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부석사 /정 호 승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마지摩旨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죽음도 불사한 '사랑의 의지'
먼 남녘에서 만났던 고등학교 1학년 벗에게서 카드 메일이 왔다. 열어보니 정호승 시인(1950-)의 시 〈우리가 어느 별에서〉가 안치환의 목소리로 흘러나온다.
노래에 잠긴다. 시에 잠긴다. 시가 그대로 노래인, 어둔 밤 눈물 같은 이 반짝거림.
내 어린 벗은 요즘 정호승 시인의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를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있다고 한다.
아주 아주 낡은 책에서 좋은 냄새가 난단다. 자신이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세상에 나온 시집을 읽고 있는 열여섯 살 소녀. 시가 세상에 와 어느 누군가의 마음에 닿는 길은 참으로 신비다. 그 애에게 답 메일을 보냈다.
거기에 정호승의 시로 만들어진 노래 중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부치지 않은 편지〉를 동봉했다.
'(…)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 돌아 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백창우가 곡을 만들고 김광석이 부른 노래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뻐근해진다. 소주를 딱 한잔만 하고 싶어진다.
정호승 시인에게서 나는 종종 구도자의 느낌을 받는다.
사랑의 화두를 온몸으로 짐 진 채 전 생애를 걸고 떠난 구도행.
슬픔, 그리움, 절망, 외로움, 희망, 사랑, 이런 단어들이 한꺼번에 떠오른다.
그는 데뷔 이래 세 번이나 스스로 시업(詩業)을 쉬었다.
이 공백기들에 그는 참담한 절망을 건너온 듯하다.
절망이 깊어도 끝내 사랑을 버릴 수 없었던, 아니, 오직 사랑에 의지해 캄캄한 터널을 통과해온 구도행의 정점에 이 시가 있다고 할까.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해인사 큰스님의 법어에서 충격을 받고 기어이 시로 빚어진 이것은 죽음도 불사한 사랑의 의지다. 순도 높은 '오직 사랑'이다.
낮고 그늘진 변두리 사람들에 대한 한없는 사랑과 연민이 가슴 싸한 슬픔으로 번지던 시편들에서 7년의 공백을 거쳐 나온 다섯 번째 시집 《사랑하다 죽어버려라》는 극한의 고통을 통과해 나온 자리에 핀 한 떨기 붉은 열매처럼 오롯하다.
진저리친다. 이 조용한 구도자의 사랑법은 온몸이다.
정호승의 사랑은 스스로 등신불이 되고자 한다.
'아직도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나를 사랑하는지 /
아직도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 어려운지 /
미나리 다듬듯 내 마음의 뼈다귀들을 다듬어 /
그대의 차디찬 술잔 곁에 놓아 드리리 /
마지막 남은 한 방울 눈물까지도 /
말라버린 나의 검은 혓바닥까지도 /
그대의 식탁 위에 토막토막 잘라 드리리' (〈모두 드리리〉부분)
사랑이 부박해져가는 시대이지만, 소름 끼치도록 염결한 사랑의 의지가 세상 한 녘에서 이렇게 타오르는 한 오라, 절망아, 사랑은 당신의 상처를 치유하고야 말 것이다!
한(恨) /박 재 삼
감나무쯤 되랴
서러운 노을빛으로 익어가는
내 마음 사랑의 열매가 달린 나무는!
이것이 제대로 벋을 데는 저승밖에 없는 것 같고
그것도 내 생각하던 사람의 등 뒤로 벋어가서
그 사람의 머리 위에서나 마지막으로 휘드려질까본데.
그러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안마당에 심고 싶던
느껴운 열매가 될는지 몰라!
새로 말하면 그 열매 빛깔이
전생(前生)의 내 전(全) 설움이요 전(全) 소망인 것을
알아내기는 알아낼는지 몰라!
아니, 그 사람도 이 세상을
설움으로 살았던지 어쨌던지
그것을 몰라, 그것을 몰라!
내 사랑은 서러운 노을빛, 감나무를 닮았네
문명이라는 것이 인간의 영역이라면 숲으로 상징되는 자연은 신의 영역이다.
우리는 숲에서 신을 느낀다.
가을은, 봄은, 계절은 도시로 오지 않고 숲으로 스미지 않던가. 숲에 들 때마다 생각나는 이름이 있다. 박재삼(朴在森). '박달나무 숲에 살다',
나는 그 이름을 이렇게 마음속으로 번역해 부르곤 했다.
그 이름이 생각날 때마다 숲에서 걸어 나오는 한 인간을 상상하곤 했다. 그렇다고 산신령 같은 이미지로서는 아니다.
그저 순한 웃음기를 온몸에 입힌, 어눌한, 그래서 간절히 순리에 입각한 한 시인.
"천 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 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직도 천 년 전의 되풀이다"(〈천년의 바람〉 중)라고 노래하는 걸 보면 역시 숲의 시민, 바람의 이웃임에 분명한 시인. 사랑을 나무에 비유하면 어떤 나무가 될까?
박재삼 시인에게 사랑의 비유는 감나무다. 허나 그 감나무 여염하지 않다.
'제대로 벋을 데가 저승밖에 없는' 나무다.
이승에서는 다 못할 사랑 아닌가.
게다가 그 사람의 등 뒤로나 벋어나가는 혼자의 사랑이다.
그 사람의 머리 위에서 마지막으로 '휘드려지는',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의 빛이 되는 사랑은 '한(恨)'에 다름 아니다.
한 치의 원망도 절망도 없는, 마음의 순리를 따라가서는 마침내 '느껴운 열매'가 되는 사랑이야말로 우리를 '성실'히 이승을 살게 하는 근원적 동력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러한 깊은 눈으로 얻어낸, 누구나 할 것 없이 사랑은 아픔일지 모른다는, 질문이며 동시에 독백인,
"그 사람도 이 세상을/
설움으로 살았던지 어쨌던지/
그것을 몰라, 그것을 몰라!"라는, 리듬을 보라.
'그것을 몰라,'와 '그것을 몰라!' 사이에 흐르는 침묵과, 속울음과, 아득함을, 서편제의 계면조 같은 '한(恨)'을 보라.
실은 감나무는 가장 흔한 우리네 유실수다.
그럼에도 가을 어느 하루 이웃의 마당가에 잎을 떨구며 서 있는 감나무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우리는 느끼는 바가 있지 않을 수 없다.
그 모습은 인간의 전생애를 보여주고도 남는다.
그래서였던지. 화가 근원(近園 김용준)과 수화(樹話 김환기)가 이어 살았던 집의 이름이 '노시산방(老枾山房)'이요, 박용래의 집도 '홍시(紅枾) 있는 골목'이었다.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울음이 타는 가을강〉 중)는 가을이다.
'서러운 사랑 이야기'가 골목마다, 오솔길마다, 지붕마다 '지글지글 타는' 가을이고 그 '등성이'에 우리는 지금 서 있다!
민 들 레 /신 용 목
가장 높은 곳에 보푸라기 깃을 단다
오직 사랑은
내 몸을 비워 그대에게 날아가는 일
외로운 정수리에 날개를 단다
먼지도
솜털도 아니게
그것이 아니면 흩어져버리려고
그것이 아니면 부서져버리려고
누군가 나를 참수한다 해도
모가지를 가져가지는 못할 것이다
사랑이 아니면 부서져 버리리라
신용목(34)은 젊은 시인이다. 요즘 젊은 시인들 시가 너무 난해하다고 고개 젓는 독자분도 많지만, 오해를 푸시길.
'진정성'이라는 말이 낡아 보이긴 해도 예나 지금이나 '진정성' 있는 시의 마음은 통하게 되어 있으니. '진정성'이라는 낡고 오롯한 마음을 바꾸어 말하면 곧 사랑의 마음이겠다.
신용목은 삶에 대한 조촐한 사랑의 마음이 시의 근원자리임을 아는 시인이다.
그래서 신용목은 동시대 사람들의 남루한 삶의 곡절에 진득하니 귀 기울인다.
시를 짓는 그의 태도는 담박한 낡음을 옹호하고 그가 펼쳐 보이는 시의 감각은 청신한 젊음을 섭렵한다. 좋은 궁합이다.
이 시 〈민들레〉는 '오직 사랑'을 향한 간결하고 빛나는 뼈대를 담백하게 드러낸다.
모호함으로 무언가를 감추려 하지도 과장되게 드러내려 하지도 않는다. 설명이 필요 없다.
심해서 그에게 이 시를 쓴 때가 언제쯤인지 물었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 왠지 자꾸 실연당한 기분이 들었단다.
실제로 실연당한 것도 아닌데!
세상이 나만 왕따 시키는 것 같은 꿀꿀한 느낌도 그 비슷한 언저리에 있을 게다.
질풍노도의 청춘에 자신이 믿었던 신념, 그것을 실천하는 일의 어려움, 당장 코앞에 닥친 먹고 사는 문제 등이 난마처럼 얽혀 안팎으로 우울하던 때를 겪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란다.
사랑이란 '있지도 않은 약속' 같은 거라는. 그리고 사랑이란 '있지도 않은 약속을 꼭 지키고 싶다는 다짐' 같은 거라는. 어느 날 문득 스스로에게 다짐하기를, 있지도 않은 약속일지 모르지만 자신을 다 걸자!고 했단다.
그렇게 자신을 다 거는 사람만이 고독할 자격이 있는 것 같다고 사투리 섞인 어눌한 말투로 그가 말한다.
햐! 환하다. 있지도 않은 약속에 자신을 다 걸고 처형되는 민들레처럼.
'밤의 입천장에 박힌 잔 이빨들, 뾰족하다//
저 아귀에 물리면 모든 罪가 아름답겠다//
독사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는, 별의 갈퀴//
하얀 독으로 스미는 罪가 나를 씻어주겠다'(〈별〉).
죄를 씻는 것이 사랑임을, 사랑으로 스스로를 정화하기 위해 사랑의 뾰족한 이빨에 기꺼이 물려야 함을 그는 알고 있다.
아직 젊은데 이 조숙함은 어디서 왔을까. 하긴 그는 지상의 남루를 견디는 갈대들, 그 아버지들 뼛속 바람까지 보는 아들이다.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가장(家長)//
아버지의 뼈 속에는 바람이 있다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갈대 등본〉).
지상의 쓸쓸한 어버이들이여.
수고를 그만 떨치시고 다음 세대로 확산되는 사랑의 풍욕을 즐기시길.
시인 아들이 걸어서 도착할 바람의 끝에서 새로운 사랑의 역사를 받으시길!
질투는 나의 힘 /기 형 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유일하게 남은 희망이 '질투'라니!
저녁 거리에 서서 물끄러미 추억을 바라본다. 오래 된 책을 펼칠 때 툭 발등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을 만난 적 있을 것이다.
그곳엔 오래 전, 그러니까 지금보다 훨씬 눈이 밝았을 때, 지금보다 훨씬 외로웠을 때, 지금보다 훨씬 미숙했을 때의 자화상이 들어있게 마련이다.
사랑하던 사람이 하나쯤 그때 모습 그대로 어룽거리며 걸어 나온다. 그 중 십중팔구는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미 화석이 된, 그 가슴 에이는 '사랑의 시간'을 미리 떠나가서 뒤돌아보는 시가 바로 이 시다. 그는 죽음을 미리 예감한 것만 같다.
'사랑'이란 말은 생각의 양, 즉 '사량(思量)'의 변형이라는 설이 있다.
기형도(1962-1989)는 마음에 상념이 얼마나 많았으면 '공장을 세웠'다고 했을까.
사랑이 아니라면 그만한 상념일 수는 없으리. 그러나 그 '너무나 많은 공장'의 생산물들을 기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탄식'만을 남겼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남은 희망이 '질투'라니! 잔인하다.
질투만 없어도 사랑은 얼마든지 할 만한 것 아니던가!
질투는 그래서 사랑의 저주일지도 모를 일.
이 질투를 앓는 자, 지금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 두었다.
그 청춘이 얼마나 긴 그림자를 남겼는지는 여백에 속한다.
기형도의 유품 중 어느 책갈피엔가 지금도 이러한 글귀가 적힌 쪽지가 꽂혀 있을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릿하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인생은 사랑을 찾아 헤매다 죽는 것인가? 아마 그럴 것이다. 그 사랑의 농도를 열정이라 하리라. 그는 침침한 심야의 극장에서 그만 청춘의 마지막 숨결을 놓아버렸다.
사후에 나온 유일한 그의 시집은 이후 90년대에 등장하는 젊은 시인들에게 강력한 자기력을 띤 것이기도 했다.
"너 좋아하던 시인이 죽었대…."
신경숙 선배의 더듬거리는 전화 목소리가 들려오던 그 가을날의 스산한 오후가 엊그제 같다.
기형도 시인은 태생지가 내 이웃의 섬이어서 친연성이 있었던지 내 시를 유심히 읽어주고 격려해주던 고마운 선배였다.
인사동의 한 카페에서 한 달에 한 번 열렸던 시 합평회가 끝나면 우리들은 돌아가면서 노래를 불렀다.
우리 모두 가난한 손님들이었던 시절 듣던 그의 노랫소리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마음을 먹먹하게 했다.
그날 저녁 적십자 병원 영안실의 차디찬 형광불빛을 빠져나오며 나는 한없는 아쉬움에 가슴이 조였다.
따져보니 내년이 20주기다. 유서와 다름없는 그의 마지막 시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빈집〉).
어느 침침한 술집에 들어 촛불이라도 켜놓고 읽어야 하리라.
원 시 (遠 視) /오 세 영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무지개나 별이나 벼랑에 피는 꽃이나
멀리 있는 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별을 서러워하지 마라,
내 나이의 이별이란 헤어지는 일이 아니라 단지
멀어지는 일일 뿐이다.
네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기 위해선 이제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
늙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다는 것이다.
머얼리서 바라볼 줄을
안다는 것이다.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다운 사람아
'나이 듦'을 스스로 인정하게 되기까지 넘게 되는 고비가 있다고 한다. 한동안은 자신의 원시(遠視)를 감추게 된다고.
눈앞이 가물거려도 깨알 같은 글씨로 쓰인 레스토랑 메뉴판을 멀찍이 들고 보는 일 같은 건 절대 하지 않는다는 것. 그렇게 갈등하는 시기를 지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나이 듦'을 인정하게 되는 때가 오는데, 이제 돋보기가 필요하겠다고 앞에 앉은 사람에게 솔직히 털어놓게 된단다.
그리고 말한다. '젊은 척' 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부터 얼마나 편안한지 모르겠다고!
나이 든 내 언니들 얘기다.
젊음은 아름답지만 젊음에 집착하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 세월을 막을 수 있는 육체는 없다.
반면에 청춘의 시절엔 절대로 알 수 없는 세계가 나이 들면서 펼쳐진다는 측면에서 인생은 영원한 미지다.
오세영 시인은 나이 들며 생기는 이 새로운 미지를 원시(遠視)라는 키워드로 사뿐히 들어올린다.
그리하여 시인에겐 조금 멀어지는 일이 이별이다.
그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답다.
무엇이든 내 손안에 쥐고 있어야 안심하는 젊음으로부터 여러 걸음 떨어진 뒤안길에서 손에 닿지는 않지만 내 손끝에서 악기가 되어 울리는 사랑. 이렇게 여러 겹의 무늬로 인생이라는
긴 여행의 벗이 되는 사랑은 참으로 신비이지 않은가.
이 시 〈원시(遠視)〉는 지금까지 17권의 시집을 낸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꽃들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에 실려 있다.
지천명의 나이에 출간된 아름다운 연시집인 이 시집의 서문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완전한 삶이란 무엇일까. 나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내게 있어 시가 그에 가까워지려는 노력의 소산인 것은 분명하다.
나는 또한 그것이 사랑 같은 것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정신적 가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고 '사랑 같은 것'이라고 쓰고 있는 시인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원시(遠視)의 여유와 지혜. 내 식대로 단정 짓지 않고 '머얼리서' 바라보는 원시의 원숙함이
평생토록 시작(詩作)과 함께 시론을 탐구해온 그에게서 오롯이 드러난다. 한 잔의 차를 마시며 헤어짐을 생각하는 시인의 눈에 '무지개'며 '별'이며 '꽃'들이 가물가물 흔들린다.
시인의 눈동자에 잔잔히 피어오르는 일몰은 누가 보낸 편지일까.
김명인 시인은 오세영 시인을 가리켜 '은근한 댄디'라 했다.
김승희 시인은 '무아의 바람 속을 달리는 보헤미안'이라 했다.
이제 꿈꾸는 가을은 스스로 저만치 멀어져서 꿈꾸는 가을이며, 이별은 멀리서 껴안아보는 이별이다.
이별은 노시인의 연인이 되어 가슴에서 달 가듯이 함께 간다.
'이별을 서러워하지 마라'고 시인이 어깨를 툭 친다. 따뜻한 거리, 원시의 총총한 눈도장들!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 정 희 성
어느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70년대, 그 '가파른 시대'의 사랑
시집 《저문 강에 삽을 씻고》에 실린 정희성 시인(63)의 얼굴을 바라본다. 젊은 시절의 모습이다. 단호함과 함께 신중한 결기 같은 것이 느껴진다.
다른 시집《詩를 찾아서》와 《돌아다보면 문득》에 실린 사진들도 차례로 바라본다. 그대로 부드럽고 편안하다. 이제는 노경이라고 해도 실례가 되지 않을 것이다.
거기 실린 시들도 그 사진의 모습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위의 시는 젊은 시절 이른바 '가파른 시대'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그는 《詩를 찾아서》의 후기에 "내가 시를 쓰기 시작한 1970년 이후 20년 간은 가파른 시대였다(…)
유신에 반대하던 나의 벗들은 직장에서 쫓겨나고 감옥에 갇힌 바 되었다.
마침내 나는 고전적인 시인이 되기를 포기하고 현실적인 시인이 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래서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라고 '겨울'의 사랑을 노래한다.
그 사랑은 사랑 자체의 온도를 노래하지 못한다. '하나의 꿈'을 향한 사랑이고 그 사랑은 일종의 동지적 관계처럼도 보인다.
그래서 더 쓸쓸하다.
사랑을 하고 또 사랑을 노래해도 늘 시대의 고뇌를 동반해야 했던 비극이 가난한 시절의 옷가지들처럼 쓸쓸하게 비치는 것이다.
사랑의 뜨거운 온도 대신 깊게 가라앉은 '희망'을 어렵사리 불러내야 하는 힘겨운 주인공들을 바라보라.
파김치가 되어 힘겹게 만남을 이어가는 가난한 젊은 연인의 모습이 떠올라 안쓰럽기만 하다.
그럼에도 내면에는 서로가 씨줄과 날줄이 되어 '비단'을 만들어보자 하는 꿈이 꿈틀대고 있으니 사랑은 얼마나 위대한 생존의 에너지인가.
시인은 그 시대를 벗어난 어느 날 문득 봄이 오려는 기미를 이렇게 노래한다.
'이제 내 시에 쓰인/
봄이니 겨울이니 하는 말로/
시대 상황을 연상치 마라/(…)/
나는 사랑을 시작했네/
저 산에도 봄이 오려는지/
아아, 수런대는 소리' (〈봄 소식〉).
그 봄이 온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사랑을 시작했다'는 것. 이제 겨울이 가고, 아니 겨울을 이기고 봄이 오는 순리처럼 시대를 벗어난 순연한 사랑을 시작했다는 고백이 두 편의 시의 간격을 메우며 환희롭다.
'꽃대궁만 있고 잎은 보이지 않았다/
(…) /
꽃이 잎을 만나지 못한다는 상사화/
(…)/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인 게라고/
끝없이 저잣거리를 걷고 있을 우바이/
그 고운 사람을 생각했다'(〈시를 찾아서〉)고
잔잔한 사랑의 물결 속을 걷는 사람을 그는 노래한다.
어느 자리에선가 조용히 어린아이처럼 걱정에 가득 찬 표정으로 노모를, 또 가정사의 사소한 걱정을 아주 아주 진지하게 털어놓던 순수한 음성도 생각난다.
그대에게 가고 싶다 /안 도 현
해 뜨는 아침에는
나도 맑은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밤새 퍼부어대던 눈발이 그치고
오늘은 하늘도 맨 처음인 듯 열리는 날
나도 금방 헹구어낸 햇살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창가에 오랜만에 볕이 들거든
긴 밤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띄워 보낸
내 그리움으로 여겨다오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그리움 하나로 무장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 아니냐
진정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만큼
새날이 밝아오고
진정 내가 그대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만큼
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와 내가
하나되어 우리라고 이름 부를 수 있는
그날이 온다면
봄이 올 때까지는 저 들에 쌓인 눈이
우리를 덮어줄 따뜻한 이불이라는 것도
나는 잊지 않으리
사랑이란
또 다른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리고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
지치고 구멍난 삶을 데리고
그대에게 가고 싶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할 신천지
우리가 더불어 세워야 할 나라
사시사철 푸른 풀밭으로 불러다오
나도 한 마리 튼튼하고 착한 양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사랑이란 그대의 앞이 아닌 옆에 서는 것
대학 입학시험을 마친 고3 졸업 무렵, 강릉 경포 바닷가 윌(will)이라는 카페에서 안도현(47)의 첫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을 읽었다.
옆에 진눈깨비 몰아치던 바다가 있었다.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하였네/
못다 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서울로 가는 전봉준〉 부분).
바다로 내리는 진눈깨비는 한 자 세 치는커녕 바닷물에 닿자마자 사라져갔다. 왜일까. 심장에 무거운 바윗돌을 얹은 것처럼 열여덟 살의 나는 서러웠다.
1987년 겨울이었다. 안도현은 한결같은 '연애쟁이'다.
20년 넘게 참으로 줄기차게 시와 연애하고 있는 그는 말한다.
"시와 삶이 궁극적으로 완전한 하나가 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거의 하나에 가까워지도록 만드는, 그 둥글디 둥근 꿈만은 결코 포기하지 못하겠노라"고. 시와의 연애가 자기 삶의 전부라는 듯 닥치는 대로 털어서 시 쓰고 시를 설파하고 시를 찬양하는 그의 애정 공세는 낭만주의자의 연애법. 이 낭만주의자는 세상의 소소한 것들에서 흘러나오는 생동감을 특유의 통찰력으로 이끌어내어 따뜻한 서정을 빚는다.
낭만이 사라지는 시대에 안도현 같은 낭만주의자가 한 가마니쯤 있어주면 좋겠다.
그러면 빈한한 세속의 삶이 조금은 위로 받을 수 있을 텐데.
'너에게 가려고// 나는 강을 만들었다// 강은 물소리를 들려주었고/ 물소리는 흰 새떼를 날려 보냈고/ 흰 새떼는 눈발을 몰고 왔고/ 눈발은 울음을 터뜨렸고// 울음은 강을 만들었다/ 너에게 가려고' (〈강〉)
가히 사랑의 연기법(緣起法)이라 할만하다.
표면이 아닌 이면의 역사를 상상하는 안도현의 이런 노래가 흘러가서 여치소리를 듣는 방법을 보자.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여치소리가 내 귀에 와 닿기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는 것/(…)/ 외롭다든지 사랑한다든지 입 밖에 꺼내지 않고/ 나는 여치한테 귀를 맡겨두고/ 여치는 나한테 귀를 맡겨 두는 것'(〈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 부분)이란다.
나는 무릎을 친다. 대상에 대한 공경이 만드는 이런 일치와 이런 거리.
안도현에 따르면 사랑이란 정면에 서는 게 아니라 옆에 서는 것이다.
옆에 서서 서로에게 간격과 틈을 허락하고, 그 사이로 강물이 들고 나고 여치소리가 스미는 것을 바라보고 듣는 일이란다.
그게 바로 사랑이란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하신지.
세상의 등뼈 / 정 끝 별
누군가는 내게 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입술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어깨를 대주고
대준다는 것, 그것은
무작정 내 전부를 들이밀며
무주공산 떨고 있는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져
더 높은 곳으로 너를 올려준다는 것
혈혈단신 땅에 묻힌 너의 뿌리 끝을 일깨우며
배를 대고 내려앉아 너를 기다려준다는 것
논에 물을 대주듯
상처에 눈물을 대주듯
끝 모를 바닥에 밑을 대주듯
한 생을 뿌리고 거두어
벌린 입에
거룩한 밥이 되어준다는 것, 그것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
너에게 한 공기 '밥'같은 존재가 되리
나주(羅州)라는 남도의 유서 깊은 고을이 있다. 어느 핸가 가보았다. 그 이름처럼 곱고 고즈넉했다. 비단 고을이라니. 그곳은 들녘도 이름난 데라 가을이면 비단 폭을 펼쳐놓은 듯 하였겠구나 생각했었다.
더구나 저녁 노을은 들과 하늘을 붉은 비단결로 하나로 묶는 장관이었는데, 그러한 들로는 물이 모이고 길이 모이고 시선이 모인다.
또 그에 따른 기쁨과 아픔도 모여서 위로를 청하고 즐거움을 나눈다. 정끝별(44) 시인은 그곳이 태생지라 한다.
시인은 하는 수 없이 그 산천을 닮았겠으나 그 '사람'을 알아 갈수록 더더욱 그 이름과 시와 더불어 아주 아주 맞춤이다.
넉넉한 들과 유장한 노을 빛깔에 더한 초롱한 별이라니. 그의 마음의 소출인 이 시 또한 그러하다.
'품'과 '돈'과 '입술'과 '어깨'를 대주는 누군가의 보살행 없이는 어떤 하찮은 생명도 부지하지 못한다.
하물며 현존하는 '나'라니!
내가 나 아닌 누군가의 품과 돈과 입술과 어깨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다시 나는 '나의 전부'로 '무작정' 너의 떨고 있는 '가지 끝'과 '혈혈단신 묻혀 있는 뿌리 끝', 그러니까 너의 전부를 일깨우며 가장 낮은 자리에서 기다려주어야 한다고,
그것이 사랑하는 일임을 말한다.
'한 생을 뿌리고 거두어' '벌린 입'으로 들어가는 '밥'이 되어주는 거룩함!
'사랑한다는 말 대신' '밥'이 되라는, 즉 생명이 되라는 메시지를 이 시는 담고 있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이라는 한 줄짜리 한 연을 눈여겨보자.
아무런 느낌도 감동도 없는 '사랑한다'는, 너무나 흔해진 말의 무의미함을 이 시는 질타하고 있기도 하다.
'밥 하면 말문이 막히는/
밥 하면 두 입술이 황급히 붙고 마는/ (…)/
아, 하고 벌린 입을 위아래로 쳐다보는/
반쯤 담긴 밥사발의//
저 무궁, 뜨겁다! 밥'(〈까마득한 날에〉)하고
'저 무궁' 생명의 원천을 다시 한번 노래할 때
그의 마음 바닥은 나주평야의 그것 아니고 무엇이랴.
그것은 무궁한 모성적 사랑이고 모든 떠도는 것들의 안식을 감싸주는 사랑이다.
밥을 끓여 구체적인 사랑을 현현하고 마음의 항구로서 방랑을 재운다.
시인은
'가까스로 저녁에서야/
두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
벗은 두 배가/
나란히 누워/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응, 바다가 잠잠해서"(〈밀물〉)라며 서로의 상처를 만져주는 사랑법을 노래한다.
그 사랑은 더 깊어진다.
'질끈 감은 두 눈썹에 남은/
봄이 마른다/
허리띠가 남아돈다/
몸이 마르는 슬픔이다/
사랑이다/
길이 더 멀리 보인다'(〈춘수(春瘦)〉)처럼
'길이 더 멀리 보이는', 사랑 너머까지가 보이는 혜안(慧眼)의 사랑이다.
파문 /권 혁 웅
오래 전 사람의 소식이 궁금하다면
어느 집 좁은 처마 아래서 비를 그어 보라, 파문
부재와 부재 사이에서 당신 발목 아래 피어나는
작은 동그라미를 바라보라
당신이 걸어온 동그란 행복 안에서
당신은 늘 오른쪽 아니면 왼쪽이 젖었을 것인데
그 사람은 당신과 늘 반대편 세상이 젖었을 것인데
이제 빗살이 당신과 그 사람 사이에
어떤 간격을 만들어 놓았는지 궁금하다면
어느 집 처마 아래 서 보라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사이에 촘촘히 꽂히는
저 부재에 주파수를 맞춰 보라
그러면 당신은 오래된 라디오처럼 잡음이 많은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파문
오래된 라디오 같은… 그 사람의 목소리
당신의 짝꿍은 어느 편에 서길 좋아하는지? 우리는 습관적으로 누군가의 왼편 혹은 오른편에서 걷거나 손을 잡거나 팔짱을 낀다.
비 오는 날이면 오른편이나 왼편 어깨가 살짝 젖으리라. 내 오른편이 젖을 때 나와 반대편 방향을 적시며 나와 함께 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한없이 감사한 가을이다.
'오래된 라디오 잡음처럼' 슬퍼지기 전에 지금 열심히 그에게 말해주어야 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낙숫물이 떨어져 만드는 파문(波紋)과 파문 사이,
더 이상 파문이 생기지 않는 '부재'로부터
오래 전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슬픈 일이다.
부재와 부재 사이에 파문이 일고
파문과 파문 사이에 부재가 혼재하는 게 삶이라고,
본디 삶이 그렇게 생겨먹은 거라고
시는 말하는 듯도 하다.
현실의 우리는 외롭다.
시인도 외롭다.
비 오는 날 어느 집 처마 아래 서 보라.
아무래도 부재보다 파문을 가진 삶이 조금은 더 견딜 만하리라. 조금은 덜 외로우리라.
이 시는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권혁웅(41)의 첫 시집에 첫 번째로 실려 있는 시다.
그는 작년에 권혁웅식 연애시집이라 할 만한 《그 입술에 얼굴을 대다》라는 세 번째 시집을 내놓았고, 그 시집을 읽으며 나는 첫 시집의 《파문》을 떠올렸다.
'그 사람은 당신과 늘 반대편 세상이 젖었을 것인데'라고 알아채는 몸의 감각은 연애의 감각과 상통하는 것이니!
'파문'은 사랑의 감각으로, '부재'는 신화의 감각으로 진화해서 《그 입술에 얼굴을 대다》라는 연애시집이 꾸려졌으리라.
'이리저리 떠다니는 계란 노른자처럼 그 사람 쪽으로 중심이 조금 옮겨 가는 일'(〈먼 곳의 불빛〉 부분)인 연애의 풍경을 권혁웅은 해부학적인 미감을 가지고 구체화한다. 파문과 파문 사이의 부재를 마치 신경줄을 세는 듯한 감각으로 이야기하고 노래한다. 공부하기 좋아하는 영판 학자 같은 그가 다음과 같은 시를 선보일 때는 어떤가. '강물이 오래 흘러왔다고 말할까/ 흐르면서 제가 아는 빛이란 빛은 다 깨부수어/ 제 몸에 섞였다고 할까/ 젖꽃판 사이에 얼굴을 묻고 흘렀던 그의 눈물이/ 종지(終止)도 휴지(休止)도 없이 이어져/ 저렇게 복리로 불어났다고 말할까'(〈그래서 저렇게 글썽인다고〉 부분). 이 시의 부제는 '젖가슴'이다. 여기엔 값싸게 대상화되고 소비되는 육체의 섹시함이 아닌, 사금파리처럼 고독한 에로스의 진풍경이 있다. 그 때문에도 저렇게 글썽인다. '당신과 그 사람 사이'에 파문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