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포병들이 각성하는 그날 !
- 박갑수(다살공생발전전략연구소 대표)
전쟁의 여왕은 포병이란 말이 있다. 그만큼 포병은 전쟁터에서 생사여탈의 막강한 위력을 지닌 가운데 우아하면서도 한없이 잔인하다. 지금까지의 큰 전쟁에서 전사자의 80% 가까이는 야포의 희생자이고 나머지가 항공기와 보병 소총, 지뢰 등으로 피해를 입었다.
역사를 바꾼 명 지휘관들도 거의 포병 출신들이다. 야포를 최전방에 활용해 한때 스웨덴을 유럽 최강국으로 만들었든 구스타프 대왕, 보병 지원 사격에 야포를 처음 활용한 나폴레옹, 그 당시는 포탄의 상승 고도를 측정하기 어려워 귀가 예민한 음악가를 전선에 활용하기도 했다.
다른 나라들 보다 200여년 빠르게 육지의 포를 함포로 이용했든 고려 수군, 유럽 전체 보다 더 많은 조총을 갖고 대륙 정벌에 나선 왜군을 격파한 이순신장군의 함포 활용 학익진 전법 – 일본이 무서운 건 정유재란이 끝난 다음해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 학익진 진법을 배워 들판에서 기병과 포병의 연합으로 활용 , 일본군 40여만 명에 포위된 가운데 전멸 직전의 팔로군 사령부를 지켜 낸 팔로군 포병사령관 김무정(중앙고 출신, 쏘련 장군들이 극찬), 한국전쟁 이후 폐허의 열악환 환경에서 보릿고개를 없애고 국태민안의 초석을 다진 박정희 대통령도 포병 출신이다.
70년대 중반 우리 포병학교에서는 포병장교 1명 양성하는 데 들어가는 교육비가 보병 장교 3명과 맞먹었기에 역사적인 위상을 인지하면서 긍지도 대단했다. 그만큼 포병 장교는 보병장교가 “나를 따르라 ! ” 하는 구호 만큼의 용맹 보다는 “알아야 한다 !”고 공부를 강조했고 과학적 지식과 지형과 기상 등 정보의 총합으로 대포를 운용해야 임무를 다 할 수 있었다.
업무상 만난 비상계획 요원 중의 한분은 순식간에 생사가 오가는 월남전 개활지 전투에서 “각개 약진 앞으로” 해야 할 명령을 착각해 “일제 약진 앞으로” 지시함으로 바로 눈앞에서 많은 부하를 잃어 일평생 정신과 약을 복용하며 살았다. 출세는 못했지만 그분에 비하면 포병 지망을 정말 잘했다고 내심 위안하기도 했다.
포병들의 고뇌는 몸은 보병 뒤에 있지만 적은 보이지 않으나 살생의 대부분을 담당해야 하기에 철학적인 세계관, 종합 판단력이 더욱 요구되는 데 있다. 보병 지휘관이 쏘아 달라고 해서 다 쏘아 줄 수가 없다. 확실하게 적이어야 하고 결과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국전 발발 당시 옹진반도에서 마지막으로 철수하는 500톤급 민간 선박에는 개성시를 포기하고 후퇴하는 국군 병력도 상당수 승선하고 있었다. 인천항으로 가는 중간에서 운수 사납게 북한군 경비함을 만났다. 일방적으로 주포를 겨눈 상태에서 승선한 민군은 모두 삶을 체념해야 하는 판국에 몇 분간의 시간이 지나 그 경비함은 주포를 올리고 그냥 지나쳐 주었다. 이처럼 전쟁 초기까지는 북한 군 간부에는 동포의 생명을 아끼려는 민족적 엘리뜨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전후 북한에서는 더불어 살아야 할 동포를 없애야 하는 적으로 계속 교육시키고 살인병기로 키워 온 결과 1967년 56함(당포함) 사건에서는 고기잡이 배를 인도해 오는 도중 북한 해안포의 집중 사격을 받아 39명의 해군 용사들이 희생되었다. 문제가 되는 극히 비인도적 처사는 함정이 침몰해 구명정으로 갈아타고 있었는 데 바로 그 위에 가차없이 포탄을 퍼부었다는 점이다. 낡은 미국 함정을 싸게 불하 받아 칠을 다시해서 해군함으로 활용함으로 기동력도 떨어져 희생이 더 큰 사실을 지켜 본 그때의 생존 장교들이 해외 유학가서 이를 악물고 조선 기술을 공부해 지금의 한국 조선의 기반을 이루어 내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1999년 1차 연평해전에서 박정성제독이 우리 해군의 준비된 실력으로 10여 분만에 북한 해군 함정들의 함상 장비가 전부 고철로 바뀐 시점에 ‘북한에 태어난 죄 밖에 없는 병사들을 더 희생시켜서는 안되겠다’고 모두 침몰시킬 수 있었음에도 겨눈 주포들을 올리도록 해서 회항 지시한 사례와는 너무 대조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이외에도 우리 해군은 북한 배가 기관 고장이나 연로 고갈로 영해에 들어오면 예인은 하되 수리는 물론 식량과 연료를 충분히 충족시켜 NLL까지 보내 주는 게 상례였다. 후배들의 이야기를 듣자면 가다가 되돌아 와서 기름과 비상 식량, 부품을 더 간청하기에 민족화해의 입장에서 다 제공했다고 한다.
2010년 연평도 포격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상부에서 포격 명령이 내려와도 북한 포병지휘관은 몇 발은 경고용으로 연평도의 민간인이 다치지 않도록 도피할 시간을 주도록 사격하고 그 후 군끼리 붙어야 했었다.
왜 가장 약한 신라가 통일 했을 까 ? 살생유택(殺生有擇)이라는 가급적 살생하지 않고 선별 희생시키는 생명관에 항복한 고구려, 백제의 병사 출신들이 공감했기에 3국 출신 혼성 병력으로 다 합쳐 1/5의 열세였지만 20만 당군을 격파해서 완전한 통일까지 이루어 낼 수 있었다.
작금의 남북한 대치 상태, 향후의 ASIA UNION 결성 여부 등에도 분명 살인을 즐기지 않는 측이 주도할 것이 자명하다. 동양 정치철학의 명저인 맹자의 양혜왕 편에 “사람을 죽이는 짓을 꺼리는 자가 천하를 통일한다. ” ( 不嗜殺人者 能一之)고 갈파하고 있다.
그러면 도대체 북한의 걷잡을 수 없는 도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첫째, 안보의 토대 위에 통일을 추구해야 한다.
튼튼한 안보의 두다리 위에 따뜻한 통일의 두팔이 있지 물구나무 서는 것처럼 거꾸로 전도된 가치관을 고수하거나 인력, 예산을 비 생산적으로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부처와 인력의 역할 분담이 뚜렷해야 한다.
외통부, 통일부 등은 봄, 여름처럼 유연하고 전향적으로 남북관계 를 풀어 가고 국정원, 국방부, 경찰은 가을, 겨울처럼 냉정, 혹독 하게 북측에서 딴 마음 먹지 않도록 존재 가치를 높여야 한다.
셋째, 민족화합에 도움이 되면 확실하게 이익을 주고 남북관계를 그르치 면 분명하게 불이익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지금처럼 여객선 출항을 정지시키고 어업활동까지 지장을 주면 손 해 배상을 요구해야 한다. 지난 번 교전사태시의 전사자 보상문제 도 거론해야 한다. 금전상의 적자는 다른 기회에 흑자로 변환시킬 기회가 있으나 생명상의 희생자는 돌이킬 방법이 없다. 천안 함 사태시 우리 전사자 46명중 총각이 25명, 독자가 19명이었다
한민족 역사에서 이렇게 무고하게 남의 집 대를 끊어 놓고도 얼굴 뻔뻔한 사례가 어디 있는 가? 고려사, 조선실록을 다 훑어 보아도 왕권쟁탈의 극소수의 권력 싸움 외는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넷째, 보복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당해 부서는 전면적으로 쇄신해야 한다.
국민의 세금으로 먹고 살고 자식 키우는 주제에 국민의 아들들이 억 울하게 당해도 있으나 마나하는 존재라면 삼성 이건희 기업가 말대 로 다 바꾸어야 하는 게 옳지 않을까? 아프리카 속담에 사나운 여 인 하나 있으면 동네가 편안하다고 하는 데 위 아래의 시달림을 언 제까지 받을 것인가 ?
다섯째, 우리의 강점을 발휘하라.
경제전이든 심리전이든 상대측이 두려워하는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훗날 통일시에 대비하여 우리 사회에 아픔을 준 자들은 모두 기억하 고 자료를 남겨 반드시 심판, 선별 처리해야 할 것이다. 일본 원로 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한국 청소년, 청년들의 눈빛이 미래를 빛나게 할 것이다.
여섯째, 북한과의 공식, 비공식 대화 채널은 많을수록 좋다.
불온 간첩망을 압도하는 건전 소통망 형성에 교민사회까지 가세하여
서로 주먹이 올라가기 전에 말로 문제를 다 풀 수 있도록 과거 독 일, 예멘, 현 중국 대만처럼 건전 소통망 형성에 각별한 공을 들여 야 한다.
대한제국 멸망 후 백성이 황제 대신 주권을 행사하며 나라를 살려야 한다고 상해 임정의회에서 대한민국으로 국호를 정하였고 반면 남경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선호했든 사람들 중심으로는 다시 국호를 조선인민공화국으로 북한 지역에 출발시켰다. 양측의 국가 이름은 너무 뛰어났다. 백성이 황제(한성: 칸의 성, 상칸마마)인 대한(大韓), 해(日)와 달(月), 물고기(魚)와 짐승(羊) 이 더불어 사는 우주 공간(十十) 으로서의 조선(朝鮮), 양측은 간판이 너무 좋기에 분명 이름 값을 할 날이 올 것으로 확신한다.
그러나 이제 지난 반세기처럼 서로가 상대를 소모시키거나 피곤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한민족의 마지막 피난처인 한반도에서 다시 속고 오판해서 내부 싸움을 일으키면 한국의 전자, 조선, 자동차 산업과 북한의 군수산업은 공히 쓰러지고 이 세계 불황에 남북한의 국격은 추락하고 우리의 경쟁 분야가 사라져 주변국의 소득은 엄청 올라 갈 것이다.
조선의용군 출신에다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빨치산 토벌의 귀재 차일혁(호적 본명 차갑수) 총경은 그의 진중일기를 이렇게 끝맺었다.
이 땅의 평화를 기원하며
이른 아침 들판에 나가 일하는 농부에게 물어 보라.
공산주의가 무엇이며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는가.
지리산 싸움에서 죽은 군경이나 빨치산에게 물어보라
공산주의를 위해 죽었다 민주주의를 위해 죽었다 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 ?
그들은 왜 죽었는지 영문도 모른다고 할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이 싸움에서 어쩔 수 없이 하지만 후에 세월이 가면
다 밝혀질 것이다.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 사이에 끼여 벌어진
부질없는 골육상쟁 동족상잔이었다고
서남지구 전투경찰대 제2연대장 차일혁 총경
해방 후 북으로 가서 김일성의 정적으로 항상 견제를 받았고 6.25 전쟁에 제2군단장으로 참전했다 숙청당한 김무정은 아래와 같이 평소 거침없이 이야기 했다.
“ 나는 평생을 조국독립을 위해 싸웠다.
만약 조국의 독립을 침해하고 간섭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대포를 쏘아 묵사발을 만들 것이다.
그가 공산주의자 일지라도 말이다.“
우리에게 적이 있다면 누구일까?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눌러야 동방의 등불로 한민족이 다시 부활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