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둘째날(곤명 → 대리)
잠을 3시간 자는둥마는둥 하였는데 모닝콜의 전화벨은 사정없이 울린다. 아침을 먹고 운남역을 향하여 출발하여 가는데, 차가 잠시 서고 검사원이 올라온다. 혹시 정원을 초과하여 승객을 태운 것은 아닌지, 또는 차에 법정비품은 비치하고 있는지 등을 검사하는 것이란다. 이들을 보니 예전에 검문하러 차에 올라오던 우리나라의 경찰관과 헌병이 연상된다. 독재정권 시절 이들이 차에 올라타 나를 쳐다보면 괜히 움츠려들곤 했지.
차가 다시 도로를 달린다. 그런데 운전사가 우리 일행이 운행 중에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만 돌아다녀도 위험하다고 당장 앉으란다. 꽤나 안전에 신경 쓰는 것 같은데, 그런데 그러는 당신은? 운전사는 맞은편에서 차가 옴에도 마구 추월하여 우리의 가슴을 졸이게 한다. 덕분에 맨 앞에 앉은 나는 손과 발에 힘이 들어가 나중에 밥을 먹을 때에는 저절로 손이 떨릴 정도. 보다 못한 외국 작가들이 가이드를 통해 몇 번이나 항의하였지만, 그때뿐이다. 심지어 운전사는 운전 중에 자기를 거슬리게 하는 파리가 운전대 앞에 앉자 얼른 옆에 있던 파리채를 들어 그 파리를 가격한다. ‘아하! 저 파리채가 왜 저기에 있나 했더니 저런 용도에 쓰는 것이었구먼.’
버스가 잠시 휴게소에 들르는데, 우리를 내려준 버스는 검사소로 들어간다. ‘운행 중에도 차 검사를 하나?’ 여행중에 이렇게 버스가 검사소에 들르는 것은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이어진다. 중국이 그렇게 차량 안전에 신경을 쓰는 것이라면 아슬아슬하게 추월하는 것을 예사로 하는 중국 운전사들의 운전습관부터 고쳐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길을 가다보면 도로의 표지판에 천천히 가라고 ‘晩行’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종종 보게 되는데, 이런 난폭 운전사들은 晩行을 하는 것이 아니라 蠻行을 하는 것이다. 이들은 부처님 말씀을 잘 새겨들어 卍行을 해야 하리라.
교통 표지판에는 또 재미있는 것도 있다. ‘保持 車距’ 앞차와 뒷차의 안전거리를 유지하라는 얘기인데, 이 한자를 우리식 한자말로 읽으니, 이거 영~~~ 그런데 안전거리 유지를 하지 않는 차들이 많다. 혹시 이들은 ‘保持’를 우리말 ‘보지’의 뜻으로 잘못 알고 앞차의 꽁지를 쫒아가는 것 아냐?
운남역에 도착하니 배꼽시계는 점심시간을 가리킨다. 우리는 곧바로 식당부터 들른다. 그러니까 우리는 여행 이틀째를 지나고 있지만 아직 이동만 하고 있지 본격적인 여정은 시작도 안 한 것이다. 나는 운남역이라고 하여 무슨 역인가 하였더니 지명 자체가 운남역이다. 옛날 차마고도를 오가는 마방들이 머물렀다 가는 곳이라 운남역이란 지명이 생겼다. 그렇지 우리나라 역삼동도 그렇게 하여 생긴 지명이지. 퇴계원, 장호원, 이태원, 사리원 등도 예전에 여행자들이 하룻밤 자고 가던 원(숙박소)이 있던 곳이 아예 지명으로 고착된 것이고...
점심을 먹고 식당 앞 공터를 어슬렁거리다보니 저쪽 한 구석에는 2차 대전 때 사용했음직한 비행기가 뼈대만 겨우 남아 녹슬고 있고, 한쪽에는 도로공사 할 때 사용하던 큰 로울러들이 흩어져 있다. 로울러들 앞에 서 있는 기념비에는 ‘滇緬(Burma) 公路 紀念碑’라고 쓰여 있다. 이제 안내원을 따라 차마고도 박물관으로 가는데, 안내원이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조그만 도로 위에 멈춘다. 앞에는 절에 들어가는 일주문처럼 문이 서있고, 문 위에는 ‘雲南驛’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문을 지나서는 양옆으로 집들이 길을 따라 줄지어 서있고... 반대쪽으로는 들판 한가운데로 길은 멀리 남쪽을 향하여 가고 있다. 저 길로 계속 전진하면 버어마란다. 1938. 8.에 뚫은 길이다. 아하! 아까 식당 앞 공터에서 본 로울러들이 다 이 때 도로 닦으면서 사용하던 것이로구나. 기념비도 이 길을 뚫은 것을 기념하는 것이고... 안내원은 지금 밭으로 변한 이곳이 당시에 비행장으로 사용되던 곳이라 한다. 그럼 아까 본 비행기 잔해도 이 비행장과 관련이 있겠네.
우리는 운남역 문을 통과하여 집들이 늘어선 돌길로 들어간다. 안내원이 길 가운데에 움푹 파인 돌 하나를 가리킨다. 차마고도의 오랜 세월 동안 말이 밟고 다니면서 저렇게 돌이 파여진 것이란다. 세월의 힘은 저 단단한 돌도 저렇게 움푹 파이게 만들었구나. 茶馬古道 - 운남의 차(茶)와 티베트의 말(馬)의 교역로로 오랜 세월 내려오던 차마고도. 마방들은 오랜 세월 운남의 차를 말에 싣고 티베트 라싸까지 그 머나먼 험한 길을 걸었다. 그 험한 세월의 역사가 저 돌 위에 새겨져 있는 것이고...
차마고도는 차와 말만 교역하던 길은 아니다. 저 길을 따라 소금마을 엔징(鹽井) 여인들의 눈물이 어린 소금이 티베트로 향했고, 티베트의 라마교가 저 길을 따라 운남과 사천으로 들어왔다. 차마고도는 라싸에서 끝난 것은 아니다. 길은 라싸를 거쳐 네팔로 인도로 이어지고, 길은 계속하여 로마로까지 이어졌다. 학교 다닐 때 북쪽의 실크로드만 배웠지만, 이렇게 차마고도도 동서양의 문명을 이어주던 길이었다.
길 양옆으로 늘어선 집들은 우리나라 절에서 주련을 달아놓는 것같이 길게 글을 써놓았다. ‘發福地人財興旺’, ‘家居寶地千財旺’ 등 대부분 복이 들어오고, 재물이 들어오라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중국인들이 재물의 신으로도 모시고 있는 관운장 그림도 많이 있고, 이와 쌍으로 장비 그림도 있다. 관운장이 재물의 신이라고 하니 뭔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 중국인들은 장사에는 신의가 제일이기에 신의의 장군 관운장을 재물의 신으로 모신다는군. 한편 어떤 건물의 담벼락에는 ‘崇尙科學 反對邪敎’라고 쓴 표찰을 붙여놓았고, 닫힌 문 양옆으로는 ‘敎育要面 向現代化 面向世界 面向未來’라고 써놓았다. 학교인가? 아무튼 옛것을 떨쳐버리고 빨리 미래로, 세계로 향하자는 이들의 열망이 뿜어 나오는 것 같다.
이 길이 버어마까지 연결되었다면, 이 길은 2차 대전에도 주요한 도로였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길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니 2차 대전 기념관도 있다. 우리는 차마박물관 들어가기 전에 2차대전 기념관부터 들러본다. 안에는 미얀마로 향하는 길을 닦던 사진들과 이곳 비행장 사진, 조종사들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 속에 보이는 백인 조종사들은 이 비행장에서 비행술을 가르치던 조종사들이다. 벽에는 그중 로버트 무니(Robert Mooney)라는 조종사에 대해 써놓고 있다.
일본군이 이곳 비행장을 공습하러 왔을 때 무니는 재빨리 이륙하여 공중에서 일본기들과 교전을 벌여 일본기를 격추하였으나, 그 자신의 비행기도 일본기의 날개와 충돌하면서 비행기는 씨앙윤(Xiangyun)이라는 마을을 향하여 추락하게 되었단다. 무니가 얼른 탈출하면 자신은 살 수 있으나 비행기는 그대로 씨앙윤의 민가를 덮치게 된다. 그러자 무니는 탈출을 포기하고 비행기가 씨앙윤을 비켜나도록 조종하고는 비행기와 함께 추락하였다. 중상을 입은 무니는 결국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22살의 나이로 이역의 땅에서 숨을 거둔다. 그리하여 씨앙윤의 주민들은 무니를 위해 기념비를 세웠으나, 문화혁명 기간중 이 기념비는 파괴되었다가 1992년에 다시 무니를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 무니 - 아름다운 청년이었구나. 그 아름다운 청년을 잊지 못하고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파괴된 기념비를 다시 세운 씨앙윤의 주민들도 아름답고...
사실 일본은 이 버마공로 때문에 인도차이나 반도를 침공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중일전쟁 기간중 중국은 충칭으로 수도를 옮기고 버마공로를 통해 들어오는 물자를 가지고 전쟁을 치루며 일본을 괴롭히고 있었다. 게다가 미국이 일본에 대한 석유 등 물자 보급에 압박을 가하자, 일본은 전쟁물자의 안정적 공급을 위해서라도 인도차이나 진출이 필요하였다. 하여 일본은 1940년 인도차이나를 침공하고 그 다음해에 전격적으로 진주만 공습을 감행한 것이다. 이렇게 일본이 버마공로를 장악하게 되면, 보급로를 끊긴 중국군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래서 연합군이 중국으로 물자를 보급하기 위하여 이용한 것이 또한 차마고도다.
2차 대전 기념관을 나와 그 앞의 차마고도 박물관으로 들어간다. 박물관의 정식 명칭은 ‘운남 마방 문화박물관’. 나는 박물관이라고 하여 요즘에 지어진 건물인줄 알았더니 그 옛날 마방들이 머물다 가던 여관을 박물관으로 개조한 것이다. 아니 개조한 것도 아니고 그 옛날 건물 그대로에 그 당시 사용하던 마구 등을 전시해놓은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것이 당시 마방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어서 더 좋다. 이 건물은 청나라 초기에 문을 열었던 마점(馬店)으로 마점 중에서는 당시의 모습이 제일 잘 보존되어 있는 건물이란다.
둘러보다 보니 어느 단 위에 지폐가 3묶음으로 쌓여있다. 산의 신, 다리의 신, 길의 신 앞에 앞으로의 여정을 보호해달라며 기원을 하고 헌금을 한 것. 요즈음 헌금한 것은 아닐 테고 재현해놓은 것이겠지. 길, 다리, 산 - 이 모두가 마방들이 앞으로 티베트로 넘어가기 위하여 거쳐야할 험한 곳이니 당연히 이곳의 신에게 빌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이다. 이밖에도 박물관에는 먼 길을 온 마방들이 마구를 내려놓던 곳, 말의 목에 달려 ‘딸랑딸랑’ 소리를 내던 방울 등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을 둘러본 우리는 그 옛날 마방들이 쉬면서 차 한 잔 하던 방에 둘러앉아 우리 또한 보위차 한 잔 마시며 이곳 박물관 관계자의 설명을 듣는다. 이제 모레면 우리도 그 옛날 마방들이 넘어가던 그 길의 일부를 따라서 걸어보겠지. 그때의 말도 한 번 끌어보면서...
박물관을 나온 우리는 다시 차에 올라타고 오늘 머무를 대리에 있는 얼하이 호수의 섬 남조풍정도로 향한다. 차는 다시금 고속도로를 올라 타 한참을 달려 대리로 들어선다. 대리시는 얼하이 호수의 서쪽 가에 자리 잡은 도시로 우리가 익히 아는 대리석이 바로 이곳 대리에서 나오는 것이었기에 돌 이름도 대리석이 되었지. 대리에서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간다. 얼하이(洱海)는 중국에서 6번째로 큰 넓이 249평방킬로미터의 호수로 호수가 바다처럼 넓고 귀처럼 길쭉하다 하여 洱海라는 이름이 붙었다한다. 해발 1,973m의 고지에 어떻게 이런 큰 호수가 생겼을까? 배를 타고 섬으로 향하는데 좌우로는 호수의 끝을 알 수가 없어 洱海라는 이름이 실감난다.
남조풍정도는 호수 건너편에 바짝 붙어 있어 배는 호수를 횡단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호수는 바다라고 부르는 만큼 파도도 있고 바람도 세다. 건너가는 동안 우리가 호수를 무슨 바다라고 하느냐 했더니, 洱海는 자기를 얕잡아봤다고 당장 박선생님의 모자를 호수 위로 날려버린다. 그 모자에는 선글라스까지 붙여놨는데...
배가 점점 섬으로 접근하니 섬 꼭대기에 세운 서양의 성처럼 생긴 하얀 건물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유래가 있는 건물은 아니고, 이 섬 개발업자가 서양의 성을 본 따 세운 것으로 보인다. 글쎄~~ 작은 섬 위에 너무 큰 건물을 올려놓으니 영 비례가 맞지 않는 게 어색하기만 하다. 원래 이 섬은 바이족의 공동묘지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섬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1997년 중국 정부가 반강제적으로 무덤을 이장시키고 관광지로 개발하였다고 한다. 중국인들이 큰 것만 좋아하다보니 개발하면서 섬과의 조화는 생각하지 않았나?
남조풍정도(南詔風情島) - ‘風情島’라는 것은 풍경이 그만큼 아름답다는 얘기인데, ‘南詔’라는 이름은 무언가? 옛날 당나라 시대에 이곳 대리 일대의 운남성에는 이곳의 백족이 통치하는 남조국(737-902)이란 나라가 있었다. 남조국이 멸망한 이후에는 단사평(段思平)이 937년 대리국을 건설하고 태평성대를 유지해오다가 1,254년 원나라 쿠빌라이 칸의 침략으로 멸망을 한다. 그 후 백족의 나라는 영원히 없어지고 지금껏 중국에 복속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대리시에는 段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사는데, 그들이 대리국 왕족의 후손이겠구나.
선착장에 내리니 백족의 처녀가 우리에게 환영하는 꽃다발을 목에 걸어 준다. 선창가의 출입구를 통하여 안으로 들어가는데 왼쪽 출입구에는 ‘군인 우선’이라고 쓰여 있다. 공산주의 국가라 군인을 우대하는 것인가? 우리나라에선 요즈음 군인 우선하는 곳을 보기 힘든 것 같은데... 출입구를 통해 들어간 바로 앞은 둥그런 연못을 조성해놓았는데, 그 한가운데 대(臺)에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돌로 된 여전사가 앉아서 다가오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사일모(沙壹母)라는 청동 조각상인데 안내석에 쓰인 전설에 의하면 샤위(沙壹)는 애뇌산(哀牢山) 자락의 고기 잡는 여인이었단다. 그런데 하루는 물에 잠겨있는 통나무를 만졌다가 그만 덜커덕 임신을 하였다는 것. 그 통나무가 용의 화신이었다나. 그 후 그녀는 10명의 아들을 낳으니 이들이 운남의 각 소수민족의 선조가 되었고, 그리하여 샤위는 이들 종족들이 숭배하는 여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섬도 원래 남조국 왕족들의 휴양지였다는군.
우리가 투숙할 곳은 아까 배에서 보던 하얀 건물의 호텔이 아니고 ‘本園’이라는 호수가의 민박식 백족 전통가옥이다. 마당에 짐을 내려놓고 두리번거리는데 가브리엘이 애지중지 하는 아이스크림 제조기 옆에 소금통을 놓고 사진을 찍는다. 이번에 자기를 후원하는 기업체에서 준 히말라야 소금을 놓고 사진을 찍는 것. 후원팀에 증명사진을 보내기 위한 것인가? 우리 일행이 하룻밤 머무를 곳은 2층이다. 그런데 2층에 올라가니 방으로 구획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2층 전체에 여기 저기 침대가 놓여있다. 이거 이렇게 모두 모여 잘 줄은 몰랐네. 남녀 구분도 없고... 얼른 침대 하나를 점찍어 발라당 침대에 누워본다. 그런데 내 눈에 곧바로 들어오는 것은 천장이 아니라 지붕의 기와. 아까 차마고도 박물관도 지붕의 기와 밑에는 천장 시설을 따로 하지 않았던데, 요즈음 중국 건물도 그런가? 이걸 보니 우리나라의 기와 건물이 지붕의 선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천장의 마감까지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든다.
짐을 놓고 1층으로 내려오는데 계단 옆의 서가를 점령하고 있는 책들은 우리나라의 무협지와 무협만화들. 아니 최근에 한국 사람들이 이 섬에 많이 온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친절하게 한국책까지 갖다놓다니! 주인에게 물어보니 선물 받은 것이라는데, 누가 이 많은 책을 선물하였단 말인가? 잠시 부근의 호숫가를 걸어본다. 호수 저 건너편으로 4,000m의 창산을 중심으로 3,500m 이상의 19개 봉우리가 일렬로 늘어서 얼하이를 내려다보고 있다. 저녁 노을에 호수는 아름답게 빛난다. 호숫가에서는 한 벌거벗은 여인이 우아하게 고개를 들고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붙잡고 있고, 그 앞에 한 여인은 미끄러졌었는지 이제 한 손을 뒤로 짚고 일어나려 하고 있다. 아니면 서 있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시샘하며 그냥 앉아 있는 것인가? 현실의 여인이 이렇게 발가벗고 자세를 취하고 있다면 당장 부리나케 달려갈 일이지만 이 또한 청동 조각상이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호수에서 7만 명의 당나라 군대가 몰살을 당하였단다. 당나라가 사사건건 간섭을 하자 남조국이 티베트의 토번국과 연합하여 당에 반기를 드니, 당이 이런 남조국을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어 754년 이들을 정벌하러 왔다. 그러나 오히려 남조국의 능수능란한 수군에 의해 군대만 몰살당하고 돌아간 것이다. 대리의 다이허청 경내에 가면 만인총이라고 있다는데, 그때 수습한 당군의 시체를 그곳에 장사를 지낸 것이란다.
저녁을 먹고 난 후 이번 행사에 참가하는 외국 작가들과 정식으로 인사를 한다. 나도 떠듬떠듬 영어로 내 소개를 하고... 저녁을 먹고 모닥불에 둘러앉아 이교수님 기타 반주에 맞추어 노래도 하는데, 가브리엘이 춤을 추며 소금을 뿌리고 우리에게도 나눠준다. 그 옆으로 수잔도 가브리엘에게로 다가와 같이 어울려 돌고... 슬슬 작가들의 퍼포먼스가 시작되는구나. 앞으로의 여행이 어떤 식으로 우리 앞에 펼쳐질까? 이제 꺼져가는 모닥불과 함께 섬에서의 우리들의 하룻밤도 저물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