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암리는 지금은 농촌이지만 예전에는 산림이 울창했던 곳으로, 조선 말기에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들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1900년대 초 서울 종현(현 명동) 본당 관할이었던 의정부 지역은 구한말 박해를 피해 도자기를 굽던 교우촌이 신앙의 뿌리가 되었다. 구한말 우고리(양주시 광적면 우고리)와 신암리(양주시 남면 신암리) 일대에 박해를 피해 집단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교우촌이 형성된 것이다.
신암리에 개성 본당 관할 공소가 설립된 것은 1909년이다. 이때 개성 본당의 주임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르 장드르(Le Gendre, 崔昌根)였고, 1년에 두 차례 봄과 가을에 신암리로 와서 판공성사를 베풀고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런데 개성과 신암리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신앙을 유지하는 데에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당시 신암리 공소에는 300여 명의 신자가 거주하고 있었고, 박성로 프란치스코가 공소회장을 맡고 있었다. 1924년 10월 27일 개성 본당 서병익(徐丙翼) 바오로 신부가 신암리 공소와 우고리 공소를 방문하였다.
그 후 1925년 3월 박원문 마르코 회장 시절에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2년 후인 1927년 5월이 돼서야 최문식(崔文植) 베드로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연천· 양주 · 파주 · 포천 · 가평 · 고양군 일대를 관할하게 되었다. 그러나 본당이 경제적으로 너무나 열악하여 도저히 사제의 생활을 뒷받침할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3년 뒤인 1930년 4월에 최문식 신부는 미리내로 전임되고 본당은 폐지되어 다시 행주 본당의 관할 공소가 되었다. 이때 당시 신암리 공소의 회장은 이재현 베네딕토였다.
1933년 9월 26일 신암리 공소에 새로 개축된 경당에서 윤의병(尹義炳) 바오로 신부의 주례로 이하삼 회장 등 신암리 교우들이 참석한 가운데 79위 순교복자 첨례 대축일 미사가 거행되었다. 1935년에는 양주군 덕정리에 본당이 생기면서 그 관할 공소가 되었다.
1945년 12월 김피득(金彼得) 베드로 신부가 덕정리 본당의 주임으로 부임해 왔다. 김피득 신부는 덕정리 성당을 매각하고 의정부시 의정부동에 대지 1,625평을 매입하여 성당을 이전하고 본당 명칭을 의정부 본당으로 바꾸었다. 이때부터 신암리 공소는 의정부 본당에 속하게 되었다. 6.25 전쟁 때 신암리는 폭격을 당해 초토화되고 말았다. 1952년 9월 의정부 본당에 이계광(李啓光) 세례자 요한 신부가 제3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신암리 공소는 차츰 안정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53년부터 1955년 사이에 박복선 형제의 주도로 신암리 신자들의 노력과 영국 군인들의 도움을 얻어 공소를 재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