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를 이루는 내용
1. 시어(詩語)
시가 오늘날까지 문학의 장르 중에서 가장 으뜸의 자리에 있는 것은 시가 가진 특성 때문인지 모른다. 한 편의 시는 짧은 시 형태에서 언어, 리듬, 이미지, 비유, 상징, 문체 등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좋든 싫든 우리는 한 편의 시를 짓거나 이해할 때, 이런 시가 가지는 중요한 요소들을 파악할 수 있는 안목이 없이는 도저히 시에 접근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시의 요소를 이루고 있는 것들을 보자.
시는 두말할 필요 없이 고도의 언어예술이다. 이런 시에 사용되는 말을 시어(詩語)라고 부른다. 시어란 시에 동원되는 별개의 낱말과 어귀란 뜻으로 다른 것들과 구별되어 씀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시어를 의식하고 시를 쓰는 시인은 드물다.
오늘의 시인들은 한 편의 시에 어떤 단어든지 필요하면 시에 쓸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국문학사에 나타난 작품들을 보면 거의가 운문인 것이 많고, 또 문장이란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어와는 다른 어떤 격을 갖추어야 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문장, 특히 한문체(漢文體) 문장에는 일반인들로서는 잘 알 수 없는 고사 성어가 많고 또 시조나 가사에도 비록 한글체이지만 그런 용어들이 깃들여 있었다.
시에 쓰이는 언어가 산문에 쓰이는 언어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느끼는 것은 시가 가지는 기능 때문이다.
시의 언어가 하나의 단일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중(二重), 삼중(三重)성을 띠며, 또 시의 언어가 이미지, 리듬, 톤 등과 긴밀한 연관(聯關)을 지으며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에 쓰이는 시어는 폭넓은 상상력을 일깨워 준다. 상상력이란 기존의 언어 관념을 뛰어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언어의 힘이 없이 씌어진 시어라면 하등의 가치가 없을 것이다. 우리 시(詩)나 시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성과 시어의 단순성, 상투성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레비 스트로스는 '시어는 언어를 초월한다'고 했다.
언어의 영역을 초월하는 데에 시어의 힘이 있고 진실이 있다는 말이다.
아무튼 시어라는 것은 단순히 아무 낱말이나 시에 다 도입될 수 있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시에 쓰여진 말이 다 시어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의 구성 조직과 긴밀한 연결을 맺으면서 그 시어 하나 하나가 우리에게 미래에 대한 꿈과 사물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상실되어 가는 인간성의 회복에 신선한 바람을 주고, 또 모든 사물의 본질을 새롭게 파악하는 눈을 길러주는 것이어야 한다.
오늘날 시어에 대한 문제는 여러 각도에서 제기되어 왔다.
리챠즈의 '언어의 정서적 용법과 과학적 용법', 사르트르의 '산문의 언어는 현실의 실존적 샹황을 지시하는 기호인 데 반하여 시의 언어는 사물이다'라는 '사물'과 '기호'의 분류, 하이데거의 존재와 언어를 주체적으로 파악하는 태도 등이 그것이다.
실제 시어의 선택에 있어서도 많이 대담해졌다. 금기어(禁忌語)였던 상말까지 시에 도입되고 있다.
구멍이 없는 여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젠 어떤 여자를 붙여줘도 소용이 없다.
남근마저 노자만큼 도덕적이 되는/한 사내의 가는 길이 보이기 때문이다. -강우식 '파도調'에서
이런 언어들은 그 단어가 지닌 뜻에서만 생각하면 단순미 밖에 줄 수 없다.
시인이 기존의 단어에 어떤 핵심적인 의미를 줄 때는 새로운 의미를 부과하기 위해서다. 그런 암시성을 파악해야 된다. 그리고 이런 시를 고찰할 때는 감정가치, 의미의 범위, 적용의 이동과도 연관지어야 한다.
시어란 어느 것이든 될 수 있다. 하지만 한 시인에게 있어서 특히 즐겨 쓰는 시어가 있게 마련이다.
잠자지 마라/세월이 간다.
이 긴 겨울밤/ 이젠 눈뜬 우리의 사랑이/ 죽음으로 죽음으로 달려가서
드디어 보이지 않을 때까지/눈을 뜨고 있거라/잠의 지옥을 탈출하라.
석달 열흘 잠에서 깨고 나도/아직은 남은 잠/ 죽음에 이르기엔 부족한/나의 잠
-金閏喜 '물을 찾아서'에서
이 시인은 '잠'이라는 언어를 시에 도입시킴으로써 죽음의 이미지가 아니라 생의 철저한 자각을 깨워주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죽음에 이르기에 부족한 잠'에서 삶의 완결성이 '죽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 시어는 그 시대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유행성을 완전히 무시할 수가 없다.
풀이 눕는다./비를 몰고 오는 동풍에 나부껴/풀은 눕고/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金洙暎 '풀'에서
'풀'이란 제목의 이 시가 발표된 후 우리 시단에는 한때 '풀'을 주제로 한 시가 유행처럼 번졌다. 이런 것도 하나의 시대적 유행으로 시어를 볼 수 있는 예라고 하겠다.
(1) 적절한 시어를 선택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은 쉽지 않다. 지금까지 시에 대한 수많은 정의가 내려졌으나 완벽한 정의는 나오지 않았다. 원래 시의 정의는 나올 수도 없다. 그렇게 되어 버리면 다양성이라는 관점에서 시는 이미 의미가 없는 것이요 발전이란 것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시대에 따라 시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 뿐만 아니라 시 자체도 변모하기 때문이다.
편의상 시는 마음 속에서 이루어진 뜻을 말로 나타낸 것이라는 정의에서 출발해 보자.
'시언지(詩言志)'라는 이 정의는 동양의 전통적인 시관(詩觀)으로 오랫동안 통용되어 왔다. 먼저 뜻을 보자. 문학을 정의할 때 '가치 있는 체험을 내용으로 한다'고 하니, 시에서의 뜻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표현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절실한 그 무엇이 여기서의 뜻이라고 하겠다.
이번에는 뜻을 전달하는 '말'에 주목해 보자. 문학이 언어 예술이므로 시에서의 말도 제재(題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의 경우에 있어서 언어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가 하면 시의 형태도 소설이나 희곡과는 다르다. 짧고 압축되어 있다. 그러나 짧고 압축된 형태의 문학이면 모두 시라고 할 수는 없다. 절제(節制)된 언어의 질서가 어떤 원리에 의해 이루어지고 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야만 한다. 이처럼 시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해명해야 할 과제가 많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에 대한 부당한 선입견을 버리는 것이 좋다. 시는 아름다워야만 한다든가, 고상한 세계를 노래해야만 한다든가, 시는 일상 생활에서는 쓸모가 없다던가 하는 잘못된 생각을 버리는 것이 시에 대한 정의(定義)를 내리는 것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시의 언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는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 알아보자. 언어를 매개로 하는 문학 중에서도 가장 언어에 민감한 갈래가 시이다. 시인은 자신의 체험․정서․사상 등을 제한된 형식과 언어 속에 담아내야 하기 때문에, 시어(詩語)의 선택에 각별한 노력을 해야만 한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역사적․사회적으로 형성된 관습적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즉 언어는 어떤 특정 대상을 지시하는 기호(記號)로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정확 한 의사 전달을 위해서는 언어의 이와 같은 기능은 필수적이다. 이처럼 지시적 기능(指示的機能)을 가진 언어의 의미를 외연적(外延的) 의미라고 부른다.
그러나 시어로 채택된 언어는 외연적 의미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시어는 관습적인 때가 벗겨진, 보다 신선하고 새로운 의미의 언어이어야만 한다.
고향(故鄕)은
늘
가난하게 돌아오는 그로 하여 좋다.
지닌 것 없이
혼자 걸어가는
들길의 의미(意味)
백지(白紙)에다 한 가닥
선(線)을 그어 보라.
백지(白紙)에 가득 차는
선(線)의 의미(意味)
아, 내가 모르는 것을
내가 모르는 그 절망(絶望)을
비로소 무엇인가 깨닫는 심정이
왜 이처럼 가볍고 서글픈가.
편히 쉰다는 것
누워서 높이 울어 흡족한
꽃 그늘 ―
그 무한한 안정(安定)에 싸여.
들길을 간다. (이형기, '들길')
이 시에는 들길을 걸어가는 시적 화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시를 읽어 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가 삶에 지쳐 귀향(歸鄕)길에 오른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이라는 것, 고향이란 그 누구에게나 안식과 평화를 베풀어주는 따뜻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점차 알게 된다.
따라서, 시의 제목인 '들길'은 바로 고향으로 가는 길이다. 여기에는 물론 삶에 실패하여 빈손으로 고향을 찾아가는 화자의 궁핍한 심정이 암시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러나 시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화자의 가난한 귀향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물질적으로 가난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자기를 성찰(省察)함으로써 얻게 된 정신의 충만함이다.
역설적이지만 그는 가난했으므로 참다운 고향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세속적인 만족과 쾌락이란 덧없고 허망하다는 것, 참된 삶이란 욕망을 채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비우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상의 설명은, 물론 시인이 시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전체 의미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전체의 의미를 해명하기 위해 좀더 긴 글을 쓴다 하더라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시를 설명 혹은 분석하는 일은 일상적인 언어 행위인데 반해, 시 그 자체는 일상어를 초월한 시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일상어로서는 표현이 불가능한 이 시적인 진실, 즉 궁핍한 귀향자가 들길을 가며 깨달은 생(生)의 진실을 한 마디로
'백지(白紙)에다 한 가닥 /선(線)을 그어 보라. /백지(白紙)에 가득 차는 /선(線)의 의미(意味)'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창조한 언어, 즉 시의 언어라 할 수 있다. 다음을 보자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본래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김광섭, '성북동 비둘기')
성북동은 서울에 있는 한 지역의 구체적인 지명이다. 번지란 땅을 인위적으로 나누고 번호를 부여한 것이다.
그런데 1행에서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겼다는 것은 원래 자연이었던 곳에 인간의 주택지가 인위적으로 조성되었다는 뜻이다.
2행에서는 자연인 그 산에 살던 비둘기만 보금자리를 잃었다고 했다. 1행과 2행은 문명과 자연의 대립 구조(對立構造)로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1행의 번지는 문명을, 2행의 번지는 자연적 삶의 터전을 뜻하게 된다. 이처럼 시어는 언어의 지시적 의미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는데, 이를 함축적(含蓄的), 또는 내포적(內包的) 의미라고 한다.
지시적이고 객관적인 외연적 의미에서 암시적(暗示的)이고 주관적인 내포적 의미로 확대되어 가면서 시어는 하나 이상의 의미를 갖기도 한다. 그리고 시어가 하나의 의미로 포착되지 않고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때 오히려 시의 의미와 가치를 풍부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산(山)에
산(山)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김소월, '산유화(山有花)'의 2연)
이 시에서 '저만치'의 뜻은 무엇일까? 우선 어떤 거리를 지시함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구체적으로 몇 미터라고 해석될 수는 없다.
전체적 문맥으로 보아 꽃이 저기, 저 쪽에서 피어 있다는 의미에서 거리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경우 '저만치'는 시인이 꽃과의 사이에서 느끼는 심정적(心情的) 거리감으로 해석되어도 좋다.
그런가 하면 '저만치'는 '저렇게' 또는 '저와 같이'로 어떤 상태나 정황(情況)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산에서 피는 꽃은 저렇게 외로이 피어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저만치'를 거리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과, 상태나 정황으로 해석하는 것이 서로 모순되지 않고 오히려 상승 작용을 일으켜 결과적으로 '저만치'의 의미가 더욱 풍부해지게 되었다.
이처럼 한 단어 또는 한 문장 구조 속에 두 개 이상의 의미가 들어 있는 경우를 일러 언어의 다의성(多義性), 또는 모호성(模糊性)이라 한다. 이것은 문학, 특히 시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하다.
(2) 시어의 선택과 모티브파악
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또 한 가지가 있다면 시를 통하여 작가의 마음을 읽어내는 일이다.작가의 의도를 독자가 알아차린다는 것은 작가에게 있어서도 기쁜 일이다.
그러면 작가의 마음을 읽어내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뭐니뭐니 해도 시가 무엇을 어떻게 표현해 내려고 했는가 하는 점을 찾아내는 일이다.
여기에서 '무엇'은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對象)'일 것이며, '어떻게'는 '표현 기법'일 것이다. 그러니까 작가가 어떤 대상을 표현하는데, 어떤 언어를 사용하여 이를 대치(代置)시키고 있으며, 대신한 그 나름대로의 표현 기법에 의하여 어떠한 의미로 환기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알아차리는 일이 시를 이해하는 지름길이라는 말이다.
작가의 창작 의도에 대한 깊이에 대하여 이해하려는 나의 눈 높이를 맞추고 그 지점에서 대상과 다듬어진 시구(詩句)를 바라보는 것과 똑같은 원리이다. 이에 대한 쉬운 이해는 다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제도 하로밤
나그네 집에
가마귀 가왁 가왁 울며 새었소. (김소월, '길' 제 1연)
'갈 길을 잃은 나그네의 비애(悲哀)'를 주제로 한 김소월 시 '길'의 첫 연이다. 여기에서 시의 전체적 분위기를 압도하는 시어는 '가마귀'이다. '가마귀'를 통해서만이 자신의 모진 신세나 어두운 이미지를 드러낼 수 있다고 판단한 작가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만약 선택된 시어가 '가마귀'가 아니고 '참새'였다면 이 시는 어떤 모습일까?
어제도 하로 밤
나그네 집에
참새 짹짹 울며 새었소.
이와 같은 모습일 텐데, 분위기는 너무나 달라진다. 작가 자신의 길 잃은 나그네로서의 모습을 형상화시키기에는 뭔가 잘못 되었다는 느낌일 뿐이다. '참새'가 아니고 '까치', '종달새' 등의 다른 새였다 해도 '가마귀'가 드러내는 분위기만큼의 정서는 표현해내지 못 할 것이다. 즉 어두운 분위기를 위해서는 가장 잘 선택된 시어라고 여겨진다. 박목월의 시 '청노루'를 보자.
머언 산 청운사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나는 열두 굽이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이 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살펴보아야 할 핵심 소재(제재)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청노루'다. 시의 유기적 구성을 위해 동원된 시어가 모두 자연물이라면 그 중에는 유일하게 동물로 선택된 '청노루'가 있다 작가는 거기에 이 시의 초점을 맞추었을 것이 뻔하다. 작가의 깊은 마음을 이러한 식으로 헤아렸다면 '청노루'라는 제재를 가운데 두고 해석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 되는 것이다.그런데 우리에게 의심스러운 것은 청(靑), 즉 푸른 색깔의 노루가 있느냐 하는 점이다. 노루는 송아지처럼 누런 색깔일 뿐이다.
그럼 이 시를 '황노루/맑은 눈에//도는/구름'이라고 시어를 바꾸어 보면 어떻게 될까?
놀랍게도 이 시가 주는 이미지는 신선함이 아니라 칙칙함이다. 이렇게 되면 작가가 드러내고자 한 신선한 봄, 아름다운 봄의 이미지는 본래의 의도와 벗어나게 되는 실패작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래서 작가는 실재(實在)하지도 않는 '청노루'라는 시어를 의도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이해하여야 한다. 시어의 선택면에서 '청노루'와는 조금 다른 경우이긴 하지만 '개나리'라는 시를 한번 읽어보자.
샛노란 얼굴빛으로
앙증스런 눈웃음으로
너의 가여린 몸짓은
이 봄날을 위해
고스란히 탄생되었고……
티 없이 맑은 하늘을 우러러
대지의 언 가슴을 녹이는
너의 기도는
무언의 고독으로 떨고 있구나
오늘쯤 나는
너를 만나러 가는
한 마리의 나비가 되고 싶다
개나리 화관을 머리에 이고
개나리 목걸이를 목에다 걸고
개나리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나풀나풀 날개 짓으로
너를 만나고 싶다
노오란 꽃잎이 먼저 스러져야만
연두 빛 잎사귀가 트이는
너의 엇갈린 슬픈 사연을 듣고 싶다
나의 빈 가슴 하나 가득
너를 부비고
온통 싱그러운 마음으로
돌아오고 싶다. (김영실, '개나리'(주부 백일장 시부문 장원작))
이 시는 '청노루'에서처럼 작가의 의도적 시어 선택이 흔적으로 남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개나리'에서도 '청노루'를 해석하는 방법은 똑같이
통할 것 같다. 즉 시 전체를 통하여 가장 특징적인 시어(詩語)를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나비'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개나리'를 제대로 관찰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눈길보다도 '나비'의 시선이 더욱 정확하고 예리할 것이라는 것을 작가는 일찍부터 알고 있었음직하다.
그리하여 '오늘쯤 나는/너를 만나러 가는/한 마리의 나비가 되고 싶었던 것이며, '노오란 꽃망울이 먼저 스러져야만/연두빛 잎사귀가 트이는' 개나리의 '엇갈린 슬픈 사연을' 들을 수 있을 만큼의 정확한 관찰이 가능했던 것이다.
더욱이 작가는 여섯 연으로 이루어진 '개나리'전 편을 통하여 3연에만 단 한 번의 '나비'를 등장시키고 있어 핵심 시어의 절제면에서도 무척이나 돋보인다.
(3) 시에 있어서의 언어
나도 어디선가 주워 읽은 이야기인데, 저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 드가(H.G.E. Degas, 1834~1917)가 친구인 상징파 시인 말라르메(S.Mallarme, 1842~98)를 만나서, 「나는 간밤에 아주 기막힌 아이디어(생각)가 떠올라 그것을 시로 쓰려고 했더니 안 되더군.」하고 고백을 하니 말라르메는 싱긋 웃으면서,「그건 그럴 수밖에, 시는 붓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말로써 쓰는 것이거든.」하더란다.
이 우스개에 가까운 일화가 아니라도 시가 언어의 예술인 것은 누구나가 다 잘 아는 바이다. 물론 언어의 예술은 비단 시만이 아니라 소설․희곡․평론․수필․시나리오 등 여러 가지 장르가 있으나, 그런 산문과 시의 상이점은 뒤로 미루고 우선 우리가 주목할 것은 시라는 예술의 소재인 말은 음악의 소재인 소리나 회화의 소재인 선이나 색채와 그 기능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이다. 즉, 음악이나 회화의 소재인 소리나 색채는 그 자체로선 아무런 의미도 지니고 있지 않지만 시의 소재인 말은 그 낱말 하나 하나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실은 이것을 더 설명할 것도 없지만 이즈막 하도 시에 있어서 표현주의자들이〈무의미의 시〉어쩌구들 하니까 거기에 생사람들까지 현혹되어 언어에 대한 근본적 인식이 흐려질까 봐 하는 이야기인데, 우리 인간의 말의 발생 근원을 떠올릴 때 만일 사람이 맨 처음 홀로 이 지상에 출현했다면 그런 경우 말이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요, 역시 말이란 것은 두 사람 이상의 공동생활이나 집단생활이 시작되어서야 비로소 출현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하기는 그렇듯 말이 처음에 소리가 되었을 때는 마치 갓난아기에게서 듣는 것 같은 외침이나 웅얼거림처럼 단순한 것이었겠지만, 그것이 말다운 말이 되기 위해서는 그 입에서 나오는 소리에 일정한 공통적 체계를 이룬 의미가 포함되어 있어서야 비로소 상호간의 의사교환이 이루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회화나 음악은 의미가 없는 소재를 가지고 예술이라는 의미의 세계를 만들어내지만 시는 그것을 형성하는 소재 하나하나, 즉 낱말 하나하나가 소우주를 이루고 있다는 데 바로 시의 비밀이나 어려움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나 나날의 생활 속에서 자기의 의사, 즉 의지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하여 거의 무의식적이며 습관적으로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렇게 생활의 연모롤 쓰이는 말의 의미란 한 사물에 공동적으로 부여한 부호에 지나지 않는 것이어서 오히려 이처럼 단순화되어 있는 것이 생활의 도구로는 편리하다고도 하겠다.
그런데 문제는 말 자체에 저와는 달리 비실용적이요, 복합적이요, 신비하다고나 말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기능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시에 있어서의 말인 것이다.
바로 이 소식을 폴 발레리는〈시인의 작업이란 일상적 실용의 제품(말)을 가지고 예외적이고 비실용적인 시라는 특수한 하나의 세계, 사물의 한 질서, 관계의 한 체계를 창조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흔히 일반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처음에 당하는 곤혹이나 당황 또는 빠지는 함정이나 과오는 저러한 일상적 말에 대한 습관적인 사용법을 가지고 시라는 특수한 세계를 다루려고 드는 데 실패의 원인이 있는 것이다. 물론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나 시에 쓰여진 말이나 그말 자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지만 그 말이 내포하는 기능의 영역에서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과 같은 큰 격차를 가져온다는 것을 시의 초심자들은 먼저 똑똑히 알아두어야 한다.
그러면 말의 또 하나의 기능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앞에서도 말했지만 한 개의 낱말은 한 사물을 가리키는 부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낱말이 또다른 낱말들과 연관을 가졌을 때 전혀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우리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깨닫는다. 가령 우리는 눈[雪]이라는 낱말이 줄기가 단단한 식물의 이름인 줄 알고 있지만, 만약 이 낱말에다 다른 낱말이 보태져서 〈눈 같은 여인〉했을 때 우리는 〈흰 얼굴을 한 순결한 여인네〉를 떠올릴 것이요, 나무라는 낱말도 가령〈나무에 올려놓고 흔드는 격〉하고 말이 이어졌을 때는 전혀 나무와는 얼토당토 않게〈좋은 낯으로 남을 꾀어 위험한 곳이나 불행한 처지에 몰아넣는 것과 같다〉는 뜻이 된다.
이렇듯 그 어떤 낱말은 딴 말과의 접촉에서 그 말이 나타내던 사물의 각가지 경험을 불러일으켜서 그 낱말이 지니던 고정되고 단순화되었던 영역을 벗어나 그 낱말이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던 의미, 즉 새로운 현상의 세계를 전개하는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시의 소재인 언어는 그 낱말 하나 하나가 소우주를 이루고 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 까닭인 것이다. 이제 여기서 실제 〈눈〉과〈나무〉라는 낱말을 가지고 시인들은 그 어떤 특수한 세계를 창조해놓았는지 음미해보자.
먼저 프랑스의 전원시「시몬느」로 유명한 구르몽(Remy de Gourmont)의,
눈
시몬느, 눈은 네 목처럼 희다.
시몬느, 눈은 네 무릎처럼 희다.
시몬느, 네 손은 눈처럼 차다.
시몬느, 네 마음은 눈처럼 차다.
눈을 녹이는 데 불의 키스,
네 마음을 녹이는 데는 이별의 키스.
눈은 슬프다 소나무 가지 위에,
네 이마는 슬프다 네 밤색 머리칼 아래.
시몬느, 네 동생 눈이 정원에 잠들어 있다.
시몬느, 너는 나의 눈, 그리고 나의 연인.
다음은 제1차 대전 때 전사한 기자 출신의 미국시인 킬머(Joyce Kilmer, 1886~1918)의 시로 그리 유명하지는 않으나 이 한 편의 시가 널리 애송되었다.
나 무
나는 나무처럼 사랑스런 시는
결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단물 흐르는 대지의 젖가슴에
주린 입술을 꼭 대고 있는 나무
종일토록 잎이 무성한 팔을 들어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는 나무
여름날이면 자신의 머리카락 속에
방울새의 보금자리를 틀게 하는 나무
가슴에 쌓이는 눈이거나
내리는 비와도 정답게 지내는 나무
시는 나같은 바보가 쓰지만
나무는 오직 하느님만이 만드신다.
저렇듯 위의 시들에서 보다시피 한 사물의 부호에 불과하였던 〈눈〉이나〈나무〉라는 낱말이 그 말의 앞뒤에 결합되고 배합된 말로써 천태만양, 또한 무진장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좀더 풀이하면 〈시몬느, 너는 나의 눈, 그리고 나의 연인〉이라고 했을 때〈눈〉은 바로〈시몬느라는 연인〉의 대명사가 되었고〈나는 나무처럼 사랑스런 시는 결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고 했을 때〈나무〉는 마치〈시〉와 동질성을 지니게 되는 것으로, 이렇듯 말이란 신비하고 무한한 기능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본디 말은 그것이 일상적인 말이건 시의 말이건 반드시 한 사물을 지시하는 의미적 기능과 그 말이 발하는 음향의 청각적 기능을 함께 지닌다.
그리고 그 중 의미적 기능은 어떤 장소, 어떤 시간 속에서도 그 한 가지의 지시성을 변화시키지 않으나 청각적 기능은 때와 장소에 따라서 또는 그것을 말하고 듣는 사람의 정서에 따라서 천만 가지 변화를 보인다.
가령 우리가 쓰는〈안녕하십니까〉라는 말 하나만 하더라도 그것을 말하는 사람의 몸짓이나 표정을 비롯해 그 말이 지니는 음향의 강약이나 고저․장단․음색 등 복잡 미묘한 요소들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말의 청각적 기능을 영국의 탁월한 문예비평가 I.A.리처즈(Ivor Armstrong Richards, 1893~1979)는 말의 정서적 기능이라고 부르고〈말이 우리들에게 어떤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정서적 기능으로서 거기에 말이 우리들의 역사를 움직이는 불가사의한 작용이 감추어져 있다〉고까지 말한다.
그래서 만일 훌륭한 시인이 되려면 말의 표현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다시 리처즈의 말을 빌면〈의미 속의 의미〉, 즉 말의 정서적 기능을 체득하는 것이 절대적 조건이라 하겠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이 언어의 정서적 기능을 시에 있어 한갓 리듬적인 음악성만으로 오해하여서 이미지 중심의 현대시의 조형성(造形性)에는 그것이 결여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것은 큰 착각으로서 시 속에 담긴 어떠한 이미지도 단지 박자 본위의 음악성이 아닐 뿐이지 말이 지니는 내질적인 음악성이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하겠다. 그래서 훌륭한 시적 이미지는 인간이 지니는 모든 감각적 기능을 구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의 음악성에 관한 것은 뒤에 다시 언급하겠기에 이만 줄이고 다음은 말의 기능과 함께 우리 인간존재의 가장 기본인 생각, 즉 사고와 말, 즉 언어의 관계를 좀 살펴보도록 하자.
아직까지도 일반만이 아니라 우리 시단의 일부 통념 속에는 생각(느낌도 포함)과 말, 즉 사고와 표현을 별개의 것으로 알아 그들은 항용 시가 될 생각은 가득한데 말이 찾아지질 않아 못 쓴다고들 한다.
그러니까 자기의 생각과 부합되는 말, 특히나 아름다운 말(즉, 수식어)을 고르기에 부심하며 시를 마치〈꾸며진 말〉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이런 사람들은 그 생각이라는 것이 말로써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라 하겠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보면, 가령 어떤 사람이 달을 쳐다보고 <달이 밝다〉로 하였다가〈달이 맑다〉로 고쳤다면 이것은 표현, 즉 말의 변화만이 아니라 생각과 느낌의 변화인 것이다.
아니, 이렇게 말하기보다 달이라는 그 사물에 대한 인식 자체가 말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금세기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1889~1976)는〈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그의 저서 『숲 속의 길』속에 나오는 사고에 대한 유명한 말인데〈우리들은 언어를 통하지 않고선 존재와 만날 수도 없고 언어는 존재를 우리에게 내어주는 유일의 것이다〉라고 하면서 설명하기를, 〈가령 우리가 숲 속을 가다가 샘을 만났다고 하면 그것이 샘이란 것을 알아차릴 때 우리는 샘이란 말로 그것을 인식한다.
또한 공중의 새를 보았을 때도 그 새의 존재를 포착하는 것은 새라는 언어로써, 물론 그때 새라는 말의 소리를 내지 않았더라도 그 존재를 우리의 인식 속에 가만히 포착시키는 작용을 한 것은 언어다〉라고 갈파한다.
이렇듯 말이 없다면 생각이 없는 것이요, 말을 통한 인식이 없다면 존재는 있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말은 존재를 존재하게 한다고나 하겠다.
이런 소식은 저 근세 철학의 시조라는 데카르트(Rene Descartes,1596~1650)의〈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내가 있다〉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요, 보다 우리 김춘수(金春洙)시인의 작품 「꽃」이 그것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이 시에서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인식의 대상으로 삼아서 말로 포착하는 것이요, 그것은 또한 그 시의 결론대로 그 사물에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또한 말은 저렇듯 존재를 만나게 하는가 하면 한 걸음 더 나가 그 존재의 영역을 한정시키기도 한다.
즉, 그 말이 지니는 한도 내에서, 다시 말하면 그 사물에 대한 인식의 깊이와 넓이에 따라 마치 존재는 등불의 강약에 비례하여 사물이 모습을 드러내듯 한다. 그래서 존재에 대한 인식, 즉 생각의 깊이와 넓이는 바로 언어에 대한 넓이와 깊이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렇듯 말의 숨은 기능을 생각할 때 시를 쓸만한 생각은 많은데 말을 찾지 못한다는 얘기는 시를 쓸만한 생각을 못해냈다는 얘기요, 일반이 바라는 소위 아름다운 말, 즉 수식어나 수사법은 이미 만들어지고 쓰여지고 낡아진 말들의 시체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죽은 말들을 이리저리 바꿔서 배열해보았자 그것이 창작인, 즉 비로소 만들어지는 시가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시란 평범한 일상적인 말을 가지고 바로 그것으로 일상적 의식을 넘은 세계를 표출해내는 것으로, 여기에 시를 쓰는 어려움이 있다.
지난 장에서 한 개의 낱말은 한 사물을 가리키는 단순한 부호에 지나지 않지만, 그러나 그 낱말이 또 다른 낱말들과 배합되었을 때 그 낱말이 지니던 고정되었던 의미의 영역을 벗어나 그 낱말이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던 의미, 즉 새로운 현상의 세계를 전개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런 말은 그 말하는 태도랄까 솜씨랄까, 즉 말씨에 의해서 또한 천태만양의 의미를 달리한다. 가령 말의 배열만 해도 〈나는 이것을 너에게 준다〉를〈이것을 나는 너에게 준다〉또는〈너에게 나는 이것을 준다〉로 그 순서를 바꾸면 그 말의 강조하는 점이 달라진다.
즉,〈나는〉이 먼저일 때는 내가 강조되고, 〈이것을〉이 먼저일 때는 그 물건이, 또〈너에게〉가 먼저일 때는 너라는 상대방이 강조되어 있다고 하겠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간다〉는 말도 산다 나는이라고 어순(語順)을 바꿔놓으면 퍽 그 말의 뉘앙스가 달라진다. 더구나 이 말을 하는 사람 자체나 그 태도 또는 그 사고나 감정에 따라 그 의미 내용이 전혀 딴판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일상적 말씨도 그러하거늘 더구나 시에 있어서는 저러한 일상적 말의 평면적 질서를 뛰어넘는 새로운 질서가 요구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실은 이 점이 우리가 시를 쓰려고 들 때 그렇듯이 아무렇게나 잘 지껄이던 말이 막히고 안 나오는 까닭이기도 하다.
즉, 시의 말과 일상어의 구별은 그 사용하는 말의 다름과 함께 또한 꾸며 전 말(수식어)과 꾸며지지 않은 말로서의 구별이 아니라 말의 기능을 깊이 인식한 그 사용법, 즉 말씨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폴 발레리는 일상어나 산문을〈걸음[步行]에다〉, 시를 〈춤[舞踊]〉에다 비교하여 시에 있어서의 말씨의 특성을 아주 적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즉, 일상어나 산문에 비유된〈걸음〉이란 그 어떤 하나의 대상에 향하여 진행되는 행위로서 그 목적이 그 대상에 도달하는 데 있다.
이처럼 일상어나 산문은 오직 그 의미를 전달한다는 지시기능만이 중시되기 때문에, 그 목적이 달성되고 나면 말은 그 이루어진 행위 속에 흡수되고 마는 것이다.
가령〈이리 좀 오시오〉하는 일상어는 그 말로써 상대방이 자기에게 다가오면 그 이루어진 행위와 함께 사라지고 만다.
즉, 결과가 원인을, 목적이 수단을 흡수하고 만다고나 할까, 흔히들〈모로 가도 서울만가면 된다〉는 말처럼 그 말에 따르는 사람이 어떤 걸음새를 보여주었건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시의 말에 비유된〈춤〉은 그곳에서 이곳에 다다르기까지 그 행위의 모습 자체가 어떠한가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춤의 궁극적 목적은 그 행위 자체에 있기 때문에 그 행위의 자태, 즉 맵시가 바로 춤의 생명인 것이다.
이렇듯 되풀이되는 본질이 시의 말의 본질일 뿐만 아니라 예술에 있어서의 본질이요, 원리인 것이다. 즉, 우리가 명시라고 불리는 시를 애송한다든가, 어떤 명화를 걸어놓고 감상한다든가, 어떤 명곡을 되풀이해 듣는 것은 모두 이런 까닭인 것이다.
이제 저러한 말의〈춤〉상태를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익숙한 김소월(金素月)의 「초혼(招魂)」을 통해 새삼 음미해보기로 하자.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자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우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그 소리는 비껴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우리는 이 시를 그 말의 조직에 대한 아무런 구체적 지식이 없이도〈걸음〉같은 일상어나 산문과는 전혀 다른, 소위 말의〈춤〉을 감득(感得)할 것이다.
모두 알다시피 이 시의 주제와 제목이 되어 있는 〈초혼〉은 죽은 사람의 나간 혼을 다시 불러들임을 뜻하는데, 우리 민간의 전래풍속으로는 사람이 죽으면 누가 지붕에 올라가거나 또는 마당에서 북쪽을 향해「아무 동네 아무개 복(復ㅡ다시 돌아오라는 뜻).」하고 세 번 외쳐서 나간 혼을 다시 불러들이는 의식을 치르고서 발상(發喪)에 나아간다. 어쨌거나 소월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死別)의 통한을 이렇듯 말의 새로운 배합과 배열로써 황홀할 정도의 시적 표현에 나아간 것이다.
시가 지니는 말의 배합과 배열에 의한 무용적 요소를 발휘하게 하는 방법이 무엇이냐 하면 그 하나는 말의 생략과 압축이라 하겠고, 또 하나는 지난번에 언급한 바 있는 말의 울림 즉 리듬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라 하겠다.
먼저 말의 압축이라는 면에서 살필 때 시가 가장 짧은 형태의 문학임은 누구나가 다 아는 바로서 산문이 설명적이고 서술적인 것과 반대로 시는 생략과 압축이 행해지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것은 위에서 설명한 대로 일상어나 산문은 그 목적물에 도달하려는〈걸음〉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려고 설명적이 되지만, 시의 경우는 그 말의 압축과 생략으로 이뤄지는 암시나 상징이 바로 그〈춤〉과 같은 임무를 수행한다.
이렇듯 시에 있어서 말이 암시적 또는 상징적이 되기 위하여는 그 뜻이 넓고 깊을수록 이상적이라 하겠다. 그래서 미국의 선구적인 이미지스트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1972)는〈결국 위대한 시란 최대한의 의미를 지닌 언어에 불과하다〉고 말했는데, 이 말은 곧 여러 가지 말이 분담할 의미를 하나의 말이 전담하는 최대한의 암시력을 지닌 언어를 뜻함이요, 또한 이것은 여러 가지 말이 생략되고 극한적으로 압축된 말을 뜻한다. 그러면 실제 저렇듯 깊고 넓은 의미의 세계를 지닌 말은 어떻게 해서 얻어지느냐 하면, 언어는 오직 전달의 부호나 기호가 아니고 그것은 존재에 대한 인식의 유일한 연모로서 어떤 사물에 대한 깊고 넓은 의미를 인식하는 데서 거기에 비례하는 응축(凝縮)된 말을 획득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다음, 울림 즉 말의 리듬은 이 역시 지난번 말했다시피 언어의 본질적 기능 중의 하나인 정서적 기능의 주요 요소로서 한쪽의 의미적 기능은 어느 경우라도 확연한 하나의 지시적 세계를 지녀서 변화하지 않지만, 이 청각적 세계인 울림은 그때그때 우리의 상황이나 정상(情狀)에 따라서 천태만양의 변화를 나타낸다.
그래서 시에 있어서의 감정(감정 또는 감성)의 영역은 바로 이 리듬의 기능으로서 시가 독자를 감동시키는 으뜸가는 요소인 것이다. 가령〈안녕하십니까〉라는 가장 평범한 말도 그 몸짓이나 표정에 따라 그 말이 본디 지니는 뜻과는 다르게 되지만, 그 중에도 그 말소리의 강약고저나 속도․음색 등에 따라 상대방에게 복잡 미묘한 반응을 볼러 일으킨다.
그런데 이러한 말의 울림을 조율(調律)하는 시의 리듬을 단순한 외형적 음악성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허다하다. 이즈막에 와서도 그렇지만 근세에 이르기까지 시에 대한 일반적 관념은 산문과 상대적인 운문, 즉 일정한 리듬을 지니고 있는 글로 여겼다. 그래서 옛 중국이나 서양의 정형시에 있는 평측률이나 압운율 또는 우리 시조와 같은 자수율에 의한 박자 본위의 음악성에다 저러한 시의 리듬을 찾거나, 아니면 자유시란 그것을 좀 변형시킨 것으로 여기나 이것은 모두가 오해로서 엄밀히 말하면 말이란 본래가 운율 위에서 성립되는 것이라 하겠으니, 왜냐하면 말이 곧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의 발상 자체가 본래적으로 운율을 지닌다고 하겠다.
오직 자유시가 지난날의 시 모양으로 형식적인 외재율(外在律)의 속박을 받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말이 지니는 청각적 요소, 한 걸음 나아가서는 현대시가 즐겨 주장하는 회화적 요소 속에 깃 든 내재율을 지니고 있고 또 지녀야 한다고 말하겠다.
즉, 심상(心象)이란 것도 말로 만들고 그 말은 참된 음악성(울림)이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고나 하겠으며, 나아가서는 시로 성립되는 표현요소 모두가 리듬 속에 포괄되어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래서 정형시에 있어서는 어떤 기성의 틀에 맞추는 것이 시의 리듬이지만, 이제 자유시는 각개 시인 스스로가 시 한 편 한 편마다 보이지 않는 리듬의 틀을 만들어 그 시상(詩想)을 진행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때문에 시(특히 자유시)를 창조의 창조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상 시에 있어서 언어를 살펴보면 시의 말이란 결코 말의 수효를 많이 아는 것도 아니고, 또 소위 미사여구를 많이 익히는 것도 아니며, 그저 우리가 현실생활에서 쓰는 그 평이한 말의 의미적 기능과 정서적 기능을 깊이 이해하고 그것을 어떻게 솜씨 있게 쓰느냐 하는 데 그 열쇠가 있다는 바로 그 점이다.
(4) 시어(詩語)에 대하여
균형(均衡)과 조화(調和)를 지향했던 고전주의자들은 시에 구사된 말 곧 詩語를 일상어와는 달리 귀족적인 우아한 말(雅語)로 한정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개성과 감정을 중요시하는 낭만주의자들에 의해 거부된다. 시어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는 말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굳이 시어와 일상어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시어와 비 시어를 구분하여 논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시어와 비시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어휘가 한 작품 속의 특정한 자리에서 적절하게 쓰이고 있는가 그렇지 않는가가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어떤 특정 어휘가 A라는 작품 속에서는 능률적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B라는 작품 속에서는 그렇지 못할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를 잘못 받아들여 오늘의 詩語는 제한이 없는 것이니 아무것이나 마음대로 갖다 써도 무방하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물론 모든 언어는 시 속에 사용될 수 있지만 시인들이 보다 즐겨 사용하는 詩語들이 따로 없는 바가 아니며, 또한 보다 능률적인 시어를 생각할 수 없는 바도 아니다. 그렇다면 능률적인 시어란 어떤 특성을 가진 말들일까 생각해 보도록 하자.
첫째, 보다 다양한 내포적 의미를 지닌 말
C. B. Wheeler는 시적 언어의 특성을 한마디로 이중성(doubleness)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산문은 지식이나 정보를 전달하는 글이므로 의미가 단순 명료할 수록 효율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시는 복잡다단한 정서를 전달하는 글이기 때문에 분명하게 표현하기보다는 은근한 울림을 담고 있는 것을 선호한다. '내 마음은 고요하다'라는 표현보다는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시구가 더 은근하다. '고요하다'에 담겨 있는 의미는 단순하지만 '호수'가 지니고 있는 내포적 의미는 다양하기 때문이다.
'호수'는 '고요함'뿐만 아니라, 넓음, 시원함, 맑음, 깊음 등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능률적인 시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딱딱한 말보다는 보다 부드러운 말
어떤 이는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저항적이고 투쟁적인 내용의 시를 쓰자면 오히려 부드러운 말보다는 딱딱한 말이 강렬한 느낌을 불러일으켜 보다 효과적일 수도 있다는 주장을 펼지도 모른다. 시인도 그릇된 세상을 비판하고 불의에 맞서 투쟁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이 시를 통해 행해질 때는 격정적인 선전문이나 자극적인 구호문에 그쳐서는 곤란하다. 시의 힘은 직설적인 독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감화에 있다. 시는 용맹스런 장수의 포효보다는 인자한 어머니의 손길과 같아야 한다. 그것이 보다 큰 감동적인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시는 산문과는 달라서 운율이라는 신비로운 가락으로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글이다. 그 운율 형성에 효율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언어는 역시 부드러운 쪽이 아니겠는가.
셋째, 거친 말보다는 아름다운 말
시는 언어 예술이다. 즉 말로 빚어낸 아름다운 작품이다. 만일 어떤 시가 아름다운 요소를 전혀 지니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것을 시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아도 무방하리라.
시를 예술의 반열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아름다움이 전제되어야 한다. 요즘 해체론자들 가운데는 왜 아름다운 시만 고집하느냐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만약 그러한 주장을 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自己流의 言述에 대한 명칭을 詩가 아닌 다른 것으로 새로이 명명하라고 권하고 싶다.
넷째, 저속한 말보다는 우아한 말
시는 단순히 아름다운 말의 기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시정신이 담긴 글이다. 시정신이 무엇인가를 따지는 것은 간단하지 않지만 나는 그것을 승화된 소망(世俗的인 慾望의 淨化) 곧 眞, 善, 美 그리고 節操와 廉潔을 추구하는 선비정신과 통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말하자면 시인은 단순한 언어의 기능인만이 아니라 고고한 정신 세계를 추구하고 있는 修道者로 보고자 한다.
그러한 시인의 생각을 담고 있는 시어가 어찌 정화된 우아로운 말이 아니겠는가. 만일 어떤 시인이 상습적으로 저속한 시어들을 즐겨 구사한다면, 설령 언어를 부리는 재주가 인정된다손 치더라도 그는 아직 시인의 자질을 원만히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으리라.
다섯째, 가급적 표준어를 어법에 맞게
토속적인 정서를 실감나게 드러내기 위해서 사투리를 즐겨 사용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사투리가 때에 따라서는 구수하고 정감 어린 느낌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시에 표준어와 사투리를 아무 제한 없이 혼용해도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이는 잘못된 인식이다.
가능하면 표준어를 사용할 일이고 어법에 맞도록 쓸 일이다. 시에서는 비문법적인 표현도 경우에 따라서는 허용된다. 그러나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경우에 마지못해 그렇게 된 것이지 그것이 시의 능사는 아니다. 시의 이상적인 문장이란 산문과 마찬가지로 표준어를 어법에 맞도록 쓴 것이다. 표기도 정확해야 한다. 그런데 적잖은 시인들이 표기법 같은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언어 예술가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우선 표기법이나 문법부터 착실히 습득해야 할 일이다.
여섯째, 외래어보다는 순수한 우리말을
소위 글로벌 시대라고 해서 외래문화들이 거센 물결처럼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이에 따라 시인들의 작품 속에도 외래어가 무분별하게 범람하고 있는 경우를 보게 된다. 물론 문화가 서로 섞이다 보면 외래어도 언젠가는 한자어들처럼 우리말화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생각하면 마치 우리의 순수성이 유린당한 것처럼 느껴져서 개운치가 않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우리의 얼과 문화를 잘 가꾸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얼과 문화의 바탕이 되는 것이 언어이고, 언어를 가장 사랑하고 지키는 이가 곧 시인들이 아니겠는가. 위대한 한 시인의 탄생은 바로 그 민족어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다고 역사는 일러주고 있다.
시인은 민족어의 연금술사이며 또한 수호자들이라고 말해도 좋으리라.
일곱째, 언어 외적인 매체들
시가 언어 예술의 한계성을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은 일찍부터 있어 왔다. 그 대표적인 경향이 꼴라쥬의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림, 도형, 사진 등의 문자외적 매체를 시에 끌어들이는 경우다.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해 낼 수 없는 절실한 정황을 시각 매체의 도움을 받아 어쩔 수 없이 그려냈다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시라는 이름으로 부르려면 어디까지나 언어 매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한다면 그 작품은 다른 장르의 명칭으로 불러야 하리라. 시는 언어 예술이므로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면 이미 시라고 할 수 없겠기 때문이다.
▶ 시어는 일상어를 쓰지만 일상어와는 다르다.
'눈물'의 사전적 의미: 눈알 바깥쪽의 위에 있는 눈물샘에서 알칼리성의 반응으로 는 정신의 감동으로 심한 자극을 받아서 나오는 물.
(예) 눈가에 눈물이 돈다.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 김현승의 <눈물>
→ 이 시에서 '눈물'은 '순수함의 정수(精髓)'라고 할 수 있다. '눈물'의 관습적인 상징으로 슬픔이나 삶의 고뇌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 시에서는 그런 상징성과 함께 그것들을 극복한 정신적 충만감 까지 포괄하고 있다.
여기서 '눈물'은 기름진 땅에서 떨어져 새로운 생명을 창조해 내는 존재로서 바로 '순수한 생명'을 표상하는 것이다.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 파란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 중에서
→ '번지'란 땅을 인위적으로 나누고 번호를 부여한 것이다. 제1행에서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겼다는 것은 원래 자연이었던 곳에 인간의 주택지가 인위적으로 조성되었다는 뜻이다.
2행에서는 자연인 그 산에 살던 비둘기만이 보금자리를 잃었다고 했다. 1행과 2행은 문명과 자연의 대립구조로 되어있다.
머언 산 청운사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나는 열두 굽이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박목월의 <청노루>
→ 노루는 송아지처럼 색깔이 누렇다. 푸른색의 노루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황노루'라고 하면 신선한 이미지는 없어지고 어둡고 칙칙해진다.
이 시는 신선하고 활기차고 아름다운 봄의 이미지를 그리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청노루'라는 시어 선택은 매우 적절하다고 본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김소월의 <산유화>
◎ 이 시의 구조: 생명의 탄생→ 고독한 인간의 존재→ 죽음
◎ '꽃'의 의미: 유한하고도 고독한 존재
◎ '저만치'의 의미: '꽃(자연)과 나(인간)와 거리(자연에 대비한 고독한 인간-
작자의 감정이입)'
◎ '저만치'의 모호성: 거리(심정적 거리), 저와 같이 ,저렇게
어제도 하로밤
나그네 집에
가마귀 가왁가왁 울며 새었소. -김소월의 <길> 중에서
→'갈 길을 잃은 나그네의 비애'를 주제로 쓴 시다. 여기서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압도하는 시어는 '가마귀'다. '가마귀'를 통해서만 자신의 모진 신세나 어두운 이미지를 드러낼 수 있다고 판단한 작가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선택된 시어가 '가마귀'가 아니라 '참새', '까치', '종달새' 등이었다면?
(5) 절제된 언어 질서로 표현하기
→ 시는 산문과 다르므로 고도로 압축된 언어로 표현하라.
→ 조사와 어미를 잘 써야한다.
→ 떠오르는 느낌을 산문으로 써서 운문으로 갈무리 해 보라.
◇ 운문과 산문의 차이
다른 때보다 한 시간 먼저 일어나
오랜만에 아침밥을 먹다보니
아차! 오늘이 바로 중간고사 시작 날
무대책이 상대책이라 믿고
뱃심 하나로 치르는 3교시 영어시험
물음표에 긴장하고
마침표에 한숨쉬고
가렵지도 않은 머리를 연필로 긁적거린다. -학생 작품 <시험> 중에서
→ 이 부분을 산문으로 옮겨 보자.
다른 때보다 한 시간 먼저 일어나 오랜만에 아침밥을 먹었다. 갑자기 오늘이 시험날이라는 사실이 생각났다.
'아차, 오늘이 바로 중간고사 시작날이구나."
공부를 하나도 안 했는데 어떡하지? 그러나 나는 무대책이 가장 좋은 대책이라고 생각하며 학교에 갔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시험 내내 긴장의 연속이었다. 답답해서 괜히 머리만 긁었다.
→ 표현도 산문과 다르다. 시험치는 동안 답을 몰라 쩔쩔 매고 긴장했다는 표현을 '물음표에 긴장하고, 마침표에 한숨쉬고"라고 했다.
여기서는 '.' '?'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윤동주는 서시에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노래했는데, 여기서도 단지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 때문에 괴로워했다는 뜻이 아니다. '외부의 아주 미세한 자극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고통을 느껴 왔다' 는 의미다.
◇ 떠오르는 느낌을 산문으로 써서 운문으로 갈무리 해 보기
베개를 사뭇 진지하게 무릎 위에 올려놓고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이렇게 봐 본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벌써 베개와 동고동락 한지도 4년이 넘는다. 베갯잇 색깔이 그 세월을 입증이라도 하듯 약간 바래 있다. 거의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잠잘 때면 가장 밀접하게 붙어있던 나의 베개… 엄마에게 혼나거나 속상한 일로 울 때면 난 베갯잇에 머리를 묻히고 퍽퍽 울어댔다. 그러면 아무 말없이 베개는 나의 눈물을 다 받아 주었다.
그래 가끔은 침도 흘리고 신경질 부리며 발로 차기도 했지만 그래도 역시…그녀는 나의 소중한 친구였다. 나의 사춘기 시절을 - 얼마나 고민 많을 때인가?- 모진 고생을 해 가면서도 나의 슬픔을 그리고 기쁨을. 아무에게도 말 못했던 고민을 그녀는 꼬옥 간직한 채, 오늘밤도 자신의 몸에 매 머리가 뉘어 지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말을 할 줄 모릅니다.
그녀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녀에겐 심장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겐 이 우주보다도 더 넓은 마음씨가 있습니다.
그녀는 진실하며 나를 편하게 하는 부드러움을 가졌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절대로 비밀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그녀를 곁에 두고서 난 오랫동안 그녀의 소중함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제서야 깨달았습니다.
그녀의 '소중한'을 …그리고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는지…
그녀의 이름은 베개입니다. <베개를 바라보면>
구부정 휘어진 허리 툭툭 쳐가며
정지로 나간 어멈
새벽녘부터 분주하다
장작개비 아궁이
뜨겁게 타오르고
무쇠 솥뚜껑
열렸다 닫혔다
정지에 김이 달아오르고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에서
어멈 얼굴 가리어져 보이지 않는다.
추수하던 날 에비는
어멈을 어찌나 달달 볶아댔는지
어멈 정신이 쏙 빠졌나보다
"음메음메" 울어대는 살찐 송아지
여물 주는 것도 잊었네
어멈 돕기 위해
개똥이 마당 쓸던 빗자루 내려놓고
헛간에 쌓아둔 곡물 집어들며
송아지 여물 만든다며 가마솥 휘휘 젖는다.
아랫목에 앉아 가르렁거리던 할배는
가래침 '퇘' 뱉아 내고
어멈에게 밥 달라 소리치면
어멈은 하던 일 재쳐두고
정지로 달려가 밥상 차린다.
된장국 냄새 구수하게 풍긴다
그 옛적 개똥이 잊고 살았던
어멈의 그리움을
누렇게 뜬 된장국에서 기억한다.
무명치마 훌러덩 걷어 부치고
논밭일 한다고
하얀 손수건 머리에 동여맨
그리운 나의 어멈!
어릴 적 바쁘게만 살아갔던 어멈!
콧물 질질 흘리면 치맛자락으로
쓰윽 하고 닦아주던 나의 어멈
어멈이 보고 싶다.
- 김필남 "그가 보고 싶다.-어멈이 보고 싶다." (2002년 졸업, 계명대학교 백일장 은상)
눈물 아롱아롱
피리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리.
흰 옷깃 여며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 삼만리.
신이나 삼아줄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굽이굽이 은핫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호올로 가신 님아. -서정주의 <귀촉도>
→ 2연은 님을 떠나보내고 평소에 못해 준 데 대한 悔恨(회한)을 노래하고 있는데 언뜻 보기에 말이 제대로 연결되지 않는 듯하다.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재배열한다면?
1. 시어(詩語)
시가 오늘날까지 문학의 장르 중에서 가장 으뜸의 자리에 있는 것은 시가 가진 특성 때문인지 모른다. 한 편의 시는 짧은 시 형태에서 언어, 리듬, 이미지, 비유, 상징, 문체 등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좋든 싫든 우리는 한 편의 시를 짓거나 이해할 때, 이런 시가 가지는 중요한 요소들을 파악할 수 있는 안목이 없이는 도저히 시에 접근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시의 요소를 이루고 있는 것들을 보자.
시는 두말할 필요 없이 고도의 언어예술이다. 이런 시에 사용되는 말을 시어(詩語)라고 부른다. 시어란 시에 동원되는 별개의 낱말과 어귀란 뜻으로 다른 것들과 구별되어 씀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시어를 의식하고 시를 쓰는 시인은 드물다.
오늘의 시인들은 한 편의 시에 어떤 단어든지 필요하면 시에 쓸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국문학사에 나타난 작품들을 보면 거의가 운문인 것이 많고, 또 문장이란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어와는 다른 어떤 격을 갖추어야 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문장, 특히 한문체(漢文體) 문장에는 일반인들로서는 잘 알 수 없는 고사 성어가 많고 또 시조나 가사에도 비록 한글체이지만 그런 용어들이 깃들여 있었다.
시에 쓰이는 언어가 산문에 쓰이는 언어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느끼는 것은 시가 가지는 기능 때문이다.
시의 언어가 하나의 단일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중(二重), 삼중(三重)성을 띠며, 또 시의 언어가 이미지, 리듬, 톤 등과 긴밀한 연관(聯關)을 지으며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에 쓰이는 시어는 폭넓은 상상력을 일깨워 준다. 상상력이란 기존의 언어 관념을 뛰어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언어의 힘이 없이 씌어진 시어라면 하등의 가치가 없을 것이다. 우리 시(詩)나 시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성과 시어의 단순성, 상투성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레비 스트로스는 '시어는 언어를 초월한다'고 했다.
언어의 영역을 초월하는 데에 시어의 힘이 있고 진실이 있다는 말이다.
아무튼 시어라는 것은 단순히 아무 낱말이나 시에 다 도입될 수 있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시에 쓰여진 말이 다 시어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의 구성 조직과 긴밀한 연결을 맺으면서 그 시어 하나 하나가 우리에게 미래에 대한 꿈과 사물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상실되어 가는 인간성의 회복에 신선한 바람을 주고, 또 모든 사물의 본질을 새롭게 파악하는 눈을 길러주는 것이어야 한다.
오늘날 시어에 대한 문제는 여러 각도에서 제기되어 왔다.
리챠즈의 '언어의 정서적 용법과 과학적 용법', 사르트르의 '산문의 언어는 현실의 실존적 샹황을 지시하는 기호인 데 반하여 시의 언어는 사물이다'라는 '사물'과 '기호'의 분류, 하이데거의 존재와 언어를 주체적으로 파악하는 태도 등이 그것이다.
실제 시어의 선택에 있어서도 많이 대담해졌다. 금기어(禁忌語)였던 상말까지 시에 도입되고 있다.
구멍이 없는 여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젠 어떤 여자를 붙여줘도 소용이 없다.
남근마저 노자만큼 도덕적이 되는/한 사내의 가는 길이 보이기 때문이다. -강우식 '파도調'에서
이런 언어들은 그 단어가 지닌 뜻에서만 생각하면 단순미 밖에 줄 수 없다.
시인이 기존의 단어에 어떤 핵심적인 의미를 줄 때는 새로운 의미를 부과하기 위해서다. 그런 암시성을 파악해야 된다. 그리고 이런 시를 고찰할 때는 감정가치, 의미의 범위, 적용의 이동과도 연관지어야 한다.
시어란 어느 것이든 될 수 있다. 하지만 한 시인에게 있어서 특히 즐겨 쓰는 시어가 있게 마련이다.
잠자지 마라/세월이 간다.
이 긴 겨울밤/ 이젠 눈뜬 우리의 사랑이/ 죽음으로 죽음으로 달려가서
드디어 보이지 않을 때까지/눈을 뜨고 있거라/잠의 지옥을 탈출하라.
석달 열흘 잠에서 깨고 나도/아직은 남은 잠/ 죽음에 이르기엔 부족한/나의 잠
-金閏喜 '물을 찾아서'에서
이 시인은 '잠'이라는 언어를 시에 도입시킴으로써 죽음의 이미지가 아니라 생의 철저한 자각을 깨워주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죽음에 이르기에 부족한 잠'에서 삶의 완결성이 '죽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 시어는 그 시대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유행성을 완전히 무시할 수가 없다.
풀이 눕는다./비를 몰고 오는 동풍에 나부껴/풀은 눕고/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金洙暎 '풀'에서
'풀'이란 제목의 이 시가 발표된 후 우리 시단에는 한때 '풀'을 주제로 한 시가 유행처럼 번졌다. 이런 것도 하나의 시대적 유행으로 시어를 볼 수 있는 예라고 하겠다.
(1) 적절한 시어를 선택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은 쉽지 않다. 지금까지 시에 대한 수많은 정의가 내려졌으나 완벽한 정의는 나오지 않았다. 원래 시의 정의는 나올 수도 없다. 그렇게 되어 버리면 다양성이라는 관점에서 시는 이미 의미가 없는 것이요 발전이란 것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시대에 따라 시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 뿐만 아니라 시 자체도 변모하기 때문이다.
편의상 시는 마음 속에서 이루어진 뜻을 말로 나타낸 것이라는 정의에서 출발해 보자.
'시언지(詩言志)'라는 이 정의는 동양의 전통적인 시관(詩觀)으로 오랫동안 통용되어 왔다. 먼저 뜻을 보자. 문학을 정의할 때 '가치 있는 체험을 내용으로 한다'고 하니, 시에서의 뜻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표현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절실한 그 무엇이 여기서의 뜻이라고 하겠다.
이번에는 뜻을 전달하는 '말'에 주목해 보자. 문학이 언어 예술이므로 시에서의 말도 제재(題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의 경우에 있어서 언어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가 하면 시의 형태도 소설이나 희곡과는 다르다. 짧고 압축되어 있다. 그러나 짧고 압축된 형태의 문학이면 모두 시라고 할 수는 없다. 절제(節制)된 언어의 질서가 어떤 원리에 의해 이루어지고 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야만 한다. 이처럼 시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해명해야 할 과제가 많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에 대한 부당한 선입견을 버리는 것이 좋다. 시는 아름다워야만 한다든가, 고상한 세계를 노래해야만 한다든가, 시는 일상 생활에서는 쓸모가 없다던가 하는 잘못된 생각을 버리는 것이 시에 대한 정의(定義)를 내리는 것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시의 언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는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 알아보자. 언어를 매개로 하는 문학 중에서도 가장 언어에 민감한 갈래가 시이다. 시인은 자신의 체험․정서․사상 등을 제한된 형식과 언어 속에 담아내야 하기 때문에, 시어(詩語)의 선택에 각별한 노력을 해야만 한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역사적․사회적으로 형성된 관습적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즉 언어는 어떤 특정 대상을 지시하는 기호(記號)로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정확 한 의사 전달을 위해서는 언어의 이와 같은 기능은 필수적이다. 이처럼 지시적 기능(指示的機能)을 가진 언어의 의미를 외연적(外延的) 의미라고 부른다.
그러나 시어로 채택된 언어는 외연적 의미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시어는 관습적인 때가 벗겨진, 보다 신선하고 새로운 의미의 언어이어야만 한다.
고향(故鄕)은
늘
가난하게 돌아오는 그로 하여 좋다.
지닌 것 없이
혼자 걸어가는
들길의 의미(意味)
백지(白紙)에다 한 가닥
선(線)을 그어 보라.
백지(白紙)에 가득 차는
선(線)의 의미(意味)
아, 내가 모르는 것을
내가 모르는 그 절망(絶望)을
비로소 무엇인가 깨닫는 심정이
왜 이처럼 가볍고 서글픈가.
편히 쉰다는 것
누워서 높이 울어 흡족한
꽃 그늘 ―
그 무한한 안정(安定)에 싸여.
들길을 간다. (이형기, '들길')
이 시에는 들길을 걸어가는 시적 화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시를 읽어 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가 삶에 지쳐 귀향(歸鄕)길에 오른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이라는 것, 고향이란 그 누구에게나 안식과 평화를 베풀어주는 따뜻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점차 알게 된다.
따라서, 시의 제목인 '들길'은 바로 고향으로 가는 길이다. 여기에는 물론 삶에 실패하여 빈손으로 고향을 찾아가는 화자의 궁핍한 심정이 암시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러나 시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화자의 가난한 귀향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물질적으로 가난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자기를 성찰(省察)함으로써 얻게 된 정신의 충만함이다.
역설적이지만 그는 가난했으므로 참다운 고향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세속적인 만족과 쾌락이란 덧없고 허망하다는 것, 참된 삶이란 욕망을 채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비우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상의 설명은, 물론 시인이 시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전체 의미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전체의 의미를 해명하기 위해 좀더 긴 글을 쓴다 하더라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시를 설명 혹은 분석하는 일은 일상적인 언어 행위인데 반해, 시 그 자체는 일상어를 초월한 시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일상어로서는 표현이 불가능한 이 시적인 진실, 즉 궁핍한 귀향자가 들길을 가며 깨달은 생(生)의 진실을 한 마디로
'백지(白紙)에다 한 가닥 /선(線)을 그어 보라. /백지(白紙)에 가득 차는 /선(線)의 의미(意味)'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창조한 언어, 즉 시의 언어라 할 수 있다. 다음을 보자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본래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김광섭, '성북동 비둘기')
성북동은 서울에 있는 한 지역의 구체적인 지명이다. 번지란 땅을 인위적으로 나누고 번호를 부여한 것이다.
그런데 1행에서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겼다는 것은 원래 자연이었던 곳에 인간의 주택지가 인위적으로 조성되었다는 뜻이다.
2행에서는 자연인 그 산에 살던 비둘기만 보금자리를 잃었다고 했다. 1행과 2행은 문명과 자연의 대립 구조(對立構造)로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1행의 번지는 문명을, 2행의 번지는 자연적 삶의 터전을 뜻하게 된다. 이처럼 시어는 언어의 지시적 의미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는데, 이를 함축적(含蓄的), 또는 내포적(內包的) 의미라고 한다.
지시적이고 객관적인 외연적 의미에서 암시적(暗示的)이고 주관적인 내포적 의미로 확대되어 가면서 시어는 하나 이상의 의미를 갖기도 한다. 그리고 시어가 하나의 의미로 포착되지 않고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때 오히려 시의 의미와 가치를 풍부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산(山)에
산(山)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김소월, '산유화(山有花)'의 2연)
이 시에서 '저만치'의 뜻은 무엇일까? 우선 어떤 거리를 지시함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구체적으로 몇 미터라고 해석될 수는 없다.
전체적 문맥으로 보아 꽃이 저기, 저 쪽에서 피어 있다는 의미에서 거리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경우 '저만치'는 시인이 꽃과의 사이에서 느끼는 심정적(心情的) 거리감으로 해석되어도 좋다.
그런가 하면 '저만치'는 '저렇게' 또는 '저와 같이'로 어떤 상태나 정황(情況)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산에서 피는 꽃은 저렇게 외로이 피어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저만치'를 거리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과, 상태나 정황으로 해석하는 것이 서로 모순되지 않고 오히려 상승 작용을 일으켜 결과적으로 '저만치'의 의미가 더욱 풍부해지게 되었다.
이처럼 한 단어 또는 한 문장 구조 속에 두 개 이상의 의미가 들어 있는 경우를 일러 언어의 다의성(多義性), 또는 모호성(模糊性)이라 한다. 이것은 문학, 특히 시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하다.
(2) 시어의 선택과 모티브파악
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또 한 가지가 있다면 시를 통하여 작가의 마음을 읽어내는 일이다.작가의 의도를 독자가 알아차린다는 것은 작가에게 있어서도 기쁜 일이다.
그러면 작가의 마음을 읽어내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뭐니뭐니 해도 시가 무엇을 어떻게 표현해 내려고 했는가 하는 점을 찾아내는 일이다.
여기에서 '무엇'은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對象)'일 것이며, '어떻게'는 '표현 기법'일 것이다. 그러니까 작가가 어떤 대상을 표현하는데, 어떤 언어를 사용하여 이를 대치(代置)시키고 있으며, 대신한 그 나름대로의 표현 기법에 의하여 어떠한 의미로 환기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알아차리는 일이 시를 이해하는 지름길이라는 말이다.
작가의 창작 의도에 대한 깊이에 대하여 이해하려는 나의 눈 높이를 맞추고 그 지점에서 대상과 다듬어진 시구(詩句)를 바라보는 것과 똑같은 원리이다. 이에 대한 쉬운 이해는 다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제도 하로밤
나그네 집에
가마귀 가왁 가왁 울며 새었소. (김소월, '길' 제 1연)
'갈 길을 잃은 나그네의 비애(悲哀)'를 주제로 한 김소월 시 '길'의 첫 연이다. 여기에서 시의 전체적 분위기를 압도하는 시어는 '가마귀'이다. '가마귀'를 통해서만이 자신의 모진 신세나 어두운 이미지를 드러낼 수 있다고 판단한 작가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만약 선택된 시어가 '가마귀'가 아니고 '참새'였다면 이 시는 어떤 모습일까?
어제도 하로 밤
나그네 집에
참새 짹짹 울며 새었소.
이와 같은 모습일 텐데, 분위기는 너무나 달라진다. 작가 자신의 길 잃은 나그네로서의 모습을 형상화시키기에는 뭔가 잘못 되었다는 느낌일 뿐이다. '참새'가 아니고 '까치', '종달새' 등의 다른 새였다 해도 '가마귀'가 드러내는 분위기만큼의 정서는 표현해내지 못 할 것이다. 즉 어두운 분위기를 위해서는 가장 잘 선택된 시어라고 여겨진다. 박목월의 시 '청노루'를 보자.
머언 산 청운사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나는 열두 굽이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이 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살펴보아야 할 핵심 소재(제재)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청노루'다. 시의 유기적 구성을 위해 동원된 시어가 모두 자연물이라면 그 중에는 유일하게 동물로 선택된 '청노루'가 있다 작가는 거기에 이 시의 초점을 맞추었을 것이 뻔하다. 작가의 깊은 마음을 이러한 식으로 헤아렸다면 '청노루'라는 제재를 가운데 두고 해석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 되는 것이다.그런데 우리에게 의심스러운 것은 청(靑), 즉 푸른 색깔의 노루가 있느냐 하는 점이다. 노루는 송아지처럼 누런 색깔일 뿐이다.
그럼 이 시를 '황노루/맑은 눈에//도는/구름'이라고 시어를 바꾸어 보면 어떻게 될까?
놀랍게도 이 시가 주는 이미지는 신선함이 아니라 칙칙함이다. 이렇게 되면 작가가 드러내고자 한 신선한 봄, 아름다운 봄의 이미지는 본래의 의도와 벗어나게 되는 실패작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래서 작가는 실재(實在)하지도 않는 '청노루'라는 시어를 의도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이해하여야 한다. 시어의 선택면에서 '청노루'와는 조금 다른 경우이긴 하지만 '개나리'라는 시를 한번 읽어보자.
샛노란 얼굴빛으로
앙증스런 눈웃음으로
너의 가여린 몸짓은
이 봄날을 위해
고스란히 탄생되었고……
티 없이 맑은 하늘을 우러러
대지의 언 가슴을 녹이는
너의 기도는
무언의 고독으로 떨고 있구나
오늘쯤 나는
너를 만나러 가는
한 마리의 나비가 되고 싶다
개나리 화관을 머리에 이고
개나리 목걸이를 목에다 걸고
개나리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나풀나풀 날개 짓으로
너를 만나고 싶다
노오란 꽃잎이 먼저 스러져야만
연두 빛 잎사귀가 트이는
너의 엇갈린 슬픈 사연을 듣고 싶다
나의 빈 가슴 하나 가득
너를 부비고
온통 싱그러운 마음으로
돌아오고 싶다. (김영실, '개나리'(주부 백일장 시부문 장원작))
이 시는 '청노루'에서처럼 작가의 의도적 시어 선택이 흔적으로 남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개나리'에서도 '청노루'를 해석하는 방법은 똑같이
통할 것 같다. 즉 시 전체를 통하여 가장 특징적인 시어(詩語)를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나비'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개나리'를 제대로 관찰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눈길보다도 '나비'의 시선이 더욱 정확하고 예리할 것이라는 것을 작가는 일찍부터 알고 있었음직하다.
그리하여 '오늘쯤 나는/너를 만나러 가는/한 마리의 나비가 되고 싶었던 것이며, '노오란 꽃망울이 먼저 스러져야만/연두빛 잎사귀가 트이는' 개나리의 '엇갈린 슬픈 사연을' 들을 수 있을 만큼의 정확한 관찰이 가능했던 것이다.
더욱이 작가는 여섯 연으로 이루어진 '개나리'전 편을 통하여 3연에만 단 한 번의 '나비'를 등장시키고 있어 핵심 시어의 절제면에서도 무척이나 돋보인다.
(3) 시에 있어서의 언어
나도 어디선가 주워 읽은 이야기인데, 저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 드가(H.G.E. Degas, 1834~1917)가 친구인 상징파 시인 말라르메(S.Mallarme, 1842~98)를 만나서, 「나는 간밤에 아주 기막힌 아이디어(생각)가 떠올라 그것을 시로 쓰려고 했더니 안 되더군.」하고 고백을 하니 말라르메는 싱긋 웃으면서,「그건 그럴 수밖에, 시는 붓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말로써 쓰는 것이거든.」하더란다.
이 우스개에 가까운 일화가 아니라도 시가 언어의 예술인 것은 누구나가 다 잘 아는 바이다. 물론 언어의 예술은 비단 시만이 아니라 소설․희곡․평론․수필․시나리오 등 여러 가지 장르가 있으나, 그런 산문과 시의 상이점은 뒤로 미루고 우선 우리가 주목할 것은 시라는 예술의 소재인 말은 음악의 소재인 소리나 회화의 소재인 선이나 색채와 그 기능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이다. 즉, 음악이나 회화의 소재인 소리나 색채는 그 자체로선 아무런 의미도 지니고 있지 않지만 시의 소재인 말은 그 낱말 하나 하나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실은 이것을 더 설명할 것도 없지만 이즈막 하도 시에 있어서 표현주의자들이〈무의미의 시〉어쩌구들 하니까 거기에 생사람들까지 현혹되어 언어에 대한 근본적 인식이 흐려질까 봐 하는 이야기인데, 우리 인간의 말의 발생 근원을 떠올릴 때 만일 사람이 맨 처음 홀로 이 지상에 출현했다면 그런 경우 말이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요, 역시 말이란 것은 두 사람 이상의 공동생활이나 집단생활이 시작되어서야 비로소 출현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하기는 그렇듯 말이 처음에 소리가 되었을 때는 마치 갓난아기에게서 듣는 것 같은 외침이나 웅얼거림처럼 단순한 것이었겠지만, 그것이 말다운 말이 되기 위해서는 그 입에서 나오는 소리에 일정한 공통적 체계를 이룬 의미가 포함되어 있어서야 비로소 상호간의 의사교환이 이루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회화나 음악은 의미가 없는 소재를 가지고 예술이라는 의미의 세계를 만들어내지만 시는 그것을 형성하는 소재 하나하나, 즉 낱말 하나하나가 소우주를 이루고 있다는 데 바로 시의 비밀이나 어려움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나 나날의 생활 속에서 자기의 의사, 즉 의지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하여 거의 무의식적이며 습관적으로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렇게 생활의 연모롤 쓰이는 말의 의미란 한 사물에 공동적으로 부여한 부호에 지나지 않는 것이어서 오히려 이처럼 단순화되어 있는 것이 생활의 도구로는 편리하다고도 하겠다.
그런데 문제는 말 자체에 저와는 달리 비실용적이요, 복합적이요, 신비하다고나 말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기능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시에 있어서의 말인 것이다.
바로 이 소식을 폴 발레리는〈시인의 작업이란 일상적 실용의 제품(말)을 가지고 예외적이고 비실용적인 시라는 특수한 하나의 세계, 사물의 한 질서, 관계의 한 체계를 창조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흔히 일반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처음에 당하는 곤혹이나 당황 또는 빠지는 함정이나 과오는 저러한 일상적 말에 대한 습관적인 사용법을 가지고 시라는 특수한 세계를 다루려고 드는 데 실패의 원인이 있는 것이다. 물론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나 시에 쓰여진 말이나 그말 자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지만 그 말이 내포하는 기능의 영역에서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과 같은 큰 격차를 가져온다는 것을 시의 초심자들은 먼저 똑똑히 알아두어야 한다.
그러면 말의 또 하나의 기능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앞에서도 말했지만 한 개의 낱말은 한 사물을 가리키는 부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낱말이 또다른 낱말들과 연관을 가졌을 때 전혀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우리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깨닫는다. 가령 우리는 눈[雪]이라는 낱말이 줄기가 단단한 식물의 이름인 줄 알고 있지만, 만약 이 낱말에다 다른 낱말이 보태져서 〈눈 같은 여인〉했을 때 우리는 〈흰 얼굴을 한 순결한 여인네〉를 떠올릴 것이요, 나무라는 낱말도 가령〈나무에 올려놓고 흔드는 격〉하고 말이 이어졌을 때는 전혀 나무와는 얼토당토 않게〈좋은 낯으로 남을 꾀어 위험한 곳이나 불행한 처지에 몰아넣는 것과 같다〉는 뜻이 된다.
이렇듯 그 어떤 낱말은 딴 말과의 접촉에서 그 말이 나타내던 사물의 각가지 경험을 불러일으켜서 그 낱말이 지니던 고정되고 단순화되었던 영역을 벗어나 그 낱말이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던 의미, 즉 새로운 현상의 세계를 전개하는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시의 소재인 언어는 그 낱말 하나 하나가 소우주를 이루고 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 까닭인 것이다. 이제 여기서 실제 〈눈〉과〈나무〉라는 낱말을 가지고 시인들은 그 어떤 특수한 세계를 창조해놓았는지 음미해보자.
먼저 프랑스의 전원시「시몬느」로 유명한 구르몽(Remy de Gourmont)의,
눈
시몬느, 눈은 네 목처럼 희다.
시몬느, 눈은 네 무릎처럼 희다.
시몬느, 네 손은 눈처럼 차다.
시몬느, 네 마음은 눈처럼 차다.
눈을 녹이는 데 불의 키스,
네 마음을 녹이는 데는 이별의 키스.
눈은 슬프다 소나무 가지 위에,
네 이마는 슬프다 네 밤색 머리칼 아래.
시몬느, 네 동생 눈이 정원에 잠들어 있다.
시몬느, 너는 나의 눈, 그리고 나의 연인.
다음은 제1차 대전 때 전사한 기자 출신의 미국시인 킬머(Joyce Kilmer, 1886~1918)의 시로 그리 유명하지는 않으나 이 한 편의 시가 널리 애송되었다.
나 무
나는 나무처럼 사랑스런 시는
결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단물 흐르는 대지의 젖가슴에
주린 입술을 꼭 대고 있는 나무
종일토록 잎이 무성한 팔을 들어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는 나무
여름날이면 자신의 머리카락 속에
방울새의 보금자리를 틀게 하는 나무
가슴에 쌓이는 눈이거나
내리는 비와도 정답게 지내는 나무
시는 나같은 바보가 쓰지만
나무는 오직 하느님만이 만드신다.
저렇듯 위의 시들에서 보다시피 한 사물의 부호에 불과하였던 〈눈〉이나〈나무〉라는 낱말이 그 말의 앞뒤에 결합되고 배합된 말로써 천태만양, 또한 무진장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좀더 풀이하면 〈시몬느, 너는 나의 눈, 그리고 나의 연인〉이라고 했을 때〈눈〉은 바로〈시몬느라는 연인〉의 대명사가 되었고〈나는 나무처럼 사랑스런 시는 결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고 했을 때〈나무〉는 마치〈시〉와 동질성을 지니게 되는 것으로, 이렇듯 말이란 신비하고 무한한 기능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본디 말은 그것이 일상적인 말이건 시의 말이건 반드시 한 사물을 지시하는 의미적 기능과 그 말이 발하는 음향의 청각적 기능을 함께 지닌다.
그리고 그 중 의미적 기능은 어떤 장소, 어떤 시간 속에서도 그 한 가지의 지시성을 변화시키지 않으나 청각적 기능은 때와 장소에 따라서 또는 그것을 말하고 듣는 사람의 정서에 따라서 천만 가지 변화를 보인다.
가령 우리가 쓰는〈안녕하십니까〉라는 말 하나만 하더라도 그것을 말하는 사람의 몸짓이나 표정을 비롯해 그 말이 지니는 음향의 강약이나 고저․장단․음색 등 복잡 미묘한 요소들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말의 청각적 기능을 영국의 탁월한 문예비평가 I.A.리처즈(Ivor Armstrong Richards, 1893~1979)는 말의 정서적 기능이라고 부르고〈말이 우리들에게 어떤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정서적 기능으로서 거기에 말이 우리들의 역사를 움직이는 불가사의한 작용이 감추어져 있다〉고까지 말한다.
그래서 만일 훌륭한 시인이 되려면 말의 표현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다시 리처즈의 말을 빌면〈의미 속의 의미〉, 즉 말의 정서적 기능을 체득하는 것이 절대적 조건이라 하겠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이 언어의 정서적 기능을 시에 있어 한갓 리듬적인 음악성만으로 오해하여서 이미지 중심의 현대시의 조형성(造形性)에는 그것이 결여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것은 큰 착각으로서 시 속에 담긴 어떠한 이미지도 단지 박자 본위의 음악성이 아닐 뿐이지 말이 지니는 내질적인 음악성이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하겠다. 그래서 훌륭한 시적 이미지는 인간이 지니는 모든 감각적 기능을 구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의 음악성에 관한 것은 뒤에 다시 언급하겠기에 이만 줄이고 다음은 말의 기능과 함께 우리 인간존재의 가장 기본인 생각, 즉 사고와 말, 즉 언어의 관계를 좀 살펴보도록 하자.
아직까지도 일반만이 아니라 우리 시단의 일부 통념 속에는 생각(느낌도 포함)과 말, 즉 사고와 표현을 별개의 것으로 알아 그들은 항용 시가 될 생각은 가득한데 말이 찾아지질 않아 못 쓴다고들 한다.
그러니까 자기의 생각과 부합되는 말, 특히나 아름다운 말(즉, 수식어)을 고르기에 부심하며 시를 마치〈꾸며진 말〉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이런 사람들은 그 생각이라는 것이 말로써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라 하겠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보면, 가령 어떤 사람이 달을 쳐다보고 <달이 밝다〉로 하였다가〈달이 맑다〉로 고쳤다면 이것은 표현, 즉 말의 변화만이 아니라 생각과 느낌의 변화인 것이다.
아니, 이렇게 말하기보다 달이라는 그 사물에 대한 인식 자체가 말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금세기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1889~1976)는〈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그의 저서 『숲 속의 길』속에 나오는 사고에 대한 유명한 말인데〈우리들은 언어를 통하지 않고선 존재와 만날 수도 없고 언어는 존재를 우리에게 내어주는 유일의 것이다〉라고 하면서 설명하기를, 〈가령 우리가 숲 속을 가다가 샘을 만났다고 하면 그것이 샘이란 것을 알아차릴 때 우리는 샘이란 말로 그것을 인식한다.
또한 공중의 새를 보았을 때도 그 새의 존재를 포착하는 것은 새라는 언어로써, 물론 그때 새라는 말의 소리를 내지 않았더라도 그 존재를 우리의 인식 속에 가만히 포착시키는 작용을 한 것은 언어다〉라고 갈파한다.
이렇듯 말이 없다면 생각이 없는 것이요, 말을 통한 인식이 없다면 존재는 있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말은 존재를 존재하게 한다고나 하겠다.
이런 소식은 저 근세 철학의 시조라는 데카르트(Rene Descartes,1596~1650)의〈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내가 있다〉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요, 보다 우리 김춘수(金春洙)시인의 작품 「꽃」이 그것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이 시에서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인식의 대상으로 삼아서 말로 포착하는 것이요, 그것은 또한 그 시의 결론대로 그 사물에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또한 말은 저렇듯 존재를 만나게 하는가 하면 한 걸음 더 나가 그 존재의 영역을 한정시키기도 한다.
즉, 그 말이 지니는 한도 내에서, 다시 말하면 그 사물에 대한 인식의 깊이와 넓이에 따라 마치 존재는 등불의 강약에 비례하여 사물이 모습을 드러내듯 한다. 그래서 존재에 대한 인식, 즉 생각의 깊이와 넓이는 바로 언어에 대한 넓이와 깊이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렇듯 말의 숨은 기능을 생각할 때 시를 쓸만한 생각은 많은데 말을 찾지 못한다는 얘기는 시를 쓸만한 생각을 못해냈다는 얘기요, 일반이 바라는 소위 아름다운 말, 즉 수식어나 수사법은 이미 만들어지고 쓰여지고 낡아진 말들의 시체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죽은 말들을 이리저리 바꿔서 배열해보았자 그것이 창작인, 즉 비로소 만들어지는 시가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시란 평범한 일상적인 말을 가지고 바로 그것으로 일상적 의식을 넘은 세계를 표출해내는 것으로, 여기에 시를 쓰는 어려움이 있다.
지난 장에서 한 개의 낱말은 한 사물을 가리키는 단순한 부호에 지나지 않지만, 그러나 그 낱말이 또 다른 낱말들과 배합되었을 때 그 낱말이 지니던 고정되었던 의미의 영역을 벗어나 그 낱말이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던 의미, 즉 새로운 현상의 세계를 전개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런 말은 그 말하는 태도랄까 솜씨랄까, 즉 말씨에 의해서 또한 천태만양의 의미를 달리한다. 가령 말의 배열만 해도 〈나는 이것을 너에게 준다〉를〈이것을 나는 너에게 준다〉또는〈너에게 나는 이것을 준다〉로 그 순서를 바꾸면 그 말의 강조하는 점이 달라진다.
즉,〈나는〉이 먼저일 때는 내가 강조되고, 〈이것을〉이 먼저일 때는 그 물건이, 또〈너에게〉가 먼저일 때는 너라는 상대방이 강조되어 있다고 하겠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간다〉는 말도 산다 나는이라고 어순(語順)을 바꿔놓으면 퍽 그 말의 뉘앙스가 달라진다. 더구나 이 말을 하는 사람 자체나 그 태도 또는 그 사고나 감정에 따라 그 의미 내용이 전혀 딴판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일상적 말씨도 그러하거늘 더구나 시에 있어서는 저러한 일상적 말의 평면적 질서를 뛰어넘는 새로운 질서가 요구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실은 이 점이 우리가 시를 쓰려고 들 때 그렇듯이 아무렇게나 잘 지껄이던 말이 막히고 안 나오는 까닭이기도 하다.
즉, 시의 말과 일상어의 구별은 그 사용하는 말의 다름과 함께 또한 꾸며 전 말(수식어)과 꾸며지지 않은 말로서의 구별이 아니라 말의 기능을 깊이 인식한 그 사용법, 즉 말씨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폴 발레리는 일상어나 산문을〈걸음[步行]에다〉, 시를 〈춤[舞踊]〉에다 비교하여 시에 있어서의 말씨의 특성을 아주 적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즉, 일상어나 산문에 비유된〈걸음〉이란 그 어떤 하나의 대상에 향하여 진행되는 행위로서 그 목적이 그 대상에 도달하는 데 있다.
이처럼 일상어나 산문은 오직 그 의미를 전달한다는 지시기능만이 중시되기 때문에, 그 목적이 달성되고 나면 말은 그 이루어진 행위 속에 흡수되고 마는 것이다.
가령〈이리 좀 오시오〉하는 일상어는 그 말로써 상대방이 자기에게 다가오면 그 이루어진 행위와 함께 사라지고 만다.
즉, 결과가 원인을, 목적이 수단을 흡수하고 만다고나 할까, 흔히들〈모로 가도 서울만가면 된다〉는 말처럼 그 말에 따르는 사람이 어떤 걸음새를 보여주었건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시의 말에 비유된〈춤〉은 그곳에서 이곳에 다다르기까지 그 행위의 모습 자체가 어떠한가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춤의 궁극적 목적은 그 행위 자체에 있기 때문에 그 행위의 자태, 즉 맵시가 바로 춤의 생명인 것이다.
이렇듯 되풀이되는 본질이 시의 말의 본질일 뿐만 아니라 예술에 있어서의 본질이요, 원리인 것이다. 즉, 우리가 명시라고 불리는 시를 애송한다든가, 어떤 명화를 걸어놓고 감상한다든가, 어떤 명곡을 되풀이해 듣는 것은 모두 이런 까닭인 것이다.
이제 저러한 말의〈춤〉상태를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익숙한 김소월(金素月)의 「초혼(招魂)」을 통해 새삼 음미해보기로 하자.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자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우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그 소리는 비껴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우리는 이 시를 그 말의 조직에 대한 아무런 구체적 지식이 없이도〈걸음〉같은 일상어나 산문과는 전혀 다른, 소위 말의〈춤〉을 감득(感得)할 것이다.
모두 알다시피 이 시의 주제와 제목이 되어 있는 〈초혼〉은 죽은 사람의 나간 혼을 다시 불러들임을 뜻하는데, 우리 민간의 전래풍속으로는 사람이 죽으면 누가 지붕에 올라가거나 또는 마당에서 북쪽을 향해「아무 동네 아무개 복(復ㅡ다시 돌아오라는 뜻).」하고 세 번 외쳐서 나간 혼을 다시 불러들이는 의식을 치르고서 발상(發喪)에 나아간다. 어쨌거나 소월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死別)의 통한을 이렇듯 말의 새로운 배합과 배열로써 황홀할 정도의 시적 표현에 나아간 것이다.
시가 지니는 말의 배합과 배열에 의한 무용적 요소를 발휘하게 하는 방법이 무엇이냐 하면 그 하나는 말의 생략과 압축이라 하겠고, 또 하나는 지난번에 언급한 바 있는 말의 울림 즉 리듬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라 하겠다.
먼저 말의 압축이라는 면에서 살필 때 시가 가장 짧은 형태의 문학임은 누구나가 다 아는 바로서 산문이 설명적이고 서술적인 것과 반대로 시는 생략과 압축이 행해지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것은 위에서 설명한 대로 일상어나 산문은 그 목적물에 도달하려는〈걸음〉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려고 설명적이 되지만, 시의 경우는 그 말의 압축과 생략으로 이뤄지는 암시나 상징이 바로 그〈춤〉과 같은 임무를 수행한다.
이렇듯 시에 있어서 말이 암시적 또는 상징적이 되기 위하여는 그 뜻이 넓고 깊을수록 이상적이라 하겠다. 그래서 미국의 선구적인 이미지스트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1972)는〈결국 위대한 시란 최대한의 의미를 지닌 언어에 불과하다〉고 말했는데, 이 말은 곧 여러 가지 말이 분담할 의미를 하나의 말이 전담하는 최대한의 암시력을 지닌 언어를 뜻함이요, 또한 이것은 여러 가지 말이 생략되고 극한적으로 압축된 말을 뜻한다. 그러면 실제 저렇듯 깊고 넓은 의미의 세계를 지닌 말은 어떻게 해서 얻어지느냐 하면, 언어는 오직 전달의 부호나 기호가 아니고 그것은 존재에 대한 인식의 유일한 연모로서 어떤 사물에 대한 깊고 넓은 의미를 인식하는 데서 거기에 비례하는 응축(凝縮)된 말을 획득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다음, 울림 즉 말의 리듬은 이 역시 지난번 말했다시피 언어의 본질적 기능 중의 하나인 정서적 기능의 주요 요소로서 한쪽의 의미적 기능은 어느 경우라도 확연한 하나의 지시적 세계를 지녀서 변화하지 않지만, 이 청각적 세계인 울림은 그때그때 우리의 상황이나 정상(情狀)에 따라서 천태만양의 변화를 나타낸다.
그래서 시에 있어서의 감정(감정 또는 감성)의 영역은 바로 이 리듬의 기능으로서 시가 독자를 감동시키는 으뜸가는 요소인 것이다. 가령〈안녕하십니까〉라는 가장 평범한 말도 그 몸짓이나 표정에 따라 그 말이 본디 지니는 뜻과는 다르게 되지만, 그 중에도 그 말소리의 강약고저나 속도․음색 등에 따라 상대방에게 복잡 미묘한 반응을 볼러 일으킨다.
그런데 이러한 말의 울림을 조율(調律)하는 시의 리듬을 단순한 외형적 음악성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허다하다. 이즈막에 와서도 그렇지만 근세에 이르기까지 시에 대한 일반적 관념은 산문과 상대적인 운문, 즉 일정한 리듬을 지니고 있는 글로 여겼다. 그래서 옛 중국이나 서양의 정형시에 있는 평측률이나 압운율 또는 우리 시조와 같은 자수율에 의한 박자 본위의 음악성에다 저러한 시의 리듬을 찾거나, 아니면 자유시란 그것을 좀 변형시킨 것으로 여기나 이것은 모두가 오해로서 엄밀히 말하면 말이란 본래가 운율 위에서 성립되는 것이라 하겠으니, 왜냐하면 말이 곧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의 발상 자체가 본래적으로 운율을 지닌다고 하겠다.
오직 자유시가 지난날의 시 모양으로 형식적인 외재율(外在律)의 속박을 받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말이 지니는 청각적 요소, 한 걸음 나아가서는 현대시가 즐겨 주장하는 회화적 요소 속에 깃 든 내재율을 지니고 있고 또 지녀야 한다고 말하겠다.
즉, 심상(心象)이란 것도 말로 만들고 그 말은 참된 음악성(울림)이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고나 하겠으며, 나아가서는 시로 성립되는 표현요소 모두가 리듬 속에 포괄되어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래서 정형시에 있어서는 어떤 기성의 틀에 맞추는 것이 시의 리듬이지만, 이제 자유시는 각개 시인 스스로가 시 한 편 한 편마다 보이지 않는 리듬의 틀을 만들어 그 시상(詩想)을 진행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때문에 시(특히 자유시)를 창조의 창조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상 시에 있어서 언어를 살펴보면 시의 말이란 결코 말의 수효를 많이 아는 것도 아니고, 또 소위 미사여구를 많이 익히는 것도 아니며, 그저 우리가 현실생활에서 쓰는 그 평이한 말의 의미적 기능과 정서적 기능을 깊이 이해하고 그것을 어떻게 솜씨 있게 쓰느냐 하는 데 그 열쇠가 있다는 바로 그 점이다.
(4) 시어(詩語)에 대하여
균형(均衡)과 조화(調和)를 지향했던 고전주의자들은 시에 구사된 말 곧 詩語를 일상어와는 달리 귀족적인 우아한 말(雅語)로 한정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개성과 감정을 중요시하는 낭만주의자들에 의해 거부된다. 시어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는 말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굳이 시어와 일상어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시어와 비 시어를 구분하여 논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시어와 비시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어휘가 한 작품 속의 특정한 자리에서 적절하게 쓰이고 있는가 그렇지 않는가가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어떤 특정 어휘가 A라는 작품 속에서는 능률적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B라는 작품 속에서는 그렇지 못할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를 잘못 받아들여 오늘의 詩語는 제한이 없는 것이니 아무것이나 마음대로 갖다 써도 무방하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물론 모든 언어는 시 속에 사용될 수 있지만 시인들이 보다 즐겨 사용하는 詩語들이 따로 없는 바가 아니며, 또한 보다 능률적인 시어를 생각할 수 없는 바도 아니다. 그렇다면 능률적인 시어란 어떤 특성을 가진 말들일까 생각해 보도록 하자.
첫째, 보다 다양한 내포적 의미를 지닌 말
C. B. Wheeler는 시적 언어의 특성을 한마디로 이중성(doubleness)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산문은 지식이나 정보를 전달하는 글이므로 의미가 단순 명료할 수록 효율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시는 복잡다단한 정서를 전달하는 글이기 때문에 분명하게 표현하기보다는 은근한 울림을 담고 있는 것을 선호한다. '내 마음은 고요하다'라는 표현보다는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시구가 더 은근하다. '고요하다'에 담겨 있는 의미는 단순하지만 '호수'가 지니고 있는 내포적 의미는 다양하기 때문이다.
'호수'는 '고요함'뿐만 아니라, 넓음, 시원함, 맑음, 깊음 등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능률적인 시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딱딱한 말보다는 보다 부드러운 말
어떤 이는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저항적이고 투쟁적인 내용의 시를 쓰자면 오히려 부드러운 말보다는 딱딱한 말이 강렬한 느낌을 불러일으켜 보다 효과적일 수도 있다는 주장을 펼지도 모른다. 시인도 그릇된 세상을 비판하고 불의에 맞서 투쟁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이 시를 통해 행해질 때는 격정적인 선전문이나 자극적인 구호문에 그쳐서는 곤란하다. 시의 힘은 직설적인 독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감화에 있다. 시는 용맹스런 장수의 포효보다는 인자한 어머니의 손길과 같아야 한다. 그것이 보다 큰 감동적인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시는 산문과는 달라서 운율이라는 신비로운 가락으로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글이다. 그 운율 형성에 효율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언어는 역시 부드러운 쪽이 아니겠는가.
셋째, 거친 말보다는 아름다운 말
시는 언어 예술이다. 즉 말로 빚어낸 아름다운 작품이다. 만일 어떤 시가 아름다운 요소를 전혀 지니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것을 시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아도 무방하리라.
시를 예술의 반열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아름다움이 전제되어야 한다. 요즘 해체론자들 가운데는 왜 아름다운 시만 고집하느냐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만약 그러한 주장을 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自己流의 言述에 대한 명칭을 詩가 아닌 다른 것으로 새로이 명명하라고 권하고 싶다.
넷째, 저속한 말보다는 우아한 말
시는 단순히 아름다운 말의 기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시정신이 담긴 글이다. 시정신이 무엇인가를 따지는 것은 간단하지 않지만 나는 그것을 승화된 소망(世俗的인 慾望의 淨化) 곧 眞, 善, 美 그리고 節操와 廉潔을 추구하는 선비정신과 통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말하자면 시인은 단순한 언어의 기능인만이 아니라 고고한 정신 세계를 추구하고 있는 修道者로 보고자 한다.
그러한 시인의 생각을 담고 있는 시어가 어찌 정화된 우아로운 말이 아니겠는가. 만일 어떤 시인이 상습적으로 저속한 시어들을 즐겨 구사한다면, 설령 언어를 부리는 재주가 인정된다손 치더라도 그는 아직 시인의 자질을 원만히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으리라.
다섯째, 가급적 표준어를 어법에 맞게
토속적인 정서를 실감나게 드러내기 위해서 사투리를 즐겨 사용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사투리가 때에 따라서는 구수하고 정감 어린 느낌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시에 표준어와 사투리를 아무 제한 없이 혼용해도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이는 잘못된 인식이다.
가능하면 표준어를 사용할 일이고 어법에 맞도록 쓸 일이다. 시에서는 비문법적인 표현도 경우에 따라서는 허용된다. 그러나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경우에 마지못해 그렇게 된 것이지 그것이 시의 능사는 아니다. 시의 이상적인 문장이란 산문과 마찬가지로 표준어를 어법에 맞도록 쓴 것이다. 표기도 정확해야 한다. 그런데 적잖은 시인들이 표기법 같은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언어 예술가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우선 표기법이나 문법부터 착실히 습득해야 할 일이다.
여섯째, 외래어보다는 순수한 우리말을
소위 글로벌 시대라고 해서 외래문화들이 거센 물결처럼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이에 따라 시인들의 작품 속에도 외래어가 무분별하게 범람하고 있는 경우를 보게 된다. 물론 문화가 서로 섞이다 보면 외래어도 언젠가는 한자어들처럼 우리말화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생각하면 마치 우리의 순수성이 유린당한 것처럼 느껴져서 개운치가 않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우리의 얼과 문화를 잘 가꾸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얼과 문화의 바탕이 되는 것이 언어이고, 언어를 가장 사랑하고 지키는 이가 곧 시인들이 아니겠는가. 위대한 한 시인의 탄생은 바로 그 민족어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다고 역사는 일러주고 있다.
시인은 민족어의 연금술사이며 또한 수호자들이라고 말해도 좋으리라.
일곱째, 언어 외적인 매체들
시가 언어 예술의 한계성을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은 일찍부터 있어 왔다. 그 대표적인 경향이 꼴라쥬의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림, 도형, 사진 등의 문자외적 매체를 시에 끌어들이는 경우다.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해 낼 수 없는 절실한 정황을 시각 매체의 도움을 받아 어쩔 수 없이 그려냈다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시라는 이름으로 부르려면 어디까지나 언어 매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한다면 그 작품은 다른 장르의 명칭으로 불러야 하리라. 시는 언어 예술이므로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면 이미 시라고 할 수 없겠기 때문이다.
▶ 시어는 일상어를 쓰지만 일상어와는 다르다.
'눈물'의 사전적 의미: 눈알 바깥쪽의 위에 있는 눈물샘에서 알칼리성의 반응으로 는 정신의 감동으로 심한 자극을 받아서 나오는 물.
(예) 눈가에 눈물이 돈다.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 김현승의 <눈물>
→ 이 시에서 '눈물'은 '순수함의 정수(精髓)'라고 할 수 있다. '눈물'의 관습적인 상징으로 슬픔이나 삶의 고뇌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 시에서는 그런 상징성과 함께 그것들을 극복한 정신적 충만감 까지 포괄하고 있다.
여기서 '눈물'은 기름진 땅에서 떨어져 새로운 생명을 창조해 내는 존재로서 바로 '순수한 생명'을 표상하는 것이다.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 파란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 중에서
→ '번지'란 땅을 인위적으로 나누고 번호를 부여한 것이다. 제1행에서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겼다는 것은 원래 자연이었던 곳에 인간의 주택지가 인위적으로 조성되었다는 뜻이다.
2행에서는 자연인 그 산에 살던 비둘기만이 보금자리를 잃었다고 했다. 1행과 2행은 문명과 자연의 대립구조로 되어있다.
머언 산 청운사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나는 열두 굽이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박목월의 <청노루>
→ 노루는 송아지처럼 색깔이 누렇다. 푸른색의 노루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황노루'라고 하면 신선한 이미지는 없어지고 어둡고 칙칙해진다.
이 시는 신선하고 활기차고 아름다운 봄의 이미지를 그리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청노루'라는 시어 선택은 매우 적절하다고 본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김소월의 <산유화>
◎ 이 시의 구조: 생명의 탄생→ 고독한 인간의 존재→ 죽음
◎ '꽃'의 의미: 유한하고도 고독한 존재
◎ '저만치'의 의미: '꽃(자연)과 나(인간)와 거리(자연에 대비한 고독한 인간-
작자의 감정이입)'
◎ '저만치'의 모호성: 거리(심정적 거리), 저와 같이 ,저렇게
어제도 하로밤
나그네 집에
가마귀 가왁가왁 울며 새었소. -김소월의 <길> 중에서
→'갈 길을 잃은 나그네의 비애'를 주제로 쓴 시다. 여기서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압도하는 시어는 '가마귀'다. '가마귀'를 통해서만 자신의 모진 신세나 어두운 이미지를 드러낼 수 있다고 판단한 작가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선택된 시어가 '가마귀'가 아니라 '참새', '까치', '종달새' 등이었다면?
(5) 절제된 언어 질서로 표현하기
→ 시는 산문과 다르므로 고도로 압축된 언어로 표현하라.
→ 조사와 어미를 잘 써야한다.
→ 떠오르는 느낌을 산문으로 써서 운문으로 갈무리 해 보라.
◇ 운문과 산문의 차이
다른 때보다 한 시간 먼저 일어나
오랜만에 아침밥을 먹다보니
아차! 오늘이 바로 중간고사 시작 날
무대책이 상대책이라 믿고
뱃심 하나로 치르는 3교시 영어시험
물음표에 긴장하고
마침표에 한숨쉬고
가렵지도 않은 머리를 연필로 긁적거린다. -학생 작품 <시험> 중에서
→ 이 부분을 산문으로 옮겨 보자.
다른 때보다 한 시간 먼저 일어나 오랜만에 아침밥을 먹었다. 갑자기 오늘이 시험날이라는 사실이 생각났다.
'아차, 오늘이 바로 중간고사 시작날이구나."
공부를 하나도 안 했는데 어떡하지? 그러나 나는 무대책이 가장 좋은 대책이라고 생각하며 학교에 갔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시험 내내 긴장의 연속이었다. 답답해서 괜히 머리만 긁었다.
→ 표현도 산문과 다르다. 시험치는 동안 답을 몰라 쩔쩔 매고 긴장했다는 표현을 '물음표에 긴장하고, 마침표에 한숨쉬고"라고 했다.
여기서는 '.' '?'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윤동주는 서시에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노래했는데, 여기서도 단지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 때문에 괴로워했다는 뜻이 아니다. '외부의 아주 미세한 자극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고통을 느껴 왔다' 는 의미다.
◇ 떠오르는 느낌을 산문으로 써서 운문으로 갈무리 해 보기
베개를 사뭇 진지하게 무릎 위에 올려놓고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이렇게 봐 본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벌써 베개와 동고동락 한지도 4년이 넘는다. 베갯잇 색깔이 그 세월을 입증이라도 하듯 약간 바래 있다. 거의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잠잘 때면 가장 밀접하게 붙어있던 나의 베개… 엄마에게 혼나거나 속상한 일로 울 때면 난 베갯잇에 머리를 묻히고 퍽퍽 울어댔다. 그러면 아무 말없이 베개는 나의 눈물을 다 받아 주었다.
그래 가끔은 침도 흘리고 신경질 부리며 발로 차기도 했지만 그래도 역시…그녀는 나의 소중한 친구였다. 나의 사춘기 시절을 - 얼마나 고민 많을 때인가?- 모진 고생을 해 가면서도 나의 슬픔을 그리고 기쁨을. 아무에게도 말 못했던 고민을 그녀는 꼬옥 간직한 채, 오늘밤도 자신의 몸에 매 머리가 뉘어 지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말을 할 줄 모릅니다.
그녀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녀에겐 심장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겐 이 우주보다도 더 넓은 마음씨가 있습니다.
그녀는 진실하며 나를 편하게 하는 부드러움을 가졌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절대로 비밀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그녀를 곁에 두고서 난 오랫동안 그녀의 소중함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제서야 깨달았습니다.
그녀의 '소중한'을 …그리고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는지…
그녀의 이름은 베개입니다. <베개를 바라보면>
구부정 휘어진 허리 툭툭 쳐가며
정지로 나간 어멈
새벽녘부터 분주하다
장작개비 아궁이
뜨겁게 타오르고
무쇠 솥뚜껑
열렸다 닫혔다
정지에 김이 달아오르고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에서
어멈 얼굴 가리어져 보이지 않는다.
추수하던 날 에비는
어멈을 어찌나 달달 볶아댔는지
어멈 정신이 쏙 빠졌나보다
"음메음메" 울어대는 살찐 송아지
여물 주는 것도 잊었네
어멈 돕기 위해
개똥이 마당 쓸던 빗자루 내려놓고
헛간에 쌓아둔 곡물 집어들며
송아지 여물 만든다며 가마솥 휘휘 젖는다.
아랫목에 앉아 가르렁거리던 할배는
가래침 '퇘' 뱉아 내고
어멈에게 밥 달라 소리치면
어멈은 하던 일 재쳐두고
정지로 달려가 밥상 차린다.
된장국 냄새 구수하게 풍긴다
그 옛적 개똥이 잊고 살았던
어멈의 그리움을
누렇게 뜬 된장국에서 기억한다.
무명치마 훌러덩 걷어 부치고
논밭일 한다고
하얀 손수건 머리에 동여맨
그리운 나의 어멈!
어릴 적 바쁘게만 살아갔던 어멈!
콧물 질질 흘리면 치맛자락으로
쓰윽 하고 닦아주던 나의 어멈
어멈이 보고 싶다.
- 김필남 "그가 보고 싶다.-어멈이 보고 싶다." (2002년 졸업, 계명대학교 백일장 은상)
눈물 아롱아롱
피리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리.
흰 옷깃 여며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 삼만리.
신이나 삼아줄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굽이굽이 은핫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호올로 가신 님아. -서정주의 <귀촉도>
→ 2연은 님을 떠나보내고 평소에 못해 준 데 대한 悔恨(회한)을 노래하고 있는데 언뜻 보기에 말이 제대로 연결되지 않는 듯하다.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재배열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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