆)실을 그렇게 부른다. '산고의 밀실'이라는 용어가 신비화되고 있는 한 창작에 대한 신비화는 결코 벗겨지지 않으며 그와 함께 창작의 원천이 '영감(靈感)'이라는 관념론적 문학예술관은 타파되지 않는다. 여기에 좋은 사례가 있다.
우리나라에 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천재시인이 있다.
행여 그 시인이 주는 신비의 감동이 깨질까봐 되도록 이름마저도 부르기를 삼가해 왔던 우리 민족의 시인의 대명사, 호는 김립이요 이름은 김병연이며 그는 죽장에 삿갓 쓰고 이 나라의 산천을 정처 없이 떠돌며 살았다해서 김삿갓이라 불리웠다.
그는 방방곡곡 발길 닿는 곳마다에서 시를 짓고 만인의 가슴을 격동치게 했지만 한 편의 시를 짓기 위하여 붓이나 종이 따위는 필요로 하지 않았다.
김삿갓에 대한 추억은 문학예술의 원천이 영감인 것처럼 여기게 하는 데 크게 일조를 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 급변하는 변혁의 시기에 김삿갓처럼 노래할 수 있다면 변혁운동에 복무하는 창작자로서 그보다 더 한 행복은 없을 곳이다.
그래서 그런 노력을 해보던 사람들은 가끔 이런 말을 한다. 김삿갓처럼 시를 한갓 여흥을 돋구는 취미생활로 활용하는 예가 아니라면 이것은 불가능하다고.
정말 그럴까? 이런 의문을 갖는 이들에게 제시해 주고픈 장면이 하나 있다.
1989년 2월 어느날, 서부경찰서 면회실에서 있었던 일이다.
변혁운동에 복무하는 문인 한 사람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수사를 받고 있을 때 민족문학작가회의 청년위원회 회원들이 동료시인에게 면회를 갔었다.
설흔 살의 나이에 벌써 두 번 째 국가보안사범이 된 그 시인은 전날 면회 다녀간 어머님의 회갑을 앞두고 몹시 착잡해져 있었다.
그 시인은 면회 온 동료문인들을 보자 기록해 주길 부탁하면서 즉흥적으로 시 한 편을 낭송해 갔다. 다음의 시가 글자 한 자도 안 틀린 그 날 읊었던 시의 전문이다.

2년 전에 아무 것도 모른 채 산을 올랐고
2년 후 이제 어머니
당신의 품 속 뜨거운 숨결 느끼며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2년 전 어머니의 산이 어쩌면 평지와 같았다면
오늘 오르고 있는 이 산은 더욱 험악할 것입니다.
어머니 산 그 뜨거운 숨결로
내가 저 막막한 봉우리를 치어다 보고
먼저 골짜기에 묻힌 수많은 어머니의 아들과 또는
그 벗들과 함께 산을 오르는 오늘
어머니여 노여움을 거두소서
어머니여 서러움 한 자락도 남기지 마옵소서
저기 아침 햇살의 그 날
저기 눈부셔 차마 치어다 볼 수 없는 태양
그곳으로 가는 길 산길
어머니 품속으로 가는 길 ----[서시 산어머니 ]전문

이 시인은 이런 방식으로「반미의 깃발」등 다수의 작품을 창작해 냈다.
실제 음풍농월(吟風弄月)이 아니더라도 이런 속도 높은 창작은 분명 있다.
이런 실제 상황들이 우리 현실 속에 담겨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몇 행 한되는 시 한 편을 쓰기 위해 두 달, 세 달 낑낑대던 끝에 마침내 나는 능력이 없어서 시를 못 쓰겠다, 혹은 쓸 것은 많은데 표현력이 모자라 못 쓰겠다, 아니면 역시 시는 천부적인 재능이 판가름해 주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창작의 열정을 포기해 버린다.
여기에 반해 우리가 알고 있는 다수의 창작자들은 시 한 편을 쓰면서 그에 관련된 사식의 편린들을 주워 모으고 집을 짓듯이 그 것들을 토대공사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짜 맞추고 마침내 정련 단계를 거쳐 힘들게 한 편의 시를 완성해 낸다.
방금 이야기한 두 가지의 경우 중 어느 것이 진실인가?
어느 방법이 보다 세상을 밝게 하는 시들을 쏟아내게 할 수 있는 방법인가?
이 문제를 밝히기 위해 우리는 전자의 경우에 해당하는 소수의 시인들에게 창작의 비밀을 물어 볼 필요가 있다.
처음부터 그랬는가? 라고, 아니면 지금도 당신은 모든 창작을 해 나감에 있어 다 그렇게 기동성 있는 형평이 유지되느냐고. 거기에 대해 백이면 백, 천이면 천이 모두 이구동성으로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고.
사실 이렇게 선 자리에서 시를 지어내는 즉흥적인 경우거나 몇 개월을 낑낑대어 완성하는 경우거나 똑같이 관철되는 한 가지 기정사실이 있다.
그것은 한 편의 시를 생산하는 과정에 소요되는 노력은 똑같다는 점이다.
즉흥시이거나 힘들여 쓴 시이거나 이는 모두 창작출발에서 완료까지 과정을'똑같이 경험하고 똑같이 치루어 낸다. 다만 그 과정이 매우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느냐 많은 시간들을 소요시키며 이루어지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과정을 효율적으로 잘 치뤄내면, 그리고 그렇게 잘 치뤄 낼 역량이 갖춰져 있으면 시 쓰는 시간은 한결 단축되고 양-질의 수준도 높아질 것이다. 이제 이 과정에 대해 하나하나 밝혀보기로 하자.
여기서는 그것을 보다 세분하여 창작출발에서 완료까지의 과정을 크게 가닥을 추려 두 개의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제1의 단계는 형상화의 대상을 찾아 창작노동이라고 하는 인간의 실천이 퍼부어져야 할 현실을 확고히 세우는 과정이요, 제2의 단계는 그것을 언어로 베껴내는 과정이다.

(2)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좋은 글이란 한 마디로 말해서 정확한 문장으로 쓴 글이다.
정확한 문장이라야 전달(傳達)이 순조롭고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전달을 염두에 두지 않은 표현은 없다. 정확한 문장은 수식이 현란하고 아름답기 이전에 우선 문법에 맞아야 한다. 최근 특히 라디오 방송을 듣고 있노라면 방송에 초청 받은 출연자는 말할 것도 없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사람 역시 문법이나 어법에 어긋나는 말을 자주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예는 다양하며 요인 또한 각색이지만 다음 몇 가지 원리만 선별하여 설명하려고 한다.

* 생각을 시어로 쓰기
시어(詩語)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기에 앞서 '시가 무엇이냐'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시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 한마디로 답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수많은 시인들이 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나름대로 정의를 내리고 있음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시에 대한 정의는 자신의 문학관의 표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서 생각해 보도록 하자.

☆ 시는 율어(律語)에 의한 모방이다. (아리스토텔레스)
☆ 시는 운율적 구문이며, 이성의 도움에 알맞는 상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쾌락과 진리를
결합시키는 기술이다. 그리고 그 본질은 발견하는 것이다.( 사무엘 존슨)
☆ 시는 일반적 의미에서 상상의 표현이다. (셀리)
☆ 시는 시적 진리와 미의 법칙에 의한 인생의 비평이다.(메슈 아놀드)
☆ 나의 시는 나의 참회다. (괴테)
☆ 시는 체험이다.(R.M. 릴케)
☆ 시는 정서의 표출이 아니라 정서로부터의 도피요,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의 도피다.(T.S.엘리어트)-------감정의 일반화와 언어화를 지적
☆ 시는 우주의 생명적 본질이 인간의 감성적 작용을 통하여 표현되는 언어의 통일된
具象이다.(조지훈)
☆ 시는 언어의 건축이다.(김기림)

이들 정의들이 시의 모든 것을 다 말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위의 정의들 중에서 공통된 사항을 정리한다면 '시는 정서와 상상의 문학이며 운율적 언어로 생명의 해석과 체험의 표현' 이라는 공통점을 찾아낼 수 있다.
이렇듯 다양하게 해석되는 시(詩)를 구성하는 요소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가장 대표적인 요소는 시어, 리듬, 이미지, 표현기교, 소재, 주제, 행과 연의 형태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것은 시어(詩語)이다.
시의 본질이 언어예술이란 점으로 보아 시어의 중요성에 이의를 달기는 어렵다. 물론 특수한 예로 그림이나 기호로 쓰여진 시들이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시도일 뿐, 시의 일반적 모습은 아니다.
발레리는 "시는 언어의 연금술(鍊金術)"이라고 했다. 이 말은 시를 쓰는 작업은 시정신을 가다듬고 내적 체험을 응결시키는 일이며, 언어와의 대결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언어를 깎고 다듬고 손질하고 매만져서 그 정수(精髓)를 캐내는 일이 곧 시인의 시작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시는 문학의 한 갈래이다. '문학'이란 말이 어렵다면 그냥 '글쓰기'라고 생각해도 된다. 글쓰기란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나타내는 표현의 한 방법이다. 시도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는 글의 한 갈래란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생각을 글로 나타내는 것을 의외로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좋은 생각이 떠올라도 어떻게 글로 나타내야할 지를 모르겠다며 하소연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접하게 된다. 그런 하소연을 들을 때마다, 지금 내게 말하듯이 그냥 글로 옮기면 된다고 일러주면 그게 그렇지 않다면서 공연히 글쓰기를 무슨 대단한 일로 신비화시킨다. 글은 자신의 생각을 문자로 표현하는 것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글쓰기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글을 너무 높게 평가하고 있다. 아름다운 글을 써야하고, 의미가 그럴듯한 철학적 주제를 담아야 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글은 아름다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담아내야 한다. 특히 시 쓰기를 어려워하는 경우의 대부분은 자신이 무엇을 시 속에서 말하려 했는지 조차 뚜렷하지 않아 자신이 시를 써놓고도 이내 '이게 아닌데…'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내 앞에 펼쳐진 탁 트이고 수평선만 내다보이는 바다를 보았다면 무슨 생각이 맨 먼저 들었을까?

① 넓다/푸르다/물결이 진다/잔잔하다/반짝인다
② 시원하다/춥다/음산하다/짭조름하다/비릿하다
③ 유리 같다/거울 같다/들판 같다/목장 같다/호수 같다
④ 소근거린다/비밀이 담겨 있다/또 하나의 세상이다

등등의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①은 최초의 감각이며 시각적이다. '넓고 푸른 물결이 반짝인다'고 쓰면 바다의 모습을 쓴 글이 된다.
②는 느낌을 쓴 것으로 촉각과 미각의 감각이다. '시원한 바람이 비릿하게 코끝을 스쳤다' 고 쓸 수 있다.
③은 눈에 보이는 시각적 현상을 다른 사물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유리처럼 반짝이는 바다'라고 쓰면 바다가 햇살을 받아 유리처럼 매끄럽게 빛나는 모습과 유리의 날카로움이 겹치게 된다.
④는 주관적 느낌이다. '바다는 늘 소근거렸다'고 쓸 수 있다.

앞의 예로 든 글 쓰기는 모두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쓴 것이다. 여기서 ①과 같이 단순한 시각적 느낌만을 썼다고 해서 질이 낮은 글이 되는 게 아니라 글을 쓰는 사람의 처지와 느낌, 그리고 상황에 따라 느낀 바 그대로 솔직하게 쓰면 된다.
다정한 친구와 여행을 와서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바다는 '귓가에 속삭이는 바다'의 다정함으로 비칠 수도 있다.
엄마한테 꾸지람을 듣고 서러운 마음에 찾아 온 바다는 결코 '거울 같이 반짝이는 바다' 일 수 없다. 즉 자신의 생각이나 상황과 다른 글을 쓰면 글 전체로 보았을 때 어울리지 못하는 구절이 되어 쓰지 않은 것만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옷에 단추를 달아야 하는데 단추 대신 값이 나가는 동전을 가져다가 꿰맸다고 어울리는 옷이 될 것인가?
그러나 예외는 있다. 엄마한테 야단을 맞아 슬픈 마음으로 바다를 찾아 왔는데, 바다가 거울같이 반짝이고 있었다고 생각이 되었다면, 분명 다음 구절에는 '나의 슬픈 마음을 바다에 비추어 보며 위로를 받는다'는 상황의 구절이 이어져야 할 것이다.
즉, 일반적 사고와 다른 대비적 상황이 놓여진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계기(이유)가 전제될 수 있어야 시작품의 구조적 필연성이 성립된다.
이유나 상황제시가 없이 돌발적인 대립적 의미는 타당성이 없는 표현이 된다.
우선 글을(시를) 쓸 때는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분명한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나타낼 수 있어야 비유도 성립되고 상징도 이루어질 수 있다.
분명한 자신의 생각을 알지 못하고 글을 쓰게되면 글쓰는 흥미도 사라지고 마음에 부담만 되어 오히려 쓰지 않음보다 못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나는 글쓰는 재주가 없는가 보다', '글은 전문적인 시인이나 소설가나 쓰는 건가 보다.' '글은 천부적인 재질이 있어야 하는가 보다.' 등등의 글쓰기 최대의 부정적 상황까지 자신을 내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을 비하시킬 필요는 없다.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을 문자언어로 바꾸는 작업은 문맹자가 아니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도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은 생각을 드러내기도 전에 멋을 내거나, 꾸미려 애쓰기 때문이다.
생각이 나타나지 않는 글은 글이라 할 수 없으며, 읽는 이에게 그 내용이 전달되지 않는 '무늬만 글인 것'이 되고 만다. '배가 고프다'고 하면 될 것을 '아름다운 배가 고프다'라든가, '조각달 같은 배가 쪼르르 고프다'고 한다면 본래의 뜻을 나타낼 수 없다. 우선 글이 된 다음에 비유도 상징도 성립된다는 얘기다.

* 시 - 체험의 결과물이다
시는 결국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쓰여지지만, 그 이전의 맨 처음으로 돌아가면 시인의 체험이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시를 머리로 쓰느냐, 아니면 가슴으로 쓰느냐, 아니면 몸으로 쓰느냐 하는 구분을 확연히 할 수는 없겠으나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시는 '온몸으로 쓴 시'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가슴(情)으로 쓴 시'에서 막연한 감동을 공감하게 된다. 이는 천박한 감상주의로 인해 우리의 눈물샘을 자극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명시'라고 들어 온 많은 시들에서 이러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고운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유치환<깃발>

관념적 체험만 있으며, 그 관념도 '왜?'란 질문에 뭐라 답할 수 없는 막연함이 느껴진다. 읽는 이에게 ' 깃발을 꽤나 어렵게 표현했군'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할 뿐 별 감동을 주지 못한다.
교과서에도 실린 <깃발>에서 비유․상징의 묘미는 얻을 수 있을 망정 시가 지녀야할 내용성에 대해서는 아쉽게도 별로 할 말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추상적 의미를 구체화시키며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오히려 구체적 사물을 추상적 의미로 바꾸어 낯설게 하고 있음에 의의를 찾아야 할까? 날아가지 못해 찢기우고 헤지는 색바랜 깃발이 더 우리의 마음을 흔들지 않는가?
지금은 그래도 많이 바뀌었지만 이 같은 시들이 중․고등학교의 국어교과서를 온통 뒤덮고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의 어린 학생들 시에서 우리는 머리로 쓴 시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진실된 체험이기보다는 '그럴 것이다'란 당위성에서 쓰여지는 시, 어른의 흉내를 낸 시들이 백일장을 휩쓸고 있다.

봄의 소리
새롭다.

꽃잎이
열리는 소리.

나비의
날개 젓는 소리.

봄의 소리
들으면
가슴이 열리고
마음은 훠얼훨
하늘을 난다. <봄의 소리>

초등학교의 어린이가 쓴 시에도 이처럼 억지 감동의 글이 있다. 어른들이 생각한 것보다도 더 심한 이 같은 꾸며진 상상은 상상이 아니라 거짓이다. 상상력과 거짓은 다르다. 상상력은 현실에 뿌리박고 있는 건강함과 진한 감동을 느끼게 하지만(딱지 따먹기), 거짓은 뿌리가 없으면서도 마치 있는 듯이, 그럴 수 있을 것이란 짐작으로 위장된다(봄의 소리).

딱지 따먹기를 할 때
딴 아이가
내 것을 치려고 할 때
가슴이 조마조마한다.
딱지가 홀딱 넘어갈 때
나는 내가 넘어가는 것 같다. <딱지 따먹기>

시는 마음이다. 억지로 되는 게 아니다. 시삼백이면 사무사(詩三百 思無邪)라고 했다. 진실된 마음으로 사물을 보고 거짓이 없다는 얘기다. 우리는 이쯤에서 뛰어난 독일의 서정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충고 몇 마디를 떠올려 보아야겠다.

① 모든 사건은 언어를 넘어선 영역 속에서 일어난다.
② 자기 자신 속에 침잠(沈潛)하라
③ 쓰라고 명령하는 근거를 캐어라
④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써라
⑤ 쓰지 않고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필연 속에서 써라
⑥ 자연에 근접하여 보고 체험하고 사랑하고, 잃게 될 것을 모방하지 말고 표현하라
⑦ 보편적 주제를 피하라
⑧ 창조하는 자에게는 빈곤도 없다
⑨ 어린 시절의 풍성한 추억의 보고(寶庫)를 간직하라
⑩ 자기 자신 즉, 고독 속에 파고들라

릴케의 이와 같은 충고는 우리를 주눅들게 하기 충분하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다. 시도 하나의 글에 지나지 않으며, 글이란 자신의 생각을 담는 것에서 시작된다.
글에 대해 어렵다는 선입견을 가지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스스로 포기하기 때문이다. 릴케의 충고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결국은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하라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상상력을 부르는 체험과 관찰

천 년 몇 천 년이 걸릴지라도
네가 내게 입맞춤하고
내가 네게 입맞춤한
그 영원의 한 순간을
말, 다할 수가 없으리.
겨울 햇볕이 내리쪼이는 아침
<몽수리>공원에서의 일이었네.
<몽수리>공원은 파리의 안,
파리는 지구 위,
지구는 별의 하나. 자크 프레베르 <공원>

시의식의 확대를 통해 범우주적인 사고를 하고 있는 시이다.
'벤취 위에서 입맞춤을 하는 연인―몽수리 공원―파리―지구―우주' 로 확대되는 상상력이 독자를 자연스럽게 우주적 사고로 이끌고 있다.
지극히 평범한 소재에 이토록 크고 넓은 우주적 세계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바로 시인의 상상력이다. 시는 소재가 훌륭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소재를 어떤 의식에서 비라보고 관찰하며 또한 상상력으로 표출해내느냐에 달려 있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김수영, <풀>)
시인이 시를 통해서 나타내려고 하는 중심 생각이나 사상으로, 작품 속에 암시적으로 표현된다. 경우에 따라 사상, 정서, 의지 등으로 나타난다.
* 주제의 형상화 - 형상화란 내부의 관념 또는 감각을 통해 느끼거나 생각한 것 등을 어떤 수단에 의해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일이다.
흔히 비유, 상징, 이미지 등 암시적 방법을 통해 이루어진다.

3. 생각의 시작과 확장

정원석(정원사)

침묵과 인고의 상징(시인:유치환) 수성암 형성시기(지리학자)
↖ ↗
바위
↙ ↘
안식처(피곤한 사람) 신의 조화(종교인)

조각품(조각가)

앞의 그림에서 보듯 하나의 '바위'를 바라보는 시각은 너도나도 다르게 마련이다.
이러한 개인적 관점의 차이는 개인의 삶의 태도와 환경, 그리고 자신의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평범한 생활 속에서 바라보는 '바위'는 그냥 '바윗덩어리'라고 느끼는 게 일반적 모습이며 평범한 생각이다. 그러나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살려한다면 무의미하게 사물을 바라보기보다는 의미를 담아 느낄 수 있다면 삶의 가치는 달라진다.
내가 자연환경 보호자라면 자연의 신비로, 조각가라면 돌을 깨어 빚어낼 조각품의 원석(原石)으로 떠올리게 된다.
유치환 시인처럼 생명의식을 지닌 소유자라면 바위에서 인고의 삶을 끌어낼 수 있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 비정(非情)의 함묵(緘黙)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유치환 <바위>

유치환의 <바위>는 바위를 통해 허무의 의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즉 바위라는 소재를 통해 시인이 바라본 것은 그의 가치관 속에 내재한 '허무 의지이며 생명 의식'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내면에 흐르는 생각을 구체적인 바위로 형상화시키고 있어, 허무를 극복하고 무한한 생명의식으로 나아가려는 시인의 생각을 쉽게 이해하게 된다.
시는 우선 글이 되어야 한다. 글은 또한 생각이 나타나야 한다.
생각을 글로 나타내는 훈련이 먼저 이루어져야만 시도 쓸 수 있다.
시의 가장 초보적 단계는 짧은 글 속에 자신의 생각을 담아내는 단계다.
그것이 음악성을 지니든, 구체적 이미지를 가지든 하는 문제는 다음 단계다.
성급하게 음악성, 시어의 상징성을 이미지를 떠올리고 시를 쓰게 되면 자신의 생각마저도 드러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게 된다.
흔히 시를 '표현'이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표현(表現)이라는 의미는 “말하지 않고 드러낸다”는 시법(詩法)이다. 이미지화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미지 속에 의미를 담지 못한다면 그것은 한갓 언어유희에 지나지 않게 된다.

4. 연상(聯想)을 이용한 상상력의 확대

무심코 길을 가다가 돌멩이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고 하자.
A: 아무 생각 없이 툭툭 털고 일어나 가던 길을 간다.
B: "아유- 재수 없어." 하고 가던 길을 간다.
C: "어, 이게 뭐야? 왜, 여기 있지? 아, 엊그제 도로공사를 했지?" 하면서 간다.
D: "어, 이게 뭐야? 어디서 굴러왔지? 이 놈도 머잖아 모래가 될텐데. 인생은 다 그래."하며 오늘 저녁 이 돌멩이를 가지고 글을 써야지라고 생각하면서 간다.

여기서 촉발된 계기는 네 사람이 모두 동일하다. 그러나 A는 아무런 생각도 가지지 못했고, B는 재수 없다는 생각은 가졌으나 더 이상의 확장된 생각이 없었다.
C는 사물에 대한 원인과 결과에 대한 생각을 가졌으나 사실에만 머물렀다.
그리고 D는 촉발된 계기를 가지고 상상을 통해 인생의 문제로 확장시켜 나가고 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바람직한 시 쓰기 태도는 마지막 경우이다.
연상의 과정이 의미 있는-쓸 만한 가치가 있는 방향으로 생각이 확장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연상과 상상의 확장 속에서 드디어 유치환 시인은 <바위>를 바라보며,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라고 자신의 생명에 대한 의지를 노래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시상의 확장은 소재의 발견임을 다시 확인할 수밖에 없다.
즉 뛰어난 시인은 소재(자연물이든 자연 현상이든, 아니면 사람이 만든 인공물이든)에 내재(內在;안에 이미 담겨 있는)한 '의미'를 발견하고, 자신의 입맛에 맞게 끌어다 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창조적 의미라고 한다.
애초에 창조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극단적 견해도 있다.
'시는 자연의 모방'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시학』에서 말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말은 시는 자연(사물과 현상)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것을 언어로 쓴 것이 시(문학)이라는 것이다.

5. 시의 장작 과정

(1) 시의 첫머리와 영감

모든 창작예술의 경우, 제일로 고심하는 것은 첫머리를 어떻게 풀어 나가느냐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시와 같은 문자예술의 경우에는 오로지 단어가 갖는 의미만으로 독자와 마주 대하는 첫머리라서 더욱 힘이 든다.
양주동은 언젠가 장편소설을 쓰고자 원하였으나, 첫머리의 중요성을 절감한 나머지 세계명작의 첫머리를 수집하다본즉 맥이 빠지고 말았다는 실토를 하고 있다.
계용묵과 김진섭은 그 점을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나에겐 언제나 서두 1행 여하에 그 작품의 성불성(成不成)이 따르게 된다. 서두가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을 시일 관계로 그대로 되겠지 하고 진행을 시키다가는 번번이 실패를 본다.
실로 이 서두 1행에 내용을 살릴 작품 형식이 결정되는 것이니 서두에 소홀할 수 가 없다. -桂鎔黙 '沈黙의 辯'에서

문장의 첫 구절-글쓰는 이는 누구든지 경험하는 일이겠지만 글에 있어서 최초의 1구같이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최초의 1구 -이것을 얻기 위해서 말하자면 모든 문장가의 노심초사는 자고로 퍽 큰 듯 보이고, 그만큼 이 1구는 문장의 가치에 대해서도 결정적 인 세력을 가지고 있다. 백 사람의 문장가를 붙들고 물어 본 다면, 그 중에 여든은 가로되 이 최초의 1구가 얼마나 고난에 찬 최대 최시(最始)의 문장적 위기를 의미하는 동시에 그의 모든 준비를 발전시키는 가장 중요한 지도자임을 말하리라. 훌륭하게 만들어진 물건이 중간에서 혹은 말단에서 잘되기 시작할 리야 없겠고, 좋은 결 과, 발전을 위해서 시작이 지난하다는 것은 또한 당연한 일이니, 문장이 매양 좋게 시작된다면, 그 다음은 거저먹기라 할까.
요컨대 다음 문제는 논리적으로 그 방향만, 그것이 가야 될 길만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문장의 도는 근본적으로 발단의 예술임을 주장 할 수 있으니 모든 문장이 첫 대목을 가지고 자기의 내용과 형식을 암시할 뿐 아니라 자신의 본질적 가치까지 결정해 줌에 따라 독자에게도 그것이 자연 결정적인 작용을 주게 되는 것은 우리들이 일 상 경험하는 일이다.
계용묵과 김진섭의 도입부에 관한 말은 모든 언어예술에 해당이 된다.
허나 시의 경우는 발단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불과 몇 백 자의 짧은 구조로 이루어지는 표현이므로 작품 전편의 성취도와 더욱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더구나 시는 영감 혹은 정신의 구체적 표현이므로 대개의 경우 첫머리의 시작은 초월적인 만남이기 일수이다. 발레리가 시의 첫줄은 신(神)에게서 온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감이란 말처럼 초심자를 괴롭히는 걱정거리가 또 있을까. 나아가선 아예 영감이 오지 않아서 작품을 쓰지 못했다는 말도 한다. 그때마다 필자는 시인의 영감은 머리가 아니라 손끝에서 나오니 우선 펜을 들고 시작해 보라고 권한다. 영감이란 가만히 그것을 기다리고 있다 해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시인의 내부에 마련돼 있다. 시인에겐 다만 그것을 어떻게 빨리 불러내느냐는 문제만 남는다. 그렇다면 그것을 불러내는 시도를 해보야 할 게 아닌가.

(2) 어떻게 첫 행을 써야 하는가

시에 있어서 첫머리는 독자와 만나는 첫 번 째 고비이다.
첫머리에서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이 없다면 그 작품을 도대체 누가 읽어줄 것인가. 더구나 시는 20행 내외, 길어야 50행 정도이다.
그런 만큼 시 독자는 인내심이 없다. 소설이라면 어느 정도 읽어나간 다음에 그 작품에 대한 판별이 서기 시작하지만 시의 경우는 그야말로 짧은 한순간의 눈길로 그 작품을 판단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많은 시인들은 그 첫머리를 특징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온갖 테크닉을 개발하게 마련이다.
아래는 그 첫머리를 유형별로 분석해 본 것이다.
다소 도식적이지만 이러한 기초사항을 눈여겨봄으로써 자기만의 독특한 첫머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1] 시간을 나타내는 시의 첫 행은 매우 일반적이다. 특정한 시간대는 호기심을 유발한다.
흔히 4계절이나 하루 중 특정한 시간을 제시함으로써 첫 행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계절 가운데는 봄이, 하루 중에는 밤이 첫 행에서 압도적으로 나타나는 시간이다.
따라서 이런 류(類)의 첫 행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복잡하거나 충격적인 어귀를 쓰게 마련이다. 덧붙이자면 단순한 시간대는 피하는 게 현명하다.

1> 봄이에요. 노랗게 목 메이는-이태수
한밤입니다. 자연의 밤-권달웅
2> 이즈막엔-한기팔
어느 새벽-조창환
집 한채를 몽땅 태우고 잠을 깼네 캄캄하리라 잠들 때였네-김정아
3> 6월 16일은-김영태

1>은 봄이나 밤을 묘사하는 상투적인 표현법에 변화를 가한 예라고 하겠다. 앞은 도치의 방법으로, 뒤는 점층의 방법으로 상투성을 벗어나고 있다.
2>는 불특정한 시간대를 설정함으로써 시간에 대한 상상적인 해독이 가능하도록 한 예다.
3>은 오히려 특정한 시간을 제시함으로써 유인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2] 시의 첫 행에서 시간을 제시하는 경우보다 공간을 설정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빈도 수를 보여준다. 자연 공간 중에서도 산이나 강이 압도적이다. 들과 골짜기, 바닷가, 또는 뜰과 나뭇가지 등등 대체로 시의 모티브가 작품 내부의 공간으로 설정되고 있다.

1> 어딘가에서-윤강로
2>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김주혜
3> 서울역에서 23시 5분에 나를 태울 때 너는 막차다-이화숙
서울 변두리 쌍문동 103의 175-신협

1> 은 시간의 제시 방법에서 본 바와 같이 불특정한 공간을 설정함으로써 시의 융통성을 살린 예의 하나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첫머리는 다음의 두 번 째 행이 더 극적이어야 하는 부담을 준다. 또 한 시인이 여러 차례 반복 사용할 수 없다.
2>는 시의 주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제재(題材)로서 특수한 공간을 설정한 예가 된다. 허나 이 역시 자주 쓰면 상투적이고 도식적일 위험이 있다.
3>은 시적 감흥을 위해서 약점을 무릅쓰고 구체적인 사항을 제시함으로써 오히려 독자들에게 충격을 가하고 있는 예다.

[3] 시간과 공간이 첫 행에서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경우는 훨씬 효과적이다.
이러한 표현법은 그만큼 압축되고 간결한 어휘의 구사가 요구되지만 표현상 자연스럽게 보이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1> 지금 어드메쯤-조병화
2> 가을 햇볕 속에는-이수화
3> 겨울에도 비가 오는 城北洞 기슭-이명수
4> 기원전 5세기 해발 1,600미터의 올라간 강언덕 파지르크 2호분에 묻힌 주인공은 전형적인 몽골의 특징을 지닌 건장한 체격의 60대 남자이다 가슴과 등, 두 팔은 스키토 시베리아 동물양식의 문신으로 완전히 덮여 있었다-지인

1>은 불특정한 시,공간을 제시함으로써 막연하고 애매한 기대감을 환기시킨다.
2>는 보다 구체적이다. 가을 햇볕에 대한 독자의 호기심을 유인한다.
3>은 '성북동 기슭'이라는, 작품 외부에도 실제로 존재하는 공간이 겨울과 비와 함께 작품내부의 새로운 공간을 형성한다. '겨울에도 비가 오는'이라는 관형어절이 주는 효과 때문이다.
4>는 시간과 공간, 주인공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신문기사와 같은 한 대목을 도입부의 첫머리로 삼고 있어 특이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현대시가 서사적 구조를 대담 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예증이다.

[4] 시의 첫행이 하나의 단어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1> 그윽히-허영자
귀여운-김경희
2> 그늘-김현승
누님-서정주
어머니-신석정,양명문
촛불--황금찬

1>은 부사, 형용사 2>는 명사로 된 첫 행의 예들이다. 1>은 다음 행에서 어떤 동작을 나타내는 동사의 출현이 예견되는 표현이다. 우리말의 부사나 형용사는 대체로 시의 첫 행에서 자주 쓰이지 않는다. 다음에 수식해야 할 어구가 예견된다는 것은 그만큼 상식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2>는 다시 '누님,어머니'와 같은 인간 즉 유정물(有情物)과 '그늘,촛불'과 같은 무정물(無情物)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다만, '누님, 어머니'와 같은 경우는 호격조사가 생략되므로 청각적인 기능이 강화되고, '그늘,촛불'과 같은 경우는 회화적인 시적 구성이 예견된다.

[5] 시의 첫행이 하나의 단어를 중심으로 수식된다.

1>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김소월
너라고 불러보는 조국아-이은상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노천명
허리끈을 풀어놓고 누운 여자-박승미

이번 예는 한 단어의 예 가운데 '누님 어머니'와 같은 계열에 속하는 한 변형이라고 하겠다. '이름 조국'과 같은 추상명사를 의인화시킴으로써 상상력의 변주가 가능해진다. 또한 박승미와 같이 모과를 여자로 보게 하고, 거기서 다시 허리끈을 연결시키는 식의 증 폭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6] 시의 첫 행이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진다.

1> 이쯤에서 그만 下直하고 싶다-박목월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유치환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김춘수

이번 예는 앞의 예들보다는 좀더 발전된 형태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첫 행이 한 문장으로 되어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 문장의 주어가 1인칭 즉 '나'로 되어 있거나 생략된 예들이다. 박목월과 유치환의 경우는 하직과 죽음이라는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박목월은 그 마지막 순간까지 관조하는 듯한 겸양에 찬 어법을, 유치환은 의지적인 어법을 사용함으로써 뚜렷한 개성을 보여주고 있다.
김춘수는 나와 짐승을 결합시킴으로써 새로운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2> 풀이 눕는다-김수영
관이 내렸다-박목월
길손이 말없이 떠나려 하고 있다-장만영
봉준이가 운다, 무식하게 무식하게-황동규
소 한 마리를 잡기로 하였다-송정란

[7] 2>의 예는 하나의 문장으로 첫행이 이루어졌으되, 그 주어가 명사어로 된 예들이다. 김수영의 예는 그 주어가 사물이고, 장만영과 황동규는 그 주어를 인간으로 하고 있는 점이 조금 다르다.
그러나 김수영의 '풀'은 민족 또는 민중을 상징하고 박목월의 '관'도 한 인간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다.
송정란은 소를 통해 시를 상징화하고 있다.
장만영은 '길손'이라는 불특정한 주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황동규는 '전봉준'이라는 역사상의 인물을 주어로 등장시키고 있다. 최근의 시에 가까울수록 특정한 시간, 장소, 인물이 시에 등장하는 것은 주목할 만한 현대시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예술의 독자적인 개성이 요구됨에 따라 보다 사적인 소재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3> 가난이야 한낱 襤褸에 지나지 않는다-서정주
사랑은 항상 늦게 온다. 사랑은 生 뒤에 온다-정현종

[8] 3>의 예들은 3인칭의 주어가 추상 명사로 된 것들이다.
'가난, 사랑, 목숨, 산다는 것' 등등에 대한 정의(定義)에 가까운 수사법이 이러한 예들의 근간을 이룬다.
정현종의 경우 두 개의 문장으로서 첫행을 이루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현대시의 발생기에는 그 첫 행이 비교적 간결한 경향이었으나, 최근에 와서는 두 개 및 두 개 이상의 복합 문장이 병치되거나 또는 병열문의 형태로 길어지는 경향을 볼 수 있다.

[9] 이밖에도 시의 첫 행에 있어서 '사랑이 오라 하면, 먼 후일 당신이 찾으시면, 눈 감으면, 이 비 그치면' 등 가정법이 사용되고 있다.
한때 여류 시인들에 의하여 애용되는 것 같았지만 최근에는 관념의 심화에 두드러지게 사용 되고 있다.

* 시의 첫머리를 산문형으로 시작한다

1> 길도 나지 않은, 竹山에서 사십 리도 넘는 산, 사람냄새라곤 풍기지도 않는 산죽 숲을 헤치며 벼랑바위를 발끝으로 짚고 넘으면 아심아심 내려다보이던 대실리, 둥그머니 앉은 초가집, 커다란 안채 그 뒷뜰에 터를 잡았던 넉넉한 그늘-노혜봉
십 미리 미터 단단한 기억의 유리창을 향하여 절굿공이 하나를 던지고 싶어진다.
'차앙, 깨뜨려 버려' 검정색 충동이 더운 김을 내뿜으며 내 귓가에 와서 서성인다.-이영신

70년대에 들어 우리 시에 두드러지게 보이는 현상의 하나가 시에 대한 다양한 모색이다. 그 중에서도 강우식은 4행시를 보여주었고 그에 반해 산문시, 연작시가 시의 한 흐름을 형성하였다. 미당 서정주의 '질마재 신화'가 산문시와 연작시의 형태를 보여주었다면, 박제천의 '장자시'는 연작시이자 띄어쓰기를 무시한 의식의 흐름 기법을 도입했다. 그와 더불어 단위 작품에도 산문시가 빈번하게 나타났다. 정진규, 박제천 등 60년대 시인들이 자주 쓰는 산문형 흐름은 요즘의 신인들에게 그대로 이어져서 내용의 심화를 이루게 된다. 예시들이 보여주듯 첫줄을 아예 한 대목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3) 시(詩)의 제목 달기

흔히들 제목이 그럴 듯해 보여서 책을 사보았더니, 내용이 신통치 않더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인 경우도 있다. 어떤 글이나 길고 짧든지 간에 제목을 붙이게 마련이다. 심지어 제목을 달기 어려우면 아무렇게나 '무제(無題)''실제(失題)'라고도 달아 좋은 작품을 망치는 경우도 많다.
글을 쓰고서 자신의 의도를 선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제목(題目)을 달지 못할 정도로 심약해서는 곤란한 일이 아닌가.
하지만 의도적으로'무제'를 주제화하여 제목을 삼음으로써 성공하는 예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無題라는
제목을 달고
나의 시는
큰 안방 같기를 열망한다. -박목월 '無題'에서

아무튼 글 쓴 이에 따라 제목은 여러 가지로 붙여진다.
글 쓰기 전에 제목부터 정하고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 편의 글을 완성한 뒤에야 제목을 다는 사람도 있다. 또 여러 편의 시나 소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만들 경우에는 작품과는 상관없이 전혀 다른 제목을 붙이기도 한다.
제목은 사람으로 치면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사람에게 있어서 이름이 모든 것을 대신하듯이 작품에서도 제목이 인구에 회자되어 평가를 받게 된다.

* 시의 첫 행이나 마무리 행을 제목으로 삼을 수 있다.
이런 경우는 대개 문장형일 때가 많다. 강조가 되기 때문이다.
다음의 이종희 시는 첫 행과 마무리 행, 그리고 제목이 동일하고, 김영은 마무리 행을 제목으로 갖다 썼다.

아무래도 나는 한 마리 낙타가 되어야겠다
스스로의 힘으로 물을 키우는/몸 안에 물을 싣고 다니는/ 한 마리 낙타가 되어야겠다
나는 나에게 헤매임을 바치겠다/고통으로 걸러낸 땀을/ 이 사막 곳곳에 바치겠다
천지의 목마름이란 목마름은 모두 나에게 와/모래알이 되는/이 황량한 벌판에
나는 목마르다 못해 차라리 사막이 되겠다
사막으로 떠다니기 위해/아무래도 나는 한 마리 낙타가 되어야겠다.
-이종희 '아무래도 나는 한 마리 낙타가 되어야겠다

생각하면, 참을 수 없는 내 안의 모든 것/내 안의 맑은 세포 하나 하나의 떨림
내 살의 결 한올 한올의 흔들림
성취감이나 자만심 또는 상실감 같은 것/모두를 압력솥에 넣고
내 가슴의 푸른 빛 보다 더 푸른/ 불꽃 위에 올려 놓는다
물에 퉁퉁 불어 부피가 커진 욕망/꾹꾹 눌러 참던 노여움의 알갱이들이 뒤엉켜
들끓어 오르다가 숨통이 막혀, 폭발할 수 없어/푹푹 가쁜 숨을 몰아 쉰다
제 풀에 지쳐 온전히 뼈가 무를 때까지 기다린다
마지막 남은 숨 다 빼버리고 나면/ 멍보다 더 푸른 불꽃에 덥힌 몸
한 덩어리 되어/내 안의 나를 받아들인다 -김영 '내 안의 나를 받아들인다'

* 시의 중심 오브제를 제목으로 단다.
이런 경우엔 노명순의 예시처럼 마무리가 증폭되어야 제목의 상징성을 얻을 수 있다.
임지수는 모티브에서 발전하여 의미의 증폭을 이루는 경우다.

겨울 아궁이에 왕겨를 솔솔 뿌리며 풀무질을 해 불문을 열고는 했다.
풀무에 연결된 바람 홈통 끝에 둥그만한 왕겨를 돋운 산, 발갛 게 불붙은 산,
컴컴했던 아궁이 속은 환해지고 차거운 구들장이 뎁혀지며 등짝에 짊어졌던 슬픔들은 아랫목에 슬그머니 벗어 발목으 로 누른다.
왕겨의 둥그만한 산 속에 배고픔이 풀어져 불과 불이 엉 기고 물과 밥이 끓고, 새카 맣게 번들대는 무쇠 솥뚜겅을 열어제친다.
밥김이 훅- 얼굴 위로 서리며 구스름한 밥냄새, 어머니 젖가슴 속에 찬 손을 쑥 집어넣을 때의 풍겼던,
나는 언제까지 어머니의 따숩고 말랑말랑한 젖가슴을 만지며
사발 수북히 고봉밥을 푸고 또 푸며 산을 만들었다.
흰눈이 녹고 얼음이 풀려 온산에 진달래꽃이 빨갛게 핀, 불이 훨훨 타는 산을 만들었다.
-노명순 '불문을 열면'

장정들이 묘지 주변의 풀과 나무들을 쳐내려 갔다.
힘센 낫질에 어린 밤나무, 떡갈나무, 상수리나무, 참나무.../닥치는 대로 베어진다
바쁘게 움직이던 인부의 손이 아카시아 나무 잎에서/잠시 멈칫하더니, 서슴없이 가죽을 벗겨나간다
손이 닿지 않는 위쪽의 잎사귀들만 남겨진 채/ 아카시아의 몸통은 허연 속살을 드러냈다
아카시아 줄기에선 물 한 방울 흐르지 않는다/산 아래 낡은 집은 정이 갔다
그 중 제일 낡은 집 울타리 아래로 작은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맑은 물을 보면 손을 적시고 싶다/하늘이 흐려졌다
흐린 하늘을 보면서 죽은 사람을 위해/산 아카시아나무의 가죽을 벗기는 일이 괜찮은지
나는 자꾸 아카시아의 벗은 몸통을 잊으려 했다/ -임지수 '이장하는 날'

* 새로운 의미의 합성어를 제목으로 쓴다.
시 제목을 달 때 가장 많이 사용된다. 낯선 조어 대신에 기존의 뜻을 합쳐 새로운 맛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영희는 명사형이고 윤종대는 문장형이다.

에스콰이어 쇠줄 셔터가 내려진 종로 2가/좌판 위에 금빛 자전거가 놓여 있었다
카바이트 불빛 아래 노인이 납빛 철사를 구부린다/둥근 바퀴를 만들고 있다
처음과 끝이 맞물려 또 하나의 철사를 몇 번 말아 쥐고
자전거의 몸체와 연결시킨 두개의 동그라미/ 원의 한 부분이 바닥을 집고 일어서 바퀴가 된다
그가 방금 만들어진 자전거에 금빛 스프레이를 뿌린다
황금빛이 달라붙은 날개를 만든다/반백의 머리 아래 그의 눈빛이 빛난다
빛나는 눈이 도시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간다
빛이 머무는 저기는 지구의 어디?/나는 그 빛을 따라 들어가 금빛 자전거 하나를 고른다
그리고 하트 모양의 안장 위에 앉아/그의 작은 나라로 간다
-정영희 '빛의 나라로 가는 자전거'

질긴 힘줄이 툭 툭 끊어져 무릎 위에 쌓인다./이끼가 파랗게 기어오른 밑둥치
껍질을 파고 들어/ 아킬레스건을 조금씩 끊어 들어간다.
톱날에 달라붙는 끈끈한 진/톱질소리만 들리는 나의 골짜기에/32인치 둘레의 나무둥치가 울린다.
작은 가지가 흔들리고/잎들이 잔잔한 비명을 지른다.
마지막 남은 생살이 찢어지고/땅을 치며 나무가 쓰러진다.
무릎을 떨며 일어서는/바람 한 줄기. -윤종대 '잎을 다는 일이 나무를 무겁게 한다'

* 평범한 단어를 제목으로 쓸 때가 있다.
시의 초심자들에게 흔한 일이지만, 좋은 시의 경우에도 의도적으로 사용할 때가 있다. 이런 시의 경우는 그 내용이 전혀 평범하지 않게 마련이다.
일종의 충격효과를 노리기 때문이다.
고명수는 근황을 통해 카투만두의 등산을 비유로 끌어들이고, 이종성은 차표와 별을 대비시키며, 이인원은 말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다루므로 충격을 불러일으킨다.

내 삶은 라마승과 진배없다/나의 형제들은 모두 셀파족이다
나를 따라 무거운 짐을 지고 산을 오른다
하지만 이곳 타미 마을엔/헤프게 웃거나 헬금거리는 계집들도 없고
들떼거리거나 가탈부리는 녀석들도 없다
거들먹거리는 놈들도 없다
겨울이 올 때면 30리도 더 되는/산을 넘어가 땔감을 구해오고/그저 묵묵히 야젓하게 산다
드문드문 떨어져서 호젓이 산다/다만 하얀 설산을 바라보며/하얗게 버리는 법을 배운다
이곳은 타미 마을이고 서울은 나의 카트만두이다/나는 서울에서 밀려난 셈이다
서울로 뻗은 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그곳에 이미 내려가 있는 마을 사람들의/소식을 궁금해하기도 한다
언젠가는 나도 그곳으로 진정/돌아가야 하리라는 걸 안다 -고명수 '근황'

김재홍이 구체적으로 분류하고 있는 시의 제목 짓기 방법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① 은유적 제목으로 시의 내용을 압축적으로 제시한다.
'봄은 고양이로다' 이장희, '나룻배와 행인' 한용운
② 상징적 제목으로서 시적 대상을 가리킨다.
'깃발' 유치환, '曠野' 이육사
③ 직서적 제목으로서 내용전달에 치중된다.
'나의 침실로' 이상화, '南으로 窓을 내겠오' 김상용
④ 설의적 제목으로 의미전달내지 공감영역의 확대에 중점을 둔다.
'나의 꿈을 엿보시겠읍니까' 신석정,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신석정
⑤ 형상적 제목으로 친근감있는 소재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진달래꽃' 김소월, '瓦斯燈' 김광균
⑥ 역설적 제목으로 의미의 역설을 통해 시를 심화시킨다.
'님의 침묵' 한용운, '나는 잊고자' 한용운
⑦ 기원적 제목으로 소망과 염원을 제시한다.
'그 꿈을 깨치소서' 모윤숙
⑧ 돈호법에 의해 영탄적인 호소와 감동을 형상화함에 많이 사용된다.
'오, 날개여' 변영로, '오, 나의 영혼의 旗여' 변영로

이처럼 시의 제목은 시인의 의도가 직접적으로 작용하지만, 효과적인 용법으로는 내용의 보완을 가져올 수 있는 대칭구조를 권하고 싶다.
곁들여 아래의 시집 제목 달기도 시에 응용하기 바란다.

* 제목 선정의 중요성

제목을 사람으로 말하면 그 사람의 얼굴이다.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의 모습을 어느 정도는 간파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제목을 보면 그 시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제목이 '무제'인 경우를 접하게 되면 독자들은 당황하기 마련이다.
말 그대로 제목 '題'이 없다 '無'는 의미일텐데, 제목이 없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제목으로 선택한 의도가 무엇일까를 고민해야 한다. 역설적 의미를 담은 것일 수도 있겠고, 내용 자체가 제목이 없는 것에 대한 내용일 수도 있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제목으로 삼을 만한 것이 없었다거나 그저 무성의한 제목 붙이기에 다름 아닐 수도 있겠다. 이렇게 다양한 내용을 암시할 수 있다는 것은 풍부하게 정서를 환기시킬 수 있지 않겠나 하겠지만 그만큼 애매할 수도 있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제목부터 애매한 시는 결국 애매한 시로 끝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내용 없는 시가 어디 있겠는가?

파도에 휩쓸려도
산꼭대기에서 떨어져도
돌멩이가 되리라.

새싹이 돋아나고
태양이 다시 떠오르듯
이제
웅덩이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가 되리라.

기적 소리를 멀리하고 떠나가는
열차의 바퀴에 치어
가늘게 떨고 있는 손가락의 기억을
잊을 수 있는
하얀 새가 되리라. (고교생 작품, '무제')

위에 제시된 시는 제목 '무제'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알 수 없을 뿐더러 세 가지의 되고 싶은 존재가 연결 고리없이 흩어진 채 끝맺고
있기 때문에 차라리 '무제'라는 제목을 붙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그러나 제목은 시가 갖고 있는 내용을 어떤방식으로든지 암시해 주어야
한다. 제목도 시의 일부이다. 유치환의 '깃발'은 이를 잘 드러내준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白鷺)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유치환, '깃발')

시의 본문에서는 '이것은'으로 제목 '깃발'을 지시해 놓고 '소리 없는 아우성',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 '애수(哀愁)',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이라고 은유되어 있다. 제목을 뺀 본문에는 '깃발'이라는 시어를 찾아볼 수가 없다. 여기에서 제목 '깃발'이 언급되지 않았다면 위에 열거된 비유의 원관념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매우 어렵다.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 합니다.
어머니, 이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 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 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 합니다
(신석정.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제1연)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어, 달밤이 싫어,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어,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어…… (박두진, '해' 제 1, 2연)

이 시들은 제목은 다르지만 같은 내용을 형상화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제목이 '해'인 만큼 '해야 솟아라'는 표현은 광명의 세계를
추구하는 내용일 테고,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역시 촛불을 켜야 할 어둠의 시간을 거절한다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같은 내용을 암시하는 제목이다.
시를 감상할 때 형식과 내용을 구별해 보는 것은 아니다.
이는 마치 동전의 '앞과 뒤'와 같이 특유한 의의를 지닌다. 즉, 분별해 볼 때는 감상할 때의 유기적이며 종합적인 요건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시의 제목에서부터 문제가 될 때가 있다.
시의 제목이 작품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과거엔 마땅한 제목을 붙이지 못해 그냥 무제(無題)라고 쓰는 경우도 많았다.
시의 제목은 작품이 완성된 다음에다는 수도 있고 먼저 제목이 결정된 다음에 작품을 완성시키는 경우도 있다.
한 편의 시가 완성되기까지는 다양한 차원에서 동기 유발이 이뤄진다. 단순히 낱말 하나가 강렬하게 다가옴으로써 작품을 쓰게 되는 예도 있다.
또 사물에 대한 명칭, 즉 꽃의 이름이나 지명(地名), 사람의 이름 기타 등은 그대로 제목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시의 내용적인 차원에서 그 표현법을 대별해 보자.
ⓐ 주정적 내용
① 감각적인 것 ② 정서적인 것 ③ 정조(情操)적인 것
ⓑ 주지적 내용
① 기지적인 것 ② 지혜적인 것 ③ 예지적인 것
ⓒ 주의적(注意的) 내용
① 주제적 ② 줄거리 중심 ③ 평면적 진술
주정적인 시는 19세기 낭만주의 시에서 그 주된 흐름을 볼 수 있다. 시적 기교보다는 직설적이요, 정서의 원형적 요소가 바로 드러나는 특징이 있다.

찾아온 손님의/다감한 눈빛으로/방을 훈훈히 하는/한 장의 편지
그것이 이룬/하늘에서 살짝/隱密히 내린듯/빈 책상 위에 이미,
뜻 있는 이 밝음은/써 보낸 사람의/마음의 그것
초롱을 벗어난 새의/自由가 되어 /나를 부르러 온 아아,/나의 知友여
피봉의 글씨/귀를 기울이며/이 밝음의 가상이를
곱게/편지를 뜯는다. -이수익, 「편지」전문

주지적인 시들은 고도의 수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세상의 지식을 어느 정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감상이 가능할 경우가 있다. 주지시에 동원되는 표현들은 고도의 기지와 예지가 따라야 한다. 시를 짓는 이도 직관적인 에스프리에 능할 수 있어야 한다.

그 헐벗은 비행장 옆
낡은 예레미야 병원 가까이
스물 아홉살의 强한 그대가 죽어 있었지.
쟝. 바띠스트. 클라망스
스토브조차 꺼진 다락방안 추운 氷壁밑에서
검은 으로 뎃상한 그대 어둔 얼굴을 보고 있으면
킬리만자로의 눈속에 묻혀 있는 표범 이마.
빛나는 대리석 토르소의 흰 손이 떠오르지.
지금 낡은 예레미야 병원 가까이의 지붕에도
눈은 내리고
겨울이 빈 나무허리를 쓸며 있는 때.
캄캄한 안개 속
침몰하여 가는 내 은
이제 고달픈 닻을 내리어 정박하고서
축축히 꿈의 이슬에 잠자는 인 것을,
짙은 밤 부둣가 한 모퉁이로
내 아무렇게나 혼자서 떠나보네. -이가림, 「빙하기」 부분

종일
바람에 귀를 갈고 있는 풀잎.
기은 늘 두려운 이마를 열고
우리들은 멈춘 자리에
다시 멈추게 한다.

막막하고 어지럽지만 그러나
고개를 넘으면
전신이 우는 들.
그들이 기는 한 사내의
와 죽음을 지나

먼 길의 귀 속으로 한 사람씩
떨며 들어가는
영원히 집이 없는 사람들.

바람이 분다, 살아 봐야 겠다. -오규원,「순례의 서․1」부분

주의적 시는 단독으로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떼어내서 볼 때 주제, 줄거리, 또 이들을 평면적으로 정리함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쉽게 그 내용 파악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표현상의 특별한 기교를 염두에 두지 않을 경우가 많다.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향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드리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주슨 한이 날으오리까.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六曹)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심훈,「그날이 오면」 전문

위에서 본대로 주정적, 주지적, 주의적이라는 것은 실제 작품마다 세가지 요소가 모두 합쳐져서 완성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아무튼 글 쓴 이에 따라 제목은 여러 가지로 붙여진다. 글 쓰기 전에 제목부터 정하고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 편의 글을 완성한 뒤에야 제목을 다는 사람도 있다.
또 여러 편의 시나 소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만들 경우에는 작품과는 상관없이 전혀 다른 제목을 붙이기도 한다.
제목은 사람으로 치면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사람에게 있어서 이름이 모든 것을 대신하듯이 작품에서도 제목이 인구에 회자되어 평가를 받게 된다.

6. 시를 압축하고 생략하기

시를 쓸 때 감각의 깊이를 더해 가는 노력과 끈기, 그리고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게 된다. 상식적인 생각과 관습적인 사고로서는 결코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 낼 수 없다.

길가에는 벚꽃이 뿌려지고
언제 저버릴지 모르는 벚꽃은
계속 피고, 피고 있었다.

위의 글에서 '길가에는 벚꽃이 계속해서 피어난다'는 사실 이외에는 별다른 요소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분명 벚꽃이 피고 지고 하는 모습에서 무엇인가를 느꼈기 때문에 쓴 것일텐데 단순한 자연의 현상만이 나타나 있어 왜 이런 시를 썼는지를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무엇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글을 쓰게 한 것일까? 시는 바로 이러한 이유와 근거마저도 시속에 담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 유의해야만 한다. 우리는 흔히 시는 감정의 표현이라고 말하면서도 왜 그런 표현을 썼느냐는 되물음에는 묵묵부답이거나 그것이 정서다라는 말로 얼버무리는 경우를 본다.
마치 시는 적당히 써놓으면 이렇게 저렇게 이해하면 된다는 안일한 답변을 듣는 경우도 생긴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이름 있다는 반짝거리는 시인들의 시에서도 발견한다. 시는 그렇게 무책임한 것이 아니다.
길다란 산문보다도 더욱 엄격히 완벽성을 요구하는 것이 시이다.
최초에 느꼈을 그 '무엇'을 찾아내어 시를 빚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잘 빚은 항아리는 보기도 아름답고 그 기능면에서도 쓸모가 있기 마련이다.
위의 시를 아래와 같이 고쳐보면 어떨까?

길가에는 벚꽃이 지고
지는 꽃을 보면서
지는 꽃 사이사이에
다시 뜨는 하늘의 별처럼
꽃봉오리가 매달리고
꽃봉오리가 벙글고.

위의 3행을 여섯 행으로 늘리면서 비유을 통한 이미지화를 꾀하고 있다.
앞의 시보다 훨씬 구체적이다.
그런데, 시는 압축의 문학이라고 하는데 길어졌으니 마음에 흡족하지 않다.
자신이 쓴 글이나 시에서 빼거나 줄여도 내용을 전달하는데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될 수 있는 대로 줄이고 빼야 한다. 물론 리듬의 조화를 위해 남기거나 오히려 늘릴 수도 있지만 이는 한 두 음절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압축을 위해 우리는 상징이나 비유 등의 방법을 사용하게 된다.

길가에는 벚꽃이 지고
지는 꽃 사이사이에
다시 뜨는 하늘의 별처럼
꽃봉오리가 벙글고.

이러한 시 고쳐쓰기는 활자화되기 전까지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
또 고쳐서 보다 완전한 시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활자화가 된 이후에 고치는 경우도 있게 되는데 이를 개작(改作)이라고 한다.
다음은 김소월의 <진달래 꽃>이 어떻게 개작되어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시가 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가실 때에는 말없이
말업시 고히 보내드리우리다 ←고히고히 보내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거름거름
노힌 그 꼬츨
삽분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고히나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니우리다
김소월의 <진달래 꽃>이 처음 『개벽』25에 실렸을 때는 오른 쪽의 모습이었으나, 후에 자신의 시집 『진달래꽃』에는 왼쪽의 모습으로 개작되어 실렸다.
이렇듯 시는 끊임없는 퇴고 속에서 다듬어지고 완전해지는 것이다.

흰 달빛 흰 달빛이 비치는
자하문(紫霞門) 경주 불국사 자하문을 열고 들어서면

달안개 달빛 젖은 안개가 피어오르고
물 소리 물소리는 청량하게 들려 온다.

대웅전(大雄殿) 절의 대웅전 뜨락에 서니
큰 보살 큰 보살님이 미소짓고 있네

바람 소리 바람소리가 시원하게
솔 소리 소나무사이 소근거리는 소리로 불어오네

범영루(泛影樓) 절 앞의 누각인 범영루는
뜬 그림자 추녀깃을 들어 올리는 그림자로

흐는히 달빛에 흐릿하게
젖는데 젖고 있는데

흰 달빛 흰 달빛이 내리 비치는
자하문(紫霞門) 불국사 자하문 근처의 밤은

바람 소리 바람 소리 물소리 한데 어울려
물 소리. 달빛 안개 속에서 깊어만 가네
박목월, <불국사(佛國寺)> 필자가 늘여 쓴 박목월의 <불국사>

시와 산문의 가장 큰 차이는 같은 내용이라면 길이가 짧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는 압축과 생략의 문학이라고도 한다.
없어도 상상이 되는 불필요한 수식이나 어휘, 조사, 어미 등은 과감히 생략할 수 있어야 한다. 의미의 생성과 전달, 그리고 음악적인 리듬감을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불필요한 언어라고 보아도 된다.
위의 박목월 시인의 <불국사>를 본래대로의 의미와 묘사로 확장시켜보면 오른쪽에 늘여 쓴 시와 같은 모습이 된다.
왼쪽의 <불국사> 원문과 다른 점이 없다.
그러나 구체적인 오른쪽의 시는 오히려 풀어지면서 상상의 여지가 사라져 버렸다.
시에서 언어의 과감한 생략은 많은 어휘를 쓰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표현 방법이 된다.
처음 시를 쓰는 사람은 자꾸 덧보태려 하는데, 시는 더하기의 미학이 아니라 빼기 의 미학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아기야. 너는 어디서 온 나그네냐? 보는 것, 듯는 것, 만 가지가 신기롭고 이상하기만 하여 그같이 연거푸 울음을 쏟뜨리는 너는, ―몇 살이지? ―네 살?
어쩌면 네가 떠나 온 그 나라에선 네가 집 나간 지 나흘째 밖에 아닌지 모르겠구나!
유치환, <아기>『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7. 시를 논리적으로 구체화하기

가) 잘된 시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 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비구비 펴리라. (어론 님: 사랑하는 사람)
(황진이, 진본 청구영언, 현대어 역)

어디 한 군데 허투루 쓴 게 없다. 그러면서도 결코 현학적이거나 난해하지 않다. 솔직한 자신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자연스러움이 있다. 수식도 없다.
추상적 시간을 구체적 이미지로 바꾸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읽는 이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도록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고도 격조 높게 표현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구상 시인은 "밤이란 시간을 의인화하여 여성 자신의 육체로 공간화한 그 절묘하고 고도한 수법은 얼마나 지적이며 기술적인가?" 고 감탄하면서 고도의 계산된 시의 구조와 시어의 표상을 강조한다.
구상 시인은 장 곡토의 <직업의 비밀>이란 글에서 '시인은 꿈꾸지 않는다.
그는 계산한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흔히들 시를 부정확하고 자연발생적이고 몽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은 큰 오해인 것이다." 라고 지적을 하고 있다.
다음의 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현대시가 가지는 다양한 이미지와 개인의 경험 세계가 쉬이 공감되지 않기 때문이지 엉터리 시는 아니다. 이러한 시를 이해할 때 시의 논리성에 준하여 감상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곽재구 <사평역(沙平驛)에서>

함박눈이 내리는 겨울날, 역 대합실에는 막차를 기다리는 몇 사람이 톱밥난로를 쬐고 있다. 대합실을 감싸고 있는 벽의 유리창에는 돌아가며 난로의 불꽃이 조그맣게 비친다. 기다림의 지루함 속에 자꾸 내다보이는 철로 변 마른 수숫대에도 눈이 내린다. 난로 주위에 모여 동질감을 느끼며 기다리는 사람들. 그 중의 어떤 이는 쿨룩거린다. 그 중의 한 사람이 한 줌의 톱밥을 집어 난로에 던진다.
불은 조금 반짝이고 따스한 열기는 주위의 사람들을 저마다의 내면으로 끌고 들어간다.
불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불의 자극이었을까? 시린 손들을 난로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에 내어 밀면서 저마다 고향에 가지고 갈 사과 광주리며 굴비 한 두릅을 매만지면서 조용히 머잖아 올 기차를 기다린다.
담배를 피우고, 기침을 쿨룩거리는 사람들 밖에서는 여전히 눈이 싸륵싸륵 내린다. 소리가 들린다. 눈꽃들의 화음. 그 정겨움. 자정이 넘으면서 알 수 없는 따스함이 낯설음을 허물고 서로의 뼛속에 밴 아픔을 공감한다.
간이역에는 멈추지 않고 지나가는 열차의 차창이 붉은 단풍잎처럼 창 밖을 스친다. 지나가는 열차 속의 얼굴들도 각자 그리움을 찾아가는 것이리라.
또 다른 나를 보듯 그들의 이름을 불러보면서 한 줌의 애틋한 정을 난로 속에 보탠다.
곽재구의 <사평역에서>는 이런 이야기다.
한 편의 그림처럼 펼쳐지는 이 시에서 버릴 것은 없다. 버릴 것이 없다는 얘기는 논리적으로도 합당하다는 얘기다.
바꾸어 말하면 시상과 시어, 그리고 표현이 함께 어우러져 한 덩어리가 되어 있어 어느 것을 빼거나 보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말이 되겠다.
그러나 시의 배경이 되는 '사평역'은 실재하지 않는 상상 속의 공간이다.
전남 화순군 남면 사평리에는 기차역이 없다.
시인의 상상력이 사평역을 만든 것이다.
인근 나주군에 남평역이 있을 뿐이다.
상상력의 위력과 문학적 진실을 엿볼 수 있는 시이다.

그러나 아직 논리성에 대해서 언급하지 못했다. 그래서 위의 시를 다음과 같은 질문을 통해 분석해 보는 것도 이해의 한 방법이 될 것이다.

1) 막차는 왜 오지 않느냐?
--막차를 타려는 사람은 차시간 보다 훨씬 더 여유 있게 온다.
따라서 심리적으로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길어진다.
2)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은 어떤 것이냐?
--꺽지 않은 수수꽃이 유리창에 비친 것(?) 만약 수수꽃다리를 말한다면 없어도 좋을 시행이기도 하다.
3) 그믐처럼 왜 졸까?
--그믐은 심리적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정리되는 시간이기에 지쳐있음을 표현 하고 있다.
4) 한줌의 톱밥을 왜 난로 속에 던질까?
--그리움을 더 오래 간직하고 떠올리기 위해.
5) 청색의 손바닥을 적셔두고는 어떤 것일까?
--겨울날의 차갑게 언 손을 미미한 온기에 쪼이고 있음을 객관적으로 묘사
6) 왜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을까?
--각자의 삶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며 상상과 상념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느라. 바슐라르는 불은 상상력을 일깨우는 원소로 보고 있다.
7) 왜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하는 걸까?
--그리움과 서먹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음.
8) 낯설음도 뼈아픔도 자정이 지나면 설원인 이유는?
--삶의 고단함도 시간이 지나면 눈이 덮여 하얘지듯 표백되고 정화되므로.
9) 왜 이름을 부르며 한줌의 눈물을 던질까?
--그리운 삶의 애틋한 시간들을 하나씩 불러내며 떠올리기 위하여.
등등의 질문과 답변이 타당성 있게 성립된다면 시어의 적확한 사용, 상황의 필연성, 솔직한 정서 표현 등이 갖추어 진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다.
그러나 위 시에서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의 구절에서 희고 보랏빛으로도 보이는 수수꽃이란 뜻일텐데 수수꽃이 눈오는 겨울날에 피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잘못일까? 확인할 수 없다.
곽재구 시인의 시들 속에는 패랭이꽃, 감자꽃, 진달래 등등의 꽃들이 상당히 많이 언급되지만 시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의미의 보조적 역할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볼 때 '수수꽃'은 플랫홈 철로 가에 아직 남은 수숫대 위의 수숫대궁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며, 수수꽃이 유리창에 난로의 불빛과 함께 오버랩 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이를 유리창에 낀 성애의 모양이 마치 수수꽃 같았기 때문이라면 흰 보라의 색채가 어울리지 않게 된다.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가지고 있다.
위의 시는 비교적 잘 짜여진 시로 읽힌다. 물론 시에서 완벽이란 없다.
그저 모든 시는 완전에 가깝게 표현되고 있을 뿐이며, 독자는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황동규 시인은 이 <사평역에서>를 뽑고 난 소감으로 "허황됨에서 벗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언어를 다루는 기량과 삶에 대한 끈끈한 진실도 보여주고 있다." 고 했다. 즉, 눈에 보이는 사실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표현이며, 그 속에 삶의 진실이 배어 있음을 읽을 수 있다면 시가 된 것이다.
시의 논리적 구체성은 시를 쓰는 순간에는 불필요하다.
왜냐하면 시는 감정(정서)의 표현이기에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솔직함과 진정한 마음의 표출이기에 체계적일 수 없다.
그러나 이 체계적이지 못한 솔직함이 언어화의 과정을 거칠 때는 언어적 질서와 감정의 적확한 표현을 획득할 수 있어야 한다.
순간적으로 다양한 모습과 이미지로 촉발된 정서의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이 곧 언어화의 과정이며 창작의 과정이라고 하겠다.
물론 시인이 시를 쓸 때 모든 걸 다 계산하고, 논리적이면서 필연적인 인과성 위에서 시를 쓰지 않는다.
그러나 솔직함과 진정성이 강하면 강할수록 시는 자연스럽게 질서와 논리성을 담아내게 된다. 솔직함과 진지함이 없을 때 시는 앞뒤가 잘 들어맞지 않게 된다.
먼저 사람이 되라는 얘긴데 사람되기가 쉬운 일은 아닐 터이니 그저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바람직한 시 쓰기일 것 같다.
춘원 이광수도 '시는 그 시인의 고백'이라고 했다.

나) 잘못된 시

지난 겨울
남 몰래 이장한 묘구덩 속
아직 남은 뼈마디 하나.

엉겅퀴에 걸려
푸른 보라빛으로
멍이 든
컴플렉스.

'잘라 버릴거야'
낙서처럼
스쳐지나는
개울 건너 무덤까지.

제목은 <개울 건너>라고 되어 있다.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조차 없고 여기에는 세 개의 이미지가 나열되어 있다.
이장한 묘 자리에 남은 뼈 하나와 엉겅퀴의 보랏빛 꽃, 그리고 벽에 가위가 그려져 있고 그 옆에 쓰여진 낙서다. 그러나 이 세 개의 이미지는 하나로 녹아들지 못하고 삐걱인다. 억지로 하나로 묶으려 한 흔적이 마지막 행에 드러나 있다.
'개울 건너 무덤까지'가 그것이다. 시상만 나열되었을 뿐 시가 아닌 것이다.
이 글이 시가 되려면 세 편의 시로 태어나야지 하나로는 도저히 시가 될 수 없다. 그런데도 억지로 하나로 묶어 보려다 실패하고 말았다.
위의 글이 시가 되지 못한 이유는 시상만 가지고 시를 억지로 쓰려했기 때문이다.
느낌과 감동이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건질 것은 구덩이에 버려진 뼈와 엉겅퀴의 푸른 빛깔이다.
지난 겨울이란 시간적 배경과 낙서는 없어져야 한다.
그래야 최초의 상황인 시상을 얻었을 때의 놀라움이 표출될 수 있으리란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미 솔직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만약 이것을 시라고 강변한다면 독자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도 어쩔 수 없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양심의 문제다.
그렇다면 시인들이 시를 쓸 때, 철저한 논리적 구성 속에 시를 쓰는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시인의 의식 속에 시의 씨앗으로 잉태된 정서의 출렁임은 필연적인 인과성 위에 펼쳐지지만 느낌은 순서를 가지지 않고 한꺼번에 찾아온다.
직감적으로 찾아오는 이 정서의 이미지들은 어찌 보면 무척 무질서한 듯하지만 구조적으로 완벽한 상태이다. 다만 시인이 이 무질서해 보이는 이미지를 어떻게 형상화하느냐에 따라 시가 쓰여지거나 의식 속에 잠재되어 버리거나 하게 된다.
쉽게 말하면 무엇을 보거나 생각할 때, 그 대상과 접하는 순간 의식 속에는 엉켜있는 생각의 덩어리가 자리를 잡게 되고, 이 생각의 덩어리를 차분하게 있는 그대로 최초의 느낌 그대로 표현해내는 작업이 바로 시 쓰기라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최초의 느낌이 끝까지 유지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많은 시인들이 시 작업을 하는 동안에 처음의 의도와 다른 시들을 쓴 경우가 있다고 말한다. 이는 촉발된 정서가 또 다른 정서를 일으키면서 확장되고 변형되어 최초의 생각과 다른 시들이 태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앞에 예를 든 필자의 <개울 건너>는 바로 이 확장과 변형의 과정에서 방향을 잃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이 자리에서
교수는 파이프를 비스듬히 물고
내장이 나온 창으로
상아연안이 침몰하고 있는 것을
화석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조난(遭難)하는 백합 한 송이…….

라고 쓰고 그 제목을 <작품9>라고 붙여 내놓는다면, 마치 아무렇게나 괴물의 형상을 그려놓고 도깨비라고 우기면 누가 시비할 수가 없듯이 누가 뭐라고 하지야 않겠지만 저 무의미한 표상의 나열이 결코 시가 될 수는 없다." 며 앞 뒤의 논리적 상관성과 의미적 상관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구상 <현대시창작법> 105쪽)

어제 꿈을 꾸었다
예전에 소중했던 추억이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놓치고 싶지 않아
손을 뻗어 보았지만
추억은 희미하게 사라져 갔다.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무엇도…
다시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간다.
그리곤 다시 지나간 추억을 쫓아
잠을 청한다
다시는 놓치지 않을 거라 다짐하며.

위의 글은 제목의 추상성이 주제의 모호함으로 이어지면서 내용이 없는, 생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시가 되었다.
언뜻 보면 시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나, 글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언어형식이란 점에 비추어 볼 때, 글이 되지 못하고 있어 시라고 할 수도 없다.
8. 시 창작의 실제

(1) 종이학

<대상인식>
나의 아내는 날마다 학을 접습니다.
그래서 큰 병 안에는 날마다 수많은 학들이 쌓여 갑니다.
'아내는 왜, 학을 접는 걸까요?'
나의 의문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랜 생각 끝에 짧은 이야기하나를 꾸며 봤습니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 보니, 아내가 접어놓은 학들이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수많은 학들이 어둠 속에서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가슴에 대고 물어 보았습니다.
'아내는 왜, 날마다 학을 접는 것일까?'
'학은 얼마나 많은 밤을 저렇게 난 것일까?'
그래서 아내의 얼굴을 쳐다봤습니다.
피곤한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을 보니 가슴속을 아프게 파고드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미안함과 부끄러움이었습니다.
나를 위해 자기를 버리는 아내의 삶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내가 학을 접는 까닭을 알았습니다.
내가 나만의 하늘을 날고 싶듯이 아내도 아내만의 하늘을 날고 싶어서 그럴 거라고."
이것은 종이학을 보고 상상한 이야기입니다.

<인식내용 정리>
①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보니, 아내가 접어놓은 학이 하늘을 날고 있었습니다.
② 수많은 학들이 어둠 속에서 하늘을 날고 있었습니다.
③ 아내는 왜, 날마다 학을 접는 것일까요?
④ 학은 얼마나 많은 밤을 난 것일까요?
⑤ 아내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⑥ 피곤하게 자고 있는 아내를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⑦ 아내도 자신만의 하늘을 날고 싶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성>
①을 1연, ②를 2연, ③과 ④를 3연, ⑤와 ⑥을 4연, ⑦을 5연으로 구성해 봅시다. 연은 생각의 변화, 또는 사건의 변화, 시간의 변화, 장소의 변화 등에 따라 자신의 뜻대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성하기에서도 퇴고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보니
아내가 접어놓은
학들이 하늘을 난다.

수많은 학들이
어둠을 속에서 하늘을 난다.

아내는 왜, 날마다
학을 접는 것일까.
얼마나 많은 밤을
학은 난 것일까.

피곤하게 잠이 든 아내를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내도 아내만의 하늘을 날고 싶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형상화, 퇴고>

1연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보니
아내가 접어놓은
학들이 하늘을 난다.

1행의 '잠'은 어떤 잠일까요? 포근한 잠, 피곤한 잠, 시린 잠 중 어떤 잠입니까? '시린 잠'이 어울리겠지요?
당신은 그 '시린 잠 속'에서 어떻게 나왔습니까? '깨어나'를 문맥에 맞게 고치자는 것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시린 잠 속에서 어떻게 나왔습니다. 쫓겨 나왔겠지요?
언제나 쫓기듯 사는 시린 삶이니까. 바꿔 보면, '시린 잠 속에 쫓겨 나와'. '보니'를 구체화하여 '눈을 떠보니'로 바꾸면 좋겠지요?

시린 잠 속에서 쫓겨 나와
눈을 떠보니
아내가 접어놓은
학들이 하늘을 난다.

2연 수많은 학들이
어둠을 속에서 하늘을 난다.

1행의 '수많은 학'이라는 시어는 구체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숫자를 제시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수많은'이라는 시어를 구체화하기가 좋은 숫자는 무엇일까요?
'천 마리 만 마리나'라고 하면 되겠지요? 이런 때는 정확한 숫자를 제시하면 정감이 감소됩니다.
'학'은 1연에도 나오고 '천 마리나 만 마리나'라는 시어에 그 의미가 나타나 있으니까 동어반복을 피하기 위해 생략합시다.
2행에서 '어둠 속에서' 학은 '어둠'을 어떻게 하며 날고 있을까요?
여기에서는 '어둠'은 부정적 현실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둠을 헤치며 하늘을 난다'로 바꿀 수 없을까요?
천 마리 만 마리나
어둠을 헤치며 하늘을 난다.

3연 아내는 왜, 날마다
학을 접는 것일까.
얼마나 많은 밤을
학은 난 것일까.

1행의 '날마다'를 '날이면 날마다'로 반복해 의미를 강조시켜 봅시다.
나머지는 그대로 두어도 좋겠지요?

아내는 왜, 날이면 날마다
학을 접는 것일까.
얼마나 많은 밤을
학은 난 것일까.

4연 피곤하게 잠이 든 아내를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

1행의 '피곤하게 잠이 든 아내를 보니'에서 자신은 아내의 어디를 봤습니다?
'얼굴'을 봤겠지요?
어떤 맘으로 봤습니까? 미안한 마음으로 아내 몰래 아내를 보았지요?
'미안한 마음으로 아내 몰래 아내를 보는 것'은 결국 훔쳐보는 것이지요? 정리해 봅시다.
'피곤하게 잠이 든 아내의 얼굴을 훔쳐보노라면'.
한 행이 너무 긴 것 같지요? 이런 경우에는 시어를 생략하는 방법과 행을 나누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1차적인 것은 시어를 생략하는 것입니다.
우선 '피곤하게'를 생략해 보면 어떨까요?
그렇다면'잠이 든 아내의 얼굴을 훔쳐보노라면'이 되겠지요?
그래도 긴 것 같지요? 이젠 두 행으로 나누어 봅시다.

잠이 든 아내의 얼굴을
훔쳐보노라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3행의 '미안한 마음이 든다.'에서 '미안한 마음'은 어째서 가지게 됐습니까?
가난한 살림에 시달리게 해서 그렇겠지요?
자신만의 일을 위해 아내의 희생을 요구해서 그렇겠지요? 그렇다면 자신은 지금, 마음이 괴롭겠지요?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겠지요?
이것을 '자책'이라 합니다. 이 '자책'을 구체화하면 어떻게 될까요?
자책은 '내가 나를 꾸짖는 것'. 이것을 구체화하면 '내가 나를 물어뜯는다'로 변화를 주어 봅시다. 그렇다면, '나를 물어뜯는 나'로 바꿀 수 있겠지요?
잠이 든 아내의 얼굴을
훔쳐보노라면
나를 물어뜯는 나

4연 아내도 아내만의 하늘을
날고 싶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시에서의 주인공은 '나'인 자신입니다.
아내는 '자신'이 되겠지요? 아내에게 속삭이듯 자신의 생각을 말해 보십시오.
될 수 있는 대로 줄여서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시의 생명은 압축에 있는 지도 모르니까.

당신도 당신만의
하늘을 날고 싶겠지.

이제 하나로 모아 읽어봅시다.

시린 잠 속에서 쫓겨
나와 눈을 떠보니
아내가 접어놓은
학들이 하늘을 난다.

천 마리나 만 마리나
어둠을 헤치며 하늘을 난다.

아내는 왜, 날이면 날마다
학을 접는 것일까.
얼마나 많은 밤을
학은 난 것일까.

잠이 든 아내의 얼굴을
훔쳐보노라면
나를 물어뜯는 나.

당신도 당신만의
하늘을 날고 싶겠지.

퇴고할 것이 있으면 퇴고해 봅시다. 삶과 마찬가지로 시도 언제나 미완성품입니다. 발표한 후에도 맘에 들지 않으면 고쳐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끝나는 날까지.
사람들은 저마다의 하늘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만의 하늘을 고집하는데 있습니다. 우리 함께 손을 모아 빌어 봅시다. 아내의 하늘과 내 하늘이 언제나 함께 푸르기를…….

(2) 유채 밭에서

<대상인식>
유채꽃들이 온 들판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나비들이 여기저기 날아다녔습니다. 너무도 아름다워 가슴이 벅찼습니다.
유채꽃이 방긋 웃고 있는 그 옛날의 소녀 같았습니다.
그래서 유채꽃에게 물었습니다.
'나비가 뭐라고 했기에 그렇게 웃느냐?'
유채꽃은 웃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도 그만 웃고 말았습니다. 아마 자꾸만 불어오는 바람 때문인 것 같지요? 웃고 나니, 나는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졌습니다.
어느 봄날, 차창 밖으로 보이는 유채꽃밭을 보고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서 유채꽃을 의인화하여 상상해 본 것입니다.

< 인식내용 정리>
정리할 때는 시 쓰는 데 필요한 것만을 골라 정리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용이 산만하여 시 쓰기가 어려워집니다.

① 나비가 뭐라 했기에 그렇게 웃느냐고 유채 꽃에게 물었습니다.
② 꽃들은 물어도 물어도 웃기만 했습니다.
③ 그런데 자꾸만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나도 그만 웃어 버렸습니다.
④ 왠지 모르게 부끄러웠습니다.

<구성>
①, ②, ③, ④를 각각 한 연으로 합니다.

나비가 뭐라 했기에 그렇게 웃느냐고
유채꽃에게 물었습니다.

꽃들은 물어도 물어도
웃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자꾸만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나도 그만 웃어 버렸습니다.

왠지 모르게 부끄러웠습니다.

사건의 변화에 따라 연을 구분했습니다.


<형상화, 퇴고>

1연 나비가 뭐라 했기에 그렇게 웃느냐고
유채꽃에게 물었습니다.

꽃에게 직접 묻는 형식으로 다듬어 봅시다. 그렇다면 서정적 자아는 1인칭 '나', 꽃은 2인칭 '너희'가 되겠지요? 물어 보십시오. 왜, 웃느냐고.

나비가 뭐라 했기에
너희는 그렇게 웃는 것이냐.

정리되었지요? 그런데 1행과 2행이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소리내어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음보가 고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균형을 맞추는 것은 시어를 첨가, 생략, 두 개 이상의 시어를 하나로 압축하는 방법 등이 있습니다. 이것이 운율 고르기입니다.

1행에 시어 하나를 첨가하는 것이 좋겠지요? 이 말 저 말을 넣어보는 것은 자신의 자유입니다.
'방금'을 넣으면 어떨까요? 대상인식 내용을 보면, 나비가 날고 있는 것은 현재 상황이니까. 마음에 들면 알맞은 위치에 넣어 정리해 봅시다.

나비가 방금 뭐라 했기에
너희는 그렇게 웃는 것이냐.

2연 꽃들은 물어도 물어도
웃기만 했습니다.

1행의 '꽃들은'은 이미 암시되어 있으니까 생략합시다. 그렇다면, 1행은 '물어도 물어도'.
2행도 1행이 반복법이 사용되었으니까 균형을 맞추기 위해 시어를 반복해 봅시다. '웃기만 하고 웃기만 하고'로 바꾸면 좋을 것 같지요? 이것이 시의 음악성입니다. 시가 노래가 되게 하는 바탕입니다. 이것은 시어 고르기와 운율 고르기에 의한 변화입니다.

물어도 물어도
웃기만 하고 웃기만 하고

그래도 1행과 2행이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지요? 글자수가 고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운율 골라야겠지요? 1행과 2행 중 어느 것을 바꿀까요? 1연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1행을 바꾸어야지요? 2행이 4어절이니까 1행도 4어절로 바꾸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어 보아도 물어 보아도'로 고치면 되겠지요?
물어 보아도 물어 보아도
웃기만 하고 웃기만 하고

3연 그러다가 자꾸만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나도 그만 웃어 버렸습니다.

1행을 형상화하여 봅시다. 바람이 어떻게 불어옵니까? 색깔을 한 번 넣어 볼까요? 이것이 시각적 심상. 유채꽃은 노랗게 피어 있지요?. 자, 바람은 어떤 색깔로 불어옵니까? 노랗게 불어오죠? 정리하면, '노랗게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불어오는'을 '노랗게'와 어울리게 바꿔야겠지요? 그렇다면, '불어오는'도 시각적으로 심상화하여 '번져오는'으로 바꿀 수 있겠지요? 정리해 보면 '노랗게 번져 오는 바람 때문에'.
'때문에'는 다른 시어 바꿀 수 없을까요? 보다 생동감이 있는 시어를 찾아봅시다. '밀려'로 바꾸면 어떨까요? 정리하면, '노랗게 번져오는 바람에 밀려'.
시어를 바꿀 때는 될 수 있으면 동사나 형용사로 바꾸는 연습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시가 생동감이 있습니다.

2행은 그냥 부드러운 어조 '나도 그만 웃고 말았지'로 바꾸면 됩니다.

그런데 자꾸만 노랗게 번져오는 바람에 밀려
나도 그만 웃고 말았지.

역시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젠 1행의 시어를 생략해야겠지요? '그런데'와 '자꾸만'을 생략하면 좋을 것 같지요? 마음으로 읊어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필요 이상의 시어니까.
노랗게 번져오는 바람에 밀려
나도 그만 웃고 말았지.

4연 왠지, 모르게 부끄러웠습니다.

당신은 부끄러우면 어떻게 합니까? '눈을 감지요'. 이것도 구체화. 정리해 봅시다. '왠지, 부끄러워 눈을 감았습니다'. 이젠 어조만 앞 연과 어울리게 맞추면 되겠지요?
왠지, 부끄러워 눈을 감았지.
모아 봅시다.

나비가 방금 뭐라 했기에
너희는 그렇게 웃는 것이냐.

물어 보아도 물어 보아도
웃기만 하고 웃기만 하고

노랗게 번져오는 바람에 밀려
나도 그만 웃고 말았지.

왠지, 부끄러워 눈을 감았지.
노란 색깔이 번지는 화선지 속을 사람 아닌 사람이 되어 거니는 느낌을 주는 시가 되었습니다. 꽃과 나비의 아련한 사랑을 노래한 시.
그것을 훔쳐 본 자신은 이제 열 여섯 살의 소년이 되어 그 옛날의 소녀를 그리워할 수 있습니다.

시의 여행

지금까지 우리는 간단한 차림으로 여행 연습을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조금은 멀고 긴 시의 세계를 찾아가기로 합시다.
당신은 여행자, 나는 안내자입니다. 그래서 모든 설명을 당신 입장에서 하겠습니다.
자, 떠납시다, 시의 여행을. 시의 여행이란 시를 쓰는 과정을 함께 가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시작의 과정을
① 대상인식 ② 인식내용 정리 ③ 구성 ④ 형상화 ⑤ 퇴고,
이렇게 5단계로 나누어 보겠습니다.
이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삶에 정답이 없듯이 시를 쓰는 방법에도 정답이 없습니다. 이 글에서 제시한 것은 나의 해답일 뿐입니다. 언젠가는 당신도 시에 대한 당신만의 해답을 얻을 것입니다.

(3) 돌산 앞 바다에서

<대상인식>
겨울 바다를 찾아갔었습니다. 날씨가 매우 맑고 바람도 불지 않았습니다.
바다 멀리 섬들이 보이고, 섬 기슭 여기저기에 배들이 닻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새들이 바다 밖으로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나도 새들처럼 날고 싶었습니다.
여기까지가 대상 인식하기입니다.
대상인식 내용은 줄거리를 엮어 옮겨야 합니다. 줄거리가 기행문 형식이 되었지요?

<인식내용 정리>
나의 눈에 보이는 대상들 중 필요한 것만을 골라 나열해 봅시다.
이것이 소재 선택입니다. 나의 느낌과 생각을 드러내기에 좋은 소재만 선택하여 나의 질서에 맞게 정리하면 됩니다.
① 잔잔한 바다가 있습니다.
② 멀리 섬들이 보입니다.
③ 섬 기슭 여기저기에 배들이 닻을 내리고 있습니다.
④ 새들이 바다 밖으로 날아갑니다.
⑤ 나도 새처럼 날아가고 싶었습니다.
밑그림은 그려졌습니다. 시상이 엮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눈에 보이는 것을 다 그린 것은 아닙니다. 마음에 집히는 것들만 모은 것입니다.
이것이 소재(글감)의 선택입니다. 자신신의 인상과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소재만을 고른 것입니다.

<구성>
구성하기는 정리된 내용의 순서를 당신의 의도에 따라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그림을 그릴 때, 화가가 그림의 소재들을 자기 의도에 따라 재배치하거나 필요에 의해 소재를 삭제, 첨가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①과 ②를 1연, ③을 두 행으로 나누어 2연, ④를 3연, ⑤를 4연으로 구성해 봅시다.
연을 구분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입니다. 여기에서는 소재와 정서를 기준으로 하여 나누었습니다.

잔잔한 바다가 있습니다.
멀리 섬들이 보입니다.

섬 기슭 여기저기에
배들이 닻을 내리고 있습니다.

새들이 바다 밖으로 날아갑니다.

나도 새처럼 날아가고 싶습니다.
4연으로 구성하였습니다. 1, 2, 3연은 소재에 의해 4연은 정서에 의해 나눈 것입니다.

<형상화>
형상화의 방법은 앞에서 이야기했지만 시어 고르기, 구체화하기, 표현기교 사용하기, 심상화, 음조 고르기 등이 있습니다.
유의할 점은 필요 이상의 형상화는 피해야 좋은 시가 된다는 것입니다.
지나친 형상화는 빈약한 여인이 옷만 잔뜩 껴입은 것과 같습니다.
입을 것은 입고, 벗을 것은 벗어야 여인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1연 잔잔한 바다가 있습니다
멀리 섬들이 보입니다.

두 행을 다시 정리하여 요약할 수는 없을까요?
형상화를 하기 전에 문장을 압축해 보는 것이 기본입니다. 요약해 봅시다.

바다 멀리 섬들이 보입니다.

이제 형상화해 봅시다.
‘섬'은 무엇과 같습니까?
빗대어 보기도 형상화의 한 방법입니다.
‘섬'이 멀리 보이지요? 멀리 보이는 것은 그리움의 속성을 가지고 있지요?
그럼, 지금 당신이 지금, 그리워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고향'
그렇다면 ‘섬'은 무엇처럼 바다 위에 있습니까?
섬은 ‘고향처럼' 바다 위에 있지요?
’섬'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앉아 있습니까? 서 있습니까? '앉아 있죠?'
정리해 봅시다.

멀리 섬들이 바다에
고향처럼 앉아 있습니다.

2연 섬 기슭 여기 저기에
배들이 닻을 내리고 있습니다.

‘배'는 어떤 배일까요?
‘고깃배'
이것은 구체화하기 중, 구체어로 바꾸기를 해 봅시다.
섬 기슭 여기저기에서 고깃배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닻을 내리고' 있지요?
'닻을 내리고' 무엇을 합니까?
그것을 알기 위해 '배'를 다른 대상에 빗어 보면 어떨까요?
빗대어 보기는 형상화의 기본이라고 말했습니다. 빗대어 보기 중에서 대상을 의인화시켜 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고깃배'를 '사람'으로 빗대어 봅시다. 그럼, 고깃배는, 아니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상상력을 펴기 위해 자신의 추억 속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봅시다.
농부들이 점심을 먹은 후에 무엇을 합니까? 낮잠을 자죠?
그렇다면, 지금, 일을 끝낸 고깃배들은 섬 기슭에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낮잠을 자고 있겠죠? 정리해 봅시다.

섬 기슭 여기저기에서
고깃배들이 낮잠을 자고 있습니다.

3연 새들이 바다 밖으로 날아갑니다. ‘새'를 형상화해 봅시다.

새는 어떤 새입니까? 이렇게 묻는 것도 구체화하는 방법입니다.
'갈매기' 갈매기가 몇 마리나 됩니까? 이것 또한 구체화의 방법입니다.
'갈매기 서너 마리'
정리해 봅시다.

다음은 ‘바다'입니다.
‘바다'의 풍경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어떻습니까?
아름답지요.
아름다운 것을 우리는 무엇과 같다고 합니까?
'그림'
이젠 '바다'가 '그림'이 되었습니다. 정리해 봅시다.
갈매기 서너 마리가
그림 밖으로 날아갑니다.

4연 나도 새처럼 날아가고 싶습니다.

이제 ‘새'는 '갈매기'입니다. ’나도 갈매기처럼 날고 싶다,'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것을 더 구체화시킬 수 없을까요?
'갈매기처럼 날고 싶다.'란 말이 나타내는 뜻은 무엇일까요?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말이 아닐까요?
'자유'란 어떤 뜻의 말일까요?
남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는 뜻의 말이지요? 지금, 당신이 자유를 원한다는 것은 구속을 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구속'이라는 말을 구체화하면 '울타리'로 바꿀 수 있겠지요?
울타리가 없으면 자유. 자유로운 삶을 구체화하면 '울타리 없는 삶'이 되겠지요? 어순을 약간만 바꾸어 정리하면 됩니다.

나도 울타리 없는 삶을
갈매기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모아 봅시다.

멀리 섬들이 바다에
고향처럼 앉아 있습니다.

갈매기 서너 마리가
그림 밖으로 날아갑니다.

섬 기슭 여기저기에서
고깃배들이 낮잠을 자고 있습니다.

나도 울타리 없는 삶을
갈매기들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퇴고>
아직 다듬어지지 않았지요? 운율이 너무 불규칙적이고 시행들간의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다듬어 봅시다.

1연 멀리 섬들이 바다에
고향처럼 앉아 있습니다.

퇴고에서 맨 처음 시도해야 하는 것은 압축. 압축할 때는 우선 서술어를 생략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서술어를 생략해 봅시다. 어순이 바꾸어지겠지요?

멀리 섬들이
고향으로 앉은 바다
'고향처럼'을 '고향으로' 바꾸었습니다. 직유가 은유로 바꾼 것입니다. 이런 식의 변화는 형상화와 퇴고 과정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2연 섬 기슭 여기 저기에서
고깃배들이 낮잠을 자고 있습니다.

앞 연에서 '섬'이라는 시어가 사용되었으므로 동어반복을 회피하기 위해 '섬 기슭'을 생략해도 되겠지요?

여기 저기 고깃배들
낮잠을 자는데

3연 갈매기 서너 마리가
그림 밖으로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이것도 어순을 바꾸고 서술어를 생략해 봅시다.

그림 밖으로 날아가는
갈매기 서너 마리

이처럼 어순의 변화는 시의 분위기를 바꾸어 줍니다.
그런데 시를 변화시키는 능력은 시를 쓰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기게 됩니다.
4연 나도 울타리 없는 세상을
갈매기들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이젠 당신의 심정을 갈매기에게 털어놓는 형식으로 고쳐 봅시다.
‘갈매기'는 앞 연에서 사용한 시어이니까 의인화시켜 '너희'로 바꾸면 좋을 것 같지요? 의인화는 자연과의 친근감을 느끼게 해 줍니다.
이것도 동어 반복을 회피하는 방법입니다. ‘나'와 ’너희'가 대비되어 더욱 좋습니다.
나도 울타리 없는 삶을 너희처럼 살고 싶다.

모아 봅시다.

멀리 섬들이
고향으로 앉은 바다

여기 저기 고깃배들
낮잠을 자는데

그림 밖으로 날아가는
갈매기 서너 마리

나도 울타리 없는 삶을
너희처럼 살고 싶다.

그런 대로 맛이 나는 시가 되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시는 쓰고, 고치고 다시 쓰는 과정에서 당신의 상상력이 작용하여 변모하는 것입니다. 이 시의 표현방법은 묘사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1, 2, 3연은 묘사, 4연은 진술입니다. 이처럼 시는 묘사와 진술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서 표현되어야 합니다.

(4) 나의 얼굴은

<대상인식>
직장 선배 되시는 여자 분이 ‘당신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눈은 눈대로, 코는 코대로, 입은 입대로, 귀는 귀대로 모양새가 다 예쁜데…'라는 꼬리 없는 말을 던지고 웃었습니다. 나는 의문에 쌓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여자 분의 말을 되씹어 보면, 그분이 숨겨놓은 꼬리말이 긍정어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나는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봤습니다. 깡마른 얼굴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습니다. 얼굴을 여자 분의 말씀대로 하나하나 뜯어봤습니다. 그래서 얻은 답은 그분이 숨겨놓은 꼬리말이 '당신의 얼굴은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결국에 그분의 맘에 들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사실, 나도 어릴 때부터 어처구니없이 마른 나의 얼굴이 싫었습니다.
버릴 수 있다면 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버릴 수가 없는 것이 얼굴. 이 버릴 수 없는 나의 얼굴이 우리나라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아름답다는 우리나라.
그런데 하나가 되지 못하고 남북이 나누어지고 동서가 갈려 나를 슬프게 하는 우리나라. 그러나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 없는 우리나라와 같다는 생각 말입니다.
나의 직장 선배 되시는 여자 분이 무심코 던진 말이 실마리가 되어 인식한 내용입니다.
나는 그분에게 지금도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나에게 한 편의 시를 선물해 주었으니까.
시의 소재는 이처럼 일상 생활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주위 사람들이 무심코 던지는 말이나 자신이 겪은 일, 우연히 목격한 사건이 시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인식내용 정리>
인식한 내용 중, 필요한 것만 골라 정리해 봅시다.

① 나의 얼굴은 하나하나 뜯어보면 모양새가 다 예쁘다.
② 그런데 전체를 모아 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③ 그래서 나는 나의 얼굴을 버리고만 싶다.
④ 그러나 나는 나의 얼굴을 버릴 수가 없다.
⑤ 그것은 흩어지기만 하는 우리나라와 같다.
내가 겪은 일을 고백하는 형식으로 정리하였습니다.

<구성>
①과 ②를 1연, ③과 ④와 ⑤를 2연으로 구성해 봅시다. 내용에 의해 연이 나눠졌지요.

하나하나 뜯어보면 모양새가 예쁘다는 나의 얼굴은
전체를 모아 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버리고만 싶은 나의 얼굴은
그러나 버릴 수 없는 나의 얼굴은
우리나라와 같다.

간단하지요? 간단한 것도 다듬으면 멋진 시가 될 수 있습니다. 시는 길어야 한다는 선입견에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 속의 평범한 이야기를 시로 옮길 수 있습니다.

<형상화, 퇴고>
시적 자아는 '나'입니다. 나의 마음을 고백적 독백적 진술이 되겠지요?

1연 하나하나 뜯어보면 모양새가 예쁘다는 나의 얼굴은
전체를 모아 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다.

1행이 너무 길지요? 행을 나누어 정리해 봅시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모양새가 예쁘다는
나의 얼굴은

2행의 '전체를 모아 보면'을 구체화하여 봅시다. 얼굴 전체를 모아 보는 방법은 어떤 방법일까요? 거울 속에 모아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럼, 거울 앞에 서 보십시오. 이젠 나의 얼굴이 거울 속에 모아졌습니다. 정리해 봅시다.

거울 속에 모아 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음은 2행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를 구체화하면 어떻게 될까요? '마음'은 추상적인 말이지요? 구체적인 말과 결합시키는 방법도 있습니다.
'마음(추상어)+밖(구체어)=마음 밖'과 같은 식입니다. ‘들지 않는다'도 '마음 밖'과 어울리는 말로 바꿔야겠지요? 보다 생동감이 있는 말 '떠돈다'로 바꾸면 어떨까요?

거울 속에 모아 보면
마음 밖에 떠돈다.

1연 전체를 모아 봅시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모양새가 예쁘다는
나의 얼굴은
거울 속에 모아 보면
마음 밖에 떠돈다.

이젠 2연을 다듬어 봅시다.

그래서 버리고만 싶은 나의 얼굴은
그러나 버릴 수 없는 나의 얼굴은
우리나라와 같다.
1행, 2행의 시어를 1연과 균형이 맞게 행을 나누어야겠지요?

그래서 버리고만 싶은
나의 얼굴은
그러나 버릴 수 없는
나의 얼굴은
우리나라와 같다.

3행의 '우리나라와 같다.'를 형상화하여 봅시다. 당신의 나라를 당신은 무어라고 합니까? 조국이라고 하지요. 그럼, 조국을 생각하면 당신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슬프지요? 그렇다면, '우리 나라'는 당신에게 어떤 조국입니까? '슬픈 조국'이지요?
전체의 주어는 '나의 얼굴은'입니다.
'슬픈 조국'이 서술어가 되어야겠지요? 정리하면 '나의 얼굴은 슬픈 조국과 같다.'로 바꿀 수가 있겠지요? 바꾸어 봅시다.

그래서 버리고만 싶은
나의 얼굴은
그러나 버릴 수 없는
나의 얼굴은
슬픈 조국과 같다.
5행이 문맥에 잘 어우러지지 않는 것 같지요? 서술부를 '슬픈 조국이었다'로 바꾸면 어떨까요? 정리해 봅시다.

그래서 버리고만 싶은
나의 얼굴은
그러나 버릴 수 없는
나의 얼굴은
슬픈 조국이었다.

그래도 이상하지요? 5행에 시어 하나가 빠진 것 같지요? 어떤 시어가 빠졌을까요? 잘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문장은 '나의 얼굴은 ( )에게 슬픈 조국이었다.' 형식으로 바꾸어야 어울립니다. 서정적 자아는 '나'입니다. 누구에게나 슬픈 조국일까요? 시적 자아인 '나에게'만 그렇겠죠?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나의 얼굴은 나에겐 슬픈 조국이었다.

2연을 모아 봅시다.

그래서 버리고만 싶은
나의 얼굴은
그러나 버릴 수 없는
나의 얼굴은
나에겐 슬픈 조국이었다.
전체를 하나로 모아 보면

하나하나 뜯어보면
모양새가 예쁘다는
나의 얼굴은
거울 속에 모아 보면
언제나 마음 밖에 떠돈다.
그래서 버리고만 싶은
나의 얼굴은
그러나 버릴 수 없는
나의 얼굴은
나에겐 슬픈 조국이었다.

나름대로 멋진 시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빗대어 보기와 상상하기에 의한 것입니다.

(5) 풀을 뽑다가

<대상 인식>
대상인식이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어떤 사물, 사건, 사실 등을 그대로보기, 빗대어보기, 상상하여보기를 통해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꽃을 보았을 때, 우리는 눈을 통해 그것을 봅니다. 그리고 느낍니다.
그 다음으로 그 꽃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느낌과 생각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대상 → 봄 → 느낌 → 생각'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이 때 대상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대상 인식하기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대로보기, 빗대어보기, 상상하여 보기를 통해 인식된 것을 될 수 있으면 한편의 짧은 이야기, 한 폭의 그림으로 엮어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시를 쓰면 조금은 쉽게 쓰여지기 때문입니다.
시를 감상할 때도 시를 읽고 한 편의 이야기, 한 폭의 그림으로 꾸며 보는 것이 좋습니다.
어느 여름날이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잔디밭의 풀을 뽑고 있는데, 한 아이가 나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잔디이고, 어떤 것이 잡초래요?'
나는 그만 멍해지고 말았습니다.
아이의 표정을 보면 정말로 알지 못해 묻는 말인 것 같은데 마치 '당신은 잔디입니까? 잡초입니까?' 하고 묻는 것만 같았습니다. 나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자신에게 물어 봤습니다.
'나는 잔디일까? 잡초일까?'
왠지, 부끄러워져 그 학생을 멍하니 쳐다보는데, 그 학생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억지 웃음을 띠고 농담처럼 얼버무려 그 아이에게 대답을 했습니다.
‘너처럼 생긴 것이 잔디이고, 나처럼 생긴 것이 잡초다.’
그러나 나의 가슴속에는 그 질문이 그대로 남아 나를 계속 괴롭혔습니다.
여기까지가 인식하기 즉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을 짧은 이야기로 다듬어 본 것입니다.

< 인식 내용 정리>
다음은 인식된 내용 중, 필요한 것만 골라 순서에 맞게 시상을 엮는 단계입니다.
순서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정하는 순서입니다.
앞뒤의 내용이 이치에 맞게 어우러져야 하겠지요? 그래야 독자가 이해할 수 있으니까.
정리해 봅시다. 인식의 주체는 자신이지요?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자신이 드러내는 것이니까 시적 자아는 당신 곧 '나'가 됩니다.
①잔디밭의 풀을 뽑다가 아이들의 질문에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②'어떤 것이 잔디이고, 어떤 것이 잡초냐'고
③정말로 알지 못해 묻는 것 같은데, '당신은 잔디입니까? 잡초입니까?'
하고 묻는 것만 같아 눈을 감았다.
④그래서 나는 나에게 물어 봤다. '나는 잔디냐, 잡초냐'고.
⑤ 그리고 억지 웃음으로 농담처럼 얼버무려 대답을 했다.
⑥'너희처럼 생긴 것이 잔디이고, 나처럼 생긴 것이 잡초'라고.
⑦그러나 가슴속에는 그 질문이 그대로 남아 나를 괴롭혔다.

이 과정에서도 퇴고는 해야 됩니다.
퇴고는 모든 과정에서 이루어져야 좋은 시가 됩니다.
그리고 이 인식내용 정리에서 주된 표현 방법이 결정됩니다. 묘사가 중심이 되느냐, 진술이 중심이 되느냐가 결정된다는 말입니다. 대상을 인식하는 당신의 태도가 글의 성격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당신의 마음을 고백한 독백적 진술이 중심이 되겠지요?

<구성>
이제 정리한 내용을 요약하여 구성해 봅시다.
이야기라면 줄거리를 그림이라면 밑그림을, 생각이라면 개요를 시의 형식에 맞게 틀을 짜는 것입니다.
이 틀은 하나의 체계와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사건, 의미, 이미지의 변화에 따라 연을 나누고 당신의 호흡에 따라 행을 나누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호흡이란 자신에게 걸맞은 운율을 말합니다.
구성하기 단계에서도 퇴고는 필요합니다.
①을 1연으로, ②와 ③을 2연으로, ④를 3연으로, ⑤와 ⑥을 4연, ⑦을 5연으로 나누어 구성해 봅시다.

잔디밭의 풀을 뽑다가
아이들이 질문에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어느 것이 잔디이고
어느 것이 잡초냐고
정말로 알지 못해 묻는 말인 것 같은데
'당신은 잔디입니까. 잡초입니까.'하고
묻는 것 같아 눈을 감았다.
그래서 내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잔디냐, 잡초냐.'고

그러다가 그놈에게 대답을 했다.
나처럼 생긴 것이 잡초이고
너희처럼 생긴 것이 잡초라고
농담처럼 얼버무려 대답을 했다.

그러나 가슴속에는
그 질문이 그대로 남아 나를 괴롭혔다.

구성하기가 끝났습니다.
인식 내용 정리하기를 자신의 순서에 맞게 연과 행을 구분하여 구성했습니다.
연은 생각의 변화에 따라 나누었습니다.
행은 자신의 호흡에 따라 2음보, 3음보, 4음보로 나누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이 연과 행은 형상화 과정에서 자신의 뜻에 따라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형상화>
형상화란 구성된 내용에 살을 붙이거나 빼어 대상을 실감나게 변화시키는 작업을 말합니다.
형상화 방법에는 ①시어 고르기 ②구체화하기 ③표현기교 사용하기 ④심상화 ⑤운율 고르기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시어 고르기는 문맥상 어울리지 않은 시어를 다른 말로 바꾸는 것과 시어를 첨가, 또는 생략하는 것을 말합니다.
② 구체화하기는 추상적인 시어를 구체적인 시어로 바꾸는 것을 말하는데, 구체어로 바꾸기와 수식어로 꾸미기가 있습니다.
구체어로 바꾸기는 추상어를 구체어로 바꾸는 것을 말하는데, 예를 들면, '과일'을 '사과'나 '복숭아'로 바꾸는 것과 같습니다.
'사과'를 '홍옥'으로 '복숭아'를 '백도'로 더 구체화할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추상적인 문장을 구체적인 행동이 드러나는 문장으로 고치는 것도 여기에 속합니다. 예를 들면 '사랑한다'를 '나는 너에게 한 송이의 장미꽃을 선물하고 싶다.'로 바꾸는 것과 같습니다.
수식어로 꾸미기는 하나의 시어를 보다 구체적으로 만들기 위해 수식어를 덧붙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늘'이란 시어를 '붉게 물드는 하늘'이라고 구체화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때 '붉게 물드는'가 수식어입니다.
③ 표현기교 사용하기는 표현기교를 사용하여 대상을 실감나게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밝게 웃고 있다'를 '함박꽃처럼 웃고 있다'로 바꾸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④ 심상화는 대상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게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마음을 비운다'는 말을 '마음을 발라낸다'로 눈에 보이듯 표현하는 것 등을 말합니다.
⑤ 운율 고르기는 시를 낭송하기에 좋게 운율 맞추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때의 운율은 정형률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가락에 맞추어 낭송하기 좋게 다듬으면 운율이 맞는 것입니다.
위의 방법들이 한꺼번에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의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하면 됩니다.
그리고 이 방법들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고, 서로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 한 시어나 한 시구에 복합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럼, 형상화하여 봅시다.

1연 잔디밭의 풀을 뽑다가
아이들의 질문에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3행의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는 추상적이지요?
추상적인 말로는 대상을 실감할 수가 없습니다.
실감할 수 없다는 것은 감동을 받을 수 없다는 것. 그래서 구체어로 바꿔 감동을 불러 일으켜야 합니다.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는 '하던 일을 멈추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겠지요?
이 말을 구체화하여 '그만 손을 놓아 버렸다.' 고치면 어떨까요?
고치기 전의 말과 고친 후의 말 중, 어느 것이 실감할 수 있습니까?
고친 후의 말이지요. 이것이 추상적인 문장을 구체적인 행동이 나타난 문장으로 바꾸는 구체화하기입니다.

잔디밭의 풀을 뽑다가
아이들의 질문에
그만 손을 놓아 버렸다.

2연 어느 것이 잔디이고
어느 것이 잡초냐는
정말로 알지 못해 묻는 말인 것 같은데
'당신은 잔디입니까. 잡초입니까.' 하고
묻는 것 같아 눈을 감았다.

1행과 2 행은 그대로 두고, 3행은 시행이 1, 2행에 비해 너무 길지요?
그렇다면 압축하여 '정말로 알지 못해 묻는 말이'로 바꾸어 봅시다. 압축하는 것도 형상화의 한 방법인 시어 고르기입니다.
4행은 결국 1, 2행과 반복되므로 생략하여 동어반복 회피해야겠지요?
이것도 시어 고르기입니다.

어느 것이 잔디이고
어느 것이 잡초냐는
정말로 알지 못해 묻는 말이
묻는 것 같아 눈을 감았다.

문맥이 이어지지 않지요? 3행과 4행이 잘 이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4행을 바꿔 문맥을 자연스럽게 이어야겠지요? 바꿔 봅시다.

3행의 '묻는 말이'나 4행의 '묻는 것 같아'는 결국 같은 말이지요?
동어 반복일 때는 둘 중에 하나를 생략하거나, 그 중 하나를 다른 시어로 바꾸는 방법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묻는 것 같아'를 다른 시어로 바꾸어 봅시다.
‘묻는 것 같아'는 아이의 질문이 앞에서 생략한 '당신은 잔디입니까, 잡초입니까?'라고 묻는 것 같아 충격을 받았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겠지요?
'충격'이라는 말은 상황을 설정하여 생각해 보면 '무엇에 얻어맞은 느낌'이라는 뜻.
무엇에 얻어맞았을까요? 망치로. 그렇다면,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느낌'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요? 이것도 구체화하기입니다.
이젠 '묻는 말'이 '망치'의 역할을 하겠지요?
문맥에 맞게 정리해 보면, '정말로 알지 못해 묻는 말(망치)이/ 뒤통수를 치는 바람에 눈을 감았다'로 바꿀 수 있겠지요?

어느 것이 잔디이고
어느 것이 잡초냐는
정말로 알지 못해 묻는 말이
뒤통수를 치는 바람에 눈을 감았다.

4행의 '눈을 감았다'는 '생각한다'는 의미. 좀더 구체화하여 '눈을 감고 하늘을 봤다'로 바꿔 보면 어떨까요? 4행을 다시 정리해 보면, '뒤통수를 치는 바람에 눈을 감고 하늘을 봤다'. 4행이 너무 길지요? 그렇다면, 두 행으로 나누어 봅시다.

어느 것이 잔디이고
어느 것이 잡초냐는
정말로 알지 못해 묻는 말이
뒤통수를 치는 바람에
눈을 감고 하늘을 봤다.

다시 5행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낭독해 보면, 4행의 '뒤통수를 치는 바람에'가 다른 행들과 운율이 어우러지지 않지요? 1행과 2행은 2음보로 어울러졌는데 3행은 3음보인데 4행은 2음보라 어울러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낭송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4행을 3행과 어울리게 3음보로 바꾸어야겠지요? 그렇다면 아이의 질문과 당신이 질문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너무 이질적임을 암시하는 '엉뚱하게'를 첨가하여 '엉뚱하게/ 뒤통수를/ 치는 바람에'로 바꿔 3음보로 맞출 수 있겠지요?
이것이 운율 고르기입니다.

어느 것이 잔디이고
어느 것이 잡초냐는
정말로 알지 못해 묻는 말이
엉뚱하게 뒤통수를 치는 바람에
눈을 감고 하늘을 봤다.

너무 자세하게 설명하여 지루하지요. 그러나 부분 부분을 고칠 때마다 그것을 다시 옮겨 적어 보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옮겨 적는 횟수가 많을수록 시는 더 좋아집니다.
3연 그래서 내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잔디냐, 잡초냐’고

자문하는 형식의 문장으로 바꾸면 더욱 산뜻하겠지요? 그렇다면 1행은 생략하고 2행만을 정리하면 됩니다.

나는 잔디일까, 잡초일까.

4연 그러다가 그놈에게 대답을 했다.
너희처럼 생긴 것이 잔디이고
나처럼 생긴 것이 잔디라고
농담처럼 얼버무려 대답을 했다.

1행과 4행은 의미가 같으니까 한 행을 생략합시다. 둘 중 어느 행을 생략하는 것이 좋을까요? 잘 생각해 보십시오. 문맥상 1행이 생략되어야 합니다. 나머지는 그대로 놓아둡시다. 모든 시구를 형상화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지나친 형상화는 의미 전달에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결정하는 것은 시를 쓰는 바로 자신입니다.

너희처럼 생긴 것이 잔디이고
나처럼 생긴 것이 잡초라고
농담 삼아 얼버무려 대답을 했다.

5연 그러나 가슴속에는
그 질문이 그대로 남아 나를 괴롭혔다

2행의 '질문'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아이의 질문이 자신의 질문으로 바뀌었지요? 자신이 자신에게 하는 '질문'은 '의문'이 되겠지요?
'질문'을 '의문'으로 바꾸어 심상화하여 봅시다.
심상화란 시어를 감각적인 언어로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이미지화’라고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눈과 귀와 혀, 코, 살갗, 즉 오감으로 느낄 수 있게 시어나 시구를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모양의 의문입니까? '의문'을 다른 사물에 빗대어 봅시다. 무엇과 같습니까?
찾아봅시다. 찾을 때에는 먼 곳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서부터 찾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지금 잡초를 뽑고 있습니다. 손끝에 묻어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풀물.
그렇다면, '의문'은 어떤 의문입니까? '손끝에 묻어 오는 풀물 같은 의문'이지요?
문맥에 맞게 행을 구분하여 봅시다.

그러나 가슴속에서는
손끝에 묻어 오는 풀물 같은
의문이 그대로 남아 나를 괴롭혔다.

이것이 시각적 이미지입니다.
이젠 손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십시오? 무슨 냄새가 납니까?
풀냄새.
이것이 후각적 이미지입니다. 내친걸음이니 시각과 후각을 알맞게 조화시켜 봅시다.
손끝에 묻어 오는 것이 풀물입니까, 풀냄새입니까?
풀냄새.
이젠 '손끝에 묻어 오는 풀냄새'로 바꾸면 더욱 멋지겠지요?
시각적인 것이 후각적인 것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정리해 봅시다.

그러나 가슴속에서는
손끝에 묻어 오는 풀냄새 같은
의문이 그대로 남아 나를 괴롭혔다.

이렇게 두 감각을 조화시키는 것을 공감각적 심상이라고 합니다.
이젠 '질문'을 '손끝에 묻어오는 풀냄새 같은 의문'이라고 심상화했으니 '괴롭혔다'도 그 시구와 어울리게 '짙어 온다'로 심상화하면 어떨까요? 정리해 봅시다.

그러나 가슴속에서는
손끝에 묻어 오는 풀냄새 같은
의문이 그대로 남아 짙어 왔다.'

이것을 다시 압축할 수는 없을까요?
1행의 '가슴속에서는'은 3행의 '의문'이라는 시어 속에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의심은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 의문은 가슴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니까.
그렇다면 1행을 생략하여 1행과 2행을 '그러나 손끝에 묻어 오는 풀냄새 같은'으로 줄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손끝에 묻어 오는 풀 냄새 같은
의문이 그대로 남아 짙어 왔다.

문맥이 좀 이상하지요? 다시 한 번 퇴고해 봅시다.
2행의 '그대로 남아'를 다른 시어로 바꿀 수는 없을까요?
앞뒤의 시어를 되새겨 봐야겠지요? '의문'이라는 시어의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의문'은 한 번 하기 시작하면 자꾸만 쌓이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의문은 가슴속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에 '자꾸만 쌓이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바꾸어야겠지요? 그런데 '자꾸만'과 '쌓이는'은 의미의 중복으로 볼 수 있지요? 잘 새겨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둘 중, '자꾸만'을 선택하는 것이 문맥에 맞을 것 같지요?
바꾸어 보면, '의문이 자꾸만 짙어 왔다'. 이것도 시어 고르기입니다.

그러나 손끝에 묻어 오는 풀냄새 같은
의문이 자꾸만 짙어 왔다.

너무 복잡하게 설명한 것 같습니다. 심상화는 처음에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시를 쓰다 보면 앞에서 설명한 것 같은 복잡한 절차가 없이 쉽게 이루어집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시들을 많이 외우고, 시를 많이 써 보면 됩니다.
전체를 하나로 모아 봅시다.

잔디밭의 풀을 뽑다가
아이들의 질문에
그만 손을 놓아 버렸다.

어느 것이 잔디이고
어느 것이 잡초냐는
정말로 알지 못해 묻는 말이
엉뚱하게 뒤통수를 치는 바람에
눈을 감고 하늘을 봤다.

나는 잔디일까, 잡초일까.
너희처럼 생긴 것이 잔디이고
나처럼 생긴 것이 잡초라고
농담 삼아 얼버무려 대답을 했다.

그러나 손끝에 묻어 오는 풀냄새 같은
의문이 자꾸만 짙어 왔다.

<퇴고>
바꿀 시어가 있으면 바꾸고, 연과 행을 재배치하고, 운율을 다시 고르는 단계입니다. 물론 앞의 모든 과정에서도 퇴고는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전체를 하나로 모아 읽어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이 생깁니다. 이런 때는 다시 고쳐야 됩니다.
시작 과정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 과정을 선명히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시는 미묘한 심리적 작용에 의해 쓰여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심상화 과정을 설명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심상화란 시에서 가장 복잡한 심리적 작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위험을 무릅쓰고 설명한 것은 당신의 여행을 돕기 위한 것입니다.
대상인식 과정에서 퇴고 과정까지 모든 내용을 가슴에 적어 두고 수없이 암송해 보십시오. 그렇게 하는 동안 시는 당신의 마음의 소리로 바뀌어 집니다.
전체를 이어서 읽어봅시다. 어딘가 어색하고 낭송하기가 좋지 않을 겁니다. 운율이 고르지 않아 시 전체가 왠지 모르게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고쳐 봅시다.

1연 잔디밭의 풀을 뽑다가
아이들의 질문에
그만 손을 놓아 버렸다.

그대로 두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2연 어느 것이 잔디이고
어느 것이 잡초냐는
정말로 알지 못해 묻는 말이
엉뚱하게 뒤통수를 치는 바람에
눈을 감고 하늘을 봤다.

5행의 운율이 앞의 행과 맞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한 번 읽어보십시오. 그럼, 알 수 있습니다. 3, 4행은 3음보로 읽히는데 5행은 2음보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시어를 첨가하여 운율을 맞추어야겠지요?
어떤 말이 좋을까요? 생각해 봅시다.
5행의 '눈을 감고 하늘을 봤다'는 생각에 잠겼다는 말. 생각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요? 그렇다면,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말 '얼마 동안'을 덧붙여 운율을 골라 봅시다.

어느 것이 잔디이고
어느 것이 잡초냐는
정말로 알지 못해 묻는 말이
엉뚱하게 뒤통수를 치는 바람에
얼마동안 눈을 감고 하늘을 봤다.

3행의 '정말로' 4행의 '엉뚱하게' 5행의 '얼마동안'이 잘 어우러져 3음보의 율격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음보란 낭송할 때, 마디를 주어 읽는 주기를 말합니다.

3연 나는 잔디일까, 잡초일까.

이것은 의문이니까, 생각에 잠겨야 하는 것. '글쎄'라는 말을 덧붙여 잠시 호흡을 고르며 생각에 잠기게 하면 어떨까요?
글쎄, 나는 잔디일까, 잡초일까.

4연 너희처럼 생긴 것이 잔디이고
나처럼 생긴 것이 잡초라고
농담 삼아 얼버무려 대답을 했다.

그대로 두어도 좋을 것 같지요?

5연 그러나 손끝에 묻어 오는 풀 냄새같이
의문이 자꾸만 짙어 왔다.

4연과 5연 사이에 '그러나'를 생략할 수는 없을까요?
시에서는 될 수 있는 대로 접속어를 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4연과 5연을 하나로 합쳐 한 연으로 하는 방법은 어떨까요?
한 번 해 봅시다. 시 전체를 이어서 읽다 보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너희처럼 생긴 것이 잔디이고
나처럼 생긴 것이 잡초라고
농담 삼아 얼버무려 대답했지만
손끝에 묻어 오는 풀 냄새처럼
의문이 자꾸만 짙어왔다.
4연과 5연이 합쳐 4연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지요?
운율이 맞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5행이 다른 행들과 잘 어우러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 5행에 변화를 주어 봅시다. 변화를 주는 방법 중, 제일 먼저 시도해 봐야 하는 것은 문장 성분의 순서를 바꾸어 보는 것입니다.
그럼, 5행의 주어와 서술어의 순서를 바꾸어 봅시다.
'의문이 자꾸만 짙어왔다.'를 '자꾸만 짙어오는 의문'으로 바꿀 수 있겠지요?

하나로 모아 정리해 봅시다.

너희처럼 생긴 것이 잔디이고
나처럼 생긴 것이 잡초라고
농담 삼아 얼버무려 대답했지만
손끝에 묻어 오는 풀 냄새같이
자꾸만 짙어오는 의문

이젠 '풀 냄새같이'를 문맥에 어울리게 '풀 냄새처럼'으로 바꾸면 좋겠지요?

너희처럼 생긴 것이 잔디이고
나처럼 생긴 것이 잡초라고
농담 삼아 얼버무려 대답했지만
손끝에 묻어 오는 풀 냄새처럼
자꾸만 짙어오는 의문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가 또 생겼습니다.
4연으로 끝을 맺으려고 하니 마치 꽁지 없는 새 같은 느낌이 들지요?
'의문'이라는 명사로 매듭을 짓고 보니 아직 완성되지 않는 작품이 된 것 같다는 말입니다. 한 연을 더 만들면 어떨까요?
시를 전체적으로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한 연을 더 만들어도 좋습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 마지막의 시어 '의문'을 구체화하면 한 연을 만들 수 있겠지요? 어떤 의문입니까? 옮겨 봅시다. 답은 이미 3연에 나와 있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옮겨도 좋겠지요?

나는 잔디일까. 잡초일까.

이것을 5연으로 하면 마무리가 될 것 같습니다. 3연의 '나는 잔디일까, 잡초일까.'를 다시 사용하여 반복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전체를 하나로 모아 봅시다.

잔디밭의 풀을 뽑다가
아이들의 질문에
그만 손을 놓아 버렸다.

어느 것이 잔디이고
어느 것이 잡초냐는
정말로 알지 못해 묻는 말이
엉뚱하게 뒤통수를 치는 바람에
얼마동안 눈을 감고 하늘을 봤다.

글쎄, 나는 잔디일까, 잡초일까.

너희처럼 생긴 것이 잔디이고
나처럼 생긴 것이 잡초라고
농담 삼아 얼버무려 대답했지만
손끝에 묻어 오는 풀 냄새처럼
자꾸만 짙어 오는 의문

나는 잔디일까, 잡초일까.

어떻습니까?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쳐 보십시오.
다시 말하지만 시를 쓰는 일은 어떤 규칙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어느 때는 한꺼번에 쓰여지는 경우도 있고, 어떤 때는 수많은 퇴고 과정을 거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단계를 나누어 설명하는 것은 이해를 돕기 위한 것입니다.

(6) 숲 속

잎이 다 진 숲 속, 앙상한 나무들 사이로 낡은 기와집 두어 채가 앉아 있습니다.
낡은 기와집이 무엇처럼 생겼습니까?
먼 옛날의 외갓집.
외갓집이라면, 맨 처음 생각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외할머니.
그렇다면 낡은 기와집은 누구처럼 그 자리에 앉아 있습니까?
외할머니처럼.

위의 내용을 다듬어서 정리해 봅시다.

잎이 다 진 외딴 숲 속에 앙상한 나무들 사이로 낡은 기와집 두어 채가 언제나 그 자리에 외할머니처럼 앉아 있습니다.
'잎이 다 진'과 '앙상한 나무'는 의미 중복으로 봐야겠지요? 둘 중에 하나를 생략해야겠지요? 문맥상 '앙상한 나무'를 생략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잎이 다 진 외딴 숲 속에 낡은 기와집 두어 채가 언제나 그 자리에 외할머니처럼 앉아 있다.

다시 한 번 다듬어서 행과 연만 구분하면 시가 됩니다.

잎이 다 진 외딴 숲 속
낡은 기와집 두어 채

언제나 그 자리에
외할머니처럼 앉아 있다.

시는 이렇게 쓰여지는 것입니다. 절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어디서나 가슴 안겨 오는 풍경이 있다면 화가가 그것을 그림으로 그리듯 당신도 그것을 한 편의 시로 옮길 수 있습니다.
표현기교는 직유법, 표현방법은 서경적 묘사, 눈이 보이는 모습을 그림을 그리듯 옮겨 놓은 것입니다.
(7) 바람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을 떠났습니다. 그 사람이 비워 놓은 자리는 점점 넓어만 갑니다.
지금, 당신의 심정은 어떻습니까? 당신이 느끼고 생각한 것을 옮겨 보십시오.
그 사람이 떠난 후, 나는 울고 싶었다. 이것저것 모두 다 흩어 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어디론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무작정 떠나고 싶었다.
이것은 당신의 마음을 그대로 쏟아 놓은 것입니다. 될 수 있으면 간단하게 다듬어서 시를 만들어 봅시다.

울고 싶었다.
모두 흩어 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어디론지
무작정 떠나고 싶었다.

이 시는 제목만 내용에 걸맞게 붙이면 멋진 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럼, 제목을 붙여 봅시다.
이 시의 내용은 무엇의 속성과 비슷할까요? 울고 싶을 때 울고, 흩어 버리고 싶을 때 흩어 버리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는 것.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람. 좋습니다. 제목은 '바람'입니다. 표현기교는 열거법, 표현방법은 당신의 마음을 고백한 독백적 진술입니다.

(8) 불꽃놀이

만약, 당신이 죽어 장례를 치른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매장, 화장 풍장, 수장, 조장 중, 어느 것이 더 좋을까요? 매장은 흙이 되는 것. 화장은 불꽃이 되는 것. 풍장은 바람이 되는 것. 수장은 물이 되는 것. 조장은 새가 되는 것.
이 세상을 떠나는 당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당신은 살아온 만큼 죽어왔습니다. 지금은 모든 것 다 두고 떠나는 시간입니다.
그렇게도 아끼던 몸을 버려야 하는 시간입니다. 어떻게 당신의 몸을 버리겠습니까? 매장, 화장, 풍장, 수장, 조장 중 어느 것을 고르겠습니까? 화장.
화장입니까?
화장이라면 왜, 그렇습니까?
한 번만이라도 불처럼 타고 싶어서.
이렇게 질문과 답을 고리처럼 이어가면 하나의 시상이 떠오릅니다.
여기까지가 인식하기. 그럼, 아들에게 유언을 한 번 해 보십시오.
고칠 것은 고치고, 바꿀 것은 바꿔서 멋지게.
나, 죽으면 내 몸에 불을 붙여 불꽃놀이를 하여 다오.
한 번만이라도 불처럼 타고 싶구나.
'화장'을 '불꽃놀이'에 빗대었습니다. 멋진 상상이지요? 시로 다듬어 봅시다.
나, 죽으면
내 몸에 불을 붙여
불꽃놀이를 하라.

한 번만이라도
불처럼 타고 싶구나.

마음에 들지 않지요?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갈고 닦으면 좋은 시가 될 수 있습니다. 직관은 순간적이지만 시를 다듬는 일은 많은 시간이 걸릴수록 좋습니다. 쓰고, 지우고, 고치고, 다시 쓰노라면 시를 쓰는 방법이 익숙해져 퇴고가 쉽게 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시가 완성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퇴고 과정에서 가장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동어 반복이나 의미 중복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의도적인 반복이 아니라면 동어 반복이나 의미 중복은 독자를 지루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불꽃놀이를 하라'와 '불처럼 타고 싶구나'는 동어 반복으로 봐야 하겠지요? 그럼 둘 중에 하나를 생략하거나 바꿔야겠지요? 그러나 문맥상 생략하는 것은 무리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뒤의 '불처럼 타고 싶구나'를 다른 시어로 바꿔 봅시다. 이 말은 '세상을 밝히고 싶다'는 말이 아닐까요? 세상을 밝히려면 '빛'이 되어야겠지요? 그렇다면 '세상의 빛이 되고 싶구나'로 바꾸면 어떨까요?

나. 죽으면
내 몸에 불을 붙여
불꽃놀이를 하라.

한번만이라도
세상의 빛이 되고 싶구나.

어떻습니까? 좋은 유언이 되지 않겠습니까? 온통 무덤의 천국이 되어 가는 이 세상에 빛이 되는 말씀이 아닙니까?
삶과 죽음은 가장 가까운 친구. 삶 속에서 죽음을 볼 수 있어야 참된 삶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참된 삶과 값진 삶, 이 둘 중에 당신은 어떤 삶을 선택하겠습니까? 참된 삶은 가치 이전의 삶이고, 값진 삶은 가치 이후의 삶입니다.

(9) 산

이른 아침 산 속을 걷고 있습니다. 풀잎에 맺힌 이슬이 눈을 반짝입니다.
이름 모를 꽃들이 여기 저기 피어 있습니다. 산모퉁이를 돌아드니, 피 토하듯 피어 있는 엉겅퀴꽃이 가슴에 찍혀 옵니다.
자, 이젠 상상의 세계를 펼쳐 봅시다. 상상의 뇌관은 질문이라 했지요? 그럼, 물어 봅시다, 당신이 당신에게.
'저 맑은 이슬 속을 보면 무엇이 있을까?'
'한 송이의 엉겅퀴꽃'
'꽃이 있다면 무엇이 날아올까?'
'나비 한 마리'
'그들은 그 속에서 무엇을 할까?'
'사랑.'
'그러면 이슬은 어떻게 될까?'
'강물로 굴러 떨어진다.'
'그렇다면 엉겅퀴꽃과 나비는 어떻게 될까?'
'그것들도 강물 속으로 굴러 떨어진다.'
내용 간추려 정리해 봅시다.
풀잎에 맺힌 이슬 속에서 엉겅퀴 한 송이와 나비 한 마리가 사랑을 하다가 강물 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다시 한 번 다듬어 봅시다. 이것이 재정리. 재정리를 많이 할수록 시는 좋아집니다.
'사랑하다가'를 '별을 따다가'로 바꾸면 어떨까요?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는 속담을 생각하면 금방 이해가 되지요?
보다 구체화되었지요? '굴러 떨어졌다'의 주체가 '이슬'이 아니라 '엉겅퀴꽃'과 '나비'이니까 '빠져 버렸다'로 고치는 것이 알맞겠지요?
정리해 봅시다. 풀잎에 맺힌 이슬 속에서 엉겅퀴 꽃 한 송이와 나비 한 마리가 별을 따다가 강물에 빠져 버렸습니다. 다듬어서 행과 연을 구분해 봅시다.

풀잎에 맺힌
이슬 속

엉겅퀴 꽃 하나
나비 한 마리

별을 따다
강물에 빠져 버렸다.
표현방법은 묘사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마음속에 그려진 아련한 풍경. 이것이 심상적 묘사입니다.

(10) 섬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까치가 울었습니다.
당신은 까치 소리를 듣겠습니까, 듣지 않겠습니까?
까치는 손님이 올 것을 미리 알려 주는 새. 당신은 지금, 기다리는 사람이 없지요?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 버렸으니까. 그렇다면, 까치 소리를 듣고 싶지 않겠지요?
다시 한 번 물어 봅시다.
오늘 아침 까치가 울었습니다. 당신은 까치 소리를 듣겠습니까, 듣지 않겠습니까?
듣지 않는다. 왜, 듣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이 떠나 버려서 기다리는 사람이 없으니까.
당신의 애인에게 고백하는 형식으로 정리해야겠지요?
오늘 아침 까치가 울었습니다. 나, 그 소리 듣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떠나 버렸는데 누구를 기다리며 살겠습니까?
다듬어서 틀을 짜 봅시다.

오늘 아침, 까치가 울었습니다.
나, 그 소리 듣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떠나 버렸는데
누구를 기다리며 살겠습니까.

2연의 '당신이 떠나 버렸는데'를 구체화하여 봅시다. 당신이 떠나 서정적 자아인 '나'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 외로움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구체화한다면 무엇이 좋을까요? 섬. 정리하면 '당신이 떠나 섬이 되었는데'.
1연이 높임말을 사용했으니까 어조를 고르기 위해 '당신이 계시지 않아 섬이 되었는데'로 다시 바꾸어야겠지요?

오늘 아침 , 까치가 울었습니다.
나, 그 소리 듣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계시지 않아 섬이 되었는데
누구를 기다리며 살겠습니까.
- 섬. 29 -

들리는 소리를 듣지 않는다는 역설, 이 속에 간곡한 사랑의 고백이 숨겨 있습니다. 떠난 임을 잊지 못하는 마음. 그래서 사랑은 병이면서 약. 아, 사랑이여, 너는 우리의 희망, 우리의 절망. 그래도 우리는 희망과 절망을 반죽하여 사랑을 빚으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삶이니까. 표현방법은 독백적 진술입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그대로 보기와 빗대어 보기를 바탕으로 하여 한 편의 이야기를 엮어 보거나, 한 폭의 그림을 그려보거나, 한 묶음의 생각을 털어놓는 연습을 해 봅시다. 이것이 상상하여 보기, 시라는 열매를 맺게 하는 꽃을 피우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바탕으로 짧은 시를 써 봅시다.
이제, 상상력이라는 카메라 하나 짊어지고, 무지개 빛 마음이 머무는 곳에 렌즈를 대고 사진을 찍어 봅시다. 무지개 빛 마음이란 아름다운 마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지개에는 수많은 삶의 빛깔들이 굴절되어 있습니다. 삶의 기쁨, 슬픔, 즐거움, 사랑, 미움, 아픔, 분노 등 모든 빛깔들이 스며 있습니다. 그래서 무지개 빛 마음은 슬픔을 슬픔으로, 기쁨을 기쁨으로 느낄 수 있게 하는 마음입니다.
렌즈는 대상을 보는 당신의 눈, 즉 심미안을 말합니다. 필름은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 굴절되는 대로 사진을 찍으면 됩니다. 마음의 굴절은 그대로 보기, 빗대어 보기, 상상하여 보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대상인식입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마음의 굴절을 이루게 하는 직관입니다. 직관은 대상에 대해 순간적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직관이 시의 씨앗입니다. 그 씨앗이 트면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 다시 더욱 살진 씨앗으로 돌아갑니다. 이 씨앗도 잘 정리하면 짧고 좋은 시가 될 수 있습니다.
직관의 주체, 즉 인식의 주체는 누구일까요? 꽃이 웃고 있다면, 누구를 보고 웃을까요? 새가 울고 있다면, 누구를 보고 울까요? 바로 당신입니다. 바람이 불어옵니다. 누구에게 불어오는 걸까요? 바로 당신입니다. 모든 인식의 주체는 바로 당신입니다. 이때의 당신이 시적 자아입니다.
걸음을 옮깁시다, 그러나 서두르지 말고. 지금부터 당신은 만나는 대상에 대해 순간적으로 느끼고, 생각한 바를 정리하는 연습을 해 보는 것입니다. 시의 씨앗, 즉 직관을 모아 보자는 것입니다.

다음은 상상하여 보기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 분별력이 생기면서부터 만나는 대상에 대해 호기심을 가집니다. 이 호기심이 상상의 시작입니다. 이 호기심은 만나는 대상에 대한 많은 의문을 낳습니다.
의심이 아닙니다. 의심은 죄악을 낳지만, 의문은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해 줍니다. 머리 속에 물음표가 들어가면 의심이 되지만, 가슴속에 들어가면 의문이 됩니다. 그 의문에 대한 답이 상상입니다. 그 의문이 꼬리를 물면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나타납니다.
상상하여 보기 방법은 질문을 통한 상상하기와 경험을 되살려 상상하기가 있습니다. 질문을 통한 상상하기는 대상에 대한 질문을 통해 얻은 답을 바탕으로 하여 상상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고, 경험을 되살려 상상하기는 인식한 대상에 경험 속의 상황이나 사물을 결합하여 상상의 세계를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질문을 통한 상상하기를 해 봅시다.
'들판이 화선지라면, 당신은 그것으로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그리려면 당신은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붓.'
당신은 붓이 되었습니다. 붓이 되었으면, 그림을 그려야 되겠지요?
'붓으로 무엇을 그리겠습니까?'
'고향.'
이것이 질문을 통한 상상하기. 그런데 모든 질문과 답은 당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경험은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똑같은 해를 보고 살면서도 햇빛을 받고 사는 사람이 있고, 햇볕을 쬐고 사는 사람이 있고, 햇살을 맞고 사는 사람이 있듯이 경험은 그에게 주어진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질문과 답도 이 경험에 따라 달라져서 상상의 세계도 시인에 따라 다르게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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