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법
역설은 논리적 모순을 지닌 진술이다. 말하자면 비합리적인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침묵의 함성'이 '사랑의 증오'니 '군중 속의 고독'이니 하는 등의 소위 모순어법(oxymoron)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된다. 그런데 이 역설은 겉으로 보기엔 자가당착(自家撞着)의 모순을 지닌 언술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물의 핵심을 짚어 의표를 찌르는 함축된 발언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역설을 '모순되는 두 사실의 대응을 통해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거나 깨달음을 계시하는 방법'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특히 시에서는 이 역설적 발언이 널리 원용되고 있다. C. Brooks는 현대시의 구조를 아예 '역설(paradox)'로 파악하기도 한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서정주 <국화 옆에서> 부분
이 시의 진술 내용을 요약하면 소쩍새 울음소리와 천둥이 국화꽃을 피게 했다는 것이다. 어찌하여 소쩍새와 천둥이 국화꽃을 피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역설이다. 그러나 이 언술의 모순적인 표층 구조와는 달리 속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게 된다. 한 생명체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실로 얼마나 많은 사물들의 총체적인 협조를 필요로 하는가. 빛과 공기와 물과 그리고 여러 가지 영양소들--다른 생명체들로부터 받은 수많은 유기물들의 섭취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래서 하나의 생명체는 전 우주적 요소들의 결집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또한 한 생명체(국화)의 원숙한 성취(꽃)는 긴 세월(봄, 여름) 동안의 많은 고뇌(소쩍새 울음)와 시련(천둥)을 거쳐 이루어진다는 의미도 읽어낼 수 있다. 이처럼 심오한 자연의 이치가 짧은 몇 마디의 역설적 진술 속에 담겨 있다. 이것이 시의 묘미다. 만일 이를 산문으로 설명코자 한다면 수 천 개의 단어를 동원해도 만족스럽게 표현키 어려울 지 모른다.
타고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한용운 <알 수 없어요> 부분
기름이 타서 재가 된다. 그런데 그 재가 다시 기름이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이 역설은 화자의 치열한 심리를 절실하게 표현하는 기능을 지닌다.
즉 끝없이 불타는 가슴을 처절히 극대화하고 있다. 기름이 재가 되고 재가 다시 기름이 되어 타는 반복적 소진(燒盡)을 통해 생명의 완전 연소(燃燒)를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애타는 가슴의 그 절박함을 이보다 어떻게 더 절실히 표현해낼 수 있겠는가. 이것이 역설의 기능이다. 고도(高度)의 은유(隱喩)도 역설의 기능을 지닌다.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 <절정> 부분
주지(겨울)와 매체(강철로 된 무지개)가 주술(主述) 관계 곧 등가(等價)의 구조로 이루어진 은유다. 그런데 주지와 매체의 공유소(동일성)는 추출하기가 어렵다. 말하자면 주지와 매체가 동일성이나 어떤 유사성에 의해 결합된 것이 아니라, 시인이 의도적(폭력적)으로 결합시킨 고도의 비유다. 매체인 '강철로 된 무지개' 역시 '강철의 무지개'와 같은 의미 구조를 지닌 것이니까 수식어와 피수식어어의 관계로 맺어진 결속의 은유 구조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시구는 이중으로 된 복합 은유 구조를 지닌 셈이다.
겨울이 무지개라든지, 그 무지개가 강철로 되었다는 진술이 다 논리적인 설명이 가능하지 않는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두 개의 역설을 이중으로 얽어 짠 문장이다. 또한 '겨울'은 시적 화자가 살고 있는 당대의 괴로운 시대를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시적 화자가 살고 있는 시대(겨울)는 화자의 의지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강철)이긴 하지만, 생각하면 인생이란 덧없이 사라져 가는 것(무지개)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라는 체념으로 해석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와우(蝸牛)라는 자는/ 호리병 하나만 차고/ 산하를 흘러다니고 있다/
시장하면 병을 기울여/ 술로 목을 적시고/ 졸리면 병 속에 기어들어/
잠을 잔다/ 그 작은 병 속에 어떻게 들어간단 말인가/
그런데 병 속엔 혼자만이 아니라는 소문도 있다/ 허기사/
마셔도 마셔도 바닥이 나지 않는 걸 보면/ 그 속에 누가 들어앉아서/
노상 술을 빚어대고 있는 모양이다. - <병(甁)> -
선시(仙詩) 중의 하나다.
차고 다닌 호리병 속에 들어가 잠을 자기도 하는데, 그 속에는 누군가 들어앉아서 술을 빚어대고 있다는 얘기다. 그야말로 기상천외의 정황이다. 역설 중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인생에서의 시급한 과제는 의식주의 문제다. 그 가운데서도 먹을 것과 거처할 곳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닌가. 그리고 또한 소중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는 일이다. 달팽이처럼 가벼운 집을 달고, 좋아하는 음식과 사랑을 데불고 유유자적 떠도는 삶을 상상해 보라. 이 얼마나 아름답고 멋스러운 삶인가.
그러나 이것은 현실적으로는 실현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을 역설적으로 실현시킨 것이 <병>이다. 선시(仙詩)는 실현시킬 수 없는 지상의 욕망을 역설적으로 실현시킨 꿈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가 우리들의 꿈의 기록이라면 그리고 그 꿈이 성취되기 어려운 것이라면 시가 당연히 역설일 수밖에 없을 것이 아니겠는가.
역설은 표면적으로는 모순이 되는 것 같지만, 그 진술 속에 보다 강한 진실이 숨겨 있는 표현 기교이다. 이 표현법은 독자에게 경이로움과 신선함을 주어 감동을 불러일으켜 준다.
형님, 왜 이러십니까.
무엇 때문에 알 수 없는 그림 그려 놓고
그림 속의 떡만 먹어라 하십니까.
모두가 제 그림자 끌며 사는 것인데
어쩌자고 내 꿈속까지 찾아와서
당신의 노래만 불러라 하십니까.
꽁보리밥을 먹어도 금똥만 싼다는 형님
당신만 살지 말고 나도 좀 삽시다.
당신은 당신 눈으로 당신의 세상을 보고
나는 나의 눈으로 나의 세상을 보며
제 노래 부르며 살다 갑시다.
금똥을 싸든, 보리똥을 싸든
모두가 제 그림 그리며 사는 것이
인생 아닙니까. - 형님, 왜 이러십니까 -
'형님'은 어떤 형님일까요? 3연의 '꽁보리밥을 먹어도 금똥만 싼다는 형님'. 금밥을 먹으면 금똥을 싸고, 보리밥을 먹으면 보리똥을 싸야 하는 것이 바른 이치. 그런데 시인은 억지 소리로 '꽁보리밥'을 먹어도 '금똥만 싼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이것은 억지 소리가 아니라 형님을 강하게 비난하고 있는 말이다. 이것이 역설. 비논리적인 진술로 보다 강한 의미를 부여하는 표현기교이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동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는 만큼 타락하지 못하고
날이 갈수록 맑아만 가는
그들의 눈동자에 비치는
무너져 버린 나를 보았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하지 못하기에
거짓말에 시달려야 하는
그들만의 아픔
날마다 메말라 가는 그들 앞에 서면
나의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
나를 속여야 하는
내가 슬프기 때문이다.
-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
처음부터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다. 거짓말을 하는 이유가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동자를 보았기 때문'이라는 말은 억지다.
그러나 그렇게 표현함으로써 거짓말을 하고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슬픔, 분노, 아픔을 역설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우리는 억지소리를 들었을 때, 기가 막힌다고 합니다. 이 기가 막힌 마음을 표현하는데는 역설이 좋다.
길은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갈 곳이 없었다.
찾으면 찾을수록 더욱 엉키는 길목에서
나는 거미줄에 잡힌 잠자리
몸부림을 치다 지쳐 버렸다.
눈을 감았다.
하늘은 온통 먹구름으로 가리어지고
나는 거대한 거미에게
조금씩 먹히고 있었다.
이젠 내가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내가 없었다.
그러다가 어디선가
또 하나의 내가 태어나고 있었다.
저 먼 보물섬
절름발이 선장의 어깨 위에서
앵무새로 태어나는 내가 있었다.
나를 죽이고 태어나는 내가 있었다. - 자화상 -
'찾으면 찾을수록 더욱 엉키는 길목'은 논리적으로 모순이 된다. 그러나 자아의 참모습을 찾고자 하나 자꾸만 어그러지는 상황을 엿보게 한다.
'나를 죽이고 태어나는 나'도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도 자기 참모습을 잃어버린 자아의 슬픔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놓은 것이다. 이렇게 역설은 논리적으로 모순이 되는 표현이지만 그 속에 더욱 절실한 진실이 숨어져 있다.
네가 울던 곳에 앉아
너의 울음을 울어 본다.
바위는 여전히 말이 없고
거품을 물고 흐르는 강물들
친구야, 강물은
정말로 바다로 가는 것이냐.
강둑 따라 너의 길을 더듬어 가면
온몸에 박혀 오는 도둑놈 가시
무더기로 피어나는 들꽃을
가슴에 담을 수가 없구나.
너는 가고 나는 남았는데
너는 있고 나는 없어
하늘을 차마 볼 수가 없구나.
- 강가에서 -
여기에서 ‘너’는 ‘진실하게 살다간 사람’, ‘나’는 ‘거짓되게 아직도 살아 남은 사람'을 뜻한다.
그래서 '너는 가고 나는 남았는데/ 너는 있고 나는 없어'라는 역설이 빗어지는 것이다.
역설은 논리적 모순을 지닌 진술이다. 말하자면 비합리적인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침묵의 함성'이 '사랑의 증오'니 '군중 속의 고독'이니 하는 등의 소위 모순어법(oxymoron)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된다. 그런데 이 역설은 겉으로 보기엔 자가당착(自家撞着)의 모순을 지닌 언술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물의 핵심을 짚어 의표를 찌르는 함축된 발언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역설을 '모순되는 두 사실의 대응을 통해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거나 깨달음을 계시하는 방법'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특히 시에서는 이 역설적 발언이 널리 원용되고 있다. C. Brooks는 현대시의 구조를 아예 '역설(paradox)'로 파악하기도 한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서정주 <국화 옆에서> 부분
이 시의 진술 내용을 요약하면 소쩍새 울음소리와 천둥이 국화꽃을 피게 했다는 것이다. 어찌하여 소쩍새와 천둥이 국화꽃을 피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역설이다. 그러나 이 언술의 모순적인 표층 구조와는 달리 속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게 된다. 한 생명체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실로 얼마나 많은 사물들의 총체적인 협조를 필요로 하는가. 빛과 공기와 물과 그리고 여러 가지 영양소들--다른 생명체들로부터 받은 수많은 유기물들의 섭취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래서 하나의 생명체는 전 우주적 요소들의 결집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또한 한 생명체(국화)의 원숙한 성취(꽃)는 긴 세월(봄, 여름) 동안의 많은 고뇌(소쩍새 울음)와 시련(천둥)을 거쳐 이루어진다는 의미도 읽어낼 수 있다. 이처럼 심오한 자연의 이치가 짧은 몇 마디의 역설적 진술 속에 담겨 있다. 이것이 시의 묘미다. 만일 이를 산문으로 설명코자 한다면 수 천 개의 단어를 동원해도 만족스럽게 표현키 어려울 지 모른다.
타고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한용운 <알 수 없어요> 부분
기름이 타서 재가 된다. 그런데 그 재가 다시 기름이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이 역설은 화자의 치열한 심리를 절실하게 표현하는 기능을 지닌다.
즉 끝없이 불타는 가슴을 처절히 극대화하고 있다. 기름이 재가 되고 재가 다시 기름이 되어 타는 반복적 소진(燒盡)을 통해 생명의 완전 연소(燃燒)를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애타는 가슴의 그 절박함을 이보다 어떻게 더 절실히 표현해낼 수 있겠는가. 이것이 역설의 기능이다. 고도(高度)의 은유(隱喩)도 역설의 기능을 지닌다.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 <절정> 부분
주지(겨울)와 매체(강철로 된 무지개)가 주술(主述) 관계 곧 등가(等價)의 구조로 이루어진 은유다. 그런데 주지와 매체의 공유소(동일성)는 추출하기가 어렵다. 말하자면 주지와 매체가 동일성이나 어떤 유사성에 의해 결합된 것이 아니라, 시인이 의도적(폭력적)으로 결합시킨 고도의 비유다. 매체인 '강철로 된 무지개' 역시 '강철의 무지개'와 같은 의미 구조를 지닌 것이니까 수식어와 피수식어어의 관계로 맺어진 결속의 은유 구조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시구는 이중으로 된 복합 은유 구조를 지닌 셈이다.
겨울이 무지개라든지, 그 무지개가 강철로 되었다는 진술이 다 논리적인 설명이 가능하지 않는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두 개의 역설을 이중으로 얽어 짠 문장이다. 또한 '겨울'은 시적 화자가 살고 있는 당대의 괴로운 시대를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시적 화자가 살고 있는 시대(겨울)는 화자의 의지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강철)이긴 하지만, 생각하면 인생이란 덧없이 사라져 가는 것(무지개)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라는 체념으로 해석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와우(蝸牛)라는 자는/ 호리병 하나만 차고/ 산하를 흘러다니고 있다/
시장하면 병을 기울여/ 술로 목을 적시고/ 졸리면 병 속에 기어들어/
잠을 잔다/ 그 작은 병 속에 어떻게 들어간단 말인가/
그런데 병 속엔 혼자만이 아니라는 소문도 있다/ 허기사/
마셔도 마셔도 바닥이 나지 않는 걸 보면/ 그 속에 누가 들어앉아서/
노상 술을 빚어대고 있는 모양이다. - <병(甁)> -
선시(仙詩) 중의 하나다.
차고 다닌 호리병 속에 들어가 잠을 자기도 하는데, 그 속에는 누군가 들어앉아서 술을 빚어대고 있다는 얘기다. 그야말로 기상천외의 정황이다. 역설 중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인생에서의 시급한 과제는 의식주의 문제다. 그 가운데서도 먹을 것과 거처할 곳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닌가. 그리고 또한 소중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는 일이다. 달팽이처럼 가벼운 집을 달고, 좋아하는 음식과 사랑을 데불고 유유자적 떠도는 삶을 상상해 보라. 이 얼마나 아름답고 멋스러운 삶인가.
그러나 이것은 현실적으로는 실현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을 역설적으로 실현시킨 것이 <병>이다. 선시(仙詩)는 실현시킬 수 없는 지상의 욕망을 역설적으로 실현시킨 꿈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가 우리들의 꿈의 기록이라면 그리고 그 꿈이 성취되기 어려운 것이라면 시가 당연히 역설일 수밖에 없을 것이 아니겠는가.
역설은 표면적으로는 모순이 되는 것 같지만, 그 진술 속에 보다 강한 진실이 숨겨 있는 표현 기교이다. 이 표현법은 독자에게 경이로움과 신선함을 주어 감동을 불러일으켜 준다.
형님, 왜 이러십니까.
무엇 때문에 알 수 없는 그림 그려 놓고
그림 속의 떡만 먹어라 하십니까.
모두가 제 그림자 끌며 사는 것인데
어쩌자고 내 꿈속까지 찾아와서
당신의 노래만 불러라 하십니까.
꽁보리밥을 먹어도 금똥만 싼다는 형님
당신만 살지 말고 나도 좀 삽시다.
당신은 당신 눈으로 당신의 세상을 보고
나는 나의 눈으로 나의 세상을 보며
제 노래 부르며 살다 갑시다.
금똥을 싸든, 보리똥을 싸든
모두가 제 그림 그리며 사는 것이
인생 아닙니까. - 형님, 왜 이러십니까 -
'형님'은 어떤 형님일까요? 3연의 '꽁보리밥을 먹어도 금똥만 싼다는 형님'. 금밥을 먹으면 금똥을 싸고, 보리밥을 먹으면 보리똥을 싸야 하는 것이 바른 이치. 그런데 시인은 억지 소리로 '꽁보리밥'을 먹어도 '금똥만 싼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이것은 억지 소리가 아니라 형님을 강하게 비난하고 있는 말이다. 이것이 역설. 비논리적인 진술로 보다 강한 의미를 부여하는 표현기교이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동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는 만큼 타락하지 못하고
날이 갈수록 맑아만 가는
그들의 눈동자에 비치는
무너져 버린 나를 보았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하지 못하기에
거짓말에 시달려야 하는
그들만의 아픔
날마다 메말라 가는 그들 앞에 서면
나의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
나를 속여야 하는
내가 슬프기 때문이다.
-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
처음부터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다. 거짓말을 하는 이유가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동자를 보았기 때문'이라는 말은 억지다.
그러나 그렇게 표현함으로써 거짓말을 하고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슬픔, 분노, 아픔을 역설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우리는 억지소리를 들었을 때, 기가 막힌다고 합니다. 이 기가 막힌 마음을 표현하는데는 역설이 좋다.
길은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갈 곳이 없었다.
찾으면 찾을수록 더욱 엉키는 길목에서
나는 거미줄에 잡힌 잠자리
몸부림을 치다 지쳐 버렸다.
눈을 감았다.
하늘은 온통 먹구름으로 가리어지고
나는 거대한 거미에게
조금씩 먹히고 있었다.
이젠 내가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내가 없었다.
그러다가 어디선가
또 하나의 내가 태어나고 있었다.
저 먼 보물섬
절름발이 선장의 어깨 위에서
앵무새로 태어나는 내가 있었다.
나를 죽이고 태어나는 내가 있었다. - 자화상 -
'찾으면 찾을수록 더욱 엉키는 길목'은 논리적으로 모순이 된다. 그러나 자아의 참모습을 찾고자 하나 자꾸만 어그러지는 상황을 엿보게 한다.
'나를 죽이고 태어나는 나'도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도 자기 참모습을 잃어버린 자아의 슬픔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놓은 것이다. 이렇게 역설은 논리적으로 모순이 되는 표현이지만 그 속에 더욱 절실한 진실이 숨어져 있다.
네가 울던 곳에 앉아
너의 울음을 울어 본다.
바위는 여전히 말이 없고
거품을 물고 흐르는 강물들
친구야, 강물은
정말로 바다로 가는 것이냐.
강둑 따라 너의 길을 더듬어 가면
온몸에 박혀 오는 도둑놈 가시
무더기로 피어나는 들꽃을
가슴에 담을 수가 없구나.
너는 가고 나는 남았는데
너는 있고 나는 없어
하늘을 차마 볼 수가 없구나.
- 강가에서 -
여기에서 ‘너’는 ‘진실하게 살다간 사람’, ‘나’는 ‘거짓되게 아직도 살아 남은 사람'을 뜻한다.
그래서 '너는 가고 나는 남았는데/ 너는 있고 나는 없어'라는 역설이 빗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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