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셋째날(대리 → 여강)
아침에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이 깨다. 언뜻 눈을 뜨니 내 옆 2층 침대에 서양 여자의 얼굴이 보인다. ‘어? 어떻게 된 거지?’ 순간 상황파악을 못하고 당황스러워하다가 어제 우리 일행이 2층에 전부 같이 투숙한 것이 생각난다. 아하! 그렇지! 프레디(Fredi Luedi)와 수잔(Susanne Rasmussen) 부부가 저기서 잤었지. 나도 서둘러 옷을 입고 아침을 먹기 전 얼른 근처를 돌아보기 위해 밖으로 나온다. 숲속의 오솔길을 헤치고 섬 위의 광장으로 올라가니 높다란 관음상이 숲을 지나 호수 너머 먼데 어느 곳을 바라보고 있다.
관음은 이곳 차안(此岸)에 서서 피안(彼岸)을 바라봄인가? 저 관음상은 242개의 대리석을 붙여 만들었다는데, 대리석을 붙여 만들었기에 더욱 하얗게 빛이 난다. 그런데 아름다운 미소에 허리는 들어가고 젖꼭지가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꼭 여자 같다. 관음보살이 여자일 것 같지는 않은데... 관음보살은 자비의 보살이기 때문에 어머니의 모성애에 견주어 여신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네. 그래서 저 관음상을 여신상으로 표현한 것이구나.
남조풍정도와 하룻밤의 짧은 인연을 아쉬워하며 섬을 나온다. 어제는 섬에 오느라고 한참 배를 타고 왔는데, 지금은 바로 보이는 건너편으로 향하니 배를 탔다하니 내린다. 어제 차가 대리시로 들어서며 우리를 마중 나왔던 여자 가이드가 가지런한 웃음으로 우리를 맞이한다. 버스를 타고 얼하이호와 호수가의 오래된 마을들을 바라보며 호수를 따라 나가는데, 이곳은 아직 비포장인데다가 일부 구간은 공사중이어서 길이 엉망이다. 흔들리는 차를 따라 흔들리는 얼하이 호를 바라보다 길이 호수와 작별하고 조금 더 가니 버스는 이제 흔들림을 멈추고, 앞에 보이는 동네로 들어간다.
그런데 길옆의 담벼락 위에 깨진 유리들을 열을 지어 꽂아놓았다. 나 어릴 때 우리나라에도 저렇게 담장 위에 유리 꽂아놓은 집이 많지 않았던가? 도둑놈들이 못 넘어오게 하기 위해 꽂았을 텐데, 사실 전문 도둑놈들은 저 정도는 우습게 넘어간다지 않는가? 그래서인가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저렇게 유리 꽂은 담벼락은 거의 사라진 것 같은데, 중국에서 이를 오래간만에 다시 보게 되는구나.
동네에서 잠깐 멈춰 물을 사고 다시 버스는 출발하는데 여자 가이드가 안 보인다. 우리 조선족 가이드에게 여자 가이드가 타지 않았다고 하니 그 가이드는 임무를 마치고 돌아갔다나? 아니 무슨 임무? 아직 임무 시작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 여자 가이드의 임무는 섬으로 들어가는 길과 나오는 길 안내하는 것이었단다. 운전사나 조선족 가이드나 모두 곤명 사람이라 이곳의 조그만 길은 모른단다. 내비게이션 이용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였더니 중국은 이게 아직 불완전하단다. 으~음~~ 뭐, 그 때문에 고용인구가 더 늘었다고 좋게 생각해야지.
버스는 산을 타고 올라간다. 나는 고개를 넘어가나 했더니 계속 산을 타고 간다. 뭔 고개가 이렇게 계속 올라가? 고개가 아니었다. 얼하이 호가 있는 낮은 분지에서 올라온 것뿐이다. 올라가면서 보니 호수가 있는 곳의 지형은 길게 찢어진 듯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고 있는 것이 지각운동으로 틈이 벌어진 곳에 호수가 들어찬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제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가면서 멀리 산 위로 올려다 보이던 풍력발전용 바람개비는 이제 눈앞 가까이까지 와 있다. 거인들이 우뚝 서 팔에 든 무기를 돌리고 있는 것 같은 데, 지금도 저렇게 거인처럼 느껴지는데, 저 풍차 밑에서 저놈들을 올려다보면 어떠할까? 절로 움츠러져 고개를 떨굴까?
가다보니 길가의 안내판에 ‘당원 시범로’라고 쓰여 있는 것이 보인다. 공산당원들이 시범을 보여 길을 만들었다는 얘기인가? 그러나 조선족 가이드는 지들이 무슨 직접 노력동원에 나섰겠느냐며 지시만 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지시만 하고 ‘당원 시범로’라고 쓴다? 인민들에 봉사해야 할 공산당원도 지금은 관료가 되어 인민을 부리면서 저렇게 말로만 봉사하고 있나? 또 계속 가다보니 산비탈에 구호가 적혀 있다. ‘聽黨指揮 服務人民 英勇善戰’ 애기봉 가면 멀리 산자락에 보이던 북한의 선전구호와 같은 것을 여기서도 보니 새삼 중국이 공산국가라는 것을 실감하겠다. 더군다나 그 아래로 군인들이 보이고 장갑차가 보이니, 더욱 중국이 공산당 국가라는 생각에 순간 몸이 움츠러든다.
2시 가까이 되어서야 해발 2,400m의 고지에 자리 잡은 여강에 도착하였다. 차가 요금소를 빠져나가는데 요금소 기둥에 ‘防毒反毒 人人有責’라고 쓰여 있다. 뭔 소리지? 가이드는 毒은 마약을 가리키는 것이란다. 그렇군. 이곳이 인도차이나 반도와 가까우니 마약이 운남에서도 사회문제를 일으켜 요금소에 저런 구호까지 붙여놓게 하는구나. 중국은 아편전쟁의 쓰라린 기억이 있으니, 마약에는 엄정하게 대처하고 있을까?
오늘도 오전은 이동하는데 시간 다 보내고 우리는 곧바로 식당부터 먼저 들른다. 이제 우리가 들를 곳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올라가 있는 여강고성이다. 고성 앞에는 중국 공산당의 강택민 전 주석의 글씨로 ‘世界文化遺産 麗江古城’이라고 쓰여 있다. 그냥 조용히 보고 가지 꼭 이렇게 글씨를 많은 사람들 보게 붙여 놀 것까지 있나? 모르지. 본인은 방문 기념으로 멋지게 글씨 하나 써놓고 간 것인데, 밑에 두 손 비비기 좋아하는 부하들이 이렇게 폼 나게 붙여놓은 것일지도...
나는 처음에 古城이라고 하여 무슨 옛날 성이 있는 줄 알았는데, 이 오래된 도시 여강의 다운타운을 고성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고성 앞 광장에는 차를 실은 말이 바위 위를 오르면서 힘든 듯 고개를 숙이고 있고, 그 뒤로 2명의 마방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살피고 있다. 바로 차마고도를 가는 마방의 청동 조각상이다. 여강고성이 이들 마방이 지나가는 곳에 위치한 곳이라 옛날 마방들의 조각상을 이곳에 설치하였구나. 이들의 발밑에 쓰여진 글씨는 발산섭수(跋山涉水). 그렇지 마방들은 산을 밟고 물을 건너 머나먼 티베트로 가야했지.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니 고성의 이곳저곳에는 잘 정비된 물길로 물이 흐르고 있다. 마을 북쪽의 상산(象山) 아래에서 강물이 3갈래로 나뉘어 이렇게 고성 안으로 흘러들어온다. 나는 다운타운 내를 흐르는 개울물이니 깨끗하진 않을 거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물을 들여다보는데 의외로 개울물은 깨끗하다. 이러한 점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한 몫을 하지 않았을까? 개울물을 가로 지르는 조그만 다리 하나를 건넌다. 이러한 개울물을 건너는 다리가 300여개 된다나? 그래서 이러한 물길과 다리로 인하여 여강은 동양의 베니스로 불리운다는군. 글쎄... 그렇게 불리려면 배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들어간 식당은 사쿠라 식당. 부산 출신의 김 모라는 한국여자가 십 수 년 전에 이곳에 관광하러 왔다가 중국인과 결혼하여 처음에는 카페로 문을 연 식당이라는데, 당시 이곳에서는 한국인을 별로 볼 수 없던 때라 이들의 결혼은 이 지역 언론에 소개되었고, 그래서 이들이 차린 사쿠라 카페도 잘 되었단다. 게다가 당시 기념품 가게 틈새로 카페를 차려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나? 그런데 하필이면 식당 이름이 사쿠라가 뭔가? 옆에는 한글로 벚꽃마을이라고, 또 한자로 櫻花屋이라고도 써놓았는데 사쿠라로 많이 알려졌으니, 이것을 먼저 다녀간 일본인들이 인터넷에 사쿠라라고 먼저 퍼뜨려서인가?
식당 안 몇 군데에는 체 게바라 사진을 붙여놓았다. 혁명가 체 게바라 사진을 식당에 붙여놓은 의도는 또 무엇이야? 밥 먹는 내 머리 위에 벚꽃마을 어록이라고 써놓은 것은 ‘一切美女都是紙老虎’. 모든 미녀들은 모두 늙은 종이 호랑이라니? 이건 또 무슨 말이야? 더군다나 그 옆 원 속의 인물은 암만 보아도 안중근 의사처럼 보이는데... 어쨌든 입에 안 맞는 중국 음식 먹다가 한국 음식을 먹으니 좋구나.
식당을 나와 고성 안 이곳저곳을 기웃거려본다. 지나치는 어느 집의 담벼락에는 무슨 부호 같기도 하고 아이들 그림 같기도 한 상형문자들이 넓은 벽면에서 뛰어놀고 있다. 바로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이곳 나시족의 상형문자인 동파문자였다. 중국 한족의 상형문자보다 더 그림에 가까운 상형문자가 오늘날까지 살아있었단 말인가? 이미 박제되어 책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상형문자가 이렇게 현대에까지 남아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그러나 나시족의 이 동파문자도 문명의 밀려듦에 이렇게 관광객들에게나 보이는 문자로 박제되어 가고 있다고 하는데, 이 소중한 기록문화유산이 나시족의 삶 속에 그대로 계속 살아 움직였으면...
돌다보니 일찬정(溢璨井)이란 우물도 있다. 우물 앞에 뭔가 쓰여 있다는 것은 뭔가 유래가 있는 우물이란 얘기. 무슨 내용인가 읽어보니 1253년 겨울에 쿠빌라이 칸이 대리국을 정벌하기 위해 대리로 쳐들어갈 때 이곳에서 물을 마셨다는 것이다. 원나라 이후 운남은 계속 중국의 속지로 남아져 있었으니, 이곳 토속민족들로서는 별로 달갑지 않은 유적이랄 수도 있겠다.
원래는 흑룡담 공원을 구경하려고 하였는데, 비가 많이 와서 다수결에 따라 호텔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나? 나야 물론 다시 오기 힘든 곳인데 이왕이면 하나라도 더 봐야 할 것 아니냐는 생각이라 가는 쪽에 섰었지. 호텔로 들어가는 길에 박병욱 선생이 갑자기 청소하는 아줌마 옆에 선다. 박선생이 우리 일행의 리더로서 눈에 잘 띄게 형광색 조끼를 입었는데, 마침 그런 차림새가 청소 아줌마와 비슷했던 것. 나는 웃으며 얼른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공원 가는 일정이 비게 되니 오후 시간이 널널해진다. 나는 월간중앙의 ‘양승국 변호사가 산에서 만난 사람’의 주인공을 이번 여행을 주관하는 박병욱 선생으로 했기에 박선생님과 얘기를 나누기 위해 박선생님 방으로 건너간다. 이날 오후는 비록 흑룡담 공원을 볼 수 없던 아쉬움이 있었지만, 박선생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나인 드레곤 헤즈에 대해 좀 더 많이 알고 이해하게 된 소중한 시간도 되었다.