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시인(詩人)
1. 시의 정의(定義)
우리 시문학사에 있어서 시에 대한 정의는 주로 서구의 시문학 내지 그들의 시론에 의지해 왔음이 사실이다. 서구에서의 시의 출발은 그리이스어의 ‘포에시스(Poesis)’로 보고 있다. 그 말에는 행동과 창작의 뜻이 담겨 있다.
또 시인을 일컫기를 ‘포에타’라고 했는데 이 말에도 <창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시(詩)나 시인(詩人)은 어원적으로 같은 뜻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덕수(文德守) 편저『세계문예대사전』에서 살펴보면 시와 시인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시(詩)란 집을 짓고 불을 붙이고 농사를 짓는 일과 동등한 일로 보았으며, 시인이란 논밭을 갈아서 일하는 대신에 주문을 외어 비를 내리게 하고 수확의 감사를 노래하는 데 전력을 다한 사람이었다.
이런 뜻에서 시인은 구체적인 시(詩) 작품, 즉 포에마(Poema-Poem)를 만들어내는 제작자이며 기술자이나, 또 한편 내용(內容)면에서는 포에마의 본질인 포에시스(Poesis)는 인간의 최고선(最古善)인 행복(幸福)의 문제, 즉 윤리적(倫理的) 내용을 포함하므로 모방자(模倣者)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인(詩人)의 이 같은 이원성(二元性)에 입각하여 포에타와 미메타를 병용(竝用)했고, 플라톤은 시인을 진리에서 3단계는 먼 모방자라 했다.
즉 책상 집 등의 사물의 이념을 만든 신(神)인 창조자가 있고, 그 이념에 따라 실제의 책상 집 등을 만드는 제작자 있고, 그 제작자의 제작물을 모방해서 그림을 그리고 언어로 모방해서 노래하는 시인(詩人)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시의 발생(發生) 기원과 시에 대한 개념은 동양에서도 동일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 시(詩) 문학사(文學史)에서도 시의 발생이란 영고(迎鼓)․동맹(東盟) 등에서 열리는 제천의식(祭天儀式)에서 싹터 왔음을 볼 수 있으며, 시(詩)가 가지는 ‘창작’의 의미도 그들과 같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시의 어원(語源) 같은 것은 우리가 쉽게 말할 수 있으나 ‘시(詩)란 무엇인가’라는 정의(定義)를 내리기는 그렇게 쉽지 않다.
엘리어트의 ‘시(詩)에 대한 정의(定意)의 역사는 오류(誤謬)의 역사’라는 말이 잘 대변해 준다. 이 말은 시대(時代)에 따라서, 시인에 따라서, 시의 종류에 따라서 시를 보는 안목이 모두 다름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지극히 상식(常識)적인 시(詩)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면 우리는 다시 사전을 들춰 볼 수밖에 없다.
이상섭(李商燮)은『문예비평 용어사전』에서 ‘시(詩)에 대한 가장 간단한 정의(定義)는 소설․희곡․일반 산문이 아닌 글’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 말은 시와 산문의 구별을 의미한다.
시(詩)와 산문(散文)은 똑같이 민요(民謠), 무용(舞踊)에서 출발했지만 시(詩)는 음악적(音樂的) 요소가 더 많이 깃 든 쪽으로 흐르고 산문은 철학(哲學)․역사(歷史)․웅변(雄辯)과 같이 토의가 본질인 쪽으로 갈리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시(詩)는 운율(韻律)에 의한 모방(模倣)이다’라고 한 말을 깊이 새겨볼 만하다.
시(詩)란 언어(言語)로 쓰여진 문학작품(文學作品)이다.
문제는 ‘시(詩)만의 언어(言語)’인데 이러한 ‘시(詩)의 언어(言語)’는 불완전한 일상어를 극복하여 ‘완전한 언어’를 지향한다.
가령 일상에서 쓰이는 ‘장미꽃은 아름답다’나 ‘나는 슬프다’ 등으로는 ‘장미꽃의 아름다움’과 ‘나의 슬픔’을 보다 치밀하게 담아낼 수가 없다.
따라서 시는 일상적 언어로서는 표현이 불가능한 대상의 어떤 실재(實在)를 특별(特別)한 언어-완전한 언어-로 표현해낸 것이다. 이 때 더불어 요구되는 것은 대상(對象)에 대한 시인의 반응과 그러한 반응(反應)을 시적 상상력(想像力)에 의해 유효 적절하게 시화(詩化)함이다.
코르그(Jacob Korg)는 ‘산문(散文)은 정보(情報)의 전달(傳達)과 이지(理智)에 관여하는 언어이며 시(詩)는 감정(感情)과 상상(想像)에 관여하는 언어’라고 했다.
이 말대로 시(詩) 언어는 대상을 지닌 사실 혹은 사건 그 자체를 묘사하는데 관심을 갖지 않고 그 것들에 대한 시인의 반응에 관심을 갖는 것이요 그 것이 감정과 상상에 의해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종합해 보건대 시인(詩人)은 특별한 감정을 특별한 언어로 전달하되 그 방법상 특별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시(詩)를 실현시키는 사람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시학(詩學)』을 서구시(西歐詩)의 규범으로 삼는다면 동양(東洋)에서는『시경(詩經)』이 시(詩)의 근원(根源)을 밝힌 책이라 할 수 있다.
동양에서는『시경』에 나오는 ‘사무사(思無邪)’나 ‘시언지(詩言志)’ 같은 개념이 전통적인 시관(詩觀)의 개념으로 내려왔다. 이런 개념(槪念)은 교훈적(敎訓的)이요 공리주의(公理主義)적인 성격을 띤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詩)란 어디까지나 덕성(德性)을 기르는 방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낙이불음애이불상(樂而不淫哀而不傷)’해야만 된다는 것이 중국 전통시가 주장하는 바다.
2. 시(詩)의 인식
인간(人間)은 표현(表現)의 욕구(欲求)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느낌이나 의지를 밖으로 드러내게 된다.
일상적인 어법(語法)은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의지(意志), 권유(勸誘), 명령(命令),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감정 등을 제한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청자의 즉각적인 응답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문자를 통한 표현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상대적으로 덜 받으면서 독자의 간접적인 정서의 변화와 대응을 일으키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언어란 고독한 개체로서 이 세계에 존재하게 된 인간과 세계 그리고 타인 사이에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들어 줌으로써 고독(孤獨)을 해소(解消)하고 연대감으로서 안정감을 가질 수 있게 해주는 최선의 기능이라고 했다.
일반적(一般的)으로 언어(言語)는 정서(情緖), 정보(情報), 명령(命令), 친교(親交)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기능을 활용하되 더 나아가서 언어에 새로운 의미를 더해주는 것이 시인의 존재 이유이다.
당신은 왜 시를 쓰려고 하십니까?
당신은 왜 시인의 험난한 길을 걸어가려 하십니까?
일반인들이 가지지 못하는 심리적(心理的) 결핍(缺乏) 상태 즉, 규정(規定)화된 세계에 대한 반발과 반성, 일반인들이 가지지 못하는 심미적 현상의 드러냄 등이 시를 쓰고자 하는 욕구를 일으키게 한다.
시인은 세계를 변혁한다. 그것은 점진적이고 내면적인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이제 당신이 알고 있는, 당신이 존경하는 시인들을 떠올려 보자. 그들이 시(詩)로서 나타내고자 했던 세계와 그 세계에 대한 인식, 그 시인이 살았던 행적들을 생각해 보자.
그 중에는 세인의 주목을 받고 세속적 명예(名譽)와 부(富)를 거머쥐었던 사람들도 있을 것이며 평생을 음지(陰地)에서 고독한 글쓰기를 계속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분명 이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정치가, 자본가들이다. 그들은 막대한 자본과 정책결정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 그들은 고도화된 정보를 움켜쥐고 세계를 이끌어 간다.
그러면 시인은 세상을 변혁시키는 사람들을 변혁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시인은 꿈을 실현시키려고 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꿈을 심어주려고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해 두자.
이제 당신이 시를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게 되거나 원고지와 펜을 준비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 어떤 보이지 않는 세계, 아직 확연히 드러나지 않은 미결정의 세계가 당신 앞에 도래되어 있다. 그 세계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상식이나 통념으로는 코드화 되지 않는 고독한 세계이고 이제 그 세계를 탐색하는 임무가 시를 쓰고자 하는 당신에게 던져지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나 외에 나가 없다”고 한다. 역설적인 하나의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시장에 가서 옷을 한 벌 사려고 한다. 친절한 점원은 요즈음의 패션 경향을 일러주고 그 옷을 사기를 권유한다. 일단 마음이 움직인다.
유행이란 무엇인가? 흘러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유행에 따라간다. 왜일까? 고독해지지 않으려는, 타인과의 연대감을 확인하는 무의식적인 행동양식이다.
그런데 다음날 그 새 옷을 입고 출근한다. 그런데 다른 동료가 그와 똑같은 옷을 입고 나왔다. 순간 기분이 나빠질 것이다. 왜일까?
나와 생각이 같은 존재가 이 세상에 또 있다는 불쾌감이 엄습기 때문이다.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이미 구성되어 있는 세계가 아니라 또 다른 세계가 있다. 이곳으로 오라!' 누군가 묻는다. 당신은 왜 시를 쓰게 되었습니까?
시를 쓰는 사람가운데는 처음에 성악가가 되고 싶었던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시를 쓰게 되었다. 누구의 권유도 아니고 그렇다고 재능이 있어서도 아니다.
운동을 하려면, 오락을 하려면 대상이 필요하고 그에 따르는 경제적 부담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 혼자 할 수 있는 일, 돈이 필요하지 않는 일이 글쓰는 일이다.
처음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로 눈에 보이는 사물과 현상 묘사(描寫)에 치중하는 시작(詩作)을 하다가 계속해서 글쓰는 일을 계속하기도 한다. 어느 사람은 자신을 탐색하고, 확고한 세계인식을 바탕으로 일상적 세계의 또 다른 의미를 드러내는 성과를 거두었다면 어떤 사람은 시 쓰기를 통하여 자기만이 가질 수 있는 세계가 있고 그리고 인간에 대한 따스한 시각을 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식한 만큼, 느낀 것만큼 써라!' 이것이 시 쓰기의 철칙이다.
훌륭한 시를 쓰기 위해서는 인식 방법의 새로움과 범위의 확장이 우선되어야 하고 성찰이 요구된다. 관찰과 깊은 사색이 없이는 좋은 글을 생산해내기 어렵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왜 나는 시를 쓰는가?
그 이유는 사람마다 틀릴 것이다. 그렇지만 그 질문 속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음을 깨닫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① 시는 젊음의 문학이다.
모든 노년(老年)들은 한 때 시(詩)를 썼던 청년들이다.
시인(詩人)이란 이 청년의 마음을 그대로 간직한, 나이 먹은 청년이 뿐이다.
그러면 왜 시(詩)는 젊음인가?
젊음은 끝없이 추구하고 갈망하고 존재한다. 슬픔과 고난 속에서도, 무엇에라도 몰두하고 존재를 불태워야 하는 것이 젊음이고 생명이다. 그것이 젊음의 생(生)이고 존재의 본질적 모습이기 때문이다.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문제가 거기에 있다…
그러나 무엇에 취한다?
술이든, 시든, 덕이든, 그 어느 것이든 당신 마음대로다.
그러나 어쨌든 취하라. (보들레르)
3월에 대학의 신입생들과 함께 읽는 미당(未堂)의「수대동시(水帶洞詩)」는 아름답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은 다른 계절이라고 해서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봄이 갈망될 때, 마음이 봄을 부를 때 이 시는 언제나 '새봄'을 만든다.
수대동에는 언제나 새로 생명이 샘솟기 때문이다.
흰 무명옷 갈아입고 난 마음
싸늘한 돌담에 기대어 서면
사뭇 숫 스러워지는 생각, 고구려에 사는 듯,
머잖아 봄은 다시오리니
금녀 동생을 나는 얻으리.
눈썹이 검은 금녀 동생
얻어선 새로 수대동 살리. (서정주)
시인은 새 삶을 새로 시작하기를 꿈꾼다.
이것이 '새 옷'을 갈아입는 다는 시적 의미다. 시적 언어의 특징은 이런 것이다.
‘나는 당신을 영원히 사랑합니다’라는 상투적 산문 구절이 시(詩)로 표현되어 뜨거운 울림이 되는 것이 시(詩)의 세계이고 시(詩)가 이루어내는 시적 정취다.
‘숫 스러워지는'은 이 시인의 고유한 언어(言語)다. 어떤 판본에는 '쑥스러워지는'으로 오기(誤記)될 정도로 이것은 지상의 언어가 아니다.
숫처녀, 숫총각처럼, '숫'의 존재는 새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정신이 그 마음을 '숫' 언어에 담은 것이다.
'금녀동생'또한 이러한 새 언어에 대한 필요 때문에 생긴다. 여기에는 아내의 동생을 취한다는 윤리적, 법률적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옛 시간으로 돌아감(금녀)이 문제가 아니라 새 삶이 문제된다. '검은 눈썹'이 중요한 조건이다. 누구나 검은 눈썹을 가졌는데 왜 새삼스럽게 '검은'눈썹인가?
반달같이 예쁜 눈썹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원초적 생명감에 충일(充溢)한 그런 여자가 필요하다. 이러한 존재의 속성(屬性)들이 3월의 봄과 수대동의 물과 결합되어 이루어져 새 생명에의 부름으로 가득 찬 것, 그것이 '수대동'의 세계다.
이와 같이 시에는 끊임없는 젊음이 있다. 이것은 영원히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쉼 없이 되사는 젊음이다. 되산다는 것은 죽음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새 무명옷'은 죽음의 수의(壽衣)가 되고, 새 배내옷이 되는 이중적 의미를 띈다.
그래서 이 몸 다시금
둥근 물방울의 시온성으로
밀알갱이의 예배당으로 들어가기 전(딜런 토마스)
생명 속에 죽음이 깃들 듯이 죽음 안에 생명이 있다. 수대동의 물 또한 죽음을 받아들이고 동시에 새 생명을 주는 복합적인 존재다. 봄이 또한 그러하지 않은가?
겨울을 거쳐야 봄이 온다.
시에서 원형, 상징적 인식이 중요시되는 것은 우리 삶의 근원적 모습이 이러한 우주적 질서와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② 시(詩)는 멋있는 문장(文章)의 나열이 아니다
시(詩)란 멋있는 문장의 나열이 아니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시의 언어는 단순히 사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영혼을 가진 어떤 것이다. 즉 시인의 영혼 속에서 태어난 또 하나의 영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른 언어와 결합하여 새로운 뜻을 파생시킴으로써 상상력의 세계를 보여 주며, 시인의 정신세계를 담아낸다. 아무리 아름다운 시라고 해도 그 속에서 언어의 영혼을 읽을 수 없다면, 독자의 감동을 얻을 수 없다.
시(詩) 속에도 논리가 있다. 시가 상상의 산물이고 시어가 언어의 영역을 뛰어넘는다고 해서, 무조건 언어를 골라서 연결시켜서는 안 된다.
또 상징이라고 해서 무조건 설명이나 이해의 단계를 뛰어넘는 것이 아니다.
상징(象徵)이란 남들도 다 이해할 수 있어야 상징성을 띠는 것이 아닌가.
다른 사람들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면, 아무리 좋은 뜻을 지녔더라도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다.
혹자는 자동기술법으로 쓰는 시에 어떻게 논리가 있겠는가? 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자동기술법으로 쓰인 시도 읽어보면 시인의 무의식적인 정신세계이지만 그 속에서도 한줄기 정신의 가닥이 흐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무의식의 상태에도 논리 체계가 들어 있다.
시(詩)란 곧 시인(詩人)의 정신과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3. 시안(詩眼)
시안(詩眼)이라 하면 ‘시(詩)를 보는 눈’이란 말인가, 아니면 ‘시의 눈’이란 말인가?
전자의 경우라면 그 '눈'은 시(詩)를 식별하는 관찰자의 것이 된다.
시인이거나 독자거나 간에 좋은 시를 판별해 낼 수 있는 능력, 즉 시(詩)를 제대로 볼 줄 아는 眼目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라면 그 '눈'은 작품이 지닌 것이 된다.
동양적 시관(詩觀)에서 시안의 의미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도대체 '시의 눈'이란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시에 무슨 눈이 있다는 것인가?
눈이란 곧 생명체(生命體)의 요처(要處)라고 할 수 있으니 시안이란 시의 요처를 이르는 뜻으로 짐작된다.
청(淸)나라의 오대수(吳大受)는『시벌(詩筏)』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시(詩)의 명수(名手)가 시구(詩句)를 다듬으면, 벽에 그린 용(龍) 그림에 마지막 눈동자를 찍자 그 용이 비늘을 꿈틀거리며 날아오르는 것처럼 살아난다. 경이로운 한 구절이 시(詩) 전체를 기발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야말로 화룡점정(畵龍點睛)의 묘처(妙處)라고 설명하고 있다. 시 전체를 생동감 있게 살려내는 경이로운 한 구절이 시안(詩眼)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한 바둑의 눈에 비유해서 말하기도 한다.
"시(詩)에 눈이 있는 것은 바둑에 눈이 있는 것과 같다. 시상(詩想)이 영롱하게 드러나는 것은 시안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중략) 소위 눈이란 시나 바둑이 영롱하게 되는 곳 그것을 이르는 말이다."
바둑에 눈이 있다는 말은 한 수(手) 한 수(手)마다 최선의 요처가 있다는 것이다.
한 수 잘못으로 대마(大馬)를 죽이기도 하고, 한 수를 잘 놓음으로 해서 기세(氣勢)를 얻어 상대방을 곤경에 빠뜨리게도 한다. 바둑의 名人들은 바로 그러한 요처를 찾아내는 눈을 지닌 사람들이다. 名局은 그러한 요처들이 서로 밀고 당기면서 진행되는 긴장된 구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요처들 가운데서도 국면 전체를 탱탱하게 거머쥐고 있는 가장 중요한 要石이 놓인 자리를 '碁眼'이라고 할만 하다.
시(詩)를 구성하고 있는 시어(詩語)들도 하나 하나가 다 최선의 것들로 선택된 것이어야 한다. 만일 한 편의 시가 최적의 시어들로 이루어진 완벽한 구조물이라면 그 작품에서 시어들의 경중을 따지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옥을 이루고 있는 여러 가지 자재들 가운데서도 대들보가 가장 소중한 것처럼 작품이라는 하나의 구조물 속에서도 핵심이 되는 부분이 없을 수 없다.
아니 그러한 부분이 없다면 그 작품은 긴장감이 없는 느슨한 구조가 되고 말 것이다.
소설에 클라이맥스가 설정되는 것처럼 시에서도 작품을 이루고 있는 제요소들이 어느 한 곳으로 응집되는 긴장된 구조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리라.
청(淸)나라의 유희재(劉熙載)는『예개(藝槪)』에서 시안(詩眼)을 상대적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
“詩眼에는 시집 전체의 눈[眼]도 있고 시 한편의 눈도 있고 몇 구에서의 눈도 있고 한 구의 눈도 있다. 또한 몇 구가 눈이 되는 경우도 있고 한 구가 눈이 되는 경우도 있고 한 두 자가 눈이 되는 경우도 있다.”
유(劉)의 지론은 범주의 설정에 따라 상대적으로 시안은 달라진다는 것이다.
작품 전체의 시안이 있고 또 각 부분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요처인 시안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다. 나라 전체를 놓고 본다면 수도인 서울이 要地지만 어느 한 지방만 놓고 본다면 그 지방의 행정도시가 요지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시안은 시의 한 행 안에서 혹은 한 연 안에서 혹은 작품 전체에서 각기 달리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역으로 말하면 한 작품은 부분은 부분대로 전체는 전체대로 어느 한 요처에 탄력적으로 모아지는 유기적 구조들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견해다. 詩眼의 이론은 詩語의 硏鑽이라는 수사학적 입장을 넘어서서 시의 역학적 構造論을 지향하는, 더 나아가서는 詩心의 응집 곧 시정신의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는 詩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朴木月의 <靑노루>를 예로 삼아 시안을 살펴보도록 하자.
머언 산 靑雲寺/ 낡은 기와집
山은 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 가는 열두 구비를
靑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이 작품의 전개는 원경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점 대상에 접근해 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 시는 두 개의 點降 구조로 되어 있는데,
첫째는 제1연이 '遠山→ 靑雲寺→ 기와집' 등으로 점점 하강 이동하는 것이 그렇고, 둘째는 제1, 2, 3, 4연의 전개에서 '遠山→ 자하산→ 열두 구비(능선)→ 청노루→ 눈' 등으로 대상의 범위를 점점 좁혀 가는 것이 또한 그렇다.
첫째 구조가 배경 역할을 하고 있다면
둘째 구조는 전체 작품의 중요한 맥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이 정황을 카메라 동영상으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먼 산을 배경으로 시작하여 대상인 한 마리의 노루에 서서히 접근해 간 다음 드디어 노루의 눈동자를 클로즈업시킬 것이다. 그리고 그 눈동자로부터 새롭게 펼쳐지는 구름과 창공의 무한 공간을 제시하게 될지 모른다. 제4연에서 제5연으로의 이동은 순간적 확산이다.
제1연에서부터 제4연에 이르기까지 점점 축소 응결되어 가던 시상(詩想)이 제5연에서 갑자기 확산(擴散) 소멸(消滅)하고 만다. 노루의 ‘눈’은 이 지상의 만상(萬象)을 삼키는 블랙홀이며, 무한한 우주 공간으로 열리는 하나의 신비로운 문이다.
그야말로 묘처(妙處) 중의 묘처(妙處)다. 이를 일러 詩眼이라 할만 하다.
이 짧은 시가 단순한 서경시에 그치지 않고 한 생명체의 우주적 照應을 담고 있는 秀作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작품의 詩眼인 '눈'의 역동적인 작용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4. 시심(詩心)이란 어떤 것인가
시(詩)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려 할 때 흔히 초심자들로부터 다짜고짜 “시란 무엇입니까?”하는 질문을 듣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시의 개론서나 작법들이 그 서두에다 <시의 정의>니 또는 <시의 본질>이니 하는 해답을 내놓거나 시도하고 있지만 실상 시가 무엇인가를 뚜렷하게 몇 마디로 설명한다는 것은 어렵다기보다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마치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격(格)으로 십인 십색이어서 동서고금 굴지의 시인 100명의 시에 대한 정의를 나열해놓는다 해도 그것이 시(詩)라는 것의 전모를 밝혀낼 수 없을 뿐 아니라 시에 대한 실제적 이해나 창작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이러한 시(詩)에 대한 정의(定意)의 어려움과 불가능함을 20세기 영국의 대 시인 엘리어트 (T.S.Eliot, 1888~1965)는〈시에 대한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다〉라고까지 말한다. 그래서 본 강좌에서는 저러한 성급한 시의 정의나 공소한 본질론을 피하고 먼저 시를 불러일으키는 마음, 즉〈시심(詩心)이란 어떤 것인가?〉하는 문제부터 밝혀보기로 하겠는데, 여기서〈시심〉이란 시를 불러일으키는 생각[詩想]․느낌[詩情]․흥취[詩興]등을 포괄해서 쓴 숙어요, 또한〈시를 불러일으키는〉도 좀더 적극적으로〈시를 쓰는〉으로 바꿔 생각해도 무방하다.
그야 어쨌거나 이러 저러한 시심(詩心), 즉 시적(詩的) 심리상태가 일상적 생활의 심리상태와 다른 것은 우리 누구나 체험으로 다 아는 바이지만, 그러나 무엇이 어떻게 다르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가 모호하고 막연한 상태인데, 실은 이것이 시를 쓰려는 이들의 가장 기본적인 맹점(盲點)이라 하겠기에 이야기가 좀 잘아지는 느낌은 있지만,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보겠다.
가령 우리가 일상 속에서〈배가 고파 무엇이 먹고 싶다〉든가,〈일을 많이 했더니 피곤하다〉든가,〈친구가 없어 심심하다〉든가,〈가족과 헤어져 있게 되어 쓸쓸하다〉든가, 또는〈무엇이 기쁘다〉든가,〈슬프다〉든가,〈화가 난다〉든가,〈좋다〉든가, 〈싫다〉든가 하는 심리상태와 가령 절묘한 자연의 경치를 대했을 때 자기도 모르게 일으키는 흥취나, 또는 연애를 할 때에 자기를 잊는 황홀감이나, 어떤 죽음을 마주했을 때 이는 까닭 없는 슬픔 등 소위 시적(詩的)이라고 부르는 심리상태와 구별되는 것은 앞의 것, 즉 일상적인 생각이나 느낌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의 이해(利害)에서 출발하고 또 그것의 충족으로 끝나는 것이지만, 뒤엣 것 즉 시적(詩的)인 생각이나 느낌이나 흥취는 이해를 떠난 맹목적인 것임을 발견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그 감동상태는 대상과 하나가 되어 자기를 잊는 몰아적(沒我的)이고 무아적(無我的)인 가장 순수한 마음의 상태인 것이다.
물론 이렇듯 자신의 이해를 떠나 대상과 하나가 되는 감동상태는 반드시 오묘한 자연의 경관이나, 열애(熱愛)속에서나, 죽음을 접할 때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일상생활의 아무리 흔하고 사소하고 허접스러운 일이나 물건이나 사건(事件) 속에서도 우연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고, 또 예민한 감성이나 깊은 통찰로 이를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불러일으킬 수가 있다.
즉, 우리가 어떤 자연이나 인간이나 세상살이의 그 생성과 소멸 속에서 신비한 본질이나 진․선․미의 모습을 발견한다던가, 이와는 반대로 아주 고귀하고 아름답다고 여겼던 사물 속에서 무상감(無常感)이나 연민(憐憫ㅡ가엾게 여기는 생각이나 느낌)을 느꼈을 때 우리는 저러한 감동상태에 드는 것이다.
그래서 20세기 프랑스의 상징주의의 대표적 시인인 폴 발레리(Paul Valery,1871~1945)는 이러한 시(詩)를 불러일으키는 마음을 우주적 감각이라고 하였는데 나는 거기에다 우주적 연민을 덧붙이고자 한다.
그러면 이제 실제로 이러한 우주적 감각이나 그 연민이 시로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 살펴보자.
공원
천 년 또 몇 천 년이 걸릴지라도
네가 내게 입맞춤하고
내가 네게 입맞춤한
그 영원의 한순간을
말로 다할 수가 없으리.
겨울 햇볕이 쬐는 아침
〈몽수리〉공원에서의 일이었네.
〈몽수리〉공원은 파리의 안,
파리는 지구 위,
지구는 별의 하나,
위의 시(詩)는 제2차대전 후 프랑스의 가장 인기가 높았던 시인(詩人) 자크 프레베르(Jacques Prevrt)의 작품으로서〈몽수리〉라는 한 공원에서 있었던 연인끼리의 입맞춤을 노래하고 있는데, 흔히 볼 수도 있고 또 체험할 수도 있는 이 사랑 행위가 얼마나 감미롭고 소중하고 신비한 것인가를 무한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에다 확대해가며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 또 하나의 시를 보자.
십자로에서
너는 왼쪽으로 나는 오른쪽으로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길을 가야 한다.
그리고 그 이별은 하루일지, 하룻밤 동안일지
또는 영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만나거나 헤어지거나
(우리의 길을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벗의 마음에다
우리 모두의 앞길을 위하여 건배하자.
자! 행운을 빈다.
어디로 가는지조차도 모르지만.
도박 같은 인생이어니
우리는 이기거나 지거나
그것은 제 재주도 제 선택도 아니요,
그것은 나누어 받은 패 쪽에 달려 있다.
연애에도 운이 있고 싸움에도 운이 있고
그리고 우리 중의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마침내는 운명에 굴복하고야 마느니 ㅡ
또한 우리가 잘 못했던가 잘 했던가
때로는 놀랍게도 승리를 맛본다.
자! 행운을 빈다.
우리가 서로 아직은 끝장이 나지 않았으므로.
미국의 전세기말의 방랑(放浪) 시인이었던 리처드 호비(Richard Horey, 1864~1900)의 작품으로서 아주 경쾌하게 씌어져 있지만 인간운명의 불가사의함과 그 허망(虛妄)이 노래되고 있다. 물론 이 시는 운명론이나 허무주의를 부정하고 배격하는 사람에게는 거부감을 일으키겠지만 그런 사람의 삶에도 자기의 의지나 노력만으로는 도저히 어쩌지 못할 인간존재의 유한성에서 오는 불가사의와 허망감이 때마다 엄습하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위의 두 시에서 보다시피 우리가 입맞춤처럼 아주 무심하고 심상하게 여기던 일상적 사건 속에서도 저러한 우주적 감각이 발동할 수가 있고 또 우리가 목숨처럼 가장 고귀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에도 그 덧없음이나 가엾음. 즉 우주적 연민을 느낄 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 이러한 우주(宇宙)적 감각(感覺)이나 연민(憐憫)은 어떻게 해서 일어나고 또 어떻게 해서 일으킬 수가 있는가?
그것은 별것이 아니라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자력(自力)적이던 타력(他力)적이던 어떤 존재의 본질성에 대한 자기 나름의 발견과 놀람과 그 깨우침에서 온다고 하겠다.
그 본보기로 일본의 현존(現存) 중견(中堅) 시인인 요시노 히로시(吉野弘)의 시를 음미(吟味)해보기로 하자.
생명은
생명은
자기 자신만으로는 완결될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 같다.
꽃도
암술과 수술이 갖추어져 있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버러지나 바람이 찾아와
암술이나 수술을 중매한다.
생명은
그 안에 결핍(缺乏)을 지니고
그것을 타자(他者)에게서 채워 받는다.
세계는 아마도
타자와 총화(總和),
그러나
서로가
결핍을 채운다고는
알지도 못하고
알려지지도 않고
산재(散在)해 있는 것들끼리가
무관심하게 있을 수 있는 관계,
때로는 꺼림칙하게 여기는 것도 허용되는 사이,
그렇듯
세계가 느슨하게 구성되어 있는 것은 왜ㄹ까?
꽃이 피어 있다.
바로 가까이까지
등에의 모습을 한 타자가
빛을 두르고 날아와 있다.
나도 어느 때
누구를 위해서 등에였겠지
당신도 어느 때
나를 위한 바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시(詩)는 작자가 어떤 꽃에 등에가 화분을 나르는 것을 보고 인간끼리의 나와 남의 관계도 저처럼 협동 속에서 살아간다는 데 생각이 미쳐서 그것을 노래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고, 이와 반대로 인간끼리의 삶을 살펴보다가 그 생각이 벌이나 나비나 등에나 바람이 화분을 날라서 꽃을 피우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여하간 작자는 모든 존재가 서로 다르고 제각기 떨어져 있으면서 서로의 목숨이나 그 삶에 무관한 것 같으면서도 서로가 의식도 하지 않은 채 서로의 성장이나 성취, 또 행․불행에 직접 관계를 가지고 있고 작용도 하고 있다는 사실, 즉 사물의 본질인 우주만물의 신비한 협동에 눈뜸으로써 놀라고 깨우침에 나아간 그 〈감동〉과 〈감흥〉을 저렇게 한 편의 시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감동〉과〈감흥〉이란 말에 특히 주목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어떤 사물(事物)의 본질(本質)을 이해하고 체험(體驗)하기만 하면 그것이 바로 시(詩)가 되는가 하면 그렇지가 않아서, 가령 위의 시에서 어떤 꽃에 대한 충매(蟲媒) 행위를 알기로 말하면 꿀벌 치는 이들이 더 장할 것이고 또 인간의 상부상조 같은 것은 실제 조직이나 집단생활을 하는 사람이 그 실상을 더 잘 체험하겠지만, 그러한 전문적 지식이나 풍부한 경험이 곧 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만물의 우주적 혐동을 스스로 알아내고 깨우친 그 감동이나 감흥, 즉 나대로 말하면 우주적 감각이나 연민이 시를 쓰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또다시 제기되는 것은 그러한 시적 감동이나 감흥이라는 것은 어떤 성질의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가령 우리가 〈무엇이 갖고 싶다〉든가 〈무엇이 보기 싫다〉든가 또는〈무엇이 즐겁다〉든가〈무엇에 화가 난다〉든가 하는 일상적인 욕구나 충동과 같은 일상생활의 심리상태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것이 충족되거나 시간이 지나면 끝나고 사라지는 성질의 것이지만, 가령 어떤 매혹적인 경치나 낭만적인 행위나 무상감 같은 체험을 했을 때 그 감동이나 감흥은 그 자체가 이를 지속시키고 전달하려는 욕구를 수반한다. 이것도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면, 가령 어떤 가정주부가 설악산엘 처음 가서 그 경치에 압도당하고 도취되고 매료되어 돌아왔을 때 그녀는 서투르게나마 가족들에게 자기의 설악산에서 받은 감동이나 감흥들 되살려 전하면서〈내가 시를 쓸 줄 알았다면 그것을 써서 남길 터인데…〉하고 아쉬어 한다.
저러한 시적 감동과 감흥의 〈지속〉과〈전달〉의 속성을 폴 발레리는 〈시의 내용이 되는 미적(美的)감동은 다른 감동이 오직 흥분으로 끝나는 것과는 달리 스스로가 여러 가지 모습과 질서를 스스로 지으려드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이에 덧붙여서〈이러한 시적 감흥이라 하여도 그대로 놓아두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영구히 사라지고 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아름다운 순간, 또 그 신묘한 지각(知覺)을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끄집어내어 항구적으로 보존하려는 것이 바로 시를 쓰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저러한 시심(詩心)을 시인은 말로써 표현하게 되고, 음악가는 소리로써 나타내고, 화가는 선이나 색채로, 조각가는 흙이나 돌․나무․무쇠 같은 물질을 가지고 입체적으로 조형을 하는 것이다. 이렇듯 시심은 모든 예술을 불러일으키는 모태이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이 아름답고 훌륭한 예술을 보면 시가 들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요, 이와 반대로 시(詩)가 없거나 시심(詩心)이 빈곤한 예술(藝術)은 신통치 않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저러한 시의 발생 원인인 시심이라는 것도 오직 수동적 상태만으로 보면 본래가 지극히 우발적이고 충동적인 것으로서 오직 그것만으로는 시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하면, 여기에다 능동적이고 지적인 활동이 따라야 비로소 표현의 세계에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즉, 앞에서 말했듯 시를 불러일으키는 마음이란 스스로가 질서를 지어서 보존하고 전달하려는 독특한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고 했는데, 바로 이 에너지를 능동적으로 발동시켜 그 자연발생적 감동과 감흥을 어떻게 표현하여 정착시키느냐 하는 방법과 기술의 문제가 대두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시의 어러운 작업적 측면으로서, 여기서 다시 폴 발레리의 말을 빌면 〈훌륭한 시란 뼈를 저미는 고통이 작업에서 빚어지고, 예지(叡知ㅡ여기서는 작가의 자질의 뛰어남을 가리킴)와 끊임없는 노력의 기념비요, 의지와 분석의 소산〉인 것이다.
5. 나는 과연 시(詩)를 쓸 수 있는가
시 창작에 지름길이란 있을 수 없다. 시를 포함한 모든 예술은 인간이 스스로를 표현함에 있어 그 누구와도 다른 독립된 ‘나’를 발견하자 함이고, 그 ‘나’를 완성시켜 나가는 특별한 발전적 단계이기 때문이다.
‘나’란 누구인가. 인간이라 하여 누구나 ‘나’를 깨닫고, ‘나’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사회에 적응하는 사회적인 존재라고 한다. 그러나 예술가(藝術家)로서의 ‘나’는 사회에 적응하기보다는 사회의 통념에서 벗어나서, 오히려 사회 안의 나를 뚜렷하게 부각시키고 차별(差別)화시키는 반사회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예술가의 갈등과 예술의 모순(矛盾)점은 실로 여기에 있다.
사회에 기여하기 위한 예술 본연의 목적과 예술을 성립시키기 위한 예술가의 방법론이 상치될 수 있는 위험성이 요소 요소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타고난 재능, 꾸준한 습작, 훌륭한 작품의 감상은 창작 실기의 3대 요소이다.
그러나 실제적인 창작 과정에서는 이상적인 논리에 불과할 때가 많다.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우선 창작의 욕구가 나를 표현하기 위한 것인가 남을 위한 것인가 스스로에게 따져 물어야 한다. 타고난 재능이란,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이며 그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보조수단으로서 남을 활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전제 아래 꾸준한 습작과 훌륭한 작품의 감상이 허용된다. 예술에의 원론적인 깨우침을 갖지 못할 때는 창작과정에서 성취감을 얻기보다는 심신만 피곤해지기 일쑤이다.
그러나 예술 원론에 대한 이해가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무엇인가 쓰고 싶은 사람에게 예술에 대한 공부부터 강요한다는 것은 사실 원칙론이나 이상론에 불과하다. 작품이 빠져버린 이론은 작품의 창작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아가 훌륭한 작품의 훌륭함을 깨우치기 위해서는 예술이론과 그를 뒷받침할 수 있는 기초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이 갈등의 해소점은 없는가.
작품을 써나가면서 그에 합당한 이론을 한 단계씩 밟아 오를 수는 없는가.
무엇인가 쓰고 싶은 사람에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이 책은 그와 같이 무작정 쓰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기획되고 집필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창작실기의 3대 요소부터 이야기해 나가기로 하자. 초심자의 경우 제일 먼저 궁금해하는 것이 자신에게 과연 쓸 수 있는 재능이 있느냐는 단순한 조바심이다.
허나 누가 그의 재능을 첫눈에 섣불리 단언할 수 있으랴. 세계의 문학사는 조숙한 천재들과 함께 늦깎이 문인들을 다같이 불멸의 성좌에 올려놓고 있다.
재능이라는 것은 결국 스스로의 나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있느냐 없느냐는 처음의 문제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시와 같은 문자예술에서는 나를 표현하기 위해서 우선 써보는 것이 첫걸음이다.
작품을 만들기 위해 시험삼아 써보는 것을 습작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습작은 지속적인 반복훈련에 따라 향상될 수 있다.
습작을 함에 따라 표현이 다듬어지고, 그러한 훈련을 위해 다른 사람의 좋은 작품을 참고해야 한다. 지적이고 감성적인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의 습작시기를 거치면 초보적인 작품을 생산할 수 있고, 이때부터는 훌륭한 작품을 찾아 읽을 수 있는 눈매가 서게 된다.
무엇인가 써 보았을 때부터 초보적인 작품을 쓰게 되기까지에는 또 얼마나 시일이 걸리느냐가 초심자의 두 번 째 관심사이지만 여기서도 명쾌한 답을 드릴 수가 없다.
개인차가 많기 때문이다. 허나 이 경우, 필자의 습작경험과 시작지도 경험을 예로 들 수는 있다.
처음 시를 썼을 때부터 초보적인 작품이 나오기까지는 대개 1년여가 걸리며 또 개별적으로 작품지도를 하였을 때도 6개월에서 1년여 정도면 작품의 형태를 갖추는 것이 보통이었다.
초보적인 작품의 형태를 갖추고 나면 초심자들의 발전 속도는 개인차가 더욱 분명해진다. 특히 습작과 감상을 병행하는 사람들의 발전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진다.
스스로의 힘으로 훌륭한 작품을 감별할 수 있을 때 그 작품과 스스로의 작품을 비교할 수 있게 된다. 그 비교 관점에서 스스로의 수준을 평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따라 스스로의 취약점을 고쳐나가는 힘이 붙으므로 작품의 발전도 가속도를 갖게 되는 것이다. 물론 훌륭한 작품을 감상한다지만 예술가의 명성이 개개의 작품에 걸맞지 않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독자의 수준이 너무 낮아 그 작품의 진수를 감상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이 때문에 필자는 감상작품을 선택할 때는 시인의 이름에 구애받지 말고 스스로의 판단에 의존할 것을 권한다. 다시 말해 스스로 좋은 작품을 골라나가라는 것이다. 결론은 ‘나는 과연 시를 쓸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 빠지기보다는 우선 쓰고, 읽고, 생각하는 행위에 돌입하라고 권할 수밖에 없다.
허나 무조건 쓰고 읽고 생각하는 일이란 얼마나 피곤한 시간의 낭비인가. 이 때문에 필자는 초보자를 위한 창작의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실제에 적용해 보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예상대로 많은 효과를 거두었다.
6. 왜 시를 쓰는가?
“왜 시(詩)를 쓰는가?” 하는 질문은 “너는 왜 밥을 먹지 않고 빵을 먹느냐?” 하는 질문과 동일하다. 시를 쓰는 사람은 음악을 듣는 사람보다 조금 더 시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음악을 전혀 듣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악기(樂器)를 연주하는 사람은 음악에 대한 관심도(關心度)가 시를 쓰는 행위보다 더 높을 따름이지 시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관심이란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떤 경로를 통하던 간에 쓰는 행위, 말하는 행위를 거듭하고 있다.
관심이 없으므로 이런 행위는 하지 않아도 되고 관심이 있으므로 저런 행위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생존은 행위의 복합적 축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관심의 영역 밖에 위치하는 것이다.
생존의 욕구 즉 생존의 안전이 확보되고 난 다음에 인간(人間)은 현실(現實)에서 보다 고차원적인 예술의 세계로 이행해 나간다.
예술(藝術)의 세계는 현실계(現實界)와는 동떨어져 있음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계를 捨象(사상)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현실계를 기반(基盤)으로 하여 美醜好惡(미추호오)의 1차적 감정을 드러내거나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세계를 유추함으로서 궁극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이 세상에 드러내는 일을 수행한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일 즉 표현은 여러 가지 형태로 구사된다.
불교에서 識(식)이 眼耳鼻舌身意(안이비설신의)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고 보는 바와 같이 음악, 그림, 시나 소설, 무용 등의 형식으로 분화하게 된다.
그러므로 왜 시를 쓰는가? 하는 문제는 행위자의 하나의 취향 내지는 태도와 관련 지워 질 수 있다.
시를 쓰려고 하는 의지는 <언어와의 싸움>을 통해 자신과 세계를 규명하려는 작업을 또는 시가 갖추어야할 형식을 허락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래의 글은 조선일보에 게재된 소설가 김승옥의 『문학이란 이런 것』의 전문이다.
이번 3월부터 세종대학교에서 문학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는 신문기사가 나간 후 몇 군데 잡지와 방송에서 나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 질문들 속에 공통되는 것은 내가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이냐는 것이었다.
글쎄, 색다른 교수법이라면 몇 가지 내 나름대로 준비해 본 것이 없지는 않다. 예컨대, 판소리 興夫歌(흥부가)의 돈타령, 가난타령이나 春香歌(춘향가)의 사랑타령 등의 음반을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그 타령들처럼
1) 하나의 낱말로 연상되는 모든 것을 수집해 보게 한다든지,
2) 미술 대학생들이 소묘 숙제하듯이 가령 서울역 대합실에 가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마음에 느껴지는 모든 것을 글로써 묘사해 오라는 과제를 준다든지
3) 상상력의 기초훈련을 시켜보겠다는 계획 정도는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문학이론 문제로 들어가면 나는 은근히 걱정이 앞설 뿐 특이한 대책은 없다.
한 학기 한정된 시간 속에 일반론 이상으로 특이한 강의(講義)를 하는 것은 오히려 학생들을 불구자로 만들뿐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특이하거나 첨단적인 문학론은-그런 게 있다면 말이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각자 찾아보면 될 터이고 별로 길지 않은 대학시절에는 이 세상의 평균적인 대학생이라면 기본적으로 알아두어야 할 문학론들을 섭렵하는 것이 좋겠다 생각한다.
인터뷰의 질문 중에는 문학의 효용성에 관한 나의 견해를 묻는 것이 많았다.
문학의 쓸모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왜 사람들이 문학작품을 쓰고 읽어야 한다고 보는가?
문학 특히 시와 소설 같은 창작 문학이 인간생활에 무엇을 얼마나 실용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문학인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논의가 있어 왔다.
나로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매우 간단명료하게 정리해 놓고 문학창작에 임하고 있다. 문학의 효용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언어의 쓸모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 그 답이 자명해진다.
인간은 몸(肉體)과 마음(靈魂)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존재이다. 물질적인 몸이 화학물질인 음식물을 먹음으로써 그 성분에 영향을 받아 건강을 유지하고 성장하거나 해를 입고 쇠약해지듯이 마음은 언어에 의해서 영향 받으며 그 건강을 유지하고 성숙하거나 해를 입고 손상되어 심지어 자살에 이를 수도 있다.
멀쩡한 몸을 자기 손으로 파괴시켜 버리는 자살을 가능케 하는 것은 보면 인간의 마음 그리고 그 마음을 운영하는 언어의 에너지는 세심한 주의력을 가지고 관리해야 할 대상이다.
언어란 고독한 개체로서 이 세계에 존재하게 된 인간과 세계, 그리고 타인 사이에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들어 줌으로써 고독을 해소하고 연대감으로써 안정감을 가질 수 있게 해주는 최선의 기능이다. 문학이란 그러한 언어가 최상으로 세련된 형식인 것이다.
문학을 모르고 지극히 단순한 일상적인 언어 약간만 구사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문학을 읽고 쓰며 세계를 인식하는 사람에 비해서 그 행복감이 적을 수밖에 없다. 그 마음은 어둠 속을 홀로 떠다니며 늘 답답하고 외롭기 짝이 없는 것이다.
문학도들이여, 논리와 윤리를 잘 갖춘 많은 언어를 되도록 많이 네 영혼 속에 입력시켜라. 우주는 네가 알고 있는 언어의 크기만큼 네 앞에 열리며 자기 모습을 보여주고 네 행복감은 그 우주의 크기만큼 커지는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우주의 근원인 하느님을 볼 수 있을 만큼 네 언어가 精製(정제)된 것이게 하라. 최고의 행복감이 너의 것이 되리라
이 말은 앞에서 언급한 왜 시를 쓰는가에 대한 우회적 답변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인간과 자연 사이의 의미 있는 관계를 추구하는 작업이 글쓰기이며 시(詩)는 다른 장르에 비하여 압축(壓縮)과 비유(比喩)의 기법(技法)을 통해서 자연을 포함한 타자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일이다.
상상력은 모든 예술의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정신작용이다.
수집과 묘사는 상상력을 배양하기 위한 기초훈련이다
논리와 윤리를 갖춘 언어란 무엇인가?
문학에서의 논리란 언어의 정합성뿐만 아니라 명징한 상상력의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윤리를 갖춘 언어는 언어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속성(屬性)이라기보다는 글쓰는 사람의 삶에 대한 진정성을 표현해내는 적절한 힘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리라고 본다.
7. 시인의 정신
시인 김수영이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은 한 마디로 자신의 마음 속 단단한 껍질을 깨고 나오자는 이야기다. 그 울타리를 스스로 파괴하면서 진정으로 시를 바라보고 되고 시를 쓸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시를 쓰는 행위는 정신구조상의 최상부에서 나온다고 한다. 그 아래에 있는 여러 행위들, 혹은 생각들은 모두 시를 쓰는 행위가 방해가 될 뿐이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시를 논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시를 쓰는 행위는 형식의 예술이며 시를 논하는 행위는 내용으로써 형식을 논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시가 무엇인지도 알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 시를 못 쓴다는 것이다.
시를 쓰려면 현재까지 알고 있는 시에 대한 모든 생각을 버리라고 한다. 그리고 온 몸으로 밀고 나갈 때 시인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진정으로 시(詩)를 쓰기 위해서는 시에 대한 모든 선입관(先入觀)을 버리고 시 자체로서 시를 시작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또 시인은 모든 것에도 속해있지 말고 자유로워야 하며 오직 시 하나만을 생각하고 정신 영역의 가장 안쪽에서 시어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늘날의 시인들을 돌아보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울타리에 갇혀 있는가. 종교라는 것, 국가라는 것, 문화, 혹은 여러 가지의 집단과 문화에 속해 각자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시인 자체로서만 존재한다. 그때라야 비로소 시를 쓸 수 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그간의 단단한 인습과 관습, 사회적 울타리를 과감히 제거하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갖가지 껍질을 깨고 갓 세상에 나온 병아리처럼 때묻지 않은 상태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가장 순수한 마음에서만 시에 나올 수 있음을, 또 그러한 마음으로 시를 쓸 때 진정 시인이 될 수 있다.
시를 쓰는 행위란, 마음과 몸, 온 몸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밀고 나가야 하는 것이다.
나는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시란, 참 알면 알수록, 쓰면 쓸수록 어렵기만 하다.
▣ 詩와 詩人
세계를 발견하고
발가벗은 그대로의 세상을
바라보고 싶은
신성한
소망의 표현,
그것은 삶을 노래하는
詩의 정신입니다.
詩人이란 그저 詩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가슴속이 생명의 기운으로
충만한 이들입니다 - 칼릴 지브란
"억압하는 모든 것에 저항하라"
"분노하지 않는 민족은 야수 같은 적에게 승리할 수 없다."
"모든 진실된 인간은 다른 사람의 뺨이 자신의 뺨에 닿는 것을 느껴야 한다."
- Che 게바라
▣ 시(詩)를 쓰는 마음
다음은 어느 시인의 말을 인용한 글이다.
나는 시를 쓸 줄 모른다. 나는 시인이 되려고 하였던 것은 아니다.
지천명(知天命)을 앞두고 지금까지 세상을 살면서 내가 보고 배우고 느낀 것을 내 자신이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을 아끼고 독에 소금 절이듯이 담아온 것을, 이제 퍼내어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다면 나누어주고 뿌려주고 싶은 마음뿐이다.
한 때는 연애편지를 쓰는 것처럼, 소리 없이 탐스럽게 내리는 눈을 보고 비 오는 날 창가에서 싸하게 내리는 빗줄기를 보며 턱을 괴고 아름다운 시상이 떠올랐던 적도 있었다.
시를 쓴다는 것은 결국 내 안의 나를 정리하고 나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현재를 과거에 투영시켜 지금의 삶을 풀어 가는 작업이라고 생각된다.
자신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끊임없는 번뇌와 고민을 역사의식으로 바라보아 나만의 시를 만들어 보고 싶은 것이다. 詩人이란 그저 詩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가슴속이 생명의 기운으로 충만한 이들이다
발가벗은 그대로의 세상을, 세계를 발견하고, 동시대인과의 공동체 의식을 밑바탕으로 한 진실하고 치열한 삶을 위한 참여와 신뢰와 사랑, 삶을 노래하는 詩의 정신이다. 詩로서 혁명을 할 수도 없고, 총 칼이 될 수도 없지만, 나는 나의 길을 갈 것이다. 이제 눈빛이 깊은 사람이라는 곡간(穀間)을 하나 마련하였다.
농부가 봄에 씨앗을 뿌리고 여름내 땀흘려 농사를 짓고 가을에 추수를 하면 곡간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눈빛이 깊은 사람은 세상의 인기나 독자의 수를 중요 시 하지 않고 단 한 명의 영혼에 양식이 되더라도 존재의 이유가 있다.
민들레꽃 하나가 수많은 홀씨를 날려보내듯이 시인이여, 그대는 이 시대의 진정한 삶이며, 세월의 시련을 끝내 극복해 왔노라.
시인이여, 언젠가 그대는 우리네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게 되리라.
그대의 가시관을 자세히 보라, 시인이여. 그 속에 감추어진 월계수 화환이 지금 막 움트고 있음을 보리라.
▣ 시의 발상과 전개방식에 대한 인식
"언제 이렇게 많은 시를 썼어요? 시간도 없을 텐데......"
시인들 가운데에는 전업(專業) 작가도 있지만 대개는 시를 써서 밥을 먹을 수는 없기 때문에 생업을 가지고 시를 쓰지만 그래도 당신의 직업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시인입니다" 라고 대답한다.
이들은 한가롭게 앉아서 '무엇을 쓸까?' 생각할 여유가 없다. 그렇다면 언제 시를 생각하고 쓰게 될까? ‘눈떠서 잠들기 직전까지’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시를 쓰는 일은 고도의 정신집중을 요하는 일이기 때문에 모든 정신력을 잠시도 쉬지 않고 시 쓰는 일에 쏟아낼 수는 없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일상과 사물 앞에 나의 모든 감각을 개방시켜 놓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시를 쓰고자 하는 초심자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누구나 처음에는 시를 쓸 수 있는 여건 -분위기- 이 조성되어야만 시 쓰기가 수월할 것이다. 그러다가 일년, 이년 점차적으로 연륜이 더해지다 보면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대상들이 모두 시(詩)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여기에 기본적으로 주어져야 하는 것이 시인이 가지고 있는 인생관(人生觀), 세계관(世界觀), 실험정신(實驗精神)이다.
많은 사람들이 시적 분위기에 매료되거나 자신이 억누르지 못하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바탕으로 시를 쓰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되는데 나중에 써놓고 보면 다른 사람들이 쓴 것과 비슷비슷한 그런 글들이 되고 마는 경험을 되풀이하게 된다.
이 쓰디쓴 경험을 회피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성시인의 시들을 많이 읽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선택한 시를 요모조모 분석해 보는 일이다.
내 취향에 맞지 않는다! 어렵다! 이런 난관을 헤치고 그 시인이 쓰고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해독하는 일을 쉬지 않아야 한다. 그런 해독을 통해서 발상으로부터 시작해서 한 편의 시로서 완결되기까지의 경로를 나름대로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임보 시인은 좋은 시의 조건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시(詩)란 하나의 발언(發言) 곧 남에게 들려주는 짧은 말이다. 언어의 범주(範疇)를 벗어나서는 곤란하다. 1) '남에게 들려주는', 2) '짧은 말'이 시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남에게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나의 이야기를 하던 제 3 자의 이야기를 하던 아니면 너에게 이야기를 하던 그 이야기는 함축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함축성이라는 것은 중언부언(重言復言)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폭이 넓은 상징성이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8. 시인이 지향하는 세계
시인은 결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시인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 관찰하는 것이 시인이 지향하는 첫 번 째 세계이다.
<예문 1>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눈 내리는 밤의 아름다움을 말할 수 없고 비 오는 날의 서정을 말할 수 없게된 시대에 눈과 나무, 비와 숲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작품들을 쓰고 읽고 가르친다는 것은 적절한 것인가?
아니, 그것은 도대체 가능한 일이기나 한가? 산성비와 산성 눈이 내리는 시대의 독자가 그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예전처럼 행복하게, 딸국질 한 번 하지 않고 이를테면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눈 오는 밤 숲에 머물어』를 읽으며 즐거워할 수 있을까? 프로스트의 시는 아름답다. 시의 화자는 동짓달 그믐밤 말을 몰아 눈 내리는 숲을 지나다가 문득 발을 멈춘다.눈발 속의 숲이 너무 아름다워 그냥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삶의 가장 신성한 순간처럼 <숲은 깊고 어둡고 아름답다> 그러나 화자는 그 아름다움에 매혹되면서도 세상과의 약속을 상기하고 <잠들기 전 갈 길이 멀다, 잠들기 전 갈 길이 멀다>며 다시 말머리를 돌린다. 화자는 그렇게 떠나지만 그가 떠남으로써 남기는 미련의 공간, 그 눈 내리는 숲은 독자를 유혹하여 그곳으로 달려가게 한다.
그러나 프로스트의 이 평이하고도 아름다운 시는 오늘날 서정적 텍스트로서의 적절성을 거의 <완전히>상실하고 있다 지금의 독자는 눈 내리는 숲으로 달려가지 않는다. 산성눈 내리는 지금 이 세계의 숲이 아름다울 것이며 누가 그 숲에 취해 발길을 멈추는가?
시인 자신이 눈을 피하기 위해 여름 해수욕장의 파라솔만큼이나 큰 우산을 쓰고 외출해야 하는 시대에 어느 독자가 맨머리로 눈 내리는 숲을 향해 달려갈 것인가. 달려가기 위해서는 그에게 하나의 특별한 조건, <제 정신 아님>이라는 조건이 필요하다. 이 조건을 감수하지 못하는 독자에게는 눈 오는 숲은 매혹의 장소가 아니라 그가 될 수 있도록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고 도망쳐야할 대상이다. 눈 내리는 숲은 독자를 <배제>한다.
독자의 현실정서와 시인의 문학적 정서 사이에 발생한 이 곤혹스런 괴리야말로 오늘날 문학이 대면하게 된 심각한 문제의 하나이다. 시인이 노래하는 눈의 서정은 독자가 현실세계에서 눈에 대해 지니고 있는 현실적 정서(두려움)와는 먼 거리에 있다. 두 정서는 일치하지 않고 양자 사이에는 의지하란한 공감의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시인들은 자연대상들에 대한 개인적 정서를 시의 텍스트로 조직해 냄에 있어 이 같은 근본적 괴리를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들의 개인적 정서와 독자 일반의 정서 사이에는 양자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 의지할만한 공통의 정서구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공통의 정서구조는 시인과 독자가 모두 자연으로부터 항구한 미적 정서의 공급을 보장받고, 양자 모두 자연과의 관계에서 안정된 감성체계를 확보할 수 있어다는 사실 대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이런 공통의 정서구조는 오늘날 가능하지 않다. 그 구조의 모태는 자연 자체가 지금 불구의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실정서와 문학적 감성 간의 이 괴리는 시인과 독자 사이의 정서적 간극일 뿐만 아니라 시인 자신의 정서세계에 발생한 감성분열과 상상력의 파탄을 의미한다. 누가 오늘날 프로스트처럼 눈 오는 밤 숲의 유혹을 노래할 수 있는가? 모더니스트 시대까지도 작가 시인들은 버지니아 울프처럼 <별의 언어를 옮겨쓰는 세계의 은자>에게서 자신들을 발견하고, 나무를 닻 삼아 항해하는 한 척의 배라는 서정으로 이 행성을 그려볼 수 있었다. 나무들은 아름답고 나무가 있는 세계의 강물은 푸르러 그 강에 들어갔다 나오는 백조의 날개가 푸른 잉크빛으로 물들지 모른다는 행복한 사정을 그들은 펼칠 수 있었다. 모더니스트의 시대가지 갈 것 없이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우리 시인들은 <풀잎 하나가 우주를 들어올린다>(정현종)는 빛나는 상상력을 풀잎의 감성에 실어 세상으로 띄어보내지 않았던가.
그러나 나무들이 질식하고 숲이 죽어 가는 지금 이 시대의 시인에게 그런 상상력은 가능하지 않다. 우주를 들어올리기는커녕 제 무게 하나도 추스르지 못하는 병든 풀잎을 시인은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 풀잎 자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 시인은 풀밭으로 가지 못한다. 농약 끈적한 꽃밭에 앉아 풀잎의 숨소리를 들어야 하는 왜곡과 변태를, 그 비참을, 그가 무슨 수로 견딜 수 있으랴. 풀밭은 시인을 배제한다. 비의 서정을 풀기 전에 지금의 시인은 비오는 날 비 때문에 죽어 가는 숲을 생각하여야 한다. 비는 시인을 배제한다.
푸른 강 대신에 그에게는 <똥물>이 있고 <똥통>이 된 지구가 있다. 그 똥물을 보며 똥통 속에서 그가 푸른 강을 말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하나의 특별한 능력 - 그가 강으로부터 배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과 함께 사는 듯이 생각하는 환각의 능력이 필요하고 감성분열의 능력이 필요하다.
위의 인용문은 오늘날 시인 -넓게는 예술행위를 지향하는 모든 사람들- 들이 처한 문학적 정서의 파괴를 지적하고 있다. 시인이 지향하는 세계가 자신을 들여다보기라고 했지만 그 자신이란 결국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 -자연- 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에 가면 갈수록 시인의 입지는 좁아들 수밖에 없는 현실에 처해 있는 것이다.
거시적인 안목으로 인류애와 평화 같은 주제를 넘나드는 시인들도 있고 남북통일, 노동문제, 남녀불평등 등의 사회문제에 관심을 돌리는 시인들도 있다.
그러나 일정부분 계몽적 입지를 확보하였던 그 영역에서마저도 시인들은 쫓겨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사회와 대중은 계몽의 차원을 넘어서서 넘쳐 나오는 정보의 그물에서 허덕거리는 상태에서 지사(志士)적 풍모와 예언자적 시인의 발언은 빛을 얻기가 힘든 것이 오늘날의 상황이다.
위의 글은 문학적 정서의 토양이 자연이며 자연의 파괴로 인한 정서의 고갈, 나아가서 인간성의 상실이라는 위기에 직면해 있는 오늘날의 시인들이 해야할 것이 무엇인가를 검토하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성찰을 요구하는 문제이다.
자, 당신은 무엇을 쓸 것인가? 자연으로부터 배제된 상태에서 환각에 빠져 시든 풀잎과 흐려져 버린 별을 노래할 것인가? 누구를 위하여 노래 부를 것인가?
<예문 2> 『누가 시화호를 죽였는가』 최 승 호
- 시화호의 아름다운 처녀시절을 떠올리며 술 한 잔 마시고 베란다 밖을 내다본다. 황량한 밤이다. 누군가 죽은 큰 딸 곁에서 울고 있다. 시화호에선 시체냄새가 난다. 몇 년을 더 썩어야 악취가 사라질지 이 거대한 시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아무도 모른다.
달마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가다 어느 바닷가를 지날 때였다. 마을 사람들이 짐을 꾸려 마을을 떠나고 있었다. 달마가 물었다. <왜들 떠나시오?> 마을 사람들이 대답했다. <악취 때문에 떠납니다> 달마가 보니 바닷 속에서 대충이라는 큰 이무기가 썩고 있었다. 달마는 해안에 육신을 벗어놓고 바다로 들어간다. 하지만 돌아왔을 때 자신의 몸, 해안에 벗어놓았던 몸이 사라진 걸 알고는 당황한다. 달마는 결국 자신의 육신을 찾지 못한다. 대신 누군가가 바닷가에 벗어놓은 얼굴 흉측한 육체, 그걸 뒤집어쓰고 중국으로 건너간다.
시화호에선 악취가 난다. 관료들에게서도 악취가 난다. 구역질, 두통, 발열, 숨막힘. 마을 사람들은 떠났다. 개펄은 거대한 조개 무덤으로 변해 버렸다. 쩍 벌어진 조개껍질 위로 허옇게 소금바람이 분다. 갯지렁이들도 떠났다. 도요새들은 항로를 바꾸었다.
무력감에서도 악취는 난다. 산 송장들, 시화호 바닥에 누워 공장 폐수와 부패한 관료들의 숙변을 먹는 산 송장들, 이것은 그로테스크한 나라의 풍경인가, 시화호라는 거대한 변기를 만드느라 엄청난 돈을 배설했다.
달마는 시화호에 오지 않는다. 시화호에 달이 뜬다. 누가 시화호를 죽였는가? 누가 죽은 시화호를 딸처럼 부둥켜안고 먼 바다로 걸어나가며 울겠는가.
나는 무력한 사람이다. 절망의 벙어리, 그래도 세금은 낸다. 세금으로 시화호를 죽였다.
살인 청부자? 내가 시화호의 살인 청부자였다. 나를 처형해다오. 달뜨는 시화호에 십자가를 세우고 거기 나를 못 박아다오. 아니면 눈 푸른 달마를 십자가에 못박아 피흘리게 하든지
음풍농월의 시대는 갔지만 음풍농월의 유전인자는 아직 우리들의 피 속에 흐르고 있다. 이제 확연하게 나의 문제로 빚어지는 시적 정서가 얼마만큼 나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과 유기적으로 얽혀있는 것인가를 깨달아야 할 때이다. 누구나 이 시대가 살기 어려운 시기라는 것을 압니다만 그 살기 어려움의 문제를 자기화 하려고 하지는 않다.
시인은 바로 이 점을 저항하여야 한다. 시를 쓰고 그 시속에 자신의 피와 땀을 부벼 넣을 줄 알아야 한다.
예문의 최승호 시인의 시는 썩어 가는 시화호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이 우리 모두라는 사실을 고발하고 있다. 단순히 고발 차원에서 쓰여진 글이라면 르포 이상의 자격을 얻기란 힘들 것이다. 시인은 고발의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화호를 죽인 범인이 바로 자신임을 고발하고 자성한다. 바로 그 순간 이 시는 예상하지 못한 폭발력으로 삶의 진정성이 무엇인가를 진저리치게 만드는 것이다.
시인은 작품 속에 자신의 삶의 기록과 몸부림과 고통을 버무려야 한다.
숲이 사라져 버린 그 땅에 다시 길을 내겠다고 결심을 해야 한다.
그것은 시인 각자의 몫이다.
9. 시는 오직 인간만이 쓰고 있다.
인간 이외의 다른 존재는 일찍이 시를 써본 일이 없다.
바꾸어 말하면 모든 인간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시를 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그리고 그 때문에 다른 존재와 구별되는 특이한 존재인 것이다.
실제로 인간은 상한을 알 수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오늘 현재에 이르기까지 무수하게 많은 시를 지어내고 있다.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하여 시 같은 것은 이제 발 붙일 곳이 없게 되었다는 한탄이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현대에 있어서도 시의 생산량은 줄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시의 줄기차고도 유구한 역사는 그 자체가 이미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새로 시를 쓰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나타난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오늘날의 우리 사회 역시 그 예외가 될 리는 없어 추정하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많은 시의 지망자들이 도처에서 남몰래 열심히 시의 트레이닝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들의 가슴속엔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 수 있을까]하는 안타까운 소망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 은 시의 본질이나 원리보다도 막상 시를 쓰려고 할 때 당장 표현 방법상의 이런저런 어려움에 기인하는 안타까움이다.
시 창작의 방법론이라 했지만 실상 시에는 그렇게만 하면 틀림없이 시를 잘 쓴다는 모범 답안이 없다는 말부터 먼저 해두어야 하겠다.
조지훈 시인에게 “선생님,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 수 있을까요?” 하고 묻자 그는 일언지하에, “그건 어떻게 하면 밥을 잘 먹습니까? 라는 질문과 같은 말이오"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그는 나의 무안함을 덜어주려는 듯 자기도 그 말을 정지용에게서 들었다고 했다. 그것이 바로 시에는 모범 답안적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작가 싱클레어 루이스는 어떤 대학에서 창작론의 강좌를 맡았을 때 그 첫 시간에, [학생 여러분이 정말 글을 쓰고 싶다면 지금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뭐든지 쓰기 시작하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표현은 다르지만 뜻은 완전히 조치훈과 일치하는 발언이다. 이처럼 모범답안이 없다는 것은 시와 문학이 그만큼 어려운 작업이라는 뜻으로 통한다.
그러나 시에 뜻을 둔 사람들은 이 말에 주눅을 들 필요가 조금도 없다.
인생만사 누워서 떡 먹듯 쉽게 되는 일이 어디 있는가. 설령 있다 해 도 그것은 가치 없는, 따라서 일부러 마음먹고 할 일이 못되는 것이다.
마음먹고 해볼 만한 가치 있는 일은 그 종류 여하를 막론하고 어렵기 마련인데 시와 문학이 그 중의 하나임은 구태여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세상에는 처음부터 대 작가 대 시인으로 태어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문학의 수많은 기라성들은 모두가 처음부터 대작가 대시인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노력을 통해 자기 자신을 그렇게 만들어간 사람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음먹고 한번 시에 도전해 볼 만한 일이 아닌가..
시의 지망자들이 걱정해야 할 것은 재능의 유무가 아니다. 문제는 재능이 아니라 자기 속에 이미 잠재해 있는 재능을 자 기가 얼마만큼 열심히 키워갈 수 있느냐? 하는 그 노력의 의지인 것이다. “천재는 1%의 재능과 99%의 노력의 소산이다”라고 한 발명왕 에디슨 말처럼 시에 관한 1%의 재능은 그것을 쓰는 능력이 그 존재의 한 특질로 되어 있는 인간의 기본 자질이라 할 수 있다. 시를 좋아해서 자기도 직접 시를 써보겠다고 나선 사람들에게는 그 1%의 기본자질 외에 더 많은 재능이 부여되어 있다. 그 많은 재능을 살리면 된다. 노력하면 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노력하는 사람은 남이 들려주는, 모범답안이 있을 수 없는 창작 방법론도 모범답안 이상으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노력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서 시를 잘 쓰게 된다면 그것도 역시 공짜인 것이다. 자, 우리함께, 없는 공짜는 바라지말고 떳떳하게 값을 치르면서 시를 써보기로 하자.
(1) 시, 그것은 곧 감정의 표현이다.
서양 사람들은 옛날부터 시에는 서정시, 서사시, 극시 3가지 종류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따 라 그 중에서 서사시와 극시는 이름까지도 시가 아니고 소설과 희곡이 라고 바뀔 만큼 큰 변화를 겪었다.
그에 비하면 서정시는 상대적으로 변화가 덜해서 오늘날은 그것이 시라는 이름을 독점하는 형국이 되어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시는 서정시의 준말인 셈이다.
서정시의 그 <서정(抒情)>은 문자 그대로 감정의 표현을 뜻한다.
그러니까 시는 그 이름부터가 감정표현을 주로 하는 문학양식이란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이것은 우리가 직접 시를 읽어보고서도 얼마든지 확 인할 수 있는 특성이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 민요 시(詩) <아리랑>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그것은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이 실제로 그렇게 발병이 났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알려주는 문장이 아니라, 떠나는 님에 대한 야속함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문장인 것이다.
그 야속함 속에는 님에 대한 사랑과 이별의 슬픔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이와 같이 야속함, 사랑, 슬픔 등으로 구체화된 감정을 정서라고 한다. 그래서 감정(感情)과 정서(情緖)라는 말은 까다롭게 구분하지 않고 동의어로 쓰이는 게 통례로 되어 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이 시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T. S. 엘리어트의 장시 <황무지> 의 서두 부분이다.
엘리어트는 주지주의(主知主義)라 해서 지성(知性)을 존중하고 감정(感情)은 되도록 억제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던 시인이다.
그러한 엘리어트의 이 시도 그러나 그 첫 줄부터 뚜렷하게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4월 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말은 4월에 대한 객관적 진술이 아니라 시(詩) 안에서 말하는 화자의 주관적 감정반응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흔히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다.
감정은 인간의 의식의 한 양상이다. 인간의 의식 속에는 사물에 대해 감정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 즉 감정이 있다.
이 감정과 함께 사물을 논리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이성을 아울러 갖추고 있는 것이 인간의 의식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감성을 통해 느끼고 이성을 통해 생각한다 고 말할 수 있다. 그 느낌이나 생각의 결과로써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이 대상에 대한 어떤 종류의 이해이다. 그러나 그 이해의 방법과 내용은 감성과 이성이 서로 큰 차이를 보인다.
먼저 이성의 경우를 보면 그것이 우리를 이끌어 가는 곳은 대상에 대한 분석적 객관적 이해의 세계이다. 객관적인 만큼 그것은 또 다른 사람들도 전적으로 그에 동의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갖게 된다. 예를 들면 그것은 물이라는 대상을 [두 개의 수소와 하나의 산소가 화합하여 이루어진 물질]이라고 이해하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현대의 눈부신 과학문명이 사물을 그와 같이 이해하는 이 성의 소산임은 새삼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그러한 이성적 이해는 더불어 사는 존재인 인간의 원만한 공동생활을 가능케 하는 필수 절대 의 조건이 된다. 왜냐하면 어떤 사물을 두고 갑(甲)은 그것을 꽃이라 하고 을(乙)은 그것을 돌이라 하듯 주관적 이해가 서로 엇갈린다면 인간의 공동 생활은 유지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성(理性)은 인간이 가진 가장 귀중한 능력이란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이성(理性)만이 옳고 감성(感性)과 감정(感情)은 최대한 억눌러야 할 부정적 요소라는 인식도 은연중에 용인되고 있는 실정이다.
(2) 시는 마음의 거울에 비친 세계를 그리는 것
그러나 이성의 가치를 아무리 높이 평가한다 해도 이성만으로는 인간의 삶이 온전하게 영위되지 못한다. 그것은 이성과 함께 감성을 타고난 인간의 숙명이다.
게다가 인간은 더불어 사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각자 가 다른 사람과는 구별되는 특수한 개별성을 가진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사물에 대한 감성적 이해, 즉 느낌은 그러한 개별성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것은 이성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주관적 직관적 이해인 것이다. 동일한 대상을 놓고도 그에 대한 느낌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사실이 그러한 감성적 이해의 실상을 말해준다. 이러한 감성과 또 그것이 빚어내는 감정을 배척하고 만사를 이성적으로만 생각하고 처리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 것인가.
그때의 인생은 마치 기계가 돌아가듯 정확할지는 몰라도 차갑고 삭막하기 이를 데 없는 움직임의 연속이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 당연한 귀결로서 그 때는 또 사랑이나 동정심 같은 귀중한 덕목도 헌신짝처럼 저버림을 당할밖에 없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이기를 그치고 정교한 로봇이 되어 살아가는 세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모골(毛骨)이 송연한 일 아닌가.
여기서 우리는 감성과 감정이 이성 못지 않게 귀중하다는 사실, 그리고 특히 감정이 인간을 인간으로 있게 하는 핵심적 요소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도 감정표출이 자유로운 사람을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는 인간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이성만을 내세우는 사람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차가운 인간이라는 경원(敬遠)을 당한다.
인간은 그 마음을 통해 느끼기도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 느낌, 그 생각이 하나로 어울려 있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다.
이성만 가지고는 결코 마음의 이 통합성을 이루어내지 못한다. 감성은 그와는 달리 처음부터 그 속에 이성을 포괄하는 종합적 능력이기 때문에 그 자 체가 이미 마음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가 감정(感情)을 표현한다는 말은 곧 우리의 마음에 비친 세계를 표현한다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다.
(3) 시는 가치 있는 감정을 표현해야
논어에 보면 ‘시를 배우지 않으면 그 사람은 마치 담 벽을 보고 마주 선 것과 같다’는 구절이 나온다. 담 벽을 보고 마주 선다는 것은 융통성 없는 답답한 삶이 됨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물론 감정이 메마르고 따라서 그 마음이 또한 볼품없이 막혀있는 사람이 아닐 수 없다.
돈만 아는 사람, 권세만 추구하는 사람, 자기 일신의 동물적 욕망에만 사로잡혀 우주와 인생의 그 도처에 편만(遍滿)해 있는 무수한 다른 가치에 대해서 소경이 되어 있는 사람은 손쉽게 들 수 있는 그런 예가 될 것이다. 시와 감정, 그리고 시와 마음의 상관관계를 공자는 우리에게 다시금 일깨워 주고 있다. 그러나 시가 감정을 표현한다는 말은 오직 감정 그 것만을 표현한다는 뜻이 아니다.
감정도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 저속(低俗)하거나 무가치한 감정은 배제하고 의미(意味) 있는 감정, 가치 있는 감정을 표현해야 할 것이다. 그러자면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차원 높은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철학적 명상과 지적사고(知的思考)를 쌓지 않으면 안 된다.
뿐만 아니라 표현의 효과를 드높이기 위한 기술적 고려는 오히려 우리에게 감정의 억제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우리는 또 시대의 발달이 인간에게 더 많은 지적 활동을 촉구하고 있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지적 사고가 일찍이 유례를 볼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현대인의 정신상황이다.
시라는 이름의 마음의 거울이 이러한 우리 시대의 현실적인 인간의 삶을 도외시한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우주와 인생 그 모두를 마음의 눈, 즉 가장 인간적인 눈으로 비쳐내는 것이 시인(詩人)인 것이다. 그때의 그 마음속에는 물론 시대가 요구하는 현저하게 증대된 지적 사고도 용해되어 있다. 시는 감정표현을 내용의 기본특성으로 하되, 사물과 세계에 대한 지적 분석과 비판정신도 아울러 수용하는 문학 양식인 것이다..
10. 시인(詩人)의 네 유형
세상 사람들을 문제아(問題兒), 유명인(有名人), 현인(賢人) 그리고 보통인 이렇게 네 부류로 나눌 수 있는 것처럼 시인들의 경우도 문제시인, 유명 시인, 훌륭한 시인, 보통 시인 등으로 구분하여 따져볼 수 있으리라.
첫째, 문제시인
문제를 일으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장본인들이다. 이도 행동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와 작품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로 구분할 수 있다.
만일 어떤 시인이 백주에 종로 네거리에서 스트리킹을 했다면 이는 전자에 해당된다. 대개의 문제 시인들은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자들이다.
물론 김관식이나 천상병 같은 낭만적인 문제 시인들도 없지는 않다. 반면 작품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는 이상(李箱)이라든지 김수영 그리고 실험적인 작품을 쓴 80년대의 몇 시인들에게서 그 전형을 찾아볼 수 있다.
둘째, 유명시인
이는 세상에 많이 알려진 시인이다. 문제를 일으켜 유명해지기도 하고 처세를 잘 해서 유명해지기도 한다. 잡지사나 출판사를 열심히 찾아다니며 작품도 많이 발표하고 상도 많이 탄다. 신문에 글도 자주 쓰고 방송에 얼굴도 많이 내민다. 출판사와 궁합이 잘 맞으면 베스트셀러 대열에 끼어 광고판에 얼굴을 대문짝만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평론가들을 동원하여 의도적으로 자신의 작품을 언급하게도 만들고, 교과서에 작품을 실어 학생들에게 낯을 익히는 데 진력한다. 무슨 단체의 위원으로 성명서도 자주 내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감옥에 들어가는 것조차도 불사한다.
때를 잘 만나면 국가기관의 장으로 발탁되기도 하고 비례대표로 국회위원이 되어 거들먹거리며 지낼 수도 있다.
물론 훌륭한 시인이기 때문에 자연히 유명해지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그런 시인들은 다음의 셋째 항목의 범주에 넣기로 한다.
셋째, 훌륭한 시인
'훌륭한 시인'이란 작품은 말할 것도 없고 인품 또한 훌륭히 갖춘 시인을 뜻한다. 훌륭한 시인 가운데는 세상에 이미 알려져 유명한 경우도 있고 아직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시인 본인이 생존해 있는 당대는 대체로 전자보다는 후자의 경우가 많다. 그도 그럴 것이 훌륭한 시인일수록 매명(買名)에 연연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분들은 사람과 작품이 공히 맑고 아름답다. 뜻은 높고 거동은 늘 겸허해서 난초와 같은 그윽한 향기를 품고 있다. 군자적 풍모를 지닌 선비들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 보통시인
넷째는 첫째나 둘째의 경우가 아닌 무명 시인들이다. 그런데 이 부류는 다시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하나는 욕심은 있지만 능력이 미치지 못해 무명으로 주저앉는 경우요, 다른 하나는 능력은 있지만 욕심을 줄여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경우다.
후자는 장차 훌륭한 시인으로 인정을 받아 유명해질 수도 있는 가능성을 지닌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장차 훌륭한 시인'이 아니라 '훌륭한 시인'인데 세상이 그를 알아보지 못해 초야에 묻혀 지내는 경우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이리라. 이들이야말로 공자의 저 '人不知而不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아도 개의치 않음)'의 경지에 이른 군자들이라고 이를 만하다. 그러니 보통의 무명 시인들을 놓고 흙 속의 돌멩이 보듯 깔 볼 일이 아니다. 그 가운데는 세상 사람들을 온통 청맹과니로 만든 무서운 '보석'이 담겨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문제 시인이나 유명 시인이 아니라 훌륭한 시인이다. 그들은 괴로운 이들에겐 위로를 주고, 어려운 이들에겐 꿈을 심어 준다. 교만한 이들에겐 겸손을 가르치고, 간악한 이들에겐 사랑을 일깨우기도 한다. 그들이야말로 세상을 보다 아름답게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문제시인'이나 '유명시인'은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교란시키는 쪽에 가까운 무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남에 앞서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자들이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체면도 염치도 모르는 불량배들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문제시인'이나 '유명 시인'을 마치 '훌륭한 시인'인 것처럼 잘못 받아들이고 있다.
안목이 없는 매스컴들이 이들의 농간에 넘어가 연일 이들의 이름만 떠들어대고 있으니 그도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요사이 세상을 지배하는 큰 힘을 지닌 것은 언론 매체들이다. 이들은 어떤 정치 단체나 법전보다도 막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하루아침에 거대한 재벌을 무너뜨릴 수도 있고, 한 무명인을 대 스타로 세상에 드러낼 수도 있다. 그러니 이들의 힘을 잘 이용만 하면 '무명 시인'도 일조에 '유명 시인'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시인이란 어떤 사람들인가? 아니 어떤 시인이 바람직한 시인인가?
나는 시인이란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승화된 정신 세계의 소유자들이라고 생각한다.
세속적인 욕망을 벗어난, 적어도 떨쳐버리고자 하는 의지를 지닌 자들이어야 한다. 진(眞)․선(善)․미(美)를 추구하고 염결(廉潔)과 지조(志操)를 소중히 여긴다. 그런 기상을 우리의 전통적인 시인들은 지니고 있었다. 그들이 곧 '조선정신'의 뼈대가 된 선비들이다. 그래서 나는 바람직한 시인 정신을 선비 정신에서 찾고자 한다.
오늘과 같은 혼탁한 시대에 시인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세상이 그러하니 시인 역시 부화뇌동해서 아무런 잡설이나 지껄여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이러한 세상일수록 시인은 매서운 시정신을 지녀야 하리라.
세상에 아직 크게 드러나지 않는 '보통의 시인'들이여, 그대들은 흙 속에 묻혀 있는 잡석일 수도 혹은 보석일 수도 있다. 자신이 어느 편에 속하는가의 판정은 독자의 몫이 아니라 그대들 스스로가 결정할 일이다.
나의 시정신은 무엇인가? 내가 만들어낸 한 구절의 시가 이 세상을 보다 아름답고 맑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 그대들 스스로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11. 우리는 모두 삼류시인이다.
詩的인 표현을 하겠다는 뚜렷한 생각이 없어도, 우리는 무의식중 시에 못지않는 훌륭한 표현을 할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오늘 아침에는 안개가 많이 끼었다'라고 할 것을 '오늘 아침에는 안개가 자욱하다'라고 되도록이면 상세히 모양까지 그려 보이고, '오늘 아침에는 안개에 발이 빠질 것 같다'고 보다 감각적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소식이 없다는 말을 '소식이 깜깜하다'라고 하고, 귀먹은 사람을 '귀가 절벽이다'라고 한다. 염치가 좋은 사람을 '낯가죽이 두껍다'라고 하고, 지나치게 영리하여 어리숙한 면이 없는 사람을 '빠꼼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표현은 너무 많고 다양해서 일일이 들어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사람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별명으로 부른다든지, 선거철 구호를 만들어 유권자에게 호소하는 일, 특별 강조 기간이나 각종 홍보 행사에 인상적인 표어로 대중들의 감정에 어필하려고 하는 일들도 시적인 표현을 하려는 태도인 것이다.
긴 말을 짧게 줄이어 표어나 구호를 만드는 일이나, 말의 고저와 강약에 쏟는 우리들의 애착은 리듬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적 습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시골 저녁 무렵이면 밖에 나가 노는 아이들을 불러들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들린다.
'철수야아 __! 밥 먹어라아아____'
이 말에는 단순히 날이 저물었으니 그만 놀고 밥을 먹으라는 의미 이상의 느낌이 있다.
주어와 서술어로만 이루어진 이 짧은 말에는 쉼과 계속이 있고 음절마다 쏟아내는 각기 다른 소리의 양이 있으며, 거기 담겨 있는 정돈된 감정이 있다. 다시 말해서 음악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상가에서 들리는 곡(哭)소리는 물론이고 시장에서 외치는 상인들의 웨침소리, 노동을 하면서 발성되는 힘겨운 감탄사에서도 우리는 시적인 가락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일련의 현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무의식에 자리잡고 있는 시적 본능의 자연스러운 발현인 것이다. 인간에게는 원초적인 본능과도 같이 시에의 친화력이 있으며 이 친화력이 우리생활의 도처에 시적 점화구(點火口)를 마련하게 한다.
시적인 표현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과, 지고지선(至高至善)한 생활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끊임없이 미완성의 것을 완성하려 하고 추악한 것을 미려한 것으로 수정하려 하며 지상의 것을 천상의 것으로 끌어올리려고 노력하는 인간의 노력, 이것이 곧 시를 갈망하는 마음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三流詩人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은 우리가 겨우 엉터리 삼류시인밖에 될 수 없다는 자조(自嘲)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시인이라는 것, 비록 삼류시인이긴 하지만 이미 시인이 되어 있다는 기반 위에서 출발하자는 격려의 말이다. 즉 우리는 삼류시인의 위치에서 능히 일류시인으로 상승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희망적이고 긍적적인 말이다. 그리고 이는 인간이 보유하고 있는 근원적인 시의 잠재력을 인정하는 말이다.
시창작법을 공부하기 이전에 우리가 먼저 확실히 해야 할 것은 시와 우리 사이가 멀지 않다는 인식이다.
‘나는 詩를 몰라요, 詩에는 문외한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너무나도 많이 듣는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좋은 시 구절을 접했을 때 코끝이 찡해오는 감동을 받은 경험이 있다면, 그는 절대로 시를 모르는 사람이 아님은 물론, 결코 문외한이랄 수가 없다. 시를 창작하는 데에 특별히 비법이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인가? 현실적으로는 '시창작법'이라는 말이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시창작법'이라는 말을 앞에 내걸고 그것을 논의하기가 부자연스럽다.
'시창작법'이란 시를 지어내는 특수한 비법이나 기술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창작 되어진 기존의 여러 작품들을 감상하고 거기서 최소 공약수를 추출해 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말해서 시창작법은 누구에게 구체적으로 배울 수 있는 공식이 아니다.
스스로 여러 편의 시를 읽어야 한다. 그리고 거기 나타난 공통적 질서와 원리를 체득해야 한다. 그 체득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서서히 자연스럽게 나타날 것이다.
일정한 원리나 이론에 맞추어서 시를 창작해 내거나, 이론적 지식을 시의 제작에 적용하는 시인은 없을 것이다. 시의 이론은 시를 창작하는 데에 별 도움을 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나친 이론의 적용은 오히려 언어 예술로서의 시의 미감을 약화 시킬 수 있다. 시는 두뇌로 쓰지 않고 가슴으로 쓰는 것이며 논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로 받아들이고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인간은 누구나 시를 사랑하고 감상할 수 있는 정서를 본능으로 가지고 있다.
요리를 잘 못하는 사람도 음식의 맛을 감별할 줄은 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음식평론가거나 삼류요리사임에 틀림없다.
작곡은 못해도 음악을 즐길 줄 아는 사람, 청중을 모아놓고 발표하진 못해도 노래를 부르기를 즐기는 사람, 이런 사람을 음악 비평가 내지 삼류성악가라고 부르면 어떨까. 말을 사랑하고 그 느낌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은 시인이다.
12. 詩的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왜 시(詩)를 쓰는가? 인간은 왜 시(詩)의 가치(價値)를 창조하였는가?
시는 일종의 인간의 욕망(慾望)을 대변한 것이며, 이 표현(表現)의 욕구(慾求)는 인간 정신의 갈증을 해결하려는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다.
詩(文學)가 인간의 이상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가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역으로 시인이 시의 창작활동을 통하여 그 정신을 구원하는 방법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독자의 편에서도 시를 향수(鄕愁)하는 과정을 통하여 시인이 성취한 것과 같은, 어쩌면 그 이상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
시인은 시를 통하여 자아(自我)를 발견(發見)하고 시를 통하여 자아(自我)의 주체(主體)를 유지(維持)하고 시를 통하여 자아(自我)의 결함(缺陷)을 복구(復舊)하며 시를 통하여 정신적 균형과 통일을 완성한다. 그것은 시를 통하여 타인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는 예감 아래 자기만족을 느끼기 때문이다.
자아와 타인, 자아와 세계, 주관와 객관을 연합하여서 조화와 통일을 이루려는 시각을 시적 세계관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시적 세계관이란, 자아 가운데서 세계를 발견하고 세계 속에서 자아를 발견하려는 인간 정신의 지향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욕구는 인간의 의식 속에 잠재해 있는 공통의 본능이기 때문에 그것이 노출되었을 경우에도 전혀 어색하지 않으며, 매우 자연스럽고 강열한 호소력을 가지게 된다.
詩人은 주체인 자아와 객체인 세계(여기서 세계라고 하는 것은 자아 이외의 모든 대상을 의미한다)와의 만남을 통하여 일어날 수 있는 여러가지 현상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주체와 객체가 만나는 과정에서 발견하게 되는 하나의 동일성, 즉 일체감을 중시한다. 시인으로 하여금 한 편의 작품을 쓰게 하는 모티브는 외부 세계로부터 받은 하나의 충격 혹은 감동인데, 이 충격 혹은 감동을 달리 표현하면 '자아와 세계가 하나의 새로운 동일성의 차원에서 승화되었을 때', 곧 주객일체의 경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동일성이라는 말은 문학용어이기 전, 현대에 이르러 제반 학문 탐구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학문적 탐구의 대상이기에 앞서 우리들의 현실 생활에 밀착된 가치개념이기도 하다.
<세계와 나> 사이에 동일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할 때,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소외감과 고독감이다. 동일성이 결여되었을 때 우리는 우주와 세계로부터 유리된 듯한 이질감을 느끼게 되고 거기서 존재에 대한 회의와 절망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주체와 객체 사이에서 과다한 동일성을 발견하면, 우리는 너무나 쉬운 물아의 혼연일치 속에서 오히려 자아의 위치를 상실하거나 객관적 시각을 잃어버리는 혼돈과 오류에 빠지게 될는지도 모른다.
고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문학의 각 장르에서 가장 지속적으로 취급되어 온 테마는 사랑이다.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 동시에 당연한 일이다.
사랑이란 바꾸어 말하면 동일성의 발견이거나 동일성에의 열망이기 때문이다.
즉 어떤 경우에도 자아와 자아를 둘러싸고 있는 외부적 세계와의 합일을 꿈꾸지 않은 사랑은 없다. 이토록 자아로부터 세계, 세계로부터 자아를 발견하려는 갈망은 詩의 본래의 모습인 동시에 詩人이 회귀하기를 갈망하는 정신의 고향인 것이다.
김준오는 이러한 상태, 곧 자아가 세계와의 융화를 꿈꾸는 상태를 '서정적 자아'라고 불렀으며, 서정적 자아에 대하여 조동일은, '서정적 자아는 객관과 맞서 있는 주관도 아니고 이성과 구별되는 감정도 아니다. 서정적 자아는 주관과 객관, 이성과 감정의 구분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의 것이라고 보아야 문제가 해결된다. 서정적 자아는 세계와 접촉해서 세계를 자아화하고 있는 작용을 지칭한 것이 아니고 세계와의 접촉이 없어도 존재하는 자아라고 보아야만 주관과 객관, 이성과 감정의 구분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인정될 수 있다.'고 하였다.
서정적 자아가 '주관과 객관, 이성과 감정의 구분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의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성과 감정이 미분화된 카오스(chaos)적 합일의 상태이며 주객이 화해를 이룬 혼연일체의 경지라고 해도 될 것이다.
서정적 자아에 대립하는 개념으로는 역사적 자아(Historical I), 논리적 자아(Theoretical I), 실용적 자아(Practical I)를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오늘날 물신 숭배의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자아를 가리키는 말들이다.
우리는 문명이 발달된 사회에 살아갈수록 점점 자연과 신으로부터 멀어져 세계와의 합일이 아닌 세계와 대립하여 대결하려는 의식을 강화시켜 가고 있다.
세계와 조화하고 화해를 지향하는 서정적 자아야말로 동일성의 회복을 실현하려고 하는 시적 정신의 바탕이 될 것이다.
아침 풀밭을 걷다가
달팽이를 밟았습니다
크레카 부서지는 소리
흙발로 밟아
죄짓는 소리
우주의 천장이
내려앉았습니다
벗겨진 하늘
드러난 맨 몸둥이
쏟아지는 빛이며 아우성이며
나는 춥고 어지러워
몸을 움츠리었습니다
동서남북 어디로 갈까
그 자리에 눈감고
주저앉았습니다 - 이 향 아 <달팽이> 전문 -
위의 詩는 한낱 미물에 불과한 달팽이와 시인 자신을 동일시하였다. 자아는 세계와의 동일시를 통하여 무력함, 왜소함, 고독함과 절망을 구체적 실감하고 있다. 무심코 달팽이를 밟은 시인은 자신의 흙발의 감각을, 발 밑바닥에서 '바삭'하는, '크레카 부서지는 소리'로 느끼고 있다.
동시에 시인은 자신을 짓누르는 거대한 어떤 흙발의 감각을 크레카 소리를 내며 부서질 듯한 자신의 머리 위에서 동시에 감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詩의 서정적 자아는 한 마리의 달팽이로서, 춥고 어지러워 몸을 움츠리고 동서남북 어디로 갈까 몰라서 그 자리에 눈을 감고 주저앉아 버리는 절망과 두려움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시인이 의식적으로 자아와 세계의 합일점을 추구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는 동화(assimilation)이며 다른 하나는 투사(projection)이다.
동화는 시인이 외부 세계를 자신의 내부로 끌어 들여서 그것을 인격화하는 작업이다.
원래는 시인의 자아와 갈등. 대립의 관계에 있던 세계를, 시인의 감정과 가치관에 맞도록 변화시키는 것이며, 이는 달리 세계의 자아화라고 표현할 수 있다. 투사는 시인의 자아를 상상적으로 세계에 조영하는 것으로 주체인 자아와 객체인 세계의 동일화 작업이라는 점에서는 동화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동화가 세계의 자아화라고 할 수 있는 데 반해 투사는 자아의 세계화라고 할 수 있는 점이 다르다 하겠다. 즉 투사는 자아의 감정을 세계에 移入하여 자신과의 동일성을 이루려는 일이다.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일까. 묵중하게 서 있었다.
다음 날은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귀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으로 우회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 문을 지키는 파수병일까. 외로와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한 그들의, 침울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 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 박목월 <나무> 전문 -
시인이 여행길에서 만난 여러 형태의 나무들은 '수도승'처럼 '과객'처럼 혹은 '파수병'처럼 서 있었다. 그들 나무들은 시인의 마음 속에 '뽑아 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로 뿌리를 내려 시인과 일체가 되어 버린다. 즉 시인은 세계에 자신을 합일(合一) 시키고 있다.
<달팽이>에서는 자아와 대립 관계에 있는 '달팽이'를 시인의 내부로 끌어들여 시인의 가치관에 맞게 동화시킨, 외부세계의 자아(自我)화 작업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면, <나무>에서는 세계에 자아의 감정을 이입하여 동일성을 이루려고 한 투사의 성격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동화니 투사니 하는 분류는 편의상 동일화의 성격을 논의할 때에 필요한 것일 뿐이다.
작품상에 표현되고 있는 동일화의 작업은 동일화의 작업으로 나타날 뿐이며 동화와 투사는 완전히 분화되지 않은 상태로 일체를 이루는 것이 보통이다.
풀꽃에 닿은
내 쓸쓸함까지는
그대 못 따라오네
풀꽃이 먼지 같은 꽃 하나
완성하고 있는 걸
그대는 크게 눈떠도 안 보이네
그것은 그대가 부자인 때문.
새 꽃들이 불 밭 처럼 켜지고
이 밝음 속에서는 더욱
모래같이 작은 꽃은 보이지 않아
그대는 눈멀어 저쪽에 서서 있고
나의 쓸쓸함이 가는 길을
나 홀로 비추며 비밀히 따르고 있을 뿐이니
아무리 먼 길도
내 쓸쓸함과 어깨를 나란히 걸어가면
저 山 밑 홀로 사는
풀꽃의 쓸쓸함에 초대되리라
그대여 바람이 불면
홀로 거기 욕망에 흔들리게
나는 풀꽃 속에 들어가 작은 향기로 흔들릴 터이니
풀꽃에 들어간 내 쓸쓸함을
그대는 결코 갖지 못하네. - 김선영 <쓸쓸함> 전문 -
시인은 山 밑에 홀로 피어 있는 먼지처럼 작은 풀꽃의 쓸쓸함에 동화되어 있다. 다른 사람이 크게 눈을 떠보아도 그 쓸쓸함을 모른다면 그것은 '바람이 불면 홀로 거기 욕망에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고 아직도 '풀꽃의 쓸쓸함에 초대'받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대는 눈이 멀어 저쪽에 서서 있'기 때문이라고 이 시인은 말한다.
시인은 자신이 풀꽃 속에 들어가 작은 향기로 흔들리면서 시인 자신도 풀꽃처럼 쓸쓸해지고 있음을 기뻐한다.
시인이 자신을 소멸하여 풀꽃 속에 합일하려고 한 점에서 이는 자아의 세계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시인이 풀꽃이 되는 경로를 따라 풀꽃도 시인 속에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된다.
요컨대 詩를 쓰는 작업은 주체(主體)와 객체(客體) 곧 자아와 세계 (시인과 사물)의 관계를 설정하는 일이다.
세계와 자아와의 관계를 설정함으로써 세계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고 그 존재 가치를 해석하며 양자간의 가장 구체적이고도 순간적인 조우를 포착해 내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우는 세계와 자아 사이의 동일성의 발견으로부터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저 나뭇잎 뻗어 가는 하늘은
천 날 만날 봐야
환장할 듯이 푸르고
다시 보면
얼마나 적당한 높이로
살랑살랑 미풍을 거느리고
우리 눈에 와 닿는가.
와서는, 빛나는, 살아 있는, 물방울 튕기는
광명을 밑도 끝도 없이 찬란히 쏟아 놓는가.
이것을 나는
어릴 때부터 쉰이 넘는 지금까지
손에 잡힐 듯했지만
그러나 그 정체를 잘 모르고
가다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가운데
반쯤은 명상을 통하여 알 것도 같아라.
그러나 다시 눈을 뜨고 보면
또 다른 미지수를 열며
나뭇잎은 그것이 아니라고
살랑살랑 고개를 젓누나. - 박재삼 <찬란한 미지수> 전문 -
시인은 세계로부터 동일성을 발견하기 이전 미지수를 먼저 발견하였다.
그것은 '찬란한 미지수'이다. 영원히 도달할 길 없는 거룩한 세계에 대한 미지수임을 시인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쉰이 넘는 지금까지 손에 잡힐 듯 했지만 그러나 정체를 잘 모르'는 자연의 신비와 우주의 섭리와 그리고 삶의 이치와 비밀에 대하여 시인은 미지수라고 토로한다. 그러면서도 '가다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가운데 반쯤은 명상을 통하여 알 것도 같아라'라고 발견의 기쁜 소리를 지르기도 하는 것이다. 시인이 발견하려고 하는 것은 광명으로 차 있는 자연의 신비에 대한 해답이 아니다.
시인의 정신이 추구하는 궁극, 그 영원한 향수를 시인은 자연과의 친화와 교감을 통해서 미지수화하고 있다. 자연과의 교감은 자연과의 동일성이다. '나뭇잎은 그것이 아니라고 살랑살랑 고개를 젓'을 때, 시인은 벌써 그 대답을 듣고 있지 않을까?
담담하고 솔직하게 미지수를 고백하는 시인의 육성에서 우리는 시인의 정직한 개안을 축하할 수 있게 된다.
미지수를 고백하는 시인은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미지수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와의 교감과 응답은 세계와의 합일이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
1. 시의 정의(定義)
우리 시문학사에 있어서 시에 대한 정의는 주로 서구의 시문학 내지 그들의 시론에 의지해 왔음이 사실이다. 서구에서의 시의 출발은 그리이스어의 ‘포에시스(Poesis)’로 보고 있다. 그 말에는 행동과 창작의 뜻이 담겨 있다.
또 시인을 일컫기를 ‘포에타’라고 했는데 이 말에도 <창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시(詩)나 시인(詩人)은 어원적으로 같은 뜻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덕수(文德守) 편저『세계문예대사전』에서 살펴보면 시와 시인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시(詩)란 집을 짓고 불을 붙이고 농사를 짓는 일과 동등한 일로 보았으며, 시인이란 논밭을 갈아서 일하는 대신에 주문을 외어 비를 내리게 하고 수확의 감사를 노래하는 데 전력을 다한 사람이었다.
이런 뜻에서 시인은 구체적인 시(詩) 작품, 즉 포에마(Poema-Poem)를 만들어내는 제작자이며 기술자이나, 또 한편 내용(內容)면에서는 포에마의 본질인 포에시스(Poesis)는 인간의 최고선(最古善)인 행복(幸福)의 문제, 즉 윤리적(倫理的) 내용을 포함하므로 모방자(模倣者)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인(詩人)의 이 같은 이원성(二元性)에 입각하여 포에타와 미메타를 병용(竝用)했고, 플라톤은 시인을 진리에서 3단계는 먼 모방자라 했다.
즉 책상 집 등의 사물의 이념을 만든 신(神)인 창조자가 있고, 그 이념에 따라 실제의 책상 집 등을 만드는 제작자 있고, 그 제작자의 제작물을 모방해서 그림을 그리고 언어로 모방해서 노래하는 시인(詩人)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시의 발생(發生) 기원과 시에 대한 개념은 동양에서도 동일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 시(詩) 문학사(文學史)에서도 시의 발생이란 영고(迎鼓)․동맹(東盟) 등에서 열리는 제천의식(祭天儀式)에서 싹터 왔음을 볼 수 있으며, 시(詩)가 가지는 ‘창작’의 의미도 그들과 같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시의 어원(語源) 같은 것은 우리가 쉽게 말할 수 있으나 ‘시(詩)란 무엇인가’라는 정의(定義)를 내리기는 그렇게 쉽지 않다.
엘리어트의 ‘시(詩)에 대한 정의(定意)의 역사는 오류(誤謬)의 역사’라는 말이 잘 대변해 준다. 이 말은 시대(時代)에 따라서, 시인에 따라서, 시의 종류에 따라서 시를 보는 안목이 모두 다름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지극히 상식(常識)적인 시(詩)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면 우리는 다시 사전을 들춰 볼 수밖에 없다.
이상섭(李商燮)은『문예비평 용어사전』에서 ‘시(詩)에 대한 가장 간단한 정의(定義)는 소설․희곡․일반 산문이 아닌 글’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 말은 시와 산문의 구별을 의미한다.
시(詩)와 산문(散文)은 똑같이 민요(民謠), 무용(舞踊)에서 출발했지만 시(詩)는 음악적(音樂的) 요소가 더 많이 깃 든 쪽으로 흐르고 산문은 철학(哲學)․역사(歷史)․웅변(雄辯)과 같이 토의가 본질인 쪽으로 갈리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시(詩)는 운율(韻律)에 의한 모방(模倣)이다’라고 한 말을 깊이 새겨볼 만하다.
시(詩)란 언어(言語)로 쓰여진 문학작품(文學作品)이다.
문제는 ‘시(詩)만의 언어(言語)’인데 이러한 ‘시(詩)의 언어(言語)’는 불완전한 일상어를 극복하여 ‘완전한 언어’를 지향한다.
가령 일상에서 쓰이는 ‘장미꽃은 아름답다’나 ‘나는 슬프다’ 등으로는 ‘장미꽃의 아름다움’과 ‘나의 슬픔’을 보다 치밀하게 담아낼 수가 없다.
따라서 시는 일상적 언어로서는 표현이 불가능한 대상의 어떤 실재(實在)를 특별(特別)한 언어-완전한 언어-로 표현해낸 것이다. 이 때 더불어 요구되는 것은 대상(對象)에 대한 시인의 반응과 그러한 반응(反應)을 시적 상상력(想像力)에 의해 유효 적절하게 시화(詩化)함이다.
코르그(Jacob Korg)는 ‘산문(散文)은 정보(情報)의 전달(傳達)과 이지(理智)에 관여하는 언어이며 시(詩)는 감정(感情)과 상상(想像)에 관여하는 언어’라고 했다.
이 말대로 시(詩) 언어는 대상을 지닌 사실 혹은 사건 그 자체를 묘사하는데 관심을 갖지 않고 그 것들에 대한 시인의 반응에 관심을 갖는 것이요 그 것이 감정과 상상에 의해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종합해 보건대 시인(詩人)은 특별한 감정을 특별한 언어로 전달하되 그 방법상 특별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시(詩)를 실현시키는 사람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시학(詩學)』을 서구시(西歐詩)의 규범으로 삼는다면 동양(東洋)에서는『시경(詩經)』이 시(詩)의 근원(根源)을 밝힌 책이라 할 수 있다.
동양에서는『시경』에 나오는 ‘사무사(思無邪)’나 ‘시언지(詩言志)’ 같은 개념이 전통적인 시관(詩觀)의 개념으로 내려왔다. 이런 개념(槪念)은 교훈적(敎訓的)이요 공리주의(公理主義)적인 성격을 띤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詩)란 어디까지나 덕성(德性)을 기르는 방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낙이불음애이불상(樂而不淫哀而不傷)’해야만 된다는 것이 중국 전통시가 주장하는 바다.
2. 시(詩)의 인식
인간(人間)은 표현(表現)의 욕구(欲求)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느낌이나 의지를 밖으로 드러내게 된다.
일상적인 어법(語法)은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의지(意志), 권유(勸誘), 명령(命令),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감정 등을 제한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청자의 즉각적인 응답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문자를 통한 표현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상대적으로 덜 받으면서 독자의 간접적인 정서의 변화와 대응을 일으키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언어란 고독한 개체로서 이 세계에 존재하게 된 인간과 세계 그리고 타인 사이에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들어 줌으로써 고독(孤獨)을 해소(解消)하고 연대감으로서 안정감을 가질 수 있게 해주는 최선의 기능이라고 했다.
일반적(一般的)으로 언어(言語)는 정서(情緖), 정보(情報), 명령(命令), 친교(親交)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기능을 활용하되 더 나아가서 언어에 새로운 의미를 더해주는 것이 시인의 존재 이유이다.
당신은 왜 시를 쓰려고 하십니까?
당신은 왜 시인의 험난한 길을 걸어가려 하십니까?
일반인들이 가지지 못하는 심리적(心理的) 결핍(缺乏) 상태 즉, 규정(規定)화된 세계에 대한 반발과 반성, 일반인들이 가지지 못하는 심미적 현상의 드러냄 등이 시를 쓰고자 하는 욕구를 일으키게 한다.
시인은 세계를 변혁한다. 그것은 점진적이고 내면적인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이제 당신이 알고 있는, 당신이 존경하는 시인들을 떠올려 보자. 그들이 시(詩)로서 나타내고자 했던 세계와 그 세계에 대한 인식, 그 시인이 살았던 행적들을 생각해 보자.
그 중에는 세인의 주목을 받고 세속적 명예(名譽)와 부(富)를 거머쥐었던 사람들도 있을 것이며 평생을 음지(陰地)에서 고독한 글쓰기를 계속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분명 이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정치가, 자본가들이다. 그들은 막대한 자본과 정책결정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 그들은 고도화된 정보를 움켜쥐고 세계를 이끌어 간다.
그러면 시인은 세상을 변혁시키는 사람들을 변혁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시인은 꿈을 실현시키려고 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꿈을 심어주려고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해 두자.
이제 당신이 시를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게 되거나 원고지와 펜을 준비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 어떤 보이지 않는 세계, 아직 확연히 드러나지 않은 미결정의 세계가 당신 앞에 도래되어 있다. 그 세계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상식이나 통념으로는 코드화 되지 않는 고독한 세계이고 이제 그 세계를 탐색하는 임무가 시를 쓰고자 하는 당신에게 던져지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나 외에 나가 없다”고 한다. 역설적인 하나의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시장에 가서 옷을 한 벌 사려고 한다. 친절한 점원은 요즈음의 패션 경향을 일러주고 그 옷을 사기를 권유한다. 일단 마음이 움직인다.
유행이란 무엇인가? 흘러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유행에 따라간다. 왜일까? 고독해지지 않으려는, 타인과의 연대감을 확인하는 무의식적인 행동양식이다.
그런데 다음날 그 새 옷을 입고 출근한다. 그런데 다른 동료가 그와 똑같은 옷을 입고 나왔다. 순간 기분이 나빠질 것이다. 왜일까?
나와 생각이 같은 존재가 이 세상에 또 있다는 불쾌감이 엄습기 때문이다.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이미 구성되어 있는 세계가 아니라 또 다른 세계가 있다. 이곳으로 오라!' 누군가 묻는다. 당신은 왜 시를 쓰게 되었습니까?
시를 쓰는 사람가운데는 처음에 성악가가 되고 싶었던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시를 쓰게 되었다. 누구의 권유도 아니고 그렇다고 재능이 있어서도 아니다.
운동을 하려면, 오락을 하려면 대상이 필요하고 그에 따르는 경제적 부담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 혼자 할 수 있는 일, 돈이 필요하지 않는 일이 글쓰는 일이다.
처음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로 눈에 보이는 사물과 현상 묘사(描寫)에 치중하는 시작(詩作)을 하다가 계속해서 글쓰는 일을 계속하기도 한다. 어느 사람은 자신을 탐색하고, 확고한 세계인식을 바탕으로 일상적 세계의 또 다른 의미를 드러내는 성과를 거두었다면 어떤 사람은 시 쓰기를 통하여 자기만이 가질 수 있는 세계가 있고 그리고 인간에 대한 따스한 시각을 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식한 만큼, 느낀 것만큼 써라!' 이것이 시 쓰기의 철칙이다.
훌륭한 시를 쓰기 위해서는 인식 방법의 새로움과 범위의 확장이 우선되어야 하고 성찰이 요구된다. 관찰과 깊은 사색이 없이는 좋은 글을 생산해내기 어렵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왜 나는 시를 쓰는가?
그 이유는 사람마다 틀릴 것이다. 그렇지만 그 질문 속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음을 깨닫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① 시는 젊음의 문학이다.
모든 노년(老年)들은 한 때 시(詩)를 썼던 청년들이다.
시인(詩人)이란 이 청년의 마음을 그대로 간직한, 나이 먹은 청년이 뿐이다.
그러면 왜 시(詩)는 젊음인가?
젊음은 끝없이 추구하고 갈망하고 존재한다. 슬픔과 고난 속에서도, 무엇에라도 몰두하고 존재를 불태워야 하는 것이 젊음이고 생명이다. 그것이 젊음의 생(生)이고 존재의 본질적 모습이기 때문이다.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문제가 거기에 있다…
그러나 무엇에 취한다?
술이든, 시든, 덕이든, 그 어느 것이든 당신 마음대로다.
그러나 어쨌든 취하라. (보들레르)
3월에 대학의 신입생들과 함께 읽는 미당(未堂)의「수대동시(水帶洞詩)」는 아름답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은 다른 계절이라고 해서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봄이 갈망될 때, 마음이 봄을 부를 때 이 시는 언제나 '새봄'을 만든다.
수대동에는 언제나 새로 생명이 샘솟기 때문이다.
흰 무명옷 갈아입고 난 마음
싸늘한 돌담에 기대어 서면
사뭇 숫 스러워지는 생각, 고구려에 사는 듯,
머잖아 봄은 다시오리니
금녀 동생을 나는 얻으리.
눈썹이 검은 금녀 동생
얻어선 새로 수대동 살리. (서정주)
시인은 새 삶을 새로 시작하기를 꿈꾼다.
이것이 '새 옷'을 갈아입는 다는 시적 의미다. 시적 언어의 특징은 이런 것이다.
‘나는 당신을 영원히 사랑합니다’라는 상투적 산문 구절이 시(詩)로 표현되어 뜨거운 울림이 되는 것이 시(詩)의 세계이고 시(詩)가 이루어내는 시적 정취다.
‘숫 스러워지는'은 이 시인의 고유한 언어(言語)다. 어떤 판본에는 '쑥스러워지는'으로 오기(誤記)될 정도로 이것은 지상의 언어가 아니다.
숫처녀, 숫총각처럼, '숫'의 존재는 새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정신이 그 마음을 '숫' 언어에 담은 것이다.
'금녀동생'또한 이러한 새 언어에 대한 필요 때문에 생긴다. 여기에는 아내의 동생을 취한다는 윤리적, 법률적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옛 시간으로 돌아감(금녀)이 문제가 아니라 새 삶이 문제된다. '검은 눈썹'이 중요한 조건이다. 누구나 검은 눈썹을 가졌는데 왜 새삼스럽게 '검은'눈썹인가?
반달같이 예쁜 눈썹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원초적 생명감에 충일(充溢)한 그런 여자가 필요하다. 이러한 존재의 속성(屬性)들이 3월의 봄과 수대동의 물과 결합되어 이루어져 새 생명에의 부름으로 가득 찬 것, 그것이 '수대동'의 세계다.
이와 같이 시에는 끊임없는 젊음이 있다. 이것은 영원히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쉼 없이 되사는 젊음이다. 되산다는 것은 죽음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새 무명옷'은 죽음의 수의(壽衣)가 되고, 새 배내옷이 되는 이중적 의미를 띈다.
그래서 이 몸 다시금
둥근 물방울의 시온성으로
밀알갱이의 예배당으로 들어가기 전(딜런 토마스)
생명 속에 죽음이 깃들 듯이 죽음 안에 생명이 있다. 수대동의 물 또한 죽음을 받아들이고 동시에 새 생명을 주는 복합적인 존재다. 봄이 또한 그러하지 않은가?
겨울을 거쳐야 봄이 온다.
시에서 원형, 상징적 인식이 중요시되는 것은 우리 삶의 근원적 모습이 이러한 우주적 질서와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② 시(詩)는 멋있는 문장(文章)의 나열이 아니다
시(詩)란 멋있는 문장의 나열이 아니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시의 언어는 단순히 사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영혼을 가진 어떤 것이다. 즉 시인의 영혼 속에서 태어난 또 하나의 영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른 언어와 결합하여 새로운 뜻을 파생시킴으로써 상상력의 세계를 보여 주며, 시인의 정신세계를 담아낸다. 아무리 아름다운 시라고 해도 그 속에서 언어의 영혼을 읽을 수 없다면, 독자의 감동을 얻을 수 없다.
시(詩) 속에도 논리가 있다. 시가 상상의 산물이고 시어가 언어의 영역을 뛰어넘는다고 해서, 무조건 언어를 골라서 연결시켜서는 안 된다.
또 상징이라고 해서 무조건 설명이나 이해의 단계를 뛰어넘는 것이 아니다.
상징(象徵)이란 남들도 다 이해할 수 있어야 상징성을 띠는 것이 아닌가.
다른 사람들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면, 아무리 좋은 뜻을 지녔더라도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다.
혹자는 자동기술법으로 쓰는 시에 어떻게 논리가 있겠는가? 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자동기술법으로 쓰인 시도 읽어보면 시인의 무의식적인 정신세계이지만 그 속에서도 한줄기 정신의 가닥이 흐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무의식의 상태에도 논리 체계가 들어 있다.
시(詩)란 곧 시인(詩人)의 정신과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3. 시안(詩眼)
시안(詩眼)이라 하면 ‘시(詩)를 보는 눈’이란 말인가, 아니면 ‘시의 눈’이란 말인가?
전자의 경우라면 그 '눈'은 시(詩)를 식별하는 관찰자의 것이 된다.
시인이거나 독자거나 간에 좋은 시를 판별해 낼 수 있는 능력, 즉 시(詩)를 제대로 볼 줄 아는 眼目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라면 그 '눈'은 작품이 지닌 것이 된다.
동양적 시관(詩觀)에서 시안의 의미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도대체 '시의 눈'이란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시에 무슨 눈이 있다는 것인가?
눈이란 곧 생명체(生命體)의 요처(要處)라고 할 수 있으니 시안이란 시의 요처를 이르는 뜻으로 짐작된다.
청(淸)나라의 오대수(吳大受)는『시벌(詩筏)』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시(詩)의 명수(名手)가 시구(詩句)를 다듬으면, 벽에 그린 용(龍) 그림에 마지막 눈동자를 찍자 그 용이 비늘을 꿈틀거리며 날아오르는 것처럼 살아난다. 경이로운 한 구절이 시(詩) 전체를 기발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야말로 화룡점정(畵龍點睛)의 묘처(妙處)라고 설명하고 있다. 시 전체를 생동감 있게 살려내는 경이로운 한 구절이 시안(詩眼)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한 바둑의 눈에 비유해서 말하기도 한다.
"시(詩)에 눈이 있는 것은 바둑에 눈이 있는 것과 같다. 시상(詩想)이 영롱하게 드러나는 것은 시안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중략) 소위 눈이란 시나 바둑이 영롱하게 되는 곳 그것을 이르는 말이다."
바둑에 눈이 있다는 말은 한 수(手) 한 수(手)마다 최선의 요처가 있다는 것이다.
한 수 잘못으로 대마(大馬)를 죽이기도 하고, 한 수를 잘 놓음으로 해서 기세(氣勢)를 얻어 상대방을 곤경에 빠뜨리게도 한다. 바둑의 名人들은 바로 그러한 요처를 찾아내는 눈을 지닌 사람들이다. 名局은 그러한 요처들이 서로 밀고 당기면서 진행되는 긴장된 구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요처들 가운데서도 국면 전체를 탱탱하게 거머쥐고 있는 가장 중요한 要石이 놓인 자리를 '碁眼'이라고 할만 하다.
시(詩)를 구성하고 있는 시어(詩語)들도 하나 하나가 다 최선의 것들로 선택된 것이어야 한다. 만일 한 편의 시가 최적의 시어들로 이루어진 완벽한 구조물이라면 그 작품에서 시어들의 경중을 따지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옥을 이루고 있는 여러 가지 자재들 가운데서도 대들보가 가장 소중한 것처럼 작품이라는 하나의 구조물 속에서도 핵심이 되는 부분이 없을 수 없다.
아니 그러한 부분이 없다면 그 작품은 긴장감이 없는 느슨한 구조가 되고 말 것이다.
소설에 클라이맥스가 설정되는 것처럼 시에서도 작품을 이루고 있는 제요소들이 어느 한 곳으로 응집되는 긴장된 구조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리라.
청(淸)나라의 유희재(劉熙載)는『예개(藝槪)』에서 시안(詩眼)을 상대적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
“詩眼에는 시집 전체의 눈[眼]도 있고 시 한편의 눈도 있고 몇 구에서의 눈도 있고 한 구의 눈도 있다. 또한 몇 구가 눈이 되는 경우도 있고 한 구가 눈이 되는 경우도 있고 한 두 자가 눈이 되는 경우도 있다.”
유(劉)의 지론은 범주의 설정에 따라 상대적으로 시안은 달라진다는 것이다.
작품 전체의 시안이 있고 또 각 부분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요처인 시안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다. 나라 전체를 놓고 본다면 수도인 서울이 要地지만 어느 한 지방만 놓고 본다면 그 지방의 행정도시가 요지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시안은 시의 한 행 안에서 혹은 한 연 안에서 혹은 작품 전체에서 각기 달리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역으로 말하면 한 작품은 부분은 부분대로 전체는 전체대로 어느 한 요처에 탄력적으로 모아지는 유기적 구조들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견해다. 詩眼의 이론은 詩語의 硏鑽이라는 수사학적 입장을 넘어서서 시의 역학적 構造論을 지향하는, 더 나아가서는 詩心의 응집 곧 시정신의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는 詩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朴木月의 <靑노루>를 예로 삼아 시안을 살펴보도록 하자.
머언 산 靑雲寺/ 낡은 기와집
山은 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 가는 열두 구비를
靑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이 작품의 전개는 원경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점 대상에 접근해 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 시는 두 개의 點降 구조로 되어 있는데,
첫째는 제1연이 '遠山→ 靑雲寺→ 기와집' 등으로 점점 하강 이동하는 것이 그렇고, 둘째는 제1, 2, 3, 4연의 전개에서 '遠山→ 자하산→ 열두 구비(능선)→ 청노루→ 눈' 등으로 대상의 범위를 점점 좁혀 가는 것이 또한 그렇다.
첫째 구조가 배경 역할을 하고 있다면
둘째 구조는 전체 작품의 중요한 맥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이 정황을 카메라 동영상으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먼 산을 배경으로 시작하여 대상인 한 마리의 노루에 서서히 접근해 간 다음 드디어 노루의 눈동자를 클로즈업시킬 것이다. 그리고 그 눈동자로부터 새롭게 펼쳐지는 구름과 창공의 무한 공간을 제시하게 될지 모른다. 제4연에서 제5연으로의 이동은 순간적 확산이다.
제1연에서부터 제4연에 이르기까지 점점 축소 응결되어 가던 시상(詩想)이 제5연에서 갑자기 확산(擴散) 소멸(消滅)하고 만다. 노루의 ‘눈’은 이 지상의 만상(萬象)을 삼키는 블랙홀이며, 무한한 우주 공간으로 열리는 하나의 신비로운 문이다.
그야말로 묘처(妙處) 중의 묘처(妙處)다. 이를 일러 詩眼이라 할만 하다.
이 짧은 시가 단순한 서경시에 그치지 않고 한 생명체의 우주적 照應을 담고 있는 秀作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작품의 詩眼인 '눈'의 역동적인 작용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4. 시심(詩心)이란 어떤 것인가
시(詩)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려 할 때 흔히 초심자들로부터 다짜고짜 “시란 무엇입니까?”하는 질문을 듣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시의 개론서나 작법들이 그 서두에다 <시의 정의>니 또는 <시의 본질>이니 하는 해답을 내놓거나 시도하고 있지만 실상 시가 무엇인가를 뚜렷하게 몇 마디로 설명한다는 것은 어렵다기보다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마치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격(格)으로 십인 십색이어서 동서고금 굴지의 시인 100명의 시에 대한 정의를 나열해놓는다 해도 그것이 시(詩)라는 것의 전모를 밝혀낼 수 없을 뿐 아니라 시에 대한 실제적 이해나 창작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이러한 시(詩)에 대한 정의(定意)의 어려움과 불가능함을 20세기 영국의 대 시인 엘리어트 (T.S.Eliot, 1888~1965)는〈시에 대한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다〉라고까지 말한다. 그래서 본 강좌에서는 저러한 성급한 시의 정의나 공소한 본질론을 피하고 먼저 시를 불러일으키는 마음, 즉〈시심(詩心)이란 어떤 것인가?〉하는 문제부터 밝혀보기로 하겠는데, 여기서〈시심〉이란 시를 불러일으키는 생각[詩想]․느낌[詩情]․흥취[詩興]등을 포괄해서 쓴 숙어요, 또한〈시를 불러일으키는〉도 좀더 적극적으로〈시를 쓰는〉으로 바꿔 생각해도 무방하다.
그야 어쨌거나 이러 저러한 시심(詩心), 즉 시적(詩的) 심리상태가 일상적 생활의 심리상태와 다른 것은 우리 누구나 체험으로 다 아는 바이지만, 그러나 무엇이 어떻게 다르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가 모호하고 막연한 상태인데, 실은 이것이 시를 쓰려는 이들의 가장 기본적인 맹점(盲點)이라 하겠기에 이야기가 좀 잘아지는 느낌은 있지만,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보겠다.
가령 우리가 일상 속에서〈배가 고파 무엇이 먹고 싶다〉든가,〈일을 많이 했더니 피곤하다〉든가,〈친구가 없어 심심하다〉든가,〈가족과 헤어져 있게 되어 쓸쓸하다〉든가, 또는〈무엇이 기쁘다〉든가,〈슬프다〉든가,〈화가 난다〉든가,〈좋다〉든가, 〈싫다〉든가 하는 심리상태와 가령 절묘한 자연의 경치를 대했을 때 자기도 모르게 일으키는 흥취나, 또는 연애를 할 때에 자기를 잊는 황홀감이나, 어떤 죽음을 마주했을 때 이는 까닭 없는 슬픔 등 소위 시적(詩的)이라고 부르는 심리상태와 구별되는 것은 앞의 것, 즉 일상적인 생각이나 느낌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의 이해(利害)에서 출발하고 또 그것의 충족으로 끝나는 것이지만, 뒤엣 것 즉 시적(詩的)인 생각이나 느낌이나 흥취는 이해를 떠난 맹목적인 것임을 발견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그 감동상태는 대상과 하나가 되어 자기를 잊는 몰아적(沒我的)이고 무아적(無我的)인 가장 순수한 마음의 상태인 것이다.
물론 이렇듯 자신의 이해를 떠나 대상과 하나가 되는 감동상태는 반드시 오묘한 자연의 경관이나, 열애(熱愛)속에서나, 죽음을 접할 때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일상생활의 아무리 흔하고 사소하고 허접스러운 일이나 물건이나 사건(事件) 속에서도 우연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고, 또 예민한 감성이나 깊은 통찰로 이를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불러일으킬 수가 있다.
즉, 우리가 어떤 자연이나 인간이나 세상살이의 그 생성과 소멸 속에서 신비한 본질이나 진․선․미의 모습을 발견한다던가, 이와는 반대로 아주 고귀하고 아름답다고 여겼던 사물 속에서 무상감(無常感)이나 연민(憐憫ㅡ가엾게 여기는 생각이나 느낌)을 느꼈을 때 우리는 저러한 감동상태에 드는 것이다.
그래서 20세기 프랑스의 상징주의의 대표적 시인인 폴 발레리(Paul Valery,1871~1945)는 이러한 시(詩)를 불러일으키는 마음을 우주적 감각이라고 하였는데 나는 거기에다 우주적 연민을 덧붙이고자 한다.
그러면 이제 실제로 이러한 우주적 감각이나 그 연민이 시로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 살펴보자.
공원
천 년 또 몇 천 년이 걸릴지라도
네가 내게 입맞춤하고
내가 네게 입맞춤한
그 영원의 한순간을
말로 다할 수가 없으리.
겨울 햇볕이 쬐는 아침
〈몽수리〉공원에서의 일이었네.
〈몽수리〉공원은 파리의 안,
파리는 지구 위,
지구는 별의 하나,
위의 시(詩)는 제2차대전 후 프랑스의 가장 인기가 높았던 시인(詩人) 자크 프레베르(Jacques Prevrt)의 작품으로서〈몽수리〉라는 한 공원에서 있었던 연인끼리의 입맞춤을 노래하고 있는데, 흔히 볼 수도 있고 또 체험할 수도 있는 이 사랑 행위가 얼마나 감미롭고 소중하고 신비한 것인가를 무한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에다 확대해가며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 또 하나의 시를 보자.
십자로에서
너는 왼쪽으로 나는 오른쪽으로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길을 가야 한다.
그리고 그 이별은 하루일지, 하룻밤 동안일지
또는 영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만나거나 헤어지거나
(우리의 길을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벗의 마음에다
우리 모두의 앞길을 위하여 건배하자.
자! 행운을 빈다.
어디로 가는지조차도 모르지만.
도박 같은 인생이어니
우리는 이기거나 지거나
그것은 제 재주도 제 선택도 아니요,
그것은 나누어 받은 패 쪽에 달려 있다.
연애에도 운이 있고 싸움에도 운이 있고
그리고 우리 중의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마침내는 운명에 굴복하고야 마느니 ㅡ
또한 우리가 잘 못했던가 잘 했던가
때로는 놀랍게도 승리를 맛본다.
자! 행운을 빈다.
우리가 서로 아직은 끝장이 나지 않았으므로.
미국의 전세기말의 방랑(放浪) 시인이었던 리처드 호비(Richard Horey, 1864~1900)의 작품으로서 아주 경쾌하게 씌어져 있지만 인간운명의 불가사의함과 그 허망(虛妄)이 노래되고 있다. 물론 이 시는 운명론이나 허무주의를 부정하고 배격하는 사람에게는 거부감을 일으키겠지만 그런 사람의 삶에도 자기의 의지나 노력만으로는 도저히 어쩌지 못할 인간존재의 유한성에서 오는 불가사의와 허망감이 때마다 엄습하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위의 두 시에서 보다시피 우리가 입맞춤처럼 아주 무심하고 심상하게 여기던 일상적 사건 속에서도 저러한 우주적 감각이 발동할 수가 있고 또 우리가 목숨처럼 가장 고귀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에도 그 덧없음이나 가엾음. 즉 우주적 연민을 느낄 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 이러한 우주(宇宙)적 감각(感覺)이나 연민(憐憫)은 어떻게 해서 일어나고 또 어떻게 해서 일으킬 수가 있는가?
그것은 별것이 아니라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자력(自力)적이던 타력(他力)적이던 어떤 존재의 본질성에 대한 자기 나름의 발견과 놀람과 그 깨우침에서 온다고 하겠다.
그 본보기로 일본의 현존(現存) 중견(中堅) 시인인 요시노 히로시(吉野弘)의 시를 음미(吟味)해보기로 하자.
생명은
생명은
자기 자신만으로는 완결될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 같다.
꽃도
암술과 수술이 갖추어져 있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버러지나 바람이 찾아와
암술이나 수술을 중매한다.
생명은
그 안에 결핍(缺乏)을 지니고
그것을 타자(他者)에게서 채워 받는다.
세계는 아마도
타자와 총화(總和),
그러나
서로가
결핍을 채운다고는
알지도 못하고
알려지지도 않고
산재(散在)해 있는 것들끼리가
무관심하게 있을 수 있는 관계,
때로는 꺼림칙하게 여기는 것도 허용되는 사이,
그렇듯
세계가 느슨하게 구성되어 있는 것은 왜ㄹ까?
꽃이 피어 있다.
바로 가까이까지
등에의 모습을 한 타자가
빛을 두르고 날아와 있다.
나도 어느 때
누구를 위해서 등에였겠지
당신도 어느 때
나를 위한 바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시(詩)는 작자가 어떤 꽃에 등에가 화분을 나르는 것을 보고 인간끼리의 나와 남의 관계도 저처럼 협동 속에서 살아간다는 데 생각이 미쳐서 그것을 노래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고, 이와 반대로 인간끼리의 삶을 살펴보다가 그 생각이 벌이나 나비나 등에나 바람이 화분을 날라서 꽃을 피우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여하간 작자는 모든 존재가 서로 다르고 제각기 떨어져 있으면서 서로의 목숨이나 그 삶에 무관한 것 같으면서도 서로가 의식도 하지 않은 채 서로의 성장이나 성취, 또 행․불행에 직접 관계를 가지고 있고 작용도 하고 있다는 사실, 즉 사물의 본질인 우주만물의 신비한 협동에 눈뜸으로써 놀라고 깨우침에 나아간 그 〈감동〉과 〈감흥〉을 저렇게 한 편의 시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감동〉과〈감흥〉이란 말에 특히 주목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어떤 사물(事物)의 본질(本質)을 이해하고 체험(體驗)하기만 하면 그것이 바로 시(詩)가 되는가 하면 그렇지가 않아서, 가령 위의 시에서 어떤 꽃에 대한 충매(蟲媒) 행위를 알기로 말하면 꿀벌 치는 이들이 더 장할 것이고 또 인간의 상부상조 같은 것은 실제 조직이나 집단생활을 하는 사람이 그 실상을 더 잘 체험하겠지만, 그러한 전문적 지식이나 풍부한 경험이 곧 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만물의 우주적 혐동을 스스로 알아내고 깨우친 그 감동이나 감흥, 즉 나대로 말하면 우주적 감각이나 연민이 시를 쓰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또다시 제기되는 것은 그러한 시적 감동이나 감흥이라는 것은 어떤 성질의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가령 우리가 〈무엇이 갖고 싶다〉든가 〈무엇이 보기 싫다〉든가 또는〈무엇이 즐겁다〉든가〈무엇에 화가 난다〉든가 하는 일상적인 욕구나 충동과 같은 일상생활의 심리상태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것이 충족되거나 시간이 지나면 끝나고 사라지는 성질의 것이지만, 가령 어떤 매혹적인 경치나 낭만적인 행위나 무상감 같은 체험을 했을 때 그 감동이나 감흥은 그 자체가 이를 지속시키고 전달하려는 욕구를 수반한다. 이것도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면, 가령 어떤 가정주부가 설악산엘 처음 가서 그 경치에 압도당하고 도취되고 매료되어 돌아왔을 때 그녀는 서투르게나마 가족들에게 자기의 설악산에서 받은 감동이나 감흥들 되살려 전하면서〈내가 시를 쓸 줄 알았다면 그것을 써서 남길 터인데…〉하고 아쉬어 한다.
저러한 시적 감동과 감흥의 〈지속〉과〈전달〉의 속성을 폴 발레리는 〈시의 내용이 되는 미적(美的)감동은 다른 감동이 오직 흥분으로 끝나는 것과는 달리 스스로가 여러 가지 모습과 질서를 스스로 지으려드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이에 덧붙여서〈이러한 시적 감흥이라 하여도 그대로 놓아두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영구히 사라지고 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아름다운 순간, 또 그 신묘한 지각(知覺)을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끄집어내어 항구적으로 보존하려는 것이 바로 시를 쓰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저러한 시심(詩心)을 시인은 말로써 표현하게 되고, 음악가는 소리로써 나타내고, 화가는 선이나 색채로, 조각가는 흙이나 돌․나무․무쇠 같은 물질을 가지고 입체적으로 조형을 하는 것이다. 이렇듯 시심은 모든 예술을 불러일으키는 모태이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이 아름답고 훌륭한 예술을 보면 시가 들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요, 이와 반대로 시(詩)가 없거나 시심(詩心)이 빈곤한 예술(藝術)은 신통치 않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저러한 시의 발생 원인인 시심이라는 것도 오직 수동적 상태만으로 보면 본래가 지극히 우발적이고 충동적인 것으로서 오직 그것만으로는 시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하면, 여기에다 능동적이고 지적인 활동이 따라야 비로소 표현의 세계에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즉, 앞에서 말했듯 시를 불러일으키는 마음이란 스스로가 질서를 지어서 보존하고 전달하려는 독특한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고 했는데, 바로 이 에너지를 능동적으로 발동시켜 그 자연발생적 감동과 감흥을 어떻게 표현하여 정착시키느냐 하는 방법과 기술의 문제가 대두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시의 어러운 작업적 측면으로서, 여기서 다시 폴 발레리의 말을 빌면 〈훌륭한 시란 뼈를 저미는 고통이 작업에서 빚어지고, 예지(叡知ㅡ여기서는 작가의 자질의 뛰어남을 가리킴)와 끊임없는 노력의 기념비요, 의지와 분석의 소산〉인 것이다.
5. 나는 과연 시(詩)를 쓸 수 있는가
시 창작에 지름길이란 있을 수 없다. 시를 포함한 모든 예술은 인간이 스스로를 표현함에 있어 그 누구와도 다른 독립된 ‘나’를 발견하자 함이고, 그 ‘나’를 완성시켜 나가는 특별한 발전적 단계이기 때문이다.
‘나’란 누구인가. 인간이라 하여 누구나 ‘나’를 깨닫고, ‘나’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사회에 적응하는 사회적인 존재라고 한다. 그러나 예술가(藝術家)로서의 ‘나’는 사회에 적응하기보다는 사회의 통념에서 벗어나서, 오히려 사회 안의 나를 뚜렷하게 부각시키고 차별(差別)화시키는 반사회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예술가의 갈등과 예술의 모순(矛盾)점은 실로 여기에 있다.
사회에 기여하기 위한 예술 본연의 목적과 예술을 성립시키기 위한 예술가의 방법론이 상치될 수 있는 위험성이 요소 요소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타고난 재능, 꾸준한 습작, 훌륭한 작품의 감상은 창작 실기의 3대 요소이다.
그러나 실제적인 창작 과정에서는 이상적인 논리에 불과할 때가 많다.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우선 창작의 욕구가 나를 표현하기 위한 것인가 남을 위한 것인가 스스로에게 따져 물어야 한다. 타고난 재능이란,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이며 그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보조수단으로서 남을 활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전제 아래 꾸준한 습작과 훌륭한 작품의 감상이 허용된다. 예술에의 원론적인 깨우침을 갖지 못할 때는 창작과정에서 성취감을 얻기보다는 심신만 피곤해지기 일쑤이다.
그러나 예술 원론에 대한 이해가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무엇인가 쓰고 싶은 사람에게 예술에 대한 공부부터 강요한다는 것은 사실 원칙론이나 이상론에 불과하다. 작품이 빠져버린 이론은 작품의 창작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아가 훌륭한 작품의 훌륭함을 깨우치기 위해서는 예술이론과 그를 뒷받침할 수 있는 기초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이 갈등의 해소점은 없는가.
작품을 써나가면서 그에 합당한 이론을 한 단계씩 밟아 오를 수는 없는가.
무엇인가 쓰고 싶은 사람에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이 책은 그와 같이 무작정 쓰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기획되고 집필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창작실기의 3대 요소부터 이야기해 나가기로 하자. 초심자의 경우 제일 먼저 궁금해하는 것이 자신에게 과연 쓸 수 있는 재능이 있느냐는 단순한 조바심이다.
허나 누가 그의 재능을 첫눈에 섣불리 단언할 수 있으랴. 세계의 문학사는 조숙한 천재들과 함께 늦깎이 문인들을 다같이 불멸의 성좌에 올려놓고 있다.
재능이라는 것은 결국 스스로의 나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있느냐 없느냐는 처음의 문제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시와 같은 문자예술에서는 나를 표현하기 위해서 우선 써보는 것이 첫걸음이다.
작품을 만들기 위해 시험삼아 써보는 것을 습작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습작은 지속적인 반복훈련에 따라 향상될 수 있다.
습작을 함에 따라 표현이 다듬어지고, 그러한 훈련을 위해 다른 사람의 좋은 작품을 참고해야 한다. 지적이고 감성적인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의 습작시기를 거치면 초보적인 작품을 생산할 수 있고, 이때부터는 훌륭한 작품을 찾아 읽을 수 있는 눈매가 서게 된다.
무엇인가 써 보았을 때부터 초보적인 작품을 쓰게 되기까지에는 또 얼마나 시일이 걸리느냐가 초심자의 두 번 째 관심사이지만 여기서도 명쾌한 답을 드릴 수가 없다.
개인차가 많기 때문이다. 허나 이 경우, 필자의 습작경험과 시작지도 경험을 예로 들 수는 있다.
처음 시를 썼을 때부터 초보적인 작품이 나오기까지는 대개 1년여가 걸리며 또 개별적으로 작품지도를 하였을 때도 6개월에서 1년여 정도면 작품의 형태를 갖추는 것이 보통이었다.
초보적인 작품의 형태를 갖추고 나면 초심자들의 발전 속도는 개인차가 더욱 분명해진다. 특히 습작과 감상을 병행하는 사람들의 발전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진다.
스스로의 힘으로 훌륭한 작품을 감별할 수 있을 때 그 작품과 스스로의 작품을 비교할 수 있게 된다. 그 비교 관점에서 스스로의 수준을 평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따라 스스로의 취약점을 고쳐나가는 힘이 붙으므로 작품의 발전도 가속도를 갖게 되는 것이다. 물론 훌륭한 작품을 감상한다지만 예술가의 명성이 개개의 작품에 걸맞지 않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독자의 수준이 너무 낮아 그 작품의 진수를 감상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이 때문에 필자는 감상작품을 선택할 때는 시인의 이름에 구애받지 말고 스스로의 판단에 의존할 것을 권한다. 다시 말해 스스로 좋은 작품을 골라나가라는 것이다. 결론은 ‘나는 과연 시를 쓸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 빠지기보다는 우선 쓰고, 읽고, 생각하는 행위에 돌입하라고 권할 수밖에 없다.
허나 무조건 쓰고 읽고 생각하는 일이란 얼마나 피곤한 시간의 낭비인가. 이 때문에 필자는 초보자를 위한 창작의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실제에 적용해 보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예상대로 많은 효과를 거두었다.
6. 왜 시를 쓰는가?
“왜 시(詩)를 쓰는가?” 하는 질문은 “너는 왜 밥을 먹지 않고 빵을 먹느냐?” 하는 질문과 동일하다. 시를 쓰는 사람은 음악을 듣는 사람보다 조금 더 시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음악을 전혀 듣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악기(樂器)를 연주하는 사람은 음악에 대한 관심도(關心度)가 시를 쓰는 행위보다 더 높을 따름이지 시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관심이란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떤 경로를 통하던 간에 쓰는 행위, 말하는 행위를 거듭하고 있다.
관심이 없으므로 이런 행위는 하지 않아도 되고 관심이 있으므로 저런 행위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생존은 행위의 복합적 축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관심의 영역 밖에 위치하는 것이다.
생존의 욕구 즉 생존의 안전이 확보되고 난 다음에 인간(人間)은 현실(現實)에서 보다 고차원적인 예술의 세계로 이행해 나간다.
예술(藝術)의 세계는 현실계(現實界)와는 동떨어져 있음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계를 捨象(사상)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현실계를 기반(基盤)으로 하여 美醜好惡(미추호오)의 1차적 감정을 드러내거나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세계를 유추함으로서 궁극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이 세상에 드러내는 일을 수행한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일 즉 표현은 여러 가지 형태로 구사된다.
불교에서 識(식)이 眼耳鼻舌身意(안이비설신의)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고 보는 바와 같이 음악, 그림, 시나 소설, 무용 등의 형식으로 분화하게 된다.
그러므로 왜 시를 쓰는가? 하는 문제는 행위자의 하나의 취향 내지는 태도와 관련 지워 질 수 있다.
시를 쓰려고 하는 의지는 <언어와의 싸움>을 통해 자신과 세계를 규명하려는 작업을 또는 시가 갖추어야할 형식을 허락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래의 글은 조선일보에 게재된 소설가 김승옥의 『문학이란 이런 것』의 전문이다.
이번 3월부터 세종대학교에서 문학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는 신문기사가 나간 후 몇 군데 잡지와 방송에서 나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 질문들 속에 공통되는 것은 내가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이냐는 것이었다.
글쎄, 색다른 교수법이라면 몇 가지 내 나름대로 준비해 본 것이 없지는 않다. 예컨대, 판소리 興夫歌(흥부가)의 돈타령, 가난타령이나 春香歌(춘향가)의 사랑타령 등의 음반을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그 타령들처럼
1) 하나의 낱말로 연상되는 모든 것을 수집해 보게 한다든지,
2) 미술 대학생들이 소묘 숙제하듯이 가령 서울역 대합실에 가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마음에 느껴지는 모든 것을 글로써 묘사해 오라는 과제를 준다든지
3) 상상력의 기초훈련을 시켜보겠다는 계획 정도는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문학이론 문제로 들어가면 나는 은근히 걱정이 앞설 뿐 특이한 대책은 없다.
한 학기 한정된 시간 속에 일반론 이상으로 특이한 강의(講義)를 하는 것은 오히려 학생들을 불구자로 만들뿐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특이하거나 첨단적인 문학론은-그런 게 있다면 말이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각자 찾아보면 될 터이고 별로 길지 않은 대학시절에는 이 세상의 평균적인 대학생이라면 기본적으로 알아두어야 할 문학론들을 섭렵하는 것이 좋겠다 생각한다.
인터뷰의 질문 중에는 문학의 효용성에 관한 나의 견해를 묻는 것이 많았다.
문학의 쓸모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왜 사람들이 문학작품을 쓰고 읽어야 한다고 보는가?
문학 특히 시와 소설 같은 창작 문학이 인간생활에 무엇을 얼마나 실용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문학인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논의가 있어 왔다.
나로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매우 간단명료하게 정리해 놓고 문학창작에 임하고 있다. 문학의 효용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언어의 쓸모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 그 답이 자명해진다.
인간은 몸(肉體)과 마음(靈魂)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존재이다. 물질적인 몸이 화학물질인 음식물을 먹음으로써 그 성분에 영향을 받아 건강을 유지하고 성장하거나 해를 입고 쇠약해지듯이 마음은 언어에 의해서 영향 받으며 그 건강을 유지하고 성숙하거나 해를 입고 손상되어 심지어 자살에 이를 수도 있다.
멀쩡한 몸을 자기 손으로 파괴시켜 버리는 자살을 가능케 하는 것은 보면 인간의 마음 그리고 그 마음을 운영하는 언어의 에너지는 세심한 주의력을 가지고 관리해야 할 대상이다.
언어란 고독한 개체로서 이 세계에 존재하게 된 인간과 세계, 그리고 타인 사이에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들어 줌으로써 고독을 해소하고 연대감으로써 안정감을 가질 수 있게 해주는 최선의 기능이다. 문학이란 그러한 언어가 최상으로 세련된 형식인 것이다.
문학을 모르고 지극히 단순한 일상적인 언어 약간만 구사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문학을 읽고 쓰며 세계를 인식하는 사람에 비해서 그 행복감이 적을 수밖에 없다. 그 마음은 어둠 속을 홀로 떠다니며 늘 답답하고 외롭기 짝이 없는 것이다.
문학도들이여, 논리와 윤리를 잘 갖춘 많은 언어를 되도록 많이 네 영혼 속에 입력시켜라. 우주는 네가 알고 있는 언어의 크기만큼 네 앞에 열리며 자기 모습을 보여주고 네 행복감은 그 우주의 크기만큼 커지는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우주의 근원인 하느님을 볼 수 있을 만큼 네 언어가 精製(정제)된 것이게 하라. 최고의 행복감이 너의 것이 되리라
이 말은 앞에서 언급한 왜 시를 쓰는가에 대한 우회적 답변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인간과 자연 사이의 의미 있는 관계를 추구하는 작업이 글쓰기이며 시(詩)는 다른 장르에 비하여 압축(壓縮)과 비유(比喩)의 기법(技法)을 통해서 자연을 포함한 타자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일이다.
상상력은 모든 예술의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정신작용이다.
수집과 묘사는 상상력을 배양하기 위한 기초훈련이다
논리와 윤리를 갖춘 언어란 무엇인가?
문학에서의 논리란 언어의 정합성뿐만 아니라 명징한 상상력의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윤리를 갖춘 언어는 언어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속성(屬性)이라기보다는 글쓰는 사람의 삶에 대한 진정성을 표현해내는 적절한 힘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리라고 본다.
7. 시인의 정신
시인 김수영이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은 한 마디로 자신의 마음 속 단단한 껍질을 깨고 나오자는 이야기다. 그 울타리를 스스로 파괴하면서 진정으로 시를 바라보고 되고 시를 쓸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시를 쓰는 행위는 정신구조상의 최상부에서 나온다고 한다. 그 아래에 있는 여러 행위들, 혹은 생각들은 모두 시를 쓰는 행위가 방해가 될 뿐이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시를 논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시를 쓰는 행위는 형식의 예술이며 시를 논하는 행위는 내용으로써 형식을 논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시가 무엇인지도 알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 시를 못 쓴다는 것이다.
시를 쓰려면 현재까지 알고 있는 시에 대한 모든 생각을 버리라고 한다. 그리고 온 몸으로 밀고 나갈 때 시인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진정으로 시(詩)를 쓰기 위해서는 시에 대한 모든 선입관(先入觀)을 버리고 시 자체로서 시를 시작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또 시인은 모든 것에도 속해있지 말고 자유로워야 하며 오직 시 하나만을 생각하고 정신 영역의 가장 안쪽에서 시어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늘날의 시인들을 돌아보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울타리에 갇혀 있는가. 종교라는 것, 국가라는 것, 문화, 혹은 여러 가지의 집단과 문화에 속해 각자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시인 자체로서만 존재한다. 그때라야 비로소 시를 쓸 수 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그간의 단단한 인습과 관습, 사회적 울타리를 과감히 제거하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갖가지 껍질을 깨고 갓 세상에 나온 병아리처럼 때묻지 않은 상태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가장 순수한 마음에서만 시에 나올 수 있음을, 또 그러한 마음으로 시를 쓸 때 진정 시인이 될 수 있다.
시를 쓰는 행위란, 마음과 몸, 온 몸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밀고 나가야 하는 것이다.
나는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시란, 참 알면 알수록, 쓰면 쓸수록 어렵기만 하다.
▣ 詩와 詩人
세계를 발견하고
발가벗은 그대로의 세상을
바라보고 싶은
신성한
소망의 표현,
그것은 삶을 노래하는
詩의 정신입니다.
詩人이란 그저 詩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가슴속이 생명의 기운으로
충만한 이들입니다 - 칼릴 지브란
"억압하는 모든 것에 저항하라"
"분노하지 않는 민족은 야수 같은 적에게 승리할 수 없다."
"모든 진실된 인간은 다른 사람의 뺨이 자신의 뺨에 닿는 것을 느껴야 한다."
- Che 게바라
▣ 시(詩)를 쓰는 마음
다음은 어느 시인의 말을 인용한 글이다.
나는 시를 쓸 줄 모른다. 나는 시인이 되려고 하였던 것은 아니다.
지천명(知天命)을 앞두고 지금까지 세상을 살면서 내가 보고 배우고 느낀 것을 내 자신이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을 아끼고 독에 소금 절이듯이 담아온 것을, 이제 퍼내어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다면 나누어주고 뿌려주고 싶은 마음뿐이다.
한 때는 연애편지를 쓰는 것처럼, 소리 없이 탐스럽게 내리는 눈을 보고 비 오는 날 창가에서 싸하게 내리는 빗줄기를 보며 턱을 괴고 아름다운 시상이 떠올랐던 적도 있었다.
시를 쓴다는 것은 결국 내 안의 나를 정리하고 나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현재를 과거에 투영시켜 지금의 삶을 풀어 가는 작업이라고 생각된다.
자신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끊임없는 번뇌와 고민을 역사의식으로 바라보아 나만의 시를 만들어 보고 싶은 것이다. 詩人이란 그저 詩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가슴속이 생명의 기운으로 충만한 이들이다
발가벗은 그대로의 세상을, 세계를 발견하고, 동시대인과의 공동체 의식을 밑바탕으로 한 진실하고 치열한 삶을 위한 참여와 신뢰와 사랑, 삶을 노래하는 詩의 정신이다. 詩로서 혁명을 할 수도 없고, 총 칼이 될 수도 없지만, 나는 나의 길을 갈 것이다. 이제 눈빛이 깊은 사람이라는 곡간(穀間)을 하나 마련하였다.
농부가 봄에 씨앗을 뿌리고 여름내 땀흘려 농사를 짓고 가을에 추수를 하면 곡간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눈빛이 깊은 사람은 세상의 인기나 독자의 수를 중요 시 하지 않고 단 한 명의 영혼에 양식이 되더라도 존재의 이유가 있다.
민들레꽃 하나가 수많은 홀씨를 날려보내듯이 시인이여, 그대는 이 시대의 진정한 삶이며, 세월의 시련을 끝내 극복해 왔노라.
시인이여, 언젠가 그대는 우리네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게 되리라.
그대의 가시관을 자세히 보라, 시인이여. 그 속에 감추어진 월계수 화환이 지금 막 움트고 있음을 보리라.
▣ 시의 발상과 전개방식에 대한 인식
"언제 이렇게 많은 시를 썼어요? 시간도 없을 텐데......"
시인들 가운데에는 전업(專業) 작가도 있지만 대개는 시를 써서 밥을 먹을 수는 없기 때문에 생업을 가지고 시를 쓰지만 그래도 당신의 직업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시인입니다" 라고 대답한다.
이들은 한가롭게 앉아서 '무엇을 쓸까?' 생각할 여유가 없다. 그렇다면 언제 시를 생각하고 쓰게 될까? ‘눈떠서 잠들기 직전까지’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시를 쓰는 일은 고도의 정신집중을 요하는 일이기 때문에 모든 정신력을 잠시도 쉬지 않고 시 쓰는 일에 쏟아낼 수는 없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일상과 사물 앞에 나의 모든 감각을 개방시켜 놓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시를 쓰고자 하는 초심자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누구나 처음에는 시를 쓸 수 있는 여건 -분위기- 이 조성되어야만 시 쓰기가 수월할 것이다. 그러다가 일년, 이년 점차적으로 연륜이 더해지다 보면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대상들이 모두 시(詩)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여기에 기본적으로 주어져야 하는 것이 시인이 가지고 있는 인생관(人生觀), 세계관(世界觀), 실험정신(實驗精神)이다.
많은 사람들이 시적 분위기에 매료되거나 자신이 억누르지 못하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바탕으로 시를 쓰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되는데 나중에 써놓고 보면 다른 사람들이 쓴 것과 비슷비슷한 그런 글들이 되고 마는 경험을 되풀이하게 된다.
이 쓰디쓴 경험을 회피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성시인의 시들을 많이 읽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선택한 시를 요모조모 분석해 보는 일이다.
내 취향에 맞지 않는다! 어렵다! 이런 난관을 헤치고 그 시인이 쓰고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해독하는 일을 쉬지 않아야 한다. 그런 해독을 통해서 발상으로부터 시작해서 한 편의 시로서 완결되기까지의 경로를 나름대로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임보 시인은 좋은 시의 조건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시(詩)란 하나의 발언(發言) 곧 남에게 들려주는 짧은 말이다. 언어의 범주(範疇)를 벗어나서는 곤란하다. 1) '남에게 들려주는', 2) '짧은 말'이 시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남에게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나의 이야기를 하던 제 3 자의 이야기를 하던 아니면 너에게 이야기를 하던 그 이야기는 함축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함축성이라는 것은 중언부언(重言復言)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폭이 넓은 상징성이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8. 시인이 지향하는 세계
시인은 결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시인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 관찰하는 것이 시인이 지향하는 첫 번 째 세계이다.
<예문 1>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눈 내리는 밤의 아름다움을 말할 수 없고 비 오는 날의 서정을 말할 수 없게된 시대에 눈과 나무, 비와 숲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작품들을 쓰고 읽고 가르친다는 것은 적절한 것인가?
아니, 그것은 도대체 가능한 일이기나 한가? 산성비와 산성 눈이 내리는 시대의 독자가 그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예전처럼 행복하게, 딸국질 한 번 하지 않고 이를테면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눈 오는 밤 숲에 머물어』를 읽으며 즐거워할 수 있을까? 프로스트의 시는 아름답다. 시의 화자는 동짓달 그믐밤 말을 몰아 눈 내리는 숲을 지나다가 문득 발을 멈춘다.눈발 속의 숲이 너무 아름다워 그냥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삶의 가장 신성한 순간처럼 <숲은 깊고 어둡고 아름답다> 그러나 화자는 그 아름다움에 매혹되면서도 세상과의 약속을 상기하고 <잠들기 전 갈 길이 멀다, 잠들기 전 갈 길이 멀다>며 다시 말머리를 돌린다. 화자는 그렇게 떠나지만 그가 떠남으로써 남기는 미련의 공간, 그 눈 내리는 숲은 독자를 유혹하여 그곳으로 달려가게 한다.
그러나 프로스트의 이 평이하고도 아름다운 시는 오늘날 서정적 텍스트로서의 적절성을 거의 <완전히>상실하고 있다 지금의 독자는 눈 내리는 숲으로 달려가지 않는다. 산성눈 내리는 지금 이 세계의 숲이 아름다울 것이며 누가 그 숲에 취해 발길을 멈추는가?
시인 자신이 눈을 피하기 위해 여름 해수욕장의 파라솔만큼이나 큰 우산을 쓰고 외출해야 하는 시대에 어느 독자가 맨머리로 눈 내리는 숲을 향해 달려갈 것인가. 달려가기 위해서는 그에게 하나의 특별한 조건, <제 정신 아님>이라는 조건이 필요하다. 이 조건을 감수하지 못하는 독자에게는 눈 오는 숲은 매혹의 장소가 아니라 그가 될 수 있도록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고 도망쳐야할 대상이다. 눈 내리는 숲은 독자를 <배제>한다.
독자의 현실정서와 시인의 문학적 정서 사이에 발생한 이 곤혹스런 괴리야말로 오늘날 문학이 대면하게 된 심각한 문제의 하나이다. 시인이 노래하는 눈의 서정은 독자가 현실세계에서 눈에 대해 지니고 있는 현실적 정서(두려움)와는 먼 거리에 있다. 두 정서는 일치하지 않고 양자 사이에는 의지하란한 공감의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시인들은 자연대상들에 대한 개인적 정서를 시의 텍스트로 조직해 냄에 있어 이 같은 근본적 괴리를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들의 개인적 정서와 독자 일반의 정서 사이에는 양자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 의지할만한 공통의 정서구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공통의 정서구조는 시인과 독자가 모두 자연으로부터 항구한 미적 정서의 공급을 보장받고, 양자 모두 자연과의 관계에서 안정된 감성체계를 확보할 수 있어다는 사실 대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이런 공통의 정서구조는 오늘날 가능하지 않다. 그 구조의 모태는 자연 자체가 지금 불구의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실정서와 문학적 감성 간의 이 괴리는 시인과 독자 사이의 정서적 간극일 뿐만 아니라 시인 자신의 정서세계에 발생한 감성분열과 상상력의 파탄을 의미한다. 누가 오늘날 프로스트처럼 눈 오는 밤 숲의 유혹을 노래할 수 있는가? 모더니스트 시대까지도 작가 시인들은 버지니아 울프처럼 <별의 언어를 옮겨쓰는 세계의 은자>에게서 자신들을 발견하고, 나무를 닻 삼아 항해하는 한 척의 배라는 서정으로 이 행성을 그려볼 수 있었다. 나무들은 아름답고 나무가 있는 세계의 강물은 푸르러 그 강에 들어갔다 나오는 백조의 날개가 푸른 잉크빛으로 물들지 모른다는 행복한 사정을 그들은 펼칠 수 있었다. 모더니스트의 시대가지 갈 것 없이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우리 시인들은 <풀잎 하나가 우주를 들어올린다>(정현종)는 빛나는 상상력을 풀잎의 감성에 실어 세상으로 띄어보내지 않았던가.
그러나 나무들이 질식하고 숲이 죽어 가는 지금 이 시대의 시인에게 그런 상상력은 가능하지 않다. 우주를 들어올리기는커녕 제 무게 하나도 추스르지 못하는 병든 풀잎을 시인은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 풀잎 자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 시인은 풀밭으로 가지 못한다. 농약 끈적한 꽃밭에 앉아 풀잎의 숨소리를 들어야 하는 왜곡과 변태를, 그 비참을, 그가 무슨 수로 견딜 수 있으랴. 풀밭은 시인을 배제한다. 비의 서정을 풀기 전에 지금의 시인은 비오는 날 비 때문에 죽어 가는 숲을 생각하여야 한다. 비는 시인을 배제한다.
푸른 강 대신에 그에게는 <똥물>이 있고 <똥통>이 된 지구가 있다. 그 똥물을 보며 똥통 속에서 그가 푸른 강을 말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하나의 특별한 능력 - 그가 강으로부터 배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과 함께 사는 듯이 생각하는 환각의 능력이 필요하고 감성분열의 능력이 필요하다.
위의 인용문은 오늘날 시인 -넓게는 예술행위를 지향하는 모든 사람들- 들이 처한 문학적 정서의 파괴를 지적하고 있다. 시인이 지향하는 세계가 자신을 들여다보기라고 했지만 그 자신이란 결국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 -자연- 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에 가면 갈수록 시인의 입지는 좁아들 수밖에 없는 현실에 처해 있는 것이다.
거시적인 안목으로 인류애와 평화 같은 주제를 넘나드는 시인들도 있고 남북통일, 노동문제, 남녀불평등 등의 사회문제에 관심을 돌리는 시인들도 있다.
그러나 일정부분 계몽적 입지를 확보하였던 그 영역에서마저도 시인들은 쫓겨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사회와 대중은 계몽의 차원을 넘어서서 넘쳐 나오는 정보의 그물에서 허덕거리는 상태에서 지사(志士)적 풍모와 예언자적 시인의 발언은 빛을 얻기가 힘든 것이 오늘날의 상황이다.
위의 글은 문학적 정서의 토양이 자연이며 자연의 파괴로 인한 정서의 고갈, 나아가서 인간성의 상실이라는 위기에 직면해 있는 오늘날의 시인들이 해야할 것이 무엇인가를 검토하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성찰을 요구하는 문제이다.
자, 당신은 무엇을 쓸 것인가? 자연으로부터 배제된 상태에서 환각에 빠져 시든 풀잎과 흐려져 버린 별을 노래할 것인가? 누구를 위하여 노래 부를 것인가?
<예문 2> 『누가 시화호를 죽였는가』 최 승 호
- 시화호의 아름다운 처녀시절을 떠올리며 술 한 잔 마시고 베란다 밖을 내다본다. 황량한 밤이다. 누군가 죽은 큰 딸 곁에서 울고 있다. 시화호에선 시체냄새가 난다. 몇 년을 더 썩어야 악취가 사라질지 이 거대한 시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아무도 모른다.
달마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가다 어느 바닷가를 지날 때였다. 마을 사람들이 짐을 꾸려 마을을 떠나고 있었다. 달마가 물었다. <왜들 떠나시오?> 마을 사람들이 대답했다. <악취 때문에 떠납니다> 달마가 보니 바닷 속에서 대충이라는 큰 이무기가 썩고 있었다. 달마는 해안에 육신을 벗어놓고 바다로 들어간다. 하지만 돌아왔을 때 자신의 몸, 해안에 벗어놓았던 몸이 사라진 걸 알고는 당황한다. 달마는 결국 자신의 육신을 찾지 못한다. 대신 누군가가 바닷가에 벗어놓은 얼굴 흉측한 육체, 그걸 뒤집어쓰고 중국으로 건너간다.
시화호에선 악취가 난다. 관료들에게서도 악취가 난다. 구역질, 두통, 발열, 숨막힘. 마을 사람들은 떠났다. 개펄은 거대한 조개 무덤으로 변해 버렸다. 쩍 벌어진 조개껍질 위로 허옇게 소금바람이 분다. 갯지렁이들도 떠났다. 도요새들은 항로를 바꾸었다.
무력감에서도 악취는 난다. 산 송장들, 시화호 바닥에 누워 공장 폐수와 부패한 관료들의 숙변을 먹는 산 송장들, 이것은 그로테스크한 나라의 풍경인가, 시화호라는 거대한 변기를 만드느라 엄청난 돈을 배설했다.
달마는 시화호에 오지 않는다. 시화호에 달이 뜬다. 누가 시화호를 죽였는가? 누가 죽은 시화호를 딸처럼 부둥켜안고 먼 바다로 걸어나가며 울겠는가.
나는 무력한 사람이다. 절망의 벙어리, 그래도 세금은 낸다. 세금으로 시화호를 죽였다.
살인 청부자? 내가 시화호의 살인 청부자였다. 나를 처형해다오. 달뜨는 시화호에 십자가를 세우고 거기 나를 못 박아다오. 아니면 눈 푸른 달마를 십자가에 못박아 피흘리게 하든지
음풍농월의 시대는 갔지만 음풍농월의 유전인자는 아직 우리들의 피 속에 흐르고 있다. 이제 확연하게 나의 문제로 빚어지는 시적 정서가 얼마만큼 나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과 유기적으로 얽혀있는 것인가를 깨달아야 할 때이다. 누구나 이 시대가 살기 어려운 시기라는 것을 압니다만 그 살기 어려움의 문제를 자기화 하려고 하지는 않다.
시인은 바로 이 점을 저항하여야 한다. 시를 쓰고 그 시속에 자신의 피와 땀을 부벼 넣을 줄 알아야 한다.
예문의 최승호 시인의 시는 썩어 가는 시화호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이 우리 모두라는 사실을 고발하고 있다. 단순히 고발 차원에서 쓰여진 글이라면 르포 이상의 자격을 얻기란 힘들 것이다. 시인은 고발의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화호를 죽인 범인이 바로 자신임을 고발하고 자성한다. 바로 그 순간 이 시는 예상하지 못한 폭발력으로 삶의 진정성이 무엇인가를 진저리치게 만드는 것이다.
시인은 작품 속에 자신의 삶의 기록과 몸부림과 고통을 버무려야 한다.
숲이 사라져 버린 그 땅에 다시 길을 내겠다고 결심을 해야 한다.
그것은 시인 각자의 몫이다.
9. 시는 오직 인간만이 쓰고 있다.
인간 이외의 다른 존재는 일찍이 시를 써본 일이 없다.
바꾸어 말하면 모든 인간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시를 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그리고 그 때문에 다른 존재와 구별되는 특이한 존재인 것이다.
실제로 인간은 상한을 알 수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오늘 현재에 이르기까지 무수하게 많은 시를 지어내고 있다.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하여 시 같은 것은 이제 발 붙일 곳이 없게 되었다는 한탄이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현대에 있어서도 시의 생산량은 줄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시의 줄기차고도 유구한 역사는 그 자체가 이미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새로 시를 쓰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나타난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오늘날의 우리 사회 역시 그 예외가 될 리는 없어 추정하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많은 시의 지망자들이 도처에서 남몰래 열심히 시의 트레이닝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들의 가슴속엔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 수 있을까]하는 안타까운 소망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 은 시의 본질이나 원리보다도 막상 시를 쓰려고 할 때 당장 표현 방법상의 이런저런 어려움에 기인하는 안타까움이다.
시 창작의 방법론이라 했지만 실상 시에는 그렇게만 하면 틀림없이 시를 잘 쓴다는 모범 답안이 없다는 말부터 먼저 해두어야 하겠다.
조지훈 시인에게 “선생님,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 수 있을까요?” 하고 묻자 그는 일언지하에, “그건 어떻게 하면 밥을 잘 먹습니까? 라는 질문과 같은 말이오"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그는 나의 무안함을 덜어주려는 듯 자기도 그 말을 정지용에게서 들었다고 했다. 그것이 바로 시에는 모범 답안적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작가 싱클레어 루이스는 어떤 대학에서 창작론의 강좌를 맡았을 때 그 첫 시간에, [학생 여러분이 정말 글을 쓰고 싶다면 지금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뭐든지 쓰기 시작하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표현은 다르지만 뜻은 완전히 조치훈과 일치하는 발언이다. 이처럼 모범답안이 없다는 것은 시와 문학이 그만큼 어려운 작업이라는 뜻으로 통한다.
그러나 시에 뜻을 둔 사람들은 이 말에 주눅을 들 필요가 조금도 없다.
인생만사 누워서 떡 먹듯 쉽게 되는 일이 어디 있는가. 설령 있다 해 도 그것은 가치 없는, 따라서 일부러 마음먹고 할 일이 못되는 것이다.
마음먹고 해볼 만한 가치 있는 일은 그 종류 여하를 막론하고 어렵기 마련인데 시와 문학이 그 중의 하나임은 구태여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세상에는 처음부터 대 작가 대 시인으로 태어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문학의 수많은 기라성들은 모두가 처음부터 대작가 대시인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노력을 통해 자기 자신을 그렇게 만들어간 사람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음먹고 한번 시에 도전해 볼 만한 일이 아닌가..
시의 지망자들이 걱정해야 할 것은 재능의 유무가 아니다. 문제는 재능이 아니라 자기 속에 이미 잠재해 있는 재능을 자 기가 얼마만큼 열심히 키워갈 수 있느냐? 하는 그 노력의 의지인 것이다. “천재는 1%의 재능과 99%의 노력의 소산이다”라고 한 발명왕 에디슨 말처럼 시에 관한 1%의 재능은 그것을 쓰는 능력이 그 존재의 한 특질로 되어 있는 인간의 기본 자질이라 할 수 있다. 시를 좋아해서 자기도 직접 시를 써보겠다고 나선 사람들에게는 그 1%의 기본자질 외에 더 많은 재능이 부여되어 있다. 그 많은 재능을 살리면 된다. 노력하면 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노력하는 사람은 남이 들려주는, 모범답안이 있을 수 없는 창작 방법론도 모범답안 이상으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노력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서 시를 잘 쓰게 된다면 그것도 역시 공짜인 것이다. 자, 우리함께, 없는 공짜는 바라지말고 떳떳하게 값을 치르면서 시를 써보기로 하자.
(1) 시, 그것은 곧 감정의 표현이다.
서양 사람들은 옛날부터 시에는 서정시, 서사시, 극시 3가지 종류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따 라 그 중에서 서사시와 극시는 이름까지도 시가 아니고 소설과 희곡이 라고 바뀔 만큼 큰 변화를 겪었다.
그에 비하면 서정시는 상대적으로 변화가 덜해서 오늘날은 그것이 시라는 이름을 독점하는 형국이 되어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시는 서정시의 준말인 셈이다.
서정시의 그 <서정(抒情)>은 문자 그대로 감정의 표현을 뜻한다.
그러니까 시는 그 이름부터가 감정표현을 주로 하는 문학양식이란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이것은 우리가 직접 시를 읽어보고서도 얼마든지 확 인할 수 있는 특성이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 민요 시(詩) <아리랑>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그것은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이 실제로 그렇게 발병이 났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알려주는 문장이 아니라, 떠나는 님에 대한 야속함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문장인 것이다.
그 야속함 속에는 님에 대한 사랑과 이별의 슬픔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이와 같이 야속함, 사랑, 슬픔 등으로 구체화된 감정을 정서라고 한다. 그래서 감정(感情)과 정서(情緖)라는 말은 까다롭게 구분하지 않고 동의어로 쓰이는 게 통례로 되어 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이 시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T. S. 엘리어트의 장시 <황무지> 의 서두 부분이다.
엘리어트는 주지주의(主知主義)라 해서 지성(知性)을 존중하고 감정(感情)은 되도록 억제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던 시인이다.
그러한 엘리어트의 이 시도 그러나 그 첫 줄부터 뚜렷하게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4월 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말은 4월에 대한 객관적 진술이 아니라 시(詩) 안에서 말하는 화자의 주관적 감정반응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흔히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다.
감정은 인간의 의식의 한 양상이다. 인간의 의식 속에는 사물에 대해 감정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 즉 감정이 있다.
이 감정과 함께 사물을 논리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이성을 아울러 갖추고 있는 것이 인간의 의식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감성을 통해 느끼고 이성을 통해 생각한다 고 말할 수 있다. 그 느낌이나 생각의 결과로써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이 대상에 대한 어떤 종류의 이해이다. 그러나 그 이해의 방법과 내용은 감성과 이성이 서로 큰 차이를 보인다.
먼저 이성의 경우를 보면 그것이 우리를 이끌어 가는 곳은 대상에 대한 분석적 객관적 이해의 세계이다. 객관적인 만큼 그것은 또 다른 사람들도 전적으로 그에 동의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갖게 된다. 예를 들면 그것은 물이라는 대상을 [두 개의 수소와 하나의 산소가 화합하여 이루어진 물질]이라고 이해하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현대의 눈부신 과학문명이 사물을 그와 같이 이해하는 이 성의 소산임은 새삼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그러한 이성적 이해는 더불어 사는 존재인 인간의 원만한 공동생활을 가능케 하는 필수 절대 의 조건이 된다. 왜냐하면 어떤 사물을 두고 갑(甲)은 그것을 꽃이라 하고 을(乙)은 그것을 돌이라 하듯 주관적 이해가 서로 엇갈린다면 인간의 공동 생활은 유지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성(理性)은 인간이 가진 가장 귀중한 능력이란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이성(理性)만이 옳고 감성(感性)과 감정(感情)은 최대한 억눌러야 할 부정적 요소라는 인식도 은연중에 용인되고 있는 실정이다.
(2) 시는 마음의 거울에 비친 세계를 그리는 것
그러나 이성의 가치를 아무리 높이 평가한다 해도 이성만으로는 인간의 삶이 온전하게 영위되지 못한다. 그것은 이성과 함께 감성을 타고난 인간의 숙명이다.
게다가 인간은 더불어 사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각자 가 다른 사람과는 구별되는 특수한 개별성을 가진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사물에 대한 감성적 이해, 즉 느낌은 그러한 개별성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것은 이성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주관적 직관적 이해인 것이다. 동일한 대상을 놓고도 그에 대한 느낌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사실이 그러한 감성적 이해의 실상을 말해준다. 이러한 감성과 또 그것이 빚어내는 감정을 배척하고 만사를 이성적으로만 생각하고 처리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 것인가.
그때의 인생은 마치 기계가 돌아가듯 정확할지는 몰라도 차갑고 삭막하기 이를 데 없는 움직임의 연속이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 당연한 귀결로서 그 때는 또 사랑이나 동정심 같은 귀중한 덕목도 헌신짝처럼 저버림을 당할밖에 없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이기를 그치고 정교한 로봇이 되어 살아가는 세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모골(毛骨)이 송연한 일 아닌가.
여기서 우리는 감성과 감정이 이성 못지 않게 귀중하다는 사실, 그리고 특히 감정이 인간을 인간으로 있게 하는 핵심적 요소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도 감정표출이 자유로운 사람을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는 인간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이성만을 내세우는 사람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차가운 인간이라는 경원(敬遠)을 당한다.
인간은 그 마음을 통해 느끼기도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 느낌, 그 생각이 하나로 어울려 있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다.
이성만 가지고는 결코 마음의 이 통합성을 이루어내지 못한다. 감성은 그와는 달리 처음부터 그 속에 이성을 포괄하는 종합적 능력이기 때문에 그 자 체가 이미 마음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가 감정(感情)을 표현한다는 말은 곧 우리의 마음에 비친 세계를 표현한다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다.
(3) 시는 가치 있는 감정을 표현해야
논어에 보면 ‘시를 배우지 않으면 그 사람은 마치 담 벽을 보고 마주 선 것과 같다’는 구절이 나온다. 담 벽을 보고 마주 선다는 것은 융통성 없는 답답한 삶이 됨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물론 감정이 메마르고 따라서 그 마음이 또한 볼품없이 막혀있는 사람이 아닐 수 없다.
돈만 아는 사람, 권세만 추구하는 사람, 자기 일신의 동물적 욕망에만 사로잡혀 우주와 인생의 그 도처에 편만(遍滿)해 있는 무수한 다른 가치에 대해서 소경이 되어 있는 사람은 손쉽게 들 수 있는 그런 예가 될 것이다. 시와 감정, 그리고 시와 마음의 상관관계를 공자는 우리에게 다시금 일깨워 주고 있다. 그러나 시가 감정을 표현한다는 말은 오직 감정 그 것만을 표현한다는 뜻이 아니다.
감정도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 저속(低俗)하거나 무가치한 감정은 배제하고 의미(意味) 있는 감정, 가치 있는 감정을 표현해야 할 것이다. 그러자면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차원 높은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철학적 명상과 지적사고(知的思考)를 쌓지 않으면 안 된다.
뿐만 아니라 표현의 효과를 드높이기 위한 기술적 고려는 오히려 우리에게 감정의 억제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우리는 또 시대의 발달이 인간에게 더 많은 지적 활동을 촉구하고 있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지적 사고가 일찍이 유례를 볼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현대인의 정신상황이다.
시라는 이름의 마음의 거울이 이러한 우리 시대의 현실적인 인간의 삶을 도외시한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우주와 인생 그 모두를 마음의 눈, 즉 가장 인간적인 눈으로 비쳐내는 것이 시인(詩人)인 것이다. 그때의 그 마음속에는 물론 시대가 요구하는 현저하게 증대된 지적 사고도 용해되어 있다. 시는 감정표현을 내용의 기본특성으로 하되, 사물과 세계에 대한 지적 분석과 비판정신도 아울러 수용하는 문학 양식인 것이다..
10. 시인(詩人)의 네 유형
세상 사람들을 문제아(問題兒), 유명인(有名人), 현인(賢人) 그리고 보통인 이렇게 네 부류로 나눌 수 있는 것처럼 시인들의 경우도 문제시인, 유명 시인, 훌륭한 시인, 보통 시인 등으로 구분하여 따져볼 수 있으리라.
첫째, 문제시인
문제를 일으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장본인들이다. 이도 행동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와 작품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로 구분할 수 있다.
만일 어떤 시인이 백주에 종로 네거리에서 스트리킹을 했다면 이는 전자에 해당된다. 대개의 문제 시인들은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자들이다.
물론 김관식이나 천상병 같은 낭만적인 문제 시인들도 없지는 않다. 반면 작품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는 이상(李箱)이라든지 김수영 그리고 실험적인 작품을 쓴 80년대의 몇 시인들에게서 그 전형을 찾아볼 수 있다.
둘째, 유명시인
이는 세상에 많이 알려진 시인이다. 문제를 일으켜 유명해지기도 하고 처세를 잘 해서 유명해지기도 한다. 잡지사나 출판사를 열심히 찾아다니며 작품도 많이 발표하고 상도 많이 탄다. 신문에 글도 자주 쓰고 방송에 얼굴도 많이 내민다. 출판사와 궁합이 잘 맞으면 베스트셀러 대열에 끼어 광고판에 얼굴을 대문짝만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평론가들을 동원하여 의도적으로 자신의 작품을 언급하게도 만들고, 교과서에 작품을 실어 학생들에게 낯을 익히는 데 진력한다. 무슨 단체의 위원으로 성명서도 자주 내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감옥에 들어가는 것조차도 불사한다.
때를 잘 만나면 국가기관의 장으로 발탁되기도 하고 비례대표로 국회위원이 되어 거들먹거리며 지낼 수도 있다.
물론 훌륭한 시인이기 때문에 자연히 유명해지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그런 시인들은 다음의 셋째 항목의 범주에 넣기로 한다.
셋째, 훌륭한 시인
'훌륭한 시인'이란 작품은 말할 것도 없고 인품 또한 훌륭히 갖춘 시인을 뜻한다. 훌륭한 시인 가운데는 세상에 이미 알려져 유명한 경우도 있고 아직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시인 본인이 생존해 있는 당대는 대체로 전자보다는 후자의 경우가 많다. 그도 그럴 것이 훌륭한 시인일수록 매명(買名)에 연연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분들은 사람과 작품이 공히 맑고 아름답다. 뜻은 높고 거동은 늘 겸허해서 난초와 같은 그윽한 향기를 품고 있다. 군자적 풍모를 지닌 선비들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 보통시인
넷째는 첫째나 둘째의 경우가 아닌 무명 시인들이다. 그런데 이 부류는 다시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하나는 욕심은 있지만 능력이 미치지 못해 무명으로 주저앉는 경우요, 다른 하나는 능력은 있지만 욕심을 줄여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경우다.
후자는 장차 훌륭한 시인으로 인정을 받아 유명해질 수도 있는 가능성을 지닌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장차 훌륭한 시인'이 아니라 '훌륭한 시인'인데 세상이 그를 알아보지 못해 초야에 묻혀 지내는 경우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이리라. 이들이야말로 공자의 저 '人不知而不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아도 개의치 않음)'의 경지에 이른 군자들이라고 이를 만하다. 그러니 보통의 무명 시인들을 놓고 흙 속의 돌멩이 보듯 깔 볼 일이 아니다. 그 가운데는 세상 사람들을 온통 청맹과니로 만든 무서운 '보석'이 담겨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문제 시인이나 유명 시인이 아니라 훌륭한 시인이다. 그들은 괴로운 이들에겐 위로를 주고, 어려운 이들에겐 꿈을 심어 준다. 교만한 이들에겐 겸손을 가르치고, 간악한 이들에겐 사랑을 일깨우기도 한다. 그들이야말로 세상을 보다 아름답게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문제시인'이나 '유명시인'은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교란시키는 쪽에 가까운 무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남에 앞서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자들이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체면도 염치도 모르는 불량배들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문제시인'이나 '유명 시인'을 마치 '훌륭한 시인'인 것처럼 잘못 받아들이고 있다.
안목이 없는 매스컴들이 이들의 농간에 넘어가 연일 이들의 이름만 떠들어대고 있으니 그도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요사이 세상을 지배하는 큰 힘을 지닌 것은 언론 매체들이다. 이들은 어떤 정치 단체나 법전보다도 막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하루아침에 거대한 재벌을 무너뜨릴 수도 있고, 한 무명인을 대 스타로 세상에 드러낼 수도 있다. 그러니 이들의 힘을 잘 이용만 하면 '무명 시인'도 일조에 '유명 시인'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시인이란 어떤 사람들인가? 아니 어떤 시인이 바람직한 시인인가?
나는 시인이란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승화된 정신 세계의 소유자들이라고 생각한다.
세속적인 욕망을 벗어난, 적어도 떨쳐버리고자 하는 의지를 지닌 자들이어야 한다. 진(眞)․선(善)․미(美)를 추구하고 염결(廉潔)과 지조(志操)를 소중히 여긴다. 그런 기상을 우리의 전통적인 시인들은 지니고 있었다. 그들이 곧 '조선정신'의 뼈대가 된 선비들이다. 그래서 나는 바람직한 시인 정신을 선비 정신에서 찾고자 한다.
오늘과 같은 혼탁한 시대에 시인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세상이 그러하니 시인 역시 부화뇌동해서 아무런 잡설이나 지껄여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이러한 세상일수록 시인은 매서운 시정신을 지녀야 하리라.
세상에 아직 크게 드러나지 않는 '보통의 시인'들이여, 그대들은 흙 속에 묻혀 있는 잡석일 수도 혹은 보석일 수도 있다. 자신이 어느 편에 속하는가의 판정은 독자의 몫이 아니라 그대들 스스로가 결정할 일이다.
나의 시정신은 무엇인가? 내가 만들어낸 한 구절의 시가 이 세상을 보다 아름답고 맑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 그대들 스스로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11. 우리는 모두 삼류시인이다.
詩的인 표현을 하겠다는 뚜렷한 생각이 없어도, 우리는 무의식중 시에 못지않는 훌륭한 표현을 할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오늘 아침에는 안개가 많이 끼었다'라고 할 것을 '오늘 아침에는 안개가 자욱하다'라고 되도록이면 상세히 모양까지 그려 보이고, '오늘 아침에는 안개에 발이 빠질 것 같다'고 보다 감각적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소식이 없다는 말을 '소식이 깜깜하다'라고 하고, 귀먹은 사람을 '귀가 절벽이다'라고 한다. 염치가 좋은 사람을 '낯가죽이 두껍다'라고 하고, 지나치게 영리하여 어리숙한 면이 없는 사람을 '빠꼼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표현은 너무 많고 다양해서 일일이 들어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사람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별명으로 부른다든지, 선거철 구호를 만들어 유권자에게 호소하는 일, 특별 강조 기간이나 각종 홍보 행사에 인상적인 표어로 대중들의 감정에 어필하려고 하는 일들도 시적인 표현을 하려는 태도인 것이다.
긴 말을 짧게 줄이어 표어나 구호를 만드는 일이나, 말의 고저와 강약에 쏟는 우리들의 애착은 리듬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적 습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시골 저녁 무렵이면 밖에 나가 노는 아이들을 불러들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들린다.
'철수야아 __! 밥 먹어라아아____'
이 말에는 단순히 날이 저물었으니 그만 놀고 밥을 먹으라는 의미 이상의 느낌이 있다.
주어와 서술어로만 이루어진 이 짧은 말에는 쉼과 계속이 있고 음절마다 쏟아내는 각기 다른 소리의 양이 있으며, 거기 담겨 있는 정돈된 감정이 있다. 다시 말해서 음악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상가에서 들리는 곡(哭)소리는 물론이고 시장에서 외치는 상인들의 웨침소리, 노동을 하면서 발성되는 힘겨운 감탄사에서도 우리는 시적인 가락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일련의 현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무의식에 자리잡고 있는 시적 본능의 자연스러운 발현인 것이다. 인간에게는 원초적인 본능과도 같이 시에의 친화력이 있으며 이 친화력이 우리생활의 도처에 시적 점화구(點火口)를 마련하게 한다.
시적인 표현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과, 지고지선(至高至善)한 생활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끊임없이 미완성의 것을 완성하려 하고 추악한 것을 미려한 것으로 수정하려 하며 지상의 것을 천상의 것으로 끌어올리려고 노력하는 인간의 노력, 이것이 곧 시를 갈망하는 마음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三流詩人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은 우리가 겨우 엉터리 삼류시인밖에 될 수 없다는 자조(自嘲)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시인이라는 것, 비록 삼류시인이긴 하지만 이미 시인이 되어 있다는 기반 위에서 출발하자는 격려의 말이다. 즉 우리는 삼류시인의 위치에서 능히 일류시인으로 상승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희망적이고 긍적적인 말이다. 그리고 이는 인간이 보유하고 있는 근원적인 시의 잠재력을 인정하는 말이다.
시창작법을 공부하기 이전에 우리가 먼저 확실히 해야 할 것은 시와 우리 사이가 멀지 않다는 인식이다.
‘나는 詩를 몰라요, 詩에는 문외한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너무나도 많이 듣는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좋은 시 구절을 접했을 때 코끝이 찡해오는 감동을 받은 경험이 있다면, 그는 절대로 시를 모르는 사람이 아님은 물론, 결코 문외한이랄 수가 없다. 시를 창작하는 데에 특별히 비법이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인가? 현실적으로는 '시창작법'이라는 말이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시창작법'이라는 말을 앞에 내걸고 그것을 논의하기가 부자연스럽다.
'시창작법'이란 시를 지어내는 특수한 비법이나 기술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창작 되어진 기존의 여러 작품들을 감상하고 거기서 최소 공약수를 추출해 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말해서 시창작법은 누구에게 구체적으로 배울 수 있는 공식이 아니다.
스스로 여러 편의 시를 읽어야 한다. 그리고 거기 나타난 공통적 질서와 원리를 체득해야 한다. 그 체득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서서히 자연스럽게 나타날 것이다.
일정한 원리나 이론에 맞추어서 시를 창작해 내거나, 이론적 지식을 시의 제작에 적용하는 시인은 없을 것이다. 시의 이론은 시를 창작하는 데에 별 도움을 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나친 이론의 적용은 오히려 언어 예술로서의 시의 미감을 약화 시킬 수 있다. 시는 두뇌로 쓰지 않고 가슴으로 쓰는 것이며 논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로 받아들이고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인간은 누구나 시를 사랑하고 감상할 수 있는 정서를 본능으로 가지고 있다.
요리를 잘 못하는 사람도 음식의 맛을 감별할 줄은 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음식평론가거나 삼류요리사임에 틀림없다.
작곡은 못해도 음악을 즐길 줄 아는 사람, 청중을 모아놓고 발표하진 못해도 노래를 부르기를 즐기는 사람, 이런 사람을 음악 비평가 내지 삼류성악가라고 부르면 어떨까. 말을 사랑하고 그 느낌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은 시인이다.
12. 詩的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왜 시(詩)를 쓰는가? 인간은 왜 시(詩)의 가치(價値)를 창조하였는가?
시는 일종의 인간의 욕망(慾望)을 대변한 것이며, 이 표현(表現)의 욕구(慾求)는 인간 정신의 갈증을 해결하려는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다.
詩(文學)가 인간의 이상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가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역으로 시인이 시의 창작활동을 통하여 그 정신을 구원하는 방법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독자의 편에서도 시를 향수(鄕愁)하는 과정을 통하여 시인이 성취한 것과 같은, 어쩌면 그 이상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
시인은 시를 통하여 자아(自我)를 발견(發見)하고 시를 통하여 자아(自我)의 주체(主體)를 유지(維持)하고 시를 통하여 자아(自我)의 결함(缺陷)을 복구(復舊)하며 시를 통하여 정신적 균형과 통일을 완성한다. 그것은 시를 통하여 타인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는 예감 아래 자기만족을 느끼기 때문이다.
자아와 타인, 자아와 세계, 주관와 객관을 연합하여서 조화와 통일을 이루려는 시각을 시적 세계관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시적 세계관이란, 자아 가운데서 세계를 발견하고 세계 속에서 자아를 발견하려는 인간 정신의 지향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욕구는 인간의 의식 속에 잠재해 있는 공통의 본능이기 때문에 그것이 노출되었을 경우에도 전혀 어색하지 않으며, 매우 자연스럽고 강열한 호소력을 가지게 된다.
詩人은 주체인 자아와 객체인 세계(여기서 세계라고 하는 것은 자아 이외의 모든 대상을 의미한다)와의 만남을 통하여 일어날 수 있는 여러가지 현상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주체와 객체가 만나는 과정에서 발견하게 되는 하나의 동일성, 즉 일체감을 중시한다. 시인으로 하여금 한 편의 작품을 쓰게 하는 모티브는 외부 세계로부터 받은 하나의 충격 혹은 감동인데, 이 충격 혹은 감동을 달리 표현하면 '자아와 세계가 하나의 새로운 동일성의 차원에서 승화되었을 때', 곧 주객일체의 경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동일성이라는 말은 문학용어이기 전, 현대에 이르러 제반 학문 탐구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학문적 탐구의 대상이기에 앞서 우리들의 현실 생활에 밀착된 가치개념이기도 하다.
<세계와 나> 사이에 동일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할 때,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소외감과 고독감이다. 동일성이 결여되었을 때 우리는 우주와 세계로부터 유리된 듯한 이질감을 느끼게 되고 거기서 존재에 대한 회의와 절망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주체와 객체 사이에서 과다한 동일성을 발견하면, 우리는 너무나 쉬운 물아의 혼연일치 속에서 오히려 자아의 위치를 상실하거나 객관적 시각을 잃어버리는 혼돈과 오류에 빠지게 될는지도 모른다.
고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문학의 각 장르에서 가장 지속적으로 취급되어 온 테마는 사랑이다.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 동시에 당연한 일이다.
사랑이란 바꾸어 말하면 동일성의 발견이거나 동일성에의 열망이기 때문이다.
즉 어떤 경우에도 자아와 자아를 둘러싸고 있는 외부적 세계와의 합일을 꿈꾸지 않은 사랑은 없다. 이토록 자아로부터 세계, 세계로부터 자아를 발견하려는 갈망은 詩의 본래의 모습인 동시에 詩人이 회귀하기를 갈망하는 정신의 고향인 것이다.
김준오는 이러한 상태, 곧 자아가 세계와의 융화를 꿈꾸는 상태를 '서정적 자아'라고 불렀으며, 서정적 자아에 대하여 조동일은, '서정적 자아는 객관과 맞서 있는 주관도 아니고 이성과 구별되는 감정도 아니다. 서정적 자아는 주관과 객관, 이성과 감정의 구분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의 것이라고 보아야 문제가 해결된다. 서정적 자아는 세계와 접촉해서 세계를 자아화하고 있는 작용을 지칭한 것이 아니고 세계와의 접촉이 없어도 존재하는 자아라고 보아야만 주관과 객관, 이성과 감정의 구분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인정될 수 있다.'고 하였다.
서정적 자아가 '주관과 객관, 이성과 감정의 구분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의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성과 감정이 미분화된 카오스(chaos)적 합일의 상태이며 주객이 화해를 이룬 혼연일체의 경지라고 해도 될 것이다.
서정적 자아에 대립하는 개념으로는 역사적 자아(Historical I), 논리적 자아(Theoretical I), 실용적 자아(Practical I)를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오늘날 물신 숭배의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자아를 가리키는 말들이다.
우리는 문명이 발달된 사회에 살아갈수록 점점 자연과 신으로부터 멀어져 세계와의 합일이 아닌 세계와 대립하여 대결하려는 의식을 강화시켜 가고 있다.
세계와 조화하고 화해를 지향하는 서정적 자아야말로 동일성의 회복을 실현하려고 하는 시적 정신의 바탕이 될 것이다.
아침 풀밭을 걷다가
달팽이를 밟았습니다
크레카 부서지는 소리
흙발로 밟아
죄짓는 소리
우주의 천장이
내려앉았습니다
벗겨진 하늘
드러난 맨 몸둥이
쏟아지는 빛이며 아우성이며
나는 춥고 어지러워
몸을 움츠리었습니다
동서남북 어디로 갈까
그 자리에 눈감고
주저앉았습니다 - 이 향 아 <달팽이> 전문 -
위의 詩는 한낱 미물에 불과한 달팽이와 시인 자신을 동일시하였다. 자아는 세계와의 동일시를 통하여 무력함, 왜소함, 고독함과 절망을 구체적 실감하고 있다. 무심코 달팽이를 밟은 시인은 자신의 흙발의 감각을, 발 밑바닥에서 '바삭'하는, '크레카 부서지는 소리'로 느끼고 있다.
동시에 시인은 자신을 짓누르는 거대한 어떤 흙발의 감각을 크레카 소리를 내며 부서질 듯한 자신의 머리 위에서 동시에 감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詩의 서정적 자아는 한 마리의 달팽이로서, 춥고 어지러워 몸을 움츠리고 동서남북 어디로 갈까 몰라서 그 자리에 눈을 감고 주저앉아 버리는 절망과 두려움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시인이 의식적으로 자아와 세계의 합일점을 추구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는 동화(assimilation)이며 다른 하나는 투사(projection)이다.
동화는 시인이 외부 세계를 자신의 내부로 끌어 들여서 그것을 인격화하는 작업이다.
원래는 시인의 자아와 갈등. 대립의 관계에 있던 세계를, 시인의 감정과 가치관에 맞도록 변화시키는 것이며, 이는 달리 세계의 자아화라고 표현할 수 있다. 투사는 시인의 자아를 상상적으로 세계에 조영하는 것으로 주체인 자아와 객체인 세계의 동일화 작업이라는 점에서는 동화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동화가 세계의 자아화라고 할 수 있는 데 반해 투사는 자아의 세계화라고 할 수 있는 점이 다르다 하겠다. 즉 투사는 자아의 감정을 세계에 移入하여 자신과의 동일성을 이루려는 일이다.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일까. 묵중하게 서 있었다.
다음 날은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귀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으로 우회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 문을 지키는 파수병일까. 외로와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한 그들의, 침울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 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 박목월 <나무> 전문 -
시인이 여행길에서 만난 여러 형태의 나무들은 '수도승'처럼 '과객'처럼 혹은 '파수병'처럼 서 있었다. 그들 나무들은 시인의 마음 속에 '뽑아 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로 뿌리를 내려 시인과 일체가 되어 버린다. 즉 시인은 세계에 자신을 합일(合一) 시키고 있다.
<달팽이>에서는 자아와 대립 관계에 있는 '달팽이'를 시인의 내부로 끌어들여 시인의 가치관에 맞게 동화시킨, 외부세계의 자아(自我)화 작업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면, <나무>에서는 세계에 자아의 감정을 이입하여 동일성을 이루려고 한 투사의 성격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동화니 투사니 하는 분류는 편의상 동일화의 성격을 논의할 때에 필요한 것일 뿐이다.
작품상에 표현되고 있는 동일화의 작업은 동일화의 작업으로 나타날 뿐이며 동화와 투사는 완전히 분화되지 않은 상태로 일체를 이루는 것이 보통이다.
풀꽃에 닿은
내 쓸쓸함까지는
그대 못 따라오네
풀꽃이 먼지 같은 꽃 하나
완성하고 있는 걸
그대는 크게 눈떠도 안 보이네
그것은 그대가 부자인 때문.
새 꽃들이 불 밭 처럼 켜지고
이 밝음 속에서는 더욱
모래같이 작은 꽃은 보이지 않아
그대는 눈멀어 저쪽에 서서 있고
나의 쓸쓸함이 가는 길을
나 홀로 비추며 비밀히 따르고 있을 뿐이니
아무리 먼 길도
내 쓸쓸함과 어깨를 나란히 걸어가면
저 山 밑 홀로 사는
풀꽃의 쓸쓸함에 초대되리라
그대여 바람이 불면
홀로 거기 욕망에 흔들리게
나는 풀꽃 속에 들어가 작은 향기로 흔들릴 터이니
풀꽃에 들어간 내 쓸쓸함을
그대는 결코 갖지 못하네. - 김선영 <쓸쓸함> 전문 -
시인은 山 밑에 홀로 피어 있는 먼지처럼 작은 풀꽃의 쓸쓸함에 동화되어 있다. 다른 사람이 크게 눈을 떠보아도 그 쓸쓸함을 모른다면 그것은 '바람이 불면 홀로 거기 욕망에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고 아직도 '풀꽃의 쓸쓸함에 초대'받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대는 눈이 멀어 저쪽에 서서 있'기 때문이라고 이 시인은 말한다.
시인은 자신이 풀꽃 속에 들어가 작은 향기로 흔들리면서 시인 자신도 풀꽃처럼 쓸쓸해지고 있음을 기뻐한다.
시인이 자신을 소멸하여 풀꽃 속에 합일하려고 한 점에서 이는 자아의 세계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시인이 풀꽃이 되는 경로를 따라 풀꽃도 시인 속에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된다.
요컨대 詩를 쓰는 작업은 주체(主體)와 객체(客體) 곧 자아와 세계 (시인과 사물)의 관계를 설정하는 일이다.
세계와 자아와의 관계를 설정함으로써 세계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고 그 존재 가치를 해석하며 양자간의 가장 구체적이고도 순간적인 조우를 포착해 내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우는 세계와 자아 사이의 동일성의 발견으로부터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저 나뭇잎 뻗어 가는 하늘은
천 날 만날 봐야
환장할 듯이 푸르고
다시 보면
얼마나 적당한 높이로
살랑살랑 미풍을 거느리고
우리 눈에 와 닿는가.
와서는, 빛나는, 살아 있는, 물방울 튕기는
광명을 밑도 끝도 없이 찬란히 쏟아 놓는가.
이것을 나는
어릴 때부터 쉰이 넘는 지금까지
손에 잡힐 듯했지만
그러나 그 정체를 잘 모르고
가다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가운데
반쯤은 명상을 통하여 알 것도 같아라.
그러나 다시 눈을 뜨고 보면
또 다른 미지수를 열며
나뭇잎은 그것이 아니라고
살랑살랑 고개를 젓누나. - 박재삼 <찬란한 미지수> 전문 -
시인은 세계로부터 동일성을 발견하기 이전 미지수를 먼저 발견하였다.
그것은 '찬란한 미지수'이다. 영원히 도달할 길 없는 거룩한 세계에 대한 미지수임을 시인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쉰이 넘는 지금까지 손에 잡힐 듯 했지만 그러나 정체를 잘 모르'는 자연의 신비와 우주의 섭리와 그리고 삶의 이치와 비밀에 대하여 시인은 미지수라고 토로한다. 그러면서도 '가다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가운데 반쯤은 명상을 통하여 알 것도 같아라'라고 발견의 기쁜 소리를 지르기도 하는 것이다. 시인이 발견하려고 하는 것은 광명으로 차 있는 자연의 신비에 대한 해답이 아니다.
시인의 정신이 추구하는 궁극, 그 영원한 향수를 시인은 자연과의 친화와 교감을 통해서 미지수화하고 있다. 자연과의 교감은 자연과의 동일성이다. '나뭇잎은 그것이 아니라고 살랑살랑 고개를 젓'을 때, 시인은 벌써 그 대답을 듣고 있지 않을까?
담담하고 솔직하게 미지수를 고백하는 시인의 육성에서 우리는 시인의 정직한 개안을 축하할 수 있게 된다.
미지수를 고백하는 시인은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미지수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와의 교감과 응답은 세계와의 합일이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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