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상호 心象展
지난주에 헌법재판소 옆 갤러리 에뽀끄(www.galleryepoque.com)에서 열리고 있는 중리 하상호 선생의 ‘心象展’에 다녀왔습니다. 재작년에 세종문화회관 전시실에서 열렸던 전시회 (http://blog.naver.com/yangaram1?Redirect=Log&logNo=80093749550 참조) 이후 2년 만입니다.
전시회 제목은 ‘心象展’이네요. 心象이라면 마음속에 새겨진 어떤 영상이라고 하여도 될까요? 중리 선생은 평소 마음속에 담고 있었던 선생만의 어떤 영상을 작품으로 풀어내려고 하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중리 선생의 서예 작품은 단순한 글씨 예술이 아닙니다. 글자 하나 하나마다 선생이 생각하고 있던 심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전시되고 있는 많은 작품에서는 꽃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심상이 꽃으로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입니다. 선생은 초대하는 글에 이렇게 쓰셨군요. “힘든 세상 너나 할 것 없이 바쁘고, 할 것 많고 욕심나고 화날 때, 마음 하나 놓고 뒤로 한 발 물러나보면 거기에 꽃이 피어 있습니다.”
그럼 선생의 작품을 돌아볼까요? ‘下心’이라... 마음을 내려놓다... 욕망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욕심껏 자꾸 채우려고만 합니다. 이럴 때 선생은 마음을 내려놓으라고 하는군요. 마음을 내려놓으니 ‘心’의 가운데 획에서 가늘게 자라난 줄기 위로 붉은 꽃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전시회장에 걸려있는 어느 평론가의 글이 눈길을 끕니다.
오늘도 우리는 세상을 바쁘고 복잡다다하게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을 채우기 위해 앞으로 앞으로만... 위로 위로만... 마음을 비우다... 마음을 내리다... 사실 가장 어려운 말인 것 같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무엇을 찾고 있습니다. 마음을 비우면 새로운 발견과 채움이 있음을 우리는 모르는 것 같습니다. 중리 하상호 선생은 오늘의 우리에게 ‘下心’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은 쉬우나 마음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저도 실감합니다. 마음을 내려놓으면 서로에 대한 원망과 분노도 내려놓을 수 있고, 그러면 우리의 마음에는 상대방을 위한 방이 생길 수 있습니다. ‘下心’ - 요즈음 FTA 등의 문제로 증오가 들끓고 있는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말입니다.
염원이란 작품은 오른쪽에 온통 붉은 색의 가장자리가 들쑥날쑥한 직사각형이 있고, 그 직사각형의 밑에서 솟아오른 가느다란 줄기 위로 하얀 꽃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리 선생이 쓰신 글씨는 어디로 간 것일까요? 중리 선생은 말합니다. 붉은 색으로 ‘나무관세음보살’을 1,000번 이상 썼더니 글씨의 형체는 사라지고 저렇게 붉은 직사각형만 남았다고...
오호라! 그렇군요. 저 붉은 직사각형은 단순한 직사각형이 아니라, 무수한 ‘관세음보살’이 얽히고설키며 서로가 서로에게 녹아들어가 있는 것이군요. 그렇게 무수한 관세음보살의 글씨가 녹아드니, 이윽고 거기에서 하얀 꽃이 피어나는 것이군요. 제가 서예전을 여러 번 가보았어도 이렇게 무수한 글씨가 녹아들어 글씨의 형체가 사라지는 작품은 처음 봅니다.
‘容恕’라는 작품도 재미있습니다. ‘容’은 얼굴 ‘容’자이기에 선생은 ‘容’자를 사람 얼굴로 표현하였습니다. 예전에 서양화도 그렸다는 중리 선생은 이 얼굴을 그리면서 마티스를 생각하였답니다. 저도 저 얼굴을 보면서 무언가 친근한 느낌이 든다고 하였더니, 바로 마티스였군요. ‘恕’는 또 어떻습니까? 두 남녀가 키스를 하고 있는 모습이 얘기하지 않으면 모를 만큼 글씨에 살짝 표현되었습니다. 지금 저 남녀는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키스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렇게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하니 여기서도 꽃은 피어납니다.
도연명의 유명한 ‘음주’ 시중 5번째 시를 작품으로 표현한 것도 있습니다. ‘음주’ 시를 초서체로 빠르게 흘려 쓰면서, ‘음주’ 시 중 제일 유명한 시구 ‘采菊東籬下 悠然見南山’은 한 仙人이 - 제 느낌에는 仙人입니다 - 국화를 손에 들고 있는 그림으로 표현하였네요. 선생은 몇 번 붓질로 선인을 표현하였는데, 특히 얼굴은 윤곽만 그렸을 뿐, 이목구비는 과감하게 생략하였습니다. 지금 이 선인도 멀리 남산을 바라보고 있겠지요? ‘采菊東籬下 悠然見南山’은 워낙 유명한 시구라 겸재 정선 등 한국과 중국의 많은 화가들이 이를 그림으로 나타내었지요.
햐~아~~ 이거 작품 하나 하나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많은데, 자꾸 글을 이어갔다가는 하품하시는 분들도 있을 터이니 하나만 더 얘기하고 제 얘기를 마치겠습니다. 이번 작품은 완전 특이합니다. 다른 작품에서 보이던 글씨나 꽃, 춤추는 사람 등의 그림은 보이지 않고, 크기가 다른 두 개의 직사각형이 화면을 채우고 있는데 왼편의 약간 짙음이 덜한 검은 색의 직사각형 머리 위에는 붉은 색이 오른쪽 직사각형과 맞닿고 있고, 두 직사각형이 마주하고 있는 중간에서도 붉은 점이 두 직사각형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추상화를 보는 듯합니다.
제목은 ‘단비’입니다. ‘단비? 단비라니?’ 중리 선생은 바로 중국 선종의 제2조 혜가 스님이 달마 대사 앞에서 가르침을 구할 때 자기 한쪽 팔을 잘랐다는 그 ‘斷臂求法’을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이 또한 농담이 진한 먹으로 무수한 글씨를 써서 글씨가 사라지며 하나의 직사각형이 만들어지고, 또 하나의 직사각형도 그보다 농담이 덜한 먹으로 글씨를 써서 만들어진 직사각형입니다. 그러면 직사각형 위에서 붉음이 번져나가고 있는 것은 팔을 잘랐을 때의 피가 번지고 있는 것이고, 두 직사각형 사이의 붉은 점은 여기서 떨어진 핏방울인가요? 두 직사각형을 분리함으로써 단비를 나타낸 것이고...
야~아~~ 이 작품 대단합니다. 글씨도 사라지고, 구상(具象)도 사라지고, 오로지 짙은 어두움과 그를 따라가는 회색의 어두움. 그러나 그 속에서는 깨달음이 꿈틀대고 있습니다. 여기에 붉음이 살짝 더해지고... 이건 완전히 서예 작품을 벗어나 한편의 추상화이자 禪畵입니다. 사실 斷臂求法은 많은 그림과 절의 벽화로 그려졌지만, 중리 선생처럼 깊은 깨달음을 느끼게 하는 그림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중리 선생께서는 이제는 단순한 서예가가 아니라 깨달음의 仙人으로 한걸음 나아가셨군요. 내년에 중리 선생과 같이 중국 장가계 트레킹을 가기로 하였는데, 장가계의 그 선경(仙境) 속을 거닐면서 중리 선생으로부터 禪畵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를 들어볼 것이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